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스 2:6-8 / 경제와 언약
경제와 언약
이근호
2020년 9월 16일
본문 말씀: 아모스 2:6-8
(2: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2:7)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2:8)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남쪽 유다나라는 총괄적으로 ‘율례와 법도를 무시했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북이스라엘을 통해서 그 ‘율례와 법도를 무시’한 구체적 사례를 보여줍니다. 겉으로보면 부한 자들이 가난한 자를 억압하고 있는 것이 벌받는 이유같이 보이지만, 실은 이미 이스라엘이 이방민족과 사상이 동일하다는 것은 기본 요소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나라와 사이에 역사적으로 드러난 차이는 ‘왕 있음’과 ‘왕 없음’의 차이입니다. 사무엘상 8:7-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백성이 네게 한 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낸 날부터 오늘날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계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알게 하라”
도대체 이미 약속의 땅을 접수해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이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점이 불만이었을까요?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하나만 고집하신다는 겁니다.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이었었음이니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을지라”(출 22:21-23)
즉 하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스라엘의 후견자이고 싶어하시는 겁니다. 비록 이스라엘이 목이 곧고 건방진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이루고 싶어하시는 겁니다.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신 9:5-6)
이스라엘 구성 원래 인간 왕이 필요치 않습니다. 씨족 단위로 그들은 소규모 생존의 터전을 하나님으로부터 할당받았습니다. 이 할당받은 땅은 개인 소유가 아니라 그 씨족, 그 집안 공유입니다. 대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상속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거룩한 전쟁’을 치뤄서 획득한 땅을 전리품 취지에서 주신 겁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거저주신 후견자 정신에 입각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자족해야 합니다. 그 땅의 소산물은 성소에서 매일같이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올려버치는 희생 제물의 덕분입니다. 즉 거룩한 것의 희생 덕분에 그들은 사는 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는 나라 전체가 인간들의 욕망의 화신으로 움직이는 나라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이러한 나라들에 현혹된 겁니다. 하나님의 돌보아주심과 희생에 눈이 간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부유함에 마음이 빼앗긴 겁니다. 인간 왕의 추진력에 모든 백성들의 욕망이 집결되기를 그들은 원했던 겁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방민족과 ‘나라의 부 축적 위주’의 사상과 법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아합왕과 아람왕은 양국의 도시를 선택하여 각각 일종의 경제 특구를 설치하는데 전격적으로 합의한 것도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20:34 “벤하닷이 왕께 아뢰되 내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버지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보내리이다 또 내 아버지께서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이르되 내가 이 조약으로 인해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조약을 맺고 그를 놓았더라”
군주시대의 통치가 지속되면 지배계층의 엘리트는 수혜를 입게 되고 나라는 국내 교역에 만족할 수가 없게 됩니다. 국내에서의 교역은 주로 비정기적인 지역 시장에서 주변의 마음 주님을 중심으로 필요한 물물교환정도의 수준에서 이루어졌고, 도시에게는 정기적인 장날에 실수요자들 간에 진행되는 물물교환은 물론이고 상인의 등장과 아울러 농산물의 매매(호 12:7/ 암 8:5)와 함께 각종 융자 및 임대와 농기구의 수리 등의 종합적인 업무를 수행했습니다.
왕이 추진한 것은 집약농업 정책이었습니다. 초기 이스라엘은 중앙산지에 정착하면서 자급자족하는 농촌 경제를 형성하였습니다. 이 농촌사회는 토지 이용이 자유로웠고 노동의 대가만큼 생산을 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을 유지하였습니다. 토지의 소유권은 부모에게서 그들의 자녀에게로 세습되었으며 토지의 이용률과 이용방식에 있어서는 지중해연안의 혼합농법을 사용하였는데 밭에 보리와 밀을 심는 밭농사와 가파른 토지의 경사면을 이용한 포도, 대추, 올리브 등의 열매재배(신 8:8/미 6:15/암 6:4,6), 잔여노동력을 이용한 소규모 축산을 결합한 농법을 사용함으로서 건조한 기후와 비옥하지 못한 토지, 불규칙적인 지형, 인구구의 많은 부족에 관한 점과 식량의 확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하지만 인구증가와 함께 토지부족, 또 블레셋의 침투가 원인이 되어 이스라엘 초기지파 사회는 왕조사회로 점점 바뀌었습니다. 왕조사회는 왕의 궁전과 중앙성소의 건축 및 기념비적 건축물의 건설과 함께 나라의 관료들이 상주하는 중앙의 도시를 형성시켰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체 인구의 일부와 용역과 또 농산물의 중앙 집중화가 이루어졌다.
그와 동시에 도시와 농촌의 구분과 함께 상류층과 하류층의 사회계층화가 진행됩니다. 더구나 잦은 정벌 전쟁으로 젊은이들이 전쟁에 차출되자, 농촌사회는 심한 일손 부족현상을 맞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유휴노동력인 관계계층의 형성은 이전사회에 없던 조세제도의 시작을 뜻하였습니다.
