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19:23-29 / 구속자
구속자
이근호
2021년 1월 24일
본문 말씀: 욥기 19:23-29
(19:23)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19:24) 철필과 납으로 영원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19:25) 내가 알기에는 나의 대속자가 살아 계시니 마침내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19:26)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19:27)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
(19:28)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까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19:29) 너희는 칼을 두려워 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장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당하는 그 모든 것을 기록으로 남겼으면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먼저 있고 그 기록된 말씀을 최대한도로 잘 지켜보기 위해 노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요구사항과 자신이 행위가 최대한으로 일치시킬 때, 자신은 하나님에게도 인정받는 자가 된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최고되시는 분이니 그분으로부터도 인정받는 것이라면 인간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얻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욥은 그 정도를 뛰어넘습니다. 자신이 아예 ‘기록’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기록’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겁니다. 이 말은, 내가 고난 받기 전에 하나님의 기록이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에 자신의 고난당하는 것이 기록되어진다면 이는 곧 이 기록된대로 믿지 않는 자는 심판이란 처벌을 피할 수 없다는 논리에 도달된다는 겁니다. 누가 봐서는 지금 욥은 대단한 자신감을 피력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장은 욥이 원해서가 아닙니다. 고난받는 자신이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고난을 내리시는 주님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이 중요한 하나님의 뜻을 어찌 기록으로 아니 남기겠습니까? 욥은 줄곧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자신이 죽고 난 뒤에 만나겠지만 그 안에 이유가 불명한 애매한 고난을 주시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하신 일이나 벌써부터 자신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맞다는 겁니다.
이렇듯 자신과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인정치 않는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일어나는 하나님의 일을 믿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다고 욥은 단정합니다. 욥의 이러한 이야기는 신약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을 닮았습니다. 요한복음 8:21,24에 보면,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욥과 욥의 친구 사이에 공통점을 주지 않으려는 것을 말입니다. 욥을 따로 분리시키십니다. 이럴 때 우리들은 자꾸만 욥 쪽으로 서려고 하지 마세요. 반대로 욥의 친구 쪽에서서 그들의 심정을 이해하려고 해야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욥의 주장을 그대로 듣고 있는 ‘욥의 친구’ 심정에서 욥의 주장을 다 들었다고 칩시다. 뭐라고 대꾸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반박할 것입니다. “욥아, 너의 그 주장은 너의 일방적 주장일 뿐입니다. 네가 죽어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을 미리 우리들에게 증명해다오. 그렇다면 네 말을 믿어줄게”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심판받는다는 것조차도 믿어줄 용의가 있다. 참으로 너의 주장이 실질적으로 사실 그대로 인 것을 우리에게 증명될 수 있다는 말이다”라고 나올 겁니다. 성경을 대하면서 우리는 자꾸만 우리 자신을 말씀에 반대편에 세우고 그곳으로부터 논리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힘으로 구원되는 것이 아님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와 있는대로 날름날름 다 받아먹고 “믿습니다. 아멘 믿습니다”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여분의 것으로 개입된 없는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나를 믿는 것’이 됩니다. 내 실력과 내 능력의 잠재력을 내가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과 인간 사이의 단절성이 없이 바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 사건에서 “다 이루었다”가 됩니다. 이 외침 속에는 ‘인간들이 하나님을 구박하는 본질이 있음이 제대로 다 드러났다’가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가 단절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따라서 이 단절성을 살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도 아니요 믿음도 아닙니다.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예상 못한 공간을 하나 만들어내십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안’ 혹은 ‘예수 안’입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욥 1:4) 이 ‘예수 안’이라는 공간은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시작해서 자체적으로 범주를 정해진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시작을 ‘예수님의 죽으심’이니 살아 있는 그 어떤 인간도 이런 공간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인간들이 상상하는 것은, “내가 살아있으니 살겠다”는 정신에 입각해서 만든 천국입니다. 당연히 가짜이지요. 그렇게 되면 ‘예수 안’이 아니라 ‘나 안’이 되는 겁니다.
