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강, 335강) 여력과 모자람, 승리 201208
녹취:이하림
334강-YouTube강의(여력과 모자람 마태복음 5:17)20201208-이 근호 목사
제334강, 제목은 ‘여력과 모자람’. 여력과 모자람. 비슷한 이야기처럼 들리죠. 그런데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본인이 “나는 모자란다.” 이거하고, 그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아이 모자라긴 뭘 모자라. 여력이 있어, 아직까지 힘 쓸 수 있어.” 할 때는 두 사람이 등장해서 동일한 상황에 대해서 한쪽은 본인은 모자란다고 주저앉고 다른 한쪽은 “그래도 여력이 있으니까 해봐.” 라고 격려한다든지 힘을 실어줄 때 자, 여기서 둘 중 누가 맞는가를 생각해보는 거죠.
인간은 홀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홀로 있다고 생각해도 항상 주위에 나를 지켜보는 자가 있을 겁니다. 그러면 방구석에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과 그 방에 누가 확 들어왔을 때 사람은 달라지기 시작해요. 이 말은 타인에 의해서 내가 조종 받는다는 뜻입니다.
한 사람이 있을 때, 그것도 아주 잘 아는 사람이 있을 때의 행동과 생판 모르는 사람이 쑥 들어왔을 때 행동하게 되면 내 행동이 달라지겠죠. 그 말은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변신이 가능한 무한한 내가 들어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지금 내가 미처 모르는 내 자신의 다른 요소들이 무한히 들어있어요. 들어있는데 내가 아는 사람이 오는 것하고, 내가 모르는 사람이 오는 것하고, 갑자기 고양이가 하나 뛰어드는 것하고, 갑자기 코로나 바이러스가 내 안에 들어와 걸리는 것하고 그때그때마다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누군지를 새로 정립해야 됩니다, 사람은.
그러니까 제 말은 “내가 누구다. 나는 이렇다.” 할 때는 결국 상대를 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그 상황에 맞도록 상대를 보고 하기 때문에 그 상대에 따라서 본인은 굉장히 정직해보이죠. 맨날 하는 이야기가 “솔직하게 이야기하는데...” 굉장히 정직해 보이는데 그 사람 가고 다른 사람 왔다고 하면 다른 소리가 나와요. 본인도 그걸 조절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나왔죠. 본인은 본인을 확고한 것으로 규정할 수가 없죠. 상대에 따라서 달라지죠. 그러면서도 인간은 상대가 네 사람이 다녀가냐 열 사람이 다녀가냐에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게 있어요, 인간에게. 그걸 이 사람 저 사람 다 가는데 누가 그 현장의 맞은편에 오시느냐 하면 주님이 오십니다. 주님이 오시면 인간의 모든 자기조작은 끝났습니다. 이젠 끝나요.
그 주님이 오시면서,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5장 17절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예수님 앞에 누가 있느냐 하면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그 바리새인은 5장 20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바리새인의 특징은 두 가지죠. 하나는 뭐냐, 천국을 고대한다. 두 번째 특징은 고대하는 방법을 본인들이 습득해 있다. 이렇게 두 가지 있습니다. 이건 오늘날 누굴 닮았어요? 교회 다니는 사람 닮았죠. 첫째는 천국 가고 싶다. 두 번째는 그냥 ‘가고 싶다’가 아니라 천국갈 수 있는 어떤 마음준비나 여러 가지 해온 것이 있다. 이게 바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태도와 똑같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해서 마태복음 5장 17절에서 주님께서 이미 엄포를 놔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너희들 천국 가고 싶어서 율법 지키지? 이것저것 빼기만 해봐라.” 그런 뜻이거든요. “내가 지킬 것만 지키고 미뤄둘 것은 좀 미뤄두겠다는 그런 사고방식을 하기만 해봐.” 라고 하는 거예요.
18절에 봅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런 발언을 하면서 동일한 율법을 놓고 바리새인이 천국을 들어가기 위해서 율법을 몽땅 다 지키는 그 방법과 주님이 율법에 대해서 몽땅 다 지키는 방법을 내가 바리새인 너하고 나하고 한번 대조해보자는 겁니다.
