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6:12-14 / 율법의 자리

정인순 2021. 1. 27. 21:56

음성 동영상

율법의 자리

 

이근호
2021년 1월 27일

 

본문 말씀: 아모스 6:12-14

(6:12)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서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정의를 쓸개로 바꾸며 공의의 열매를 쓴 쑥으로 바꾸며

(6:13)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뿔들을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도다

(6:14)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그들이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을 다꾸치시는 이유는, 여전히 이스라엘에게 관심이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자신을 위한 일을 해서는 아니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하나님의 이러한 취지에 대해서 오류를 낳았습니다.

그 오류라는 것이 다름 아닌 ‘율법’이 요구하는 것과 전혀 다른 것, 즉 ‘내것 챙기기’입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에 주어졌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의 근원적인 악마성과 죄악성이 노골적으로 들추어진 것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인간은 이미 악마와 결탁이 되어있어서 모든 생각과 행동이 ‘내 것 챙기기’가 최종적인 모습입니다.

창세기 3:15에서 악마는 창조주의 발꿈치을 묻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피조물 주제에 감히 창조주를 물어뜯는 것을 통해서 악마성 본연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내 것 건드리면 그 누구라도 가만 있지 않는다’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정말 무식해”라고 말입니다.

다 거짓말입니다. 어린아이부터 늙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아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 것과 너의 것 구별짓기’입니다. 본능적으로 자기 것에 집착합니다. 공부 많이하고 적게 하고도 상관없습니다. 율법을 많이 알고 적게 알고도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내가 알고 또 알고자 하는 것은 ‘내 것이 되는 법’입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들의 본성에 율법이 주어지지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가지고 각자 자기 것 많이 챙기는 식으로 활용되어 버린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율법의 용도가 잘못 알았다’입니다. 율법은 내 것 챙기는 그 심보를 합리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뜻을 보다 정확하게 알아서 나를 천국에다 올려보내야겠다’는 것은 율법을 잘못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나 챙기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동원해서 결국 견고하고 절대적이고 오래가는 ‘나만의 자리’를 마련코자 합니다.

모든 인간의 의식이나 행위는 ‘나의 것 확보하기를 위해 필요한 방법과 지식’을 노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정작 율법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시는 하나님 자리’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16-17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17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말씀은 인간이 선악과 따먹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아니 하신 말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왜 전에 말씀하신 않으신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의미를 스스로 완수하시는데 있어 인간들에게 새로운 사태가 일어나게끔 하신 겁니다. 즉 인간들은 율법 완성에 있어 하나님에 의해서 참여되게 된 겁니다.

인간들은 이미 악마의 사주를 받고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모두 ‘나의 것 챙기는 식’을 고수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악마적 성향을 하나님께서 도리어 이용하시면서 하나님 고유의 자리를 율법을 통해서 완성시켜 나가십니다. 율법 안의 들어온 백성들은 율법에 의해서 골고루 적절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제대로된 취지, 곧 ‘하나님의 자기 자리 마련’이라는 취지를 알지 못하고 율법을 통해서 인간들은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자’ 했습니다. 이스라엘 내에서 공정한 율법이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 법적으로 이해도가 낮은 것들을 소위 법을 알고 지식이 있다는 자들이 강탈하는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이야기, 즉 왕인 아합왕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서 왕권으로 빼앗는 것도 율법 위배의 일례가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 것을 확대시키는데 몰두하는 인간들은 율법이 되었든 어떤 지혜가 되었든 그 해석에 있어, 어떻게 하든지 자기 것을 늘이는 쪽으로 판결을 내리게 됩니다.

반면에 율법은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이 도리어 반대입니다. 레위기 25:23-27에 보면, “토지를 영영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라 너희는 나그네요 우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율법은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 제공된 겁니다. 이 원리는 평소에 인간들이 ‘내 것 챙기기’와 대결하게 됩니다. 서로의 자긍심(뿔)을 놓고서 충돌합니다. 자기 것을 희생하고서도 ‘하나님의 것’을 지켜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 정신이 바로 ‘구원자 정신’입니다.

죄값을 치를 능력이 없는 죄인을 대신하여 자신의 의를 내어놓으신 분이 구원자의 기능을 하시는 분이 구세주이십니다. 이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대접하는 것’입니다.(마 7:12) 곧 희생으로 나타난 사랑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항상 ‘내 것으로 챙긴 것은 마땅한 옳다’는 정신으로서 율법을 이용하려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설명하시면서 포도원에 들어온 일꾼들의 불만을 거론하십니다. “왜 더 많은 시간을 일했건만 동일한 품삯을 주시는가? 그것은 불합리하고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항변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마 20:15)

인간은 자신을 선하게 봅니다. 이것을 지적하시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겁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정의로움을 아는 자들은, 하나님의 율법 이야기가 이제는 자신 속에 들어왔음을 알고, 율법 따라 학대할지라도 도리어 그 학대마저 감사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근원적으로 자신에게 문제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22강-암 6장 12-14절(율법의 자리)21012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6장 12-14절까지입니다.

