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6:9-11 / 생명의 주인
생명의 주인
이근호
2021년 1월 20일
본문 말씀: 아모스 6:9-11
(6:9)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6:10)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한 자가 있느냐 하여 대답하기를 아주 없다 하면 저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6:11) 보라 여호와께서 명하시므로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
하나님께서 ‘다 죽여버리겠다’고 나온다고 아모스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하면 아니됩니다. 이스라엘에 애굽에서 나올 때, 무슨 조건을 유지해야 하는 조건 하에 나왔다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잊고 있었던 겁니다. 유월절 대규모 죽음은 인간적으로 무슨 나쁜 짓을 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하나의 조건을 이스라엘에 심어놓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바로 ‘유월절 양의 대신 죽으심’이라는 조건입니다. 이미 범죄한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일관적 작업장으로 삼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응축한 조건이 세상이 모든 민족에는 없고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스라엘 나라에 조건을 부여하신 것이 아니라 조건이 먼저이며 이 조건을 성사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을 차후적으로 만드신 겁니다. 그 조건이 되는 유월절 희생양 정신이 소멸되면 당연히 하나님의 저주가 임한다는 하나님다운 마땅한 조치인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자신의 생존을 우선시했고 조건에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던 겁니다.
즉 이스라엘은 자신의 존재 자체가 조건인 줄 알았던 겁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자신이 살아있기 위해 하나님이 계시는 것처럼 오해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심보와 같습니다. 나의 생존은 결코 하나님의 일의 조건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아담의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인간의 살 권리는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곧 인간은 ‘살 수 없는 존재’로 확정 난 겁니다. 하나님께서 그래도 살 수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꾸준히 하시고자 하는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 사실을 몰랐던 겁니다. 밤새 눈이 내렸다고 아침에 눈 떠서 보면, 인간이 해내지 못한 증거들이 집 지붕과 사방에 소복히 쌓여있을 겁니다.
이처럼 다른 민족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는 그동안 꾸준히 눈송이처럼 하나님께서 언약과 율법들을 제공해 왔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방민족처럼 자신들의 생존이 우선적이라서 계속 주어지는 하나님의 율법이 겨냥하는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완성의 시점을 잊지 않고 계셨던 겁니다.
율법 주신의 취지가 이스라엘의 존재의 층에 깔려있으니 그것을 들추어내기 위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세상의 끝점은 이스라엘의 바닥을 살피는 것으로 파악이 된다는 겁니다. 세상 끝점은 곧 영원히 구원받을 자가 드러나는 시점입니다. 메시야가 오는 시점인 동시에 그 구원자가 곧 심판자 기능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시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모스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파멸을 여지없이 알려주십니다. 이 이스라엘의 파멸소식에 대해서 이스라엘 사람이라면 어떻게 받아야 할까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라를 망하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뜻의 일관성으로 인해 마땅히 하실만해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내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일을 이해하기만 하면 세상을 멸망하고 나를 죽이는 일까지도 반갑게 고마워해야 될 일입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우리 입장에서 고집부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 입장을 환호해야 할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들이 도둑이기 때문입니다.
선악과 열매는 우리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을 훔쳤다는 것은 곧 남의 것을 우리 인간의 것이라고 우기는 출발점이 됩니다. 선악과를 훔친 자는 죽음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아직 작용하는 목숨은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려는 의도로 살려주시고 있는 목숨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목숨은 우리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을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양 여기면서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사야 40:7-8에 보면,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풀의 꽃은 시들어버리고 피는 겁니다. 죽어버리라고 피는 꽃입니다. 우리네 인생도 이와같습니다. 잠시 잠간 사는 것은, 그 시간을 통해서 왜 우리는 살지 말아야 하는 존재인지 그 이유를 알기 위함입니다. 만약에 어느 교회에 가서, “이 교회 교인들은 다 지옥갑니다”라고 한다면 그 교인들이 화부터 낼게 아니라 무슨 근거에 그런 소리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전하는 아모스의 기능이 그런 겁니다. 이스라엘이 망해야 될 이유는, 이스라엘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주님이 벌리시는 일관된 일이 있다는 겁니다. 즉 당연히 망해야 하는 자가 망하는 과정 속에서 복음과 연결되어 대목이 나오는 겁니다. 성도도 마땅히 죽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죽어가면서 생명과 복음과 연결된 죽음의 색깔이 나오게 됩니다. 죽음에는 두 종류의 죽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늙어서 죽는 죽음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서 죽는 죽음이 있습니다. 사사기 13장에서 16장에 나오는 인물, 삼손이 그 인물입니다. 나실인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출생된 인물입니다.
