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7:4-6 / 불심판
불심판
이근호
2021년 2월 10일
본문 말씀: 아모스 7:4-6
(7:4)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령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7:5) 이에 내가 이르되 주 여호와여 청하건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7:6)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과 선지자의 대화에 등장하는 용어들은 모두 최종 확정이 날 개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불로서 확 쓸어버리려고 하십니다. 이 얼마나 극단적 조치입니다. 하지만 그 극단적 조치마저 ‘심판의 철회’라는 조치를 준비해두셨는데 이 역시 극단적 조치입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서 등장하는 ‘야곱’이라는 단체의 등장도 극단적이고 최종 확정적입니다.
이는 기준의 이스라엘이 구원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최종적으로 확정 날 이스라엘이 따로 등장하게 되는데 이들은 우주의 불심판이라는 재앙 속에서 비로소 그 정체성이 드러나는 이스라엘입니다. 곧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히 ‘용서받은 집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의 가치는 극단적인 불심판과 같은 가치를 지닌 레벨입니다.
그 정도로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았다는 것은 온 우주를 다 얻은 것보다 더 귀한 은혜입니다. 이렇듯 최종적이고 극단적 하나님의 조치 사이에서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관리하겠다는 하는 것들은 다 무의미한 것들입니다. 악마와 한 통속이 되어 같이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 3:24에 나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 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생명나무와 인간을 두고 둘 중에 어느 편에 서 계신다가 잘 나와 있습니다.
사람을 버릴 지언정 생명나무는 지키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확실한 뜻입니다. 분명한 의중이십니다. 지키는 방법은 ‘불’입니다. 이는 곧 하나님이 실시하시는 불심판을 하나님께서 지키고 싶은 것을 확실히 지키시겠다는 의사표현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지키겠다는 의지로 인하여 불심판은 확정적이고 그 심판의 정당성을 위하여 세상에 죄가 필요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공된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저주를 저주답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달리 말씀해서, 불심판이 제대로 합당한 조치임을 드러내기 위해서 율법을 이 세상에 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율법을 인간에게만 주었다고 생각하시면 아니됩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세상을 저주 아래 있기 위함이기에 이 저주 안에 악마도 포함되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악마로부터 교육을 받는 처지로 이 세상 생활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모두 다 죄안에 가두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
즉 모든 인간은 저주 아래 있어 저주받아 마땅한 자입니다. 악마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다같이 저주 영역에 갇혀 있다는 말은 서로들 사이에 긴밀하게 의사교환과 일치가 성립되는 가운데 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도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추구하는 바가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과실을 따먹지 말라’라는 언명이 있었음을 분명히 알고도 그 권한에 침범하라고 인간을 부추긴 이유는, 하나님에게 지기 싫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에 의해서 자신의 모든 것이 통제받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구역을 따로 갖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마음이 곧 남자와 여자의 마음입니다. 악마는 인간들을 자기 지배 아래 둠으로서 삶의 원천은 하나님에서 자신에게도 옮기도록 했습니다. ‘내가 곧 모든 것의 시작점’임을 천명하게 했습니다. 절대적 자아의 등장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확보하므로서 필히 따라오는 작동 원칙입니다.
선이 무엇이며 악이 무엇인지를 결정지을 최종 판단자로서 본인이 나서겠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신이 노릇입니다. “나도 역시 신이다!”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모든 인간들의 진짜 본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 중의 하나인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 약속의 내용은 이것입니다. “약속을 믿으니 그게 의가 되고 복이 된다”는 겁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의 모든 인간성을 무참하게 짓밟아 버리는 선언입니다. 아브라함이 할 수 있는 모든 재주나 능력이나 행함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룰 수 없는 죄라는 것을 분명히 한 겁니다. 이 약속 따라서 430년 후에 아브라함 후손들인 이스라엘에 율법이 주어진 겁니다.(갈 3:17)
이 율법이 들어오므로서, 이스라엘은, “왜 하나님께서 따로 약속을 주셨는가?” 그 이유가 밝혀집니다. 이 점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3:24에 나옵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즉 그동안 우리 인간성을 교육시키고 훈육시켜온 보모는 악마였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야 하는 식으로 악마는 우리의 마음을 장악해 왔습니다. 악마들은 사람들에게, “네 자신을 늘 고쳐 쓰라”가 가르쳐왔습니다. 인간들은 스스로 다짐하기를, “다시는 두 번 다시 후회할 일 하지 않겠다”는 각오로 살게 했습니다.
