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32강, 333강) 얼굴, 미움 201117

정인순 2020. 11. 18. 08:03

332강 음성 동영상

333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32강-YouTube강의(얼굴 고린도후서 4:6)20201117-이 근호 목사


제332강, 제목은 ‘얼굴’. 얼굴을 통해서 사람들은 외부와 접선을 하게 되어 있어요. 뭐 발가락가지고 하지는 않고 등짝 가지고 안하고 뒤통수 가지고 안하죠. 얼굴에 그 사람의 모든 본질이 거기 다 담겨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얼굴 가운데에서도 귀도 아니고 코도 아니고 입도 아니고 눈. 눈을 마음의 창이라, 이렇게 하거든요. 마태복음 6장 2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에 대해서 하신 말씀이 나와 있어요. “눈은 몸의 등불이니” 몸의 등불이니까 몸에다가 등불 켰다고 보면 됩니다, 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네 얼굴이 네 몸을 대변해준다. 몸의 속성, 본질을 얼굴이 다 말해준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이야기한 것까지 정리하게 되면 사람의 몸이라 하는 것은 밝으냐, 어두우냐를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그런 기능을 부여했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나는 혼자 산다. 외롭다. 라고 하지 마시고 혼자 살든 둘이 살든 관계없이 혼자서도 충분히 하나님의 말씀을 드러낼 수가 있어요. 혼자 살더라도 눈이 밝으면 되잖아요. 눈이 밝으면 되거든요. 얼굴이 밝으면 된다 이 말이죠.

그 다음 문제는 여러분들 이제 아시겠죠. 얼굴이 밝아지려면 또는 달리 이야기하면 눈이 밝아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밝다는 것은 주님의 뜻을 제대로 세상에 펼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두 사람, 세 사람 모여야 주의 일이 되는 게 아니고 혼자서도 얼마든지 주의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친한 친구 없다고 너무 좌절하거나 낙담하거나 세상 끝낼 생각하지 마라. 이 말이죠. 아무도 나를 찾아온 사람 없기 때문에 나는 그냥 죽을래. 하지 마라 이 말이죠. 네 눈만 밝으면 되고 얼굴만 밝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얼굴의 원조가 있어요. 이 땅에서 이런 경우가 밝은 얼굴이고 이런 경우가 하나님 아버지가 인정한 얼굴이라 하는 기본 모델이 있거든요. 그 모델이 고린도후서 4장 4절입니다. 우선 4장 4절에는 세상 신이 등장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악마죠. 악마가 인간에게 어떤 작용을 한단 말이죠. 악마가 인간에게 작용을 하게 되면 이것은 제가 여러분한테 물어보나마나 그 눈과 그 얼굴은 밝겠습니까, 어둡겠습니까? 당연히 어둡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만들 때 눈 또는 얼굴을 하나의 가로등으로 생각하자 이 말이죠. 그러면 빛이 전기가 들어와서 거리를 밝히는 그 가로등과 이거 뭐 정전이 되었는지 가로등은 있는데 깜깜한 가로등, 이렇게 생각하시면 쉽습니다.

그런데 세상의 신은 인간 자체를, 인간의 얼굴을 어둡게 만들기 위해서 모든 혼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어요. 인간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눈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다른 말로 하면 얼굴을 어둡게 하기 위해서. 갱년기 되어서 기미 끼고 시커멓고 그런 걸 두고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4장 3절에 보면 “만일 우리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운 것이라” 그 망하는 자들이 바로 어두운 자. 그 어두운 자를 4장 4절에서는 마음을 혼탁케 한다. 마음을 혼미케 한다 또는 혼탁케 한다. 이렇게 보면 돼요.

아까 마태복음 6장에서 눈이 밝아야 마음도 밝다고 했잖아요. 마음은 인간 몸의 내부니까. 그런데 여기 고린도후서 4장 4절에서도 세상 신이 마음을 혼미케 한다, 어둡게 한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세상 신이, 악마가 어둡게 하는 이유가, 의도가 있어요. 4장 4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 함이니”

사람이란 무엇인가. 사람의 기능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사는가. 성도는 왜 있는가. 딱 해답 다 나왔죠. 예수님이 밝히 알려준 완성된 복음을 하나의 가로등으로서 빛을 내비치는, 빛을 주는 자 또는 발광체, 보이지 않는 주님의 발광체로서 성도가 있고 성도가 아닌 사람은 악마의 어두운 기운을 발광하는 발광체가 되겠죠.