즉 사명이 먼저이고 그 하나님의 일을 담기 위해 태어나야 하는 자가 삼손입니다. 삼손의 목숨은 두 가지 색채를 보입니다. 하나는 그 당시 이스라엘이 왜 블레셋에게 지배받을 수밖에 없는 가를 보이는 시간을 보냅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들의 생존이 우선인 이스라엘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힘 있는 삼손은 그 힘을 여자 밝히는데 사용합니다. 결국 삼손은 모든 힘을 잃어버립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삼손에게 집어넣었던 하나님의 약속은 도리어 성취를 보입니다. 그것은 ‘삼손이 살아 있을 때 죽인 자보다 죽었을 때에 죽인 자가 많다’는 겁니다.(삿 16:30) 즉 하나님은 삼손이 죽기를 원하십니다. 마치 예수님과 같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목숨은 결코 성도 본인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이 내재된 그 ‘은혜’를 지켜내기 위해 성도의 일생은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그 죽음까지도 하나님의 은혜의 산물이니 살아서도 주님께 감사하고 죽음조차도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자신을 살리기 위한 ‘나의 의’가 필요치 않음을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21강-암 6장 9-11절(생명의 주인)2101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6장 9-11절까지입니다.
아모스 6:9-11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한 자가 있느냐 하여 대답하기를 아주 없다 하면 저가 또 말하기를 잠잠하라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을 일컫지 못할 것이라 하리라 보라 여호와께서 명하시므로 큰 집이 침을 받아 갈라지며 작은 집이 침을 받아 터지리라.”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이 하는 행세가 미워서 그들의 모든 성읍을,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이스라엘 적을 통해서 모조리 다 멸망시키는 쪽으로 주께서 일을 벌이겠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9절에 “한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 그리고 10절에 “죽은 사람의 친척 곧 그 시체를 불사를 자가 그 뼈를 집 밖으로 가져갈 때에 그 집 내실에 있는 자에게 묻기를 아직 너와 함께한 자가 있느냐 하여……”
그러니까 아직 살아 있는 자가 있느냐, 묻게 될 때 아예 없습니다, 하는 답변이 나올 정도로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의 모든 성읍들을 모조리 다 죽이시겠다고 나옵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들으면서, 이것이 두렵고 무섭고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우리는 하나님 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내 편에 서 있는 셈이 된다는 것이 그만 티가 나버립니다.
살아 있는 내편에 늘 죽치고 있으면서 그저 전능하신 하나님이나 이용하려고, 그런 식으로 요령으로 살아가는 그 모습은 드디어 하나님의 화를 돋우는 일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인데 그 취지에 대해서 우리가 가담할 생각을 안 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하나님 생각 따로 내 생각 따로 라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그 간격이 벌어진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는 가만있지 않고 “내 뜻은 이것이다. 너희를 죽이는 것이다.” 하고 그것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이게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제가 생뚱맞게 감사를 여기서 끄집어냈는데, 내가 살고 죽고 여기에 연연하지 않는 자, 다시 말해서 “내 뜻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지 않고 하나님 쪽에서 서서 하나님의 뜻이 펼쳐지는대로 뭐 어떤 뜻이라도 저는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 죽인다 할 때 “역시 잘 하셨습니다. 내 그럴 줄 알았습니다.”라고 반기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지금 이 말씀을 누가 했느냐 하면, 아모스 선지자가 하거든요. 아모스 선지자가 “너희들 이제 다 죽었어.” 할 때 아모스 선지자의 말을 듣고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야 하나님답지요. 언제 다 죽이는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반갑소, 아모스! 진짜 제대로 복음 듣는군요.”
아모스 선지자가 그런 말 할 때 막 껴안고 “아, 진짜 간만에 말씀 듣습니다.” 하고 여기서 “단술이라도, 화채라도 드시고 가시지요. 제가 식사 한 끼 대접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와야 정상이라는 겁니다. 선지자가 그런 이야기를 할 때. “너는 죽었어. 너는 왜 매사가 부정적이야? 우리 잘되는 꼴을 네가 못 보는구나. 네가 질투심 때문에 있지도 않은 하나님 뜻을 들먹이면서 우리를 괴롭히지 못해서 안달해서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이렇게 화를 돋울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만약에 어떤 교회 다니는데 어떤 성도가 “교회 꼬라지 보니 이건 뭐 다 마귀가 와서 지옥으로 데려가겠네.”라고 했을 때 그 사람에게 신경질 성질 내지 말고 근거를 제시해야 돼요. “당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 근거가 뭡니까? 근거가 합당하다면 얼마든지 내가 당신 말에 동조할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돼요. 근거가 뭐냐? 성경적인 근거가 뭐냐?
이 교회는 지금 지옥 간다고 할 때 무조건 화를 덜컥 내지 마시고 그렇게 하는 근거가 뭐냐, 내가 생각한 근거하고 당신이 생각하는 근거가 일치하는지 확인 작업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 선지자가 그렇게 한 근거가 있어요. 그 근거가 뭐냐 하면, 인간의 존재 안에는 끝점이 들어 있고 그 끝점을 파내기 위해서는 그 끝점을 덮고 있는 그걸 인간을 심판해서 죽이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진리가 어디 있느냐? 진리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졌고 그 진리가 간밤에 눈 오듯이, 사람들 자고 있을 때 소복이 쌓이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나라에 하나님의 진리가 눈 내리듯이 계속 쌓인 거예요. 그 쌓임이 이스라엘의 멸망이라는 결과를 낳은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달리 하나님께서 언약에 의해서, 율법에 의해서 심판을 내린다는 말은 이스라엘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재의 층까지 내려가는 거예요. 아모스의 이 말씀이! 아모스의 이 말씀은 다른 민족보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북이스라엘 보고 이야기하거든요. 물론 남쪽도 마찬가지지만.