기독교와 복음의 차이가 이런데서 드러납니다. 기독교라는 것은 다른 여타의 종교와 비교해서 규정되는 힘의 결집체입니다. 그래서 “국가가 기독교나 교회를 핍박하지 말라. 우리도 살아야겠다”라는 문장들이 이 세상에서는 의미있는 것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국가는 결코 ‘예수 안’을 핍박하거나 구박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세계, 그런 공간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인간들이 자신들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내가 있는 공간’과 ‘내가 속하지 않는 공간’ 정도로 구분짓습니다. 그런 구분에는 기독교도 있고 교회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예수 안’은 없습니다. ‘예수 안’이라는 영역은, 사람들로부터 필요없다고 구박받고 죽으신 분에 의해서 시작된 곳입니다.
쉽게 말해서, 마른 풍선에 입대고 훅하고 불면 큼직한 둥근 풍선이 되는 것처럼, 주님께서 자체적으로 자신을 위한 범주를 만드신 겁니다. 십자가 공로를 훅 불어넣어서 말입니다. 이는 인간들이 자력으로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따라서 ‘예수 안’이라는 공간을 채우는 것은 오로지 예수님의 선택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욥이 거론한 ‘구속자’ 개념입니다. 즉 자신이 구원할 자를 구원자가 알아서 뽑아넣는 겁니다. 구원되는 자이 사전에 허락이나 의견을 듣거나 그의 희망을 듣고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은 어디까지나 구약적 인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기록을 자신에게 쏟아진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기록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신약에 나오는 ‘예수 안’이라는 공간은 일체 인간과 의논하지를 않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과의 의논에 의해서 수립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의 주인공은 욥이나 여타의 사람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람이란 일방적으로 예수님의 이 단절의 취지를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지식의 결과는 거짓된 하나님과 거짓된 천국임을 알고 주님의 부르심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67강-욥기 19장 23~29절(구속자)2021012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9장 23~29절입니다. 구약성경 779페이지입니다.
“나의 말이 곧 기록되었으면, 책에 씌어졌으면, 철필과 연으로 영영히 돌에 새겨졌으면 좋겠노라,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친히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외인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급하구나, 너희가 만일 이르기를 우리가 그를 어떻게 칠꼬 하며 또 이르기를 일의 뿌리가 그에게 있다 할진대,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
욥이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를 구박하고 나를 비난하는 것은 나와 함께 계신 하나님을 구박하고 비난하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내가 죽고 난 뒤에 나는 하나님과 함께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러면 죽고 난 뒤만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나를 아프게 하는 이 자체가 너희들은 하나님의 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일을 벌이셨기 때문에 내가 아무 죄도 없이 이렇게 죄인이 당하는 수난을 받는 것이 너희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여기에 23절에 쭉 나오는 것을 보면 내가 이러한 일이 어느 정도로 진실 되느냐 하면 차라리 내가 이걸 글로 다 쓰고 싶은 거예요. 이것이 초반에 나온 굉장히 중요한 건데 보통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쓰신 글, 그 글을 보고 맞춰나가려고 애를 씁니다.
글이 있는데 그 글의 뜻과 내 뜻이 하나가 되면 나는 복을 받든지 나는 의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이 보통 상식인데 욥은 지금 글이 없어요. 자기가 당하고 있는 인생의 고통 외에는 글이 없어요. 글이 없는 그곳에 내 고통을 그대로 복사를 해버리면 그게 하나님이 일하시는 계시가 되고 글이 된다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자신감이에요.
너희들은 그냥 눈에 보이는 글 가지고 들이대는데 내가 글이라는 거예요. 내가 곧 글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글이 너의 코앞에 있는데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이 해석하고 분석하려는 어떤 특정 책을 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욥의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예요. 너희들과 나 사이에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어떤 공통점을 제시하지 않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단절되도록. 의견 합치가 되지 않게 하기위해서.