아모스 6:12-14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그런데 너희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인진으로 변하며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는 자로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 족속아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 믿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다른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면 율법을 알아야 되는데 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진짜 여호와를 아는지 진짜 모르고 있는지를 가늠하시는 겁니다. 측정하시는 겁니다.

측정하시는 방법이, 어떻게 보면 좀 비꼬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고 있습니다. 12절에 보면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말들이 바위 위에서 달릴 수도 있겠지요. 달릴 수도 있는데 굳이 말들이 바위 위에서 달릴 이유가 없습니다. 말들이 알아서 등산갈 일 있습니까? 아니거든요. 그 다음에 또 소가 나온다고요. “소가 어찌 거기 밭 갈겠느냐”

하나님께서 말과 소를 언급하시는 이유가요, 소와 말 특징이 뭐냐? 다 주인들이 있어요. 소는 소 맘대로 못하고 말은 말 맘대로 못해요. 주인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는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 하나님의 말들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율법이 시행되게 되면 율법을 제대로 시행했을 때 이 땅에 열매 같은 것, 결과 같은 것이 제대로 나타나야 되는데 그 결과가 하나님이 의도한 것과는 다른 게 나오는 겁니다.

12절에 “공법……”, 율법이지요, “공법을 쓸개로 변하며 정의의 열매를……” 율법에 의해서 법의 정의로움이, 열매가 원래 있어야 되는데 여기서 인진(茵蔯), 인진이라는 말은 쓴, 아주 쓰디쓴 풀을 인진이라 합니다, “인진으로 변하며……” 그 다음에 더 나아가서 13절에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 백성, 이 땅에서 유일하게 택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었는데 그들이 되게 좋아하거든요. 율법에 의해서 열매를 맺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에서 인정하지도 않은 헛된 것, 율법에서 이야기하는 “이것도 헛된 거야. 저것도 헛된 거야, 헛된 거야.” 이렇게 율법에서 이미 헛된 것이라고 규정을 했던 그것들을 가지고 굉장히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그들은 율법을 전혀 모른다는 이야기가 되고, 율법을 모른다는 말은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분인지, 하나님의 뜻이 뭔지 전혀 그들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너희들은 나를 몰라. 몰라도 너무 몰라. 율법도 몰라. 아무것도 몰라. 그러나 너희가 네 하나님을 아는 방법을 내가 너희에게 기어이 알려주겠다.”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14절 끝에 보면 “내가 한 나라를 일으켜 너희를 치리니……” 여기서 한 나라는 앗수르라 하는 아주 큰 나라, 싸움해도 잽도 안 되는, 엄청난 무기를 가진 큰 나라, 저돌적으로 쳐들어오지요. 그렇게 쳐들어오는데 그 나라가 어디서 어디까지 짓밟느냐 하면, “저희가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하맛은 당시 아람나라가 있던 곳이지요. 지금의 시리아 저 북쪽까지 그리고 아라바 시내라는 것은 사해바다까지를 이야기하는데 사실은 홍해까지 더 내려가요. “……아라바 시내까지 너희를 학대하리라.” 여기 학대라는 말이 나옵니다. 학대라는 말은 뭐냐? 나의 이야기가, 하나님 나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너의 이야기가 되게 해줄게, 라고 하는 겁니다. 나의 이야기가 너의 이야기가 되게 해줄게.

예를 들면 어떤 예닐곱 살 먹은 여자 애가 있다 칩시다. 그 애는 정치 돌아가는 것도 모르고 대선이니 코로나니 모르고 그냥 인형하고 소꿉놀이 노는 애에요. 그런데 이상하게 여섯 살 애 입장에서는 부모가 이사를 자주 하는 느낌이 들어요. 여섯 살 먹은 애가 뭘 알겠어요? 이사 가서 어디로 가든 자기는 인형만 챙기면 그만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나중에 아빠 엄마가 다 돌아가셨다 합시다. 아빠는 사업하다 망해서 죽고 엄마도 덩달아 화병에 죽고 애만 덜렁 남았다는 말이지요. 덜렁 혼자 남은 그 여섯 살 먹은 애가 나중에 열 살쯤 되었는데 채권자들이 와서 열 살 먹은 애보고 “너희 부모가 사업하다 실패해서 빚이 한 16억이 있는데 열 살 애야, 네가 갚아라.” 이렇게 나온 거예요. “네가 갚아라!”