그 바리새인 자리에서 바리새인과 서기관 빼고 저와 여러분을 한번 놓아보세요. 성경말씀 앞에 우리가 서 있잖아요. 성경을 왜 본다? 첫째는 천국 가고 싶고 둘째는 천국 가는 방법을 이 성경에서 얻기 위해서 하죠. 여기에 대해서 이 맞은편에 예수님이 딱 앉아있다고 보자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동일하게 변명과 핑계가 아주 늘어나요. “이건 바빠서 못했고 이건 쑥쓰러워서 못했고 이건 아직까지 내가 무슨 뜻인지 몰라서 뺐고 이건 좀 나중에 믿음 좋을 때 지키려고 남겨두었습니다.” 그렇게 하겠죠.
그런데 17절에 뭐라고 하셨습니까?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게 아니라 했죠. “‘5년 뒤에 다 하겠습니다.’ 하지 말고 지금, 지금 다 지키는 방법을 네가 구상해봐라.” 이 말입니다. 지금 다 지키는 방법. 어느 인간이 그걸 해냅니까. 모든 율법을 지금 다.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누구의 것이 되겠냐고 했으니까 오늘 밤이 마지막 밤이라면 마지막 밤에 이 성경 다 안 지키면 지옥 갑니다.
그렇다면 모든 걸 지켜야 되는데 자기 기억에 의하면 이건 뺐어, 뭔 뜻인지 몰라가지고. 이건 나중에 하겠다고 미뤄놨어요. 이건 하고 싶은데 돈 버는 일이 바빠가지고 나중에 하겠다고 미뤄놨어요. 갑자기 오게 되면 결국은 율법을 다 지켜야 되거든요. 백 개 줬으면 백 개를 다 지켜야 돼요. 안 지킨 한 개 때문에 사단 난다고요. 어느 인간이 구원 받겠습니까? 못 받습니다.
자,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겠어요? 율법이 문제겠습니까, 율법을 지키겠다는 인간의 의도가 문제겠어요?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내가 원하는 천국 가겠다는 그 자세가 잘못 되었죠. 예수님께서 이렇게 언질을 주시고 마태복음 5장 26절에 보게 되면,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그 지옥, 옥에서 나오지 못하리라.
여기 제가 지옥이라 했는데 그렇게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일반적인 민사재판에서 돈 빌려놓고 다 갚기 전에는 감옥에서 못나오는 그 방법을 예수님이 활용했거든요. 그렇다면 일반 민사재판에서도 1000만원 빌렸는데 500만원만 갚으면 그냥 나오리라고 기대하지 말라 하죠. 1000만원 다 갚아야 나오거든요. 죄를 지었으면 죄 값을 다 치러야 나온다 이 말입니다. 사람도 그런데 이런 식의 율법이 구약에 있거든요. 그런 율법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도 그 율법을 온전히 다 이루지 아니하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올 생각하지 마란 뜻 아닙니까.
그러니까 결국 율법이라 하는 것은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천국에 갈 수 없는 너 자신을 알라. 뭐 테스 형이 이야기한 거 같지만. 천국에 가지 못한다는 것을 평소에도 늘 명심하고 있느냐를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성경 펼쳤습니다. 봅니다. 이 성경이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우리한테 지당한 당부를 합니다. 너는 이 성경대로 다 못 지키면 너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성경이 지금 우리보고 해주시는 겁니다.
끝으로 이러한 이야기를 해준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성경말씀이나 하나님께 고맙습니까 아니면 섭섭합니까? 이게 고마워야 돼요. 만약 계속 지킨다면 악마에 속한 사람이에요. 아예 포기하게 만드는 이러한 축복, 이건 행운입니다. 아예 본인이 누군지를 알게 되는 그 행운, 그게 바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나는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335강-YouTube강의(승리 사사기 4:7)20201208-이 근호 목사
제335강, 제목은 ‘승리’. 이 세상 사람들이 승리를 좋아하고 성공을 좋아하는데 본인이 성공해야 될 근거는 딱히 있습니까? 그 근거가 있어요? 남은 승리하지 말고 나는 승리해야 된다는, 남과 나와의 차이에서 나만 유독 인생 성공해야 된다는 그런 정당성, 그런 근거는 어디 있습니까? 남은 아파도 되고 나는 안 아파야 되고, 남은 코로나 걸려도 상관없고 나는 안 걸려야 된다는 그런 정당성이 있습니까?