너희들이 아무리 나를 이해하려고 애를 써도 하나님께서 그걸 말린다는 겁니다. 그걸 거부한다는 거예요. 내가 그토록 이야기해도 못 알아듣는 것을 보면 이것은 결국 무엇을 남기기 위한 것이냐 하면 29절에 보면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라고 되어있어요. 심판이 있다는 것은 너희들 생각은 이런 거예요. 나쁜 짓 하는 것은 벌 받을 일이라고 하는데 욥의 생각은 그게 아니고 이미 주어진 하나님의 뜻을 못 알아보게 되면 너희들에게는 심판이 주어진다는 겁니다.
네가 스스로 판단하기를 나는 나쁜 짓 했으니까 벌 받을 것이라고 네가 너에게 묻지 말고 너의 외부에 누가 하나님에 의해서 일하시는 자를 네 앞에 세웠는지를 보라는 겁니다. 네가 거울 보고 자꾸 너만 다듬지 말고 네 앞에 네가 납득이 안되고 이해가 안 되는 어떤 인물이 등장했다는 것을 의도적으로 하나님이 그렇게 했다는 것을 너희들은 왜 모르냐는 겁니다.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우리가 신약에서 예수그리스도의 나타난 의미와 유사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급하게 욥의 입장에 서지 마시고 그건 좀 건방진 거고, 우리는 이런 소리를 들으면 어느 편에 서야 하냐면 욥의 친구 편에 서야 해요. 친구 편에 서야 이 성경 말씀을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가 있어요.
예를 들어 25절 보면 “내가 알기에는 나의 구속자가 살아 계시니 후일에 그가 땅 위에 서실 것이라”라고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나에게 그런 이야기 하면 우리는 욥의 친구 입장이기 때문에 단박에 이렇게 이야기해야 해요. “그걸 증명해 봐. 내가 이해 가도록 증명해 봐”라고. 그다음 26절에 “나의 이 가죽, 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라고 지금 아픈 사람이 죽어가면서 하는 말이 “내가 죽고 난 뒤에 지금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하나님이 증명해 줄 것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야기합니다. “그걸 미리 증명해 봐라. 그걸 우리가 이해가 되도록 한번 설명해 봐라”
그러니까 욥이 하는 말이 “너희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는구나”라고 합니다. 칼이 심판이니까. “너희는 칼을 두려워할지니라 분노는 칼의 형벌을 부르나니 너희가 심판이 있는 줄을 알게 되리라”라고 하면 우리 쪽에서는 이러죠. “내가 거기에 쫄 줄 아느냐? 겁먹을 줄 아느냐? 우리가 심판받는 것을 네 쪽에서 증명해 봐라”라고 우리는 그렇게 나오죠.
그래서 욥과 욥의 친구의 오늘 본문에서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증명한다고 욥은 주장하고 욥의 친구는 새로운 정보가 없는데 어떻게 네가 옳고 내가 틀린 것을 어떻게 우리가 단정 지을 수 있느냐는 겁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어떤 질문을 할 때는 새로운 정보가 주어 져야 질문이 되는 거예요. 삼각함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그런 중학생한테 선생님이 삼각함수를 이야기할 때 “자 질문 있는 사람 질문해”라는 말을 할 수가 있어요.
왜냐 하면 선생님 쪽에서 먼저 삼각함수라는 수학 원리를 먼저 제시했기 때문에 들은 정보가 있기 때문에 그 정보와 내 지식을 일치시키기 위해서 뭔가 질문을 하는데 욥이 지금 하는 일은 몸이 너무 아파서 터무니없는 자기 망상에 빠진 거예요. 욥의 친구 입장에서 볼 때. 우리가 그렇게 봐야 해요.
성경을 볼 때 예수님 편에 서지 마시고 신앙 편에 서지 마시고 항상 불신자 쪽으로 후딱 그 자리에 서야 해요. 그래야 내가 나를 안 믿게 되어요. 내가 안 믿고 있는 것을 다 칼로 잘라내 버리고 그래도 남는 여분의 것이 있어 줘야 그게 하나님의 일이 된다는 거죠. 내가 홀라당 다 믿어버리면 주님은 뭐 하시는데요. 주님은 할 게 없잖아요.