이런 각오들은 이미 하나님의 불심판이 최종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지지 않기 위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악마가 시도한 수작들입니다. 인간이 그 어떤 행위를 하든지 상관없이 불심판이 확정적입니다. 변동이 없습니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구원을 위해서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율법의 저주 아래라는 수렁에 빠질 뿐입니다.
이 저주의 수렁 안에 예수님께서 뛰어들어서 합세했습니다. 예수님 역시 율법의 저주를 받았습니다.(갈 3:13)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주받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이 부활시키므로서 ‘용서’라는 새로운 약속 적용의 여지가 생긴 겁니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전적으로 예수님의 일방적 자기 의사 결정으로만 구원이 되는 조건입니다.
요한복음 5:21에,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창세 전에 구원받기로 작정된 참된 야곱, 곧 최종적으로 확정된 이스라엘입니다. 이 사람들의 특징이 누가복음 18:13에 나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성도는 불 구덩이 속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 살면서 실컷 ‘불심판 속의 얼굴들’을 보며 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기 밖에 모르는 우리가 십자가 용서를 보게하심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4강-암 7장 4-6절(불심판)21021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7장 4-6절까지입니다.
아모스 7:4-6
“주 여호와께서 또 내게 보이신 것이 이러하니라 주 여호와께서 명하여 불로 징벌하게 하시니 불이 큰 바다를 삼키고 육지까지 먹으려 하는지라 이에 내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청컨대 그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하매 주 여호와께서 이에 대하여 뜻을 돌이켜 가라사대 이것도 이루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불로서 바다와 육지를 다 삼키는 것 물론 환상입니다. 물론 환상이 나중에 현실이 되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아모스에게는 환상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렇게 할 때 아모스가 하는 말이, 야곱이라는 말은 언급을 했습니다. 불로서 큰 바다를 삼키는 것, 전 세계 우주가 불에 다 타버리는 것과 그리고 야곱이라는 이 용어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원천, 근본, 기본에 관한 용어들이고 개념들이에요.
소소하게 변화하는 그런 일들이 아니라 뿌리, 바닥, 바탕, 하나님께서 바탕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이며 그 바탕으로 제시하는 그 대화의 상대자가 누구냐 하면, 야곱이라는 겁니다. 야곱은 물론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뀌지요. 사람 대 사람의 이야기 같으면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데 하나님과 통하는 사람의 하나님과의 대화내용은 항상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을 들이대면 안 되고요. 기본이 되고, 바탕이 되고, 흔들리지 않는, 변하지 않는, 이미 확정된 그 개념들을 동원해서 주님과 대화해야 됩니다.
불로서 전 세계 우주를 다 멸한다. 물론 환상이지만 미리 이야기했지요. 다 멸한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그러면 아직까지 야곱이 미약하니까 신앙적으로 문제가 있으니까 감당 못하겠습니다.” 그러니까 6절에 “내가 뜻을 돌이키리라.” 용서지요. 하나님께서 “내가 철회할게.”
하나님께서 용서하신다는 것, 그리고 야곱이라는 하나님의 백성 됨, 하나님의 자기 백성 이름이 야곱이거든요, 그 다음에 전 우주를 불로 멸망시키는 것, 이런 것들은 최종적이면서도 필히 하나님께서 이러한 최종적인 것을 향하여 하나님의 일이 중간에 중지되거나 멈추는 일이 없다는 거지요. 최종적이니까,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되어 있으니까.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까지 하나님의 일은 쉬지 않습니다. 그 최종적인 것을 미리 알게 되면 하나님의 용서라 하는 것은 야곱이 야곱 되기 위해서만 하나님의 용서가 제시 된다, 제공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최종적으로 기어이 야곱은 하나님의 사랑받기로 작정된 그 목표에 대해서 하나님은 그 뜻을 철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 뜻 그대로 관철 해 나가신다. 그런 계획을 아모스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 우주를 불로서 다 싸질러 버린다. 이런 것이 최종적이라면 지금은 그게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그 말은 야곱이라는 것도 지금의 야곱은 야곱이 아니고 최종적으로 천국에 들어가야 그게 최종적인 야곱답게 드디어 누릴 혜택을 다 누리지요. 용서라는 것도 최종적으로 가서 확정적인 용서가 따로 주께서는 주어지는 겁니다.
