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빌립보서

빌립보서 4:4-7 / 항상 기뻐하라(예수님의 흔적)

정인순 2020. 9. 13.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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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4-7   항상 기뻐하라

 

이근호


사도 바울은 외부인이 보면 ‘주님’께 지독스럽게 집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사도 바울의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이 지금 살아계셔서 일하시는 것에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의 모든 일은 상대적으로 무가치하게 간주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하는 일을 자신이 무가치하게 본다면 이는 인간들의 타고난 본심에 대치되는 일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 만나서 대화할 때, 서로가 서로를 위하여 해낸 일들을 내어놓고서 서로의 가치를 견주는 것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사도 바울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한 일을 내어놓는데 사도는 주님이 지금 벌리고 있는 일을 내어놓게 되면 대화에 공통성을 형성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사도는 주님 일에 집착할까요? 그것은 ‘영원한 기쁨’은 인간이 하는 일에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3:2에 보면, 모세와 하나님과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이 본문에서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의 영원성을 말합니다. 소진되지 않는 불입니다.

모세라는 인간 앞에 나타난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영원성’을 갖고 나타나셨습니다. 사도 바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시적 기쁨이 아니라 영원한 기쁨을 빌립보 성도들에게 제시합니다.

그 소모되지 않는 기쁨이 나오는 재료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겁니다.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인간세계에 대해서 제대로 영원한 세계가 접근해오는 것을 보고 항상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그냥 놀러 삼아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사그리 없애기 오는 것입니다. 심판하러 오십니다. 따라서 그동안 주님만 쳐다보는 사람에게만 심판을 통과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자신들의 모든 과거의 무게에 이끌려 지옥불에 빠집니다. 즉 지옥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반기라는 겁니다.

이처럼 기분 좋은 대박소식이 또 없습니다.


예수님의 흔적

2020년 9월 20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4-7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4: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이 세상에 사는 사람은 그 누구도 ‘항상’ 기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근원적인 공포가 찾아들기 때문입니다. 이유도 모르고 원인도 모르는 공포심이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열심히 성경 공부도 하고 기도도 하면서 지식으로 혹은 지성적으로 자기 감정을 다독거려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다 실패입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지식을 내놓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가 되는지 여부에 달렸습니다. 일시적 기쁨이나 슬픔이나 실은 같은 마음에서 나왔기에 같은 종류입니다. ‘주 안’에 있는 사람이 나타내는 기쁨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그 기쁨입니다. 누가복음 15:24에 보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었는 자를 다시 살리시고 잃은 자를 다시 얻게 하시는 바로 그 작업 자체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5:10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이 작업을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해두신 방법은 예수님의 피를 이 세상에 내어놓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생소고기 요리하면서 핏물을 제거할 때는 차가운 물에 설탕 4스푼 정도 타서 10분 정도 놔두면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고기에 배여있는 핏물이 물 속에 녹아지면서 물은 핏빛을 띠게 됩니다. 예수님의 피 속에는 택한 백성이 죄가 배여나옵니다. 죄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자아를 형성하면서 맺은 모든 연줄을 타고 돌아다닙니다.

즉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아는 사이’를 형성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인간들이라면 그 누구도 동지가 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도 영원한 타인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 세상 전체가 보기에 영원한 타인입니다. 여러분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아세요?

친근한 이웃 이미지로 하나님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막상 등장한 예수님은 모든 인간에 대해서 철저한 타인의 모습을 띠고 나타났습니다. 이사야 52:14-15에 보면, “이왕에는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 후에는 그가 열방을 놀랠 것이며 열왕은 그를 인하여 입을 봉하리니 이는 그들이 아직 전파되지 않은 것을 볼 것이요 아직 듣지 못한 것을 깨달을 것임이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막상 나타난 메시야를 보고 놀라버리는 겁니다. 그들이 받아들일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사야 53:2-3에 보면,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들로부터 배척당하는 모습으로 오신 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인간 세계에서 놓여 있는 그 저주의 간격을 그대로 몸을 칭칭감고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이 그렇게 두려워하고 기피되는 그 공포, 그 한가운데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느 누가 감히 자신이 망가지는 것을 겁내지 않고 예수님에 달려들어 합류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예수님에게 우리는 타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끼리 놀고자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 나라 사이의 저주의 골을 건너서 오셨습니다. 그 저주의 공포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기생 라합은,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를 박살내려 오는 민족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얼굴 돌리지 않고 그대로 이스라엘의 일부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망하게 되는 그 최후의 모습을 마치 남의 일이라고 여기고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면으로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십자가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의 핏물과 합세한 그 색깔입니다. 우리 끼리 친하게 지낸다고 하면 예수님은 영원히 우리에게 타인이 되어버립니다.

차라리 우리 자신이 우리에게 타인이어야 합니다. 그동안 나를 형성시킨 숱한 연줄들이 실은 진정한 공포를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인간의 지식과 말들은 모두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도피행각에 불과합니다. 이사야 6:5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이라는 타인이 보기에 망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미련갖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은 곧 그 어떤 인간으로부터 도움받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전에는 예수님이 타인이었지만 주님으로부터 ‘기쁨의 대상’이 되고 난 뒤부터는 세상이 우리들에게 타인이 된 것입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이미 ‘주 안’에 있는 자들은 세상에 멀어지는 경험을 갖게 되고 반대로 주님과 가까워지는 경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즉 세상과 멀어지고 세상으로부터 타인 취급받게 되는 경우들을 두고서 도리어 그것이 기쁨이 된다는 말입니다. 출애굽기 3:2에 보면, 이스라엘의 원형이 나옵니다. 그것은 ‘떨기나무’입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출 3:2)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지만 떨기나무는 그대로 서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 업무에 실패했고 예수님께서는 이 원리를 인수받아 성취하셨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기꺼이 불 속에 들어갔고 나니엘은 기꺼이 사자굴에 들어갔습니다. 사도들은 죽을 줄 알면서도 감옥에 갇혔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거기서 부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이라는 낯선 식구를 맞이했지만 그 이삭은 아버지의 죽여야 될 식구였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적군이 가져다주는 공포 속으로 들어가야 삽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기쁨이나 즐거움은 하나님의 저주를 통과할 수 없는 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공포 속에 마주하는 주님에 합류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기적적인 구원을 찬미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1강-빌 4장 4-7절(예수님의 흔적)2009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4-7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4-7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 사도바울이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냥 기뻐하라, 하면 무리하게 느껴지지 않는데 항상 기뻐하라, 어떤 경우라도 상관없이 항상 기뻐하라, 이 말씀을 하시는 것은 이미 너는 성령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는 자로 달라졌다는 겁니다.

