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5:14-17 / 눈 물

정인순 2020. 12. 16. 21:52

음성 동영상 Youtube

 

눈 물

 

이근호
2020년 12월 16일

 

본문 말씀: 아모스 5:14-17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5:16)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꾼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5:17)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북이스라엘을 온통 울음바다로 만들어버립니다. 아름다운 터전을 고대했던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참으로 비극적인 예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러한 비극을 유발하셔야 했는지를 이스라엘은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감추어진 하나님의 뜻이 유일하게 벌어지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성문들이 있고 이 성문에서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반드시 들어야 될 하나님의 뜻을 전하게 됩니다. 이 성문에서 알려지는 대 취지는 현재 이스라엘은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해야 한다는 겁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기본적으로 악을 찾는 이는 없습니다. 모든 자는 자신이 그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나는 옳고 정당함을 여전히 갖고 있음’을 나타내고 싶어합니다. 여전히 이 땅 위에서 삶을 영위할 권리나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보이고 싶은 겁니다. 반대로 “여러분, 저를 죽이세요. 저는 죽어 마땅합니다”라고 남들에게 요청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즉 사람들은 상식적으로 선을 원하고 악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으로 향하는 방향과 악으로 향하는 방향이 서로 반대라서 만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에 개입하면서 이 모든 시도가 ‘죽음의 자리’를 유발하게 만든다고 하십니다. 이는 인간들이 생각하고 있는 선과 악의 이해와 하나님의 이해가 서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이 이해하는 선과 악은 자기 자신이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사는 방편으로 여깁니다. 즉 인간들이 선이라고 여기는 것과 악이라고 여기는 이해는 근거는 자신을 마지막 의미와 가치로 잡은 상태에서 나온 것입니다. 나의 생존에 유리하면 선한 일을 했다고 믿고, 자기 생존과 가치에 흠이 된다면 악이라고 여깁니다.

왜 이렇게 잘못되게 선과 악이 활용되는가 하면, 그것은 원래 선과 악이 자리잡은 그 조건을 폐기되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선과 악의 나무 과실을 훼손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악마의 사주를 받고 인간은 선과 악 지식을 어디에다 꽂아버렸는가 하면, 절대적 자아 의식에다 꽂았습니다.

이는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절대화하는 것이 곧 선의 최종 목표가 된다는 인식을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러합니다. 선과 악의 지식은 본래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본래의 자리란 곧 하나님의 자리입니다. 선과 악의 지식은 하나님만이 알아야 하는 내용인 겁니다.

피조물인 인간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만들기 위한 선악지식이어서는 아니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만약에 선악지식을 원래 자리가 아닌 다른 자리에 있다고 한다면 그 자리는 죽음을 맞이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악지식을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해 움직이십니다.

여기서 일련의 과정이 만들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서 찾아오시면서 율법을 퍼붓게 됩니다. 이 율법을 따라 하나님께서 내려오십니다. 이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요구하는 바는, 너희 인간들이 알지 말아야 할 선과 악의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아무리 선하고 아무리 악을 버리는 식으로 살아도 인간의 마지막 모습은 눈물을 흘려야 할 지경이라는 겁니다.

율법을 전하던 그 성문 앞은 눈물바다가 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게 된 과정이라는 겁니다. 인간 세계는 차등의 세계입니다. 차등을 통해서 의미를 발생시킵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은 그릇을 하나 만들어놓고서도, 저 그릇을 부피 단위를 붙여 사용하지, 무게 단위로 붙여 사용할지 길이 단위를 붙일지. 아니면 ‘몇 호?’라는 식으로 순서를 둘지는 결정하면서 나름대로 질서와 체제를 세웁니다.

여기에 ‘훈련된 언어’가 동원됩니다. 이 훈련된 언어를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서열이 발생합니다. 더 중요한 자와 덜 중요한 자가 인식됩니다. 소위 직업의 다양성이 발생합니다. 이로서 인간 사회는 각자 나름대로 의미를 사회로부터 배치받고 그것에다 자신의 최종 가치를 두게 됩니다.

하지만 어느 인간도 자기 속에 박혀있는 선악 지식을 원래 주인되시는 하나님에게 되돌려줄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선을 추구해도 막상 쏟아지는 율법의 세례 안에서 온전히 의를 세울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마지막은 눈물로 끝납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눈물 흘려야 마땅한 운명을 지니고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눈물이란, 인간들이 긴 세월동안 공들였던 그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눈물보다 더 시시하고 하잖은 것에 불과하다는 말입니다. 눈물을 환원될 수밖에 없는 것들에 인간들이 무슨 대단한 것인양 왜곡해서 그런 것들 속에 자신의 최종 터전을 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곧 자신의 집이 무너지는 위기를 느끼게 때문입니다.