“예수 십자가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하면 “믿습니다”하고. 주께서는 “그 입 다물라”라고 하시죠. 네가 뭐 알고 믿느냔 말이죠. 자기가 그렇게 ‘믿습니다’라고 하면서 믿으면 자기 실력으로 믿는 거란 말이죠. 나는 내 실력으로 예상했다는 것과 같죠. 주님께서는 기가 막힌 거예요. 주님 가는 길과 인간 쪽이 그리고 아담 쪽과 새 아담 쪽이 길이 다르거든요. 끊어졌단 말이죠.
그런데 홀라당 홀라당 주는 대로 “믿습니다. 믿습니다”라고 해버리면 이 끊어진 차이를 어디서 찾지요? 차이를 찾을 수가 없는 겁니다. 수련회 때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교인들은 목사보고 내 인생에 도움 되는 이야기해달라고, 도와달라고 왔고 목사가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도와주겠습니다”라고 하니까 당신 일을 도와주겠다는 그것을 수련회 참석하신 분은 아실 건데 그걸 세자로 ‘사기꾼’이라고 했습니다. 사기꾼.
인간은 인간을 도와줄 수가 없습니다. 도와달라는 그 의도 자체가 음흉해요. 주님이 인간을 왜 도와줘야 합니까. 도와줄 가치도 없는데 입에서 도와달라는 말이 나온 것으로 봐서 분명히 그것은 뒤에서 악마가 부추기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 아버지, 선악과 따먹은 거 다 무효로 하고요,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 불쌍하지도 않습니까. 그거 뭐라고 한번 따먹은 거 가지고. 그냥 눈 한번 질끈 감아주시고. 어쨌든 저쨌든 간에 하나님 찾아온 것은 도움받으려고 왔습니다. 좀 도와주세요. 과거 자꾸 따지지 말고”
그러면 주님께서 물으시죠. “네가 누군데?”라고.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안 도와주느냐 하면 신약에 그게 나옵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되어있어요. 중간에 보면 “창세 전에”라는 말 그다음에 보면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공간이 나와요.
이 공간은 이 세상에 예수님 오시면 없는 영토, 없는 공간이에요. 주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자체적으로 새로운 범주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새로운 없는 공간을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그 출발점이 뭐냐 하면 예수님의 죽으심이에요. 그런데 인간은 지금 말짱하게 살아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음에서 시작하는 그 공간에 살아있는 어떤 인간도 넘볼 수 없고 기웃거릴 필요도 없어요. 그런 것이 있는 것도 모릅니다. 자기 살아 있는 것에 정신이 급급해서, 마음이 자기 살아있는 것에서 어떻게 더 살아 있을까 거기에 다 쏠리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시작해서 새로운 없는 공간, 예수 안이라는 공간이 주님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생각을 상상도 못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그만큼 복음을 들었으면 그건 하나 알아야 해요. 교회와 복음의 차이는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어느 인간도 올 수가 있고 키울 수가 있어요. 그러나 예수 안에는 크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예수 안은 그냥 예수 안으로 족하지 큰 예수 안은 없고 작은 예수 안은 없어요. 사람들이 기독교와 복음의 차이를 모르는 이유는 기독교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불교의 세력권과 기독교 세력권의 차이 때문에 우리 편, 내 편, 불교는 불교 편, 기독교는 기독교 편 이걸 지키려는 거예요.
기독교 세력권을 지키고 불교 세력권을 지키는 것은 그 내 안에 내가 있기 때문에 평소에 나는 여기 있는 나를 지키고 키우려는 그 마음 외에는 다른 마음이 하나도 없거든요. 살아있으니까 살아가는 거예요. 이게 무슨 말이 필요하냐는 겁니다. 그쪽에서 하는 이야기는. 욥의 친구는 말하기를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것이 아니고 살아 있으니까 산다는 거예요. 이건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는 겁니다.
그럼 욥이 뭐라고 합니까? “나도 살고 싶은데 왜 하나님이 나를 죽이느냐. 좀 물어보자. 왜 멀쩡한 내가, 착한 내가, 의로운 내가 왜 죽어야 해? 그것도 늙어 죽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죽어가야 하고 모든 것이 다 날아갔는데. 한번 이야기 좀 해 보자”라고 하면 친구들은 “모르겠다”라고 하죠. 하나님이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을 모르는 거예요.
