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춘천 여름 특강 요약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2020 춘천 여름 특강 요약]
요약:정인순
2020 춘천 여름 특강 / 세계관(베드로후서 3장) / 이근호 목사
베드로후서 3장 8절에 나오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라는 말씀은 인간의 세계관에서 헤아리거나 일치시킬 수 없는 개념이다. 공간과 시간이 인물과 사랑하는 자들과 결합해서 사랑이 생기는 주님의 세계관에서 되찾은 시간이다.
신은 인간에게 있어서 추상적 관념의 대상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신을 만들어 놓고 경배하면서 오히려 인간은 인간다움의 최고의 자리에 앉아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자리에 오시는 것이다. 인간이 된 것이다.
인간으로 오심으로서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한 몸에 전체가 들어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으로부터 배척 받고 죽임을 당할 때 그만한 죽음이 이 우주 전체에 확산 되는 효과를 가져 오는 것이다. 코끼리 치약이 온 풀장을 다 덮는 효과처럼 부분에 전체를 꾸역꾸역 다 집어넣은 것이다.
인간은 다 같은 인간이라고, 그래서 다 같은 죽음이라고 생각했지만 뒤집어지는, Inversion이 일어난 것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것이다. 그 주님의 세계관에서 시간이 나오는데, 천년이 하루 같이 하루가 천 년 같이, 이 세상의 개념으로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죽었다가 살아난 세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4절에 주의 강림하심의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 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라고 되어있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공간이 먼저 등장하는데 공간은 심판이 확정되었고 멸망과 소멸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시간이 지연됨에 따라 시간이 주가 되고 갑이 되고 공간은 을이 되고 종속 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 따라 흘러가듯이 인생을 살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공간의 심판은 없고 멸망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공간이 시간에 종속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12절에 체질이 모든 물질이 불에 녹아진다고 한다. 불 심판은 인간의 시간 개념에 구애받지 않는다.
물이든 불이든 한 번 심판으로 끝내버리지 않고 왜 물 심판 이후에 시간을 지연시키고 불로 심판하신다는 것인가? 물로 심판하신 이후에 시간을 지연시킴으로서, 인간은 시간으로 공간을 재해석한다. 심판이 확정되었음에도 공간이 아니라 시간에 매달려서, 살아있음을 근거로 한 인간의 죽어 마땅함과 멸망되어 마땅함이 더욱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물 심판은 부분이기 때문에 꾸역꾸역의 전체를 보여주지 못 했다. 불로서 심판할 때 비로소 심판의 전체를 보여주게 된다.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게 되어 작지만 전체를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공간에 속하지 않고 공간 바깥에서 공간을 보고 시간 속의 나가 아니라 시간 밖에서 초월적인 존재로서 자신이 사는 쪽으로 시간과 공간을 해석한다. 인간이 아니라 신 수준이다. 인간이 신을 만들어놓고 경배한다는 것은 트릭이고 속임수이다. 주객이 뒤집어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물을 등장시키는데 성경 전체에서 가장 큰 기적은 시간과 공간이 합쳐서 하나의 인물화 되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데 새 인물이 등장하게 되며 인물은 예수님이며 더 발전시키면 성도다. 부분인 성도에게서 전체가 나오는 것이다.
공간과 시간이 한 인물에게로 수렴되고 모든 걸 말씀으로 함축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이미 공간과 시간을 극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는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지구가 불바다가 된다고 할지라도 사랑이 이기는 것이다.
준비 없는 이별이라는 노래에 ‘하루만 오늘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게 줘’ 라는 가사처럼, 한 남자에게 많은 시간들 날들이 있었지만 떠나가는 여자에게 ‘내 곁에 머물러 행복했던 시간들이 고맙다고 다시 또 살게 되어도 당신을 만나겠다고 그 말해야 할 텐데’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것이다. 나한테 종속되어 있는 나만의 시간이었던 내 중심의 세계관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순간부터 시간 해석과 공간 해석, 그리고 내 세계관이 바뀌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관은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고 싶다는 전제를 반드시 깔고 있다. 내 중심의 세계관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인간은 시간 중심이기 때문에 주님 언제 오십니까, 라고 질문하게 되는데 이건 질문 자체가 잘못 된 것이다. 자기를 위해 자기가 자기 구원을 위해 대비하기 위한 질문이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 전 세계의 모든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로 끝난 것이다. 나라는 것조차도 죽은 존재로서 떨어져 나가야 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관념적으로 신을 만들어놓고 경배하지만, 하나님은 실제로 말씀이 육신으로 한 인물이 되어, 공간과 시간을 통해서 죽으시고 부활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자연이 한 인물에 꾸역꾸역 다 집어넣어져서 부분인 물 심판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불로서 심판할 때 심판의 전체 양상을 보여주게 된다.