그러면 열 살 먹은 애가 “아저씨는 뭔데 나를 학대하십니까?” 해서 여기에 학대가 나오지요. “이거 너희 아버지 사업 이야기가 아니고 이게 네 이야기야, 네 이야기! 너의 이야기라고! 아버지가 망한 것 네가 빚 갚아라. 네가 상속녀니까 네가 갚아야 해.”

그런데 소꿉놀이나 하고 있는데 언제 16억을 다 갚아요? 암담하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자기 자신이 하나님이 누구신가, 율법이 무엇인가 알려주는 방법은 학대하는 것 외에는 없습니다. “네가 내 뜻에 의해서 이웃나라에게 포로 잡혀가는 학대를 받더라도 너는 그걸 순응하고 고마워하고 감사해야 된다.”

그 학대를 통해서 ‘내가 전에 알던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었었구나.’ 진짜 하나님은 바로 율법대로, 율법을 제대로 모른다고 해서 율법에 근거해서, 율법에 준해서, 율법에 따라서 실제로 현실적으로 우리를 삶의 억압을 주고 학대를 한다는 자체가 이것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이 아니고 뭐냐 하는 거예요.

룻기에 보면 나오지요. 룻이 시집을 갔는데 시집 간지 얼마 안 되어서 시아버지 죽고, 자기 아주버님 죽고, 자기 남편 죽고, 그 집 남자 셋 여자 셋 총 여섯 명인데 남자 셋이 씨 마르듯이 다 죽어버렸습니다. 어지간하면 ‘아, 이 집안 무서운 집안이네. 내가 더 발 들여놓았다가는 내 팔자 사납겠다.’ 하고 훌쩍 떠나버릴 텐데 룻은 ‘이거야 말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본뜻이 아니냐.’

세상에, 하나님을 만나는 것, 내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았다는 것, 그렇다면 내게 미진한 것이 뭐가 남아 있고, 내가 걱정하고 고민할 일이 뭐가 남아 있느냐 그 말이지요.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을 알아버렸는데, 해를 만드신 그분을 알았고 달을 만드신 그분을 알았는데, 나를 만드신 분을 알았는데 뭐가 내가 아직도 고민거리가 남아 있는가.

룻은 여지없이 “어머님을 작살내는 하나님을 나는 찬양합니다. 어머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고 어머님의 백성에 나도 넣어주세요. 저도 한 백성 되겠습니다. 저는 어머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어머님의 하나님께서 아들 둘과 남편을 다 죽였다면 어머니 가시는 곳에 하나님 뜻도 계속해서 연발, 연발, 된다는 말이지요.

연발이라는 말은 연발총 그 연발, 따따따따……, 연발, 계속 해서 이어지면서 하나님의 뜻이 주어질 건데 그 신비롭고 고귀한 그 체험을, 내가 그걸 마다하면서 내 인생 살아봤자 무슨 소용 있느냐,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의 현장을, 내가 왜 굳이 그것을 놓칠 이유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없지요. 나오미 가정이 아주 엉망이 될 때 룻은 그걸 반겼습니다.

하나님의 등장은 저러해야 마땅하다는 것,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원래 알았어야 돼요. 율법에 의해서 모세가 계시 받아 적었던 창세기 3장에 이미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라는 것이 나오잖아요. 3장 17-19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라고 되어 있지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여야 합니까? “야호! 하나님이 죽이시는구나.” 하나님이 죽이심으로서, 그것도 고생 직사하게 시키면서, 죽이시면서 하나님이 자기 뜻을 고스란히 드러낸다는 것,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포착했다는 것, 이것이 얼마나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최고의 선물입니까? 너무나 고귀한 거잖아요. 야호~, 우후~! 심봤다~! 목욕하다가도 뛰어 나와야 돼요. 진리를 알았으니까.

이 창세기 3장 17절에 보게 되면, 율법이 뭐냐 와 관련된 내용도 나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이야기할 때 분명히 이렇게 했어요. 16, 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잘 보세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3장 17절에서는 죽으리라, 만 이야기한 것이 아니에요. 내용이 더 확대되어 있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오지 말고 2장에 있는 대로 “……너는 정녕 죽으리라. 끝.” 이렇게 끝나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왜 이 이야기가 이제야 나옵니까? 창세기 2장 17에서는 아무 소리 안하고 “정녕 죽으리라” 단지 그 이야기만 하시다가 막상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는 추가적인 내용들이 계속 나오는 거예요. 뭐 보험계약도 아니고. “처음에는 이거 하면 얼마 타게 됩니다.” 해놓고는 나중에 약관 보면 글자도 제대로 안보여요. 약관도 왜 그리 내용이 많은지요?

