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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강, 341강) 배설, 빛과 어두움 210215

정인순 2021. 2. 17. 09:53

340강 음성 동영상

341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40강-YouTube강의(배설 에베소서 4:22)20210216-이 근호 목사


제340강, 제목은 ‘배설’. 모든 유기체, 생명체는 배설기관이 있습니다. 쓸데없는 쓰레기를 갖다버리는 작용을 자기 내부에서 하고 있죠. 배설기관이 살아있으면 그 유기체, 생물체는 살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간부터해서 모든 자연세계 속에서 특히 동물들은 노골적으로 배설기관이 따로 갖추어져 있죠. 원생동물도 따지고 보면 에너지를 뽑아내고 남아있는 술 찌꺼기 같은 것, 뽑아낼 것 다 뽑아내고 갖다버리는 배설기관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다른 피조물하고 다른 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 다른 피조물은 그냥 살아있으면 살아있는 걸로 자기 임무는 다했다라고 우리 인간들이 그렇게 볼 수 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형상을 주신 그 취지를 드러내는 식으로 인간은 자체적으로 배설해야 될 게 있어요.

에베소서 4장 22절에 보면,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여기 ‘버리고’라는 말 나오죠, 배설하는 것. 무엇을 배설하느냐. 옛사람을 버리는 거예요. 그럼 옛사람을 왜 버리는가. 구습을 좇는 옛사람.

구습이라 하는 것은 옛것을 이야기하는데 새것과 옛것이 구분되는 어떤 기준이 들어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준이 안 들어오면, 사는 대로 그냥 살게 되면 옛것, 새것을 가르는 자체가 성립이 안돼요. 딱 뭔가 여기서부터는 새것이고 이것은 옛것이다. 새것이 주어짐으로써 새것이 아닌 것은 옛것이라고 이렇게 구별 지어진다 이 말이죠.

여기서 ‘성경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해주는 하나님이다’ 하는 그러한 목적은 여기서 수립이 안 됩니다. 이런 것은 거기서 받아들여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 구원하려고 일을 벌이신 것이 아니고 옛것과 새것을 가르는 그 기준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이라는 피조물을 만드신 겁니다.

인간을 통해서 배설할 것을 주목해보라는 말이죠. 무엇이 들어왔기에 무엇이 나가느냐를 네가 살펴보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뭐냐. 하나님의 형상이에요. 4장 24절에 보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 새사람의 모델, 원형, 바탕, 근거, 그 분은 바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냐 하면 바로 골로새서 1장 15절에 보면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해서 그 분이 누구냐.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 말씀을 다시 할게요. 에베소서 4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뭐냐 하면 의와 진리와 거룩인데 의와 진리와 거룩이라고 되어버리면 이것을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오해하기 쉬우냐 하면 옛사람은 그대로 있고 옛사람에다가 그동안 모자랐던 의와 진리를 거룩함으로 여기에 더해서 뒤집어씌우면 이것이 새사람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옛사람 자체는 폐기처분해야 되고 새로운 것인데 그게 아니고 옛사람은 아까워서 그대로 갖고 거기에다가 추가해서 의와 진리, 거룩함이라는 윤리도덕으로 그냥 덮어씌우면 그것이 새사람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의라는 분, 진리라는 분, 거룩함이라는 분이 오시는 거예요. 그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구습을 좇는 옛사람을 버리는 이유가 예수님 자신이 의와 진리와 거룩함이라는 것을 생산하기 위해서 어떤 공정, 어떤 절차가 필요했느냐 하면 구습을 좇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되시는 예수님 자신을 미워하고 버리고 진짜 예수님 자체를 배설해버리는 그런 사건이 선행되었다는 사실이 기준점이 되는 거예요.

더 쉽게 갑니다. 예수님이 오셨다. 그러면 인간은 자기가 구습을 좇는 옛사람이라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아요. 인정하지 않고 “예수님 영접하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라는 말을 서슴없이 해버립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나오죠. 문을 두드리면 문 열고. 두드리면 문 열면 그만이지. 내가 받아들이겠습니다. 어디를? 구습을 좇는 옛사람에다가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예수님을.

그렇게 되면 무엇이 빠지느냐 하면 예수님이 오실 때 모든 인간들이 합세해서 예수님을 처단하고 밀어낸 그 결정적 사건이 거기서 누락이 되어버려요. “길 가는 과객이니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라고 하면 양반집에서는 자기가 양반인 티를 내느라고 “누추하지만 사랑방에 주무세요.” 이렇게 될 경우에 뭐가 빠져버립니까. 한 쪽은 우리 집에 들어오려는 의사가 있었고 나는 충분히 그 의사를 존중해서 따뜻하게 환대, 배려해줬다는 거예요.

특히 환대 같은 경우에는 현대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기독교를 있게 하는 새로운 윤리는 뭐냐. 아주 망가진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어떤 이웃을 환대하는 것이 주의 뜻이다 뭐 이런 식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가르친다고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거기서 뭐가 빠지느냐 하면 결정적인 복음, 십자가 사건, 서로 배척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누락이 되고 빠져버려요.