그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밤에 내린 눈처럼 그동안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주어졌던 하나님의 언약이 있고 말씀이 있다는 말이지요. 그 말씀이 쌓여서 이스라엘 총 멸망으로 이어졌다면 이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신 언약이 해답과 정답, 진리가 바로 이 이스라엘 존재 층에 깔려 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파내야지요. 이스라엘 끝점에서 하나님의 진리가 들어 있는 겁니다. 다시 설교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특수한 나라거든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동안 선지자를 보냈다 이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말씀을 보게 되면 이게 경사진 지붕처럼 그냥 떨어져 나가 버려요. “뭐 들었어? 뭐 알았어?” “몰라. 선지자가 와가지고 이상한 잔소리나 하는데 우리 안들은 것으로 하자.” “그래. 그렇게 하자.” 그런 식으로 계속 보내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이스라엘에게 떨어진 하나님의 계시가 어디에 쌓여 있느냐 하면, 바로 이스라엘 나라의 존재 층에 깔려 있는 거예요. 그러면 진리를 파악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에 있는 존재 층, 위층에 있는 그걸 다 뜯어내고 그 끝점을 바라보는 거예요.
그 끝점이 뭐냐? 오늘 본문 9절처럼 “한 집에 열 사람이 남는다 하여도 다 죽을 것이라.”라는 말은 끝점을 찾아가는 겁니다. 끝점을 찾아가는 그 작업을 아모스 선지자가 말씀하기를, 하나님이 해내신다 하니까 이 얼마나 반가운 소리냐 이 말이지요. 진리를 함유하고 있는 존재에 대해서 진리 좀 보자, 해가지고 다 뜯어내는 거예요. 인간을 분해해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스라엘이 망했는지를, 그걸 찾는 작업이 그게 왜 기분 나쁜 일입니까?
어느 교회가 있다. “내가 보니 이 교회 다 지옥 가겠네.”라고 했을 때 그 교회 30년 50년 다닌 사람들이 또는 목사가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 “당신은 무슨 근거에 의해서 우리가 지옥 간다고 하느냐?”라고 했을 때 “우리 교인들 불러다가 존재의 끝을 한 번 볼까? 한번 뜯어볼까? 그 사람들이 마지막 그 무엇을 위하여 이 교회 나오는지 그 사람 말을 직접 한 번 들어봐?”라고 나와야지요.
이사야 40장 8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자, 풀의 꽃은 왜 피느냐? 이게 지라고 피는 거예요. 지라고, 져버리라고, 말라비틀어지라고 꽃은 피는 것이다 그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네 인생은 왜 살아 있느냐? 죽으라고 살아 있는 거예요.
그러나 그냥 죽으면 안돼요. 죽는 이유를 알아야 돼요. 하나님의 말씀과 매치가 되어서 어떻게 그 말씀이 무슨 근거에 의해서, 왜, 무슨 이유 때문에 우리를 죽이느냐 할 때 그 죽음에 대해서 우리는 쌍수를 들고 대 환영을 해야 되지요. 그게 풀 같은 우리 존재의 기능 아니겠습니까? 꽃은 피지만 지기 위해서 핀 것이기 때문에.
잠시 피었다가 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라면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잠시 살게 한 이유, 이 땅에 태어나게 한 이유, 그 이유에 대해서 새삼스럽게 관심을 갖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하면 돼요. “너 죽인다” 할 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매치가 되면 돼요. “내가 너 죽일 거야.” 할 때 “감사합니다.” 하고 어떻게 매치를 시킬 수 있느냐? 그게 성도의 삶인데.
왜냐하면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라 했으니까 “너 이제 멸망당했어.” “아이고, 고맙습니다.”라는 고백이 여지없이 탁 튀어나올 수 있게 하는 것 있어야 되는 것, 어떻게 하면 우리가 아모스 같은 성도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겠습니까?
거기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 죽음을 가지고 설명이 가능합니다. 하나는 사람이 죽이는 죽음과 그리고 또 하나 하나님이 죽이는 죽음, 어느 쪽이 감사로 이어질 죽음이냐 하는 겁니다. 사람이 죽이는 죽음보다도 하나님이 죽이는 죽음에 우리가 관심이 있다면 살아 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감사하고 신기할 일이지요.
우리존재의 층에 깔려 있는 하나님 자신이 던져준 진리가 우리에게 담겨 있다는 것도 과분한 일이고, 참 고마운 일이고 영광스런 일이에요. “주께서 주신 그 진리를 알리기 위해서 뜯어내신다면 언제든지 제 인생을 주님께 갖다 바치겠습니다.” 실제로 성령 받은 사람은 다 그래야 한다는 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편지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사도바울은 항상 두 개를 가지고 이야기해요. 뭐냐 하면, 세상의 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세상의 영이 따로 있고 또 하나님께로 온 영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의 특징이 뭐냐?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심.