이는 도시 경제의 유지를 위한 각 마을의 경제가 자급자족하던 생산량을 잉여생산량으로까지 확보해야만 하는 제도적 압력으로 작용하였습니다. 나라의 왕은 또 충성하는 신하들에게 다향의 토지를 보상으로 하나하는 법을 시행함으로써(삼상 8:14, 22:7) 나라의 관료들은 도시에 거주하면서 원거리의 시골에 소유하고 있는 자신의 토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이익분을 챙기는 부재지주의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부족하기 짝이 없는 노동력과 잉여생산의 압력은 농촌의 농민들에게는 반강제적으로 집약농업을 실시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농민은 도시의 외부적인 요구에 부응하여 휴경지를 줄이거나 휴경지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방책을 강구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농촌이 도시의 부(富)에 의해서 착취 대상이 된 것입니다.
이런 모든 여건이 원활할 때는 상관이 별로 없지만 만약 가뭄이나 기근이라도 생기는 해이면 어김없이 농민들은 외적 요구에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은 물론 자신들이 먹고 살 식량마저 확보하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때 굶주린 농민들이 흔히 취하는 자구책이 도시의 부유한자들에게 담보를 잡히고 고리의 채무를 얻는 것이다.
채무변제를 불이행한 농민은 부유한 자들과 권력자들에게 매수된 지방의 법정에서 저당권을 설정받고 그 저당잡힌 재산을 상실하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왕상 21:1-16) 특히 8세기의 경우, 북왕국의 사방으로 넓은 영토를 확장하는데 성공한 여로보암 2세와 남 왕의 웃시야왕은 자배국가로서 국제무역에 활발히 참여 하였습니다. .
그 결과 이 국제무역에의 참여로 자국경제의 기초를 상당부분 흔들리게 되는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그 결과 이 시대의 두 왕실은 생산되는 많은 농산품 중에서 현금가치가 가장 우수한 포도주와 감람유 생산에 열을 올렸고 곡식에서도 보리보다는 단위 생산단가가 높은 밀을 주력 작물로 생산하는데 열을 올렸습니다.
웃시야는 이를 위해 제도적으로 이스라엘의 국토를 삼분하여 각각 밀,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목축생산 지역으로 배분한 전략적 품목들의 특수생산 정책을 실시합니다. “또 광야에 망대를 세우고 물 웅덩이를 많이 파고 고원과 평지에 가축을 많이 길렀으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들을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었더라”(대하 26:10)
중앙에서 시행한 지역특수화의 정책은 극약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혼합영농법의 특징은 농가의 위험부분의 분산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기준인데 특정지역을 특정 농산물만을 재배하게 만들게 하는 왕실 주도의 의무경제에 따라 시행된 이러한 정책은 토지사용에 위기 집중을 초래하고 가중시킵니다. 토양의 질 저하와 생산 저하, 그리고 마을의 자율적으로 형성된 교환경제를 도시 중심의 시장경제로 내모는 결과를 초래함으로써 농민에게 삼중부담과 함께 경제적 악순환의 결과에 일차적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서 권력층와 부유층은 농산물을 다른 곳에 수출하는 한편(겔 27:17) 반대로 군사용 전략무기나 사치품만을 수입하므로(왕상 4:28/5:18) 결국 부의 재분배란 불가능하게 되었다. 초기 지파 중심의 평등주의가 깨어진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어쩌면 오늘날 인간세상의 지극히 자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도 하나님께서 거룩한 전쟁을 그대로 적용시키십니다. 진정한 거룩한 의로움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의 공로로 만들어진 하늘나라입니다. 따라서 성령받은 성도라면 왜 이 세상이 기어이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세상인지를 알고 도리어 즐거워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자신이 이미 집단 범죄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암 2장 6-8절(경제와 언약)200916-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아모스 2장 6-8절까지입니다.
아모스 2:6-8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스라엘의 서너가지 죄로 인하여 내가 그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리니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 모든 단 옆에서 전당 잡은 옷 위에 누우며 저희 신의 전에서 벌금으로 얻은 포도주를 마심이니라.”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께서 유다의 죄 서너 가지를 잡아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유다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 죄 서너 가지를 지목했습니다. 유다의 죄에 대해서는, 율법을 멸시하고 그 율례를 지키지 아니했다고 되어 있는데 율례, 율법을 무시한 이스라엘 내에서 그것을 먼저 선창하듯이 율법을 어긴 죄를 범한 쪽은 남쪽 유다가 아니고 북 이스라엘입니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이스라엘의 죄는 구체적이에요. 유다는 그냥 율법을 멸시하고 율례를 지키지 아니했다 하는데 선행해서 이런 짓을 한 그 예를 이스라엘에게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의 서너 가지 죄를 죽 보니까 대충 봐도 소위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압제하는 그 죄에 대해서 언급하고, 그리고 없는 사람에 대해서 탐을 내고 주로 사치를 범하는 죄에 해당되는 거지요.
특히 6절에 보면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이것은 인간이냐 돈이냐를 놓고 가치를 돈에 우선적으로 놓고 돈을 얻기 위해서 인간의 영혼의 가치마저 돈과 교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지적하는 대로 율례를 어기고 법도를 어긴 그러한 죄의 대체적인 모양새는 ‘돈 밝히는 나라기 때문에 나는 이스라엘에게 벌을 돌이키지 아니하고 내리겠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유다나 북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안 믿었는가? 여호와를 인정했지요. 인정했는데 인간들의 하나님에 대한 관심사와 하나님이 인간을 볼 때 어느 대목을 보느냐의 관심사가 서로 어긋나게 되어 있어요.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뒷조사’라 하는데 하나님의 존재가 어떠니, 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가, 거기에 대해서 백날 연구해봐야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관심 갖는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실상을 감추는 의도가 강렬합니다.
