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5:21-27 / 율법 패대기

정인순 2020. 12. 30. 21:28

음성 동영상

 

율법 패대기

이근호
2020년 12월 30일

 

본문 말씀: 아모스 5:21-27


(5:21)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5:22)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5:23)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5:25)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5:26)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5:27)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절기를 지켜라’, ‘제사를 지켜라’라고 명령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들이 신을 기쁘게 하자고 고안해 낸 제도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면 어떤 혜택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철저에 철저를 기하고 완벽에 완벽을 기하면 그 성과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복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그러나 이미 인류의 멸망은 기정 사실입니다. ‘깜깜한 날’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의 조치입니다. 모두 다 멸망입니다. 마치 노아 때처럼 모든 인류는 자신의 자리에서 멸절당합니다. 이러한 심판에는 그만한 정당성이 있습니다. 이 정당성이 곧 ‘정의’요 ‘공법’입니다.

인류가 하나님에게 이처럼 후달리고 쫓기게 된 연유에는 창세기 3장에 나오는 ‘선악과 탈취 사건’이 있습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선악 나무 과실’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래서 ‘정녕 죽으리라’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즉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자신들을 더욱 더 완벽한 삶을 보장할 줄 알았습니다. 마치 신이라고 된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죽음’을 가지고 찾아올 줄 몰랐습니다. 선악을 아는 지식은 ‘죽음’과 결합되므로서 온전히 보존될 수가 있는 과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시범 민족으로 정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그 율법 안에 죽음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을 죽이기 위해 율법을 준 겁니다.

이스라엘만큼은 죽더라도 죽는 이유를 알고 죽게 하고 싶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 율법이 자기들을 멸망시키고 죽이기 위한 용도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율법이 있고 그것을 지키는 자신들만큼은 다른 이방민족과는 달리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마지막 날을 ‘깜깜한 날’로 정해놓으셨습니다. 그 모든 인류가 다 심판받아야 될 날로 정해놓았습니다. 그 심판의 날의 정당성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멸망을 통해서 찾아내시고 구성해내십니다. 신명기 4:16-19에 보면,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은 자기를 위해 형상을 찾게 된다는 겁니다. 자신의 생존의 정당함을 위해 격려해 줄 신을 자신과 같은 형상거리를 대자연물에서 찾게 마련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이 하늘의 별을 신으로 섬기는 것을 결코 별을 섬김이 아니라 별의 존재와 관계를 맺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우상화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위하여’는 우상을 섬기는 기본 동기가 됩니다. 인간은, 눈에 보이고 살아있다고 느껴지는 ‘자기’에 대한 집요한 집착을 포기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뭘해도 모두 ‘자기를 위한’ 일이 되는 겁니다. 이는 곧 자신의 성과와 자신의 노력의 결실은 눈에 보이는 식으로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요한복음 20:29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인간은 ‘보지 않는 것’은 믿음의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온 인류를 대표로 해서 인간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인간들의 한계는 이러합니다. 자신이 시도한 그 일이 자신을 죽이거나 없애거나 부정하는 일들은 애초부터 인정하지 싶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미리 신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떻게든 자신을 살려내고자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이미 확정된 깜깜한 심판의 취지에 부합될 수 없습니다.

벌써 선악지식이 인간 내부에 작렬하고 있는 마당에서 인간에게 있어 죽음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바로 인간의 이런 운명을 담고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고 살리는 율법이 되려면, ‘율법의 완성’을 보여야 합니다. 율법이 완성되면 마치 강물이 거침없이 흘러가듯이 율법의 의로움이 모든 방해물을 넘어뜨릴 겁니다.

이런 율법의 완성을 위해 하나님께서 따로 하나님의 아들을 준비해두셨습니다. 즉 아버지의 아들 관계에 율법이 담겨 있습니다. 이 담겨진 관계는 ‘아들의 죽음’이 생겨나야 성사됩니다. 이 ‘죽음의 일’에 이스라엘이 관여하도록 하나님께서 조치하신 겁니다. 로마서 5:17에 보면, “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넘쳐남’이 곧 의로움의 강물처럼 흐르는 양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과가 아니라 일의 성격이 의롭습니다.