이 말은 뭐냐 하면, 우리가 그냥 은혜를 모르고 살아버리면 항상 내가 잘했다, 못했다, 못했다, 잘했다, 에 굉장히 신경 쓰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는 순간 이건 뭐냐? 나한테 은혜가 있다, 없다, 에 관심을 두게 돼요. 주님이 주신 것이 아직 있느냐, 아니면 다 갖다 버렸느냐? 그런데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내가 잘했다, 못했다, 가 아니라 뭔가 주께서 주신 것이 아직 살아 있고 남아 있느냐? 혹은 그게 없느냐의 문제라는 말이지요. 내가 행동을 잘하냐, 못하냐, 하는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의 관심사가 되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영을 받은 사람은 선악과를 따먹도록 부추김을 받았기 때문에 은혜라는 것은 없고요. 내가 나를 사수하고 방어하는데 급급해요.
잘했느냐, 못했느냐, 못했느냐, 잘했느냐, 그걸 신경 씁니다. 그래서 누가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죽인다, 하게 되면 거기에 대해서 아주 펄쩍 뛰지요.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이 나이에 죽어야 됩니까?” 이런 식으로, ‘내가 지금껏 살아온다고 신경을 얼마나 많이 쓰고, 조심스럽게 살아 왔고, 안 죽을만큼 착한 것을 쌓아두면서, 설마 하나님이 이정도 착한데 죽일 리야 있겠어?’라고 하면서 자기 목숨 건사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 했는데 지금 와서 죽는다 하니까 너무나 절통하고 원통하고 분통하고 어쩔 줄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정말 성도라면, 그걸 다른 말로 해서 정말 은혜를 받았다면, 정말 여러분이 악마, 세상 영, 세상 신, 이게 여러분에게서 떠났다는 것을 경험하려면, 또는 어떤 경험이냐를 알려면 자기 의가 자기 몸에서 떨어지는 순간, 악마가 떨어지는 순간으로 보시면 됩니다. 나의 의가 나에서 빠이빠이, 하고 이별하고 떠나버리는 거예요.
나의 의가 떠나버리면 그것은 나한테 붙어 있던 악마가 떠나는 순간이에요. 속이 다 시원합니다. 속이 다 시원하다고요. 나의 의가 떠나버리니까 더 이상 나의 의를 끌어 모아야 된다는 숙제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이젠 그 숙제 안 해도 돼요. 착해야 된다, 바르게 살아야 된다, 남에게 꿀리지 않아야 된다는 그런 숙제에 더 이상 시달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면 뭐가 남아 있느냐? 그 나의 의는 타고났기 때문에 우리가 못 떨어지는데 이걸 떼 내게 했다는 말은 주님께서 우리보고 뭐라고 하는 거냐 하면, “너 이제 구원 받았어.” 하는 뜻이거든요. 그런데 그 구원은 뭐냐 하면,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그 힘, 은혜로 주신 것, 성령이지요, 십자가 영, 그것으로 인하여 더 이상 그러한 자기 의에 대해서 안 시달려도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구원받았으니 하나님의 은혜만 간직하면 되겠네.’ 그렇게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실 때에 예수님이 이 땅에서 은혜 받았으니까 잘 먹고 잘살고 그렇게 살았습니까? 그게 아니거든요.
그러면 뭐냐?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을 증거 하는 자로서 하나님 아버지가 죽이는 죽음을 평생 보여주신 거예요. 그러니 이래도 인간은 죽고 저래도 인간은 죽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내가 선악과를 품은 채 죽어버리면 본인은 억울해서 못사는 거예요. 억울해서! 주님께 대들고, 반항하고.
그런데 악마가 떠나고 난 뒤에 은혜로 주신 것들로 내가 죽게 되면 우리는 뭐냐? 죽는 것도 하나님이 내 안에서 벌이는 하나님의 자기 사업이기 때문에 기꺼이 하나님의 사업에 우리 몸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맘대로 하세요.”
왜냐하면 은혜가 있으니까. 은혜가 알아서 내 속에서 어떤 업무를 개시하시니까 그게 내 일은 아니잖아요. 주의 일이잖아요. 주의 일을 하시겠다는데 우리가 장소 제공했기 때문에 이 얼마나 황공무지로소이다, 하고 감격할 일이에요.
인간들, 특히 불신자들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겁니다. 우리의 목숨은, 우리가 죽는 것을 자꾸 무서워하는데 우리의 목숨은 이게 내 것이 아니고 남의 거예요. 쉽게 말해서 옆집 통닭을 훔쳐서 멀리 한 260킬로 떨어진 다른 곳에 가서 자기가 그 훔친 통닭에 양념을 발라놓고 그 양념발린 양념통닭이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거예요. 자기 것이라고!
그런데 그 벌거벗은 통닭을 어떻게 주인이 알았는지 수소문해서 “그거 네 거 아니잖아. 내 것 도둑질 했잖아. 내놔라.”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우리를 공격하는 게 아니고 주님이 자기 것 찾으러 온 거예요. 죽음이라는 게! 이래도 죽음이 억울하십니까? 뭐가 억울합니까? 자기 것 자기가 찾아가겠다는데.