항상 기뻐해야 되는데 만약에 성령이 오지 않고, 성도가 아니라면 항상 기뻐하는 것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그냥 기뻐할 때도 있고 슬퍼할 때도 있고, 그렇게 되는데 항상 기뻐하지는 않아요. 항상 기뻐하게 된 그 성도가 그렇게 된 환경이 5절에 소개 되어 있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주께서 가깝다는 말은 전에 살던 그 동네에서 네가 이미 딴 사람이 되어서 멀어졌다. 네가 그렇게 너에게 가깝게 여겨졌던 그 세계가 이제는 뒤돌아볼 필요 없을 정도로 너무 멀리 있고, 그리고 주께서는 가까이 있고. 그렇게 되게 되면 성도는 주님에 의해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동할 때 ‘주 안에서’라고 했으니까 ‘주 안’이라 하는 것은 지난시간에 이야기했듯이 하나의 경계를 넘은 거예요. 이 세상 말고 달리 주 안에 있을 때는 경계를 넘어섰고 경계를 넘어선 사람한테는 세상 사람들이 가끔 기뻐하는 그런 기쁨에 대해서 점점 더 그 소리가 아득히 멀어지는 거예요. “저걸 왜 기뻐하지, 참 별난 사람들, 하고 주님이 더욱더 가까워지는 현상을 보일 것이다.” 사도는 지금 그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주께 가깝게 오면 올수록 너는 항상 모든 일이 항상 기뻐하게 되지? 그지?” 라고 우리에게 묻는 거예요. 그래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사도의 이야기가, 사도가 이렇게 규정하고 있는 모든 요건이 무리수를 두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람이 과연 있겠어?’ 할 정도로 ‘주 안’에 있는 사람의 요건이 너무 허황되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다음에 6절에 보면 이것도 역시 무리한 요건처럼 보이지요.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이 말은 우리한테 사도바울이 같은 동질의식을 가지고 묻습니다. “주안에 있으니까 아무것도 염려될 것이 없지? 그지?”라고 묻고 있는 거예요. 우리한테 확인시켜 주는 겁니다. “나는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는데 나만 그렇지 않을 거야. 너도 그럴 걸? 너도 아무것도 염려할 것이 없지? 그지?”라고 묻는 거예요.

어디에서? ‘주 안’에 있는 사람한테,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사람에게는 이런 기이한 현상들이 일어난다는 겁니다. 7절에 보게 되면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께서 너의 모든 운명과 미래에 대해서 책임자로 지키고 있다는 점이 또한 너로 하여금 항상 기뻐하게 만들지? 그지?”라고 우리에게 묻는 겁니다. “나 사도바울은 이런 것을 느끼고 있는데 너도 같이 느끼고 있지?”라고 묻는 겁니다.

이 모든 말씀을 남의 이야기, 참 희한한 사람도 다 있다, 이렇게 할 것이 아니라 이것이 실감나려면 ‘주 안’이라는 공간이 어떤 공간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됩니다. 가끔 기뻐한다는 것은 이것은 ‘주 안’하고 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주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의 특징은 가끔 기쁘다는 거예요. 그걸 어떤 이는 ‘우야다 기쁘다’ 이렇게 해서 다른 지방 사람들에게는 ‘방금 내가 뭘 들었지?’ 이렇게 돼요.

우야다 기쁘다. ‘우야다’가 일본의 제과회사 이름인가, 우야다가 무슨 뜻이냐, 심지어 부산사람들도 몰라요. ‘어쩌다가’ 그런 뜻이라는 말이지요. 우야다 기쁜 것은 우야다 슬픈 것의 일종이에요. 기쁘다 슬프다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내 마음이 늘 휘딱거리면서 살아가는 그 동네에 있는 겁니다. 그런데 항상 기뻐하다, 하는 이런 요구조건에 대해서는 도저히 들어줄 수 있는 재주가 없어요.

그러면 이 주 밖에서 ‘주 안’으로 들어오려면 ‘주 안’ 이 주님이 무슨 일을 했기에 우리는 항상 기쁘냐, 여기에 대해서 쉬운 예를 들면 됩니다. 생소고기를 사서 핏물 뺄 때 차가운 얼음물에 설탕 네 스푼 넣고 십 분정도 담그면 된답니다. 여자분들 다 아는 이야기를 저는 처음 알아서 이야기하니 우습습니다만, 설탕 네 스푼 넣은 얼음물 찬물에 두게 되면 핏물이 빠진 대요.

그러면 예수님의 십자가 피는 뭐냐? 우리 자신의 자아라는 것을 빼기 위한 핏물입니다. 아침부터 이런 더러운 소리하기 참 곤란합니다만, 오랫동안 목욕 안하다가 따뜻한 욕조에 담가 있으면 땟물이……, 참 죄송합니다만 땟물이 둥둥 뜨잖아요. 그게 십자가 핏물이에요.

