베드로전서 4:18 / 겨우 구원 / 210218
녹취:이하림
서울의존강의20210218a 베드로전서4장 18절(겨우 구원)-이 근호 목사
베드로전서 4장 17절-19절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찌어다”
여기 18절에 무슨 단어가 나오느냐 하면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와요. 구원은 건져냄이죠. 그러면 구원을 둘로 생각해봅시다. 첫째, 누가 나를 건져내라고 부탁한 적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좀 구원해달라고 누가 요청한 적 있느냐는 말이죠. 없죠. 인간은 구원을 요청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알아서 사는 자들이에요.
인간세계에서의 구원이라는 것은 누가 나를 구원하는 자체가 나에 대한 모욕입니다. 내 가치를 완전 개무시하는 거죠. ‘당신 구원받아야 된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너는 인간도 아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욕을 해도 우회적으로 하지 않고 직접적으로 욕하는 거예요.
그런데 두 번째, 오늘 본문에 구원에 대해서 앞에 어떤 부사가 붙어요. ‘겨우’ 구원받는다 했죠, 의인도. 여기에 의인도 겨우 구원을 받죠. 누가 구원을 해달라고 했습니까? 예를 들어서 아들이 늦게 들어오니까 엄마가 하는 말이 “너 집에 들어오길 기다리느라고 저녁에 나 겨우 밥 한술 떴다.” 이렇게 이야기 했다고 합시다. 그럼 아들이 엄마보고 퉁명스럽게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나 기다리지 말고 밥 잡수시라 했잖아요! 겨우 한술 떴다고요? 밥 먹지 말라고 누가 말렸어요? 내가 오든 말든 그냥 잡수세요, 어머니. 내 핑계대지 말고. 내 걱정한다 하지 말고.”
‘아니 누가 구원해 달래? 나는 당신한테 그런 구원 같은 거 요구하지도 않고 나한테 나의 구원이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나의 일상 자체가 누가 외부에서 나를 건져주는 일상으로 나는 살아간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라고 인간들은 그렇게 외치고 싶은 겁니다. 내가 알아서 인생 내가 사는데. 그게 내 인생에 내가 주인공이라는 뜻 아니겠어요? 여러분 인생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내 인생 주인이 누구에요? 나 말고 있습니까?
심지어 어린아이들은 엄마가 밥 먹여줘도 자기가 주인이래요. “엄마 아빠가 너에게 밥 먹여줬잖아.” 그럼 애들이 뭐라고 합니까? “입은 내가 벌렸잖아요.” 아무리 도와줘도 최종의 주도권은 남한테 빼앗기기 싫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주님의 뜻은 뭐냐. 바로 그 본성에서 구원하라는 거예요, 본성에서.
사람은 측정하거든요. 내가 행동할 때 결과가 어떤 식으로 나오나 미리 측정한다고요. 그러니 측정한다는 자체가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뜻이에요, 내 관리는. 그럼 내 관리는 내가 알아서 해버리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겠다면 흔쾌히 내가 도와줄 용의가 있습니다.’ 이래버리면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아이디어가 평소에 ‘나는 이렇게 구원되고 싶습니다.’ 하는 아이디어와 연결되고 내용이 일치가 된다는 뜻이죠. 그렇게 되어버리면 ‘겨우’ 이것이 성립 안 된다고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아 혹시 너희들 가운데 나중에 죽어서 천국 가고 싶고 구원받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그러면 “저요!” 손들죠. 손들어버리면 주님께서 우리를 천국 가게 해주고 영생 얻게 해준다 할 때 그 생각이 우리 마음에 듭니까, 안 듭니까? 둘 중 하나인데. 마음에 들어요, 안 들어요? 마음에 들죠. 아니 죽어서 천당 가는데 싫어할 사람 누가 있습니까. 마음에 들죠. 마음에 들어버리면 무슨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이 ‘겨우’가 성립 안 된다고요, 겨우가.
나라에서 “1인당 재난지원금 500만원 드리겠습니다. 원하는 사람 있습니까?” “아이 나 500만원 짜증나서 못 받겠다. 너무 작아서 못 받겠다.” 이런 사람 있습니까? 전부다 “저요, 저요.” 하죠. 오늘 설교제목을 <저요>로 할까요. 저요 저요 하면 500만원이 겨우입니까, 아니면 대다수에요? 진짜 집이 재벌이어서 껌 값도 안 되는 그걸로 괜히 생색내지 마. 이런 사람들 빼놓고. 이것은 겨우 구원받는 게 아니잖아요. 대다수가 구원 받죠.
이 말은 하나님의 구원에 필요한 그 장치와 내용과 구조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아이디어이며 인간이 생각하는 구원과는 공통점이 일체 없다는 거예요. 그게 ‘겨우’에요, 겨우. 사람이 납득이 되고 사람이 동의가 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한다, 안 한다? 구원을 안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누구 아이디어여야 돼요? 오직 하나님만이 아는 아이디어여야 돼요.
인간이 납득되고 이해되는 구원을 하나님께서는 안 해줍니다. 왜냐하면 ‘구원’되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구출되려면 인간의 아이디어에서 전혀 나오지 않는 방식으로 구출이 되어야 제대로 된 인간 자체가 구원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시는 것하고 내가 아는 것을 같이 협의하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구원이 시작되는 그 구원의 아이디어가 인간이 살아가고 인간이 내가 내 인생에 대해서 관리하는 그 가운데에서 언제든지 나올 수 있는 아이디어 있잖아요. 어떻게 하면 천국 갈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예수 믿어질까, 십자가 피 믿을까 이런 것 있잖아요. 이것은 누구 아이디어에요? 성경에서 준 그 내용을 가지고 내가 낸 아이디어죠. 아, 오케이. 주님께서 이런 구원을 주셨구나. 가만 있어보자. 이거 괜찮네. 오케이 콜. 내가 수용하겠습니다. 이게 인간의 구원이에요. 인간의 구원이라고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이세요. 오케이. 받아들이겠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들이 생각하는 구원입니다. 거기에 인간 자체가 다칩니까, 안 다칩니까? 안 다치죠. 구원받겠다는 인간 자체의 생각이 하나님 앞에 부정당합니까, 아니면 긍정적으로 하나님이 인정할 거라고 생각하겠어요? 긍정적으로 인정할 거라 생각하죠. 이게 무슨 구원입니까? 이게 무슨 구출이에요? 그건 구원이 아니죠.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이 시작되는 그 구조, 그 상황은 하나님만이 아는 상황이고 구조에요.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상황, 구조에서 나오는 나름대로의 구원 있잖아요, 죽어서 천당 가는 것. 그것은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성경구절가지고 인간들이 지어낸 거예요. 성경구절 가지고 자기가 구원받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자기가 만들어낸 거예요.
구원이 시작되는 그 환경 자체가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를 지금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시작점이 달라요, 시작점이. ‘겨우’라는 말이 성립되려면...... 얼마나 이질적이었으면 ‘겨우’라는 말을 할 수 있겠어요, 얼마나 이질적이었으면.
언젠가 제가 유튜브 강의에서 한 것을 다시 한 번 해보면 노아 당시에 홍수가 일어났죠. 그 홍수가 노아가 살던 곳에도 물이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집사님? 노아 홍수의 물이 노아가 전에 살던 자기 집, 거기까지 물이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성경에 나오죠. 지구상에 모든 물이 덮이죠. 그럼 노아가 살던 그 곳에 물이 들어와요, 안 들어와요? 들어오죠.
그럼 또 하나 묻겠습니다. 출애굽할 때 하나님의 사자가 아예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는 동네에 들어왔습니까, 안 들어왔습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요. 들어왔어요, 안 들어왔어요? 살던 그 골목에 하나님의 그 죽음의 사자가? 들어왔죠.
그럼 다시 묻습니다. 노아가 살던 그 고향이 있죠. 그 고향에는 홍수물이 안 들어온 게 아니고 들어왔죠. 그럼 노아가 그냥 있었으면 물에 빠져 죽었어요, 살았어요? 물에 빠져 죽잖아요. 노아는 당대 의인이라면서. 노아가 당대의 의인이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라면서요. 그러면 우리 보기에는 착한 사람이잖아요. 착한 사람인데 자기 집에 물이 왜 덮칩니까, 죽으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이디어가 ‘저 괜찮지요? 저 보호해 주실 거죠?’ 라는 구원이 아니고 죽이고 죽이고 다 죽이는 거예요. 다 죽이는 거예요. 그럼 무엇을 구원하는가. 방주 자체를 구원해요. 방주 자체를 구원하는데 방주가 하나님의 언약이다 이 말이죠. 언약 자체를 구원하는 겁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는 거예요.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하기 때문에 예수 안이 방주 같은 역할을 해서 예수 안에 있는 자만 구원이 되죠.
그러면 내가 살던 이 고향은 예수 안입니까, 아닙니까? 나의 살던 고향은 예수 안이 아니죠. 예수 안이 아니면 심판의 대상이고 저주의 대상이죠. 이 말은 우리가 구상하는 구원은 하나님께서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지요. 왜?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하기 때문에.
더 노골적으로 말씀드릴게요. 인간은 내가 나를 관리하는 데에 급급하기 때문에, 온통 관심사가 거기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이......저울 한번 그려볼게요. 저울 달아보겠습니다. 여기 저울이 있고 물건을 올려 놓는 데가 두 군데 있다고 합시다. 왼쪽에 ‘내가 나를 관리한다’는 관심사, 오른쪽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관심사. 무게 달아 봅시다.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오늘 전부다 침묵시위하기로 작정했나. 어느 쪽이 더 무겁습니까? 답변하기 곤란합니까? ‘내가 나를 관리한다’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평소에 하루 일과를 여기에 치중합니까, 아니면 ‘주님이 특이하게 나를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서 빼내려고 한다’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까? 어느 쪽 무게가 더 나가느냐. 어느 것에 더 생각을 많이 갖고 있느냐는 말입니다.