하지만 택한 백성 이스라엘에게 있어 ‘일괄적 눈물’이란 하나님의 일관된 계획의 일환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이러합니다. ‘긍휼을 받아 등장하는 요셉의 남은 집’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이는 마치 꿈을 얻게 된 요셉이 아버지 요셉으로부터 완전히 ‘잃어버린 자’를 배제된 상태에서 ‘언약의 남은자’로 무사히 야곱과 합류가 되는 과정을 반복하는 겁니다.

시편 126: 5-6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완성, 곧 생명나무 과실을 먹게 된 자의 등장을 위해 친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내에 오십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온통 눈물 바다가 되어 자기 자신에게 절망을 하지만, 야곱에게 있어 요셉처럼,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을 일방적으로 성취하듯이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오셔서 ‘요셉의 남은자’를 기어이 발생시키십니다.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전했던 그 성문으로부터 시작해서 바깥으로 추방되게 됩니다.

히브리서 13:12-14에 보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예수님께서 친히 ‘요셉의 남은자’로 오셔서 바깥에서 새로운 긍휼의 선물을 제공하십니다.

그 결과가 요한계시록 21:4에 나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즉 진정한 선악지식의 주인되시는 예수님 있는 곳에만 선악지식의 완성으로 있어야 하는 겁니다. 거기서 성도는 생명나무과실을 먹습니다.(계 22:2)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친히 자신의 것을 찾아내시는 과정을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녹취:오용익

16강-암 5장 14-17절(눈물)2012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5장 14-17절까지입니다.

아모스 5:14-17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군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은 기본상식에 속하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는 어떤 대상자가 여기 나옵니다. 그게 바로 “너희는……” 이렇게 되어 있고요. 그 다음에 너희는, 방향이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산다는 것은, 창세기 2장에 보면 산다는 것은 생명나무가 있을 경우에만, 생명나무과실을 먹을 경우에만 살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선을 구한다는 것은 곧 생명나무 과실을 구하는 것입니다.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할 때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선악과 따먹은 그런 쪽으로 두 번 다시 그런 행위를 보여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고 언질을 준 거기에 대해서는 탐을 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러한 선이나 악이라든지 산다는 모든 개념은 어디서 나왔는가? 14절에 보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만군의 하나님이 없을 경우에 너희들이 생각했던 선과 악과 사는 것, 그것하고 하나님이 함께 있을 때 선이라는 개념, 악이라는 개념, 산다는 개념은 바로 함께 계신 하나님에 의해서 새롭게 제시되는 겁니다.

함께 있다는 그 상태, 그 상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디를 주시했느냐 하면, 이스라엘이 살던 그 성문을 주목한 거예요. 15절에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성문은 모든 이스라엘이 다 한자리에 집중해야 되고, 주목해야 되고, 다 모여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기 위해서 동일한 의식체제가 선포되고 반포되는 그 지점이 성문입니다. 성문에서 공법이 전파되고 공의에 관한 사항이 알려지는 그 지점 그 성문을 하나님도 같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문에서 어떤 소식이 들리냐 하면, 요셉의 남은자를 긍휼히 여기신다, 불쌍히 여기신다는 조치가 주어지는 겁니다. 긍휼이 주어지게 되면 긍휼을 받은 자들을 뭐라고 규정할 수 있느냐? 요셉의 남은자 이스라엘이지요. 특히 북 이스라엘은 요셉지파가 있던 그 동네입니다. 요셉의 남은자들이 어떤 혜택을 받느냐 하면, 불쌍히 여김을 받는 혜택이 성문에서 제공이 된다는 겁니다. 조건은 뭐냐 하면, 너희가 선을 찾을 때 그렇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조건을 달아놓고 그 다음에 16절부터 보게 되면, 거기에 어떤 경과가 나오는데, 어떤 과정이 나오는데 그 과정이 뭐냐 하면, 모든 광장에서 사람들이 울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이 모든 광장에서 울겠고 모든 거리에서 오호라 오호라 하겠으며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울음군……” 장례치를 때 전문적으로 울어주는 사람, 슬픔의 분위기를 조장해주는 일군, 호곡군이라 하는데 곡해주는 사람, 곡해주는 아르바이트 하는 그런 사람이지요, 그런 사람, “울음군을 불러다가 울게 할 것이며”

그런데 되면 일체 울음 외에는 아무것도 없게 만드는 상황으로 되고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이유가……, 농부, 포도원의 농부지요,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음이 나오고 이런 가운데서 누가 지나가느냐? “모든 포도원에서도 울리니 이는 내가 너희 가운데로 지나갈 것임이니라.” 내가,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지나가게 되면 주변상황은 울음바다가 된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앞에 설명한 것과 뒤에 설명한 것이 연결이 될 때는 어떤 경우가 되느냐 하면, 공법과 정의로움, 먼저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알고 있는 정의 하나님이 알고 있는 공의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마 알려줬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제시한 그 공의와 이스라엘은 망해가면서, 울어가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잘못된 해석으로 인하여, 잘못된 태도로 인하여 전혀 하나님이 요구하는 그 공의로움과 맞지 않는 그 격차, 그 차이를 제대로 드러내는 기능을 이 세상 모든 민족을 제켜두고 이스라엘은 그 기능을 해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가 뭐냐? 그것은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산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그러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말씀 안에 다 들어 있어요. 그 말씀으로 인하여 무엇이 부각이 되느냐 하면, 진정한 생명 생명나무 과실을 너희가 따먹을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드러내시는 거예요.