정당성이 없는 것을 ‘억지’라고 해요. 그걸 네 자로 ‘우격다짐’이라 하죠. 매일 본인이 우격다짐으로 사니까 스트레스 안 받을 수 없고 아무리 좋은 것 먹어도 암에 걸릴 수밖에 없어요. 매사가 우격다짐이니까, 매사가. 버스정류소에 갈 때 딱 가자마자 저쪽에서 버스가 와야 돼. 이게 우격다짐이에요. 가자마자 떠나면 안 돼. 왜 안 되는데요?
이게 여러분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지만, 교사 임용고시 칠 때 어떤 분이 코로나에 걸렸다고요. 그러니까 임용고시 못 친다고 나라에서 배제를 했다고요. 하니까 소송하겠다는 겁니다. 수능은 되는데 임용고시는 왜 안 되느냐. 이렇게 된 거예요. 나라 뜻은 비용이 너무 많이 든대요. 그런데 그게 남의 일입니까? 아이고, 이기주의. 이렇게 하지만 막상 우리자신에게 그 일이 닥쳐버리면 우리는 거의 미친 듯이 국가를 향하여 고소하고 난리입니다.
스쿨존에 우리 애가 가는데 트럭이 와서 받쳐서 죽었어요. 그 전에 스쿨존에서 죽은 애가 한명도 없었습니까? 수백 명 수천 명 죽었어요. 그런데 그 애 이름이 김민식이거든요. 민식이법을 만들었어요. 얼마나 이기주의인지 몰라요. 그러면 그 애 아버지가 남의 애 죽었을 때 뭐를 외쳐야 됩니까, 자기 애 말고. 몇 년 전에 남의 애 죽었을 때 자기 일처럼 여겨서 국회 앞에서 성토하고 법 만들자고 이렇게 되어야 되잖아요. 가만히 있다가 딱 자기 애 죽으니까 법 만들자고 난리도 아니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죠. 뭐 그게 대단한 용기처럼 생각됩니까?
이런 걸 가지고 ‘자기주장’이라고 하거든요. 인간이 자기주장을 왜 하느냐면 인생에 실패하기 싫어서 자기주장을 하는 겁니다. 실패하기 싫다는 말은, 나는 꼭 성공하고 싶다는 겁니다, 누구하고 비교해서. 혼자서는 성공인지 실패인지 몰라요.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있을 때 성공했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이게 난감해요. 비교대상이 없으니까.
만약에 로빈슨 크루소가 무인도에 갔는데 혼자 있어서 하루에 고등어 한 마리 잡고 있었는데 어떤 배가 지나가다 파선해서 자기 있던 섬에 또 왔다 이 말이죠. 소설에는 없지만 예를 들면. 자기 있는 섬에 그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은 솜씨가 좋아서 옛날에 어부 좀 해가지고 한 번에 고등어 두 마리씩 잡아요. 그러면 둘 중에 누가 성공한 거예요? 그 사람이 성공했죠, 고등어 두 마리 잡으니까. 이 사람은 한 마리밖에 못 잡는데.
그러니까 성공 실패라 하는 것은 절대적이 아니고 상대적이죠. 상대적이라 하는 것은 세 번째 사람이 왔을 때 졸지에 자기가 또 실패할 확률이 있고 네 번째 사람이 오게 되면 또 어떻게 될지 몰라요. 그래서 이 세상은 평균률로 봐요. 통계학에서 가운데가 (종모양으로) 볼록한 곡선의 제일 위에 있을 때, 그 값을 평균이라고 합니다. 평균적으로 봐서 나는 중간층이다, 너는 잘 산다 못 산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거 하늘나라에 통할까요? 주님이 그 통계표 인정할까요? 안하죠.