이 의의 완성은 ‘인간이 행하는 일’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그 차이에서 발생된 겁니다. 이 차이에서 ‘하나님의 죽음 사건’이 일어난 겁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따라서 복음 그 자체에서 강물처럼 터져나오는 그 의로움을 인간의 행함으로 훼방하거나 가리거나 보이지 않게 하도록 용납해서는 아니되는 겁니다.

갈라디아서 4:10-11에 보면,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친히 하나님의 아드님이 하신 성과는 하나님에게 감사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따라서 성도가 가질 안목은, ‘감사해 드리자’가 아니라 ‘감사 자체가 되었다’입니다.

이 ‘감사가 됨’을 위하여 성령님께서 쉬지 않고 성도가 하는 일을 가로막고 나서시는 겁니다. 우리 자신이 일을 하면서부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성과에 미혹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에게 물러받은 본성이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우리 성도로 하여금 그 죄에 대한 ‘죄사함’의 의로움을 보게 합니다.

그 의가 우리 몸을 통해서 강물같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 어떤 형편에 있더라도 주님의 의의 증거물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8강-암 5장 21-27절(율법패대기)20123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5장 21-27절까지입니다.

아모스 5:21-27

“내가 너희 절기를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찌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래 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찌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이는 만군의 하나님이라 일컫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하시는 이유가, 앞서 보게 되면 20절에 “여호와의 날이 어찌 어두워서 빛이 없음이 아니며 캄캄하여 빛남이 없음이 아니냐” 이미 여호와의 날은 깜깜한 날, 모든 자를 다 물리치시는 날, 모든 자를 다 거부하시는 날이 여호와의 날로 이미 확정났습니다.

이렇게 확정지어진 이유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심판하시는 그 정당성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 안에 내재되어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20절부터 여호와의 마지막 날은 깜깜한 날이라고 하시고 그 다음에 21절부터 줄곧 23절까지 너희 절기를 받지 않는다, 너희 제사도 받지 않는다, 너희 희생제물도 받지 않는다, 너희의 찬양소리도 받지 않는다, 받지 않는다, 받지 않는다, 이렇게 밀어내시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심판의 폭력성이 율법 안에 이미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어 하시는 겁니다.

율법을, 절기를 지키라고 하는 것도 하나님께서 지시한 일이에요. 출애굽기 23장 14-17절에 보면 “너는 매년 삼차 내게 절기를 지킬찌니라 너는 무교병의 절기를 지키라 내가 네게 명한대로 아빕월의 정한 때에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찌니 이는 그 달에 네가 애굽에서 나왔음이라 빈 손으로 내게 보이지 말찌니라 맥추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밭에 뿌린 것의 첫 열매를 거둠이니라 수장절을 지키라 이는 네가 수고하여 이룬 것을 연종에 밭에서부터 거두어 저장함이니라 너의 모든 남자는 매년 세번씩 주 여호와께 보일찌니라.”

이렇게 절기 지키고 모든 남자들이 절기 때 한곳에 모여서 하나님 계신 곳에 나오라고 지시하신 분은 하나님 쪽입니다. 그들이 마음 합해서 “하나님께 정기적으로 드려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지시한 겁니다.

그리고 제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 1, 2, 3, 4, 5장 죽 보게 되면 소제, 소제라 하는 것은 곡물로서 드리는 것을 소제, 그리고 번제는 동물성 제물로서 대 태워서 드리는 제사, 그 다음에 화목제,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속죄제 드리고 난 뒤에 드리는 희생의 제물 바치는 거창한 제사.

이것을 분명히 레위기 1장부터 2, 3, 4장으로 오면서 이렇게 하라고 하나님 쪽에서 지시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절기도 안 받겠다, 제사도 안 받겠다, 그리고 23절에 노래 소리, 비파소리로 찬양하는 것도 안 받겠다. 왜 이제 와서 하나님께서 안 받겠다고 하시는가?

‘인간이 절기를 잘못 드렸구나. 인간이 제사를 잘못 드렸구나. 인간이 찬양할 때 소프라노가 삑사리 나서 그런 가? 정신없어서 노래 가락을 잊어서 그런가?’ 만약 그런 문제라면 정밀하게 딱 날짜 박아서 절기를 지키고, 그 날 노동도 하지 않고, 제사 드리는 제물은 저울에 달아서 1그램도 빠지지 않게 하고, 조사해서 흠도 티도 없는 제물을 드리면 되고, 노래 소리는, 비파소리는 전문가에게 맡겨서, 아마추어 말고 비파전문가 있잖아요, 정말 잘 치는 사람으로 하여금 드리게 하면 하나님이 받으시겠느냐, 하는 겁니다.

