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아모스

아모스 5:7-9 / 관람객 신앙

정인순 2020. 12. 2. 23:43

음성 동영상

 

관람객 신앙

 

이근호
2020년 12월 2일

 

본문 말씀: 아모스 5:7-9

(5:7)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5:8)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5:9)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지난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집’을 진노로 치신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오늘 본문에서는 지상에 율법을 외면하고 거짓으로 사회가 돌아가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 준수를 당부하시면 될 터인데 오늘 본문에서는 대자연 창조자로서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십니다.

그 이유가 무얼까요? 그것은 인간들 눈에 보이는 자연이 실제로는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디에 묶여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 눈에 보이는 대자연이 한데 묶여져서 연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자연은 무기(無機)적이지 않고 유기(有機)적입니다.

이 말은 이 대자연은 그 중심되는 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준수를 했다면 대자연도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쏟아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율법을 외면하면 대자연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식으로 작용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을 거들떠보지 않는 이유는 주변 이방민족들이 신봉한 신이 구미에 맞기 때문입니다.

그 신은 유기적이지 않고 무기적입니다. 즉 달리 말해서 인간의 개별자 성향에 부합되는 신이었던 겁니다. 개별자 성향이란 자기 위주로 세상을 보는 관점을 장착한 것을 뜻합니다. 이 개별자 의식은 아담이 범죄하면서 대물림되어서 온 인류에 퍼진 그 의식입니다. 최종 중심처가 자기 자신 뿐이다는 의식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는 신분사회가 무너지면서 이 개별화 의식이 노골화되었습니다. 오로지 최종적으로 자신의 생존과 가치성을 위해 주변의 모든 이들과 무한 교환에 나서게 됩니다. 개인적인 노동은 교환을 통해 노동생산물을 거래합니다. 이 교환은 ‘자유로운’ 계약의 세계이라고 여깁니다.

자유로운 가치 교환을 통해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을 사회가 인정하는 시대에 접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옛날 사회는 신분적인 유기체적 사회였습니다. 예를 들면, 왕실의 공주는 왕실의 전통과 체통을 유지하기 위한 혼인을 해야 했습니다. 개별자 의식으로 본인이 마음에 드는 신랑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화된 사주와 궁합을 통과해야만 왕실 혼사가 성사되었습니다.

개인적인 운명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한다는 요즈음 시대는 이런 유기적 사회에 비해서 무기적이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사물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무엇이 자기에게 필요한가를 본인들이 판단내립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인간들이 얼마나 자신이 필요없는 존재로 간주하시는지 너무 잘 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쪽에서 그 인간을 천국에서 배제하십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마 10:32-33) 정말 율법의 유기성에 포함된 자라면 자신의 고유성을 포기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율법 정신입니다.

신명기 22:8을 예를 들면, “네가 새 집을 지을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이 떨어지지 않게 하라 그 피가 네 집에 돌아갈까 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유기적 사회에서는 개별자의 행복을 최종적 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여야합니다. 신명기 22:5의 말씀 같은 것은 그 배려의 취지가 어디까지 도달하는지 현대인의 의식으로는 분명하지 않아 보입니다.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이같이 하는 자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자이니라” 이런 말씀 같은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토달지 말고 이 말씀의 성취성에 그대로 수용해야만 합니다. 신명기 22:9-11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양 털과 베 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즉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서 결코 관람객의 자세를 취하면 아니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원래 인간은 자신을 절대화하는 개별자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북두칠성과 삼성이라는 별조차도 이 율법과 연관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밤과 낮의 바뀜도 이 율법과 연관점이 있습니다. 바닷물을 통한 강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이 여호와 자신의 변신과 관련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대자연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변신을 시도하십니다. 대자연은 무너지도록 창조되었고 인간은 죽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밤을, 다음날의 낮을 위한 휴식의 간격이라고 여기지만 오늘 본문에서 그렇게 보지 않고 ‘사망의 그늘’이라고 했습니다.

전도서 5:17에서는 이렇게 우리의 전 생을 표현합니다. “일평생을 어두운 데에서 먹으며 많은 근심과 질병과 분노가 그에게 있느니라” 즉 우리네 인생은 마땅히 무너져야 하고 대자연에 깔려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항거하거나 불만이 있다면 이는 개별자 의식으로 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7:8에 보면, “에브라임이 여러 민족 가운데에 혼합되니 그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화덕이 벌겋게 달아올랐지만 이스라엘은 자신의 등짝이 타들어가는 것도 모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여호와의 변신을 위한 대자연 세계의 변화를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세상을 심판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그 무너짐 속에 자기 자신을 포함시켜 버린다는 겁니다. 스스로 심판받은 하나님이 곧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무너진다 할지라도 약속에 땅에 끝나지 살아남아야 할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포도나무’입니다.