그동안 죽는 게 무섭다 하는 이것은 악마한테 속은 거예요. 아니 주인이 왔으면 돌려내야지 왜 얼굴이 전부 다 뻔뻔스러워요? 내 것 아니구나, 이러면 되잖아요. 아, 내 것인 줄 알고 얼마나 거기다가 신경을 썼는지. 아, 그동안 내 것도 아닌 것을 내 것으로 한다고 참, 여러분 얼마나 신경 썼습니까? 예?
교육시켰지요, 세상에서 온갖 맛있는 것은 다 먹였지요, 옷은 또 예쁘게 차려입고, 넥타이도 골라가면서 맸지요. 왜 그렇게 나한테 신경을 썼습니까? 내거니까 그렇게 신경 쓴 거예요. 누구 맘대로 내 것이에요? 누구 맘대로? 내 것 아닌데 내 것인 듯 내 것 아닌 내 것 같은……, 아니 내 것 아니에요. 아예 내 것 아니에요.
정신 바짝 차려야 돼요.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진리가 무엇이냐, 사실이 무엇이냐를 분명히 확실히 하자는 거예요. 몇 년을 더 살지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무엇이 사실이냐? 알려드려요? 나는 내 목숨과 내 모든 것은 남의 것이라는 것, 내 것 아닌 정도가 아니고 아예 주인이 따로 있어요. 남의 것이에요.
그 분이 자기 것이라고 지금 회수하러 오시는 겁니다. 후딱 얼른 내 드리세요. 설교 여기서 5분 만에 끝내버리렵니다. 후딱 내드리세요. 억지 부리지 말고. 세상에서 뭐 어떤 사람은 노래를 잘한다, 어떤 사람은 돈을 잘 번다, 어떤 사람은 바둑을 잘 둔다, 어떤 사람은 스케이트 잘 탄다, 어떤 사람은 얼굴이 예쁘다 하지만 전부 다 남의 것 가지고 장난치면서 평생을 보내요.
내 자식은 공부도 잘한다, 이렇게 하는 것, 전부다 자기 것이 아니고 남의 것이에요. 주님께서는 내 다리 내 놓아라, 하는 식으로 찾아오시는 겁니다. 아니 선악과나무가 누구겁니까? 아, 정말 이거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인데 선악과나무가 누구 거예요? 주님이 주님 거라고 심어놨잖아요. 그걸 파서 자기 집에다 심어놨으니까 주인이 그걸 잊을수가 있겠어요? 잊지를 못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것 아닌 것을 자기 것으로 데려가는 방법인데 그냥 데려가 버리면 이스라엘이 구원을 못 받아요. 구원받는 삶이 없어요. 그래서 그냥 죽여 버리고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이스라엘은 특별하게 하나님의 약속을 집어넣었어요.
그러면 이스라엘은 다른 민족하고 달라서 두 개의 죽음 앞에 끼어 있는 깨어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하나는 주님이 죽이시는 말씀과 약속으로 죽이시는 죽음.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식이지요. 네 거가 아니고 내 것이었다 하는 것. 그리고 일반적인 죽음, 이방민족들이 알고 있는 죽음, ‘왜 죽지? 왜 자꾸 늙지? 내가 죽는 것은 겁나지 않지만 내가 늙어가는 것은 솔직히 내가 참을 수 없습니다.’ 유명한 소설에 보면 그런 대목이 나와요.
사람이 죽는 것은 눈 꾹 감으면 되지 하지만 이 늙어가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은 꼴 보기도 싫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언약이 없고 말씀이 없는 사람은 하나의 죽음만 상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예요. 벌벌 떨면서 될 수 있는 대로 죽음에서부터 도피하기 위해서, 달아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합니다.
착하잖아요, 착한 일 많이 했잖아요, 내가 살아 있어야 자식이 잘되지요, 나는 이 세상에 필요한 존재입니다, 지금 나 죽으면 일이 안 됩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버티는 겁니다. 지난 18일 아침 여섯시 어둑할 때인데 어떤 60대 남자가……, 요새는 왜 자꾸 그런 것만 보이나 몰라요.
그 60대 남자가 차를 세우고 기어를 중립에 넣고 내렸다가 자기 차와 벽 사이에 끼어서 죽었어요. 기어를 중립에 넣어놨는데 경사에서 차가 움직였다 그 말이지요. 빠져나오지도 못하고 끼어서 결국은 그 두 물체 사이에 끼어죽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애초부터 죽은 존재기 때문에 살아 있는 것을 신기하게 여겨야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약속을 위해서 우리를 죽이려 할 때에는 우리는 환영의 손을 들고 반겨야 돼요. 왜냐하면 그 약속 안에 바로 영생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영생은 그렇게 찾아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놀러온 게 아니시지요. 예수님께서 우리 말고 또 하나의 죽음, 영생으로 통하는 죽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 그 말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얼씨구나 하고 십자가 죽음을 반겨야지요.
