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8강, 339강) 실상과 가상 , 소리 210202
녹취:이하림
338강-YouTube강의(실상과 가상 갈라디아서 3:3)20210202-이 근호 목사
제338강, 제목은 ‘실상과 가상’ 또는 ‘실상과 허상’. 사람들은 실상과 가상을 나름대로 늘 구분하고 있습니다. 구분을 짓는 자기 자신은 무조건 실상이에요. 꿈속에서 자기가 뭘 했든 간에 그게 꿈이라 할지라도 꿈을 꾼 사람은 나니까 일단은 나는 무조건 이유도 없이 실상이 되는 겁니다. 내가 허상일 리도 없고 가상일 이유도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내가 실상이니까 이 나의 실상 됨을 인정해주고 증명해주면 그건 실상이 되고 나의 실상임을 훼손시킨다든지 그것을 부정케 하면 그것은 가상 또는 허상이 되는 겁니다. 그렇게 이야기해서는 잘 모르겠죠. 이렇게 이야기하면 됩니다. 볼펜이 여기 없는데 내가 볼펜을 가지고 이 볼펜을 여기 테이블에 놓았으면 이것은 실상이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볼펜이 없는 자리에 나라는 실상이 볼펜을 들고 볼펜을 이렇게 놓았으니까 볼펜이 있다는 것은 실상이 되는 겁니다. 주인공인 내가 했기 때문에. 내가 원인이 되고 그 원인에 대해서 내가 한 결과가 있으면 그건 이유도 없이 실상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볼펜을 내가 놓지도 않았는데 내 볼펜이 여기 있게 되면 이것은 원인하고 결과하고 끊어졌어요. 분명히 내 볼펜인데 놓아도 내가 놓는데 남이 내 볼펜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내가 놓지도 않은 볼펜이 거기 있다면 우리는 일단 그것을 허깨비 또는 허상, 가상으로 부정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원인이 안 되었는데 왜 이게 여기 있느냐는 말이에요. 원인과 결과가 연결되어야 그게 실상인데 내가 하지도 않는데 뭐가 나타나면 그건 허상이 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할 때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갈라디아 사람들아 십자가가 눈에 보이는 정도가 아니고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했어요.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사람들은 그걸 듣고 십자가 찾아다니는 거예요. 어? 십자가가 어디 있지? 이거 뭐 밝히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십자가가 안보이잖아요. 십자가는 몇십 년 전에 있었던 사건이고 지금 여기는 십자가가 없단 말이죠.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십자가가 밝히 보인다 했다. 그래서 왜 사도바울이 그런 이야기를 할까. 사도바울은 그 뒤에 이야기하기를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했어요.
여기 있던 내 볼펜을 이렇게 테이블에 놓아버리면 이것은 내 육체로 한 거예요. 내가 볼펜 들고 놓았으니까 내 육체로 한 거다 이 말이죠. 우리는 그것을 실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내 육체가 원인이 되어서 내 육체가 내가 행해야 어떤 결과가 나오죠.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내게 필요한 결과가 주어질 리 없는 겁니다. 그것은 가상이고 허상이죠. 이것은 내게 도움된다는 그 점이 증명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령으로 시작했다는 말은 성령이 뭐 보여야죠. 성령이 안보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기를 무엇을 실상의 출발점으로 보느냐 하면 성령이 하는 것을 실상의 출발점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이 보이지 않잖아요. 보이지 않죠?
우리는 내가 실상이기 때문에 실상이냐 허상이냐는 판단을 누구부터 시작하느냐 하면 내가 판단하고 싶은 거예요. 내가 판단하기에 내가 이해가 되면 그것은 실상이라고 규정짓고 싶고 내 눈에 안 보인다든지 내가 해내지 못하는 일이라든지 뭐 내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했겠죠, 어째든 간에 나도 신체를 갖고 있고 어떤 사람도 신체를 갖고 있다면 육을 갖고 있다면 육이 뭘 해줘야 일어나는 일, 그것만을 실상이라고 하고 싶어요.
