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6강, 317강) 속과 겉, 혈연관계 200616
녹취:이하림
316강-YouTube강의(속과 겉 마태복음 26:7)20200616-이 근호 목사
제316강, 제목은 ‘속과 겉’. 세상에서 인생경험 좀 있고 인생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생각을 많이 했던 사람들, 차분하게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자기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해요. 속과 겉이 하나가 되어야지 다르면 안 된다. 들어보면 맞는 것 같습니다만 그 사람들은 뭐를 모르냐 하면 겉과 속이 같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바리새인들이 경건한 행동을 했죠. 주님께서는 그들의 경건해 보이는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말라, 그들의 속은 이미 추잡하다고 얘기했거든요. 어느 정도 추잡하냐면 마치 묘지 안에 시신이 썩어가고 있는데, 썩어가면 냄새 많이 나죠, 흉하잖아요, 흉물이죠, 시체 껴안고 잘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너무 끔찍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끔찍하기 때문에 더욱더 과도하게 묘지를 아름답게 꾸밉니다. 아예 끔찍함이 생각나지 않도록. 전혀 그런 것이 의식되지 않도록 그렇게 조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평토장한 묘 또는 시멘트 포장을 한 묘라고 해서, 인간을 묘사할 때 유대인들은 겉과 속이 다르다고 그렇게 쉽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뜻은 겉과 속이 다르다가 아니라 속에 시신이 들어있는 그 인간들이 속만 그런 게 아니라 겉도 경건하게 위장할 줄 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겉과 속이 다른 게 아니고 똑같아요. 겉과 속이 똑같습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 그래요.
인간은 자기 속을 행위로 숨길 수가 없습니다. 감출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감추겠다는 그 의도 자체가 음흉한 속을 대신하기 때문에, 대변해주기 때문에. 뭔가 감추겠다, 건전해 보인다 라고 이렇게 나서는 것 자체가 속과 괴리된 게 아니고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더러운 것은, 고상한 것으로 나타나는 식의 더러운 짓을 바깥으로 표출한다.’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사도바울도 고린도후서 11장에서 말씀하시기를 인간은 속과 겉이 똑같다는 사실을 왜 그리 모르는지. 너희들이 원하는 당회장 목사, 너희들이 원하는 사도, 그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라 했죠 (마태복음 7장 15절,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양의 탈을 썼다.
그러니까 이 말은 무슨 말이냐 하면 가면 안 쓰고 탈 안 쓴 인간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에요. 어린 양, 순한 양의 형상을 띄고 나타나는 것, 그것이 목자도 거룩한 목자인 것처럼 위장하는 그 자체가 이미 내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부와 연결되지 않으면 그런 짓을 할 필요가 없죠.
그러면 사도바울은 어떻게 살아가는가. 사도바울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속과 겉이 일치된 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절, “예수께서 베다니 나병환자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이것을 비싼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런 겁니다. 여자로 하여금 그 모아놨던 옥합, 귀한 향수를 한꺼번에 예수님의 머리에 다 붓는 것은 여인이 한 행위가 아니에요. 앞에 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유발된 거예요. 예수님 앞에 뭔가 해야 된다는 생각이 예수님을 만난 순간 발생된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에 도달하느냐 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겉(바깥, out)은 주님이 원하는 안(in)이 주님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나 가능한 일이 되는 거예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인간은 어느 누구도 속과 겉이 하나가 되어서 따로 놀 수가 없다. 안이 더러우면 바깥에 더러운 짓이 나오는데 그 더러운 짓이 바로 경건한 척 하는 것, 거룩한 척 하는 것, 남들 보기에 어떻게 보이는가 되게 신경쓰는 것, 그 짓이 속을 조작하는 짓이 되는 겁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어요. 조작하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타인을 속이고 사귀는 그 재주를 평생 키워나가는 게 인간입니다. 남 속이는 것. 남 속일 때 그 수단이 뭐냐. 말이라는 거예요. 행동, 말,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터무니없는 행위를 지금 이 여인이 했어요. 참으로 터무니없는 짓입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참뜻은 인간들 보기에, 자기가 자기를 속이는데 급급한 인간들 보기에 참으로 터무니없는 존재가 예수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여인에게 상식에 맞지 않는, 상식을 뛰어넘는 그러한 황당한 일을 예수님으로 인하여 유발되게 하시는 그 관계.