그게 뭐냐? 은혜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간직하고, 지키고, 우리 안에 들어온 것은 뭐냐? 우리가 오래 사는 것이 아니고 역시 우리가 죽는 건데 그 죽음은 어디와 통하느냐? 복음과 통하고, 부활의 세계와 통하고, 영생과 통하고, 생명나무와 통하는 낯선 죽음, 기이하고 특이한 죽음이 성도에게만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게 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래도 우리에게는 사는 게 없고, 저래도 사는 것은 없는데 다만 그 지옥으로 통하는 죽음과 영생으로 통하는 죽음 사이에 끼어서 주께서 우리 속에 작업을 하는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기쁘게 반겨야 돼요.
그래서 제가 성경을 통해서 여기서 두 종류의 인간형을 제시해 보겠습니다. 한 사람은 삼손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가룟유다에요. 삼손과 가룟유다에 대해서 삼손은 역시 죽었고 가룟유다도 죽었어요. 두 죽음이 늙어죽는 죽음이 아니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죽음의 현장에서 죽게 되었습니다.
삼손에게 하나님의 나실인이라는 사명이 부여되었어요. 삼손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삼손이 받을 사명부터 먼저 있고 그 사명에 맞춤 인간이 바로 삼손입니다. 그런데 나실인의 뜻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 바치운자가 되기 때문에 멸망하는 죽음의 이스라엘 속에서 영생과 통하는, 그러한 새로운 이스라엘을 건져내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실인 제도에 부합되는 인간을 잉태치 못하는 가정을 통해서 잉태케 했습니다.
이 점을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기 위해서는 이걸 생각해야 돼요. 유월절 날 하나님께서 애굽의 장자들을 다 학살했지요. 다 죽였습니다. 애먼 학살이지요. 영문도 이유도 없이 다 죽었으니 학살이지요. “네 죄를 알렸다. 사형!” 이런 것 없어요. 그냥 다 죽여 버린 거예요. 그냥 죽였어요.
그것은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인간은 처음부터 자기목숨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 주인이 도로 가져가겠다는데, 죽은 인간을 죽이겠다는데 우리는 거기에 대해서 내 목숨이 아닌 이상은 항의하면 안돼요. 다만 살아 있는 것을 감사하게 여겨야 됩니다. ‘내 것도 아닌데 왜 자꾸 살아있지? 신기해, 신기해.’ 이렇게 되어야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유월절의 그 학살이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고 여겼잖아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해한 거예요. 왜냐하면 유월절 그 때 조건이 있었습니다. 사는 조건이 어떤 조건이냐 하면,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문설주 문지방에 발리는 조건하에 그 히브리인의 장자는 살았어요.
그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조건이 사라지게 되면 그 유보된 학살은 그대로 이스라엘 전역에 퍼진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조치지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뭘 모르느냐? 오늘날 우리가 뭘 모르느냐 하면, 우리가 예뻐서 살려줬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큰 잘못이에요. 우리가 쓸모 있고, 우리가 살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살려줬다는 것, 이것은 주님이 하는 일에 엄청난 곡해고 오해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자체가 예뻐서가 아니라 우리 안에 주님이 살려줄 조건이 있기 때문에 살려주고 있는 거예요.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고 우리 존재의 층, 존재의 바닥에 주께서 하실 일이 있기 때문에 살려주는 거예요. 아모스가 지금껏 이야기했지만 완전히 작살내거든요. 다 죽여 버리거든요. 그러면 그동안 이스라엘은 왜 남아 있었는가? 이스라엘은 그 끝 지점에 메시아가 오도록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메시아의 그 시기가 다가왔으니까 이제는 준비된 스케줄에 따라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다 죽여 버리는 겁니다. 남아 있는 이스라엘까지 로마군대에 의해서 다 죽이지요. 마지막에 대 환란을 주는 겁니다. 그게 아까 제가 이야기한 은혜로 주신 것들, 은혜로 주신 것들이 있는 거예요.
아모스 선지자가 이런 이야기할 때 아모스가 이스라엘 편이냐 아니냐, 그런 소리 들을 필요도 없어요. 아, 이스라엘 다 죽이는 것 보니까 하나님이 그 다음 작업에 돌입하실 예정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그 작업, 언약, 약속, 은혜, 무슨 말이든지 다 좋아요, 주실 때는 하나님께서 성도를 죽일 때는, 성도로 하여금 그 다음 작업, 영생의 나라,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죽이신다 그 말입니다. 전혀 어렵지 않아요.
정말 이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스케줄대로 미끄러지듯이 진척되는 겁니다. 내가 살아 있느냐, 죽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주님의 일이 내 안에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 주님의 일이 아직도 계속 작용하고 있느냐, 소리도 없이 날라 가버리고 희석되었느냐, 그게 중요하다 그 말입니다. 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 안에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이 더 중요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죽는 것에 대해서는 사실, 그 작업을 은혜대로 아는 사람한테는 사는 것도 반갑고 죽는 것도 반가운 거예요. 오히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반갑지요. 이스라엘은 아모스가 이런 이야기를 할 때 회개해야 돼요. 나를 쳐다보는 시선을 내 끝점, 내가 망해야 비로소 나타나는 그 끝점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준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돼요.