이 말은 지금 아모스와 하나님이 이야기할 때 서로 극단적인 대화를 주고받는 것, 마지막이고 최종적이니까 극단적이지요. 극단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께서 제시한 것이 전 우주를 내가 화가 나서 불 싸지른다, 다 불질러버린다. 얼마나 극단적이에요.
그런데 그러한 강도, 하나님의 재앙의 강도, 심판의 강도를 딱 제시할 때 아모스가 야곱 이야기를 했거든요. 야곱의 가치가 최종적으로 어느 정도 되는 가치냐 하면, 최종적인 용서를 부여받을 위치에 있는 것이 야곱이라는 거예요. 최종적인 용서.
이 최종적인 용서를 부여받을 것이 야곱이기 때문에 야곱 하나 생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불 심판이 준비되어 있고, 그리고 최종적인 용서가 준비되어 있고, 그 가운데 등장하고 생산되는 것이 야곱이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용서의 가치가 무게가 어느 정도냐 하면, 우주를 불로 싸질러 버려도 될 만한 곳에 용서가 주어졌다는 말은, 용서라는 것이 얼마나 고귀하고 최종적인 사랑인가를 알 수가 있지요. 불로 싹 싸질러 버리니까.
“숙제 안했어? 청소해.” “선생님, 용서해주세요.” “용서해줄게.” 이런 식의 용서받는 그런 정도가 아니고 불로 다 싸질러 버리는 거예요. 그걸 두 자로 ‘싹 다’, 싹 다 갈아엎어버리는 거예요. 싹 다, 재개발, 사랑의 재개발하듯이 싹 다 갈아 엎어버리는 거예요. 누가 불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없어요.
하나님의 용서가 어느 정도로 위력이 있느냐 하면, 싹 다 불 싸질러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용서된 자만이 등장하는데 그게 최종적으로 야곱이 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극단적으로 불 심판을 제시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제가 후회할 일을 두 번 다시 안하겠습니다.”라는 이 되도 않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거지요.
불 심판을 내리겠다는 것은 우리 행동 여하에 따라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어떤 행동을 하든 그런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게 이미 확정 났다. 이 세상에 불 심판은 확정난 거예요. 악마는 자꾸 우리보고 우리자신을 고쳐 쓰라고 이야기합니다. 고쳐 쓰면 좋은 인간 될 수 있다고 자꾸 격려하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보고 너 이미 죽었어, 라고 이야기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고쳐 쓸 존재라면 우리는 여전히 우리자신에게 가능성과 희망을 포기를 못해요. 우리 자신의 가능성과 희망을. ‘아, 지난번 그런 실수만 안했어도 지금 괜찮은 인간인데.’라는 식으로 자기의 잠재력에 대해서 끝까지 뭔가 쥐려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의식들이 최종적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하나님의 극단적인 조치, 하나님의 모든 행위가 극단적인 조치인데 하나님하고 거래할 일도 아니고, ‘하나님께 잘해주면 하나님도 나에게 잘해주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이미 모든 것이 결정 났어요. 불 심판이다 그 말이지요. 인류의 모든 환경은 불이에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에 나옵니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 내시고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여기에 여러분이 유념 있게 봐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쫓아냈다. 첫 번째 사람을 쫓아냈어요. 그러나 생명나무는 안 쫓아냈습니다. 사람만 쫓아냈지 생명나무는 그대로 있어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두루 도는 화염검, 불 칼로 두로 돌게 하는 것은 쫓겨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에요. 흔히 말하는 사랑의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없어요. 하나님은 생명나무 사랑해요. 인간 사랑하는 것이 아니고.
창세기 3장 24절이 그 이야기 하는 거예요. 얼마나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사랑을 하는지 아예 불 칼로 생명나무 안 다치게 조치를 하시는 겁니다. 미군부대 철조망에 그런 것이 있지요. “접근하면 발포한다.” 영어로 써놨어요.
생명나무 길을 인간들이 못 오도록 지켰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편이에요, 생명나무 편이에요? 이거 뭐 초등학생이 글자만 알아도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람 편 아니에요. 생명나무 편입니다. 되도 않는 종교 만들어가지고 하나님은 사랑하신다. 메시아는 한국 사람이라고, 승리재단인지 뭔지가, 참, 내…….