그러면 성령이 하는 일은 내 몸이 그걸 실상이라고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그건 허상이 되는 거예요. 내가 두 번 세 번 되풀이해서 반복해서 할 수 있는 것만 실상이에요. 어쩌다 하는 것은 한 번 했을 뿐이지 믿을 수가 없어요. 다음에 하면 그대로 안 되니까 믿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성령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인다는 것을 네 신체, 육신의 행함으로 네가 받아들일 수 있느냐 아니면 성령의 일하심으로 십자가가 믿어지느냐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거든요,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실상은 뭐냐 하면 내가 두 손 모아서 기도해서 내 뜻대로 뭔가 이뤄지게 되면 우리는 이것을 실상이라고 봅니다. 내 기도 응답했다. 그 기도한 원인을 시작으로 해서 응답이라는 결과가 나왔다면 우리는 실상이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돈을 가지고 예배당에 딱 헌금을 했더니만 그 다음 주일날 누구누구 십일조하셨습니다. 딱 나올 때 그걸 우리는 실상이라고 보는 거예요. 내가 어떤 사람 붙들고 열심히 성경말씀해가지고 “다음 주 교회 나오겠습니까?”, 교회 나온다 했을 때 우리는 전도했다는 실상을 의미하는 거예요. 뭐든 실상이라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공부를 했는데 성적이 올랐다. 이것도 실상입니다. 내가 어느 집에 가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퇴근시간에 보니까 일당을 주더라. 이것도 실상이에요. 우리는 모든 것을 실상 위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3장 1절에 성경이 말하기를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이 눈에 안 보이느냐?” 이렇게 나오거든요. 십자가 너 봤냐? 나 안 보이는데. 그런데 사도바울은 봤다고 하던데. 우리의 안목, 내 신체의 안목으로 또는 이 시각으로 지금 못보고 있는 거예요.
못보고 있으면 실상이냐 허상이냐 했을 때 어느 쪽으로 무게가 실리냐 하면 허상이 될 가능성이 있어요. 허상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믿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귀신을 믿어라. 이건 말이 안 되잖아요. 만약 귀신을 믿게 되면 항상 귀신은 옆에 따라다니는 것 같아. 밤에 잘 때도 잠을 못 자요. 귀신이 와서 나 자는 것을 딱 보는 것 같아. 어떻게 사람이 살겠습니까. 귀신이 없다 해야 아 여기 베개 있고 이불 있고 잠자는 사람 나밖에 없고 이 방에는 나만 잔다. 이래야 우리가 숨을 쉬고 살 수가 있어요, 이 세상은. 그런데 그게 뭐냐. 사도바울은 이게 네 육신의 한계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구원받을 믿음은 네 육신의 한계 그 너머에 있다는 겁니다. 헌금해도 안돼요. 전도해도 안돼요. 기도해도 안돼요. 예배 참석해도 안돼요. 친히 벽돌로 쌓아서 예배당 지어도 이것은 주님이 원하시는 실상과 연결이 안 됩니다. 연결이 안 되면 끊어진 상태에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가. 출발점을 나의 실상부터 출발하면 안 되고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돼요.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가능합니다. 십자가로부터 출발하게 되면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도 성령의 은사요 성령의 선물이 되는 거예요.
소망, 사랑, 성경 말씀, 예수님의 재림, 예수님께서 부활하심 이 모든 것이 믿어지는 것은 내 솜씨나 내 능력이 아니고 성령께서 나를 갖고 노시는 겁니다. 성령께서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셔서 자기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을 대외적으로 알려주라고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셔서 이만큼 오늘날까지 살게 만드신 거예요. 이게 실상이에요.