관악기는 악기인데 악사가 그 악기 안에 바람을 휙 집어넣으면 관악기가 가진 공간적 패턴에 의해서 바람이 새로운 공간 안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면 들리는 소리가 관악기 종류마다 그 구조적 패턴에 따라서 다른 소리를 내게 되어있어요. 바이올린도 마찬가지이고요. 지금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데 그 패턴이 뭐냐 하면 자기 아들의 억울한 죽음입니다. 다른 패턴은 없어요.
예수님의 죽음에 성령의 바람을 훅 불어넣어 버리면 그 예수님의 죽음이 커져서 예수님 자체적으로 스스로 어떤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나오는 바람에 의해서 누가 나오느냐 하면 성령의 사람, 영에 속한 사람이 나오는 거예요. 영에 속한 사람을 제가 될 수 있는 대로 이야기를 잘 안 하려고 해요. 그러나 성경에 보면 고린도전서 2장 14~16절에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말이 뭐냐 하면 내가 일방적으로 그냥 보통 인간이에요. 키가 얼마고 갈비뼈가 어디 있고 허파는 어디 있고 다 알아요. 악기의 패턴처럼 공간 구조가 다 그렇게 되어 있단 말이죠. 거기에 성령을 확 부어버리는 거예요. 부으니까 성도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성전이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는 성전이 되어 버렸어요.
사람들은 그걸 몰랐죠. 그러니까 누가 주님 하는 일을 알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게 영에 속한 사람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영에 속한 사람이 방귀를 뀌어도 성령께서 하신 방귀가 됩니다. 뿡~ 주께서 하신 일이 되어버립니다. 성령 받은 본인도 차마 그 이야기가 과연 그런지가 의심될 정도로 그런 이야기를 못 하죠.
왜 이 영에 속한 사람을 제가 말하기를 주저하냐면 한국교회를 워치만니가 다 버려놨어요.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 삼분설. 워치만니라는 중국 사람이 그 짓을 했고 그 제자 위트니스니 그 두 사람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기존의 기독교 육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기독교 신학에서 그걸 베껴서 그렇게 한 거예요.
성경에서 말하는 영에 속한 사람은 없어요. 없는데 자기들은 나를 영에 속한 사람으로 만들어 달라는 겁니다. 자기는 육에 속했는데 성령이 임해서 영에 속한 사람 만들어 달라는 거예요. 네가 뭔데? 그걸 왜 만들어 줘야 해요? 네가 뭔데? 주님의 영에 속한 주님의 세계는 이미 주님이 죽으심으로 인간세계, 주님 세계가 따로 되어버렸어요.
따로 되어있는데 주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새로운 범주, 새로운 영토, 새로운 지평선을 만든 거예요. 영에 속한 사람은 육에 속한 사람이 아무리 끄집어내도 육에 속한 사람이 고린도전서 2장 보고 자기가 상상한 거예요. 육에 속한 사람이 있고 영에 속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게 육적인 사고방식이에요. 그래서 어쩌라고. 그게 탐이 나? 영의 사람 되어서 주의 일을 하니까 탐이 나? 그게 바로 악마의 욕심인 거예요.
예수 안이라는 자체가 없는 공간이에요. 없습니다. 없는데 말씀이 있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이 있는 거예요. 내 안에. 음흉하게 천당 가려고 노리는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의해서 내가 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주식이 한창 오른단 말이죠. ‘이때 주식 있으면 팔면 돈 벌겠는데’라고 하는 거 있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 주식이 없어요.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식을 빌려요. 빌려서 나중에 갚아 줄게. 비쌀 때 주식을 받아서, 그러면 주식을 빌렸으니까 가지고 있겠죠. 있는 것을 비싼 값에 파는 겁니다.