우리 속에 있는 모든 땟물과 더러운 속된 것, 소고기 같으면 설탕 넣은 찬물에 집어넣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피 안에서 그것이 다 빠져나오는 겁니다. 핏물이니까 벌겋게 빠져나오는 거예요. 그 피를 자랑한다는 것은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겁니다. 내가 이미 그리스도안에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성경에 굉장히 많이 나오는데 이게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인지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세계에 오시기 전에 하나님과 함께 있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타인입니다. 남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 인간세계에 왔을 때 사람들이, 제자들이 아는 체 하니까 주님의 모든 말씀은 이거예요. “네가 나를 알아? 네가 언제 봤다고 날 알아? 네가 나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어? 너는 나에게 타인이었어. 나는 너에게 타인이고 너는 나에게 타인인데 언제 봤다고 나를 알아? 언제 봤다고?”

주님의 취지는 이거예요. 네가 나를 못 알아보는 이유,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셨다는 말은 사람들이 못 알아봐서 죽인 것이고 그래서 돌아가신 거예요. 네가 나를 못 알아보는 것은 네가 그동안 너답게 된 그 엮인 연줄이라는 것이 있어요. 이세상은 서로 아는 사이로 교차되어 있습니다.

그 안다는 관계, 몰랐던 사이도 서로 알게 되면 너는 너무 차가운 타인이 아니고 서로 공통부분이 있어서 아는 사이가 되었다는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인간들에 있어서 나라는 것은 나를 알아주는 많은 연줄에 둘러싸여서 나는 누구를 알고 누군 아직 모르고 있고 그렇게 이해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런 연줄 가운데서 벌어지는 사건이 뭐냐 하면 우야다 기쁘고, 우야다 슬프고, 항상 기쁨이라는 것이 없어요. 내가 기대한 바가 잘되면 나는 기쁘고 못되면 슬프고, 기쁘고 슬프고, 기쁘다 슬프다, 하는 이것은 내감정이거든요. 그래서 교회 온 교인들이 슬프고 기쁘고 이 감정조절을 어떻게 다스려 보겠다고 기껏 하는 일이 뭐냐 하면, 성경지식을 공부합니다. 신학을 공부해요.

지식으로서 자기감정을 컨트롤 해보겠다는데 감정은 나와 더 가까워요. 지식보다 나와 더 가까워요. 대학교수 정도면 많이 알고 또 박사쯤 되면 부부싸움 안하겠지, 이렇게 생각하는데 감정은 감정이고 자기전공분야는 전공분야고, 아는 것은 아는 것이고 감정은 감정이에요.

감정은 그동안 타인과 교류하면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 타인들의 입맛에 맞추면서 발달된 것이 감정입니다. 그러니까 감정은 자기 자신보다 더 우선적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네가 예수님에 대해서 공부하라, 십자가에 대해서 연구하라, 그게 거듭난 사람의 표시다,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까?

아니에요. 항상 기뻐하라고 했어요. 우리의 지식으로 컨트롤 안 되는데 항상 기뻐하라는 거예요. 어떤 경우에도 기뻐하라는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6절에 보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것이 거듭난 사람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의 특징이다, 라고 사도바울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소개하고 너도 그런 사람이냐고 묻고 있습니다.

나는 항상 기뻐하는데 너도 항상 기뻐하느냐, 나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데 너도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는 사람이냐고 묻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너의 자아가 예수님의 피안에서 핏물로 다 빠졌느냐, 너 자아라는 의식이 다 빠져나갔느냐, 를 묻고 있는 거예요. 빠져나가면서 네가 이 세상에서 연결된 모든 연줄도 같이 더러운 가치로서 더러운 모습으로서 빠져나갔느냐를 묻고 있습니다.

“네가 이 세상 사람과 그동안 아는 사이였잖아. 하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타인이었잖아. 이제는 네가 예수님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이제 네가 안다는 모든 사람은 남들이 너를 타인으로 여길 것이다.” “‘사람이 어째 저렇게 변했어? 나 저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는데 갈수록 점점 모르겠어.’ 실례지만 누구세요, 누구십니까?”

같은 말이에요. “누가 당신을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누구세요? 누구 십니까?” “저는 ‘주 안’에 있는데요.” “주안에 사신다고요? 나는 인천에 사는데요. 부평에 사는데 같은 동네, 그 옆 동네 아닌가요? 왜 슬퍼할 때 당신은 슬퍼하지 않고 우리가 까르르, 기뻐할 때 왜 기뻐하지 않습니까?” 물으면 “나는 항상 기쁩니다.”

“미쳤나?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항상 기쁘고 어떻게 사람이 되어서 염려가 없을 수가 있습니까? 평소에 당신하고 나하고 서로 아는 사이고 가까운 사이였잖아요.” 라고 할 때 ‘주 안’에 있는 사람은 말합니다. “당신은 나를 모르지. 나는 당신과 타인이고 당신은 나와 타인이야. 서로 모르는 사이야. 왜? 서로 사는 공간이 영역이 이제는 달라졌다.”는 겁니다.

다른 공간에 살고 있는 거예요. 함부로 나에 대해 안다고 이야기하지 마세요. 당신은 기쁨과 슬픔이 교차되는 그 감정을 추스른다고 일평생을 지금 지식으로 버티는데 여러분, 지식이라 하는 것은 다가오는 알 수 없는 공포를 피하는 도피행각입니다.