왼쪽이 더 무겁겠죠. 그럼 왼쪽은 더 내려가고 오른쪽은 힘없이 그냥 위로 올라가겠죠. 구원하나마나 난 신경도 안 써, 난. 지금 내 가정 이것도 바빠. 내 가정을 내가 관리하기 바빠요. 그 중에 자기 몸도 들어있고. 쌍꺼풀 수술 할까 말까. 지금 거기에 관심이 있다니까요. 살을 몇 키로까지 빼야 돼. 여기에 지금 관심이 있어요. 내가 나를 관리하는 것이 태어나면서부터 이건 본성이에요, 본성.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니까요.
왼쪽이 더 무거워요. 온통 관심사가 여기 있다니까요. 내가 내 인생 관리하고 너는 너 인생 관리하고 나중에 어느 인생이 관리 더 잘했는지 배틀, 시합 한번 붙자. 세상은 이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다가 예수님이 너를 구원한다 하니까 오케이. 예수님 구원을 받아들여요. 예수를 받아들이는데 내가 내 인생 관리하는 것은 건드리지 말고 숟가락 하나 더 얹는 식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이 이렇게 결합될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게 결합이 됩니까? 나의 존재+예수님의 존재가 가능합니까?
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인지 하나님의 존재와 내 존재가 결합이 되면 죽어요. 모세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얼굴을 감히 못 봤고 하나님께서 손으로 덮어서 나를 보고 살 자가 있다, 없다?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네가 구상하고 생각하는 그 구원은 내가 생각하고 만들어 낸 구원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더러워서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더럽습니까? 묻죠. 너는 너한테 정신 팔려 있거든요. 온통 내가 사는데 정신 팔려 있다고요. 죽어서 천당 가는 데에 정신 팔려 있다고요. 본인을 안 놓치려고 해요. 본인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해요. 본인을 안 다치게 하려고 하는 거예요. 타고났어요, 이것은. 타고났다고요.
오늘 본문에 보세요. 겨우. 이 ‘겨우’라는 말은 어디에 썼느냐 하면 노아 홍수 이야기입니다. 앞에 노아 홍수 때 몇 명 구원받았다고 했습니까, 베드로전서에서? 여덟 명. 이 얼마나 겨우 입니까. 3장 20절. ‘여덟 명’ 앞에 부사가 붙죠. 많은 여덟 명이 아니고 ‘겨우’. 고작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노아를 통한 구원 방식은 인간들이 이미 익히 상식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구원의 방법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는 겁니다.
그러면 구원방법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면...... 인간들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 하에 두면서 나름대로 자기가 구상하는 자기의 구원방식이 있어요. 오늘 강의 주제에 제가 서서히 접근해가려 하고 있습니다. 접근해가려고 하는 이 테마를 이렇게 정리하면 돼요.
구원을 둘로 나누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환경에서 나오는 구원. 하나님의 환경, 조건에서 나오는 구원.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조건이 들어있는 그런 식의 구원. 하나님께서 자신의 요구에 충족하다고 기뻐하시는 조건으로 가득 차 있는 그런 조건이 유지되는 조건 하의 그런 구원. 두 번째는 인간들의 자기 관리 또는 자기 책임 하에 내가 되고 싶은 이 조건을 충족시켜주는 구원.
길었습니다만 하나님이 스스로 만족하는 것으로 차 있는 구원과 두 번째는 자기 관리 하에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고 싶다는 이 조건이 손상되지 않고 유지되는, 충족되는 조건 하의 구원. 구원이 이 두 가지에요.
그러니까 신이 나를 구원하더라도 이 조건은 건드리지 마라. 이걸 탓하지 마라 이 말이죠. 신이 나를 구원하더라도 나도 내 인생 내가 살고 싶은 그 최소한의 기쁨과 보람은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내가 비참한 가운데 구원되기는 싫다는 거예요. 구원될 때 부자 되고 난 뒤에 천당 가고 싶지, 내가 강도로서 구원되는 것, 그것은 나한테 거부당할 시나리오라는 겁니다.
내가 세리와 창녀 되어가지고 구원받는 것 있잖아요. 그것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거예요. 하나님보고, 나한테 결재 다시 올려라. 내 가치가 고스란히 남아 있으면서도 죽어서는 천국 가는 그런 결재안을 나한테 다시 올리게 되면 내가 땅땅 동의하는 도장 찍어줄 테니까 그런 구원이 나한테 오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누가 만든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 뜻이 아니고 인간이 자기가 지어낸 거죠. 인간 자기가 지어낸 거예요.
그럼 하나님의 환경에서의 만족스러운 구원은 어디서 나오는 구원이냐 하면 율법에서 나온 구원입니다. 율법을 포괄적으로 이야기하면 언약에서 나오는 구원이죠. 노아 언약이 대표적인 거죠. 아까 질문 다시 안 해도 되죠? 노아가 평소 살았던 고향에도 물이 들어왔느냐. 그 물은 어떤 물이냐 하면 심판의 물이거든요. 노아가 살던 그 동네에도 심판의 그 무서운 홍수 재앙이 들어왔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들어왔죠.
그럼 다시 묻습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에 살던 그 동네에도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들이 집집마다 들이닥쳤냐 하는 문제입니다. 들이닥쳤죠. 결국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죠. 죽음의 천사가 넘어간 것은 인간성 보고, 아이고 네 인생 알아서 네가 열심히 살았네, 그것보고 넘어간 게 아니죠. 그럼 내가 평소에 나 다운 것 있잖아요. 그걸 죽음의 천사가 봤다는 이야기입니까, 안 봤다는 이야기입니까? 안 봤다는 이야기죠. 고려했다는 이야기입니까, 고려 안했다는 이야기에요? 전혀 고려 안했죠.
하나님의 죽음의 천사가 보고 있는 것은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가 발리는 단지 그 조건에 의해서만 그 집안을 안 죽이고 그냥 넘어갔잖아요. 그 조건, 어린양의 피가 점점 더 구체화되면서 내용이 깊어지고 가미되면서 주어지는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율법이 드디어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나중에 아브라함 이후에 430년, 그 때부터 율법이 주어집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하면 히브리인들이 광야에 갔을 때 목적지가 있어요. 출애굽기 3장에 나옵니다. 그 목적지가 시내산이에요. 시내산까지 가서 다른 사람들은 못 올라가고 모세만 올라가죠. 모세가 관광하고 구경하러 갔습니까? 하나님 얼굴 보러 갔습니까? 뭘 받아왔죠. 하나님이 만족하는 조건을 받아온 거예요, 하나님이 만족하는 조건을. 그 조건이 율법이죠. 십계명이잖아요. 그럼 조건은 딱 정해졌습니다. 이 십계명대로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는 거예요. 율법대로 살지 않으면 구원이 없는 겁니다.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관리하고 싶은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생각하는 그 구원의 상태에 자기가 협조하기 위해서 내가 나를 돕기 위해서 하는 거거든요. 인간이 말하는 구원이라는 게 뭡니까? 영생 얻는 거죠. 영생 얻고 안 아프고 편안하게 살고 행복한 것을 원하죠.
그럼 그 조건은 하나님이 주신 조건입니까, 본인이 본인에게 기대 거는 조건이었어요? 오늘 이거냐 저거냐 묻는 게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본인이 원한 거죠. 이것이 본인의 본성에 위배돼요, 본인의 본성에 위배되지 않는 구원을 원합니까? 내가 평소에 나한테 기대하는 본성과 합치되는 구원을 원했죠.
그러면 묻습니다. 오늘 자꾸 묻는데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인간은 본인에게 법을 제시합니까, 법을 제시 안 합니까? 또 묻는 거예요. 인간은 자꾸 자기에게 법을 제시해요, 제시 안 해요? 인간이 자기 책임 하에 자기 관리한다는 것은 평소에 자기가 자기한테 법을 제시합니까? 규칙이라는 게 있어요, 없어요? 있지요.
이것이 내가 나한테 명령하는 겁니다. 어떻게 명령합니까? 내가 이런 행동하면 내가 살고 안 하면 죽는다. 내가 벌칙 다 만들고 내가 결정하는 겁니다. 인간이 되어서 자기 관리를 소홀히 하고 자기 책무를 소홀히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어린아이 물에 빠져 죽인 인간도 자기 애 같으면 얼마나 착실한지 몰라요. 괜히 남의 애이기 때문에 보기 싫어서 집에 놔두고 자기는 이사가버리고. 구미에 그런 일 있었죠. 20대 아줌마가 애 놔두고 가버렸죠. 자기가 낳은 애 아니라고 꼴 보기 싫어서. 꼴 보기 싫으면 꼴 보기 싫은 거지 뭐. 건사해서 키우기 싫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그 애를 왜 유기했습니까, 내던졌습니까? 자기 행복에 대해서 그 아이가 도움 된다고 생각했겠어요,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어요? 나는 남의 애를 건사하기 싫다는 것이 누가 누구한테 명령한 겁니까? 내가 나에게 명령한 거죠. 명령의 어떤 확고한 원칙이 있죠. ‘나는 나의 행복을 도저히 포기하지 못한다’ 이거잖아요. 나는 나의 행복을 포기하지 못해요. 나만의 삶을 포기하지 못하는 겁니다.