이 여인과 예수님의 관계는 뭐냐. 그 여인은 순간 예수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 존재자체가. 예수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말씀화 된 여인이 되죠. 물론 그 여인이 구세주라는 뜻은 아니고 예수님 모습의 한 덩어리가, 조각이 여인을 통해 확장되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할 수 있느냐 하면 이 여인의 행위에 대해 누가 나서서 변호해주시는 거예요,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나서서 변호해주는 거예요. 여러분 행위를 여러분이 나서서 변호하지 마세요. 자기가 옳다 하는 것은 칭찬받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옳고 그른 것은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존재, 유발된 행위, 유발된 마음을 안과 밖 공히 드러낼 때 그게 의미가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어떤 사람을 개인적으로 착한 일한다고 착하다고 보지를 않아요. 예수님이 착하다고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면 예수님을 위하여 유발된 행위를 드러낼 때만 예수님께서 인정하십니다. 그 외에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 겉과 속, 속과 겉이 신자나 불신자나 한결같이 동일합니다. 신자에서는 속과 겉 모두 다 예수님에 의해서 유발된 행위를 보여주게 되죠. 그리고 불신자는 속과 겉이 전부다 주님의 편에 서지 않고 주님의 반대편에 섰다는 것을 유감없이, 아주 거침없이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겉과 속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옥합을 예수님 머리에 붓는 이 여인에 대해서 여기 8절에 보면 제자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그냥 말하지 않습니다. 분노에 차서 말합니다. “무슨 의도로 이 많은 돈을 한꺼번에 다 허비하느냐?” 라고 했을 때에 이 제자들의 평소 모습은 뭐냐 하면 돈은 귀하게 쓸 때 예수님이 기뻐하신다는 그러한 원칙을 지니고 있었던 거예요.
돈을 귀하게 쓰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다는 게 바로 자기 속내를 유감없이 보여준 겁니다. 주님 저 어때요? 착하죠? 이것은 조작이에요. 이것은 엉터리입니다. 그래서 제자들마저 분노할 만한 일을 의도적으로 이 여인을 통해서 발생시켜버립니다.
이것이 그 당시 제자들이 이해 못한 주님의 독특함을 자기 여인을 통해서 드러내듯이 오늘날 성령 받은 우리도, 우리도 예상 못한 독특함을 주께서 사용하셔서 드러내시는 겁니다.
317강-YouTube강의(혈연관계 아가 6:9)20200616-이 근호 목사
제317강, 제목은 ‘혈연관계’. 혈연관계는 모든 인간세상의 바탕입니다, 기본입니다. 가족이 중심이 되어서 시작이 된 인간세계는 나중에 커서는 이제 가족을 넘어서 사회를 구성하는데 이 가족에서 일어난 일이 번식이에요, 생식. 그래서 어미가 있으면 어미에게서 자식이 태어나서 사람이 발생되죠. 우리가 알고 있는 바탕, 근본, 바로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은 성경이 아니라도 세상에서 다들 오랫동안 언급되어 왔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부모 없이는 네가 없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알다시피 마태복음 12장 끝에 보면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 군중들 그 뒤에 예수님의 모친과 예수님의 배다른 형제들이 와있죠. 제자들이 특별손님 왔다고 예수님에게 알려줍니다. “예수님이여 어머니가 오셨고 형제들이 오셨습니다.” 라고 할 때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참 혈연관계에 속한 사람들이 들으면 섭섭하기 짝이 없는 말씀을 해요. “저분도 우리 어머니고 이 분도 형제지만 여러분도 우리의 가족입니다.” 이렇게 말을 좋게 하면 되는데 그렇게 좋게 안하셔요. “누가 내 모친이며 누가 내 형제냐”하고 반문하죠.
이 말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말씀 자체가 무엇을 바꾸겠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설교하는 중이니까 설교하는 그 설교의 바탕은 세상 사람들이 알다시피 혈연관계가 바탕이 아니고 그보다 더 우선되는 게 있어요. 예수님의 존재에서 나오는 그 말씀이 더 바탕이 되고 기본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누가 내 모친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내 모친과 형제들을 보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너희들이 곧 내 모친이고 내 형제니라.” 쉽게 말하면 “내 가족이다”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자 이 말씀에 대해서 이 말씀과 관련 있는 구약의 말씀을 한번 생각해보겠습니다. 구약 아가서 6장 4절부터 쭉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와요.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너울 (여인들이 얼굴 가리는 투명한 수건)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그만큼 싱싱하다 이 말이죠. 이빨이 시릴 정도로 싱싱한 거예요.
8절,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그러니까 내 주변에 여인들이 그렇게 많더라도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 다음에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이렇게 되어 있어요.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에게 반해서 아름다움을 묘사하거든요.
