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강, 325강) 철저함의 철저함 , 무능력 200922
녹취:이하림
324강-YouTube강의(철저함의 철저함 누가복음 4:41)20200922-이 근호 목사
제324강, 제목은 ‘철저함’. 사람의 만족도 가운데서 자기 자신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철저하다고 느낄 때 저절로 입가의 미소가 싸악 번져 나오죠. 아, 참 내가 생각해도 내가 참 대단하다. 철저함. 그런데 그렇게 철저하다는 것은 본인이 어떻게 생각해서 철저하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어제까지, 조금 전까지 자기가 모자란다고 한 그 대목이 오늘에 와서 마저 채워질 때 사람은 ‘참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예를 들면 공무원 시험을 치는데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면 대단하고 떨어지면 나는 참 모자란 인간이다.’ 라고 시험 치기 전에 그렇게 생각을 했죠. 그런데 시험치고 난 뒤에 보니까 아무래도 떨어질 것 같아. 자신감이 없다 이 말이죠. 나중에 발표 날 때, 그래도 뭐 결과는 알아봐야지 하고 보니까 합격이 되었어요. 그럴 때 인간은 실력이 모자랐는데도 합격했다는 생각이 안 들고 ‘역시 합격될 만한 자질이 있으니까, 실력이 되니까 합격했구나.’ 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긍정하게 되는 겁니다.
철저함은 인간의 목표에요. 보다 완벽하고 보다 철저하고. 그런데 자기가 자신보고 철저하다고 이야기하는 것, 그게 주님이 우리를 그렇게 평가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평가에 대해서는 인간의 상상을 넘어섭니다. 내가 한 중에 착한 일 몇 개 있고 나쁜 일 몇 개 있다는 것은 구약적 안목이에요.
다윗은 밧세바 이외에는 별로 나쁜 짓하지 않았다는 것은 구약적 안목이에요. 그럼 ‘다윗이 메시아냐’ 라고 물을 수 있는데 사도행전의 베드로 설교에 의하면 다윗은 분명히 메시아가 아니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2장 25~36절)
다윗이 메시아냐 아니냐를 결정짓는 근거가 뭐냐 하면 그가 죽어서 무덤에 내려갔다는 사실이에요. 그러면 늙어가고 있고 죽어가고 있고 무덤에 내려간다면 그 인간은 하나님 보시기에 철저하지 않은, 완전하지 않은, 완벽하지 않은 인간입니다.
여러분들이 대인관계에서 사람을 만날 때 그 사람이 영원히 살 사람이냐, 천사같이 영원히 안 죽을 존재냐 안 그러면 죽을 인간이냐 라는 점을 한번 보세요. 그 사람이 나이 많아 늙어 죽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사람에게 기죽을 필요 없고 그 사람의 말을 들을 이유도 없어요. 신뢰할 필요 없습니다. 그 사람은 진리가 아니니까.
진리라 하는 것은 완벽하게 진리 될 때 진리지, 몇 개 뭐 맞는 거 있다고 진리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공무원 시험 합격해도 본인이 늙어 죽는다면 공무원 시험의 합격이 나의 구원을 보장해주는 게 아니에요. 공무원 시험 합격하게 되면 누가 좋으냐면 에듀윌 그쪽 학원에서는 되게 좋아하죠.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공무원 시험 합격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막 기뻐하고 그런 것 없습니다. 네가 공무원 합격을 했구나, 천국에 넣어줄게. 이런 거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말해서 철저하다는 평가는 누가 내려야 되느냐면 하나님 쪽에서 선언을 해주고 내려줘야 돼요. 그러면 내가 보기에 내가 부실하고 어설프고 남들 보기에 ‘아이고 인간아, 나가 죽어라’ 할 정도로 저주를 품는다할지라도 주님께서 ‘너는 철저하고 완전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완전한 인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왜 봅니까? 성경을 보게 되면 인간이 모르는 여분의 진리가 있잖아요. 인간이 모르는 진리.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 그런 게 성경에 나와 있다 이 말이죠. 그거 아니면 성경을 왜 봅니까? 성경을 보는 사람이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그런 거를 생각해야 될텐데 대부분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철저의 철저를 기하기 위해서 성경을 봐요.
목회를 하는데 교인 2명밖에 안되는데 성경 봐서 2명에서 3명으로 한번 늘려볼까. 왜? 교인 3명이 2명보다 더 철저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설교를 하는데 좀 완벽하게 설교를 했는지 안했는지 성경을 한번 찾아보자. 그것은 자기 철저함이죠. 내 설교를 철저하게 하려고 성경 준 게 아닙니다.
내가 하는 모든 일에 대해서 철저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이것이 하나님의 철저하게 보시는 그 관점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누가복음 4장 41절에 보면,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귀신들이 나가면서 뭐라고 하느냐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그러한 고백이 아니에요. 마귀가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누가 이야기했죠? 귀신들이. 소리 질러. 그러니까 주님께서 하신 말이 그 입 다물라. 이렇게 된 거예요. 입 다물어. “주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누가 그리스도인줄 안단 말입니까? 귀신이. 예수님이 바로 메시아인줄 아는 거예요.