살고자 하는 인간에게 이 세상에서 복음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1절에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라고 한 말씀은 이렇게 바꾸어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코로나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이미 코로나로 죽은 우리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본디오 빌라도를 비롯해 예수님의 제자들과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이 세상 세계관의 한계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시기 전에 배에서 풍랑을 만나게 된다. 제자들의 세계관으로는 배안에 13명이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세계관에서는 제자들 하나 하나는 더해질 수 없는 제로다. 아무리 많아도 0이다. 죽은 자들이다.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자신들이 풍랑으로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다. 예수님은 풍랑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먼저 제자들을 꾸짖는다.
제자들은 각자 1로 생각하지만 심판의 대상으로 확정된 공간에서는 다 죽은 자들이다. 물 심판 때에 노아의 식구 8명이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그들도 역시 심판 속에 있었던 것이다. 다 죽은 것이고 그들은 다만 그들의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물 심판이 있었고 그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알려줄 증인으로서 살아나야 했던 것이다. 심판의 대상인 공간 안에서 모든 것은 헤아릴 자격이나 권한도 없으며 헤아림의 대상이 되지 못 한다.
그러한 형편에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의 개념을 일치 시킬 능력이 없다. 인간이 사용하는 단어 의미 개념을 사용했다 할지라도 그걸 해석하는 세계관이 다른 것이다. 자신을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1로 헤아리는 세계관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일치시키려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시는 것과의 격차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율법은 바로 그러한 인간의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서 의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이 바로 저주 아래 있는 것임을 드러내게 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외에 다른 의를 따로 자기 이름으로 만드는 바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복음은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주지 않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외에 그 어떤 것도 심판 받을 공간 안에서 의로 만들어질 것은 없다고 단정 짓는 것이다. 시간이 아무리 흐른다 해도 공간은 여전히 심판의 대상으로 확정되어 있는 것이다.
해 뜨고 해 지고 처음과 다를 바 없는 것처럼 공간을 해석하도록, 시간은 우리를 속였던 것이다. 심판으로 확정된 공간에 예속되었는데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길어지는 시간은, 기롱하는 자들이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고 하게 한다.
주님께서는 인물을 통해서 시간을 다시 끄집어내신다. 다 이루신 분, 완성된 분에게서 시간을 주었기 때문에 그 시간은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하는 것이다. 공간은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멸망을 위해 보존되고 있는 것이고, 봐줄게 하고 지연된 시간에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겠다고 하지만 그건 율법을 지키다가 지옥 가는 것이다. 이미 지옥 간 것을 율법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자기 세계관에서 율법을 지켜보지만 주님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준비 없는 이별에서 떠나는 여자에게 하루만 하루만 준비할 수 있도록, 이라고 하는 것은 그전에는 자기 혼자의 시간이었고 자기 자신에게 종속된 시간이었는데 떠나는 여자와의 관계 속에서 내게 없었던 새로운 시간관이 발생 되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 주님의 세계관에 합류된 시간은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이다. 없기 때문에 저주 받고 심판 받는 것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요소가, 하늘의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불 심판은 확정된 것인데, 공간과 시간이 한 인물화 되어서 율법을 다 이루시고 사랑이 생산된다. 그 분이 사랑을 줄 때 나는 사랑의 결과물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 대치되는 개념이다. 율법을 지켜서 불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없을 때 사랑은 먼저 생겼다. 사랑이 오게 되면 자기가 함몰 된다.
준비 없는 이별의 마지막 가사에 ‘차라리 나를 기다리라고 말을 해.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도록, 영원토록 바라볼 수 있도록’ 라고 되어있다. 짧은 하루에서 영원이 나오고 있다.
나밖에 모르는 나를, 주님께서 내가 아닌 나로 등장시킬 때 나는 영원한 나가 되는 것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거기서 영원함이 나온다. 하루는 짧지만 짧은 하루에서 영원을 증명할 수 있고 영원한 것을 끄집어 낼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신다.
부분인 자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전부인 사람,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다. 바라본다는 것은 거기에 예속 되었다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인간은 어떻게 마지막을 대비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이미 성령 받은 베드로가 성령 받은 자기의 사랑하는 자들이 지금 이런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세상과 차이나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골로새서 1장에서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에 있는 것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자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계시니라, 고 한다. 여기서 ‘그’는 하나다. 그가 1이 되면 나머지는 1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기를 최종적인 1로 간주한다. ‘그’가 그것을 0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들은 그에게 예속된 나이며, 배후에 주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다. 성도는 예속 된 자이지 구원된 자가 아니다. 주님이 구원된 것이고, 우리는 구원에 예속된 사람으로서 구원된 것이다.