진즉 자세한 이야기 미리 해주지 미리 해주지도 않고 죽으리라, 해놓고 그 내용을 아코디언 펼치듯이 좍 펼쳐보니까 죽을 때 곱게 죽는 게 아니고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또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하면서 마지막에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 때서야 죽는다는 이야기가 나와요. 나중에 앞에 2장에서 나온 죽는다는 이야기는 뭡니까? 3장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는 또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무슨 숨어 있는 약관 같아요. 하나님이 이런 이야기는 한 적이 없어요. 따먹었으니까 주께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율법자체가 이것이 하나님의 자기이야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자기 이야기인데 하나님이 자기 이야기를 어떻게 펼치느냐 하면, 자신이 만든 피조물인 인간을 통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 어떤 역사, 어떤 시간의 흐름 그 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들의 몸부림과 그러한 괴로움 이런 것들 속에서 율법이 내장되어 있고 담겨 있는 그것이 점점 더 세밀해지는 겁니다. 상세하게 드러나는 거예요.

그리고 인간들은 그 상세함을 위한 말려든 사람들입니다. 인간을 위한 율법이라는 것은 애당초 없었습니다. 율법을 위한 인간, 그 말은 맞습니다. 구체적으로 율법은 하나님의 자기자리 만들기, 하나님의 자리에요. 처음에는, 따먹기 전에는 몰랐지요. 선악과 따먹으면 그날 죽는지 알았지요. 오후 세시에 따먹으면 오후 세시 반쯤에 갑자기 헉, 숨이 막힌다, 해서 그냥 돌아갈 줄 알았지요. 아담이 그렇게 오래 살줄도 몰랐지요.

아담이 선악과 따먹고 돌아가시기까지 930년입니다. 물론 선악과 따먹을 때가 몇 살인지 그건 안 나와 있지만 어쨌든 930년이란 끈질긴 인생 살면서 죽으리라, 하는 그 단어, 개념이 함유하고 있는, 품고 있는 그 뜻을 아담의 역사를 통해서, 하와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풀어내는 거예요. 그렇다면 율법의 내용 “선악과 따먹지 말라”도 포함된 내용이지요, 왜 율법의 내용이 이렇게 저주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가?

그것은 율법 따먹으라고 부추긴 어떤 배후세력이 있었습니다. 그 배후세력의 성깔, 성질, 본질, 의도하는바 그걸 그대로 하나님께서 노출시키려 하는 거예요. 뱀이 하는 짓은 뭐냐? 피조물이면서도 창조주의 발꿈치를 뜯어먹었지요. 창세기 3장 15절에 피조물이면서도 자기를 지으신, 만들어주신 창조주의 발꿈치를 뜯어먹은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 했는가, 왜 뜯어먹었느냐? 하나님이든 예수든 누구든 간에 내 것 건드리면 나는 가만두지 않는다. 악마가 들어 있는 인간의 본 모습이 그거예요. 여러분이 불신자까지 찾을 필요 없어요. 교회 교인들, 교회 장로, 그리고 목사하고 대화를 해보세요. 대화 가운데 가만 들어보세요. 내 것 건드리면 콱 물어버린다는 것. 모든 전화내용이라든지 다 그거예요.

“페인트칠 하는데 50만원인데 40만원으로 해드리면 어떻습니까?” 이렇게 좋게 이야기하면 안 물어요. 그런데 딴 소리 하게 되면 꽉 물고 싶어. 말은 그냥 비슷한데 기분 나쁘게 하는 경우요. 이게 인간 속에 괴물 들어서 그래요. 내 것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그 악마를 무엇을 통해서 끄집어내는가? 율법을 통해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러면 율법을 통해서 끄집어낼 때 인간은 자기위주로부터 시작한다, 그게 전제가 되는데 나부터 시작한다고 할 때 쉽게 말해서 어떤 사람은 말하지요. 무슨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들어요. 불신자한테서도 듣고 교인들한테서도 많이 듣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집사님, 복음이 뭡니까?”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되게 겸손한 것 같아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데 불신자도 마찬가지고요, 절에 다니는 사람도 “나는 무식해서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거든요. 서울법대 나와도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고 수능 그만큼을 어떻게 맞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데 사람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진짜 어린애부터 나이 많은 어른까지 딱 아는 게 있어요. 뭐냐? 내 것과 네 것을 알아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내 것이고, 여기서 여기까지는 네 것이고.

아무것도 모르는 요양병원의 무식한 할머니도 “내 기저귀 네가 가져갔지? 내 손자가 가져온 요구르트 네가 먹었지?” 이게 요양병원의 풍경입니다. “너는 왜 내 침대에 앉았느냐?” 내 것을 인식하는 이 놀라운 능력, 인간이 아는 것은 내 것으로부터 내 것으로 마감돼요. 끝나요. 모든 인간의 말은요, 항상 내 것이 되는 사용법에 관한 이야기를 인간들은 지식으로 확보하고 있습니다.