선수 치는 거지요. “제가 하나님에 대해서 이렇게 관심 두니까 하나님께서 내 뒷조사는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사전에 자기방어책으로서 하나님께 되게 관심 있는 것처럼, 하나님중심으로 사는 것처럼 위선을 떠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고, 인간나라는 결국은 망해야 된다, 망하는데 자료수집차원에서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의 죄를 찾아내는 겁니다. 이방민족도 마찬가지고.
어차피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거룩한 전쟁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속된 것을 작살내는 전쟁,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는 거룩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망한다는 그것을 충분하게 보이기 위해서 활동하시는 하나님, 따라서 거룩을 거룩되게 하려면 속됨은 더욱 더 속되게 노출돼야 되겠지요.
그렇게 해서 결과가 뭐냐? 종말이지요. 망하는 거지요. 인간이 망하고 결국은 하나님 앞에 벌 받는 것. 이것을 이상하다고 여기지 말고 이것은 지당한 겁니다. 우리의 갈 길은 그 길밖에 없어요. 누가 거룩한 하나님의 요구조건에 충족할 수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어요.(롬 3:10) 자기 딴에 착해 보여도 결국은 다 죄인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뭘 할 수 있느냐를 하나님 앞에 생각하시 마시고 지금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생각해야 돼요. 아, 하나님께서 쉬지도 않으시고 놀지도 않으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 뭘 하느냐? 네가 망해야 될 자료수집, 뒷조사에 하나님께서는 되게 바빠요. 바로 하나님이 인간을 보는 관심사가 뒷조사입니다. 뒷조사.
이미 결론은 나 있어요. “이래서 너는 망해야 되고 벌 받아야 된다. 너는 거룩에 부합되지 않는 이유를 너는 몰라. 내가 알아.” 인간이 날 때부터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의 본질에 대해서는 주님이 잘 아시지 우리는 몰라요. 우리가 자꾸 잘나 보이지만 그것은 우리의 본질을 우리가 몰라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모스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아모스 선지자의 그 고난과 역경 그리고 비난 받는 것은 밑에서, 인간에서 하나님께 올라가는 관심사와 위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관심사가 아모스의 몸 위에 상호 겹쳐져서 그래요. 사람들은 선지자에 대해서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이유를 몰라요. 그냥 보통 사람으로 살면 될 텐데 왜 유난떨고 그렇게 하느냐, 너는 인간 아니냐, 하는 식으로 비난하겠지요.
6, 7절에 보면 “이는 저희가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부자가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히며”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부자라 하는 것은 부(富)한,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 부자(父子), 아버지와 아들을 말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자하고 관계를 맺는 거예요. 아버지와 아들이 동서지간 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적할 때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알아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왜 하나님 믿는 나라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지적받을 수밖에 없느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되었느냐 하는 것을 알아봐야 되겠지요.
약속의 땅에 들어온 이스라엘이 처음에 들어올 때는 어떤 사회였느냐 하면 소박한 몇몇 지파중심, 혈통중심의 가족끼리 살았어요. 왕이라는 것도 필요치 않고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에서는 하나님이 왕이기 때문에. 그런데 이방인들은 약속의 땅에 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어떤 영웅적인 존재가 왕으로 있어야 되고 세습화해야 돼요. 대대로 왕을 섬기면서 그 왕의 백성 되는 것을 좋아했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 자체가 왕이기 때문에 다른 이방민족과 더불어 최고지도자가 그들에게는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햇빛 주시고 공기주시고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밤에 잘 때도 우리의 자율신경과 교감신경 부교감신경계까지 다 계산해서 소화도 되게 하시고 심장이 뛰게 하시고 다 그렇게 하시잖아요.
잠 잘 때 새벽 세시에 일어나서 “심장아, 잘 있느냐?” 그럴 필요 없다는 말이지요. 하나님께서 잠자게 하시고, 깨게 하시고, 모든 발걸음 머리카락까지 하나님께서 다 세시는 겁니다. 왕이 있는 거예요. 다른 추가적인 왕이 필요 없는 거예요. 우리는 왕의 혜택을 받으면 그것이 왕의 백성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 이스라엘백성은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그런 혜택을 받는 것은 네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나의 언약,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너희들이 마음씨가 착해서가 아니고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이고 완악한 백성이지만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준 맹세를 이루기 위해서 난 너희를 약속의 땅에 살게 했다.”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7장, 8장 9장에 죽 나와 있거든요. 특히 9장 5절에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런데 그들이 약속의 땅에 살면서 지난 시간에 했듯이 율법과 율례를 놓치고 말았어요. 그저 눈에 보이는대로 다른 주변의 나라들이 어떻게 잘사는지 그것을 탐을 낸 겁니다. 그들은 여호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있느냐, 하나님의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 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법이 있느냐 없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고 자기 내부에 있는 그 탐욕이 중요하고 욕망이 중요한 거예요. 어떻게 하면 다른 나라 잘사는 것처럼 우리도 잘 살 수 있는가 거기에 넌지시 마음이 쏠린 겁니다. 사사기에 보면 굉장히 자주 나와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는. 사사기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옛날 광야 때를 잊어버렸다. 배고픈 시절을 잊어버린 거예요. 그들은 애굽에서 노예였던 시절을 잊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후대니까. 홍해를 건너고 요단강을 건너왔던 그 선대는 다 죽어버리고 젊은 사람들은 아, 그 때 그런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전설로 실제로는 모르겠고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지, 이런 식으로 하면서 ‘중요한 것은 옛날이 아니고 지금 우리가 저 나라처럼 더 잘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되어버린 겁니다.