그렇다면 내가 내 중심으로 하는 것은 뭐냐. 없어질 허상이 되는 겁니다. 허상이 그동안 실상을 가로막아 온 거예요. 허상 때문에 울고 허상 때문에 웃고 이러고 있다는 말이죠. TV에 나오는 모든 프로그램이, 뉴스가 실상은 이야기안하고 전부다 허상만 이야기하면서 겁박주고 협박주면서 그게 이 세상의 전부인줄 알았다 이 말이죠.
성령부터 시작하는 것. 나부터 시작하지 않는 것. 주님부터 시작하는 것. 이게 믿어지는 게 바로 실상과 가상, 이게 바뀌어져야 되는 겁니다.
339강-YouTube강의(소리 시편 19:4)20210202-이 근호 목사
제339강, 제목은 ‘소리’. 소리라는 것을 물리학에서는 파동으로 봅니다. 이 파동에는 매질이라는 것이 필요해요. 공기가 없는 곳에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저쪽에서 어떤 에너지가 발생되고 에너지는 공중에 퍼지는데 공기가 있어주면 저쪽 공기가 그 옆의 인접한 공기를 밀고 그 공기가 또 밀고 밀고 밀고 하게 되면 공기의 주름살이 밀려서 우리 귓속에 있는 음파를 탐지하는 고리관하고 귀청을 지나게 되면 뇌에서 판단해서 소리라는 것이 ‘누가 나를 부르는구나’ 우리가 안다는 겁니다.
그 말이 맞는 이야기라면 그 다음 질문이 나와야 돼요. 이 세상의 소리는 그럼 누가 만들었는가. 사람들은 알 수 없죠. 소리가 들리는 건 아는데 누가 처음 소리를 냈는지는, 듣는 거는 아는데 누가 냈는지는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소리를 듣고 판단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 판단하느냐 하면 저 소리가 나한테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를 판단하는 것으로 멈춰버립니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친구가 내 이름을 부를 때는 판단을 해요. ‘저 목소리, 저 음파의 목소리. 아 내가 좋아하고 내가 반기는 친구 목소리구나.’ 라고 해서 대번 문을 열어주는데 바깥에 소리를 들어보니까 두 번 다시 꼴 보기 싫은 친구가 와서 그리할 때는 마치 없는 것처럼 해서 “아, 내 친구 없네. 집에 가야겠네.” 하고 가기를 기다리겠죠.
그러니까 모든 소리가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고 그 소리는 나한테 이익이 되는 소리일까, 손실이 되는 소리일까를 판단하면서 자연의 소리를 인간들이 그런 식으로 이용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나한테 이익이 되냐 손해가 되느냐 그것 말고 그 소리, 손해가 되든 이익이 되든 어째든 간에 그 소리는 누가 만들었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맹탕이에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어요.
그러면 우리가 평소에 이 소리에 대해서 편리한대로 이익대로 쓰고 이 소리가 어디서 오는지도 모르고 했다가 나중에 소리 주인한테 걸려서 심판받을 때는 어쩌려고요. 남의 것 썼잖아요, 남의 것. 내 것 아니잖아요. 소리를 내가 만들었습니까? 들려오잖아요. 우리는 내게 필요한 소리만 낸 거예요.
만약에 환풍기가 있는데 환풍기 소리가 지금처럼 조용한 게 아니고 대포소리만큼 크다면 저 환풍기 팔아넘길 거예요. 안 쓸 겁니다. 왜? 나한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귀가 먼 사람들의 모임이라든지 애들이랑 있으면 일반사람들은 그 자리에 가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왜냐하면 이야기하는 것이 시끄러워요. 자기들은 소리가 안 되기 때문에 크게 이야기한다든지 손짓발짓해서 산만해지거든요. 그러면 그것이 평소에 익숙치 않은 환경이기 때문에 자기한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그 자리를 피해버리죠.
그렇다면 시편 19편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절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가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 말씀이 세계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분명히 이 자연세계는 우리가 이용하기 이전부터 소리가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에 보면. 그런데 그 소리가 어떤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뭐냐.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우리 보기에는 지금 하늘 소리가 들립니까? 안 들리죠. 안 들리는데 안에 내용이 있다는 거예요. 그 내용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있다는 겁니다. 땅도 마찬가지고.