“QR코드 어떻게 심어요?” 그거 왜 심는데? 이거 심으면 내 것이 되기 때문에. 모든 것은 내 것이에요. 뭘 겸손한 체 하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요? 인간은 내 것 만들 때 어떻게 하느냐? 카운트 합니다. 수는 두 종류가 있어요. 서수가 있고 기수가 있는데 서수는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이렇게 순서로 하는 것은 서수라 하고, 기수라 하는 것은 귤이 하나 있네, 둘 있네, 셋 있네, 이렇게 카운트 하는 거예요.

카운트 하는 것이니까 인간이 수학을 한다는 것은 이것은 내 것, 이것은 내 것, 수학을 배우지 않더라도 카운트, 헤아림은 내 것으로 사는 인간들이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필수적입니다.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학교도 안 들어간 어린애도 자기 것은 알아요. 본능적이라. 자기 것은 알아요. 카운트 하는 것, 헤아리는 것.

그래서 인간이 자기성공을 위할 때는 카운트를 해요. 내 땅이 몇 평이고 내 상속이 어떻게 되더라. 모든 것이 카운트에요. 인간의 말과 모든 행동 속에 카운트 한다, 헤아린다는 것을 기조로 깔고 있습니다. 모든 물리학도 수학이 기본이지요. 수학의 기본은 뭐냐? 카운트 하는 겁니다. 왜 카운트 하느냐? 수학을 연구하면서 남의 것이 또는 자연의 것이 우리 인간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내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지혜를 사용하는 겁니다.

카운트를 제대로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것이 부모의 자식에 대한 바른 교육처럼 나오는데 그런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한 석봉 이야기입니다. “불을 꺼라. 너는 글씨 쓰고 나는 떡을 썰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도 떡을 반듯하게 썰 듯이 너도 불 끄고 반듯하게 글씨를 쓰라는 거지요. 요새 같으면 눈에 안대하고 글씨를 쓰는 거지요.

왜 엄마가 석봉에게 그렇게 하느냐? 글씨 잘 쓰면 다 네 것 된다는 거예요. 이 떡을 잘 썰어서 내 것 되었듯이 너도 네 것 되니까 네가 한평생 이 땅에 살면서 알아야 될 것은 뭐냐? 내 것 만드는 방법 이것만 있으면 너는 밥 먹고 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에게 율법을 준 것은, 십계명을 준 것은 이 십계명을 잘 알아서 이 십계명에 있는 복을 내 것 만들면 나는 구원도 받고, 하나님의 천국백성이 되고, 이 땅 복도 받으니 이것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냐, 라고 율법을 이해한 거예요. 오늘날 한국교회처럼 말입니다. 평소에 마귀 들린 심보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성경 모든 것을 내 것 만들기 위해서 카운트 하듯이, 헤아림 하듯이 보는 거예요.

그렇게 율법을 적용하다 보니까 북 이스라엘의 계층이 발생되거든요. 자본주의는 어디에도 있어요. 아는 사람들은 돈 버는 구석, 내 것 만드는 것에 대해서 발달하고 모르는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 내 것 만드는 것을 알기는 아는데 어설퍼, 세상 흐름을 간파를 못하니까 지금 어디에 투자해야 될지도 모르고, 이미 한물간 아이템, 컨셉 가지고 가게 문 열고 하다 보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해서 장사도 안 되고 가게 문 닫고 하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아는 것이 없어서 그래요. 그런데 아는 사람, 그냥 아는 것은 소용없지요. 퀴즈대회 나가는 것도 아니고요. 퀴즈대회 나가서 얼마나 법니까? 안다는 것은 내 것 만드는 것, 심지어 남의 것이라도 내 것으로 만드는 것, 그것 잘 아는 거예요. 노골적으로 해서 어디에 아파트를 사 놓으면 차익이 많다, 그것 아는 거예요. 지금 정부에서 어느 쪽에 개발한다는 그걸 정부의 권력자들은 먼저 아니까, 사모펀드도 그렇고 지금 어디에 투자하면 은행이자보다 많이 번다는 그걸 아는 것.

그것을 촌에 있는 강원도 할머니가 알겠어요? 사모펀드가 뭔지 그걸 알겠어요? 모르지요. “할머니한테 돈 줄 테니 땅 파세요.” 하면 좋다고 하지요. 땅 팔아놓고 보니 열배 백배로 다시 팔아먹었다는 소식이 그 할머니 귀에 들어가 보세요. “있는 자들이 더 심하구나.” 하지요. 있는 자들이라고 하지 말고 내 것 만드는 걸 아는 자라고 이야기하세요. 고상하게 내 것 만드는 방법을 아는 자.