사람을 꾀려고 환장을 했어요. “여러분은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원받을 희망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구원받을 희망을 하나님이 준 적이 없어요. 인간을 구원하자 하는 그것은 교회가 그런 사기를 친 거지요. 기독교가, 마귀가!
창세기 3장 24절만 봐도 모르겠어요? 왜 자꾸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인간구원을 원한다. 왜 자꾸 그런 소리 하느냐 하면, 인간들이 자기가 홀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악마와 더불어 있어요. 악마 집에 더부살이 하고 있다고요. 늘 악마와 더불어 있어요.
악마의 특징은 원천을, 하나님께 원천을 두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 생명나무에 원천을 두는 것이 아니고 ‘잊자. 하나님 잊고, 생명 잊어버리고 원천을 너 자신에게 두어라.’ 이게 악마의 가르침입니다. 공자 가라사대, 공자 말을 들어보세요. 그 두꺼운 책들 시경이나 역경, 그게 다 한 줄로 뭐냐 하면, 모든 시작은 인간으로부터.
불경, 불교의 경전 있잖아요. 절에 새벽에 가면 청량하기 짝이 없는 풍경소리가 딸랑 딸랑, 아름답다. 아름답고 뭐고 다 좋은데……, 소리, 음파가 아름다운 것은 맞아요. 문제는 절에 가서 하는 그 짓거리가 나부터 출발하자는 거예요. 나부터 출발해서 나에게 돌아오는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말이지요.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께서 저주를 할 때 이것은 진짜 마음을 비우고 보게 되면 너무 쉽게 나오는 건데 너무나 나중심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것이 있어요. 그냥 보면 들어오는 게 있어요. 그게 뭐냐? 여자하고 남자하고 뱀하고 세트가 되어서 다 같이 저주받았다는 사실이에요. 그거 안보입니까? 뱀하고 남자하고 여자하고 다 셋 다 저주 받았어요. 남자 여자만 저주받은 것이 아니고 뱀하고 같이 저주받는다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뱀이 저주받는 그곳에 남자 있고, 남자 저주받는 그곳에 여자 있고, 뱀과 여자와 남자 셋 다 다 같이 동일한 저주의 지평선에 같이 살고 있어요. 그래서 남자는 뱀에게서 발을 못 빼고, 여자도 뱀에서 발을 못 빼고, 남자는 여자 없이 못살고, 여자는 남자 없이 못살고, 남녀 공히 뱀 없이 못살고, 그게 지금 창세기 3장의 저주의 환경속에 셋이 사이좋게 오붓이 다 들어 있어요. 뻐꾸기 둥지 안에 셋이 다 들어 있다고요.
그것이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가두었다, 하는 것은 율법으로 인하여 가두어 둔거예요.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은 남자와 여자만 죄 아래 가두어진 것이 아니고 뱀도 율법아래 가두어졌어요. 뱀도 죄 아래 가두어졌다고요. 악마가! 악마는 놔두고 남자 여자만 족치자고 율법준 것이 아니고 악마까지 족치기 위해서 가두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이 세상은 악마와 여자 남자로 이루어진 세상인데 전부다 율법아래 있고, 율법아래 있다는 말은 저주 아래 있다는 말로 이렇게 이해하라는 것이 갈라디아서 3장 이야기거든요. 모든 율법을 항상 지키지 않으면 그냥 못 지키는 것이다, 중립이다. 아니에요. 저주 아래 있는 거예요.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준 거예요. 남자나 여자만 그런 것이 아니고 뱀도 마찬가지에요.
뱀도 저주아래 있어요. 가룟유다도 마찬가지고 사탄도 저주아래 있는 거예요. 다 같이 저주 아래 있는 동창생들이니까 별 탈 없이 보이는 거예요. ‘세상이 어때서? 코로나 때문에 약간 신경이 쓰이지만 백신 만들었으니 낫겠지.’ 이러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뱀과 남자가 셋 다 전부다 죄 아래, 율법아래 두신 이유는 거기에 예수님도 뛰어들어요. 예수님도 저주아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십자가 죽음이 저주 아래 죽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하시느냐 하면, 창세기 3장 24절을 다시 보게 되면, 사람을 쫓아냈다, 그 말은 아주 사정 두지 않고 배제한 거예요. 두루 도는 화염검과 천사들을 통해서 못 오게 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취지가 하나님이 죄를 지은 것을 심판하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심판을 하기 위해서 죄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나서는 겁니다.