안 받아요. 왜 안 받느냐 하면, 하나님이 율법 줄때부터 마지막에 하나님의 폭력성이 거기 담겨 있기 때문에 심판받기 위해서, 너희들은 심판받으라고 율법을 준 거예요. 인간이 율법에 관심 없고 율법을 안 지켜서 깜깜한 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율법 받을 때 그 율법 안에 심판도 같이 받은 거예요.

이것은 필연적 결과입니다. 안 받는 것은. 시켜놓고 패는 거예요. 딱 시켜놓고 패는 겁니다. 옛날에 전설의 고향, 그런 것 있잖아요. 마음씨 나쁜 시어미가 아무것도 없는 며느리보고 잡채해라 해서 “어머니, 잡채 여기 있어요.” 하니까 “너나 먹어라.” 하고 잡채를 얼굴에 패대기 치는 거예요. 패대기가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거예요. 김치 패대기라든지.

그러면 며느리가 하는 말이 “어머니,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잡채 다시 해 올리겠습니다.” “올리지 마! 원래 잡채 만들 때 잡채는 네 얼굴 패대기치기 위해서 만들었어.” 이걸 며느리가 이해를 할 수가 있습니까? 이해를 못하지요. 율법은 인간이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율법에 의해서 네가 저주받으라고 율법을 주신 겁니다. 앞당겨서 이스라엘이 그 기능을 했고요.

참 하나님께서 심술도 이런 심술을, 하나님은 심술의 극단을 보여주시는 분이지요. 심술의 극단.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율법을 줘놓고 율법을 지키는 그들을 향하여 내가 너희들의 모든 절기도 제사도 다 거부하시는 이유가 뭐냐? 그것은 이스라엘을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죽일 때 하나님께서 대체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자기가 만든 나라, 자기가 만든 백성,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면서 만든 그 백성을 스스로 만들어놓고 스스로 모래성같이 무너뜨리면서, 그런 조치를 하시면서 정작 하나님께서 무엇을 얻고자 그 가녀린, 나약한, 아무것도 모르는 불쌍한 인간들을 상대로 덩치 큰 분이 횡포 부리듯이 이런 식으로 심판을 행사하고 폭력을 행사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얻고자 하시는가,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돼요.

그것은 바로 차이 차이를 얻고자합니다. 간격, 차이, 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준 것은 이스라엘이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이 법을 받을 때 인간은 그 법을 가지고 수행할 때 얻는 결과에 대해서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인간은 율법을 지켜서 거기에 대한 결과를 가지고 자기가 율법 지킨 행위, 그 원인, 그렇게 해서 생긴 그 결과를 보고서 자기가 노력한 것을 신에게 드려서 신을 흡족하고 만족스럽게 하고 싶은 겁니다.

그것은 바로 보이는 내가 어떤 행동을 해서 거기서 보이는 어떤 결과를 낼 때, 성과를 낼 때 그 성과를 하나님께 바치면 보이는 나와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원활한 좋은 관계가 이루어질 거라고 들이밀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율법을 줌으로서 인간이 성심껏 해내는 그 결과물과 그리고 인간 말고 하나님 자신이 이 땅에서 하시는 일에 율법을 성취시키는 일과의 차이를, 폭력을 통해서 그 차이 남을 보이고 싶은 거예요.

아까 예를 다시 들게 되면,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잡채를 만들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며느리는 시어머니 뜻도 모르고 열심히 잡채를 만들겠지요. 그 시간에 시어머니는 노느냐? 아닙니다. 시어머니는 따로 자기 비밀 부엌에 가서 잡채를 만드는데 시어머니는 60년 노하우를 갖고 있어요. 한식의 달인, 자격증만 다섯 개를 가지고 있어요.