아름다움이 먼저일까요, 사랑이 먼저일까요? 아름답기 때문에 이렇게 사랑하는 겁니까, 아니면 사랑하니까 이렇게 매사가 아름답게 보이는 거예요? 그 질문이 의미가 있는 이유가 만약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해버리면 나중에 세월 지나서 할머니가 되게 되면 그렇게 사랑스럽지 않아요. 왜? 조건이 있었기 때문에. 아름답다는 조건 하에. 아무리 자기가 젊을 때 좋아했던 여자라 할지라도 그 여자가 젊을 때하고 나이가 들 때하고 차이가 나요, 아름다움에. 피부의 윤기부터 해서 모든 것에서 차이가 나거든요.
그러니까 만약에 순서를 바꿔서 사랑한다면, 익어가는 것도 사랑스러운 거예요. 늙어가는 게 아니고, 늙어가면 밉상인데 익어가는 것도 사랑스러워, 모든 게. 숙성되는 것이 사랑스럽겠죠. 그러면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 사랑해서 아름답게 보십니까, 아름다워서 사랑하는 겁니까? 사랑스럽기 때문에 우리의 하는 모든 짓거리가, 행위가 아름다워요.
우리는 죄짓는다고 하는데 주께서는 죄짓는 모습조차도 사랑차원에서 거두어집니다. 왜냐하면 죄가 있는 곳에 의가 넘치기 때문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모르는 이유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내 사랑에 너무 몰두해서. 그러면 내 사랑에 너무 몰두했다는 것은 혈연관계와 상대해서 우리는 가족, 혈연관계에, 그냥 육에서 나온 육에 매여 있어버리면 사랑을 의도적으로 얻으려는 시도를 해요. 이것이 육의 한계입니다.
육적인 존재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영의 관계에서 끊어졌기 때문에 내가 사랑받을 짓을 해야 사랑할 거라는 생각을 가져요. 그렇게 되면 이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나 예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육적인 마인드, 육적인 사고방식을 자기한테 매사에 적용시켜버립니다. 하나님 이렇게 착한 짓 했으니까 저 사랑해주세요, 저 예뻐해주세요. 내가 요런 짓 했으니까 주께서 얼마나 미워하실까. 다음에는 착한 짓해서 이 미운 짓을 내가 변경시켜보겠습니다. 복 받게, 복이 오도록.
그렇게 자꾸 시도하는데 그것은 바로 육에서부터 육의 사고방식 가지고 억지로 영을 꿰뚫을려고, 이어보려고 시도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 나오는 술람미 여인이 다른 왕궁의 시녀들, “여기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라” 육십하고 팔십 합치면 백오십명 정도죠. 백오십명하고 자기하고 할 때 여기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자기가 뭐 어떻게 오디션 봤습니까? 미장원에서 머리 한번 다듬고 왔어요? 그냥 그대로에요.
꾸미지 마세요. 꾸민다고 주님께서 더 이뻐하는 게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 그대로 나오세요. 세리면 세리, 창기면 창기, 강도면 강도, 도둑이면 도둑, 살인자면 살인자. 주께서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왔다 이 말이죠.
뭐 죄를 그렇게 이뻐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랑하는 자, 사랑한다는 이유 때문에 받아주는 거예요. 사랑하는 자를 받아줄 때는 내가 주님한테 기대했던 그것보다도 더 넘어, 더 넘치는 예상 못한 것까지 다 주셔요. 내가 예상 못한 것까지.
탕자가 집에 돌아올 때 자기가 예상한 것은 ‘이제 아들은 끝났다. 그저 종이나 해서 월급만 주면 더는 소원 없다.’ 라는 것까지만 생각했는데 세상에 아들 쳐주는 정도가 아니에요. 그 비싼 한우 잡잖아요. 소 잡아서 심지어 형한테 주지도 않던 가락지까지 끼우고 새 옷 입히고 우리 아들 왔다고, 김상사 월남에서 돌아왔다고 하는 식으로, 우리 아들 돌아왔다고 온 동네방네 다 자랑질하는 거예요. 탕자가 재산 날리고 다 탕진하고 돌아온 게 뭐 그리 자랑스럽다고 하겠어요.
그러니까 구원받은 탕자도 감히 생각 못하고 거기까지 생각 못한 그 이상의 것을 주님께서는 사랑의 이름으로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생각을 누가 막느냐? 악마가 악착같이 막아요, 악마가. 똑바로 행동해야 사랑받는다고. 온 천지, 교회, 기독교, 종교에서 다 그렇게 가르치죠. 그 이상의 것을 넘보지 못하도록.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자기의 성실하고 충실한 행함만 쳐다보도록 오늘도 악마는 우리 흔들기에 나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악마의 흔들기보다 흔들기에 구애받지 않고 한결같이 우리를 사랑하는 그 시선 있잖아요. 응시, 바라보심, 그게 바로 성령의 은사로서의 사랑의 진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