죄지어서 심판받는 것이 아니고 심판행위의 정당성을 위해서 인간은 죄지어야 되는 거예요. 이 땅에서. 그게 율법의 용도입니다. ‘하나님, 참, 그 때 내가 너무 후회하고 잘못했으니 용서해주세요.’ 지금 이런 의식 자체가 마귀적의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오늘 확정적으로 이미 불로서 싸지른다 했잖아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인류의 이 세상 유일한 환경과 배경은 불입니다. 이미 불속에 있는 거예요.
명절에……, 요새는 다섯 명도 못 모이지만 누굴 만날 때 불속에서 만나세요. 불속에서 나타난 얼굴들입니다. 뭐 어떤 사람은 더운데 갔다 와서 벌건 사람도 있지만 북극에 갔다 와서 허연 사람도 불속에 있는 거예요. 불속에서 못 벗어난다는 겁니다. 이게 확정적이에요.
이것은 내가 착한 일 더 한다고 빠지고 나쁜 일 한다고 불속에 더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인간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 땅에 죄를 지어야 되는 겁니다. 왜? 심판을 심판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의 심판의 정당성 때문에, 주님의 불 칼의 정당성, 생명나무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정당성 때문에 우리는 죄짓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자꾸 후회하고 반성하고 그러면 안돼요. 그것은 뭔가 세상을 잘못보고 있는 겁니다. 그것은 마귀와 함께 있지 않고 자기 단독으로 따로 ‘마귀 저리가!’ 하고 자기 혼자 살고 있는 줄로 알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저주는 나 혼자 받는 것이 아니고 마귀와 더불어 받고, 여자도 여자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남자 여자 마귀 저주를 같이 받아요.
저주를 저주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저주를 먼저 줘놓고 그 근거를 나중에 제시합니다. 그게 율법이에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율법이 430년 후에 왔다고 되어 있거든요. 17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그 말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미 하나님께서 심판을 먼저 실시했어요. 그 심판이 뭐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이 믿으매 그게 의가 되는 심판이에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언약을 믿으매 그게 의가 되어버렸어요.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거든요.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안줬으면 아브라함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없어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아브라함을 선택해가지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야곱인 것을 여러분이 염두에 두시고요, 제가 아까 초반에 야곱은 확정적이라고 했지요. 아브라함을 선택을 해놓고 선택된 자에게만 하나님의 언약을 줘버린 거예요. 차고 치는 겁니다, 이것은.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그래놓고는 믿으니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브라함 당사자도 생뚱맞은 거예요. 자식도 하나도 없는데 자식이 하늘의 별같이 많다고 하니까,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찾아와서 언약을 줘서 네가 복되다, 의롭다, 하는 순간 이것은 아브라함이 평소에 자기 인간성, 악마와 더불어, 자기 아내 사라와 더불어, 남자 여자 뱀과 더불어 이 모든 것이 그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는 무의미한 것이 됩니다. 처벌받고 저주받고 심판받는 게 돼요.
왜?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예상과 기대는 무참히 주님의 언약 앞에서 작살난 거예요 아작 난 겁니다. 짓밟힌 거예요. 개무시당한 거예요. 그렇게 해놓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주고 의롭다 해주고 천국백성 만들어놓고, 그 다음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언약이 언약되기, 왜 이게 불가능한지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죄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발췌해내는 작업에 나섭니다. 발췌해내는 작업.
지금 우리교회가요, 한 20년 되었습니까? 20년 될 때까지 교회가 정말 기적적으로 조용해요. 조용하고 아무 말썽이 없었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헌금을 안 하고 봉사를 안했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비비 꼬는 것 아닙니다. 진짜입니다. 헌금 안하고, 봉사 안하고, 관심 있는 것은 자기 집구석밖에 없고, 교회간판의 ‘우리교회’ 그 글자들이 어떻게 되든 관심도 없고, 하여튼 자기 집구석 자기 몸만 생각하면 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제일 칭찬이 뭐냐? “네가 네 죄를 아는구나.” 이겁니다. “네가 용서를 아는구나.” 이미 복음을 십자가를 알고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그 다음 절차가 뭐냐? 왜 내가 내 구원에 무능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
그동안 우리가 왜 무능해야 되고 왜 우리가 내가 하는 헌금과 봉사가 아무짝도 소용이 없는가 하면, 갈라디아서 3장 24절에 나오지요. 23, 24절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게 뭐냐 하면, 그동안 우리가 악마로부터 길들여져 왔기 때문에 그래요. 악마가 우리한테 뭘 심어줬다 하느냐 하면, 다시 한 번 말씀드려서, 모든 시작과 원천은 나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관계없이 나는 내 새끼하고 내 집, 내 부동산, 내 가족, 내 집만 챙기면 그만이거든요. 내 가정만 챙기면 그만이거든요.