시어머니가 따로 잡채를 만드는 겁니다. 며느리는, 초짜 새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잡채를 만드는데 재료는 얼추 비슷하지요. 유사성, 그 유사성을 가지고 25절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그게 바로 우상이라는 겁니다. 율법을 가지고 신을 섬겼는데 나온 결과는 우상이라 그러니까 시어머니가 자기가 만든 잡채맛과 며느리가 만든 잡채 맛, 그게 차이를 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잡채로 며느리 얼굴에 패대기를 치면서 “이것도 잡채냐?” 며느리에게 잡채를 시키는 방법으로 시어머니는 자기 잡채솜씨를 자랑질하고 싶은 겁니다. 누구 앞에? 며느리 앞에. 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일을 심술궂게 하시느냐 하면, 처음에 창세기 2장과 3장에서 하나님께서 분명히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어요. 선악과 따먹지 말라, 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뭐가 중요하냐 하면,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필히 반드시 죽으리라.”가 딱 연결시켜 놓은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죽으리라, 를 끊어버린 겁니다. 죽으리라, 가 붙어 있지 않는 선악과는 선악과가 아닙니다. 그것이 선악과가 아니라는 말은, 죽음이 떨어져버린 선악과는 선악과의 완료, 완성이 될 수가 없어요.

하나님께서 선악과 심어놓은 그 취지가, 죽음이 달려 있지 아니하면, 꼬리 붙어 있지 아니하면 그것은 선악과 값을 못하는 겁니다. 가짜 선악과에요. 인간에게 악마가 달라붙어서 죽음이 빠진 선악과, 지식만 탐을 내서 악마의 부추김을 받아서 인간이 따먹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선악을 아는 지식 자체가, 인간이 선악으로 아는 모든 것들이 시어머니가 인간이 아는 모든 것을 도로 인간에게 패대기 칠 수 있는 근거를 인간 쪽에서 만들어낸 게 돼요. 선악과를 따먹고 선악을 아는 지식과 하나가 되었으니까, 그러니까 선악가지고 부지런히 뭐든지 하는 거예요. 보이는 내가 선악의 논리를 집어넣어서 열심히 어떤 성과를 내서 그것을 드리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들이 제시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방식과, 처음부터 선악을 알지 말라고 했던 알게 되면 정녕 죽는다 했던 그 따먹지 말라고 하셨던 그 하나님이 생각하셨던 선악의 완료와, 두 개의 잡채를 비교해보는 거예요. 이정도 하면 인간이 잡채 패대기 맞을 만 하지요.

더 과격한 예를 든다면 하나님 식구가 식당에서 치킨을 사먹는데 거기에 인간도 같이 참석을 했어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당부했어요. “마지막 남은 닭다리는 먹지마라. 거기에 폭약이 묻어 있으니 먹지 말라. 터져 죽는다.” 했는데 인간이 닭다리, 처갓집 통닭이죠, 그 자리에서 닭다리를 먹은 것이 아니고 그 닭다리를 집고 후다닥 화장실에 가서 혼자 먹는다고 하다가 화장실이 폭파되었어요. 그게 깜깜한 날이에요. 그게 인간의 운명입니다. 어쩔 수 없어요.

화장실 폭파되기 전에 주님께서 화장실 문을 조금 열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절기라는 율법, 제사라는 율법을 툭 던져줬다 그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들은 그게 수류탄인지도 모르고 ‘닭다리 다음에 이건 날개가 나오네. 먹자.’ 먹어보니 그게 폭파해버린 겁니다. 심판받아 완전히 폭파해 버린 거지요.

화장실 문 열어보니 얼굴이 완전히 시커멓게 되어서 머리카락도 다 타버리고 옷도 다 찢어져서 기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왜 범죄 한 인간을 계속 살려두시는가? 살려두는 것이 아니고 죽음을 살려둔 거예요. 죽을 존재를 살려둔다는 것은, 죽음 자체, 죽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으며 왜 선악과 따먹으면 정녕 죽어야 되는가,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서 선악과 따먹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계속해서 하나님의 실습대상으로 사용하신 거예요.

그 실습대상에 가장 전형적인 하나의 조교처럼 시범케이스처럼 사용한 것이 이스라엘이에요. 하나님이 던져준 율법을 그들은 시키는 대로 절기를 지켰고 시키는 대로 제사를 드렸는데 나중에 뻥 하고 폭탄 터지듯이 깜깜한 날, 저주의 날, 심판의 날이 된 겁니다.