회개란 뭐냐 하면, 회개라 하는 것은 주님의 것을 주님께 도로 돌려드리는 그 가벼움이 회개입니다. 회개해놓고 막 억울하고 그러면 안돼요. 주인님께 돌려주면서 “이거 주인님 거지요?” 하고 “이 현찰은 제 것이 아니고 주님 것입니다.” 하고 돌려주면 되는데 “그래. 이제 알았어요.” 가져가려고 하니까 봉투 끝을 안 놓네. “주님 것 드립니다.” “그래 놓으라니까!” “드린다니까요?” “그래 네 뜻 아니까 놔!” 그걸 안 놓으면 회개가 아니에요.
원래 주인에게 주인을 찾아서 돌려드리는데 홀가분해야지요. 남의 것 가지고 치장한다고 하여튼 헛수고한 그것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홀가분합니까. 바로 빼앗아갈 때 영생과 통하는 천국과 통하는 목숨이 우리 안에 있다 하는 것을 우리가 파악할 수가 있는 겁니다.
어쨌든 유월절 이야기를 다시 해 봅시다. 유월절 날 조건이 뭐냐 하면, 어린양의 피의 정신이 살아 있는 한 너희들에게는 학살이 유보되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이 예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주께서 주신 것이 있어요.
그 주신 것, 그게 장차 하나님의 이름이지요. 하나님이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긴, 하나님에게서 떠나서 이 세상에 왔던 그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는 그걸 그리워하고 찾고 있고 만나고 싶어하는 거예요. 하나님 이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의 모습으로 이 땅에서 움직이니까 그게 지금 너의 안에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유보되었으니까, 애굽사람을 향해서 비아냥거리고, 우리는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겠지, 그거 소용없습니다. 그 조건 떨어지니까 유보된 애굽의 비극이 이제는 이스라엘 쪽에 싹쓸이 하듯이 찾아온 것이 오늘 내용이에요.
그렇다면 아까 그 교회 이야기, 내가 보니 네 교회 지옥 가네, 할 때 화낼 것이 아니고 물어야 돼요. “무슨 근거에서 우리가 지옥 간다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면 그 교인들 한 사람 한사람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이 교회 왜 나왔습니까?” 물어보게 되면 “내 목숨 살리려고 나왔습니다. 내 목숨 천국가고 이 땅에 살면서 내 목숨이 윤택하고 내 인생이 잘 풀리고 잘 되기 위해서 왔습니다.”라는 이야기가 들리고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되면 그것은 누가 뭐래도 지옥가는 교회 맞습니다.
맞아요. 자기 것도 아닌데 남의 목숨 가지고 여전히 그걸 쥐고 있으니까. 그거 보면서 지옥 갑니다, 라고 하는 이야기 말고 달리 뭐가 있겠어요? 뭐 대단한 선지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고 성경을 이렇게 슥 봐도 슬쩍 훑어봐도 딱 그거잖아요. 물론 성령을 받아야 되지만.
성령 받고 난 뒤에 성경 보게 되면 ‘아, 인간은 처음부터 도둑놈이구나.’ 도둑놈이 도둑놈 아닌 걸로 버틴다는 그것이 얼마나 한평생을 스트레스 속에서 살았겠습니까? 바로 그 과정이, 오해의 과정이 삼손에게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을 살리기 위해서 준 나실인의 기능을 삼손은 힘으로 이길 줄 알았지요. 왜냐하면 힘이 있으니까. 그 힘이 누구냐? 삼손은 내 힘이라고 본 거예요. 그러면 그 힘은 어디서 나오나? 머리카락에서 나온다는 거에요. 그러면 머리카락이 어디에 꽂혀 있는가? 내 신체에 꽂혀 있지요.
그러면 내 신체는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감히 손 못 대는 신체다. 왜? 하나님이 일을 하려면 내 신체가 유지되어야 되고 그래야 하나님의 뜻대로 이스라엘을 블레셋에서 해방시킬 수 있기 때문에 설마 하나님이 내 신체에 손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이 머리카락에 꽂혀 있는 이 신체에 뭐가 또 있느냐? 거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여자 밝힘증이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 자기가 힘은 있고 또 같은 신체에서 힘도 나오지만 여자밝힘증도 나오니까 삼손은 생각하기를, 어쨌거나 저쨌거나 이 몸을 하나님께서는 안 다치게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머리카락은 다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일하게 여자 세 명이나, 그보다 더 되는지 그건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성경에 나오는 건 세 명이니까, 여자 세 명 밝히면서 살았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마지막 여자가 바로 삼손의 힘보다 더 센 힘을 갖고 있습니다. “자기 나 사랑해?” 그 한마디가 이스라엘 구원하는 나실인의 기능을 다 훼손하고 말았어요. “당신의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다.” 왜? 삼손은 별 근육질도 없었으니까, 보통 평범한 사람이었으니까. 마치 예수님 바라볼 때 예수님의 구원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구원받지 않은 강도가 아무리 살펴도, 이래 봐도 저래 봐도 저 예수라는 맥없이 지금 십자가에 달린 저 쪽에서 구원의 힘이, 악마를 이기는 힘이 나온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는 거예요. 구원 받지 못한 강도의 입장에서.