에덴동산에 살아 있다, 라는 자체가 영원히 사는게 아니라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조건을 유지하는 한 너희들은 생명나무를 따먹을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하나님의 공의고 정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입장에서는 인간보다 뭘 강조하느냐 하면, 선악과 취지와 생명나무 취지를 인간보다 우선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보다 하나님 자신을 더 우선시 한다,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명예를 더 우선시 하는 거예요. 따라서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 인간이 건너갈 수 있느냐? 외람스럽게도 건너갈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인간은 하나님보다 자기가 우선되는 의식에 파묻혀 있기 때문에, 그게 바로 나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면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정의로움과 하나님의 뜻으로 나를 거기다 이동시킬 수 있는 그런 능력은 인간에게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공의와 뜻을 하나님 쪽에서 포기하느냐? 절대로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하나님께서 택한 이스라엘 속에 오셔서 인간들에 의해서 훼손되어 있는 하나님의 정의와 뜻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실현시키는 겁니다. 실현시키기 위해서 등장되어야 될 그러한 단체가, 집단이 바로 요셉의 남은자에요.

요셉은 남은자를 긍휼히 여겨서 요셉의 남은자가 등장했다는 말은, 제대로 된 하나님의 뜻을 반영하는 그러한 새로운 이스라엘이 등장할 때까지 하나님의 뜻과 정의는 이 땅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서, 지상의 역사 속에 있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전개되는 겁니다. 전개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예요.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말은 선악과를 폐기시킨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가 있던 자리는 이제 없는 거예요. 선악과 있는 자리는 선악과가 훼손되지 않는 상태에서 선악과가 있어야 되는데 선악과를 건드려버렸으니까 선악과라 할 수 있는 선악과는 비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러면 선악과는 어디로 이동했는가? 선악과는 있는 자리에서는 폐기되고 인간 안으로 선악과가 들어와 버린 거예요.

이렇게 되면 선악과가 원래 있던 자리, 인간의 침범을 받지 않아야 될 그 자리가 훼손되고 이제는 있지 말아야 될 인간에게, 선악과 지식이 인간 쪽에 와 버린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여기에 대해서 양보 없지요. 그러면 본래 있던 선악과 자리를 나님께서 되돌려 줘야 되지요.

선악지식을 아는 인간을 에덴동산에서 내쫒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자리에 원래 있던 선악자리는 사라지고, 비어 있고, 없어지고 인간에게 선악자리가, 선악의지식이 작렬하게 되고 원래 선악은 인간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 그 선악은 어울리거나 맞지를 않는 거예요. 인간에게 저주와 고통이 따르게 될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그걸 죽음이라고 이야기 하셨는데 본래의 자리에 되돌리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나서는 겁니다. 원래 있던 자리, 그 자리는 하나님이 계신 자리로 선악나무가 있어줘야 되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의 선악을 모르는 상태에서. 선악과에 대비되는 것이 오늘 본문에 나오지요. 긍휼, 불쌍히 여기는 것, 그냥 사랑을 베풀어주는 겁니다.

사랑은 선과 관계없어요. 요셉의 남은 자를 하나님께서 전제를 하시고 이제 인간세계에 찾아가십니다. 내 것 돌리도, 이런 식이지요. “내 것 돌리도(돌려줘)!” 오늘 본문에 14절에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찌어다.” 여기 선과 악에 대해서 언급을 하십니다. 그런데 아모스가 전하는 이 말씀 자체가 이스라엘한테는 굉장히 낯설어요.

왜냐하면 모든 인간은 악을 구하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선을 구하고 있습니다. 선악 지식 가지고 인간이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면, 자기를 더 악하게 하기 위해서 활용하겠다는 인간은 없어요. 아무리 나쁜, 악한 범죄인이라도 나름대로의 내 가는 방향은 선한 쪽입니다.

“사회적으로 환경이 안 되어서 그렇지 나는 선한 쪽입니다. 나는 근본적으로 악한 사람은 아니고 선을 추구하려는 사람입니다.”라고 선과 악을 자체적으로 두고서 악은 멀리하고 선은 가까이 하려는 것이 모든 인간의 공통점이에요. 극악무도한 어떤 인간도 다 이유가 있고 명분이 있습니다.