포도나무는 약속의 땅에 나타난 생명나무입니다. 처음에 약속의 땅에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가서 들포도가 되었습니다.(사 5:1-2)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께서 스스로 극상품 포도나무가 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요 15:5) 예수님의 살과 피로서 모든 언약을 이루었기에 더 이상 인간들은 다른 포도를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눅 22: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다 십자가 완성을 위한 일이니 우리 자신의 개별성이 무너짐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14강-암 5장 7-9절(관람객신앙)2012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5장 7-9절까지입니다.

아모스 5:7-9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백주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오늘 본문만 두고 보면 상당히 상관없이 느껴지는 그러한 것들 사이에 과격한 연결 같은 것을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했는데 공법이라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 적용되는 율법이지요. 인진(茵蔯)이라는 것은 쓴 풀, 독초, “율법을 독초로 변하게 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까지만 보게 되면 이 본문은 별로 어려울 것이 없겠다 하는 생각이 들지요.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버리고, 돌아보지 아니하고, 적용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율법이 있어도 없는 양 철저하게 배제하고 무시하는 사회상, 불의가 넘치는, 거짓과 폭력이 넘치는 세상, 이렇게만 보게 되면 ‘아, 하나님께서 율법 안 지키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굉장히 분노하시는구나.’ 이 정도로 아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7절만 보면서 앞으로 율법대로 잘살겠습니다, 지키며 살겠습니다, 라고 하면 그만인데 8절에 보면 ‘묘성’이라고 되어 있어요. 묘성은 북두칠성입니다. 북두칠성과 삼성, 삼성이라 하면 오리온자리에 별 세 개가 나란히 있는, 불이 켜져 있는 것 같은 사이좋은 별 세 개를 말합니다. “묘성과 삼성을 만드시며” 갑자기 하나님이 별을 내가 만들었다는 언급을 하시는 겁니다.

“지상에서 율법대로 바르게 살아라, 얘들아.” “예”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전혀 상관없는 북두칠성과 삼성을 하나님 자신이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왜 언급해야 되는가? 이게 연결고리가 잘 안 되는 것 같지요. 우리보고 별 만들라는 말인지? 인간이 무슨 별을 만들어요? 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전문이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은 어느 누구도 다 아는 이야기인데 왜 여기서 갑자기 언급을 하시는지.

그 다음에 “사망의 그늘로 아침이 되게 하시며” 그냥 쉽게 밤이 아침 된다고 하면 되는데 밤이라 하지 않고 ‘사망의 그늘’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 그리고 “백주(대낮)로 어두운 밤이 되게 하시며” 낮이 밤이 되고 밤이 낮이 된다. 다 아는 이야기가 왜 언급되느냐? 그것이 앞에 있는 율법 지키라는 이야기하고 두 개가 잘 결합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지요.

사람들이 “낮은 우리 인간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밤도 인간들이 만들었습니다.”라고 우기면 “아니야, 아니야! 밤과 낮은 내가 만들었어.” 이렇게 주님이 나설만한 환경이 되는데 밤낮을 자기가 만들었다는 사람도 없고, 북두칠성도 내가 만들었다고 우기는 사람도 없고, 삼성이야 뭐 이 건희가 만들었겠지만 삼성을 만들었다고 우기는 사람도 없는데, 왜 삼성과 북두칠성과 낮과 밤의 교체까지 다 언급을 하시는가?

그 다음 8절에 보면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바다는 바다고 땅은 땅인데, 땅에 그냥 비가 오면 된다고 할 것인데, 땅에 비 오는 것이 바다에서부터 생산이 된다는 지구과학 그거 강의하시려고 하는 말씀도 아니고 왜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지 수긍이 잘 안되지요. 그 다음에 9절을 보면 “저가 강한 자에게 홀연히 패망이 임하게 하신즉 그 패망이 산성에 미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을 어떻게 한꺼번에 딱 연결시킬 수가 있느냐 하면 “그냥 무너져라, 그냥 무너져라. 하늘은 무너지게 되어 있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 그러면 인간입장에서는 “죽을 인간을 왜 만들었으며 무너질 세상을 왜 만들었습니까?”라고 하신다면 그 정답은 8절 끝에 나옵니다. “바닷물을 불러 지면에 쏟으시는 자를 찾으라 그 이름이 여호와시니라.”