거기서 그냥 포기하지 못한다 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법이 주어져요. 내가 나를 법으로 다스리는 거예요. ‘겨우’라는 말에 이게 다 포함되어 있어요. 아까 숫자로 몇 명이라고 했습니까? 베드로전서 3장 20절, 겨우 여덟 명이라. 숫자로 표현했다는 말은, 이것은 기적이라는 뜻이에요. 사실은 제로라는 뜻이에요. 인간 본성에 준해서 노아홍수에서 살아날 사람은 실질적으로 아무도 없어야 맞는 구원을 하나님께서 실시했다고 이렇게 봐야 돼요.
‘겨우’라는 뜻은 누구나 납득이 되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거든요. 나를 안 다치게 하는 구원은 누구나 납득이 돼요. 그러나 나를 죽은 자로 이미 박살내고, 나의 모든 일은 내가 나를 관리하고 내가 나에게 명령한 이것을 개무시하기까지 나를 구원하는 구원은 인간의 자력으로써는 수용이 안 됩니다.
왜 수용이 안 되느냐 하면 아까 저울 봤죠? 온통 관심사가 나의 의로움을 지키는 거예요. 내가 못 먹고 못 살고 이렇게 힘들게 살아도 도저히 포기 못하는 하나가 있어요.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런 거. 갈릴레오처럼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식으로 말이죠.
권세 있는 사람 앞에서 나보다 힘 있는 사람 앞에서 나보고 ‘눈 깔아’ 하면 우리는 눈 깔아야죠. 안 그러면 죽으니까. 그 눈 까는 방법이 내가 나를 관리하는 방법이에요. 내가 생각한다고요. 한번 눈 깔아주자. 내가 나한테 명령한다고요. 눈 까니까 상당히 자존심 상하고 기분 더럽잖아요. 그래서 궁시렁거리죠. 그래도 지구는 돈다.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눈은 깔았는데. 지구는 네가 돈다고 해서 돕니까? 그런 소리 안 해도 돌게 되어 있어요.
내가 그런 소리 안 해도 지구는 도는데도 불구하고 지구는 돈다고 하는 이 말은 ‘네가 나를 이렇게 업신여기고 나를 짓밟아도 끝까지 나는 나를 위로하고 나를 냉대하지 않겠다’ 에요. 비록 내가 지옥가도 너에 대해서 내가 지켜줄게. 나의 유일한 보호자는 이 세상에 나 외에는 없기 때문에. 이게 그렇게 듣고 싶었던 악마의 보이스,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악마는 어디 있느냐. 뭐 흉측하고 나쁜 짓 하는 게 악마가 아니라 내가 바로 악마입니다, 내가. 온통 24시간 나한테 관심 있는 그게 악마에요. 주님께서 왜 우리에게 협조를 구하는 식으로 구원이 안 되는지 아시겠지요. 만약에 우리에게 협조를 구하고 내 동의가 된다면 하나님은 누구를 구원하는 셈이 됩니까? 마귀를 천국으로 데려가는 셈이 되고 그러면 지옥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죠.
지옥이 없는 세상. 여호와의 증인하고 똑같아요. 지옥이 없는 세상. 맹자의 성선설처럼 인간은 날 때부터 착한 구석이 있다. 우리가 개발 못해서 그렇다. 개발하게 되면 아무리 악한 도둑이라도 양심은 있으니까 착하다. 그게 누구의 음성이에요? 그게 마귀의 음성이라니까요.
마귀는 사람의 편에 서서 어째든 간에 네가 절대로 너를 포기하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도 네 편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하나님도 네 처지를 이해할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하는 소리에요. 유명한 노래 있잖아요. 이 노래 알죠? 누가 불렀는지 이제 기억난다. ‘닭고기 아줌마’라는 노래 알아요? 성진우가 불렀어요. 다 포기하지 마. 빨리 해보세요, 닭고기 아줌마. 아침에 눈만 떴다 하면 내 속에 내가 나한테 지시해서 매 순간 우리한테 용기와 격려를 아낌없이 부여하면서 하는 말이 뭐냐. 너를 포기하지 마.
이미 율법이 있어요. 이미 내 율법이 가득 찼는데 다른 율법은 여기에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다른 잔소리 들어오려면 내 허락 맡고 들어와야 돼요. 나는 나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겨우 구원받는다는 말은 구원이 결코 인류의 보편적인 것이 아니고 특이한 현상이라는 거예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대척관계, 대립관계에 있는데 구원이라는 것은 대립관계에서는 있을 수 없거든요. 맞아요. 반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는 구원이라는 게 성립이 안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 구원에 도달되는 것이 아니고 어디에 도달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사람으로 만들어요.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안에 딱 집어넣으면 비로소 삽입되어 있는 새롭게 등장한 그 지점, 예수님이라는 그 지점에서 이 어두운 세계에 새로이 아버지의 구원의 조건에 만족스러운 새로운 구원의 개시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새로 출발하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에요. 예수님의 구원이에요.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어떤 축제기간이 있다고 합시다. 축제기간에 한때 장사하기 위해서 천막하고, 축제라는 게 먹고 즐기는 거잖아요, 간이 음식점, 트럭에다가 패스트푸드 쫙 파는 풍경 상상할 수 있죠. 페스티발 할 때 이럴 때, 장날 때도 마찬가지고 쭉 하더란 말이죠. 그래서 장날이나 행사할 때 간단히 먹을 수 있는 떡볶이, 치킨, 피자나 이런 것 쭉 팔고 있을 때 사람들이 먹어보는 거예요. 축제기간에 음식을 팔아서 다 먹어봤는데 맛이 없다고 할 때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이 축제기간에 먹을 만한 음식은 없다’가 되죠. 먹고 만족하는, 돈값을 하는 만족스러운 음식은 없다고 결정이 났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을 할 때 전제적으로 무슨 일들이 일어나야 그게 구원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만족스러운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를 미리 깔아야 돼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카펫처럼 미리 쫙 깔아버려요. ‘어떤 인간도 하나님이 만족할 만한, 충족할 만한 사람은 없다’에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를 확실하게 깔아버립니다.
자 그렇게 되면 인간이 요구하는 모든 구원조건은 자동적으로 폐기되죠. 인간은 구원하겠다는 것도 구원 안 되고 안하겠다는 것도 구원 안 되고. 어째든 간에 인간세계는 일체 구원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의인은 없다고 할 때 의인이 없는 그 증거가 뭐냐. 율법이죠. 율법을 줌으로써 어떤 인간도 모든 율법을 위반하지 않고 항상 다 지키는 인간은 없다. 율법을 제시하는 그 이유가 율법대로 사는 인간은 단 한명도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게 로마서 3장에 나오죠. 율법을 준 이유가 뭐냐 하면 모든 입, 사람마다 입이 있잖아요. 입을 열고 막 말하고 싶고 나는 이 정도입니다, 나는 저 사람과 다르고 이 정도로 깨끗합니다, 온갖 입이 나오겠죠. 율법이 그 입을 전부다 막아버리고. 요새 기차 탈 때 마스크를 해서 기차가 한결 조용해졌어요. 옆자리가 없어서 특실 같아, 전부다. 여담입니다만.
여러분들이 <기생충>영화 포스터를 봤죠. 그 포스터의 특징이 뭐던가요. 사람들, 주인공들이 있는데 보통 포스터는 주인공이 조여정이고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런데 여기에 뭘 가려버려요? 포스터에 전부다 시커멓게 눈을 가리죠. 눈을 가린다는 말은 인간들이 시각을 통해서 종합적으로 구성된 이 현실에서는 알 수 없는 내용들이 영화를 채운다는 뜻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주장한 게 아니고 내가 그렇게 주장하는 거예요. 봉준호 감독이 그렇게 설명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오늘 강의와 너무나도 밀접한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뜸 들이지 말고 말씀드릴까요? 봉준호 감독은 눈을 가렸잖아요. 주님은 이름을 가립니다. 이름을 없애버려요. 이것은 구원에서 필수적입니다. 이름을 없애버린다고요. 이름을 갖고 있는 사람은 구원되지 못합니다. 이름을 지워버려요.
이름은 독자적이에요. 왜 독자적이냐 하면 사람마다 이름이 다 다르니까. 다르다는 말은 각자 각자 자기의 chamber, 자기의 방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201호, 202호, 203호 방이 다 있죠. 201호와 202호의 차이점이 뭡니까. 독자적인 공간을 확보하는 거예요. 그럼 그 방에다가 201호, 202호 숫자 대신에 자기 이름을 딱 써놓으면 어떻게 살아가는가 확실하게 드러났죠?
집안에 애 둘과 부모, 이렇게 넷이 살아간다 합시다. 보통 30평짜리 아파트 살게 되면 방이 3개는 되잖아요. 그럼 방 하나는 부부가 쓰고 나머지 방은 딸애 하나, 아들 하나 주죠. 그러면 갑자기 그 방은 누구를 대변하는 방, 누구의 챔버입니까? 아들, 이쪽은 딸, 이쪽은 부부. 그럼 택배가 왔다. 엄마가 딸 방에 함부로 못 들어가죠? 똑똑. 애야, 집에 있나? 공부하나? 왜요, 엄마. 너 택배 왔는데...앞에 놔두세요. 택배를 두 번 놔둬야 돼요. 문 앞에 놔둬야 되고 딸 방 앞에 놔둬야 되고. 이것은 내 허락을 맡아야 돼요. 그 방안에서는 내가 관리자이기 때문에.