이렇게 보면 혼자 사니 외로워요. 뭐 어떻고 저떻고 하는 그런 궁시렁거리는 것은 다 주제파악이 안됐고 자기 분수를 몰라서 그래요. 이런 엄중한 임무와 사명이 주어졌잖아요. 우리 존재의 이유가. 자기 사랑하는 여자 친구와 빨리 조만간 결혼하겠다. 그게 존재의 이유가 아니고 존재의 이유는 바로 광채를 비추는데 그 광채는 세상에 없는 광채고 예수님에게서 나왔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제 여기 5절 건너뛰고 6절 봅시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그 다음에 나와 있는 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자, 강의 처음으로 돌아갑시다. 얼굴이라는 것은 뒤통수로 알려지는 게 아니죠. 발꿈치로 관계하는 것이 아니고 얼굴은 관계해야 될 쪽을 향하게 되어 있는 게 얼굴입니다. 참 얼굴이 양쪽에 있었다면 헷갈릴 뻔했죠. 얼굴이 사방에 다 있는 그런 피조물도 있어요, 천사. 에스겔에 나오는 천사는 사방으로 해야 될 일이 있기 때문에 소의 얼굴, 독수리 얼굴, 사자의 얼굴, 인간의 얼굴 다 기능 때문에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기 택한 백성 쪽으로만 비추면 돼요.

그러면 비추게 되면 택한 백성, 성도만이 그 빛이 오는 쪽으로 가만있지 않고 자기 얼굴을 어디로 돌리겠어요? 주님 쪽으로 바라보겠죠. 자 여기서 중요합니다. 주님과 그 성도 사이에 서로 얼굴을 마주볼 때 인플레이션이 어떠니 북한 핵문제라든지 트럼프가 버티고 안 나오고 있다든지 독도가 뭐 일본 땅이냐 우리 땅이냐 하는 그런 문제가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코로나 19가 눈에 들어오겠어요?

코로나 19문제가 들어왔다는 말은 이미 자기 얼굴을, 용도가 한 쪽에만 그리스도 광채가 비추는 쪽으로만 쓰려고 한 얼굴의 용도인데, 갑자기 본인이 본인 스스로 살아보겠다고 코로나 19에 얼굴 돌리는 순간 그 얼굴은 빛이 한 모퉁이 날라가 버렸죠. 조명발이 안 되는 거예요. 경사도가 떨어져가지고 조명발이 귀 있는데 여기 한 부분만 비추고 나머지 80%는 시커멓게 되는 겁니다.

주님 바라보면서 살아야 될 사람이 가게 개업을 했다. 가게 개업을 해도 괜찮아요. 개업을 해도 주님만 바라보면서 개업하면 되는데, 개업하는 데에 그만 신경이 다 쓰여 가지고 본래 성도의 용도에 합당한, 주님 얼굴하고 서로 교제하라고 쓰는 얼굴을 간판 어떻게 하면 되고 메뉴판 어떻게 하면 되는지 여기에 신경 써버리면 얼굴이 퍼렇게 되겠죠.

그러니까 메뉴판 신경 쓰고 손님 대접하더라도 얼굴은 항상 십자가 복음 쪽에 얼굴을 쓰는 게, 가게 열라고 하는 용도가 아니고 ‘손님 어서 오십시오’ 하는 데 쓰는 용도가 아니고 주님 빛을 비춰서 손님이 오든 누가 오든 그 빛을 되비치게 하는 것이 성도의 얼굴입니다.


333강-YouTube강의(미움 창세기 27:41)20201117-이 근호 목사


제333강, 제목은 ‘미움’. 사랑은 단독으로 주어지는 게 아니고 미워할 자와 동반해서 나타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조물을 만들어놓고 그 피조물 내부에 미워할 자도 따로 만들고 사랑할 자도 따로 만들었어요. 사랑하려고 전부를 만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미움이 드러날 필요가 있어서 “내 미움이나 받아라, 이것들아.” 하는 그 기능 때문에 미워할 자도 따로 만드신 거예요.

그러면 사랑의 하나님께서 미워할 자를 왜 만드셨는가. 사랑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만든 거예요. 미워할 자와의 차별을 통해서 사랑을 더욱더 부각하기 위해서 미워할 자를 만든 겁니다. 그럼 미워할 자와 사랑할 자, 이렇게 둘을 만든 이유는 심판주로서의 하나님이, 심판하는 기능자가 온 우주를 창조한 창조주의 최종적인 주님이 되기 위해서 그렇게 미워할 자가 있습니다.

인간보고 “너희들 중에 하나님 미워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 보세요.” 이렇게 해가지고는 자진해서 영원히 미움 받을, 저주받을 사람이라고 나설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죠. 그래서 미워할 자는 인간의 의사를 물어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찍었어요. 너는 미움의 대상이라고 찍어버린 거예요.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든지, “공평치 못합니다.” 한다든지, 그것은 썩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마음에 합치되지 못한다든지 그렇게 성질 낼 자들이 필히 생겨나게 되어있어요. 왜냐하면 그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정리해보면 강의는 쉽죠. 하나님께서는 미워할 자의 그 본질을 악마의 본질과 통하도록 그렇게 하신 겁니다. 인간을 만드시고 악마로 하여금 인간을 꼬시도록 하여서 악마의 마음이 인간의 마음으로 흘러가도록 하나님께서는 허락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심판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래야 미워할 거리가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 그래서 미움 받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악마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미움 받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악마의 마음은 뭐냐. 악마의 마음이라 하는 것은 악마자체가 독립 선언한 천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가 독자적으로 홀로 살고 싶은 사람들은 다 미움 받기로 작정된 사람이다. 그러한 성품이다, 품성이다. 이렇게 보면 돼요. 혼자 살고 싶은 사람. 독자적으로, 최종적으로.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가장 나다운 모습은 최후의 남은 일인자가 남이 아니라 내가 되는 것이 가장 나답다고 여기는 사람, 그러한 피조물들, 그러한 인간들, 그거 하나님께서 지옥 보내기 위해 작정한 사람들이에요. 말 좀 전한다고, 복음 전한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미 작정을 했기 때문에 달라지지 않아요.