예수님도 하시는 말씀이 옛 술은 옛 부대에 담는다. 이 말을 왜 했었겠어요? 새로운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옛 부대에 담을 만한, 감당할 만한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의와 진리와 거룩함은 예수님이 가지고 오신 의와 진리와 거룩함을 도리어 배척하게 만드는 그러한 예상 못할 내용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갖고 오는 의와 진리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인간은 자기가 하나님께 배설물로 버려져야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어느 인간도 그것을 인정하는 인간이 없어요. 자진해서 알아서 “예, 지옥 가겠습니다.” 이래야 마땅해요, 우리의 현재 형편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어떤 형편이 되느냐 하면 “예, 제가 죄 지었으니까 지옥 가는 것이 당연한 거죠. 가겠습니다.” 우리는 그 정도 대상밖에 안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어떻게 하느냐면 반대로 “제가 뭐가 잘못되었습니까?” 이렇게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더욱더 지옥 갈 만한 존재인 겁니다, 우리가. 우리가 예상했던 의와 진리와 거룩을 우리가 포기해야 돼요. 그것은 가짜고 나의 구습인 옛사람을 지키려는 얄팍한 마귀의 술책이라는 것을 우리가 놓치면 안돼요.

그리고 말이 옛사람이지 사실 지금 우리, 그냥 우리에요. 우리의 본성, 아담의 본성, 태어난 그 성격, 성질, 그 성질로써는 수용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들어오면 사도바울의 고백처럼 나는 아예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새사람 모습이에요. 이것이 주님이 내 안에 들어왔다는 새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죽고’에 해당되는 나는 뭐냐. 그게 바로 주님 들어오기 전에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허접함과 나의 근원적인 죄악성이죠. 성도가 되었으면 바로 이 두 가지가, 주님으로 십자가로 인하여 무엇이 새사람이고 무엇이 옛사람인지를 이제는 기쁨으로 둘다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새로운 사람입니다.


341강-YouTube강의(빛과 어두움 로마서 13:12)20210216-이 근호 목사


제341강, 제목은 ‘빛과 어두움’. 성경에서 빛과 어두움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개인적으로 빛이라 어두움이라 이야기하지 않고 일괄적으로 이야기한다는 것, 그것이 전제되어야 됩니다. 일괄적이에요.

다섯 사람이 형광등 켜고 있는데 다섯 사람이 전부다 얼굴이 볼그스름하고 다 이쁘다 이 말이죠. 그런데 갑자기 정전되었어요. 그러면 그 이쁜 사람 어디로 갔습니까? 안 보이죠? 왜냐하면 일괄적으로 정전되었으니까. 일방적으로 어두움이니까. 그러면 정전되고 난 뒤에 어떤 사람이 저 안에 어두운 사람 다섯 명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지, 얼굴 통통한 사람 누구 있고 이렇게 이야기 안하죠.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일괄적으로 하는 것은 구약 때부터 줄곧 이어주신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한 언약 완성상태가 나타날 때 도출되는 결과는 두 가지밖에 없어요. 빛이냐 어두움이냐. 구약 때부터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가지고 그렇게 평가가 돼요. 언약 평가는 개성을 찾아주는 게 아니고 이 세상에 대해서 일괄적으로 이 세상이 어둡다는 것을 고발하는 식입니다.

그 언약 가운데 첫 번째 언약이 노아 언약인데 창세기 8장에 나오죠. 창세기 8장에서 노아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주셨는데 8장 2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흠향하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인하여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특정 인간을 두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죠? 모든 인간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그러니까 어릴 때는 성선설, 다 착한 마음을 가졌는데 그 사람이 살아가는 환경에서 독한 환경 또는 독한 마음씨 때문에 어떤 사람은 선하고 어떤 사람은 악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언약에 의하면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악해요.

왜냐하면 선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그래요. 저주의 효력. 선악을 알면 그 현장이 필히 죽음의 현장이 돼요. 죽음이 나온다고요. 죽음이 나올 때는 이유가 있어야 되겠죠. 악하기 때문에 죽음이 나오죠.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기 위해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악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이야기하시는 이유가, 그래서 내가 인간사는 세상에 물로 확 부어버렸다. 노아가 있던 땅에도 홍수가 왔겠어요, 안 왔겠어요? 역시 왔죠. 노아는 식겁하고 방주에 들어가 피했을 뿐이지, 노아가 가꾼 그 텃밭, 노아가 가축했던 닭, 소 키우던 곳에도 사정없이 여지없이 봐주는 것 없이 그냥 홍수물이 들이닥쳤습니다. 노아가 방주 안탔으면 큰일날 뻔 했죠.

왜냐하면 노아도 악하기 때문에. 노아는 은혜를 입은 사람이에요. 안 악한 사람이 아니고 악한데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그 은혜의 은혜다움을 도드라지게 그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노아를 하나님이 들어 하나의 재료로 이용하신 거예요.