내가 주인이에요. 내가 신이에요, 내가. 왜? 이름이 있으니까. 이름 봐라. 누구 이름이 있나. 이건 아빠 이름이 아니고 엄마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이라니까요. 이름이 나를 대표해요. 그런데 성경에 사도행전 4장 12절에 보면 다른 이름은 구원이 안 된다(“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게 얼마나 귀한 이야기입니까, 정말. 뭐 더 진도 나가기 싫어. 다 끝났어요.
여러분 이름이 있습니까? 이미아 성도님이라 하지 말고 201호 이름 있습니까. 201호, 202호, 목사님 203호, 204호, 나 208호. 남의 방에 들어가면 안돼요. 허락 맡고 들어가야 돼요. 한윤범 목사님 209호 할당해드리겠습니다, 209호.
그래서 기독교 문화 속에서 미국 같은 청교도 문화 속에서는 한쪽 이름을 없애버렸어요. 자기 이름이 있더라도 남편하고 결혼하게 되면 여자가 자기 이름을 기꺼이, 사실은 강요된 기꺼이죠, 강요된 자발성에 의해서 남편 이름에 종속이 되고 복속이 되고 여자는 자기의 이름을 잃어버려요. 기독교 문화에서는 부부가 결혼해서 두 몸이 한 몸 되면서 한 몸은 두 개의 이름을 가지면 안 되잖아요. 하나의 이름, 대표 이름을 뭘로 할 것이냐. 남편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우리나라 유교제도에서는 아내의 이름까지 없애지는 않지만 자식의 성은 남성을 따르지 여성을 따르지는 않죠. 그런데 지금은 법이 바뀌어서 자식도 엄마의 성을 따를 수 있다. 딸은 엄마, 아빠의 성 중에 하나를 고를 수 있다. 이렇게 하겠죠. 그걸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제는 아빠에도 없고 엄마에도 없는 성을 자기 마음대로 해요. 결혼식도 내가 내 스스로 축하하려고 주례도 없애는 판에 내 인생 내가 관리하는데 타인인 아빠, 엄마 성을 왜 붙여. 나는 헨리로 하겠어. 지 마음대로 헨리 ◯, 제임스 ◯, 카펜터스 ◯, 아니면 강다니엘 하든지.
제가 이렇게 사회 법적으로 어떤 형식을 두고 이야기하기 이전에, 형식을 바꾸기 이전에 개인이 오직 자기 이름의 독자성을 태어날 때부터 확보한다는 점이 바로 오늘날 현실 환경입니다.
자기 이름에 미쳐있고 자기 이름을 위해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목사님들이 성경을 이야기한다고요. 그러면 그 성경이야기가 들어오는 족족 뭐에 달라붙겠습니까. 내 이름을 없애겠습니까, 아니면 내 이름에다 내용을 채우고 또 채우고 채우겠습니까? 채우죠. 자기 이름은 멀쩡하죠. 자기 이름은 안 다치고 싶은 거예요.
그래놓고 성경에서 말하는 주의 이름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뭔 얘기인지 몰라요. 아, 나라는 이름의 인간이 예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구원이 되는구나. 아닙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으로부터 살해당한 이름이에요. 제거된 이름이라고요.
오늘 안양모임의 어떤 분이 이야기하기를 자기 남편은 30년 전부터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발작을 일으킨답니다. 거기에 병명을 짓는다면 예수 발작증세? 부처에 대해서는 아무 발작이 없다가 예수 이름으로 발작을 일으킨대요. 그래서 “아휴 집사님 참 다행이십니다. 정말 복된 분입니다. 세상이 지옥이라는 것을 마음껏, 느낌적인 느낌으로 풍성히 느끼면서 신앙생활을 하니 얼마나 실감나는 구원이겠습니까.” 이랬어요.
만약에 그 남편이 예수님에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고 예수 이름에 막 호응하고 나선다면 그 집사님은 어떻습니까? 자기 가정이 지옥 같은 가정이라는 생각이 안 들고 그 가정 자체에다가 자기 이름을 붙이고 자기 이름이 안 다치죠. 자기는 구원받은, 괜찮은 이름을 소지했기 때문에 자기 이름이 다칠 이유가 없잖아요.
아무개 가정 구원받았다. 그 이름을 앞에 붙일 거예요. 그러면 그건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은 게 아니고 그 원칙에 위배돼요. 예수 이름을 아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이름으로 구원받는데 예수 이름을 안다는 조건하에 내 이름은 다치지 않고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면서 구원되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다른 이름으로 구원받은 적이 없다는 말에 위배되는 겁니다.
예수 이름을 부를 때는 조건이 있어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선하게 여기시는 그 율법에 대해서 구원되는 당사자가 율법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날 거냐 의인으로 드러날 거냐 그게 확정되어야 돼요. 율법 앞에서 우리는 죄인이 됩니까, 의인이 됩니까? 저주받을 죄인이 되죠. 그렇다면 저주받을 우리 이름이 그 구원에 들어가야 돼요, 안 들어가야 돼요? 들어갈 수가 없죠.
아까 그 차이점을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분명히 성경대로 하면 내 이름이 들어가서는 안돼요. 두 개의 이름이 동시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말이죠. 예수의 이름은 모든 인류의 이름,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을 대표로 하는 아담의 뿌리, 아담의 줄기, stem에 합세한 그 단합된 의사결정에 의해서 주님 이름은 살해당했기 때문에 그래요.
살해당한 그 분이 내 이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내 이름이 다치지 않기 위해서 나로 인하여 살해당한 그 이름이 나를 구원하게 되면 나는 당연히 그 이름 앞에서 이번에는 누가 부정당해야 됩니까? 내 이름이 부정당하는 것은 이치상 그건 당연하고 마땅한 겁니다.
제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이 제시한 구원은 개시점이 율법 안이죠. 율법은 선합니다. 거룩합니다. 율법대로 살지 아니하면 어떤 인간도 천국에 못 온다. 이것이 하나님이 제시하는 구원이에요.
하나님이 구원 못해서 환장하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인간 구원하는데 있어서 인간이 혹시 화낼까 싶어서 염려한다면 율법을 주지 않아요. 율법 그거 무시해 무시해. 괜찮아 괜찮아. 안 지켜도 돼. 안 지켜도 될 율법을 주기는 왜 줍니까. 뭔가 교체가 일어나야 된다는 겁니다. 내 인생은 내가 관리한다는 바로 그 자체의 악으로부터 너를 빼내겠다는 거예요. 내가 나를 만들면서 생기는 그 조건을 박살내면서 너를 끄집어내겠다는 겁니다. 그 조건이 하나님 마음에 안 드니까. 마음에 들 수가 없죠.
첫째시간 강의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구원은 내 뜻이 아니다. 구원은 내가 예상도 못하고 내 뜻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구원은 하나님이 일체 들어준 적이 없다. 그 증거가 ‘겨우’에요, 겨우. ‘겨우’란 없다, 제로라는 말의 완곡한 표현이에요. 당연히 없는 거야. 라는 뜻에서 겨우라는 거예요.
전에 이야기했듯이 바늘이 안 떨어진 것보다 바늘이 떨어진 게 물리적으로 더 시끄러워요. 그런데 바늘을 떨어뜨렸을 때 그 소리가 들린다는 말은 그만큼 조용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늘을 떨어뜨리는 소음을 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노아를 구원했다는 말은 아무도 구원될 자격은 인간에게는 애초부터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8장 끝에 보면 하나님께서 노아의 제물을 흠향해서 받으시고 하시는 말씀이 인간이 구원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생각하는 바가 악하기 때문에. 이것은 너희들 아이디어가 아니고 순전히 너희들이 모르는 하나님만의 아이디어로 너희를 구원한다. 그 절차는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10분 뒤에 쉬고 합시다.
서울의존강의20210218b 베드로전서4장 18절(겨우 구원)-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구원. 율법은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것이고 그 제시된 율법이 인간에게 왔을 때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을 저주 아래에 두게 했고 진노 아래에 두게 했습니다.
그런 것이 율법이라면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중에 구원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죠. 우리가 율법을 이루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율법을 이루었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았다. 이렇게 되죠. 다들 그렇게 이야기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대속해서 율법의 짐을 지셔서 그 죄 값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용서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다. 맞는 이야기인 것같이 들립니다.
문제는 나 또는 우리. 우리의 상태에 대해서 우리가 구원받기 전의 상태와 그 이후의 상태가 동일한 우리냐 하는 그 문제를 사람들이 놓치고 있어요. 결론적으로 미리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구원받기 이전의 나는 나에게 미쳐있는 나에요. 내가 전부였던 나에요. 나는 내 가치와 내 의로움과 내 잘남이 전부였던 거예요. 그것 때문에 나는 하루하루 힘들지만 살아왔던 거예요. 그것을 아까 첫째 시간에 뭐라고 했느냐면 내 이름이 지워지지 않기 위해서 살아간다.
202호가 제일 좋다. 특별한 나만의 공간을 내가 사수 안하면 누가 사수하겠는가. 딸애 같으면 전부다 인형으로 채워주고 아름다운 핑크빛으로 하는 것은 이것이 내 방이기 때문에 내가 내 취향에 맞도록 전부다 도배하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 세계는 나만의 세계, 나만의 독단적인 세계이고 독자적인 세계입니다. 그 안에서 나는 신이 되는 겁니다. 내가 절대자가 되는 거예요.