그들이 심판받는 날이 27절에 나오지요.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다메섹이라 하는 것은 율법을 모르는 앗수르 나라에요. 하나님을 모르는 앗수르 나라에 사로잡혔다는 말은, 결국은 시범조교의 역할을 끝내고 이제는 도로 같은 인간류, 같은 인간종류로 그냥 다 합류하도록 내 맡긴 겁니다. 써먹을 데 다 써먹었다, 하고 같은 족속끼리 잘 해보라 하고 그냥 넘겨준 거예요.

그 넘겨주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할 일이 있습니다. 그 할 일이 26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게끔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겁니다. 신명기 4장 19절에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께서 이미 모세를 통해서 예언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약간 어려운 대목인데요. 지루하지만 16절부터 19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두렵건대 스스로 부패하여 자기를 위하여 아무 형상대로든지 우상을 새겨 만들되 남자의 형상이라든지, 여자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있는 아무 짐승의 형상이라든지, 하늘에 나는 아무 새의 형상이라든지, 땅 위에 기는 아무 곤충의 형상이라든지,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아무 어족의 형상이라든지 만들까 하노라 또 두렵건대 네가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어 일월 성신 하늘 위의 군중 곧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천하 만민을 위하여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 그것에 경배하며 섬길까 하노라.”

“분정하신 것을 보고 미혹하여”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방민족들이나 섬기는 신들, 그게 바로 이방민족이 이방민족화 되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일월성신 별들을 하늘에 박아 두었다 그 말입니다. 20, 21절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택하시고 너희를 쇠풀무 곧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사 자기 기업의 백성을 삼으신 것이 오늘과 같아도 여호와께서 너희로 인하여 내게 진노하사 나로 요단을 건너지 못하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그 아름다운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은즉……”

이렇게 죽 나오는데 이게 왜 제가 어렵다는 말을 하느냐 하면, 그들이 세상에 있는 형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갔다는 거예요. 그게 우상이라는 겁니다.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 했거든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자신은 이 땅 어떤 형상화가 될 수 없다는 거예요. 형상화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인간들은 일단 자기가 눈에 보여요. 눈에 보이니까 눈에 보이는 것으로 시작해서 어떤 결과물을 내는데 어떤 결과물을 보고 싶어 하느냐 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결과물은 인간은 싫어해요.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내고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선물이 우리를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다, 그러고 싶은 거예요, 인간은.

보이는 것부터 해서 보이는 것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그게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의 범위에요. 범주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말씀 하셨어요. 인간들이 들으면 정말 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정말 실천에 옮기기 힘든 이야기를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 이야기했어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인간은 뭔가 본다는 그것이, 본인의 구원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내가 눈에 보인다는 그것이 가장 심각하고 결정적인 방해가 되고 장해가 되는 거예요. 본다는 그것, 뭐든지 형상화 되어서 자기 앞에 하나의 개념으로 만들어진다는 그것, 그것이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결정적인 방해물이에요. 보는 것을 본다고 하는 그것이 잘못이라는 거예요.

“홍시 맛이 나는데 어떻게 홍시가 아니라고 할 수가 있습니까?” 드라마 <대장금>에 나오는 그 대사처럼 홍시를 홍시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게 왜 홍시가 아닙니까, 라고 한다면 아마 새댁이 시어머니한테 홍시 따오라 하니까 자기가 홍시라는 형상을 눈으로 보고 손으로 조심스럽게 따서 쟁반에 담아서 “어머니, 홍시 가져왔습니다.” 하니 시어머니가 “이것도 홍시냐?” 해서 홍시 패대기를 쳐버린 거예요.

그러니까 며느리가 하는 말이 “홍시를 홍시라 하는데 이게 뭐가 나쁩니까?” 이렇게 된 거예요. 시어머니가 하는 말이 “내가 홍시라고 한 그 홍시는 눈에 보이는 홍시가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홍시를 말한다.” 이렇게 한다면 며느리가 속으로 뭐라고 하겠습니까? ‘미쳤구나. 이 동네가 완전히 미쳤구나.’ 그러면 시키지를 말든지, 자기가 알아서 하든지.