율법을 가지고 정당화해서 격차를 벌리는 거예요. 동일하게 약속의 땅에서 만든 그 생산물을 두고서 율법에 무식한 자, 그걸 통치이념이라 하는데 율법에 의한 통치이념을 모르는 사람들은 가진 것도 다 빼앗기고 율법을 빙자해서 앞장세워서 얻고자 하는 사람은 율법을 이용해서 부자 된 거예요. 원래 율법은 그런 것이 아닌데. 율법은 그런 것이 아니거든요.

레위기 25장24 -27절에 보면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찌니 만일 너희 형제가 가난하여 그 기업 얼마를 팔았으면 그 근족이 와서 동족의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요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거든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그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런 복잡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게 뭐냐 하면, 내 것 만드는 재주나 그런 머리 쓰는 것, 원래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땅에서 난 소산물로 그걸로 자족하고 살아야 될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상속한 그 땅이 탐이 나니까 그걸 뺏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이용해서 뺏어오는 거예요.

내가 누구한테 들은 이야기거든요. 들은 이야기니 생소하더라도 좀 참으세요. 어떤 형제가 있는데 그 부모가 땅을 남겼어요. 형은 기분 좋다고 희희낙락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있는데 동생한테 준 땅 값이 더 올라버렸어요. 그 때 “나는 형이잖아” 해서 달려들어서 뺏는다면 이게 뭐냐 하면, 모든 사고방식이 상대적으로 더 좋아보니까 그 때부터는 어떻게 빼앗을 수 있는가에 신경 쓰면서 살아가는 거예요. 인간들이 그런 인간들이다.

그러면 율법의 정신은 뭐냐? “너 아는 친척이나 가족 중에서 억울하게 빼앗겼거든 네가 돈 주고 희생해서 도로 그 사람에게 물어주고 도로 찾아오너라.” 이게 율법정신이에요. 이걸 가지고 구원자라고 합니다. 구원자라는 것은, 율법이 이 지상에 도달했을 때 인간들의 모든 의식은 카운트, 내 것 만드는 것 밖에 모르는 악마의 사회, 지옥 같은 세상이 된 거예요.

그러면 그 율법이 여기에 주어졌을 때 이스라엘 너희들만큼은 율법을 받았으니까 내 것만 아는 이런 삭막한, 그리고 내 것만 알아서 부자 되면 그것이 복이라고 여기는, 여호와로부터 복 받았다고 여기는 그런 세상에서 율법의 정신은, 네 것을 내놓아서, 억울하게 당한 사람을 대신 갚아줘서 원래 하나님이 각자 주신 것으로 되돌려주는 그 일을 하라고 율법을 준 겁니다.

이야기 들어보면 ‘아, 이 율법이라 하는 것은 결국은 나만 손해잖아요. 같은 동족이라는 이름 하에 남에게 억울한 짓을 해서 땅 빼앗은 그 사람한테 돌려주게 해야지 내가 그 사람에게 억울한 짓 하지도 않았는데 제 3자의 입장인 내가 왜 대신 갚아줘서 땅을 도로 찾게 하느냐? 이렇게 되면 결국 나만 손해 아니냐?’라는 생각이 들 거라는 말이지요. 당연하지요

그런데 이 율법이라는 것이 카운트를 할 때 하나님이 자기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가지고 자기 카운트, 자기백성을 헤아려서 데려오는 거예요. 하나님의 백성을.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면 하나님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어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 자신이 율법을 이 땅에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그것은 아까 구원자라고 했지요. 대신 죄 짐을 대신 지시는 분으로 오신 분이 바로 율법의 주인공인 하나님 당사자가 율법대로 시행했던 그 결과가 그겁니다. 죄인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자기가 그 희생을 담당하는 거예요. 이 이야기가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제는 예수님의 이야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이야기로 연결될 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말하는 천국의 백성이에요. 그게 바로 공법이라는겁니다. 그게 바로 율법의 완성한 것이라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내가 율법줄 때 나라꼴이 이렇게 건방지고 교만하게 되는 법은 없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아모스 6장 12절에 “말들이 어찌 바위 위에서 달리겠으며……” 말은 쓰이는 용도가 있는데 바위 위, 아무것도 없는 바위위에서 말이 달릴 필요가 없고요. 또 소도 거기서 밭갈 이유가 없다. 다시 말해서 너희는 율법의 용도를 헛되이 잘못 쓰고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을 지켰는데 그 결과가 뭐냐 하면,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된 것에다 그들은 율법 이야기 언급하면서 다 쏟아 붓는 겁니다.