여호와께서 벌이시는 일을 그냥 수긍하는 것, 받아주는 것이 인간을 포함한 피조물 세계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겁니다. 영광 돌리겠다고 별짓을 하지 말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어요. 이 세상, 땅과 하늘은 무너지게 되어 있다면 그 무너짐을 기꺼이 감수하라는 말이지요. 그리고 인간이 죽게 되어 있다면 “죽여주옵소서. 예, 죽이소서.” 하고 그냥 감수하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스케줄대로 진행하는 하나님의 작업에 가담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일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의 모양이 변신을 하는 거예요. 스스로 이 땅에서 하나님 자신이 내세운 그 약속을 자기의 변신을 위한 모양을 바꾸는, 위상을 바꾸는 식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약속을 주신 겁니다. “나 하나님은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렇게 변하겠다.” 그 변신의 과정에 피조세계가 같이 연동되어 있으면 같이 연결되어서 움직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피조세계는 무너지게 되어 있고 인간은 죽게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이 안 무너지려고 애를 쓰는 것은 이것은 수상해요. 왜냐하면 자기영광을 따로 챙기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계획에 그냥 묻혀 버리는 거예요. 무너지면 그냥 무너지면 돼요. 그런데 안 무너지려고 애를 쓴다는 이것은 하나님의 계획 따로 있고 내 계획 따로 있다고 챙기는 것이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망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망하면 망하지요, 라고 할 것이 아니라 왜 망해야 되는가, 그 연유, 그 이유를 알아야 여호와가 누구냐, 하는 것을 알 수 있어요. 하나님을 찾으려면 하나님이 누군가를 알아서 찾아야지 그냥 여호와, 여호와, 부른다고 해서 여호와 찾는 것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누구시냐, 라는 것을 어떻게 아느냐?

오늘 본문 말씀의 일련의 과정과 경과를 보여주는 겁니다. 그것은 바로 ‘이 땅의 율법에 대해서 인간들은 그 한계를 드러내서 율법을 독초로 바꾸고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이 필히 나타나야 되고, 거기에 호응해서 하늘도 같이 지상에 와르르, 기둥 부러지듯이 무너지게 된다. 별이고 달이고간에 다 무너지게 되어 있고, 바다와 땅이 원래 구분되어 있는데 땅이 바다로 함몰되어 버려서 땅이 없어지는, 땅이 땅 구실을 못하고 땅에 세워진 인간의 모든 것들이 무너지는, 그렇게 하시는 분을 찾아라.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인간은 자꾸 고정하려고 하고 하나님께서는 자꾸 움직이시니까 움직이는 하나님을 따라가야 되는데, 인간은 자기고정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나 단단하게 안정되게 살고 싶다, 를 기정사실로 여기고 그 다음에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하나님과 좋은 관계 좋은 사이가 되어 봅시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마을 근처 숲에 호수가 있는데 마을의 전설에 의하면 그 호수에 물귀신이 나온다는 전설이 있다 합시다. 그것도 대보름 달 밝을 때 한 달에 한 번씩 물귀신이 때 맞춰 출몰한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우르르 호숫가에 진 칩니다. 각 방송사 카메라 세워놓고 물귀신이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보려고 준비하고 있지요.

그런 자세가 관람객의 자세입니다. 뭔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서 챙길 것은 챙기겠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하여. 그런데 과연 물귀신이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은 와, 하고 놀라고 도망치면서도 그 와중에 사진 찍고 생중계도 합니다. “여기는 물귀신이 나타난 현장입니다.” 하는데 만약 그 중 한사람이 호수 근처에 있다가 물귀신에게 납치 되어서 물귀신과 함께 깊은 호수에 빠져 들어갔다면 사람들은 그 사람보고 얼마나 재수 없는 비극적인 사람으로 간주하겠습니까?

제가 왜 이런 예를 들었느냐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모든 계획이 완료된 거예요. 사람에게는 일종의 물귀신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십자가로 구원받는다 하니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저 십자가의 원리를 나에게 어떻게 적용시키는가, 라고 갖은 고민과 공부를 많이 해요.

왜냐하면 관람객이 되는 거예요. 십자가에 대해서 관람객의 자세로서 십자가에 관한 자료를 모으고, 예루살렘에 가서 구경 다하고, 그렇게 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모든 인간이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지요. 자신의 안전빵을 위해서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재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만, 그 십자가가 나를 납치해서 사람들이 거부하는 그 십자가, 출몰된 그 세계에 물귀신과 함께 빠져버린다면 그것을 가지고 신약성경에서 성도라고 이야기합니다. 성도는 관람객이 아닙니다. 십자가 속에 들어온 사람이에요. 십자가 바깥에서 십자가를 구경하고 연구하고 탐색하는 과학자 입장이 아니에요. 실험하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어떤 과학자가, 코로나 19 연구도 하고 그런 어떤 과학자가, 바이러스는 추출해서 현미경으로 관찰하고 조사하고 분석하는 과학자들밖에 없지 ‘아, 나도 바이러스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과학자는 어디에도 없지요. ‘나 이제 이름 바꾸겠어. 이 바이러스, 이런 식으로 나도 바이러스 인생 살래.’ 이런 것은 없어요.