여호와를 잊어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아모스를 통해서 또는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약속을 줬기 때문에 율법을 줬기 때문에 그 율법에 위반되면 필히 망한다, 저주받는다는 것을 통해서 너희들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살아 있고 율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북쪽나라와 남쪽나라, 이스라엘과 유다를 통해서 하나님 자기 자신의 뜻을 펼치시는 거예요. 그런 차원인 겁니다.
그러면 이 북쪽 이스라엘 나라, 또 유다도 마찬가지고 언제 그들은 이렇게 이방나라를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살게 되었는가? 사무엘상 8장에 보게 되면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는 대담한 제안을 합니다. 이제 여호와 말고 다른 식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제안이 사사기 끝나고 사무엘상 8장에 나옵니다. 우리에게도 이방나라처럼 왕이 있어야 되겠습니다, 라고 제안합니다.
5절에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사무엘에게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이들이 왕이 있어야 된다는 것, 그것이 여호와를 버린 것이 되고 여호와 말고 다른데 정신을 두게 되고, 하는 하나님 보시기에 패역한 짓이 되는데 그러면 여호와의 왕 됨을 버린다는 것은 결국은 여호와의 주신 약속 속에 마음이 들지 않는 내용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우린 알아야 돼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무엇이 마음에 안 들어서 “우린 여호와 하고 안 놀래. 차라리 우리끼리 왕 삼아서 그렇게 살래. 그래도 저 이방나라는 잘 먹고 잘살잖아.” 이렇게 그들 마음이 돌아서게 된 것은 어떤 대목에서 그렇게 하나님이 싫게 되었는가?
처음에 하나님이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 하나님께서 기업을 주신다고 했는데 기업이 뭐냐? 땅과 더불어서 그들이 씨족중심의 세계입니다. 씨족중심의 세계. 씨족이라 하는 것은 한 8명에서 50명사이의 작은 규모로 모인 것을 씨족이라 합니다. 5-80명은 씨족이고 그 다음에 80명에서 수백 명 되는 것은 부족이고, 수백 명에서 수천 명 되는 것은 족장사회라 하고, 그 다음에 5만 명 이상 되는 것은 국가라고 편의상 분류를 해요.
왜 하나님께서 씨족중심으로 하게 했느냐? 하나님이 주신 상속, 그걸 기업이라 하는데 하나님은 개인재산을 준 것이 아니고 씨족에게 공동재산을 준 거예요. 땅을 분배하되 지파로 분배하고 지파에서 또 분배할 때 그것이 한 가정에게 준 것이 아니고 한 씨족에게 땅을 분배한 겁니다.
열왕기상 21장에 보면 나봇의 포도원이 나오는데 그 나봇의 포도원이 나봇 개인용이 아니고 나봇의 집안용이에요. 집안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쉬우니까 씨족대신 집안이라 합시다. 나봇에 속한 집안의 공동소유로 땅을 준 거예요.
그런데 처음에 하나님께서 유업으로 주셨다는 그 말은, 하나님이 거룩한 전쟁을 해서 약속이 없는 민족을 일방적으로 거룩하지 않다고 규정하셔서 다 쫓아내시고 오직 하나님의 언약의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그냥 약속의 땅 전체에 들어가 살게 한 거예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살게 한 겁니다. 대충 인구수대로 분배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그들은 공짜로 땅 받은 거지요. 자신의 행함이나 노력 없이, 자신의 의로움 없이 공짜로 땅을 받은 거예요. 제가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그들은 목이 곧은 백성이고 고집이 세지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신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약속의 땅에 들어온 거예요.
그러면 너희들이 그 땅에 사는 하나님의 조건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무상으로 준 것이다.” 그걸 하나님의 상속분 또는 하나님의 기업이라. 기업이라 하면 요새 회사하고 자꾸 구별이 잘 안되니까 상속분 또는 유산, 하나님이 주신 유산이라는 말입니다.
유산이라는 말은 누가 죽고 죽은 자의 소유가 자식들에게 분배되는 것이 유산이잖아요. 거룩한 어린양의 희생제물이 죽고 그 죽음의 공로에 의해서 분배되는 거예요. 그래서 약속의 땅의 중앙 성소에는 항상 제사장들이 매일같이 거룩한 죽음의 반복으로 이루어져야 그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르고 생산물을 낸다고, 레위기나 신명기 28장에도 약속이 계속해서 살아 있도록 너희들은 그 증인역할 해야 된다는 조건을 주신 거예요.