그렇게 잘난 시어머니 자기가 홍시 직접 따서 먹든지, 왜 그렇게, 안다는 분이 잡채 자기가 만들어서 먹든지 하지 시키기는 왜 시키느냐 그 말이거든요. 그 질문을 나오게끔 하겠다는 그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그게 바로 오늘본문 34절에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찌로다.” 이 대목이요.

앞에 절기 지키는 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이 공법이라 여겼어요. 그 다음에 제사지내는 것을 하나님의 정의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홍시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잡채가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흐르려면 이것은 고정화되고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고, 흐른다는 말은 이게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거예요.

어떤 특정 입자에서 나온 파동이 되는 겁니다. 파동은 실체가 없어요. 연못 한복판에 돌덩이를 던지면 거기서 물결이 생기잖아요. 물결은 결코 돌멩이가 아니에요. 물결은 원인을 제공한 그 실체가 아닙니다. 인간들은 보이는 자기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모든 행동이 보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보이는 것으로 계속 나가요.

그러나 하나님의 공법과 하나님의 원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고 그냥 흘러가는 거예요. 그냥 흐르는 거예요. 흐르는 물이 아니고 그냥 흐르는 거예요. 그냥 흘러가는 것. 이렇게 설명해서는 모르고 하나의 예를 들어야 돼요. 양동이에 물을 담는데 물의 수위를 봐서 다 찼다 싶으면 물을 잠그려고 했거든요. 제가 옛날에 그런 적이 있어요.

그런데 물 받는 속도가 별로인 듯싶어서 방에 들어가서 책을 보고 있었나, 하여튼 할 일을 하고 있었는데 가만 보니 이상하게 내가 뭘 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밖에 나가 보니까 양동이에 물이 이미 넘쳐서 베란다가 물 천지가 되고 말았어요.

이게 뭐냐? 로마서 5장에 하나님의 의가 왕 노릇 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의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 정도면 의입니다, 라고 하는 것, 내가 이정도면 착합니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 그게 하나님의 의가 아니고 우리가 생각하는 그 양동이가 흐르고 넘쳐나는 거예요. “이것도 의입니까? 이것조차도 의에요?” 할 정도로 놀랄 수밖에 없어요.

왜 그러냐 하면, 물이 흐르고 넘친 것은 내가 예상한 이 정도 되면 하나님 의라는 그 범위를 훨씬 넘어서서 그걸 뭐라고 하느냐? 충만이라고 해요, 충만. 가득 채우고도 남는 것, 측정불가, 예수 그리스도 하신 의가 우리에게 임하면 그 의는 우리를 죄 없는 무죄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감당하지 못할 의가 터져 나오는 거예요.

옛날 구정 때 촌에 쌀 튀밥 튀기잖아요. 돌아가는 무쇠 솥에 쌀 집어넣고 애들은 귀 막고 있다가 주워 먹으려고 하고 있고요. 망태기를 대고 뻥 하고 튀기는데 터지면 그 앞에 있다가는 얼굴 시커멓게 되고 쌀 튀밥으로 뒤집어쓰겠지요.

하나님의 의로 그 앞에 있다가, 십자가 앞에 있다가,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그 의로 우리 앞에 뒤집어쓰는 거예요. 뭘 따로 의롭고 할 것도 없어요. 나 자체가, 행동 자체가 전부 다 의의 충만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그거예요. 내가 따져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모독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하신 일은 내가 예상하는 일을 훨씬 넘어서는 겁니다.

그럴 때 그걸 뭐라고 하느냐? 정의가 흘러넘친다고 해서 흐른다고 하는 거예요. 정의가 어떻게 흘러넘치는가? 강물같이 정의가, 하수, 하수도가 아니고 한강처럼 넓은 강같이 거침없이 어떤 것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누가 막아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의를 마귀가 막습니까? 내 죄가 막습니까? 못 막아요. 주님의 의, 십자가에서 터져 나오는 그 하나님의 의의 폭발을 누가 막습니까? 못 막습니다. 그게 바로 율법의 완성이에요. 그게 시어머니가 만든 잡채에요. 시어머니가 원하는 홍시가 그 홍시입니다.