바이러스를 적으로 간주하지, 바이러스를 퇴치할 목적으로, 그래서 내 것 건강하기를 원해서 연구하듯이 십자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이 믿을 만 하면 믿겠다는 거예요. 주님이 필요할만하면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그런 십자가, 그런 예수님은, 세상에 그런 예수 그런 십자가는 존재한 적이 없어요. 그런 것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 관람객들아! 더 이상 나 예수가 너희들에게 필요 없지, 그지? 나는 너희들이 더 이상 나를 필요치 않는다는 것을 내가 기어이 활동을 통해서 노출시킬 거야. 관람객으로 머물기를 원하지 십자가 속에 뛰어 들어오기를 거절하는 너희들, 내가 반드시 너희 정체를 까발리고 말리라.”

그게 바로 오늘 본문 내용이에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 하는데 안가요. 네가 가라, 옆 사람 막 밀어요. 본인은 안가요. 잘되는가 보고 슬슬 내가 알아서 움직이겠다는 겁니다. 눈치껏 하겠다는 거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왜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 이스라엘에게 준 율법, 공의의 법, 정의가 왜 땅에 떨어졌고 서로에게 독초처럼, 쓴 쑥처럼 작용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이 우주, 자연이 사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듯 자연스럽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은 무기적이 아니고 유기적이라는 뜻이에요. 보통 오늘날 과학에서 자연을 유기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무기적으로 봐요. 생명이 없는 걸로 본다는 말입니다. 운석을 조사해도 생명은 없어요. 생명은 인간만 생명이지 다른 것은 생명 없다고 보는 거예요. 식물이든 동물이든 전부 다 하나의 사물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택한 민족인 이스라엘의 율법이 지켜지지 않은 그 원인으로 인하여 하늘의 북두칠성과 삼성이 다 무너지고 이 세상이 홀연히 패망한다는, 세상 모든 것이 패망하는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은, 땅과 하늘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겁니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둘 셋이 아니고 통으로 전체가 하나로 움직인다는 뜻이에요. 하나로 전체가.

여호와께서 중심이 되기 때문에 여호와 중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로 움직이는 겁니다. 율법을 안 지키는 것과 북두칠성 내가 만들었다 하는 이 이야기는, 북두칠성을 만들고 삼성을 만든 내가, 바닷물을 만들고 땅을 만드신 내가, 낮과 밤을 만드신 내가, 너희에게 나서서 이스라엘 너희들을 패망시키겠다, 그 말은 너희들은 살아가면서 북두칠성과 너희 존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너희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북두칠성과 내가 하는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거예요. 북두칠성과 내가 하는 행동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말은 결국은 이것은 뭐냐 하면, 네가 여호와중심으로 생각하지 않고 네 중심으로, 모든 것을 너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바깥에 있는 것을 관람객의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겁니다. 그냥 구경하고, 관찰하고, 측정하고, 자기 이익 되는 것만 챙기고 그런 식으로 했던 거예요.

모든 관계가 실은 다 끊어진 거예요. 여호와 하고도 관계가 끊어지고, 신약으로 말하면 예수님하고도 관계가 없고, 항상 나 잘되는 것만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인간자체가 무기적이 된다는 겁니다. 무기적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개별인간화, 개별자처럼 살아간다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난 뒤에 신처럼 되리라, 한 그 개별자의 성향이 하나님의 율법을 패대기 침으로 말미암아 서서히 그것이 등장되고 그 낌새가 보이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율법이 나 살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율법의 해석은 나 구원위주, 나 위주로 해석할 수가 없어요. 실제로 율법 내용을 가지고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신명기 22장 8절에 보면 “네가 새 집을 건축할 때에 지붕에 난간을 만들어 사람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이 굉장히 세심한 것까지 다 율법조항으로 주셨지요. ‘지붕 만들 때 난간을 만들어서 다른 사람이 헛디뎌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줘라.’ 그러나 난간을 만들게 되면 그 비용이 더 들어요. 더 들더라도 다른 사람 생각해서 난간 만들라고 한 겁니다. 그 정도는 오늘날도 건축할 때 하잖아요.

그러면 이런 것은 어떻습니다. 신명기 22장 5절에 보면 “여자는 남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요 남자는 여자의 의복을 입지 말 것이라.” 여자들 청바지는 다 입었다 이제. 여기에 대해서 사람들이 왈칵 반발하지요. 옷이란 나 편하기 위해서 입는 것이고 내 스타일 좋게 하기 위해서 입는 것인데 왜, 주님이 뭔데 내 옷 입는 것 까지 잔소리를 해대냐, 라는 그런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율법은 우리를 건드리는 거예요. 네가 하나님, 여호와, 백날 해도 너는 하나의 개별자 입장에서 율법을 바라보고 있고, 그리고 관찰하고 있고, 구경하고 있다는 것을 다 찾아내는 거예요. 3, 4절에도 그렇지요. “나귀라도 그리하고 의복이라도 그리하고 무릇 형제의 잃은 아무 것이든지 네가 얻거든 다 그리하고 못본체 하지 말 것이며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못본체 하지 말고 너는 반드시 형제를 도와서 그것을 일으킬찌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날 이 정도 신사도는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명기 22장 9절에 보면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이것은 또 왜 그렇게 하라고 하느냐? 그러니까 내 이익위주로 모든 것을 봐버리면 성경해석이 전혀 진행이 안 되고 진도가 나가지를 않습니다. 율법 중에서 자기 이익 되는 것, 자기 잘난 것, 그것 자랑하는 것만 뽑고 다른 어떤 것은 전체적으로, 유기적으로 하나로 일관된 해석이 인간의 범죄이후에는 나올 수가 없어요.