그런데 그들이 약속의 땅을 다 차지했지만 그들은 어디에 모여 살았는가? 씨족단위니까 노동력이 풍부하지 않아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중앙산지, 산맥까지는 아니지만 중앙의 좀 높은 지대에 살았어요. 이스라엘 지형이 평평한 것이 아니고 중간에 등뼈가 튀어나온 것처럼 튀어나왔다고요.
툭 튀어나온 그 서늘한 동네에 베들레헴도 있고, 예루살렘도 있고, 기브아도 있고요. 유명한 도시들이 늑골 같은 곳, 중앙산지라 하는데 다 그 위에 있다고요. 벧엘도 그 위에 있고. 지리적으로 위쪽으로는 갈릴리 호수가 있고 남쪽으로는 사해바다입니다.
지금은 도로가 다 나 있습니다. 서안지구라 해서 팔레스타인 지구가 있는데 겁도 없이 저는 거길 통과했지요. 돌아가야 되는데 돌아가기 싫어서 그냥 가자, 해서 그 중앙산지도로를 죽 따라서 남쪽 예루살렘까지 내려왔습니다. 그 중앙산지는 농토가 그다지 넓지를 않아요.
넓지 않다는 말은 씨족에게 각자 할당된 하나님이 분배한 그 작은 땅뙈기를 스스로의 작은 노동력이지만 그 노동력으로 자급자족이 가능하도록, 하나님께서 그러한 형편에 살도록 맞춰서 그 땅을 준 거예요. 그 땅에는 처음에는 보리를 심어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보리중심 농사를 지었습니다. 보리 필 때를 유월절이라 하고, 몇 개월 후에 맥추절이 있어요. 그것은 밀 거두는 겁니다. 보리 심고 그 다음에 밀 심고, 그 다음에 여러 가지 과일, 포도나 올리브도 심고. 올리브는 지중해 쪽으로 내려가는 비탈에는 건조한 땅들이 있기 때문에 올리브를 심고요.
그렇게 농사를 지어서 자급자족이 되도록 했어요. 왕이 필요 없지요. 자급자족이 되고 그 자급자족의 모든 공로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늘 농사지을 때마다 느끼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 왕이 등장하니까 왕은 자기전쟁을 시작하게 되고요. 전쟁하게 되면 필요한 부하들이 있어야 돼요.
그 부하들에게 주는 ‘봉토(封土)’라는 것이 있어요. 전쟁을 해서 땅을 빼앗아서 수고했다고 봉급용으로 기사계급에게 주는 땅을 봉토라 하거든요. 왕은 전쟁을 일으키는 오야붕이라 할 수 있고 전쟁에서 이기게 되면 전쟁지휘관들에게 대대로 집안이 이 땅에서 먹고 살라고 땅을 분배해준다는 말이지요.
사무엘상 8장에 보면 천부장과 백부장에게 땅을 하사한다는 말이지요. 그렇게 되니까 하나님이 각자각자 땅을 분배해서 살게 한 그 씨족체제에 국가체제가 침범하게 되어버려요. 나봇의 포도원은 하나님이 기업으로 주신 것인데 아합왕이 하는 말이 “내놔라. 돈 잘 쳐줄게.” “안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겁니다.” “저놈 죽여라.” 죽여 버렸잖아요. “어딜 왕의 명령을 거역해.” 나봇을 죽여 버리고 포도원을 빼앗아버립니다.
이게 바로 율례와 규례에 담겨 있는 내용을 완전히 모독하는 거예요. 왕제도가 되니까. 왕이 있는 다른 나라들이 어떻게 사는가 보니 너무너무 잘 살거든요. 너무 잘 사는 이유가 농사 지어서 잘 사는 것이 아니고 무역을 해서 잘 산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역이 되려면 뭐해야 되느냐? 나라가 농업국가로 하지 말고 상업국가로 전환될 필요가 있는 거예요.
상업국가 되려면 다른 나라에 필요한 것을 이쪽에서 특화작물로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리나 밀, 그저 소박하게 감람나무죠, 올리브나 심고 남아 있는 터에 목초지라도 있으면 말이나 소나 양이나 이것 키워서 씨족공동소유의 집안끼리라도 잘 사는 겁니다. 더 이상 클 필요가 없거든요. 왜? 하나님의 유업의 경계선을 넘어가면 안 되니까 그런 거예요.
만약에 자기 씨족가운데서 어떤 남자가 전쟁에 나가서 죽었다든지 어떤 병에 걸려 죽었으면 졸지에 그 집안에 고아와 과부가 발생되잖아요. 고아나 과부가 발생되면 어떻게 했느냐? 자체적으로 씨족 내에서 해결하면 돼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아버지가 자식이 없을 때는 형수가 시동생과 결혼해서 자체적으로 아들을 낳아서, 아들이 노동력을 제공해서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사는 식으로 오순도순 사는 것, 각자각자 하나님이 주신 땅이 있기에 남의 땅을 넘보지 않는 자세, 그러니까 왕이 필요치 않지요.