스탈린이라는 사람은 자기 국민 1500만을 죽였거든요. 신기록 세웠어요. 1500만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후대가, 공산주의가 잘살기 위해서 약간의 희생물이 필요하다 그 말입니다. 약간, 1500만, 약간이지요, 약간.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어서 자기는 선지자기 때문에 거추장스러운 것은 좀 제거해도 제거할 명분이 있다는 겁니다. 나름대로 전부 다 선을 추구하기 때문에. 히틀러도 마찬가지고요.

사람들은 선한 쪽과 악한 쪽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간다고 생각해요. 방향이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선과 악이 서로 만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는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리겠다는 그 인간들에게 선과 악이 결국은 한 곳에서 만나도록 하나님께서 주선을 해주시는 겁니다.

그 만나는 지점이 뭐냐? 울음이에요. 우는 장소에요. 온 백성이 다 우는 장소, 그 우는 장소에서 우리가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렸다는 것이 하등 쓸모 짝이 없다는 거예요 우리의 선악지식 가지고 백날 적용해서 울지 않기 위해서, 늘 웃기 위해서 노력했던 모든 것은, 그 선악지식은, 마지막 그 최후의 지점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다 우는 지점으로 모이게 되는 겁니다.

상대적으로 악한 자도 울고, 착한 자도 울고, 너도 울고, 나도 울고, 다 울고 있는, 그 우는 데는 직업도 필요 없어요. 우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호곡군이냐? 상관없어요. 차이 없어요. 모조리 다 울고 있어요. 왜 우느냐? 사람이 우는 이유가 자기 집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마지막 자기를 편안하게 모실 그 집이 없으면 사람들은 울게 되어 있습니다.

눈에 뭔가 먼지가 들어가서 우는데요? 먼지가 들어가면 내 신체의 안정성이 깨지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우는 겁니다. 원래 인간은 안 울어야 돼요. 왜냐하면 눈물샘이 눈알을 늘 촉촉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콧물로 빠지게 되어 있는데 외부의 자극을 받게 되면 이게 오버가 되어서 눈물샘에서 눈물이 많이 나와요. 눈으로 안 나오고 콧물로 빠져야 될 것이 눈을 통해서 나오면 그걸 눈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왜 자극을 받으면 눈물샘에서 눈물이 많이 생산되는가? 거기에 대해서는 의사나 과학자는 몰라요. 알 수가 없어요.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해줍니다. 인간이 왜 우느냐? 요한계시록 21장에 보면 나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하늘에서 예루살렘, 천국이 내려오면 왜 눈물이 없느냐 하면, 예수님의 집에 가서 살기 때문에 그래요. 영원한 안식처가 제공되기 때문에.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있어야 될 그 자리를 찾아오게 되면 영원한 신랑집이, 영원한 신부가 된 자들의 집이 되거든요.

원래 부부는 한집에 살게 되어 있어요. 요한계시록 21장 2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신랑을 맞이하는 하늘에 올라간 신부가 영원한 모양새로 내려올 때 보니까 그 동네는 눈물이 없더라.

따라서 단언하건데 에덴동산에 바람 불어서 먼지가 눈에 들어가도 에덴동산에는 눈물이 없습니다. 그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니까. 눈물이 없다는 것은 이 동네가 내 동네 나를 위한 세계가 아니고 주님을 위한, 하나님을 위한 세계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지 않게 하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아모스에서 눈물을 흘렸다는 말은 하나님은 빼고, 하나님은 제켜버리고 내가 최후의 절대자로서 하나님의 자리에 있어야 될 그 선악의 지식, 나를 최후의 지식으로 여기고 여기에 선악지식을 꽂아버릴 때 마지막 그 모습은 뭐냐? 선을 추구해도, 악을 버려도 상관없이 그것은 눈물바다의 동네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눈물의 동네가 되도록 주께서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이나 누구나 양심이라는 것이 있고 뭔가 선을 행하려면 하나님의 법대로 사는 것이 선이라는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우리가 뭔가 지키고 법을 지키는 것은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뭐냐? 내가 형성한 내 집이 위협받지 않는 조건하에 눈물을 흘릴 일이 없다는 조건하에 우리는 내가 하는 행동을 선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을 해버립니다.

내 것 다치지 않는 조건하에 나는 선이고, 그 선이 다치는 법이 없으면 나는 웃을 것이고, 만약에 그것이 약간의 피해를 입는다든지 공격을 받게 되고 위협을 받게 되면 우리는 눈물을 주르르 흘리는 거예요. 멀리 미국에 있는데 고국에 있는 자기 어머니가 편찮다가 이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는 딸은 눈물을 주르륵 흘리지요.