어떤 것은 나에게 이익 된다 싶어서 하고 싶지만 어떤 것은 ‘나에게 완전히 손해인데 내가 손해되는 짓을 왜 하느냐? 내가 바보야?’ 이런 생각이드는 구절도 굉장히 많거든요. 안식일에 나무하지 말라, 이런 구절도 마찬가지잖아요. 굶어죽으라는 말인가, 대번에 이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율법에 대해서 하나님이, 내 마음은 이렇다고 내세움에 대해서 인간들은 전혀 받을 자리가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그냥 관람객이지요. “물귀신이 어떻게 생겼는가 보고 이익 되면 믿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율법이 있는 이 이스라엘 나라 주변에 여호와라는 이름의 물귀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바알이라는 신이 등장하거든요. 바알신들을 보니까 아, 그 신에는 뭐가 없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적요소가 빠진 거예요. 언약적요소가 빠졌으니까 인간이 다루기 따라서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우상을 믿는 그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의 인간의 본성과 너무나 잘 연결이 되는, 잘 이해가 될 수 있는 신이 우상이에요. 그 방법이 뭐냐 하면, 교환입니다, 교환! 자, 이 교환의 시대가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교환의 시대 이전이 신분사회에요.

나라의 옹주의 배필을 뽑는데 여러분 본인이 옹주라 합시다. 옹주, 그냥 공주로 합시다. 공주가 본인 결혼하는데 국가에서는 공주개인의 취향에 맡기지 않습니다. 이것은 왕실의 일이에요. 왕실의 일이라는 것은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그 나라의 전통에서 조금도 벗어나면 안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심점, 백성이 마음을 확 끌어당기는 구심점이 계속 살아 있어줘야 백성들은 신이 우리 나를 지켜준다는 생각에 함께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이데올로기거든요. 그게 이념이거든요. 그 이념, 일종의 종교잖아요. 그 이념으로 백성의 마음이, 나라가 하나가 돼야 나라꼴이 돼요. 나라가 돌아간다고요.

그런데 그 공주가 몰래 밖에 나가서 아버지가 미리 점찍어놓은 신랑후보감 4인방을 만나러 돌아다닙니다. 이것은 왕실의 전통에서 있을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왕실은 어떻게 하느냐? 인물보고 학벌보고, 그것은 기본이고 조선시대 때 제일 많이 보는 것이 뭐냐? 사주와 궁합이에요. 사주와 궁합.

아무리 공주가 그 남자를 맘에 들어 해도 사주가 틀어지고 궁합 틀어지게 되면 그것은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주와 궁합을 전문적으로 보는 점쟁이가 하나의 정 5품이든 해서 하나의 공무원 벼슬로서 월급 받고 있는 거예요.

그것을 가지고 유기적 사회라고 합니다. 하나의 통합된 사회, 개인의 취향과 호응도는 완전히 무시되는 사회. 그런데 공주가 딱 보니까 4명 다 후보감이 맘에 안 들거든요. 그래서 자기 맘에 드는 후보감을 따로 만났어요. 감히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나는 저 4명의 남자를 거부하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 “그러려면 공주라는 자리를 포기하고 평민으로 내려가거라. 그러면 내가 허락하겠다.”

이게 바로 조선시대 경우는, 개별자 개인이 원하는 행복을 위해서 개인의 배필을 얻는 그런 시대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특히 왕실의 경우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만약에 공주가 아버지가 뽑은 신랑후보감 중에서 첫 번째가 사주와 궁합이 맞아서 강제로 첫날밤을 치르면서 남편감이 되었다면 나중에 결혼하고 난 뒤에 신하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남편이 “어떻습니까?” 하면 “우리는 다 임금님의 은총을 받아서 이렇게 좋은 혼사를 치렀습니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게 유기적 사회거든요.

그렇다면 오늘날 성도가 나중에 결혼해서 남편감 아내감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서 이런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까?” “다 우리 주님의 은총이죠.” 이게 유기적 사회에요. 이게 이스라엘이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그걸 좀 상세히 말하면, “여호와 하나님의 자기변신의 과정 속에 내가 가담하고 참여하다 보니 나는 저 남자 혹은 저 여자와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좀 문장이 길지만, 그게 유기적 사회에요.