이미 절대자의 맛을 봤는데 그걸 미쳤다고 포기해요? 그래서 만약에 내가 신으로 살았는데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내 죄, 스스로 지울 수 없는 내 죄를 위해서 대신 돌아가셔가지고 내가 구원 받았다는 거예요. 기분 좋죠. 기분 참 좋죠. 정말 좋지요. 그렇게 구원받으면 여기 신이었던 나라는 상태가 구원받고 난 뒤의 나라는 상태와 같게 되는 그런 경우가 발생되는 겁니다. 이것은 나로부터의 구원이 전혀 안된 상태지요. 그 나가 그 나인데 무슨 구원이 돼요? 마귀도 천당 가는 수가 생깁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구원받은 이후의 나라는 것은 모델이 있어요. 그 모델이 뭐냐 하면 율법의 거룩함 앞에 나라는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나’가 그 제단에다 자기의 모든 걸 바쳤어요. 모든 걸 바쳤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아버지 앞에 바친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에게 바치고 그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주의 자리로 부활시킨 겁니다. 나사렛 예수님의 자리를 주의 자리로 부활시켰다면 그 주 안에 들어오려면 그냥 그대로의 우리가 아니라 우리의 이름은 예수님이 하신 그 율법 완성에 완전히 바쳐져야 된다는 거예요. 바쳐져야 됩니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을 통틀어 바쳐지기 위해서 변화된 것이 있어요. 성신에서 성령으로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구약 이스라엘의 파멸은 율법에 준해서 잘린 겁니다. 신약에서 지옥 가는 사람은 율법에서 잘린 게 아니고 복음에서 잘리죠. 고린도전서 16장에 나오죠. 율법을 못 지켜서가 아니라 주 예수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가 있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16장 22절, “만일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기독교 물품 파는 가게에 그 많은 액자들 중에 왜 그런 구절은 없는지 모르겠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그런 것 액자 해야지 뭐 이상하게 이 집에 들어오는 사람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런 천주교에서 하는 그런 것 좀 하지 말고.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그런 다단계에서 하는 것 하지 말고.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것 좀 했으면 좋겠어요. 여호와는 나의 목자니 그런 것만 하지 말고요.
너희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런 것 있잖아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그런 구절 있잖아요. 좋은 것 얼마나 많습니까. 확정 난 구절.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런 것처럼 확정 난, 저주 앞에서도 자신만만한 구절을 집에다 걸어놔야 돼요, 저주 앞에서도. 엄마야, 아이고 무서워라. 이런 것 말고. 오라 저주여.
네가 저주할 저주의 화살이 겨냥할 내 이름은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사라졌다. 예수님 십자가 안에서 내 이름이 사라졌어요. 그러면 나라는 몸뚱아리는 뭐냐. 주의 이름의 완성태가 적용이 되는 몸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아버지께 바쳐진 그 이름이 나에게 오게 되면 나는 짬뽕을 먹든지 짜장면을 먹든지 뭘 하든지 간에 아버지께 바쳐진 몸으로 짬뽕 먹고 짜장면 먹고 치킨 먹고 피자 먹는 거예요. 빵 먹고. 바쳐진 이름으로.
관리는 누구 하에 들어갑니까? 주님 하에 들어가죠. 주님 하에 관리 들어간다는 말이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그런 뜻이에요. 이것은 전처럼 내 자신의 가치와 보람을 위해서 먹고 마시는 게 아니고 다른 분의 영광을 위해서 이 음식이 너한테 제공되었다는 겁니다. 네 인생이 할당되었다는 거예요.
이걸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렵게 표현하는 멘트가 되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일을 없앨 수 있을까’ 여러분 좋은 아이디어 부탁합니다. 어떻게 하면 내일을 없앨 수 있어요? 어제 말고 내일. 지금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관리할 때는 내일을 대비하기 위해서 관리하잖아요. 내일이 오늘의 짐이 되어버려요. 이런 짓해서 내일 큰 탈나지, 이런 것 있잖아요. 그놈의 내일이 문제라.
그러면 내일이 없다고 하면 걱정 근심도 안할 수 있죠. 염려거리가 없는 거예요, 내일이 없다면. 지금 제가 말 잘못했습니까? 내가 말 잘못했나... 모든 걱정과 염려와 불안은 어디에 있습니까? 내일을 예상하기 때문에 오는 거예요. 분명히 예수님이 이야기하셨다고요, 마태복음 6장에서. 내일은 네 소관 아니라고요. 네가 너무 건방지구나. 어떻게 예수 믿는다 하면서도 평소에 네가 네 관리하는 것처럼 그 관리를 그냥 계속 유지할 수 있느냐는 말이죠. 그러니까 계속해서 무거운 짐같이 염려가 되는 거예요.
내 몸이 전처럼 내가 관리하는 내 몸이 아니에요. 주님께서 오죽 했으면 참새 이야기하고 들풀 이야기했겠습니까. 참새, 들풀 관리자가 누구에요? 참새였습니까, 들풀이였어요? 여기서 이북 말 나와야 돼요. 아니디요 아니디요. 아니지요, 그건.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내일이 없다면 오늘이 마지막인데 굳이 내일을 걱정할 게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내일 시험 잘 쳐야 되는데. 내일이 없다면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죠. 궁금합니까, 내일 없애는 방법 궁금해요? 뭐 500원 준비 안 해도 돼요. 500원 안 받습니다. 궁금합니까? 궁금하나 안하나 이야기할거면서 묻는 게 잘못되었죠.
말씀드리겠습니다. 내일을 없애는 방법은 율법, 언약이죠, 율법의 완성은 십자가이고 다 같은 말입니다, 율법, 언약, 약속 일단은 같은 걸로 보고요, 율법에 의해서 우리가 바닥을 치면 되는 겁니다. 바닥을 치면 됩니다. 어느 정도 올라갔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늘 바닥입니다. <늘 바닥>. 제목으로 괜찮네. 늘 바닥이라는 말은 애초에 타락은 없었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인간은 올라가야 뭐 타락이 있죠. 추락이 있죠. 올라간 적이 없어요. 율법이 너무 세기 때문에. 율법이 너무 센 거예요.
초등학교 때는 산수 배우죠. 구구단 배우죠. 그런데 고등학교 3학년 때는 구구단 안 가르치잖아요. 왜 고3은 초등학교 때 배웠던 구구단을 안 가르칩니까? 이제 격을 높여야죠. 그것은 기초고 점점 더 높은 곳을 향하여 올라가잖아요. 그것도 단절이 아니고 연속되어가지고. 초등학교 공부 마치고 중학교 공부 마쳐가지고 고등학교 공부 마쳐가지고. 이렇게 점점 더 연결되면서 향상되죠. 진보되잖아요.
율법에 그런 게 있습니까? 율법 100개 중에서 10개 어기고 90개 지키면 진보된 거예요?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던가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양적으로 봤습니까, 질적으로 본 거예요, 성경에? 여러분 다 아는 이야기이지만 다시 한번 우리가 우리의 기본적인 삶의 태도를, 스스로 나는 열심히 살았다 자꾸 우기지 마시고 율법 앞에서 자신을 보세요. 율법과 언약 앞에서 보시라고요. 노아처럼 또는 모세처럼. 율법 없애지 마시고요. 하나님의 말씀, 약속, 십자가 없애지 마시고. 스스로 자기가 명령하면 안 되고요.
여기 보면 야고보서 2장 9-10절에,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그러니까 모든 율법을 365가지라고 보고 365가지 전부에 딸랑딸랑 울리는 종들이 설치되었다고 봅시다. 그리고 조심히 가다가 율법 하나를 탁 쳤다고 칩시다.
톰크루즈가 비밀 금고를 터는데 레이져 광선 쏘니까 온 폼을 다 하면서 마구마구 무작위적으로 있는 선 사이를 들어가서 기어이 비밀무기를 탈취하잖아요. 심지어 땀방울 흐르는 것도 탁 손으로 잡잖아요. 땀방울 흘리는 것도 무게가 감지되면 비상 걸리기 때문에 땀방울 흘린 그걸 손으로 탁 받아낸다고요. 공중에 떠가지고 비밀 금고를 터는데. 묻습니다. 율법에는 우리가 그렇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저주 받으라고 이미 규정한 율법이기 때문에 아무리 틈새를 노려도 그 틈새를 보면 적외선에 다 걸리게 되어있어요. 어떤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이미 저주 아래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그걸 확인 차 율법을 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것도 모르고 율법 지키면 저주에서 벗어날 거라고 오해한 겁니다. 율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한 게 뭡니까? 행함이죠. 그게 뭐냐 하면 자기가 자기 관리한 거예요. 자기가 자기 이름 건사시키는 거예요. 왜냐하면 율법 지키는 당사자가 구원받기 때문에 그래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율법 지켜서 남이 구원받지 않고 율법 지킨 당사자만 구원받는 그런 식으로 율법을 이해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모든 율법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를 어기면 모든 게 어긴 게 되고 만약 하나를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를 지키면 모든 것이 다 지킨 게 돼요. 문제는 어떤 인간도 단 하나의 율법도 못 지켰다는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이것은 양적이 아니고 질적이기 때문에. 서로 딸랑딸랑 다 연결되어 있어요. 그래서 하나를 어기면 온 천지가 율법 어긴 자에게 나오는 저주가 쏟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를 어기면. 제 이야기입니까? 야고보서 2장 10절 이야기죠. 하나를 어기면.