왕은 그냥 깡패 두목이고 오야붕이고 그 밑 부하들은 양아치지요. 왕이 자꾸 전쟁을 하려 하니까 기존의 유업으로 있는 땅까지 침범을 해서 왕이 다 땅 내놔, 해서 자기 군대 지휘관 대대장과 중대장들에게 줘버리는 거예요. 줘버리니까 부하들은 전쟁하는 사람들이기 어디에 사느냐? 농촌에 안 살아요. 농촌에서 할 일도 없어요. 전쟁준비하고 훈련해야 되니까 도시로 모이는 거예요.
도시로 모이고, 도시에 있는 그들은 그냥 농사나 짓고 자급자족하는 것이 아니고 더 큰 부를 축적하려고 합니다. 왕이 하는 일이 부를 축적하는 일인 거예요. 그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 다른 나라와의 무역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다른 나라에 ‘너희 나라는 우리가 어떤 것을 수출했으면 좋겠어?’ 해서 돈 되는 막대한 이윤을 남기는 작물을 재배하기 위해서 기존의 농토를 쓸어버리고 거기에 특수작물을 특화재배하는 거예요. 수출용작물재배에 들어가는 겁니다.
더구나 열왕기상 20장 34절에 보면 아람왕과 북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서로 조약을 맺었는데 각자의 나라에 경제특구를 설치하는 겁니다. “벤하닷이 왕께 고하되 내 부친이 당신의 부친에게서 빼앗은 모든 성읍을 내가 돌려 보내리이다 또 나의 부친이 사마리아에서 만든 것 같이 당신도 다메섹에서 당신을 위하여 거리를 만드소서 아합이 가로되 내가 이 약조로 당신을 놓으리라 하고 이에 더불어 약조하고 저를 놓았더라.”
쉽게 말해서 개성공단 만든 거예요. “값싼 노동력과 원료, 서로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식으로 무역하자.” 그런 식으로 나왔어요. 거리 이름을 상대방나라의 거리로 만들어요. 테헤란로, 이런 식으로. 이것은 이스라엘 아니지요. 이방나라지요. 하나님이 유업으로 주신 그 흔적을 완전히 깡그리 다 없애버린 거예요. 밟아버렸어요.
그게 무슨 하나님이 왕인 나라입니까? 하나님이 왕인 나라가 아니에요. 하나님의 약속이, 말씀이 왕이 되는 나라가 아니에요. 인간의 돈에 대한 욕구에 환장한 사람들이 왕이에요. 경제특구가 되니까 이방민족과 사상이 동일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무역을 하려면 교역을 하려면 서로 상호적용이 가능한 법제정이 되어야 돼요.
무역법이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무역법이 있어야 돼요. 도량형법, 부피나 무게나 측량할 때도 서로 동일한 측량의 제도가 있어야 되겠지요. 관세나 보조금 그런 것, 벌금이나 각종 부과금, 이런 것을 위해서는 이스라엘 왕이 자기 나라의 경제개발에 나서야 됩니다. 경제개발에 나서는 그 모든 개발의 사전정보 계획표가 누구 손으로 넘어가느냐 하면, 중앙에 있는 엘리트들, 수뇌부에게 먼저 정보가 다 집결됩니다.
대구 지묘동에 공기업 들어선다는 계획이 서게 되면 이 지역의 땅을 누가 사겠어요? 빨리 그 정보를 획득한 그 지역의 국회의원부터 공무원들이 자기 삼촌이나 조카의 명의를 가지고 땅 다 사놓고 땅값이 백배로 오르는 것. 치킨 팔고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땅값은 얼마 안가서 수억 수십억이 오르니까.
남편들이 그렇게 정보를 얻어서 떼돈 벌면 사모님들 정경부인들이죠, 그녀들은 무슨 일을 하는지 이사야 5장 8절에 나옵니다. “가옥에 가옥을 연하며 전토에 전토를 더하여 빈 틈이 없도록 하고 이 땅 가운데서 홀로 거하려 하는 그들은 화 있을찐저.”
그리고 이사야 3장 17-23절에 “그러므로 주께서 시온의 딸들의 정수리에 딱지가 생기게 하시며 여호와께서 그들의 하체로 드러나게 하시리라 주께서 그 날에 그들의 장식한 발목 고리와 머리의 망사와 반달 장식과 귀 고리와 팔목 고리와 면박과 화관과 발목 사슬과 띠와 향합과 호신부와 지환과 코 고리와 예복과 겉옷과 목도리와 손주머니와 손 거울과 세마포 옷과 머리 수건과 너울을 제하시리니.”
무슨 똥, 똥 하는 것들 있잖아요. 뤼비똥, 이런 프랑스나 이태리의 명품들, 이게 다 수입품이에요. 그리고 국가의 수입품은 뭐냐? 애굽의 말과 활입니다. 수입하려면 외화를 획득해야 되고 외화를 어디서 획득하는가? 무역을 통해서 얻고, 무역을 하기 위해서 전국토를 수출드라이브정책으로 바뀌는 거예요. 그걸 누가 하는가? 도시에 있는, 중앙에 있는 왕이 하는 거예요.