왜? 엄마하고 같이 있었던 그 세계가 나의 세계였어요. 그런데 엄마가 없어지고 누락이 되어버리면 내 정서를 안정하게 만들었던 그 세계가 침해를 받는 거예요. 공격을 받은 거예요. 한쪽이 무너진 거예요. 안정된 평화로운 좋다고 만족스럽던 내 집에 차질이 생긴 겁니다. 그래서 눈물이 주르르 흐른 거예요.

내 집을 내거라고 유지할 때 세상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항상 위협의 대상이 되고 공격의 대상이 돼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유명한 말을 했어요.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내게 다치면 항상 울 준비를 하고 있어요.

개척교회 시작해서 교인 한 네 명 다섯 명 모여서 나도 개척교회 한다, 했는데 그 다음 주 토요일에 와서 “목사님, 죄송합니다. 우리 이사 가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좍 쏟아져요. 그 목사 같으면 교인이나 교회까지 포함시켜서 내 영토거든요. 포함시켜서. 내 집, 내 영토라는 말은 내 자리다 그 말이지요.

나를 최종의미로, 내가 나 됨을 최종적으로 확정 시켜주는 그걸 사람들은 진리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은 그걸 절대적인 내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죄송합니다. 멀리 직장 따라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목사가 대번에 하는 말이 “그러면 나는 누구하고 예배 보노? 우리 마누라하고 보나?” “또 주께서 보내주시겠지요.” 전혀! never! 전혀 위로가 안돼요.

내 세계가 깨졌으니까. 내가 얼마나 공들였고 뭐도 갖다 주고 했는데 떠나버리면 눈물이 주르르 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려서 눈물은 언제 나오는가? 내 집이 상처 입을 때, 내 안식처가 손상 입었다고 느껴질 때, 그 때는 눈물이 나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눈물에서, 눈물을 딛고, 눈물을 깔고 태어납니다. 언제든지 이 안정은 조그만 자극이나 일이라도 눈물이 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이런 눈물 나는 인생을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해하는 겁니다. 의도적으로 오늘 본문에서 눈물이 나게 했기 때문에. 눈물 나도록 조치를 하셨거든요. 하나님이 지나가 버리면 모든 것은, 이스라엘은 눈물바다가 되게 만들겠다는 거예요. 그래야 선악이 교체가 되니까요. 인간이 알고 있는 악도 선도 같은 방향이에요. 눈물을 내게 하는 같은 방향이라고요.

그래서 하나님은 이 땅에서 이스라엘 속에 함께 계시고 찾아오게 되면, 너희들은 처음부터 눈물을 흘려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서 너희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그 고귀한 너의 인생이라는 것은 눈물 흘려야 마땅한, 시시한, 아니아니 더 심하게 말해서 눈물 한 방울 보다도 가치 없는 시답지 않은 인생이었다. 눈물로 변종되는, 눈물로 다 전환되는 그러한 세월 들 뿐이었다는 거예요. 눈물보다 더 무가치한 인생을 너희는 살아왔다는 겁니다.

너희가 보여줄 것은 눈물 외에는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다는 겁니다. 눈물 흘리는 이유는, 지나온 모든 과거가 시시한 것들이었어요. 시시한 것들. 결혼하는 것, 자식 키우는 것, 내가 죽는 것, 모든 것은 다 시시한 거예요. 농부나 호곡군이나 어떤 자리에 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의 직업에 관계없이 모든 자가 전부 다 눈물 흘려야 마땅한 사회를 너희는 구성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오지 않으면 너희는 그걸 모르고, 하나님이 오지 않으면 너희는 눈물 흘릴 일도 없고, 이스라엘이 포로 잡혀 갈 때 직업 같은 것 상관없이 그들은 다 눈물 흘릴 수밖에 없는 그러한 세월을 보냈던 겁니다. 사람들은 자기들끼리의 사회, 각자 자기 터전을 존중해주고 눈물 없는 그러니까 선악지식, 하나님이 따먹지 말라는 그 선악지식을 따먹음으로서 선악지식을 하나님자리에서 폐기시킴에도 불구하고 욕심은 뭐냐?

그래도 나는 살면서 아픈 것 없이, 괴로운 것 없이, 눈물 흘리는 일 없이 하하, 웃으면서 행복과 행복으로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라는 어처구니없는 무가치한 것을 가치 있게 전환시키려고 아주 억지와 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인생이라는 게

그래서 그들은 선은 가까이하고 선 쪽으로 지향하면서 악은 멀리하면 설마 하나님께서 복 안주시지는 않겠지, 라는 그러한 진리를 왜곡되게 하는 사고방식으로 모두가 한통속이 된 겁니다. 그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사발이 있다 합시다. 그 그릇을 인간들은 어떻게 보느냐?