왜 사람들은 이런 것을 생각 안하고 자기 구원에 성급할까요? 그것은 평소에 내 인생을 내가 알아서 내가 납득되는 쪽으로 선택하고 내가 결정하겠다고 나오는 거예요. 아까처럼 그렇게 되면 ‘겨우’라는 말이 무의미해지죠. ‘겨우’라는 말은 정상적인 인간 같으면 구원이 못 된다는 뜻입니다. 특별조치 때문에 구원받았다는 게 ‘겨우 구원’이에요, 겨우.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구원되는 조건은 인간이 이해되도록 사전에 상의하고 협의해서 구원이 되는 조건을 준 적이 없어요. 주님께서 구원의 조건을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차고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내가 요청하지 않더라도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율법의 완성이니까 저주 없는 진짜 구원이 우리에게 차고 들어왔으면, 정말로 차고 들어왔으면 그 사람이 예전처럼 자기 인생을 자기가 관리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관리 안하죠.
정말로 율법이 들어왔으면, 내가 다가가는 식으로 내가 말씀 지키고 예수 믿는 식으로 왜 구원이 안 되는가. 내가 예수 믿는 식으로는 왜 구원이 안 되는가. 주님이 찾아와야 구원되지 내가 예수 믿는다고 구원되는 게 아니거든요. 내가 믿음 가지고 다가가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내가 실행하는 행함에 속한 가짜 믿음이에요.
진짜 믿음은 결과적으로 쳐들어온 결과로서의 믿음이거든요. 내가 구원의 결과물이 되어야 되니까. 만약에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주께서 차고 들어와서 구원을 했다면 우리는 졸지에 나는 ▭다. 나는 애초부터 바닥이었구나. 이걸 고백합니다.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이 말이죠. 나는 애초부터 바닥이었어요, 애초부터. 내가 관리하나 안하나 애초부터 주님 보시기에는 1cm도 못 떴어요. 이 저주의 바닥에서. 이 밑창에서 1cm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세 번째 묻습니다. 노아의 고향에 홍수물이 들어찼습니까, 안 찼습니까? 이제는 답변해주세요. 들어찼죠. 무슨 뜻입니까? 방주 없이는 너도 똑같다. 방주 없으면 너도 똑같아. 방주는 외부적인 거예요. 노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라고 한 거예요. 하나님이 만들라는 말은 네가 만든 것 타고 구원받으라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진 그것으로 인하여 너는 전에 방주 없을 때 네가 살던 네가 네 관리했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종쳤다는 거예요.
전에 알던 내가 아니에요. 율법 안의 나 또는 말씀 안의 나, 십자가 안의 나는 전에 알던 내가 아닙니다. 새로운 환경, 조건 속에서 내가 이미 죽은 자로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죽은 자로. 죽은 자가 존재되어버리면 어제도 죽었죠. 주님께서 어제 죽은 나를 살려줬거든요. 오늘도 죽었는데 주께서 살려줬죠.
그러면 죽은 내가 미래까지, 내일까지 연속할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그건 내 뜻이 아니죠. 내일 살려줄지 안 살려줄지 그건 누구 소관이에요? 누구 관리입니까, 누구 책임입니까? 그건 일방적인 주님 관리 하에 있죠. 내가 내일까지 살려달라고 주께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은 나에게 없습니다. 율법에 의하면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은 아무 소리 못하거든요. 아무 소리 못하면 주는대로 받아먹고 감사해야죠. 그래서 범사에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을 관리하면 우리가 감사 못하는 이유가 내일 때문에 그래요, 내일. 지금 로또 한 20억 들어왔다고 좋아하는데 문제는 내일 사촌동생이 와서 투자한다고 돈 빌려달라고 할 수도 있고 옛날 내가 신세졌던 친구가 와가지고 너 어려울 때 내가 도와줬잖아. 너 이번에 로또 탔다면서? 나 어려우니까 나 도와줘. 이럴 수 있잖아요. 뜯어가는 사람이 더 많아. 복권 탄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뜯어가는 사람은 200명이네. 안 그러면 깡패가 와서 돈 안 주면 너 확 불싸질러버린다 해서 할 수 없이 정든 고향 버리고 이사 가야 되네. 로또 당첨되고 이사 가기. 전화번호 다 바꾸기. 왜 그런 것 합니까? 오늘은 20억 있는데 내일은 20억 있을지 없을지 보장이 안돼요. 보장이 될 수 없어요.
왜냐하면 내일 몸은 내 몸이 아니기 때문에. 내 몸도 아닌데 걱정은 누가 합니까? 내일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내일의 주인공도 아닌 나를 오늘을 사는 나가 쓰잘데기 없이 내일까지 걱정을 이어가고 있으니까 이런 부질없는 인생이 어디 있습니까? 이름을 바꿔야 돼요. 바닥이라고. 김바닥 최바닥. 늘 바닥이에요. 바닥이니까 많이 용서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고 바닥일 경우에는 감사 안할 게 없어요. 아픈 것도 감사하고 돈 없는 것도 감사하고. 모든 게 감사죠. 누가 나를 욕해도 감사하죠. 나는 이미 기생충이니까. 내 이름이 없으니까요.
나는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닙니다. 율법 앞에 대면 십자가 앞에서 내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누구 이름으로 살아갑니까? 주의 이름으로 살죠. 그럼 애가 공부 못하는 것도 누가 공부 못하게 하신 거예요? 주께서 공부 못하게 하신 거예요. 살짝 짜증나지 않습니까? 왜 살짝 짜증이 나냐 하면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이렇게 공부 못하면 내일 어떻게 되겠나, 또 내일 생각한다고요. 내일이 있으면 지금이 행복하지를 못합니다. 지금이 만족스럽고 감사하지를 못해요. 아직까지 성신과 성령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타락을 언급할 때는 이미 구원받고 난 뒤에 구원받기 전부터 타락했음을 인정해줘야 되죠. 구원받고 난 뒤에 아, 처음 구원받을 때보다 타락했다 그런 소리하는 게 아니에요. 구원 받았다는 말이, 자기의 본모습이 아무리 노력해도 1cm도 이 타락의 자리에서 못 벗어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구원이에요. 율법 앞에서 십자가 앞에서 자기를 되비추기 때문에. ‘나는 죽은 자구나’라고 아는 것, 이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저주받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나보고 ‘너는 저주받은 존재야’라고 이야기하지 않는 복음은 우리를 저주케 하는 복음이에요. 우리를 붕 뜨게 만들고 허영심 집어넣는 복음은 저주받은 복음이에요. 바닥에 있는 존재가 진짜 내 본모습이 바닥을 기고 있는데 누가 나의 존재에 대해서 바닥을 기고 있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고마워하고 감사해야죠. 뭘 그걸 기분 나빠해요.
홍시를 홍시라 하는데 그거 기분 나빠요? 홍시를 홍시라 하는데 왜 홍시냐고 물으시면 나는 어떻게 대답하죠. 죄인을 죄인이라 하는데 왜 거기서 궁시렁궁시렁 지구는 돈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해요? 지구 도는 것하고 너 죄인 안 되는 것하고 무슨 관계있다고. 아무 관계없어요.
율법의 압박감이 그 정도에요, 율법의 압박감이. 율법의 압박감은 우리한테만 주어진 게 아닙니다. 예수님께도 주어졌어요. 율법 앞에서 예수님은 어떻게 되었지요? 저주 받았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성경적 문자 나온다. 율법 앞에서 우리는 입을 다물고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보세요. 오늘 강의에서 제일 중요한 겁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에 있지요. 그럼 십자가는 뭡니까? 율법에서 완성이 된 것이 십자가지요. 율법에서 저주 받았으면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뭐가 됩니까? 율법에서 저주 받았으면 율법의 완성인 십자가 앞에서도 우리는 동일하게 저주 아래에 있는 거죠. 나의 이름은 죽고 내 이름을 죽이게 한 그 분의 이름만 살아나는 거죠. 주의 이름이 살아나려면 그 전에 내 이름은 작살나고 박살낸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주의 이름이 주의 이름답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첫째 시간과 연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왜 우리는 자꾸 자기를 관리하려고 합니까? 내일이 있기 때문에. 내일이 자꾸 기다려지기 때문에. 오늘로써 인생 종칠 게 아니기 때문에. 내일 또 살아야 되기 때문에. 내가 내일 또 산다는 그 예측과 기대감 때문에 삽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혜로 사는 겁니까? 아, 이거 문제 쉬운 문제다, 정말. 아니 지금 우리가 느낌적인 느낌이 중요한 게 아니고 사실이 뭐냐는 거예요. 어떤 느낌이십니까 묻는 게 아니고 사실이 뭐냐.
우리의 생명은 무엇이뇨. 코에 있다. 주께서 생명 끊어버리면 우리는 그냥 숨 거두어지면 죽는 거예요. 그 숨의 주도권은 주님이 갖고 계신 거예요. 그래서 사무엘상에 보면 나오죠.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고. 그게 율법 아닙니까.
그럼 율법 앞에 선다는 말은 주께서 우리를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는 그 대상체가 누구다? 그 말씀이 실효성 있게 보여주기 위해서 대상으로 불려나온 사람이 누구다? 나죠. 우리 자신들, 성도들이죠. 구원받은 자죠. 그러면 우리 구원받은 자에게 율법의 내용이 여기 가득 도착해있어야 되죠.
그럼 우리의 고백은 뭡니까? 오늘도 사는 것은 주께서 살도록 허락하신 조치에 의해서 살았습니다. 그 고백을 하면 되는 거죠.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은 결국 내 나름대로의 소원이나 요구조건은 주께서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바닥이에요. 바닥이니까 내일 내가 산다는 기대는 할 수 있지만 그 기대는 사실이 아니고 실제적으로 팩트가 뭐냐 하면 나한테 내일은 없는 겁니다.