웃시아 왕은 남쪽 유다왕중에서 제일 영토가 넓었던 때 왕이고 북쪽에서는 여로보암 2세때 가장 영토가 넓었어요. 잘나갔던 거예요. 영토가 굉장히 큰 거죠. 왕이 되었으면 자존심이 있어서 자기가 왕이니까 백성들에게 보여줄 만한 괄목할만한 성과를 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장기집권 되거든요. 안 그러면 쿠데타 일으켜서 정권이 뒤집어지니까. 역시 왕 덕분에 잘 먹고 잘산다는 혜택이 백성들에게 골고루 주어져야 되잖아요.
그래서 역대하 26장 10절에 보면 “또 거친 땅에 망대를 세우고 물웅덩이를 많이 팠으니 평야와 평지에 육축을 많이 기름이며 또 여러 산과 좋은 밭에 농부와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를 두었으니 농사를 좋아함이더라.”
원래 포도농사는 산비탈에서만 하면 되었어요. 보리농사가 주입니다. 그런데 돈 안 되는 보리보다 밀과 포도와 감람유 이런 데 치중을 한 거예요. 이스라엘이 처음 약속의 땅에 들어왔을 때는 대추라든지 소규모로 자기네 집안끼리 밥먹고 살면 되는 소박한 농사로 족했어요.
중요한 것은 제사장들이 죽음을 반복하는, 희생제물을 드림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의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면 그게 바로 약속의 나라고 천국입니다.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10)
그 정도면 되는데 주변에 탐이 날만한 이방민족들이 설쳐대니까 자기 욕망에 동하니까 그것을 못 따라가서 환장한 겁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나 살겠느냐, 따라붙자, 우리도 저들만큼 살 수 있다, 우리도 그만한 역량이 있다, 우리 이스라엘 스스로 우리를 무시하면 안 돼, 저들처럼 살 수 있어, 라고 이런 쪽으로 하나님 버리고 수직 버리고 수평으로 나간 겁니다. 세상 쪽으로 나간 겁니다.
도량형 법 만들 때 그 법 만드는 모든 취지가 어디서 나왔느냐?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거예요. 부강한 나라를 창출하는 거예요.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전쟁에 이겨야 되고, 전쟁에 이기려면 무기를 만들어야 되고, 무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땅 주인들은 도시에 있어요.
하나의 지주계급들이 도시에 있어 가지고 자기들 무기 사고, 사모님들 장식품 사는데 모자라니까 무역을 하는데 계속 외국에 투자를 해놨으니까 누굴 압박하느냐 하면, 소박하게 사는 하루 벌어먹는 사람들 압박해서 세금을 올려버리는 거예요.
옛날에는 땅이 공장이었잖아요. 수출 공장이었잖아요. 그러면 생산물의 가치가 높아지게 되면 지대가 덩달아 높아져요. 땅값이 높아지면 그걸 임대해준 농부들에게도 세를 많이 받게 되는 거예요. 여러분, 장사 잘될 때 집주인이 가만있습니까? 가게 세 더 내라 하잖아요. 그것과 똑같은 겁니다.
그러면 수출을 위한 법은 국가의 부를 창출하기 때문에 모든 법제정에 가담하는 사람들은 국가의 부 창출에 기여한 바가 있는 사람들만 법제정에 가담하게 돼요. 그러면 그 법 제정에 누가 가담 못하느냐 하면, 가난한 사람들, 땅 뺏긴 사람들, 자기 땅 뺏긴 사람들은 법 제정에 가담을 못하게 돼요.
이 말은 뭐냐? 오늘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이 말이에요. 하나님의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법은 가진 자 위주의, 왕 위주의 법으로 이게 전부 전환되었다는 겁니다. 오직 하나님만 왕으로 바라보고 사는, 요새 말로 주만 바라보고 사는 그 사람들의 법은 완전히 개무시 당하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국가발전, 경제발전, 그 발전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정당한, 국가경제발전에 도움 되는 쪽으로 법이 새롭게 제정되는 거예요.
그걸 선지자들은 이 불법한 자들아, 라고 하는 거예요 여기 나오는 “은을 받고 의인을 팔며 신 한 켤레를 받고 궁핍한 자를 팔며 가난한 자의 머리에 있는 티끌을 탐내며 겸손한 자의 길을 굽게 하며……” 그들이 돈만 탐내는 것이 아니고 국가 부를 창출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보다 세상영화를 쫓아가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율법안의 진짜 내용은 뭐냐? 바로 후견자제도에요. 어려운 사람을 대신 나서서 희생해준 정신,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무상으로 제공하는 것이 이스라엘에 살아남아야 될 하나님의 율법정신이에요. 왜? 그들은 애굽에 있을 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였으니까.
하나님께서 무상으로 희생했기 때문에 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왔잖아요. 광야에서 그들은 거지꼴이었잖아요. 거지지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온 것은 뭐냐 하면, 주님이 친히 그들의 후견인이 된 거예요. 배후에서 도와주는 착한 분이 된 거예요. 주님께서 착한 사마리아인이 된 거예요. 바로 그 정신을 잃어버린 거예요.