무기적 사회라는 것은 뭐냐? 신분제사회가 완전히 무너졌거든요. 1789년 프랑스혁명 후에 신분제도가 완전히 무너지고 그 다음부터는 내가 얼마나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 하는 소유적사회가 되면서 소유가 소유되려면 교환을 해야 돼요. 교환입니다. 지금 이 시대가 교환의 시대에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아서 내가 제대로 교환을 했으면 나의 소유가 점점 더 늘어나고 커지는 그것을 삶의 보람으로 여기는 거예요.

그게 바로 교환이고 그 교환 이전에는 뭐냐? 나는 개별자가 되는 겁니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내가 하는 거예요. 그러면 국가의 법은 뭐냐? 국가의 법은 사유재산을 보호하는 법이에요. 그게 이 시대의 공법이에요. 하나님의 율법의 정신 아닙니다. 유기적 사회 아니에요. 무기적 사회, 너도 하나의 사물이고 너도 하나의 사물로 교환하는 거예요. 서로 내놓을 것 내놓고 지킬 것 지키는 겁니다.

여러분이 나중에 세상에 나가서 공부를 더 하게 되면 자본가와 노동에 대해서 공부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개인은 그 자체로 개별자, 천부인권설이라 해서 미국의 독립정신이에요. 개인 대 개인, 자기 결정에 의해서 일 대 일 대응으로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시장의 교환으로서만 자기권리를 가진다. 개인을 절대화하는 세상을 법으로 정해놨어요.

그런데 실제로 경제에 들어가게 되면 돈을 가진 자본가가 자본이 없는, 자본이 좀 모자라는 사람을 대할 때는 분명히 계약은 일 대 일인데 사실은 일 대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을 사고 파는 게 아니에요. 그 사람의 노동력을 사고팔거든요, 노동력을. 이왕 힘든 것 더 어렵게 할게요. 인간의 노동을 사는 게 아니고 ‘노동력’을 사는 거예요.

노동력을 산다는 말은,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를 사는 게 아니에요. 나는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재주나 능력이 있습니다, 를 사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그 노동력은 시장에 나와 있는 하나의 진열된 상품과 같아서 그 기술이나 그 능력이나 재주가……, 상품이 망가지면 물건 안사잖아요.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그런 재주가 있는데 이미 한물간 기술이라든지 그런 재주가 있어서 일 좀 하다가 높은데서 떨어져서 허리가 나가서 일을 못한다든지 하면 상품가치가 날라 가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 아니고 인간 대 상품의 만남이니까 분명히 법적으로서는 인간 대 인간이지만 실제로서는 가진 자가 없는 자를 마음대로 골라잡을 수 있는 상품으로, 하나의 사물로 보는 거예요.

있는 자는 자기가족끼리만 유기적이고 상대는 전부다 무기적이 되는 거예요. 무기적이라는 말은 하나의 사물, 딱딱한 돌멩이같이 그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돈 없거든 꺼져.” 그런 식이에요. “돈 떨어졌으면 나가. 이 도박판에서 나가. 판돈 없으면 나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세상 자체가 운발이에요. 도박이 왜 이게 악마적이냐 하면, 도박은 자기운을 일본그림이나 서양그림으로 파악을 하려고 하는 거예요. 지금 자기 손에 1, 2, 3, 4, 5가 나왔는데 그 다음 운발이 6이 나오면 운이 있는 것이고 6이 아니고 8이 나오면 이것은 운발이 다 된 거예요.

자기 운명 자기운을 눈으로 목격한다는 이 짜릿한 쾌감을 못 버리고 인간은 도박판에서 해매고 있는 겁니다. 운발이에요. 삼성전자 주식 샀는데 이게 7만원으로 올라야 할 텐데 된다, 안 된다, 이런 거 있잖아요. 내 운이 어느 정도인지 본인의 눈으로 자기운을 보려고 하는 거예요. 왜? 누굴 위해서? 나 개별자를 위해서, 나 개별자를 위해서.

법은 바로 내 사유재산을 수호하기 위해서 법이 만들어졌으니까. 이 세상 중심은 누구다? 내가 중심이다. 하나님이, 주님이 중심이 아니에요. 나의 가난에서 부자가 되는 나의 변신을 내가 스스로 보면서 감동하고 감격하는 것, 나는 이렇게 인생 승리했다는 것을 스스로 보고 싶은 거예요. 자기 손 안에 화투장 여덟 장이면 그 여덟 장이 나의 운발을 보여주는 것처럼, 또 거기다가 토요일에 로또도 사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은 나를 위한 운발이에요. 남을 위한 운발이 아니고 나를 위한 운발이라고요.

말로는 투자, 투자 아닙니다. 투기입니다. 갬블, 우리는 전부 다 도박꾼이에요. 운 없는 사람은 나가 죽고 운 있는 사람만 살아남고. 사업도 그렇고, 모든 것이 그렇고, 심지어 교회마저 그래요. 학생들 끌어 모아서 교회 하겠다고 했는데 그 학교가 지방대학이라서 폐교되어 버렸어요. 교인 하나도 없지요 뭐. 모든 게 운발이에요.