이 이야기 듣고 오늘 밤에 가셔가지고 햄버거나 피자 사가지고 엄마, 웬일로 맛있는 피자를 오랜만에 사왔어? 너 오늘 나하고 둘이 마지막이다. 마지막에 아름답게 맛있는 걸로 끝내자. 엄마, 언제까지 끝내는데? 오늘 12시까지만 끝내자. 12시 넘는 것은 주의 소관이야. 심야영화, 그거 주의 소관이 아니면 못 봐. 여기까지 먹고 주님의 제단, 율법의 제단 앞에 우리의 몸을 드리자. 어떻게 드려요? 자면 돼. 그냥 의식 잃어버리고 자고 그 다음 날 아침에 눈 뜨거든 다시 율법의 제단에서 살아난 줄, 부활하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주님의 지시와 명령이 내일되면 또 주어져요. 내가 이거 해야지 하는 것은 내가 나에게 명령내리는 거예요. 아침에 눈을 떠서 주님 오늘은 뭐할까요? 그냥 놀까요? 오늘 트롯트 듣고 놀까요? 그것도 주의 지시죠. 주의 지시 아닌 게 없어요. 만약에 내가 나에게 명령한다면 책임을 누가 져야 돼요? 내가 져야 되겠죠. 내가 지면 옆에 십자가 완성, 율법의 완성, 십자가 또는 율법이 나를 어떻게 하겠어요? 이거 저주받은 인간이 왜 이리 오늘 까불고 난리야. 이렇게 되겠죠. 오늘 더 향상된 생활하겠습니다. 뭘 향상돼? 바닥인데. 율법 앞에서는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오늘 또 제목 바꾸고 싶다. <입이 백 개>.
구약에서의 율법의 잘림이라고 하는 것은 주어진 율법을 못 지켰을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꾸 지연시킵니다. 그래, 못 지키지? 대책 마련해놨어. 그럼 이것은? 그것도 못 지키나. 그럼 이렇게. 예를 들면 율법을 못 지키잖아요. 이스라엘이 율법을 못 지켰으니까 율법대로 하면 저주 받아서 망해야 되죠. 그런데 이스라엘에 이방 여인 룻을 보내죠. 룻의 4대손이 누구입니까? 다윗 보내잖아요. 모든 책임을 다윗 중심 제도로 바꿔버려요. 마치 제사장 중심으로 바꾸듯이. 바꿔버리면 다윗 왕이 멀쩡하면 백성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기들이 다윗 왕 때문에, 다윗과 하나님과의 왕적 계약 때문에 그들은 혜택을 입게 됩니다, 혜택을. 그러니 다윗 왕이 일종의 세상 죄를 지고 간 어린양 같은 존재에요.
이것을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는 바닥이고 저주 받아야 되는데 놀랍게도 저주받아야 되는 우리에게 십자가 소식이 들려오잖아요. 그러면 내가 구원 받는 게 아니고 내 안에 있는 율법의 완성, 십자가가 나라는 외형을 통해서 그 내용물이 끊임없이 구원 받고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다 널리 전하는 겁니다. 이 문장이 어렵죠?
방금 한 문장을 강남강의에서 했어요. 어떤 내용물이 있는데 내용물이 자꾸 퍼지다보면 외형이 생긴다는 말이죠. 공기 중에 굳어진 이 외형. 외형이 우리 자신이에요. 그럼 우리 안의 내용물이 되는 십자가가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는 주님의 지시에 대해서 어떤 형태가 만들어지면 그 형태가 우리의 외형이 되는 겁니다. 남자든 여자든 뭐 나이가 오십이든 사십이든 관계없이 그것이 남들 보기에는 그냥 보통사람이지만 주님 보시기에는 안에 내용물이 있다는 것을 바깥으로 보여주는 예수의 증인 되겠죠.
지난 낮 설교에 했지만 골로새서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능력이 사도바울 안에 들었다 했죠. 그럼 눈에 보이는 사도바울은 뭡니까?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의 외형물이 되는 거예요. 이건 어렵지 않죠? 다시 말해서 나의 내용은 나의 관리 하에 있다, 없다? 내 관리 하에 있지 않습니다. 밀리는 거예요. 내용물에 의해서 밀려서 내가 된 거예요. 참 쉽죠잉? 굉장히 쉽죠.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안 들어올 때는 내 내용물은 누구 관리 하에, 누구 책임 하에 있습니까? 나의 책임 하에 있죠. 나의 책임 하에 있기 때문에 항상 내 가치, 내 잘남, 나의 훌륭함을 지켜내기 위해서 누가 누구에게 명령하느냐 하면 내가 나한테 명령하고 내가 나를 관리할 수밖에 없어요. 안에 있는 내 내용물은 내가 평생을 통해 일구어낸 나의 모든 노력과 희생과 아픔과 그리고 애씀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내 이름을 못 버리는 거예요, 아까워서.
만약에 자식이 다섯 명 있는데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여자가 혼자서 어떤 직업을 하든지 간에 시장에서 무슨 일이든 해가지고 애 다섯 명 대학 다 보냈다. 그런 분들 있어요. 물론 자식들 보면 다른 이야기하겠지만 엄마는 내가 자식들 키웠다는 거예요. 자식들은 지가 아르바이트했다 하고.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째든 다 키웠다 합시다. 그 자기자식을 내 자식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 자식 안에 누가 들어있어요? 자기의 성과와 공로와 희생이 들어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앞에서 노아의 홍수 앞에서 그리고 소돔과 고모라에 덮친 불 심판 앞에서 그것이 통합니까, 안 통합니까? 안 통하죠. 그 아줌마가 요구하는 것은 뭐냐. 내가 자식 5명 키웠다는 그 공로를 인정하는 조건 하에 나를 천국 보내달라는 겁니다. 이것이 그 아줌마만의 생각일까요? 그 아줌마의 생각일까요?
어떤 여자가 있는데 남편한테 충성봉사 다 했어요. 남편이 너 사랑한다는 말만 믿고 충성봉사 다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여자를 배신했어요. 그럴 때 그 여자가 자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합니까? 눈물 찔찔 흘리면서 하나님 제가 뭐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에요. 그냥 평범한 하나의 가정주부만 되도 저는 더 원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보통 사는 삶만 살게 해 달라 하겠죠. 여러분 보통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요? 기적을 받아야 가능한 거예요. 그저 보통 사는 삶이에요. 상식이 통하는 그런 삶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는 인간은 율법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을 원해요.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사람을 원합니다. 다르잖아요. 구원의 내용 자체가 달라요. 다릅니다. 겨우 구원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주께서 엉터리 교회를 계속 만들어내시는 이유가 거기 있어요. 그래야 겨우가 작년도 겨우고 올해도 겨우고 계속 겨우 겨우의 말씀이 실효성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기 17절에 보면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하나님의 집이라 해서 자동적으로 구원받는 것 없다. 겨우라는 원칙을 내가 적용시키겠다. 그냥 율법=심판, 십자가=심판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뭐 어려운 것 없어요. 십자가는 심판하는 심판 용도. 그걸로 끝난 거예요. 인간은 중립이 아니고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심판이 들어오는 거예요. 더 이상 네가 너를 관리하지 말라고. 이게 되게 어려운 이야기에요? 발상의 전환을 하면 안 어려워요.
찔찔 울지 말란 말이죠. 좋아서 우는 건 인정하겠는데 그것은 박수칩니다. 내가 바닥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것은 좋은데 절통하고 원통하고 분통하고 하여튼 통증은 다 있는, 통증은 다 쏟아내 가면서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우는 그 짓하지 마세요. 자기가 뭐 대단한 존재인 줄 알고 있어요.
자신을 율법 앞에서 주님의 언약 앞에서 모세 언약 앞에서 다윗 언약 앞에서 안 세워서 그래요. 십자가 앞에서 세우지 않아서 그래요. 아까 저울 이야기 했잖아요. 아침 눈만 뜨면 모든 관심사가 내가 나 살리기에 온통 신경이 다 쓰여져요. 관심이 그것밖에 없어요. 그 말은 과연 내 안에, 내 내용물에 복음이 들어왔는지 그게 의심이 될 정도에요. 내 안에는 내가 얼마나 귀한 것들만 들어있다. 이러고 있단 말이죠. 그 귀한 것들 율법에 작살납니다.
성신과 성령의 공통점이 있어요. 성신과 성령의 공통점은 둘 다 언약을 지킨다는 겁니다. 언약을 지킨다. 지난 수요설교 때 한 것 다시 해보겠습니다. 유명한 말이죠, 창세기 3장 24절. 여기는 생명나무 있고 여기는 인간이 있는데 하나님의 두루 도는 화염검, 불 칼이 어느 쪽을 지키기 위해서 어느 쪽을 배척하기 위해서 불 칼이 있습니까? 인간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나무를 지키는 겁니까? 아니죠. 생명나무를 지키는 용도로써 불 칼이 있는 거죠. 인간이 들어올까 싶어서 악마가 들어올까 싶어서 지키는 겁니다.