어떤 사람은 저 그릇의 지름이 몇 센티냐, 하고 센티 단위로 이야기할 거예요. 또 어떤 사람은 저 그릇의 부피가 몇 리터냐, 하고 리터로 다루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요. 어떤 사람은 그 그릇을 멀리 독일로 택배로 보낸다 한다면 무게가 문제거든요. 저게 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냐, 이렇게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자기 집에 그릇이 많아서 이 그릇은 나에게 몇 호냐, 120호냐, 혹은 121번째냐, 이렇게 호로 이야기할 거예요.

사물 하나를 이렇게 구분 지을 때 여기에 뭐가 동원되느냐 하면, 여기에 언어가 동원돼요. 하나하나 이름을 붙이기 때문에 언어가 동원됩니다. 그 언어는 훈련된 언어에요. 그 훈련된 언어를 우리는 왜 어릴 때부터 배우느냐? 그래야 체제가 후대에 계속 유지가 되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체제에 대해서 아모스 같은 경우에 선지자를 보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희는 공법을 세우라 하나님의 의를 세워라 정의를 세워라.” 이렇게 이야기한다고요.

아모스 5장 7절에 “공법을 인진(독초)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이렇게 되어 있다고요. 아모스를 통해서 뭐를 제공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율법을 제공한 거예요. 지난번에 제공한 것처럼 하나님의 율법은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오는 미끄럼틀이라 했어요. 야곱이 봤던 사다리,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 사다리.

인간들은 이미 선악의 목적자체가 자기 자체가 늘 행복하고, 저주 없고, 내 존재자체로서 모든 가치나 좋은 것이 마감되는 그걸 노리면서 선악지식을 활용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원래 선악이 있던 자리가 네 자리가 아니에요. 엉뚱한 자리에다 꽂아놓고, 악마가 시켜서 그렇지만, 엉뚱하게 자기 자리에다 꽂아놓고 자기가 신이 되어서 ‘선악지식은 내게 합당해. 내게 부합된다 그 말이야.’라고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방치하지 아니하시고 내 다리 내놔라, 하는 식으로 “왜 남의 것을 네 것이라고 여기면서 너의 영원성과 너의 영원한 복을 위해서 거기에 활용되지 못할 선악을 어떻게 너에게 활용되느냐?” 그래서 인간 나름대로 체계를 갖춘, 선과 악의 체계를 갖춘 거기다가 하나님의 율법을 쏟아 붓는 겁니다.

그래서 쏟아부어버리면 그들은 울음 없고 웃음으로 가득 찬 이상적인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고 언어적으로 법적으로 체계를 잡고 선한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아무리 노력해도 하나님의 율법을, 제대로 그 뜻을 모른다는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전부다 눈물바다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거지요.

자기에게 적합하지도 않은 선악지식을 가지고 그것 가지고 뭘 해보겠다는 말입니까? 뭘 해보겠다는 거예요? 그 의도가 참으로 악마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고 안정을 추구하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사람이 운다는 것은 내 자리가 없어서 우는 거예요. “왜 나에게 내 자리가 없느냐? 왜 나에게 내가 설 자리가 없느냐?”

나한테는 내가 제일 중요한데 제일 중요한 나, 나를 모실만한 자리가 위태롭고 없다는 그 자체가 눈물로서 쏟아지는 거예요. 거기에 대해서 하나님의 오늘 말씀은 뭐냐 하면, “너의 자리는 네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가 만들 자리에 네가 있어야 돼. 너의 자리는 너 바깥에 있는 거야.” 이걸 이야기하는 거예요. 너 바깥에.

지금 오늘 본문 아모스 5장 15절에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찌어다.” 할 때 이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선과 공의를 세우려고 했지요. 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된 거예요. 방향이 하나님 쪽으로 가는 게 아니고 어느 쪽이냐? 나 잘되는 쪽, 내가 유리한 쪽을, 실익, 실제 이익이 있는 쪽을 선이고 옳은 것이라고 그렇게 규정을 해버린 거예요.

이미 범죄한 이상은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 쪽으로 선악지식을 돌려줄 수 있는 어떤 방안, 방식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돌려주는 방법이 없어요. 그렇다면 이 선악에 꽂혀 있는 원리, 정녕 죽으리라, 를 주께서는 마음껏 가동 시킵니다. “네가 선악을 안다는 자체가 네가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죽어가는 너를 너 자신이 안 죽으려고 저주 안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어떤 방법은 너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되면 정녕 죽으리라, 하는 그 취지를 양보한 적이 없어요. 중간에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죽여 버리는 그 뜻이 뭐냐? 16절에 “농부를 불러다가 애곡하게 하며” 농사짓는 농부도 이유도 모른 채 자기는 포도원에서 울어야 돼요.