지금 누가 돈 많으냐, 누가 힘세냐의 경쟁마당이 된 겁니다. 남쪽도 마찬가지고 북쪽도 마찬가지고. 이방나라도 마찬가지고 똑같이 되었어요. 그러니까 법 만들 때 “국가의 부 창출에 보탬이 안 되면 입 다물고 가만있어. 법은 우리가 만드는 거야. 법은 가진 자들인 국회의원이 만드는 거야. 없는 자들은 입 다물고 있어.” 그 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어떤 조그만 조직체라도 회비 안내거든 발언권 없다, 그 말입니다. 유-튜브에 “좋아요, 안 해주려거든 들어오지도 말라.” 이 말이에요. 여러분,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인간세계에도 희생물에 의해서 살아가는 그런 세계가 있었습니까, 라고 의아해 할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몸이 자연스럽게 동의되는 세계가 돈 나고 인간 난 세계거든요. 돈이 우선되는 세계에요. 법은 돈을 가진 자를 위해서 만든 게 법이에요. 없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법은 생색내기지 그건 제대로 된 법이 아니에요. 권력이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돼야 권력이 있느냐 하면, 있는 법도 넘어설 때 그걸 권력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군 휴가법이 있어도 휴가법 때려치울 수 있을 때 야, 진짜 살아 있는 권력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추씨 집안 아니라면 욕하겠지만 같은 추씨 집안이라면 “쉿, 입 다물어라. 자칫하면 우리한테 돌아올 혜택도 날아간다.” 그러니까 그 당시 가진 아줌마들, 강남의 많은 부한 아줌마들이 남편이 번 돈을 가지고 가옥에 가옥 전토에 전토 부동산 투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호세아 13장 11절에 이런 말씀 있잖아요. “내가 분노하므로 네게 왕을 주고 진노하므로 폐하였노라” “너희들이 왕 달라 할 때부터 알아봤어. 끝났어. 너희들이 결국 왜 망하는지 그 내력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너희에게 왕을 허락해줬다.”
왕의 특징은 눈에 보인다는 거예요. 그리고 맘에 안 들면 갈아치울 수 있는 가능성, 우리 손에 내 손에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러나 한 번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갈아치울 수가 없어요. 꼭 하나님을 갈아치워야 되겠습니까? 갈아치우면 내가 신이게요? 하나님 뜻은 뭐냐? 내가 주는 대로 먹으라, 그 말이지요. “내가 살려주는 대로만 살아라. 백 살 구십 살 살려고 하지 말고. 늙어? 그냥 죽어.”
우리교회는 심방이 거의 없어요. 심방 해봤자 결론 이미 났어. “그냥 죽으세요. 죄인인데 왜 살려 하십니까?” 그러니 누가 심방 오라 하겠어요. 구약을 주신 것은 이스라엘 망하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그 많은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이야기에요.
아, 이 세상에서 그냥 인간답게 사는 것이 지옥 가는 사람답게 사는 거구나. 남들처럼 사는 것이 넓은 길 멸망의 길로 가는 것 맞구나. 남들처럼 사는 그것이 지옥으로 죽 빠져 들어가는 거예요. 나이아가라 폭포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전쟁에서 젊은이를 차출해서 죽고 난 뒤에 노동력이 부족하니까, 경작할 사람이 없으니까 서울에 있는 지주한테 농지를 팔아버려요. 그러니까 농사짓는 사람이 땅 주인이 아니고, 씨족의 공동소유가 아니고 도시에 있는 부자들이 땅 소유자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디로 가느냐? 도시로 가요. 그러면 도시는 잉여농산물, 세금을 때리니까 남아도는 그 농산물도 도시로 모이고, 남아도는 노동자들도 도시로 모이고. 농촌에 있어야 될 사람들이 도시에 와서 남아도는 노동시장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대구비산동, 새벽 5시 되면 담배피우고 있으면서 봉고차 오기를 기다리거든요. 군데군데 노동시장이지요. 농촌출신, 촌놈이지요, 농촌출신이기에 교육을 못 받아서 단가 높은 기술이 부족한 거예요. 그러니까 쉬운 직업만 찾다보니 공급은 많은데 수요는 작아요.
그래서 자기들끼리 경쟁하다 보니 여기서 치안문제가 생겨요. 사소한 것 가지고 분노조절장애니 해서 성질나면 무조건 술 먹고 담배피우고 차가지고 박아버리고 그러니까 그야말로 치안이 험해지니 법 가진 사람은 국가경제발전에 지장된다고 강력한 법을 제정할 수밖에 없어요.
가진 자는 다 빠져버리고 돈 없는 사람만 맨 벌금내고 있고 그런 식이지요. 이것이 악순환이에요.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이 세상을 성경에서 이렇게 보여주는 겁니다. 나라 바꾸라는 말이 아니에요. 이웃 사랑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웃사랑은 생색내기이고 이 땅은 결국은 이래서 망해야 되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완성, 십자가지요 주님의 모든 언약의 완성된 십자가 용서하심이 기다리는 새 하늘과 새 땅,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따라서 이 땅, 지옥 같은 세상에서 우리는 신나게 구경들 하시면 되는 자들이 성령 받은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이 세상 형편에서 나의 살아가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정당성도 부여하지 말게 하옵소서. 뭘 해도 죄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우리 자신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육신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그런 인생일 수밖에 없음을 자인합니다. 그럼에도 십자가 알게 해주시고 성령 주셔서, 우리의 나라가 이곳이 아니고 다른 곳에 있음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