오히려 뭐가 이상하냐 하면, 저 보잘 것 없는 육신에서 구원의 힘이 나온다는 것이 본인 생각에도 띵한 거예요. 진짜 맨 붕이지요. 그걸 믿는다는 게 맨 붕이에요. 본인이 놀랄 지경이어야 한다는 거예요. 인간의 자기 의가 없다는 것이, 드디어 홀가분하다는 이것이 일반사람들에게 이것은 도저히 믿기지 못하는 거예요.
그러나 진짜 마귀가 떠나서 자기의가 없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인 것을 기쁘고 감사히 받는다는 것은 본인 생각해도 맨 붕 상태에요. 내가 이렇게 시건이 있었나, 이렇게 시건 있을 때가 있었나, 내가 평생 살면서 이렇게 홀가분할 때가 있었어, 이렇게 가벼울 때가 있었어, 이것은요, 차에서 울어도 괜찮아요. 자기의가 떠날 때는 통곡해도 괜찮아요. 속 시원한 통곡 괜찮습니다.
그동안 속은 것, 마귀에게 속은 것을 생각하게 되면 너무 감사해요. 삼손은 죽을 때 얼마나 신났겠습니까? 아, 이 몸을 머리카락에서 힘이 나온 것이 아니고 이 신체 자체가 이게 내 것이 아니고 진짜로 몽땅 다 주께서 쓰실 몸이라는 것을 모든 자기 주특기가 다 빼앗겼을 때에 비로소 알게 된 겁니다.
‘인간은, 이 목숨은 주인님께 돌려드려야 되는데 그냥 돌려주면 안 되고 나실인의 입장에서 돌려줘야 된다. 이게 내 주인이 원하는 바였구나.’ 이걸 삼손이 깨닫는 거예요. 그 삼손의 정신이 예수님이었고 그 예수님의 정신이 성령 받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우리는 지금 즐겁게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주의 은혜가 있습니다, 하는 것을 증거 하면서.
거기에 대해서 또 한 사람 가룟유다는 남의 목숨 가지고 자기가 평생 동안 자기한테 교육시키고 자기지식으로 포장을 해서 아주 범벅이로 내가 이만큼 많이 안다는 것을 뒤집어써서 자꾸 그렇게 살다보니까 아까운 거예요. 그동안 자기에게 공들인 것이 아까운 거예요. 그러면 이 공들인 것 빼앗기기 싫어서, 죽기 싫어서 예수님이 자기의 위협요소가 된다는 이유 때문에 위협요소를 제거하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유다의 이 인간성은요, 지옥 가는 모든 인간에게 다 먹히는 어울리는 인간형입니다. 물론 삼손도 가룟유다같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일관된 작업으로 삼손은 자기 내 목숨이라는 그러한 환상과 시험에서 놀랍게도 벗어났거든요.
그런데 가룟유다는 못 벗어났어요. 그러니까 그 마태복음 26장 24절에서 예수님께서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 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여기 ‘제게’라는 것이 있어요. “네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나라는 것에 대해서 이 하나님이 네가 설정한 네 뜻을 안 따라준 것이 참 네 입장에서는 안타깝다.” 그런 뜻이에요. 왜 쓸데없이 나라는 것을 설정했느냐 그 말입니다. 나라는 것을 자꾸 설정해서 그걸 지키려고 하니까 자기의도 거기에 다 집어넣고, 자기의 집어넣은 그걸 그게 허상인데 그걸 지키려고 하니까 세상은 그렇게 안 돌아가든요.
세상 모든 것은 죽음 일변도라는 말이지요. 왜? 목숨은 주님 거니까. 주님 것을 도둑질해서 있는데 그 현실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마귀한테 속아서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내 목숨은 내꺼다, 내 목숨은 내꺼다, 나는 내 가치를 놓치면 안 돼, 이게 악마가 지금껏 인간세계를 속여 온 거예요.
그런데 구원받은 강도는, 강도질 했다는 그런 것 생각하지도 마세요. 주께서는 그런 것 묻지도 않습니다. 네가 강도냐, 아니냐, 잘했느냐, 못했느냐는 묻지도 않아요. 내가 준 작업이 네 속에 있다면 너는 이미 영생과 통하는 존재가 된 겁니다.
바로 오늘 본문에서 아모스가 “싸그리 다 죽인다, 멸망해버린다. 이제는 하나님 이름 부르지 마라. 이름 불렀다가는 또 죽어. 우리가 하나님 이름 불렀다가 죽었잖아.”라는 이 처참한 북이스라엘의 최후의 모습을 다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 메시아가 오는 징조, 전조, 메시아가 쿵! 쿵! 하는 발자국이 이스라엘 존재 층 저 밑바닥 끝점에서 메시아와 만난다는 징후를 아모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 속에 계속 살아 있기를 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내 것이 아닌 것을 우리가 언제 적 알았습니까? 악마한테 그동안 속은 것이 너무나 분합니다. 주의 목숨 가지고, 주께서 쓰실 목숨가지고 건방떨면서 내 것이라고 우겼던 이 치명적인 오류를 이제는 깔끔하게 던져 버리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