로마서 2장 19-21절에 보게 되면 “네가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규모를 가진 자로서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이요 어리석은 자의 훈도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율법이라는 것은 뭘 들춰내느냐 하면, 나라는 존재는 어떤 율법을 동원하든 하나님을 동원하든 예수님을 동원하든 항상 내 것 챙기는데 급급한 그런 존재가 나입니다, 라는 것을 폭로당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아까 창세기 3장 17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이미 아담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서 고생 실컷 하고 결국 허무하게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라고 자기가 받아들여야 돼요. 이것은 나의 소멸이에요.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자기가 소멸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꾸 소멸 안 될 것으로 여기고 내 것을 채우는데 모든 역량을 다 소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마태복음 20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네가 선하지도 않은데 선한 척 하면서 도리어 제대로 하나님과 말씀과 공의를 펼치는 나를 두고 악하다고 네가 지적질하느냐. 이런 말씀을 하거든요.

이 말씀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은 자기가 율법을 받으면서 자기가 선하다고, 착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마음가짐으로 모든 인간은 율법을 생각해요. 그런데 예수님이 딱 등장하니까 그렇게 자기가 선하다고 여기는 그 자기의 선함, 선함 자체도 나만 선하면 되잖아, 라는 자기 챙기는 주의로 율법을 잘못 썼다는 것이 들통 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나만 천당 가면 되잖아, 라는 식으로 잘못 쓰인 거예요. 악마와 결탁된 아담, 인간의 본성이 원래 그래서 그래요. 아무리 좋은 것이 와도 내 것 만들기에 급급한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20장에서 천국은 이와 같다고 해서 인간들이 소위 선하다는 인간들에서 나올 수 있는 그 논리……, 그 논리가 뭐겠어요?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면 나는 천국은 내 것으로 챙길 수 있다. 그게 그들의 논리지요. 하나님의 바른 뜻이 나를 바르게 천국가게 한다. 그게 천국인 거예요. 그렇게 하는 사람들을 주께서는 전부 뒤엎어 버려요. 굉장히 불합리하게 만들어버려요.

그게 바로 포도원의 농부 뽑는 겁니다. 많이 노동한 자가 많은 품삯을 받는 것이 선한 인간들 세계에서 통용되는 그 기본적인 사고방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니까 소위 율법을 아는 자들이 율법을 많이 알기 때문에 많이 가져야 된다는, 그러한 소위 지식을 아는 자들이 그런 식으로 적용시키니까 사회가, 하나님의 주신 상속분들이 엉망진창이 되고 있는 자에게 많이 가고 없는 사람은 농토고 뭐고 다 팔아먹게 되는 그러한 일들이 벌어진 거예요.

자기가 선하다고 여긴 겁니다. 나는 어느 정도 선하냐 하면, 하나님께서는 죄를 창조하지 않는다, 라고 알 정도로 나는 선하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죄를 창조할 리가 없다는 거예요. 이사야 45장에 보면 하나님은 빛도 창조했어요. 피조물도 창조하고 악마도 창조했어요. 7절에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가 선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설마 악마를 만든 적이 없겠지, 악마나 죄짓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허락한 적이 없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본인이 본인 선한 것만 자꾸 챙기니까 자꾸 그런 오류를 범하는 거예요. 그래서 포도원 비유에서 주님께서는 제일 마지막에 온 사람부터 일꾼들 죽 세워놓고 품삯을 줍니다.

마태복음 20장 8절에 “저물매 포도원 주인이 청지기에게 이르되 품군들을 불러 나중 온 자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온 자까지 삯을 주라 하니.” 품삯을 줄 때 제일 일 많이 한 사람 품삯 주고 “집에 가” “쟤는 얼마 주는데요?” “알 필요 없어. 너는 네 것만 가지고 집에 가.” 이런 식으로가 아니고 보란 듯이 이렇게 합니다.

퇴근 시간이 여섯시거든요. 다섯 시에 온 일꾼이 있었어요. 달랑 한 시간만 일했지요. 한 시간 일 해놓고 하루 품삯 다 받았어요. 그 당시 남자 하루 일당이 십만 원이라 봅시다. 한 시간 일했는데 십만 원 딱 주니까 제일 먼저 온 그 노동자가 입이 벌어졌어요. 카운트 한 거예요. 카운트, 헤아린 거예요.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지요.

‘가만 있자. 내가 9시간 일한거지. 저 사람이 십 만원? 그렇다면 나는 9십만 원, 휴~, 주여, 감사합니다.’ 이러고 있다는 말이지요. 요즘 같으면 ‘전도 한 사람 했는데 천국을 가? 나는 그러면 우리교회 교인 전도한 12명 했으니까 와, 나는 천국가도 열두 배로 상급이 많겠지.’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왜? 자기 챙기는 게 기본이거든요. 기본자세가 자기 챙기는 것 그게 끝이에요. 내가 중요하니까 내가. 자기가 소멸되어야 될 대상인지 모르고 자기는 주님 앞에 언제든지 “나 여기 있습니다.” 할 자격이 있는 줄로 알고 있어요. 제일 늦게 온 사람에게 먼저 품삯을 줬거든요. 다른 사람들이 다 봤어요. 얼굴이 싱글벙글해요.