갈라디아서 3장 26절에 보면 ‘너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너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라고 되어 있는데, 세상에서는 이걸 다양성이라 한다.
그러나 이게 뭉쳐져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는 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다양성이 나오는 것이고 그 전체는 하나에 복속되는 것이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하나 됨을, 주님이 살아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6절에 보면 이로 말미암아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되었다, 이렇게 되어있다. 인간이 1이라면 멸망할 걸 왜 만들었나, 라는 질문이 성립된다. 그러나 인간은 1이 아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께서 시간도 만들고 공간도 만들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구분할 때 시간으로 부분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한 날이다. 하루 하루의 마지막 날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7은 앞에 있는 하루 하루에 속하지 않는 1이다. 이 1에서 1의 다양성이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유대인 헬라인 종 자유자 남자 여자의 다양성이 나오는 것처럼.
마태복음 12장에 보면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안식일이야.” 라는 것이다. 시간이 인물이 되는 것이다. 되찾은 시간이다. 인간들이 시간을 해석하며 안식일은 언제부터 언제까지입니까, 멸망은 언제 입니까, 라고 계산할 그런 시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1이 될 것을 왜 다양하게 만들어놨는가? 1을 위해 없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것이 멸망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주가 되기 위해 멸망의 재료들을 만들어놓은 것이다. 멸망은 주님께서 창조의 원리대로 실시하신 것이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주님은 살아있고 나는 죽었고 그게 믿음이고, 없어진 내가 그리스도가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등장해 있는 것이 사랑의 관계인 것이다. 사랑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등장했다.
천년이 하루같이 하루가 천년 같다는 것은 되찾은 시간, 인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분에게서 시간이 나오고 공간이 나온 것이다. 그 분에게서 시간이 나왔다는 것은 진짜 불로 멸합니까, 언제 물로 심판 받았습니까, 라고 묻는 게 아니고 누가 그 일을 하십니까, 라고 물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진멸의 대상 멸망의 대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건드려줄 때 알게 되는 것이다. 진멸의 대상인데 왜 지금까지 진멸하지 않았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주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시간적 여유를 주신 것이다. 그 시간은 천년이든 만년이든 상관없고 단 하루라도 충분하다. 코끼리 치약처럼 부분 속에서 꾸역꾸역 집어넣은 것이 보잘 것 없는 나를 통해서 전체가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를 이용하시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 끄집어내는 것이다. 율법에서 끄집어내는 것은 저주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진노에서 멸망에서 심판에서 끄집어낸다는 뜻이다. 이걸 달리 말하면 인간의 시간과 공간 개념에서 끄집어내는 것이다. 인물이 되는 것이다. 주님과 합치된 인물이 되는 것이다.
인물에서 다시 시간과 공간으로 파견근무 나간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과 하나가 된 채 시간과 공간을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불로 망한다. 주님은 시간이 흘러서 오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 오실 때 시간은 종식 되는 것이다. 시간은 천년이 흘렀든 하루가 흘렀든 천년이 하루같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물 안에서 나온 것이다.
시간은 그리스도에게서 나왔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있는 한 성도는 영원한 분으로부터 영원한 말씀으로부터 생산되었기 때문에 이 쇠퇴하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3장 11절, 12절에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느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고 되어있다.
거룩한 행실은 하늘의 요소 때문에 더 이상 땅의 요소, 나 살고자 하는 요소는 나하고 상관없다고 여길 때 그것이 바로 구분 된 것, 거룩이라고 한다. 땅의 사람과 구분 되는 것이다. 스스로 행함으로서 거룩의 개념에 합치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면 경건인 것이다.
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에 거한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본다, 라고 한다. 바라본다는 것은 이미 거기에 소속 되어있기 때문에 시간적 바라봄이 아니고, 시간은 날아가 버리고, 공간적으로 이쪽 공간에서 새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기 때문에 시간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놓쳐서는 안 될 갈라디아서 4장8절을 보면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 하고 본질상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에게 종노릇 하였다, 고 한다. 종노릇, 그 누르는 게 바로 이 세상의 해석이고 의미인 것이다.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어찌 종노릇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에게 전하고 수고한 것이 헛될까봐 걱정 된다. 이 말은 주님이 전한 이 복음이 다른 말로 하면 주의 일이다. 주의 일의 특징은 나의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내가 했던 일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 종의 자녀였다는 말이다.
우리는 내가 나 되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을 남들 보여주기 위해서 해왔다. 복음을 알게 되면 경건한 사람 만들어서 천당 가려고 노력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아낌없이 버릴 수가 있다.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리고 버리는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