그 차이, 그 차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혼자 할 수도 있는데 이스라엘한테 먼저 시키는 거예요. 인간의 대표로서 이스라엘에게. “네가 한번 율법 지켜봐라.” 그들은 율법을 어떻게 지켰느냐 하면 자기가 눈에 보이는 어떤 실적으로 확인이 되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의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내 병이 낫기를 간절히 기도했는데 병이 나았다. ‘아, 이건 하나님의 의로움, 하나님이 의롭다고 나에게 주신 선물이구나.’라고 그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 병 나은 그것 가지고 패대기를 쳐버리는 겁니다. “이게 흐름이냐, 이게? 이게 눈에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어야 그게 믿음이에요. 이 말은, 눈에 보이는 것은 전부 다 없애버리라 그 말입니다. “눈에 보이는 네가 눈에 보이는 어떤 업적과 실적을 끄집어냈거든 그런 것은 전부 다 하나님의 선물이 아닌 것으로 다 치워버려라.”

액체처럼 흐르는 것, 고체로 사물처럼 스톱되고 규정할 수 있고 측정 가능한 것이 아니고 흐르는 것은 측정이 안돼요. 그 자체가 충만인데 어떻게 측정합니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끊을까요? 끊을 수가 없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힘들다, 고민 된다, 걱정 된다, 두렵다, 공포 스럽다, 하는 말은 이게 흐름이 아니고 입자가 되어서 툭툭 끊어져서 그래요.

여기서 여기까지는 되었는데……, 예를 들어서 이번 중간고사에서 백점 맞았다. 그러면 기분좋다, 잠시 뿐이에요. ‘다음에도 백점 맞아야 되는데 백점보도 더 상한선은 없을까? 백점 플러스 백점, 그런 것은 없나?’ 또 걱정이 되는 거예요. 이게 흐르고 넘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열심히 노력해서 이만한 성과를 얻었다는 거예요. 그 백점 가지고 패대기쳐버려야 돼요.

그러나 그것은 네가 원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지요. 바로 네가 원하는 것을, 네 속에서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죽을 수밖에 없는 근거를 주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뽑아내려고 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26절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하늘의 별을 보면서 아마 우리 하나님은 저 별처럼 저렇게 아름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별 하나에 나 하나……, 이런 시구를 붙인 독립투사도 있잖아요. 윤 동주. 윤 형주 집안이죠. 인간은 결코 별을 신으로 만든 게 아닙니다. 여기 분명히 나와 있어요. 너희 우상 기윤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별을 신으로 섬긴다는 말은 별과 자기를 연관시키는 것은, 내가 ‘나는 안 죽어야 되고 내가 하는 모든 성과는 하늘로부터 칭찬받아 마땅하다.’라는 자기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응원하고 충성하기 위해서 별을 이용한 거예요.

결국 신은 누가 신이냐? 본인이 신이 되는 거예요. 신이 되든 누가 되든 나는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악마와 결탁되어 있는 인간이 악마의 품성으로 이미 변했다는 겁니다. 거기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거예요. 그러면 절기를 지키지 말라 할 때 절기를 왜 줬는가?

거기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4장 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 했으니까 너희를 위해서 수고한 것, 너희들은 날과 달과 절기를 하나님이 지시한 율법이기 때문에 지켜야 된다고 하는데 그러나 인간이 지키는 것과 인간이 만든 잡채지요. 그리고 주님께서 하신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복음, 십자가 복음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 복음에 뭐가 있느냐? 폭력성이 개입되어 있어요. 죽음이 개입되어 있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은 무슨 과정을 경유해서 완성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자신의 죽음, 폭력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그 내용이 들어 있을 때만 율법의 완성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인간들은 율법, 죽으려고 법 지키는 것 없어요. 전부 다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리기 위해서 법을 지키는 겁니다. 인간이 만드는 잡채하고 하나님이 만드는 잡채하고 차이가 나요. 그 차이에서 뭐가 나오느냐? 진정한 강물같이 흐르는 율법의 완성이 나오는 거예요. 그 차이에서. 주님 십자가 지시고 그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한다, 이러면 안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 지셨다면 우리는 우리가 하는 우리 본성대로 뭘 해야 돼요. 꼼지락꼼지락 뭘 해야 된다고요. 며느리한테 잡채를 시켜 줘야 돼요. 자기 딴엔 ‘아마 시어머니를 기쁘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지.’ 아니지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을 경유해서 하나님조차도 나에게 뿅 갔다, 그 이야기를 듣는 내가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는 인간이 애초부터 선악과 따먹은 그 자체가 죽을 수밖에 없는 극한적인 범죄고 잘못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겁니다. 그러면 율법의 내용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관계, 아버지와 아들관계인데 그 관계가 그냥 성립되는 것이 아니고 그게 완성되려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예수님에게 맡긴 율법은 반드시 인간들에게 맞아죽는 처참하게 무시당하고 맞아죽는 그 내용이 포함될 때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형상입니다. 그래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는 겁니다.