주님께서는 이처럼 도박판 같은, 자기밖에 모르는 이 자연자체를, 나만 살아 있고 나머지는 전부 다 나 하기 나름이다, 무기적이니까 죽은 물체로 보는 거예요. 타인까지 다 마찬가지에요. 건축하다 돈 좀 모자란다. 그러면 난간 안 짓습니다. 왜? 돈 모자라는데 남까지 고려할 필요 없기 때문에. 내가 나에게 지시하는 거예요. 나 말고 나에게 지시할 사람이 나에게 없는 거예요.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그 달란트 비유. 공장에 세 명의 직원이 있었거든요. 세 명 중에서 한명이 잘린 거예요. 그 잘린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하면, 내가 나에게 지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인이 하는 말이 “너 나 필요 없지 그지? 나도 너 필요 없어. 나가.” 그래서 잘린 거예요.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데 예수님이 왜 그 사람을 거둬줘야 되겠어요? 거둘 필요 없어요.

그래서 주님이 묻는 것은 “나 필요해? 너보다 내가 더 필요해? 네가 중심이 아니고 내가 중심인 것을 네가 수용하겠어? 네 계획 말고 내 계획을 수용하겠어? 그냥 물귀신 구경하지 말고 나라는 물귀신과 같이 내 계획 속으로 들어올래?” 이게 주님 뜻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2, 33절에 보면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왜 사람들이 예수를 부인합니까? 나 우선이니까, 나 우선이니까 예수님은 아쉬울 때만 찾겠다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시험을 한 겁니다. 진짜 여호와가 필요한지, 아니면 자신을 위해서 여호와를 이용하는지. 이스라엘을 실험했는데 결국 이스라엘은, 지난 시간도 이야기 했지만 아모스 5장 6절에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요셉의 집을 완전히 불바다 저주를 해버린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오늘 본문 아닙니까? 천지를 만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 무너뜨리는 그 작업을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심판하고 전 세계를 불로서 심판해서 주께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도대체 주님께서 뭘 노리고 이렇게 세상을 멸망시키는가?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자신의 변신인데 어떻게 변신하느냐 하면, 그 무너지는 세상 안에, 그 무너짐, 그 자연의 무게, 율법의 저주의 무게를 하나님 자신에게 덮쳐버려요. 하나님 자신이, 멸망해가는 이스라엘 백성과 더불어서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자신이 내리는 심판에 스스로 파묻혀 버리는 겁니다.

“너희도 날 따라서 같이 저주와 심판 아래 파묻혀 버려라. 무너져 버려라. 버티지 말고. 하늘은 무너지기 위해서 만들었고 인간은 죽기 위해서 만들었다.” 밤이라 하는 것, 오늘 본문에도 나왔지만 밤이라 하는 것이 죽음의, 사망의 그늘로 되어 있어요. 전도서 5장 17절에 보면“일평생을 어두운데서 먹으며 번뇌와 병과 분노가 저에게 있느니라.”

인생 산다는 자체가 훤한 대낮에 살아도 하나님 보시기에 어둡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유기적인 사실을 모르고 개별자 입장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모든 출발을 자기부터 하거든요. 호세아 7장 7, 8절에 보면 “저희가 다 화덕 같이 뜨거워져서 그 재판장들을 삼키며 그 왕들을 다 엎드러지게 하며 저희 중에는 내게 부르짖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그 자세한 것은 8절에 나옵니다.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화덕은 벌건데 벌건 화덕에 하나의 전병 떡이지요. 이스라엘에서는 전병이고 우리 한국식으로 하면 파전, 해물전, 빈대떡. 이 빈대떡이 한쪽은 타들어가도 뒤집을 줄 모르는 거예요. 왜? 이 삶, 개별자 삶에, 나밖에 모르는 삶에 너무나 익숙해져가지고 뭔가 뜨겁기는 뜨거운데 다른 대안이 없어요. 내가 무너져야 되고 나는 망해야 된다는 생각을, 이게 우리의 도리라는 생각을 태어나서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어요.

뭐든지 만나면 전부 다 라이벌이야. 내가 갖고 싶은 것 때문에 뺏어야 돼요. 깨물어서라도 뺏어야 돼요. 누나고 뭐고 없어요. 타고난 본성이에요. 그러나 우리는 그 본성, 내 본성은 나밖에 모르고, 깨물어서라도 남의 것을 무조건 내 것으로 하면 우리는 해해거리면서 좋아한다, 라는 사실을 본문을 통해서 알아서, 하나님의 그 스케줄에 우리가 하나의 물귀신에 빨려가듯이, 내 존재가 아니고 하나의 역할로 들어가야 돼요.