도시가 아니고 농촌에 있는 사람을 불러다가 그 많은 사람 모인데서, 성문 앞에서, 공적인 자리에서 대표적으로 울게 만들고, 거기에 호곡군, 전문적으로 우는 사람들을 같이 곁들여서 울게 하고, 모든 이스라엘을 울게 만드는 그 울음에서부터 우리는 다시 한 번 내가 있을 자리, 우리자리를 우리가 확보하지 못했다는 상태를 분명히 해야 돼요.

그렇다면 이런 말씀을 주신다는 그 자체가 범죄한 너의 자리는 하나님 쪽에서 보장해주는 겁니다. 어떻게 보장해주느냐 하면 ‘요셉의 남은자’라고 했을 때에 요셉이 야곱의 집에서 잃어버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언약 안에서 발견해요. 야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어떻게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계속해서 인간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고 밀어 붙이는가?

그게 뭐냐? 요셉, 그것도 어린 요셉의 꿈이었어요. 꿈은 밤에 꾸지요.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를 만난 것도 밤이에요. 밤의 특징은 어둡다는 것이고 어둠의 특징은, 인간의 소소한, 모든 소소함의 차이를 다 없애버려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밤에는 모든 차이를 없애버리면 시시하다, 혹은 시시하지 않다, 자기들끼리 나는 너보다 더 소중해, 너는 나보다 덜 소중해, 라는 그러한 비교 자체가 깜깜한 밤중에는 의미가 없거든요.

창세기 32장 31절에 보면, 야곱이 천사를 만날 때 밤에 만나요. 그 밤에 천사에게 한바탕 얻어터지고 난 뒤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하나님을 만나고도 내가 목숨을 부지했다는 그 브니엘, 하나님이 복 줬기 때문에 내가 살았다는 그 브니엘, 그 곳을 “지날 때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밤을 지나고 보니 어제의 낮과 다른 낮으로, 낯선 밤, 예상 못한 밤을 통해서 새 날이 밝은 거예요. 어제까지 다리 절지 않던 멀쩡했던 야곱의 다리가 하나님을 만난 밤을 지나고 난 뒤에 다리 저는 새날을 맞이한 겁니다.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지? 어제 밤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야곱이 죽었고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난 날이 어제 밤이었습니다. 창세기32장 31절에서.

그러니 이것은 뭐냐 하면, 바깥에서 오신 분에 의해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가 된다는 겁니다. 내 실력으로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바깥에서 오신 분을 만나게 되면 나는 졸지에 이 세상과 어떤 차이를 둔 그 모든 의미가 다 없어지고, 나도 시시하고 내가 그동안 살아보려고 애썼던 모든 나의 비교대상들도 시시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그걸 달리 이야기하면 나도 눈물 한 방울이고 너도 눈물 한 방울이고, 모든 것이 눈물로 환원될 수밖에 없는 울음 속에서 자아가 소실될 수밖에 없는 눈물만 남고 자아는 사라지는 그런 세상 속에 우리가 살아왔던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왜 내 것도 아닌 선악지식을 내가 뭔가 해보겠다고, 내 행복을 위해서 뭔가 해보겠다고, 한번 써보겠다고 악마의 속임수를 받아서 우리가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라 하는 것은 선악과 원래 자리에 있던 그 자리, 하나님 자리, 그분에 의해서 새롭게 개시되어야 됩니다. 선악을 다 지키고 선과 악에 대해서 온전하게 하시는 분만이 선악지식을 가질 권한이 있습니다. 그분이 어디에 오느냐? 오늘 본문 16절에 보면 이스라엘 속을 방문하게 돼요. 찾아오게 됩니다.

찾아오는데 그 과정 속에서 요셉의 꿈, 요셉의 꿈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요셉과 요셉의 아버지 야곱의 집은 헤어지게 되어 있어요. 야곱은 요셉과 헤어지는 그 정도가 아니고 아예 잃어버렸어요. 정작 언약을 지킬 주인공이 아버지 야곱에게는 더 이상 없는 거예요. 왜? 요셉은 죽었으니까. 어떻게 죽었는가? 짐승한테 물려 죽었어요.

요셉의 형들이 자기를 속였든 말든 상관없이 야곱은 알고 있는 전부가 뭐냐 하면,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백퍼센트 확실하게 짐승의 피에 물려죽었습니다.’ 왜냐하면 요셉의 채색 옷에 피가 묻었고 그 피는 그 당시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설치가 안 되어서 그 피를 조사를 못했지만 그것이 요셉의 피가 확실합니다, 라고 야곱은 믿었기 때문에 야곱은 요셉의 꿈 성취에 대해서 어떤 기여도 하지 못해요.