제가 지금 화내는 것 아닙니다. 이게 누가 그렇게 가르쳤느냐 하면……, 복음을 아는 사람만 알아요. 율법 아래 있게 하는, 늘 같이 있는 악마가 나로 하여금 ‘너만 잘되면 그만이야’라는 그 인식을 우리에게 길들여왔고 우리에게 그렇게 교육, 훈육시켜 온 거예요. 그걸 몽학선생이라 하는 거예요. 그만큼 교육시켜 온 거라고요.
악마가 보모였습니다. 악마가 보모였어요. 우리를 키워왔어요. 물론 물고문 하고 막 때리고 하면 안 되지만. 아무리 성경을 듣더라도 후다닥 틈만 나면 돌아서는 것은 뭐냐 하면, 바로 내가 챙길 것, 내 것으로 돌아와요. 복음을 10년, 20년, 30년 들어도 소용없습니다. 제일 소중한 것은 내 소유에요. 내 것이에요. 내 자식이고 내 가정이고 그것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교회 왔다가 짜증나서 막 튀어나갔어요. 그런데 꾸준히 남아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께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네가 네 죄를 아는구나.” 이게 내가 안 고쳐 진다는 것, 평생토록 악마한테 길들여졌기 때문에 이게 고쳐질 리가 없어요. 주께서 “고치지 마.” 왜? 야곱은, 구원받은 사람은 용서로서 되는 것이지 네가 수리해서, 개선해서, 네가 인간되어서 천국 가는 것 아니기 때문에.
이 이야기 듣고 우리 교인들 막 우쌰, 우쌰, 하고 있어요. ‘목사님, 감사합니다!’ 그런 거예요. 첫째,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나를 키워온 것은 주님도 아니고 뱀이 나를 키웠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내가 지키고자 하는 나라는 사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18장 11절에서 바리새인이 자기자랑을 해요.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소득과 십일조를 드린다고.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저들과 같지 않음을 뿌듯하게 느낍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런데 13절에 보니까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는 □(네모)다.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죄인입니다. 이게 마귀 안에 사로잡힌 자에게서 이게 나오겠어요? 성철스님한테 이게 나오겠어요? 법륜스님한테 이게 나오겠습니까?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지옥가야 돼요.” 그 이야기가 나오겠어요? 안 나와요.
악마의 마음은 뭐냐? ‘모든 것을 버리고 너부터 출발해. 네가 신이야.’ 네가 신이야, 부터 시작하거든요. 부산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왜 내가 신이 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선과 악을 누군가는 판정을 해야 되는데 선과 악을 아는 그 지식을 내가 확보했으면 이것은 선이고 이것은 악이고, 그 최종판결자가 나 빼고 누가 있겠어요?
내가 바로 선이고 악이고를 판정할 거다. 그게 바로 신이에요. 선과 악의 판정자, 그게 신이고 신이 그 외에 무슨 다른 일을 하겠어요? 선과 악을 구분해서 심판하는 일, 그게 신이 하는 일이에요. 그런데 그게 바로 내가, 이 자아가 된 거예요. 그래서 맨 날 자기 반성하면서 ‘아, 전에 내가 너무 나쁜 일 했구나. 이제 좋게 해 보자. 착한 일 많이 해서 나쁜 일을 상쇄해보자.’ 맨 날 이런 계산을 하는 거예요. I am GOD too. 이런 식으로.
‘나도 신이다. 신이시여, 나도 신이다. 나는 신에게도 지기 싫어요.’ 악마가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따먹는 이유는 내가 너한테 이 악마가 당신, 주님, 당신 예수님한테 지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다는 거예요. 하지 말라, 하는 것을 내가 건드림으로서 당신은, 이 신은 나를 온전히 모든 방면으로 몽땅 다 장악할 수는 없다.
왜? 내가 그걸 거부했기 때문에. 그 마음으로 선악과 따먹으라고 부추겼고, 인간은 거기에 말려들었고, 같이 저주받은 동기동창생 된 거예요. 이런 순간이 올 때 우리는 기념사진 한 장 찍어야 됩니다. “움직이지 마세요. 사진 찍습니다.”