타인이 와도 내가 아는 사람이 오게 되면 무섭지 않아요. 그런데 생판 내가 생각지도 못한 어떤 타인이 성큼 나에게 다가와 버리면 그 때부터는 근원적인 공포에 휘둘리고 휩싸이게 됩니다. 사람이 슬프고, 기쁘다, 하는 것은 슬픈 원인, 기쁜 원인을 자꾸 발굴 하려고 하는데, 찾아서 어떻게 해소하려고 하는데 슬픔과 기쁨은 우리 감정으로 해소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그 자체가 근원적인 절대적인 공포에 놀아나는 모습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공포라 하는 것은 이 세상 어딜 찾아봐도 발견되지 않는 그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분, 내가 얼추 사람에 대해서 안다고 자부하고 자신만만했는데 그 부류에 절대로 속하지 않는 어떤 그분, 그분이 쑥 들어왔을 때 우리는, 나는 그분에게, 나는 다른 딴 동네에 살고 있는 그분에게 영원히 타인이었구나, 나는 그분과 모르는 사이정도가 아니라 남남이었구나, 십자가로 경계선을 쳐서 나는 그분과 전혀 상관없는 존재로서 살아왔었구나, 를 깨닫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과 전혀 모르는 사이기 때문에 십자가사건이 일어났거든요. 그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피를 흘렸고 그 피가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면 그 피안에 우리를 담아버려요. 담아버리면 우리는 드디어 핏물이 빠지는 작업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동안 내가 나를 관리하던 우리가 스스로 내가 나를 관리하지 않고, 뜨끈한 욕조에 그냥 내가 열심히 때를 미는 것이 아니에요. 성화하자, 깨끗하게 살자, 그것이 아니고 그냥 뜨뜻한 욕조에 벌거벗은 몸으로 그냥 담그기만 해도 여기서 땟물이 죽 빠지면서 욕조의 투명한 색깔이 핏빛으로 변하는 겁니다.

핏속에 우리가 있다. 돼지족발, 하나의 살점 고기로서 핏물이 죽 빠지면서 저 피는 왜 저렇게 벌거냐, 주께서 남남인 너를 우리 아는 사람 되기 위해서 내가 같이 흘린 그 핏물이에요. 내가 스스로 목욕탕 가면 때나 밀지 내 죄는 빠지지 않아요. 주님의 그 생명은 특별한 용액입니다. 그 피안에 담그면 거기서 죄라는 죄는 죄다 쑥쑥 빠져나오지요.

이러한 예수님의 피가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는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경험이기 때문에 무서운 공포가 되어서 우리는 그 피, 나의 자아까지 뽑아내고 내가 살아온 환경까지 다 죄로 규정하고 뽑아내는 그러한 다가옴을 자꾸 외면하고 싶고 피하고 싶은 거예요. 도망치고 싶어요.

그런데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은 성령으로 딱 집어서 강제로 피와 더불어 죄가 깔끔하게 빠지도록 그렇게 해버리는 겁니다. 이러한 무서운 공포, 알 수 없는 공포, 설명할 수 없는 공포가 우리 인생을 참 힘들게 하는데 그것은 아직도 이 세상 자체가 구약의 시대와 연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광야에서 이스라엘 사람들 혼쭐났지요. 애굽에서는 농사짓고 먹을 것 먹고 입을 것 입고 마실 것 마시면서 사는 것이 사는 것이다, 이렇게 여겼는데 광야를 지나면서 40년 동안 그들에게는 물도 없고 양식도 없고 농사지을 자기 솜씨를 발휘할 수 있는 어떤 환경도 없고, 그들은 거기에서 공포를 느꼈습니다.

공포를 느낄 때 자동적으로 그들은 발악을 하면서원망을 했고 그들의 분노는 누구한테 쏠리느냐 하면, 모세한테 쏠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공포는 뭐냐? 인간의 공포는 생존의 위협을 받을 때 공포를 느낀다. 이게 구약적환경입니다. 여전히 구약적환경은 이 세상까지 계속 꽂히고 있어요. 못먹고 못살고 외로운 사람은 못 견딘다. 발악을 해서 그 모든 자기의 한풀이는 하나님에게 쏟아 붓게 되어 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하면 먹을 것 마실 것 넉넉하고 누가 칭찬을 하게 되면 갑자기 우리는 기쁨이 생긴다. 그래서 이 기쁨과 슬픔이라 하는 것은 인간의 몸이 있는 한 이미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저는 세자로 이야기합니다. 안락함. 인간에게는 편안함, 안락함, 안락하면 행복이고 불편하면 불행이에요. 안락하면 기쁨이고 불편하게 되면 짜증나고 슬픔이고 공격성향으로 바뀝니다. 안락함이에요. 이 몸의 안락함입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5절, 이스라엘이 생기기전에 이스라엘의 원초적인, 이스라엘은 이래야 이스라엘이라는 이스라엘의 본질을 출애굽기 3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2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대요. 떨기나무가 여러분의 몸이라면, 여러분의 몸에 불이 붙었으면 어떻게 됩니까? 이게 편안합니까, 불편합니까? 불편한 정도가 아니지요. 뜨거워서 펄쩍 뛰겠지요. 나무에 불을 붙이면 그 나무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이 떨기나무, 불붙은 떨기나무가 원형이에요. 이스라엘은 이러해야 된다는 겁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세계에서 가장 극단의 고통스러움 속에서 인간아 나와 너와 만나자, 인간의 가장 공포스럽고 고통스러운 그 가운데서 너와 내가 만나자, 그래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이라는 그 말이에요. 그 공포 속에서. 공포를 피해서 도망치지 말고 내빼지 말라는 겁니다.

이번에 제주여행하면서 방주교회를 봤어요. 방주교회가 일본사람이 설계했다고 하는데 방주교회라고 치면 모양새가 나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모양새로 있어요. 설계한 건축가가 방주의 사태를 그대로 묘사한 모양으로 설계한 거예요. 물위에 떠 있는 모양으로 만들고 카메라로 찍을 때 앵글을 낮추면 물만 있고 그 위에 방주교회가 떠 있는 모습으로 찍힙니다.