십자가는 보이지 않습니다. 왜? 우리는 맨 날 나만 쳐다보기 때문에. 나 쳐다보는 것이 우선이기 때문에 내가 이만큼 인생 살아온 것이 다 내덕이다, 라고 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런 너 때문에 내가 죽었다. 너 어느 것 믿을래?”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론상 십자가만 믿습니다, 이러고 있지요. “십자가만 진짜 믿는다면 네가 암에 걸려 죽는 것도, 그것도 하나님의 의로운 작업인 것도 네가 받아들이겠느냐?”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하려고 애를 씁니다. 제가 하도 감사, 고맙소, 이런 말을 많이 하니까 감사하고 고맙소, 가 나오면 그게 성령의 일이라 했으니까 뭘 해도 뒤에 감사, 고맙소, 이렇게 붙이고 싶은 거예요.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고맙소, 하세요.”라는 말이 아니고 “당신자체가 하나님의 감사가 되었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 자체가!

감사를 할까요, 아니면 감사가 될까요? 우리 자체가 주님의 솜씨가 되어야 된다 그 말입니다. 이 말은 보이는 것을 보지 말라는 말이 아니고 보이는 나를 통해서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나에게 주님께서는 기뻐하시고 감사한 대상으로 보시는 주님의 그 죽으심의 공로가 우리 몸에서 강처럼 흘러나오는 겁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 우리 몸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거예요. 우리의 행동을 통해서

따라서 인간은 본성대로 살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의 말씀은 늘 본성대로 사는 우리를 앞에서 가로 막아요. 항상 가로막게 되어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사실은 모든 것이 유혹으로 작용하거든요. 십자가는 보이지 않잖아요. 그런데 보지 않고 믿는자는 복이 있다, 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제시하는데 우리는 보이는 것 나부터 보이니까, 나부터 챙기려고 하고 보이는 것 챙기려고 하니까 그 보이는 것이 안중요한데 그게 하나의 중요한 것처럼 우리의 유혹거리가 된 거예요.

그 유혹의 본성은 어디서 왔는가? 선악과,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탐스럽기도 한 그 선악과를 유혹했던 그 본성이, 아담의 본성이 아직도 여전히 우리 안에 계속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성과주의, 남에게 내세울 것, 늘 자기반성하면서 ‘이정도 하면 나도 신자라 할 수 있잖아.’ 자꾸 보이는 나와 보이는 성과에 대해서 잘해보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놓고 성경에서 감사하라고 하니까 이제는 감사까지 거기에 덧붙여서 옵션으로 해서 ‘이제는 완벽하겠지’ 그런 짓거리를 했으니까 이스라엘이 깜깜한 날로 패대기를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깜깜한 날 패대기 당해도 “그것조차 우리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이뤘던 완성에서 나온 그 죽음이라면 그 죽음에 합류시켜 주옵소서.”

왜? 그게 하나님의 감사거리가 된다면 언제든지 우리는 늘 죽을 마음 자세가 되어있는 그것이 바로 우리 몸을 통해서 진정한 하나님의 율법 완성, 하나님의 의가 강처럼 흘러나오는 상태 흐르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흐르는 파동이 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늘 일하고 계시는 주의 일, 우리는 그것은 보지 못하고 오늘도 열심히 몸이 부서져라 피곤하게 일했던 자신의 서글픔만 부각되고 신경 쓰고 있습니다. 내가 나에게 유혹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주여, 성령께서 찾아오셔서 그것마저 주께서 아름다고, 기쁘고, 감사거리인 것을 저희들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