왜냐하면 인간은 이미 창세기 3장 22절에서 에덴동산에서 쉽게 말해서 생명나무가 있는 곳에서부터 절단되고 단절되어 있으면 그가 재벌이든 삼성그룹 이건희가 되든 현대그룹 총수가 되든 관계없이 그것은 실패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소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쫓겨남으로써 하나님과 소통하지 못하고 우상과 소통하게 되었어요. 자기가 만든 신과 소통하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뜻은 차단시켜버리고. 자기가 실패했다는 것을 지적질하기 때문에 듣기 싫은 거예요.
내가 성공한 것을 증명해줄 신을 교회에 와서 예수라는 이름으로 하나님이라는 이름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찾고 있는 겁니다. 그건 뭐냐 하면 하나님 좋으라고가 아니라 나를 긍정하기 위해서. 그게 자기 정당성이죠.
이게 이방민족인데 그럼 이스라엘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이 직접 오셨죠. 오셔서 싸움하겠죠. 싸움할 때 누구하고 싸운다는 것은 제가 이만큼 말씀드렸으니까 여러분 아시겠죠. 진짜 하나님이 오신 뜻은 가짜 하나님, 자기 성공을 고대하는 그런 하나님과 전쟁을 벌이는 겁니다.
전쟁을 벌일 때 가짜 신에게서는 인간이 나 잘난 척하기 위해서 신에게 다가갈 때 내 잘난 주특기나 내 솜씨, 내가 농사해서 많은 열매 맺힌 것, 호박도 작은 것 아니고 큰 호박, 고구마도 작은 것 아니고 신의 축복으로 이만큼 큰 고구마 했습니다. 신의 축복으로 월급 많이 받았습니다. 이런 걸 드리고 싶죠. 이렇게 자기 자랑질을 신 앞에 하겠죠. 이게 가인이 드린 제사입니다. 그 신에게 가는 방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찾아오게 되면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인간의 솜씨로 할 수 없는 것을 주께서는 시켜버려요. 그게 바로 사사기 3장 15절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 구원자를 세우셨으니” 부르짖었다는 말은 참 많이 답답했다 이 말이죠. 그리고 사사기 4장 3절에도 “이스라엘 자손을 심히 학대한고로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라” 그렇게 되어있죠.
오늘 본문의 결정적인 것은 사사기 4장 7절, “내가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그 병거들과 그 무리를 기손강으로 이끌어 네게 이르게 하고 그를 네 손에” 그 다음에 “붙이리라” 붙이리라. 네가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자석에 이끌리듯이 그들이 끌려와서 지가 알아서 박살나게 할 것이다. 그들이 이 이스라엘에 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아이고, 만만한 것.”하고 쳐들어왔는데 와보니까 박살난 거예요. 그들이 끌려와서 자석에 못이 끌리듯이 끌려와서 붙이는 거예요. 박살난 거예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솜씨입니까, 아니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승리겠어요? 이게 하나님의 승리죠. 그러면 하나님의 승리가 승리답게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기듯이 자기 솜씨를 부리는 겁니까, 자기 힘을 빼는 거예요? 무능자가 되는 거예요, 무능자. 무능자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모든 면에서 자기가 무능자가 아니고 유능한 자가 되려고 해요, 자기가 노리는 게 있어서. 뭘 노립니까? 제가 아까 처음에 얘기했잖아요. 남은 실패해도 나는 성공하고 싶고 남은 아파도 나는 건강하고 싶다. 남은 불행해도 우리 집안은 행복하고 싶고 남은 코로나 걸려도 나는 안 걸리고 싶다. 거기에 대해서 대비하겠죠, 마스크 써가면서. 그런데 그건 결국 누구 성공이에요? 주님 승리에요, 내 승리에요? 내 승리잖아요.
주께서는 필히 막아버립니다. 주님의 승리가 내 승리에 교묘하게 가리워지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런 식으로 일 안했습니다. 어떻게 일하시는가. 거저 주시는 것으로 감사하라고. 그럼 거저 주시는 거면 ‘어? 내가 한 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갖겠죠. 그럴 때 누가 승리합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통해서 승리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백성과 함께하시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