거기를 가봤어요. 방주교회 들어가려면 카메라로 보는 입장에서는 물속을 통과해야 방주교회로 갈 수 있는데 실제로 보면 물의 수위하고 놓인 섬돌의 수위하고 같아서 잘 안 보이는데 그 섬돌을 밟고 방주교회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영원한 궁극적인 타인이란 말이 뭐냐 하면, 인간과 인간사이에 궁극적인 타인은 없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은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서로 대화하고 말을 하면 서로 다 아는 사이가 되고 얼마간 지나면 다 친구사이가 되고 그렇다는 겁니다.

영원한 타인은 인간세계에는 없습니다. 정이 안 들어서, 그렇지 말을 안 해봐서 그렇지, 너무 가까이 안 지내봐서 그렇지 멀리 있는 사람이라도 펜팔 하고 자주 만나보세요. 김 정은 하고 만나보세요. 다 친구 되어서 식사하자고 나오지요. 영원한 원수는 인간에게는 없어요. 잘해주면 다 좋은 사람 돼요. 남들이 욕해도 잘해주게 되면.

영원한 타인은 인간세계는 없고 인간세계 밖에 있어요. 그 인간세계 밖에 계신 분이 옴으로 말미암아 인간세계는 뭘 놓치고 있느냐 하면, 바깥에 인간에게 영원한 타인이 보기에 그들은 지금 무시무시한 저주와 공포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지금 그들끼리 단합해서 잘 살고 있는 거예요.

따라서 인간세계와 하나님사이의 골, 그 갭, 거기에 있는 무시무시한 하나님의 저주의 심판의 불, 그것을 인간은 건너가지를 못하는 겁니다. 그 안에 인간은 둘러쳐져 있어요. 노아사건이 그 사건 아닙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가족은 어디에 포위되어 있다? 깊은 물위에 포위되어 있어요.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그 물을 건너서 방주 안에 못 들어갑니다.

들어올 수가 없어요. 방주가 떴을 때는 이미 버스는 떠났어요. 아무도 그 세계에 갈 수가 없습니다. 그 방주가 뭐냐 언약이죠. 주님께서는 그 언약, 인간세계와 하나님세계 사이에 있는 그 심판, 저주, 공포, 그걸 주님의 몸에다 둘러치고 주님께서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거예요.

이사야 52장 2절 “이왕에는(이제 와서 보니) 그 얼굴이 타인보다 상하였고 그 모양이 인생보다 상하였으므로 무리가 그를 보고 놀랐거니와.” 무리가 놀란다는 거예요. 메시아가 왔는데 형편없이 망가진 모습으로 오신 거예요. 이것은 우리가 인간끼리 아는 세계에서는 생각도 못한 메시아 구원자입니다. 구원자가 전혀 구원자 안 같아요. 매가리가 없어요. 구원할 수 있는 어떤 힘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누구보다 더, 더, 철저하게 망가진 모습.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저주를 둘둘 감아서 나타났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우리보고 이런 이야기 합니다. “인간들아, 너희가 하나님의 저주를 알기는 알아? 이게 저주야. 이게 저주라고.”

이사야 53장 2, 3절을 여러분이 알다시피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타인으로 와서 타인으로 추방될 대상이라는 겁니다. 누가? 예수님이.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묻는 거예요. “네가 나를 알아? 네가 지금 나를 알고 믿는 거야? 뭐 친근한 이웃? 아이고, 친근한 이웃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것은 잘못 된 이미지야.” 잘못된 하나님이미지, 메시야, 이미지라고요.

미국 치킨 집 할아버지 또는 금복주 할아버지, 그런 사람 말입니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요? 실제로 객관적으로 나타난 주님을 보세요. 그 당시 유대인들, 그 당시 사람들이 우리보다 바보라서 그분을 못 알아 봤습니까? 공부를 못해서 못 알아봤습니까? 그들은 누구보다도 하나님에 대해서 집중했던 사람들이에요.

그렇게 집중하고 지식으로 연구했던 사람들이 직관적으로 알았어요. ‘저분은 우리 동네 사람 아니다.’ 어떤 인간도 이 동네에서 자력으로 저쪽으로 건너갈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아무도 예수 믿을 사람 없습니다. 그것 분명히 해야 돼요. 영원한 타인이에요. 예수님은 남인데 뭘 알고, 어떻게 그분을 아는 사이라고 함부로 할 수가 있습니까? 모르는 사이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이 빈말이 아니에요. 오신 메시아를 보면 그래요. 어떻게 사람이 살아도 저주를 둘둘 감고 삽니까? 가끔은 기뻐해야 되고, 가끔은 슬퍼해야 되고, 그렇게 살아야 그게 사람사는 것이지 어떻게 온 평생이 저주를 둘러쳐서 살아갑니까? 누가 그 인생을 부러워하겠어요? 선뜻 그 인생을 선택하겠습니까?

주님은 우리 사이에 간격을 갖고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이사야 6장 5절에 보면 이사야가 하는 말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아, 내가 그동안 믿고 연구하고 ‘하나님 저 믿는 것 맞지요? 하나님, 저 아는 것 맞지요?’ 이렇게 스스로 자기를 설득시켜 왔는데 막상 하나님을 볼 때는 하나님은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었어요.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낯설어도 너무 낯설어요. 문제는 뭐냐? 주님의 공포에 내가 뛰어 들어가지 못하고 내가 주춤거리고 거기에 합류할 생각이 없다는 그 이유가 뭐냐?

원인은 내가 나의 연줄, 나의 관계들, 그동안 나를 나 되게 한 관계들, 나 자신, 이것을 내가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예수님께서 피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은 네가 너를 포기하는 법을 배워라, 그 말입니다. “이 예수도 나를 포기했잖아.” 아버지의 저주 앞에서, 심판 앞에서 포기했다고요.