나는 신이다, 누구한테도 지기 싫어, 그래서 복음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것도 복음 알아서 남한테 지기 싫어서 복음 연구하는 거예요. 아 참 복음 아는 그것도 열심히 성경 파는 것도 성경 아는 면에서 남에게 지기 싫은 거예요. 기어이 이기고 싶은 겁니다. 이 악마의 본성이.
그러나 율법 아래에서는요. 그러한 품성 하나하나 다 색출해서 저주로 되갚아 줘버립니다. 왜? 이미 불로서 확정 났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불의 심판이 확정 났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 땅에 하시는 일은 왜 불로 싹 싸질러야 되는 이유를, 하나님의 불 심판의 정당성을 위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악마와 인간들을 저주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 너희끼리 한통속 되어서 잘 해먹어라.” 그 말이지요.
우리 자신이 누군지를 그렇게 보고 싶습니까? “주여, 찬송합니다.” 그거 사진 찍지 마세요. 가식적이에요 위선입니다. 조작하지 마세요. 진짜는 뭐냐 하면 “하나님이여, 나는 하나님에게도 가슴팍 찌릅니다. 나는 나대로 살래요.” 그 때 천사가 와서 “자, 스톱, 움직이지 마세요. 찍습니다. 펑, 찰칵!” 이거 당신 증명사진, 여권사진입니다.
그 순간을 바로 십자가에서 양쪽에 달린 강도가 보여줬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강도가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나를 여기서 풀어주면 내가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쪽 강도는 “주여, 오늘밤에 저를 생각해 주세요. 아, 내 직업이 강도이어야 하는 이 신세에 대해서 저는 찬미하고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심판이 먼저 있고, 주의 심판은 왜 내가 죽어 마땅한가, 왜 주님 조치가 정당한가를 저를 통해서 보여주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저는 주여,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그 고백, 그 세리의 고백, 그 고백이 바로 복음 속에 있는 사람, 하나님의 용서 안에 있는, 용서로 말미암아 생산된 하나님의 이스라엘, 야곱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야곱입니다. 극단적인 조치, 어떤 행동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불로 때려 치시는 그 가혹하고 비정한 하나님의 조치가 참으로 그게 사랑이었노라. 하나님이시기에 그래야만 한 것을, 이제는 그것을 받아들일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야곱으로 생산된 하나님의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복음을 아는 성도가 이 세상에서 가야 될 길을 인도함을 받는다는데 무슨 인도함을 받는가? 늘 어디를 가도 불 심판 속에서 인도함을 받는 과정이에요. 어떤 일이 벌어져도 불 심판 받을 이유들이 퍽, 퍽, 퍽, 터져 나오는, 매일 터져 나오고, 매주 터져 나오고, 매달 터져 나오는, 불 심판이 터져 나오는 그 길을, 그 속을 거니는 거예요. 신나게 거니는 거예요.
하나님의 조치는 정당하다, 합당했다, 불 심판은 합당했다. 그걸 계속해서 느끼면서 감사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스라엘 되지 못하고 하나님의 용서의 대상이 되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나는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이렇게 충실하게 바르게 살았다는 자기 기억이 있잖아요. 자기 기억.
그러나 심판은 인간의 기억이 아니고 주님의 기억이에요. 심판은 창세기 3장 24절이라는 하나님의 자기기억의 일관성입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렇다면 아까 말씀대로 하면 율법 안에 뱀하고 남자, 여자, 모든 인류가 다 같이 저주받고 심판 아래 있어서 불 심판의 대상으로 있는데 어떻게 거기서 이스라엘이라는 것, 야곱이라는 것이 나타나느냐?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이 불의 연못 속에 풍덩, 같이 뛰어들어 왔어요. 뛰어들어 와서 생긴 것이 피 입니다, 피!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은 율법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된 거예요. 그 피에 근거해서 율법의 완성, 유일하게 죄 없이 의로운 분이 예수님밖에 없거든요.
그렇다면 율법을 완성한 입장에서는 그게 하나님의 의인데, 하나님의 용서, 의가 이미 완성된 입장에서는 주님 쪽에서 이 불속에서 자기 원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아버지께서 모든 심판을 예수님께 일임했어요.
21, 22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아들이 원하는 자를) 살리느니라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아들이 심판하는 거예요. 선과 악 사이를 아들이 심판하는 거예요.