팔고 나중에 주식이 롤러코스터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거든요. 그런데 내려갈 때 싼값에 주식을 사서 전에 비쌀 때 받은 주식을 되돌려 주는 겁니다. 그걸 가지고 공매도라고 합니다. 이건 주식을 빌릴만한 이런 신용 있는 기관에서나 하는 짓이지 개미들은 못 해요. 개미들은 법으로 못하게 되어있어요. 외국 투자기관이나 기관에서 증권회사에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 공매도 과정에서 비쌀 때 없으면서도 사서 팔고 수익을 남길 때 주고받는 게 뭐냐 하면 주식이라는 겁니다. 주식을 주고받는 거예요. 지금 욥을 친구들이 답답해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지금 내가 당하는 하나님이 함께 있어서 벌어지는 상황을 내가 기록하고 싶다는 거예요. 주식처럼 말씀처럼 기록하고 싶다는 거예요. 너 나중에 내가 죽고 난 뒤에 내가 기록한 것을 한번 보란 말이죠.
없는데 내가 있잖아. 내가 말씀의 기록 내용의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욥이. 하지만 욥은 구약적 사람이라서 뭣이 지금 한계에 이르렀느냐 하면 내 이야기를 하나님께서 기록한다는 그 이야기를 했는데 에베소서 1장 4절에서는 어떤 인간의 이야기도 성경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 이야기밖에 없어요. 그게 에베소서 1장 4절입니다.
창세 전에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을 예수 안이라는 공간의 완성체로 결국 남기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은 원어를 따지고 히브리어 헬라어를 따지면서 성경 킹제임스 번역을 하면서 아무리 연구를 해도 인간은 성경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어요.
왜냐면 성경의 시작은 죽임당하신 예수님이 계시했기 때문에 어떤 인간도 내가 살아 있는 채로 내가 원어 지식을 가지고 성경을 분석해서 또는 설교를 수천 번 듣는다고 해서 예수 안으로 못 들어옵니다. 오래된 교회 3~4대 내려오는 교회 장로님들의 특징은 한마디로 뭐냐 하면 안 들으려고 졸고 아무리 애쓰고 속으로 목사에게 빨리 시간 채우고 설교 끝내라고 이런 식으로 해도 이상하게 목사가 하는 설교는 “전에 들은 거 같은데”라고 집어내죠.
하도 수천 번을 들어서 다 알아요. 자기는 전혀 믿지도 않고 잔소리처럼 들리지만 뭔가 한번 써먹었던 거 또 한다 싶으면 “전에 들은 거 같은데”라고 하죠. 하도 많이 들어서 아는 겁니다. 설교는 들었죠. 성경은 빠삭하니(분명하게) 알고 하지만 결과는 예수 밖인데. 예수 밖에 있어요. 성경공부 바람을 내서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바람을 냈는데 바람 내면 뭐합니까. 예수 밖인데. 예수 밖에서 성경공부 실컷 하고있는 거죠.
성경공부를 통해서 알아야 할 것은 ‘아, 내가 예수 밖에 있구나. 예수 밖에서부터 그냥 그 자리에 있어야 하는구나’입니다. 언제까지. 성령이 호출 할 때까지. 성령이 부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예요. 내가 성령 받아서 들어가려고 하면 안 돼요. 그냥 기다려. 스톱! 강아지 너 가만히 있어. 내가 빵 줄 때까지 가만히 있어. 주인이 줘야 되는 거예요. 주인이.
주인이 줘야 내 몸이 주의 것이 되는 겁니다. 주님 이용해서 내가 천당 가는 것이 아니에요. 그걸 가지고 욥은 거기까지는 몰랐는데 그게 주의 뜻이겠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걸 ‘고엘’이라고 합니다. 구속자라고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내가 죽고 난 뒤에 이러한 사태, 몸이 아픈 상태, 이건 결코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야. 너도 잘라내고 나도 잘라내는 그 여분의 것, 그 잉여의 것,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데 누가 손을 댄 것, 그분이 하나님이시겠지. 이걸 쓰자는 말이죠. 그걸 가지고 욥은 뭐라고 표현하느냐 하면 그게 바로 구속자라고 본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나는 강아지처럼 예수 밖에 있었는데 예수 안에서 손을 내밀어서 나를 끄집어내서 다시 예수 안으로 강제로 끄집어 주시는 그걸 가지고 구속자, 구원자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장로님은 아니지만 제가 지난 설교했던 예를 다시 들겠습니다. 농구 선수가 농구 골대에 공을 집어넣을 때 그동안 나의 노하우와 나의 스킬을 이용해서 정확하게 각도 잡아서 집어넣는다고 할 건데 이상한 나라의 농구장은 골을 반대쪽으로 집어넣고 있는데 농구 골대가 늘어져서 농구공을 낚아채서 강제로 두 점 골인하도록 만들 때 공을 넣은 사람은 아마 돌아버릴 거예요.