포기하게 되면 주께서 준비한 것이 있어요. 항상 기뻐해요. 항상 기뻐한다고요. 오늘 본문 4장 4절에 ‘주 안에서’라는 말이 나오지요. 그 다음에 5절에 보면, 주께서 가깝다고 되어 있어요. 이 말을 보는 모든 인간들이 갖고 있는 자기를 위한 신앙관에서는 이게 모순되는 거예요. “목사님, 분명히 이야기해주세요. 우리가 ‘주 안’에 있습니까, ‘주 안’에 있지 않고 가까운 겁니까? 가까운 겁니까, ‘주 안’입니까? 둘 중에 하나만 이야기하세요. 헷갈리게 하지 말고.”

이런 생각 들지 않겠습니까? 세례요한이 왔을 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깝다, 고 했어요. “가까운 거예요, 이미 온 거예요? 분명히 하세요.” 우리는 그것을 분명히 하고 싶은 거예요. “이미 천국이 왔습니까, 아니면 지금 가까이 온 거예요?”라고 “둘 중 한 개만 선택해야 우리가 납득이 됩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제가 제주도에서 대구로 오는 길에 본의 아니게 누구의 문자를 본적이 있어요. 문자를 보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제주의 성도님이 문자를 보낸 거예요. 답장을 하면서 “예, 비행기 안입니다. 곧 대구에 도착합니다.” 비행기 안입니다. 주님과 함께 버스 탔습니다. 그런데 뭐냐 하면, 곧 대구에 도착합니다.

비행기 안인데 아직 이 비행기는 제주도상공에 있어요. 대구상공은 아니에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주안에 있는 사람이 곧 도착합니다. 천국에.” 따라서 대구에 집이 있는 사람은 대구가 가깝고 가까운 것에 대해서 항상 기뻐함이 소실되지 않습니다. 항상 기뻐합니다. 그런데 제주도에 집이 있는 사람은 대구 가까이 가면 갈수록 점점 더 내 집하고 멀어지네, 이렇게 되겠지요.

‘어, 걱정 되네. 내 인생 어떻게 살지? 예수 믿고 난 뒤에 생활비는 어디서 구하지? 예수 믿고 난 뒤에 이 땅에서 나보고 가난하다고 하면 우세스러워서 어떻게 살지? 예수 믿고 난 뒤에 목회하는데 교인 다 가고 한 명도 없으면 나 어떡해? 예수 믿는데 애가 아프면 어떻게 해? 내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해? 내가 암 4기 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것이 뭘 깎아먹느냐 하면, 항상 기뻐한다는 그것을 다 깎아먹는 거예요. 내 몸이 아프고, 애가 공부도 못하고, 수입이 없고, 내 몸은 점점 늙어가고, 하는 그것이 항상 기뻐하는 재료가 된다는 겁니다. “멀어졌잖아. 그게. 옛날에는 심각했지? 지금은 그게 빠이빠이 할……” ‘아, 옛날에는 내가 그랬지.’

지금은 그런 내가 주님의 피 안에서 핏물이 다 녹아 빠져버린 거예요. 예수의 피에 섞여버린 자아, 그 자아를 대구에 가까이 가면서, 제주도가 나쁜 동네라는 뜻이 아닙니다, 대구에 가까이 오면서 ‘내가 참 아찔했지. 저게 전부인줄 알았지. 저기서 내가 착각하기를, 하나님은 내 편이다, 이렇게 예수 믿습니다, 이런 헛소리를 했지. 개코도 주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억지를 부리면서, 오늘부터 우리 아는 1일 합시다, 이런 식으로 데이트 하면 되는지 알고. 그 공포도 처리 못하면서.’

내게 매일같이 다가오는 공포도 처리 못하면서 예수를 알아요? 예수님은 공포의 주 원인인 내가 쏙 빠진 입장에서, 내가 없는 상태에서 결합될 수 있는 게 공포의 세계에 합류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다니엘의 세 친구에요. 사자 굴에 갔던 다니엘. 굶어서 으르렁 거리는 사자 굴에 다니엘이 들어갔고 불속에 다니엘 세 친구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감옥행 그리고 죽기를 기다린다고 통보했지만 사도바울은 내가 이렇게 매여서 교도소 간다할지라도 내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주의 뜻이야, 항상 기뻐함이 소실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도라 하는 것은 쉽게 말해서 예수님의 튀김옷이거든요. 알맹이는 보이지 않지만 튀김옷을 입은 거예요.

제주도에서 요한계시록 강의하면서 성도는 예수님의 아토피 현상이라고 했어요. 자꾸 피로 용서받은 현상이 아토피처럼 인생 표면에 자꾸 돋아나요. 이미 노을이 져서 해가 저문 서쪽 하늘에 마지막 빛을 머금고 있는 층층이 구름의 모습, 참 아름다워요. 강정마을에서 그걸 봤습니다. 제주서쪽의 노을을 보러 갔어요. 그렇게 젊은 사람들이 많아요.

성도라 하는 것은 내 자아를 따로 찾지 마시고 허공을 감싸는 하나의 도배지라 보면 됩니다. 축구공처럼. 축구공안에 바람만 들었지만 껍질이 있잖아요. 우리가 떨기나무처럼 불붙었다 할지라도 우리의 본질은 주님이에요. 십자가에 내가 죽었으니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이 말은 “제발 좀 빠져줘. 맨 날 걱정만 하고 염려만 하는, 공포가 무서워서 돌아가는, 겁만 집어먹는 인생 자체에서, 나 자신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는 너는 좀 빠져라. 그 너의 자리를 비워 놔라. 주님의 주되심으로 채워 넣기 위해서는 거기에 네가 들어가지 말라.” 하는 말이지요. 그 빈자리, 그것을 가지고 성경에서는 너희들은 나의 기쁨이다, 그 말입니다.