지금 수십 년 동안 예수 피 믿고, 예수 피 바르시면 죄 사함 받는다는 이야기를 엄청나게 했고, 또 그렇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제가 지금까지 듣고 있어요. 예수 피로 구원받고, 용서받고, 예수 피로 새사람 되고 천당 간다. 백날해도 저는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 이유가, 본인 위해서 예수 피를 믿는 것으로 자꾸 들려오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예수 피를 자꾸 거론하고, 십자가를 거론하고, 복음을 거론한다 그 말이지요. 그리 되면 뭐가 되느냐 하면, 아무리 해도 본인의 이론밖에 안돼요. 지식밖에 안된다고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하고 자기하고 뚝 떨어져 있어요. 거리가 있다 이 말이지요. 사회적 거리두기 합니까? 뚝 떨어져 있는 거예요.

주님의 뜻을 제가 흔쾌히 받겠습니다, 하고 본인이 와서 주의 십자가 피 믿으면 구원받는다, 하는 것을 자기가 계속 가져오는 식이에요. 자기는 멀쩡하고.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영화의 엑스트라가 아닙니다. 엑스트라는 역할이에요. 십자가를 내가 이용하는 것이 아니고, 믿는 게 아니라 이미 가동되는 십자가 작업 속에 하나의 엑스트라로 이미 거기에 참여된 거예요.

나의 모든 움직임이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이런 인생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을 즐거워해야 되지요. 망하면 망하는 대로, 무너지면 무너지는 대로 십자가만 드러내는 일이 되기에 나는 끽소리 않고 오히려 자신의 무너짐을 즐거워하는 겁니다. 내 것이 없으니까, 챙길 내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뭐 십자가 피 믿고 용서 받았습니다, 하면 백날 이야기해야 당신은 지금 구라에요 거짓말 하고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위해서, 주님을 위해서 나 이렇게 마땅히 당연히 망가지고 망하고 무너지는 것이 즐겁습니다.” 이러면 한 번 생각해 볼 수도 있어요. 그렇게 한다면 ‘오, 저 사람은 진짜 지금 십자가라는 하나님 영화에 출연한 출연자구나.’ 우리는 영화구경꾼이 아닙니다. 관람객이 아니에요. 출연진이에요, 출연진. 큰 강에 휩쓸려가듯이.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마냥 다 무너지는가? 무너지지 않는 게 있어요. 이사야 5장 1, 2절에 보면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노래하되 나의 사랑하는 자의 포도원을 노래하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포도원이 있음이여 심히 기름진 산에로다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그 안에 술틀을 팠었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 포도를 맺혔도다.”

내가 약속의 땅에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는 겁니다. 극상품 포도나무를 내가 심었다. 하나님이 심어놨는데 그러나 그들이 좋은 포도 맺기를 원했더니 들포도를 맺었다. 주님께서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이 포도를 가지고 언약의 완성의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신약 누가복음 22장 18절에 보니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이제부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까지 포도나무에서 난 것을 다시 마시지 아니하리라.” 모든 것이 무너져도 주님이 계획한 포도나무는 주께서 다시 살리시는 겁니다. 이게 여호와의 변신이에요.

세상 무너짐에 함께 무너졌다고 생각하는 주님께서, 모든 인간은 소생할 수 없었지만 예수님은 그 무너짐 속에서 죽음과 악마의 권세를 뚫고, 율법의 정죄함을 뚫고,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켰잖아요. 그 부활시킨 것이 뭐냐? 그게 생명나무 같은 포도나무에요. 이스라엘 약속의 땅의 그 포도나무가 다시 돋아난 겁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22장 30절에 보면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내 상에서 먹고 마시며……” 이렇게 되어 있어요. 그 포도나무 이야기를 계속 하시면서 29절에는 “내 아버지께서 나라를 내게 맡기신 것 같이 나도 너희에게 맡겨” 너희들이 나와 함께 이 약속의 땅에서 먹고 마실 것이다. 하나님이 약속한 그 모든 영생의 그 나무를 영생의 과실을 먹을 것이다,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뭐냐? 이미 하나의 출연진으로서 예수님 물귀신 속에 같이 휩쓸려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여호와의 변신이 마지막에 주 예수님이 되듯이 예수님의 그 효과 속에서 같이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말씀 나오지요.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너희는 나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같은 영화의 출연진이라는 말이지요. 주님의 영화가 우리의 영화거든요. 그래서 성령 받은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으로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리스도를 믿는 정도가 아닙니다. 아예 그리스도 안에 들어온 사람, 물귀신과 함께 주님께서 하는 계획대로 무너지는 것도 감사하고, 자빠지는 것도 고맙고, 망가지는 것도……, 주님도 망가졌는데 우리는 왜 안 망가져야 되지요? 말도 안 되거든요.

주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해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감사하는 사람에게는 영생의 열매를 주님과 같이 공유하게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계획 멈춤이 없고 질주하는 기관차처럼 일관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저희가 알게 되어서 저희들의 위상을 다시 돌아보게 하십니다. 우리가 관람객인지 아니면 주님이 부리시는 출연진인지, 어느 쪽이 우리의 자리인지를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