내가 뭘 본거지. 내가 미친 게 아니야? 그래서 사도바울도 자기 자신을 표현할 때 내가 미쳤다고 한 거예요. 자기는 율법 전공자예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사람이에요. 그때 아무리 요모조모 따져봐도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아닌 거 같아요. 예수님이. 자기는 메시아라고 우기는데 부활이라는 것도 우기는데 그건 남들이 하는 소리이고 인간은 죽으면 끝이고 부활할 수 없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저 말씀대로 순종하면 천당 가는 거지. 그게 내가 아는 전부라고 알았던 사울이 예수님 만났을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습니다. 창세 전부터 새로 시작해야 하고 그 새로 시작하시는 아이디어는 내 쪽이 아니라 나에게 찾아오신 주님 쪽에서 나에게 일방적으로 가르쳐야 하고 집어넣어야 한다는 거예요.
내 안에서 나를 빼고 나를 집어넣어야 하는 거예요. 참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지금 욥도 하고 있고 사도바울도 하고 있는 겁니다. 너희들 가운데 성령 받은 사람이 혹시 있는가 싶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이 정말 세상 상식을 전혀 모르는 무식한 친구에게 이야기했어요. “루이 18세가 어쩌고저쩌고...”라고 이야기하니까 “루이 18세가 누구인데?” “프랑스 왕이야” “아, 프랑스 왕은 열여덟 살 먹었구나”라고 이야기 한 거예요.
자기가 아는 국어 범위에서의 해석은 ‘~세’라고 하는 것은 ‘몇 살’할 때 붙는 것이 ‘18세’니까, 낭낭18세 할 때 ‘세’니까 열여덟 살 먹은 것이 자기로서는 한계이고 정답인 거예요. 그러니까 말했던 친구가 이런 말을 합니다. “그럼 요한 바오로 2세는 두 살이겠네” 모든 언어 해석이 나의 노림수부터 다시 말해서 구속자가 구원자 됨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구원받았는데 그게 아니고 내게 필요한 구원자를 뽑다 보니까 그렇게 교회 교인들이 많은 거예요.
그 사기꾼에 속아서. 나 천당 가는데 도와달라는 거예요. 목사는 장사해야 하는데 잘됐다 싶어서 도와준다고 한 거예요. 둘 다 지금 예수 밖에서 놀고 있는 거예요. 성경에 보니까 영이 여기 있어. 그러면 영에 속한 사람, 육에 속한 사람, 혼에 속한 사람, 이런 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갖다가 붙이는 거예요. 좋다고 은혜받았다고 하면서. “그걸 굳게 잡으세요”라고 하면 “예, 굳게 굳게 잡겠습니다”라고 하면서 굳게 잡는다고요.
잡았는데 80세 되어서 치매 걸려 다 날아가고. 다 날렸잖아요. 그게 무슨 소용 있어요. 자기 위로와 자기변명이고 자기 위장술이죠. 그러다가 코로나 걸리니까 다 도망가버리고. 우리는 용도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나는 존재한 적이 없었어요. 이건 하나의 용도예요.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기 때문에 피조물이 되는 겁니다. 오늘날 성도의 피조물은 뭐냐 하면 구원자는 일방적으로 자기 백성을 택했다는 겁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택한 자, 오직 택한 자만이 천국에 올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용도가 오늘날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결과적으로 보게 하옵소서. 그 과정 속에서 우리가 무슨 헛짓 했는지를 돌이키게 해주시고 성경에 나오는 주께서 죽으심이 하는 일과 내가 은근히 노리는 일이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깨닫는 성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