나의 기쁨이다. 기쁨이라는 그 말은, 누가복음 15장 10장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우리가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기쁨이 돼요. 그 기쁨이 되는, 이제는 아는 사이가 된 주님의 안목에 우리가 같이 동참하기 때문에 아 내가 어떤 짓을 해도 이게 기쁨이 되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우리는 항상 기뻐할 수밖에 없지요.

‘내가 어떤 짓을 해도 항상 기쁨이 되는구나.’ 이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지만, 이게 기쁨이 되는구나, 그것을 느끼는 거지요. 누가복음 2장에 들판에 목자들이 있을 때 천사들이 나타났지요. 천사가 하는 이야기가 14절에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러면 그 기쁨은 우리가 기뻐하자, 기뻐하자,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러면 그 기쁨은 어떻게 성사되느냐? 누가복음 15장 23절에 보면, 아버지가 탕자가 돌아왔다고 파티를 여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주 안’이라는 것은 예수님 안, 주님께서 우리에게 피를 제공해서 그 피에 우리를 합류시켜서 그동안 우리가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살면서 덕지덕지 찌든 때 같은 것들을 피 안에 다 받아내는 거예요. 그래야 다 용서가 되니까, 피로 말미암아 속죄가 되니까, 네가 갖고 있지 말고 다 뽑아내게 하는 거예요.

뽑아내버리면 우리는 죽지요. 죽은 자를 피로 말미암아 다시 살려내는 작업을 피와 더불어, 피 안에서, 피 라는 욕조 안에서 이루어지는 거예요. ‘안’이라는 말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안’이 없어요. 전부 다 나만 생각해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바깥에 둘러쳐버리는 겁니다. 훌라후프처럼 둘러치는 거예요. 방주교회처럼 사방에 물로 가득 채워버리는 겁니다.

너는 자력으로 갈 수 없었고, 네가 나가려해도 나가기를 허락하지 않는 경계선 안에다 우리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 안에서의 하나님의 작업은 우리가 경계선 바깥에서 알던 그 하나님이 아니에요. 죽었다가 살려내는 겁니다. 죽었다가 살려내기 때문에 죽었다가 살려낸 그 과정을 계속해서 주 안에서 되풀이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봅시다. 다시 보면서 구약을 다시 생각해 봅시다. 빌립보서 4장 6절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이것도 우리 입장에서는 앞뒤가 충돌되는 모순되는 이야기처럼 들려지는 겁니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려면 진짜 아무것도 고민거리가 안 일어나야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아무것도 염려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가 공포가 무서워서 도망치던 옛사람의 품성이에요. 이미 주님에 의해서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나 자신을 핏물 빼듯 빼놓았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들락날락 할 수 있는 그러한 자유성이 보장되는 거예요.

따라서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전 같으면 얼마든지 염려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들고, 그럴만한 일들이 계속 쉬지 않고 우리에게 불어대는 겁니다. 염려할 만한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러한 일들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기도와 간구라 하는데, 이 기도와 간구가 ‘주여, 살려주세요. 어려워서 힘듭니다. 이래서는 지옥 가겠습니다.’라고 해버리면 그것은 기도와 간구가 아니에요.

그것은 옛날에 주 밖에서 했던 그 행세와 똑같이 하는 행세거든요. 그러면 뭐냐? 감사함으로, 감사함으로, 다시 말해서 이런 사태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구원받았음을, 죄용서 받았음을 또다시 확인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를 확인차원에서 너는 기도하라, 어떤 사태가 일어난다면. 인생이 자꾸 파도가 밀어치고 하는 거예요.

구약에서 마지막 공포라 하는 것은 생존에 관한 거예요. 그러나 신약에서의 공포라 하는 것은 하나님하고 우리가 따로 논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남남이라는 데서 오는 공포.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주는 공포도 보통 은혜 아니에요. 우리가 언제 누구한테 기죽고 삽니까? 기죽어도 기죽지 않는다고 버티고 있지요. 아무도 기 안 죽어요.

그런데 사실은 우리는 매순간 행동하는 모든 순간이 부들부들 떨면서 행동하는 거예요. 이것은 타인, 지목된 특정인 때문에가 아니고 내가 연줄, 어떤 아는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해서가 아니라, 알 수 없는 그 공포가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할 때 그 때는 기도와 간구의 찬스가 온 거예요. 찬스가 온 겁니다. 주님, 이럴 때 어떻게 해야 됩니까, 벌벌 떠는 거예요.

이스라엘 역사를 보시면서 성경을 자주 접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상당히 이해하기 힘든 사건이 이스라엘 역사가 끝나면서 길게 나열되어 있어요. 그게 뭐냐? 선지자들의 주장인데 “바벨론에 잡혀가라. 그게 사는 길이다.” 그 이야기에요.

이스라엘 망할 때 “잘 망했습니다. 훌륭하게 망했습니다. 예,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 맞습니다, 하고 깨끗하게 포기하고 네가 그렇게 미워했던 그 대제국 바벨론, 하나님도 믿지 않고 여호와도 모르고 마르둑 신을 믿는 그 나라에 아무소리 하지 말고 네가 잡혀가라. 그게 하나님의 뜻이고 네가 사는 길이다.”

그게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아모스 줄줄이 잔소리 하는 거예요. “같이 망해라. 망하는 모습을 네가 경험해야 네가 신자야. 안 망하려고 버티지 말고 망할 때는 망하는 찬스인줄 알고 망하는 그 공포 속으로, 네가 지저분하게 망해버린 네 모습을 피하지 말고, 외면하지 말고 그게 네 진 모습인 것을 받아들이라.”는 말이지요.