자, 그러면 성신과 성령의 공통점은 둘 다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나의 구원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구원을 지키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형성된 구원을 지키는 거예요. 너의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이 내 안에 박혀야 우리 구원이 되잖아요. 박혀있는 그 예수님을 성령이 보호하는 겁니다. 성령은 오직 나에 대해서 증거 한다고 했거든요,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는 것은 나 잘났다가 아니라 예수님 자기 잘났다. 예수님은 정당한 거예요. 율법을 완성했기 때문에 정당한 거예요. 이와 같은 말이 나를 배척한 인간들은 정당하지 않다를 증거 하는 용도가 성령이죠. 그러니 성령은 우리에게 와서 정당하지 않다를 그냥 우리에게 퍼붓는 거예요. 너는 정당치 못하다. 먹는 것 마시는 것도 정당치 못하다. 오직 예수님만 정당하다. 예수님 안에서 너의 가치를 따로 그 내용물에 섞어 넣지 말라는 거예요.
그럼 차이점은 뭐냐. 구약에서는 언약이 종결되지 않았거든요. 언약이 계속 추가적으로 주어집니다. 처음에는 노아 언약, 그 다음에는 아브라함 언약이죠. 이런 말이 좀 어렵거든요, 사실은. 그런데 구약의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의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다 평면적이고 이차원적이고 지리적으로 제한적이에요. 만약 지금도 아브라함 언약 믿어서 구원받으려면 우리는 비행기 타고 이스라엘 가야돼요. 어려워요, 그거. 돈 없는 사람 비행기 타고 가지도 못하잖아요. 제한적이에요, 제한적.
구약의 아브라함언약이나 다른 언약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 구원의 한계, 테두리를 이미 정해버렸어요. 오직 혈통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만 구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들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대상에 list에 후보감에 들어가 있다 이 말이죠. 이런 게 참 골치 아픈 이야기죠. 왜냐하면 할례언약이 선택받은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를 구분하기 위해서 할례언약을 줘버린 겁니다. 할례언약이 아브라함언약이거든요. 누구든지 할례언약을 받지 않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될 수 없고 내 거룩한 곳에 올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 할례언약이 아브라함과 이방인을 가려냈다면 할례언약의 확대가 바로 모세언약이에요. 모세언약 가운데 이미 할례언약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할례언약만이 아니에요. 계속 추가적으로 뭔가 미진한 것이 남아있어요.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구약 이스라엘은 몰라요. 다만 성신께서 추가적으로 다음, 다음 다음의 언약들을 미리 예보해줍니다. 일기예보 하듯이. 예보하기 위해서 성신 받은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선지자.
그럼 선지자는 무엇과 대립되느냐 하면 기존에 내려왔던 율법을 준수했다고 여긴 사람들과 대척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다. 따라서 율법만 있으면 돼. 라고 안일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성신이 미리 예보하는 또는 성신이 예언하는 사람의 말이 무시되는 거예요. 추가적으로 계속 주어지니까. 성신은 예수 십자가 최종언약을 향하여, 백성들을 분리해서 이끌기 위해서 계속 추가적인 언약을 예고해주시는 거예요. 예고한다는 말은 기존에 있는 사람들에게 낯설게 들리죠.
그러면 성령 안에는 이러한 요소가 완성된 채로 성령 안에 들어옵니다. 성신의 이 기능을 성령께서 어떻게 이루느냐 하면 ‘이미 다 이루었다’를 이 어두운 시대에 성도를 선지자노릇으로 만드는 거예요. 앞으로 이렇게 된다가 아니라 이미 다 이루었다는 그것이 선지자의 예언이 되도록 말씀이 되도록 말씀이 곧 현실이 되니까 이것이 현실이 되도록 자기 백성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 백성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백성은 없어요. 이미 구원되었기에 확정된 구원의 기능이 성도를 통해 계속 번져 나오고 발휘되는 겁니다. 여러분 형광등의 외형이 있죠. 몇 cm짜리, 몇 cm짜리 유리관이 있죠. 그러면 몇 cm짜리 유리관이 있으면 그걸 형광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형광등의 본 기능은 형광등 모양을 하는 등이 있다고 형광등이 아니고 불이 켜져야 되잖아요, 불. 이 어두운 세계에 불이 켜져야 되죠.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세상이 밝다고 할 때 ‘아니야 결코 밝은 것이 아니야’ 어두움이라고 세상의 빛과는 다른 빛을 발산해주는 기능이 오늘날 선지자 기능을 하는 성도입니다.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의 다 이루심이 내용물로 들어있는 거예요. 성도는 다 이루었기 때문에 뭐 구원 챙겼는데 나 아무것도 안한다가 아니라 성신과 달리 성령께서는 이미 다 이루었다는 것을 성도를 통해 계속해서 증거 하게 하는 거예요. 제자리 뛰기 하는 거예요.
끝으로 성신을 받지 못한 사람의 말로, 성신을 받았다가 받지 못한 사람의 말로를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게 사무엘상 28장에 나오는데 수련회 때는 그 대목을 시간관계상 설명을 다 못했어요. 사무엘상 28장 21절에 보면,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 심히 고통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나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청종하였사오니 그런즉 청컨대 이제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나로 왕의 앞에 한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가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이것은 수련회때 자세히 설명 안했어요. 이게 무슨 대목이냐 하면 여자 무당이 사무엘 만나고 지 인생 종쳤다는 것을 알 때, 확정되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 기절한 거죠. 쉽게 말해서 혼쭐난 겁니다. 내일에 희망을 품었는데 내일이 오든 모레가 오든 한달 뒤가 오든 시간의 경과와 아무 상관없이 이미 끝났어요. 아말렉에 대해서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는 그걸로 이미 인생 종쳤어요.
이것을 9강에 설명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현재는 아말렉이 아니고 십자가죠. 십자가로 운명이 이미 확정 되었어요. 확정 난 확정일자 받아놓고 끝나버렸어요. 인생은 이미 하나님에 의해서 구분되었어요. 주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그 말씀이 현실로 이미 드러나 버렸어요. 그러면 주를 사랑하는 자가 있다는 뜻이거든요. 그래야 구원이 되니까. 주를 사랑하는 자는 이미 그 사람의 운명이 확정되었습니다, 천국 가기로.
따라서 처음에는 사울이 성신 받았잖아요. 지금 성령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 이야기 하는 중입니다. 성신을 받았는데 선지자가 누구냐 하면 사무엘이죠. 사무엘 말을 안 들었잖아요. 안 들었을 때 성신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예언적 기능을 갖고 있죠. 다시 말해서 기존이 마감이 아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사울은 기존에 내가 왕인데 이만하면 됐지 하고 멈췄죠. 그러니까 성신 자리에 성신 대신에 성신의 반대말, 악신이 들어가죠. 인물로서는 사울 대신에 다윗이 들어가고. 영적으로서는 성신 자리에 악신이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하고 사무엘상 28장 이 대목하고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게 혼쭐이 난 거예요. 정신이 나가버렸잖아요. 확정되었으니까. 확정된 입장에서 누가 옆에서 격려하고 위로하고 독려해줄 수 있느냐. 그것은 율법에 의해서 이미 저주받기로 확정된 자가 있어요. 그게 바로 무당 여인이에요. 신접한 여인입니다. 신이 접한 여인이에요. 그러면 사울이라는 이스라엘 왕은 사실은 이스라엘 왕이 아니고 신접한 여인,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는 자와 한통속이 되어서 도움을 받게 돼요.
쉽게 말해서 우리 둘이 한 패아닙니까. 같은 쪽인데 내가 주는 떡이나 먹고 기력이나 회복하소서. 우리는 같은 동네 사람인데 왜 이러세요. 당신이 나를 살려줬잖아요. 당신이 나를 살려줬다는 말은 스스로 내 편이라고 이야기한 것 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사무엘 같은 건 잊어버리고 그냥 떡이나 먹고 기력이나 회복하소서. 이게 사울이 받을 수 있는 마지막 위로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드디어 마지막 장 31장에 보면 자기 집안 전체가 율법 없는 자의 손에 죽어버려요, 율법 없는 자의 손에. 이스라엘에서 탈락한 겁니다.
구약에는 탈락이 가능해요. 성령이 아닌 성신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러면 신약의 성령 때는 왜 탈락이 불가능하냐. 이미 우리는 죽은 자로, 바닥을 친 자로 뭐 추락할 것도 없어요. 매일같이 우리는 추락되었음이 십자가 앞에서 확정되어지기 때문에 그 인간 속에다가 십자가의 의미를 담아낼 수가 있는 거예요.
십자가의 의미가 두 가지거든요. 모든 인간은 저주받는다. 예수님도 저주 받았으니까. 두 번째로 뭐냐 하면 성령이 임한 자는 이미 율법 완성의 혜택을 입는다. 이 두 가지 이야기가 바로 성령이 들이닥칠 때 눈이 열리면서 나도 새롭게 보고 세상도 새롭게 보고 우주도 새롭게 보고 교회도 새롭게 보고. 아, 이게 전부다 주님 소관이지 내 소관이 아니었구나. 나는 다만 주님 하시는 일의 결과물인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겨우 구원받은 사람들 속에, 그 겨우 속에 다른 말로 하면 기적적으로 성령이 임해서 우리는 감사함으로 내가 죄인이고 바닥인 것을 도리어 감사하면서 감격하면서 이 용서받음을, 세상 살면서 내 인생에 어떤 굴곡이 온다 할지라도 이 기쁨을 훼손하지 않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몰랐었습니다. 율법을 업신여겼고 십자가를 하찮게 여겼습니다. 그래놓고 무슨 신자라 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성령께서 말씀 자체가 우리 속에 들어와서 겨우 받는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의 혜택을 입은 자라는 것을 또다시 알고 감사케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