그러니 이 대목을 두고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난감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라고 고백했다가는 잘못하면 “네가 바로 귀신이야. 마귀야.” 이런 꾸짖음을 들을 수도 있잖아요. 귀신이 나가면서 하는 고백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에.
그러면 복음서나 바울 서신이나 편지에서 성도가 하는 고백은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가 아니라 “나는 죄인입니다.” 이거에요. 그래야 주님께서 할 말이 있어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런데 마귀는 왜 꾸짖음을 받죠? 마귀는 스스로 자기가 철저함을 추구하고 있어요. 인간보다 더 철저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서 지식적으로 악마보다 더 뛰어난 인간은 없어요. 그런데 악마의 지식에 의하면 예수님은 그리스도입니다. 그 말이 맞아요.
신학을 연구 많이 해서 예수님은 그리스도 맞다고 증명한다면 그건 마귀입니다. 그건 귀신이에요. 철저한 주님 앞에 철저함으로 맞닥뜨리고 만나라고 성경 준 게 아니라 이 말이죠.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공부 할 때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고 보다 철저에 철저를 기하기 위해서 성경공부 하잖아요.
그것은 왜 그러느냐 하면 귀신이 심어준 본성이 그래서 그래요.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내가 정작 원하는 복 받겠지. 그동안 철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받았지만 철저하면 이제 복으로 전환되겠지. 라는 의도가 은근히 있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독립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도 자립하고 싶은데 이왕 자립하는 거, 철저에 철저를 기해서 자립하게 되면 하나님도 나를 무시 못할 것이고 티 잡을 게 없을 것이다. 라는 그러한 품성, 마음. 이게 무슨 마음이라고 했습니까? 이게 악마의 마음이죠.
그동안 내가 다른 건 아는데 성경 몰라서 왔는데, 교회 와서 성경 알아가지고 천국 들어가겠다. 이게 바로 철저함의 철저함. 누가복음 4장 41절 없었으면 이건 무슨 진리처럼, 그래야 되는 것처럼 다들 알 게 아니겠습니까? 주님께서 원하는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325강-YouTube강의(무능력 출애굽기 3:12)20200922-이 근호 목사
제325강, 제목은 ‘무능력’. 출애굽기 7장 6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없었던 나라,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새로 만드는 이유가 나옵니다. 3장에도 나오고 몇군데 나오는데 7장 6절에 보면 이렇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대로 곧 그대로 행하였더라”
‘행하였더라’ 라고 되어있을 때 여러분 보기에는 모세와 아론이 참 능력이 많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 자체가 모세는 능력이 전혀 없다는 사실. 물론 자기가 숟가락 들고 밥 먹는 능력은 있지만. 자기 일에는 능력이 있어요. 그런데 어디에는 능력이 없느냐 하면 주의 일은 하나님께서 절대로 능력을 인간에게 인수인계한 적이 없습니다, 주의 일에는.
출애굽기 3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 말씀을 보게 되면 간단하게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준 목적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무능력하게도 그걸 몰라요.
마치 오늘날 우리가 태어나서 돌잔치 받고 유치원 다니고 초등학교 다니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본인이 존재하는 목적에 대해서 본인이 알 수 있습니까? 나이 90이 되고 100살이 되도 본인이 존재하는 이유를 압니까? 나이 90넘은 송해가 본인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아요? 모르죠. 몰라요.
성경을 이야기하면 알 게 아니냐. 하지만 성경을 이야기해도 몰라요. 왜냐하면 성경 이야기가 내 속에 들어오지를 못합니다. 왜 그러느냐 하면 성경 말씀에 대해서 내 속에서 밀어내는 힘이 작용해요, 밀어내는 힘이.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야기했겠습니까. 내가 이 땅, 애굽에 내려온 것은 여러분들 나라를 만들어서 그 나라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약속한 바가 있어 하나님이 지시한 산에 가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내가 보내졌단다. 알았지? 알아듣지? 그러면 그들이 아, 그것 때문에 그랬구나. 라고 알아듣는다고 이야기를 해요. 이구동성으로. 뭐 그거 어려운 말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모세, 아론 보내서 우리로 하여금 그냥 집단으로 만들어서 애굽에서 탈출해서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 섬기게 되어 있구나. 이거 뭐 하나님이 그럴만한 하나님이다 라고 되겠지만 자기 마음속까지는 들어올 수가 없어요. 그 이야기 자체를 그들이 듣게 되면 그들은 하나도 다치지 않고 곱게 곱게 일이 추진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 신약에 와서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가 이 땅에 온 메시아다. 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로마서 10장 나오죠. 또 사도행전에 나오죠. 누구든지 나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그 문장을 들으면 우리 인생은 굉장히 곱게 가는 것처럼 느껴져요. 몰랐던 건데 평소에 살던 대로 살고 뭘 하나 추가하면 되느냐면 예수 몰랐는데 예수 믿으면 이제 죽어서 천국 간다. 그거 하나 추가하는 게 뭐 힘듭니까? 어렵습니까? 갑자기 인생이 뭐 바뀌어지는 그런 게 있겠어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김밥 먹다가 목 매여가지고 “아주머니, 여기 혹시 우동국물 없습니까?” 추가를 했다 이 말이죠. “아이고 빠뜨렸구나. 그래 우동국물 떠먹어가면서 김밥 잡수세요, 총각.” 했을 때 그 우동국물 하나 추가한다고 해서 갑자기 내 인생이 막 아프고 속 쓰리고 토하고 어지럽고 그러겠어요, 우동국물 추가한다고? 갑자기 내 아파트가 무너지고 그런 일이 생기겠습니까? 우동국물인데. 그게 독약이 아니고 그냥 흔히 먹는 국물이에요.