“아, 저게 나다! 저게, 망하는 저게 내 모습이야. 반갑다 친구야!” 하고 네가 너하고 악수하라 그 말이지요. 그동안 그것을 숨긴다고 얼마나 가식질을 했습니까? 자기를 날조했습니까? 교회 와서 신자인척 하고. 기도할 때 기도 잘하는 척 하고, 헌금할 때는 기마이 잘 쓰는 사람처럼 하고, 전도할 때는 전도라고 하면 하늘나라 상급이 많은 줄로 알고, 얼마나 착각들을 했습니까?

“네 모습은 아직 멀었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모습이 네 모습이야. 무섭지? 그래서 네가 복음듣기 싫어했지? 이제는 그러지 마.” 정면으로 마주치세요. 내가 망하는 마지막 모습. 다른 사람 같으면 자살하지만 우리는 자살도 용납 안 됩니다. “자살하지 말고 기도하라.”

주께서 네 모습, 자살 직전의 모습이 진짜 네 모습인 것을 고맙게 여길 줄 알아야 돼요. 자살이 고마우면, 자살이 기쁘면 그것은 항상 기쁜 거예요. 망함이 기쁜데 더 이상 안 망할 것이 뭐가 있어요? 그 속에서 우리는 아무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돼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요. 아무도 날 도와주는 사람 없습니다.

누가 말하거든 이렇게 하세요. “누구세요? 누구세요?” “김 집사 아닙니까.” “김 집사가 누구세요?” 20년 동안 같이 다녀놓고 누구세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교인들 안 그래도 냉정한데 더 냉정하게 됐다.

지난시간에 제가 차이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시간은 흔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가발 벗어놓고 퇴근한 그 흔적, 그 가발, 실종된 아이가 남긴 그 곰 인형,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은 흔적밖에 없습니다. 공연이 끝난 뒤에 남은 티켓 영수증 같은 것, 거치대만 남아 있는 상패 없는 거치대.

그러나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이 비어 있는 거치대위에 상패가 나타날 것이라는 거지요. 세상은 보이는 것이 전부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린다면 우리는 이미 주님과 남남이 아니고 아는 사이입니다. 아는 사이에요.

요한계시록 3장 1920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주님께서 떨기나무처럼 하나님과 내가 같이 있어도 불붙었는데 타지는 않는 그러한 것, 그 이스라엘, 그 이스라엘의 원리는 누가 마무리 짓는가? 예수님이 마무리 지은 거예요. 망가지고, 온통 망가지고 마지막에는 저주받아 죽었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 모습이 진솔한 진짜 찐찐, 그 모습이에요.

이 땅에서 아무도 그분을 모르고 배척했던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최후의 마지막 모습이 그 모습입니다. 부활해서 멋있게 보일 때, 제자들이 만지려고 했을 때 “만지지 마라. 네가 아직 멀었다. 너는 아직 경계선 안 넘어섰어. 나 만지지 마라. 멋있는 내 모습 만지지 마라. 너부터 포기해라. 너부터 이미 죽은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처음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을 때 자기 식구는 아브라함, 사라, 이스마엘, 그 세 식구밖에 없었어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 식구를 주신다는 거예요. 창세기 18장에 보면 세 명의 천사가 와서 아기를 준다, 하니 부인 사라가 임신이 안 되거든요. 태가 죽은 자인데, 죽은 자인데 새 식구가 온다고 하니 같잖아서 웃었습니다. 그 이름이 이삭이에요. 웃었다고.

18장 11-12절 “그가 가라사대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정녕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아브라함과 사라가 나이 많아 늙었고 사라의 경수는 끊어졌는지라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처음에는 이랬지만 나중에는 진짜 좋아서 웃었거든요. 그 좋았다는 그 새 식구를 창세기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죽여 버립니다. 공포분위기를 만들어버리지요. 다정한 좋은 식구 하나 줬다 했는데 그 식구가 집안의 위기를 조성합니다. 그분과 주께서 주시는 타인이 우리 안에 들어왔을 때 이제는 우리가 나를 타인으로 여겨야 돼요. 내가 나에 대해서 잊어버리고 포기해야 됩니다.

그렇게 했던 사람 여러분이 잘 알다시피 여호수아 2장 9절에 기생라합입니다. 라합과 그 땅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굉장히 무섭게 여겼어요.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백성이 다 너희 앞에 간담이 녹나니”

그런데 기생 라합은 그 무서운 이스라엘, 공포의 이스라엘의 그 일부를 자기 집에 영접했습니다. 그래서 기생 라합은 구원된 거예요. 이 나를 박살내러 오신 분을 내가 영접하고 “내가 박살나야 마땅합니다. 왜? 나는 당신들 안목에서 볼 때, 하나님 보시기에 저는 그런 인간인 것을 이때껏 몰랐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 사는 이 세상을 박살낸다면 그것은 주님의 합당한 일인 것으로 인정해서, 그걸 받아들여서 “맞습니다. 박살내야 됩니다. 내가 망해야 됩니다.” 하고 영접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는 가끔 우야다, 어쩌다 기쁘고 어쩌다 슬픈 것이 아니고 나의 존재 자체가 항상 기뻐할 수 없는 일들만 우리에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안돼요. 우리의 본성 때문에. 짜증내고 울고 난리도 아니에요. 이럴 수 있습니까, 하다가 다시 기도와 간구를 하는 가운데서 아, 내가 이 세상과 타인이라는 인식을 다시 한 번 새롭게 가지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신자도 아니면서 지식 좀 안다고, 십자가 공부했다고 신자로 으스대다가 인생사태의 불길한 일 들이닥치니 모든 분노를 다 쏟아내는 우리의 모습이 마땅히 망해야 될 모습인 것을 다시 십자가 피에서 핏물 뽑아내면서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여, 우리 자신보지 말고 우리 죄가 모여 있는 그 십자가 피에 감사하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