어떤 보탬, 어떤 도움도 주지를 못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의 언약을 지킬 요셉이라는 특수한 사람에 의해서 조용히 진행이 되고, 야곱은 거기서 배제된 채 뚝 떨어져 있어서 어떤 도움도 주지를 못한 상태지요. 요셉이 꾼 꿈은 요셉으로 하여금 드디어 요셉의 남은 자를 형성시켰습니다. 요셉의 남은자, 잃어버렸다는, 바로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학대받은 그 잃어버린 자가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성문에서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라, 할 때 그 성문에서 외쳤던 율법의 공격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어떤 대책도 없어요. 그래서 그들은 다 울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과정을 밟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계시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시편 126편에 나옵니다. 시편 126편 3절, 4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내들 같이 돌리소서.”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눈물이라는 것은 필수적으로 통과해야 돼요.

눈물은 뭐라고 했지요? 눈물은 뭐가 없어진다? 나의 거처가 날라 가는 거예요. 내가 살 내 모든 생각들이 좌절되는 겁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어떻게 하면 내 인생 펼까, 라는 것이, 애초에 우리가 배제가 되는 거예요. 그저 눈물 흘리게 태어났으면 눈물 흘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게 우리 인생의 운명이에요. 눈물 흘릴 수밖에 없어요. 그게 당연한 우리 하나님의 마땅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소식이 들리느냐 하면, 요셉의 남은 자가 등장하게 되면, 이것은 어떤 분이 그 생명나무를 먹을 수 있도록 모든 조치는 일방적으로 다 해주셔서 그게 긍휼이라는 선물로 우리에게 제공되면 우리는 눈물을 그치고 눈물 속에서 기쁨이 나오는 거예요.

그 조치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율법을 외쳤던 그 성문에서 오히려 배제된 분으로서 그 일을 이루지요. 히브리서 13장 11, 12절에 보면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성문 밖에서 고난 받으셨다, 하는 것은 예수님을 내 치는 세력으로 짝을 이루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냥 자살하신 것이 아니고 내치라는 거예요. 나를 내쳐야 된다. 그래야 아모스 오늘 말씀이 성취가 돼요. 기존의 인간들이,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고집스럽게 자기 행복만 추구한다는 것, 하나님 이름을 빙자해서 자기 행복만 추구한다는 그러한 고집 있는 자들로부터 진짜 주인공 되시는 하나님 자신은 밀려나갔어요. 성문 밖으로.

성문 밖으로 단지 내쳐진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죽으셨어요. 13, 14절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성문밖에 나가면 영원한 곳이 되어버립니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하나님이 도와주소서, 가 아니라 “주여, 우리를 버려주옵소서. 우리는 하지 못할 짓을 했나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행복을 추구했고, 내가 하나님의 것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잘못을 숨기기에 급급했고, 마치 나는 행복해야 마땅하다고 고집부리는 나, 그 나를 주여, 눈물로 전환시켜 주옵소서. 원래 주인 되시는 분이 오셔서 이 눈물 속을 지나가옵소서.”

눈물을 유발시키고 그 눈물 속으로 지나가게 되면 그분이 우리의 모든 눈물 흘려야 될 이유를 다 대신 감당하셔서 다시는 눈물도 없는 복만 있는 고통이 없는 세계로 우리를 데려가는 그 주인공은 바로 하나님 그 자신입니다. 우리 인간이 아니에요.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울게 만들고 우리를 울게 만든 그 자체가 행복입니다. 내가 울어야 마땅함을 아는 사람이 이게 구원받은 자에요. 요셉의 남은 자에요.

내 것 없다고 찔찔 울던 우리가 이제는 내 것 없어져야 마땅함을 깨닫는 것은, 긍휼 입어 요셉의 남은 자가 될 자에게만 ‘원래 내 것이라 하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되는구나. 이게 주의 뜻이구나.’ 그걸 기쁨으로 받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바로 기쁨의 찬양으로 승화가 되는 겁니다.

“눈물로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시편 126편의 그 말씀처럼 우리의 모든 일은 나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잃어버린 그 분이 다 성취하셔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서, 이 아모스 5장 말씀을 그대로 성취하셔서, 그것을, 십자가를 통해서 성취하신 그것을,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내막을 ‘전은 이렇게, 그리고 후는 이렇게 주께서 일을 이렇게 진행시켰다.’ 하는 그 사실을 우리에게 한꺼번에 다 주게 될 때 우리는 충분히, 이제 충분히 마음껏 잃어버린 그 기쁨을 눈물 흘려가면서, 눈물은 나고 입은 벌어지면서 좋고 이상한 분열증에 걸려서,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그러한 기쁨에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자기 것 찾겠다고 오신 그 주님의 활동에 우리 자신을 하나의 활동의 장으로 열어서 사용해주시니 너무나 감사합니다. 못난 것, 자기 것만 고집부리는 저희들이 하나님의 활동의 영역이 되었사오니 이제는 요셉의 주께서 잃어버렸다가 얻은 자로서 마음껏 주님께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