그러면 ‘쟤는 내가 용서하고 싶다.’ 하면 일방적으로 용서하게 되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용서를 받는 순간 비로소 그 사람은 예수 이름으로 야곱이 되는 겁니다. 본인의 능력이나 실력이나 본인의 회개나 반성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방적인 자기기억, 아버지께 받은 택한 백성이 있다는 그 기억, 창세 전에 누구는 사랑해야 된다는,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해야 된다 할 때 야곱은 사랑해야 된다는 그 야곱에 해당되는 사람을,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명단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 명단대로 자기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용서를 해버리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도 불 재앙이 떨어져야 마땅한데 그걸 철회시키는 겁니다. 예수님의 자기권한으로.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 과거에 잘나갔다, 5년 전에 은혜 받았다, 그 기억이 아니라 순전히 예수님의 기억만 기억하고 예수님의 은혜만 기억해요. “주께서 용서했기에 용서받았어요.”라는 이야기만 입에서 나올 뿐입니다.
왜? 우리는 마땅히 저주받아야 되고 악마와 한통속이 되어 있으니까. 나는 내 챙길 것, 내 가족이나 내 돈, 내 재산, 그거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 안하기 때문에. 그 속에 있으면서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나라는 것은 변하지 않아요. 나는 나밖에 몰라요. 하지만 인도받음이 있어요. 인도받음, 불 심판을 먼저 받은 자라는 인식을 가지고 인도함을 받는 거예요.
오순절에 보면 성령이 올 때 불같은 성령이 와요. 역대하 7장 1-3절을 봐도 솔로몬이 성전을 다 세우고 기도를 하는데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서 그 번제물과 제물들을 사르고 여호와의 영광이 그 전에 가득하니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하므로 제사장이 그 전에 능히 들어가지 못하였고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불이 내리는 것과 여호와의 영광이 전에 있는 것을 보고 박석 깐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선하시도다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 하니라.”
솔로몬이 성전 짓고 난 뒤에 예배드리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불이 떨어졌어요. 제물을 싹 다 불살라 버렸어요. 그걸 볼 때에 그게 용서에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수님은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받을 불세례라고 이야기했어요. 누가복음 12장 49, 50절에서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예수님의 십자가는 내가 율법아래 들어왔다, 이 저주의 세계 안에 들어왔다는 것 때문에 주님께서 역시 마찬가지로 저주를 받는 거예요. 불 심판을 받는 거예요. 왜? 불이 확정적이니까, 불 재앙이. 그런데 용서는 뭐냐? 예수님의 그 피 때문에 용서받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먼저 물로서 완전히 싸질러버렸지요. 이제는 불로서 마지막에 싸질러 버립니다.
그 모든 물과 불의 심판은 율법이라는 데서 나왔기 때문에 율법의 완성된 분이 계신다면 물의 심판도 정당하고, 불의 심판도 정당하고, 야곱에게 용서를 주시는 그 예수님의 결단도 정당해요. 따라서 이 악마의 세계, 저주의 세계, 불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빠져나올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살과 피 밖에 없습니다. 그게 전부에요.
예수님의 살과 피, 내 살과 피를 먹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으리라. 결국은 주님의 영생보호에요. 영생을 영생답게 하기 위해서, 영생이 얼마나 고귀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건지는 겁니다. 그러면 그 영생이 뭐냐? 내가 곧 길이요, 내가 곧 영생이요, 생명이요, 내가 생명의 떡이요, 내가 곧 진리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기 백성을 모집하는 거예요.
이러한 일관성이 있는 이 환상이 구약에서는 환상이지만 신약에 오면 실제로 십자가에 죽었다가 강도도 구원받고 예수님도 사흘 만에 부활되고. 이게 실제현실 팩트라는 것. 이게 팩트에요. 이게 사실이에요.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은 바로 이 사실,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이 사실, 이 놀라운 비밀, 조금도 이 세상에 꿀리지 않고, 코로나에 꿀리지 않고 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주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있을 겁니다.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할 수 있는 사람, 당신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라고 외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어떤 일을 해도 빠져나갈 수 없었던 그 저주, 유일하게 주님께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빠져 나가사 아모스의 말씀대로 우리에게 재앙을 철회해주시고 배제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말씀, 용서라는 말씀이 우리 안에 영원히 들어 있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살과 피가 함께 들어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