성경 창세기 4장을 보면서 흠칫하고 우리가 잠시 주춤하면서 놀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죠. 죽이고 난 뒤에 창세기 4장 10절에 보면 “가라사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 대목보고 움찟하지 않습니까? 내가 땅에 아무 소리 안했는데 그냥 동생을 죽였을 뿐이에요.
그런데 목격자가 있다는 거예요. 어디 cctv를 깔아놨어요? 땅 자체가 목격자라는 겁니다. 목격자인데 이 목격자가 고자질을 잘해요. 하늘의 하나님한테 땅이 “내가 억울한 피를 받았습니다.” 하고 고자질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한테 고자질을 하고 있는 겁니다. 아이고 무서워서 어디 살겠습니까. 조용히 하는 어떤 짓도 땅이 다 알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 시편 19편 2절에 보면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라 하는 것은 지식을 전하는 매개, 용도에요. 지식을 전하고 말을 하고. 날은 날에게 뭘 한다고 되어 있어요? 말하죠, 말. 소리 아닙니까. 말. 분명히 언어도 없고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절에 보면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만 왕따 당한 거예요, 결국 인간만. 하나님 앞에 범죄 해서 왕따 당한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보고 선악과 따먹으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뱀이 이야기하죠. 그런데 지금은 뱀이 하는 이야기를 우리가 못 알아들어요. 알아듣지를 못합니다. 분명히 여자는 뱀한테 소리를 들었다고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특별한 사람에게 인간이 쓰는 언어처럼 들리게 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인간이 쓰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얼마나 하나님이 낮아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사무엘상에서 어린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누구 목소리로 사무엘을 부르는 줄 알아요? 엘리 제사장 목소리로 사무엘을 불러요.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과 동거하며 한 집에 살죠. 잠자고 있다가 “사무엘아 사무엘아” 할 때 누구 음성으로 분명하게 들렸습니까? 엘리 제사장 음성으로 분명히 들은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이 낮아지고 낮아져서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이 그 당시 쓰는 아람말로 해서 제자들과 그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이야기해줬어요. 물론 못 알아들어요. 물론 못 알아듣습니다. 사도행전 28장에 사도바울은 헬라어로 또는 히브리어로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분명히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28장 끝에 보면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제는 소리가 없어서 못 듣는 게 아니고 소리가 있어서 시끄럽게 이야기를 해도 마음이 완악하게 되면 마음이 강퍅하게 되면 마음속에 악령이 들어있으면 이 복음의 소리가 안 들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 문을 열어주는 게 제일 먼저 하시는 일이었습니다. 마음 문을 열어 주는 것. 마음 문을 열어서, 사람들 지껄이는 것 말고, 뉴스 아나운서 이야기 말고요, 정치꾼들 이야기 말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된 말.
그것은 오늘날 성경 말씀을 보면서 우리의 마음 문이 열렸으니까 성령께서 친히 쓰신 이 성경 내용을 우리 마음속에 성령이 계시니까 성령이 이야기하는 것을 성령의 말로서 우리에게 들려지게 하는 거예요. 이 말씀에 대해서 전혀 거부감 없이 믿어지게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이게 바로 옛날 우리가 몰랐던 하늘의 소리이고 땅의 소리였습니다. 침묵의 소리. The Sound of Silence라는 거 있죠. 침묵의 소리. 우리는 이제 거기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비록 세상 사람들은 못 알아들어도 그 말을 알아듣는 사람끼리 천국의 같은 가족이고 백성입니다. 죽고 난 뒤에 천국까지 살아야 가족이지 뭐 같은 식구라도 못 알아들으면 무슨 가족이겠어요. 죽으면 헤어질 사람은 가족이 아니고 영원한 가족,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