그러면 복음이라는 것은 그런 사람까지 돌이켜서 구원받게 하는 기능이 아니고 구분하는 기능이죠. 사실은 모든 인간들이 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구분해야 될 기준이 주어지는데 그 기준이 무슨 기준이냐 하면 “나는 어떤 이는 미워하고 어떤 이는 사랑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언약 안에, 약속 안에 담겨서 우리에게 주어져요. 언약 안에 담겨서.

창세기 27장 41절에 보면, “그 아비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인하여” 그 다음에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이렇게 되어있죠. 여기 미움 나왔죠. 축복이 없으면 에서는 자기 동생 야곱을 미워할 이유가 없죠. 그러니까 이 축복이라는 것이 인간 집단을 두 토막 내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거예요. 그 경계선 자체가 축복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동생을 전혀 미워하고 싶지 않아요. 미워할 이유도 없고, 사랑하고 싶어. 그런데 축복이 와버리면 그 다음부터는 동생을 미워하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를 성경은 하시는 겁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뭐냐 하면 “형아, 너는 동생을 섬겨라.” 이겁니다. 동생을 섬겨라. 이것이 바로 29절에, “만민이 너를 섬길 것이요” 나오는 거예요.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그러면 우리 같으면 동생이 되든 뭐든 하나님의 지시니까 하나님께서 섬기라니까 “그럼 섬기겠습니다.” 이렇게 나올 수 있잖아요. 그런데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악마의 마음은 뭐냐 하면 누구를 섬길 의사가 전혀 없어요. 오히려 “세상 모든 것들아, 내 앞에 꿇어.” 이렇게 되는 거예요.

직장에서 말단 사원으로 설움 받던 아버지가 집에 와서 술 한잔 정도가 아니고 그냥 말술로 먹고 가득 취해 와가지고 집안 식구들, 애들하고 불러놓고 지가 대장질 잠깐이나마 코스프레하고 나중에 코골고 자고 싶은 이유가 지가 당한 게 있기 때문에. 자기보다 나이 어린 거, 나보다 늦게 들어왔는데 자기보다 승진 빠른 사람. 존재 자체가 미워요, 존재 자체가.

또 이런 예를 들죠. 여기 만약에 빵집을 했는데 빵집이 제법 한 달에 200만원이라도 떨어지는 게 있어가지고 애 키우고, 애 학교 공부시키고 노후까지 대책하자. 이랬는데 바로 앞집에, 그것도 영업 윤리도 없이 바로 앞집에다가 거대하게 프렌차이즈 베이커리해가지고 시설 잘해놓으니까 손님들이 거기 빵 맛있다고 다 가버렸어요. 파리바게트가 빵이 맛있어요. 다른 동네가게가 못 따라간다고.

그럴 때 그 사람이 이 사람 동네 빵집을 해코지한 것도 아무것도 없어요. 너는 너대로 빵집하고 나는 나대로 빵집 하는데 미울까요, 안 미울까요? 엄청나게 미운 거예요. 그렇죠? 여기 교회 있는데 저기 맞은편에 교회 하나 들어와서 교인들 다 데려갔다. 밉죠. 미우면 어떻게 하겠어요? ‘참아야 하느니라’ 이렇게 됩니까, 아니면 죽으라고 기도하겠습니까?

바로 그 미움을 누가 받았는가? 예수님이 받은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지옥 보낼 만해서 지옥 보내는 겁니다. 이 세상의 어떤 인간도 하나님께서는 안받아주고 오직 하나님께서는 예수님만 받는다는 이야기를, 예수님이 안했으면 괜찮은데 동네방네 그 이야기를 한 거예요.

너희들 아비는 악마다. 아버지는 나만의 아버지이지, 너희들 아버지가 아니다. 이 이야기가 이미 가게 차려놨던, 장사했던 그 사람들로 하여금 안 죽일래야 안 죽일 수 없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악마가 이 땅에서 활동해야 했고 우리가 악마의 마음을 받는 것이 구원의 절차이어야 해요.

구원은 뭐냐. 어디서 벗어났는가. 미움 받아야 마땅한 내 마음에서, 그 악마의 발목에서 벗어난 거예요. 미움 받아야 마땅한 내 마음에, 십자가, 너는 가해자이고 나는 피해자라는 소식을 성령을 통해서 부여받는 순간 우리는 사랑이라는 것을 알아요.

사랑은 미움 받아야 되는 자에게 불쌍히 여김, 긍휼히 여기심의 의미가 비로소 평생토록 계속해서 살아있는 거예요. 살아있는 겁니다. 그게 바로 예상 못할 사랑이에요. “나 같은 인간은 사랑받을 가치가 없습니다.” 가 사랑을 받은 사람의 확실한 징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