뭘 하나 추가한다고 해서 든든하고 확고한 내 인생이 망가진다는 것을 사람들이 예상하겠느냐 이 말이죠. 예상 안하죠. 만약에 마약을 먹으라고 한다면 이건 예상하죠. 마약하면 나는 이제 끝났다 이게 되겠는데 우동국물이라니까. 그거 뭐 부담 없어요. 우동국물 말고 짬뽕국물로 할까. 뭐 괜찮아요. 아무 일 없거든요.
내가 만약에 골목식당을 하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 믿으세요.”, “예, 믿겠습니다.”하는 순간 골목식당이 와르르 무너지고 그래요? 아니죠.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와 아론이 와서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 인생에 그다지 큰 우환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광야가 기다릴 거라는 것은 상상도 못했어요. 왜? 그 정도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를 섬긴다고 한 그 순간, 또는 오늘날 신약 식으로 네가 나를 믿는다고 한 그 순간 우리는 믿을 능력이 없다는 것을, 그리고 출애굽기 같으면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이고 뭐고 모든 본질 자체가 섬기는 대상이 안된다는 사실을 본인들은 몰랐어요, 안된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모세와 아론을 보내서 안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겁니다. 안되는 걸 되게 하는 거예요. 그야말로 씨름판에서 상대방 선수 샅바 붙들고 넘어뜨리거나 뭐 이정도 할 줄 알았지 세상에 그 씨름선수가 나를 통째로 들어서 머리는 아래로 다리는 위로 해서 꽂아버리듯이 한판을 따낼 줄은 샅바 붙들 때까진 몰랐죠.
우리가 거꾸로 산다는 것은 피가 거꾸로 쏟아질 정도로, 현기증 날 정도로... 내가 추구하고 내가 원하는 인생 목표가 있잖아요,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 이렇게 살고 싶다 이런 거 있잖아요, 그걸 내가 기피하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그 인생을 거꾸로 완전히 모래시계 뒤집듯이 뒤집을 줄이야 상상을 못했습니다. 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마 그렇게 광야생활을 미리 보여주고 하나님 믿으라 하면 그들은 아예 하나님 포기했을 거예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 환난이 기다리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선택하거나 결심하거나 나설 위인들이 아닙니다.
따라서 주님께서 예수 믿게 해요. 지금 협박, 공갈 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 믿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섬기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 아셔야 돼요. 예수 믿는데 전혀 믿을 마음도 없고 예수 믿고 싶은 자발적인 의지가 없고 그 가는 길이 너무나 험하고 어렵고 불가능하고 좁은 길이라서 나설 수 없는 인간을 기어이 그 좁은 길 가게 하셔서 예수 믿게 하십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믿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문장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능력자가 아니라 주님이 그 문장을 본인이 가져가서 그 문장대로 기어이 예수 믿게 해주시는 겁니다.
우리는 완전히 사단났고요, 그 와중에서. 우리는 박살났고요. 우리는 내 고집, 내 의지 찾을 수 없고요. 내가 꿈꾸던 세계 날라가버렸고요, 초장에. 내가 바라는 근사한 나, 멋진 나, 인생 괜찮게 살았다 자랑질 하고 싶은 나, ‘나 어때? 이만하면 인간답지’라고 남한테 으스대고 싶은 모든 것, 그것은 기대하지 마세요. 그것은 넓은 길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넓은 길쪽이에요. 가만히 놔두면 절대로 우린 천국 가는 길로 갈 위인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에요. 신약 성도 우리 자신 보기 전에 이스라엘부터 먼저 보세요. 이스라엘이 얼마나 혼났고 박살났고 깨졌고 죽었고 망했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가치를 기어이 붙들고 어린 양의 가치를 위해서 어린 양의 피의 의미를 계속해서 발산시켜 가면서 그들을 죄인으로 만들어 가면서 죄인의 죄됨을 문제삼지 아니하시고 오직 어린 양의 십자가 피, 어린 양의 피의 효능만 자꾸 드러내면서 기어이 우리를 천국 들어가는데 주의 이름으로 능력있게 성사시킵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무능한 자라는 고백을 기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저 무능합니다.” 라고 고백하면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