방주 없어도 노아는 버틸 수 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방주 없어도 노아는 하나님께서 손 못 댈 정도로 의로와. 이런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노아가 의롭다는 것은 은혜 안에서, 언약 안에서 의로운 거예요.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희생제물의 효과가 노아의 천성과 본성을, 악함을 극복했기 때문에 노아는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제물의 혜택, 은혜라 하는 거예요. 은혜는 그냥 봐주기가 아니고 어떤 것을 근거해서 봐주죠. 희생 제물에 근거해서. 그러면 목사가 되어서 교인들에게 무엇만 전하면 되겠어요? 그 희생의 은혜, 혜택. 여러분들은 개성적으로 뭘 해도 그것은 악합니다. 언약을 증거할 수밖에 없어요.

이처럼 구약에서 언약이 주어진 현장도 일괄적으로 악하다 어두움이라고 했기 때문에 이 주어진 언약이 완성이 되게 되면 더는 다른 언약은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할 때 예수님께서는 언약을 세울 때에 더 추가적으로 그 다음 언약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내 살과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생명이 없다고 요한복음 6장에서 하셨고 마태복음 마지막 만찬에서는 “이 떡을 먹어라 그리고 이 잔을 마시라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내 피니라 살이니라” 했거든요.

그래서 아버지와 내가 너희들과 함께 언약을 세우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언약을 유지하려면 무엇이 계속해서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되느냐면 예수님의 희생의 살과 피가 계속 살아있는 그 영역 안에서만 하나님의 구원의 언약이 유지되겠죠.

그게 뭐냐 하면 요한복음에서 말하는 빛이에요. 요한복음에도 나오지만 에베소서에도 나옵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되어 있죠. 그냥 우리가 착해서 빛이라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영역을 제시하죠. 어디 안에서 빛이라고 했습니까? 주 안에서 빛이라 했죠. 주 안에서 빛이라. 그러면 빛이 빛 될 수밖에 없는 어떤 요소가 우리 안에 내장되어 있죠. 내장되어 있는 겁니다.

밤에 정전되거나 불 꺼도 불그스름하게 빛을 비추는 물질을 형광물질이라 하잖아요, 형광물질. 성도가 형광물질이라고 되어 있어요, 성경에 보면. 로마서 13장 12절에 보면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밤이 깊다는 거예요. 과학적으로는 밤낮 바뀌는데 성경은 그런 식으로 보는 게 아니고 언약적으로 봤을 때 이 세상은 밤이 계속 깊어지는 거예요, 밤이 갈수록.

문명론에서나 과학론에서는 갈수록 인간 지능이 똑똑해지고 발전한다고 하잖아요. 진화한다고 하죠. 과학적으로 진화하지만 윤리 도덕적으로도 진화되어서 인간이 더욱더 성숙해졌다고 주장하거든요. 그러나 성경은 반대로 갈수록 더 밤이 깊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밤이 더 깊으면 깊을수록 형광물질이 더욱더 빛을 발하게 되죠. 아주 독특하게. 윤기가 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편지에서 누누이 편지받는 그 성도들에게 편지하기를 환란이 주어진 것에 대해서 슬퍼하지 말고 도리어 기뻐하라고 했어요. 왜냐하면 그 형광물질이 빛의 자녀가 값을 하는 절호의 기회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어떤 공장이 있는데 직원이 세 명 있어요. 공장장, 사장님하고 직원이 세 명 있으니까 직원 셋 다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죠. 그러나 어느 날 사장님 하는 말이 “내가 먼 타국에 갔다 올게.” 빠져버려요. 빠지고 자금을 세 사람에게 줍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돈을 각 직원에게 지급해서 나 없을 때 네가 한번 돈을 굴려보라고 주죠. 흔히 말해서 그것을 ‘달란트의 비유’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분류를 할 때 누가 빛에 해당되는지 누가 어두움에 있는지 주님이 살아있다 할 때는 주님한테 잘해주려고 서로서로 주님 앞에 아부하는 식으로 “주님 믿습니다” 한단 말이죠. 예수님 당시에도 그랬어요. 내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할 때 다른 사람들은 몰라요. 주의 일 열심히 하는 줄 알았죠.

그러나 예수님께서 눈에 안 보이는 식으로 타국에 갔을 때 보이지 않는 주님이지만 전에 함께 있을 때와 동일하게 일한 사람, 그 사람은 자기를 쳐다보는 게 아니고 빛 되신 주님의 빛만 사모하는 사람이에요. 자기를 사모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지 자랑하려는 사람이 아니에요.

요령부리는 사람이 아니고 내가 발광체가 된 것은 주님 때문에 빛의 자녀가 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 사람을 통해서 예수님이 증거 되기 위해서 이 세상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두운 짓밖에 할 수 없는 것. 그것도 주의 조치이니까 세상이 어둡다고 너무 탓하지 마시고 빛의 자녀로서 살면 되죠.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로마서 13장 12절에 그렇게 나와 있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은 네 갈 길로 가라. 우리는 예수그리스도의 빛만 증거하겠다. 이렇게 살면 되지 세상에 대해서 너무 비난하거나 섭섭해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