그 다음으로 늦게 온 사람에게 또 십만 원을 딱 주니까 오후 세시에 온 사람의 인상이 확 달라졌어요. 오후 열두 시에 온 사람에게 또 십만 원 주니까 인상이 또 확 달라졌고, 아침 일찍 온 사람이 또 십만 원 받으니까 확 또 달라졌어요. “이렇게 노동의 양이 다른데 왜 품삯이 차이가 나지 않고 동일합니까?” 주인이 하시는 말씀이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왜?”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네가 왜? 내 것 가지고 내가 맘대로 하는 이게 바로 선이고 이게 율법의 자리고 율법의 정신이에요. “너희들은 율법가지고 네 것 챙겼지. 나 하나님은 율법 가지고 내 것 챙긴다. 왜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는데?” 하나님은 율법 가지고 자기자리 챙기는 거예요. 율법을 통해서 예수님을 주로 만드는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인간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걸 누군가 이야기했는데, 유명한 그 사람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해? 네가 메시아를 알아?” 교회를 알아요? 네 것 챙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면서요. 이스라엘 사람이나 오늘날 교인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 아모스에 희망이 있어요. 뭐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네 것 다 빼앗아 버릴게.” 그 때 성도는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주님, 내 것 챙기는 나 없애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것 챙기는 나, 내 것 챙기는 이 성질은 나도 감당 못했는데 주께서 이 감당 못한 나를 주님의 하신 일의 이야기가 이 안에서 그대로 적용되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은 나는 내 것 챙기고 주님은 내 것 챙긴 것 빼앗고, 죽이 잘 맞아서 감사합니다.”

나는 무조건 챙기고, 챙긴 그것을 주님께서 무조건 빼앗아 버리고. “네 건 없어도 돼. 내 것만 있으면 돼.”라고 해주시는 그 살아계신 하나님의 일, 이거 땡 잡은 겁니다. 이거 횡재한 거예요. 진짜 하나님이십니다. 나는 나대로 나만 챙기는 그 더러운 것을 그대로 알고, 주님은 그것과 반대에서 그런 나 같은 인간을 그냥 두지 아니하시고 주님의 십자가 이야기를, 그 희생 이야기를 내 안에 들어오게 하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따라서 이 성경말씀은 항상 율법 안이냐, 율법 밖이냐가 중요합니다. 율법 안에 있어서 고생을 얼마나 해도 이 법 안에, 하나님의 약속 안에, 언약 안에 있으면 그것은 정말 천국 백성입니다. 따라서 예를 들면 “나는 결혼해서 아기를 낳았습니다.” 그걸 자랑할 것이 아니고 “나는 결혼해서 아기 낳았습니다.” 할 때 그게 율법 안에서 이루어졌나, 율법 밖에서 이루어졌나를 물어봐야 되지요.

그거 네 것 챙기기 위해서, 너 잘난 체 하기 위해서, 너 오늘 본문 아모스 6장 13절에 있듯이, “허무한 것을 기뻐하며 이르기를 우리의 뿔은 우리 힘으로 취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네 뿔을, 네 자긍심을 높이기 위해서 네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나, 아니면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나, 주님 높이기 위해서 결혼하고 애 낳았나, 그걸 물어봐야 되지요.

“나는 결혼도 안했고 혼자 삽니다.” “그래 잘했다.”가 아니라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사는 그것이 주님의 지시에 의해서 했나, 너 혼자 편하고 싶어서 ‘복음 모르는 남자하고는 나 결혼 안 할 거야.’ 그거 너 편하기 위해서 했나, 그게 중요한 거예요.

나 돈 많이 벌었어요, 할 때 그 돈 많이 번 것이 주님께서 그렇게 하셨나, 아니면 네가 돈 버는 것이 네 것 챙겼다는 네 보람 때문에 했나, 항상 그렇게 질문하고 그런 생각이 들어오는 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완성으로서, 십자가의 완성으로서 다 이루시고 용서받은 그 목소리, 바로 너는 내가 네 안에 내 자리를 만드는 하나의 용도로서 이 복음 안에 붙잡혀오고 하나님에게 참여된 바가 된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정말 주의 말씀대로 산 게 하나도 없음을 깨닫습니다. 타고난 아담의 본성처럼 나만 잘되면 되고, 나만 천국가면 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이 사고방식, 그러나 주께서 오셔서 이 못된 우리를 위해서 대신 희생하셨음을, 그게 율법의 완성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