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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강, 311강) 얼굴, 증거 200505

정인순 2020. 5. 5. 22:39



310강                음성                  동영상


311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10강-YouTube강의(얼굴 요한계시록 1:16)

20200505-이 근호 목사


제310강, 제목은 ‘얼굴’. 사람의 얼굴은 늘 변하기 때문에 자기 얼굴이 고정되지 않습니다. 옛날에 찍은 사진 같은 것을 보면 처음에는 오랜만에 보니까 좋지만 자꾸 보게 되면 꼴 보기 싫어요. 왜냐하면 그 때 그 얼굴만 보이면 괜찮은데 젊을 때 얼굴을 통해서 옛날에 고생했던 게 아울러서 같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 때 그 시절이 싫은 거예요. 딱 잊고 싶은 겁니다. 얼굴만 보면 괜찮은데 저 얼굴 때 같이 옆에 있던 친구 얼굴 보게 되면 그 친구가 돈 빌려줬는데 아직도 안 갚았다는 생각이 같이 떠올라서 지금이 괴롭죠.

그래서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인간의 얼굴은 본인이 모른다. 왜? 변하기 때문에. 자꾸 변해요. 그래서 인간의 얼굴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과거라는 것이 누적되어 있습니다. 차곡차곡 누적되어 있어요. 인간의 얼굴은 과거의 얼굴이거든요.

그러면 변하지 않는 얼굴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 인간의 변화가 골인 지점이 있어요. 인간의 얼굴이 변하는데 어디로 골인하는가? 한 줌의 재로 골인합니다. 오늘 어린이날특집인데 너무 지금 가혹하죠?

어린아이 얼굴에서 어른 얼굴이 정점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정점에 있던 얼굴이 삼십이 지나게 되면, 점점 더 삼십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뭔가 무너진다 할까. 퇴색된다 또는 퇴화된다. 알 수 없는 힘에 의해서 가장 최절정의 좋은 모습을 유지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애써도. 아무리 권투하고 운동하고 북악산에 올라가봤자 점점 더 이 모든 것이 뭉개진다는 말이 옳아요. 점점 늙어지는 겁니다.

화장품 선전 같은 데 보면 종이에다가 촘촘히 그물 같은 거 오려놓고 홈쇼핑하는 사람이 그 그물에 손가락을 넣어서 찢어버려요. 여름의 피부가 이래서 되겠습니까? 촘촘해서 쫄깃쫄깃해야 되는데 딱딱하니까 그 구멍에 손가락 집어넣고 확 벌려버리니까 다 찢어지는 거예요. 여름 피부가 이러니까 바르세요, 이 화장품을. 이런 식으로 선전이 되는데 화장품 효과 떨어지면 마찬가지로 또다시 주저앉죠.

그래서 인간의 본얼굴은 죽음이다. 그냥 한줌의 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의 본얼굴입니다. 그럼 왜 인간이 잠시 착각하게 만드는가? 이렇게 이쁘고 머리 길어서 연예인처럼 하고. 머리가 얼굴이 이렇게 예쁜가? 착각하게 하시는 그 이유가 뭐냐? 그 이유는 변화를 보게 하는 거예요. 누가 이 변화의 과정을 주도하고 있는가를 보게 하는 겁니다.

빨리 늙어서 죽고 싶어 환장한 사람 없잖아요. 자기 몸이 아프고 갱년기 되어서 온몸이 벌겋게 열 일어나고 이걸 누가 좋아합니까? 그러니 갱년기나 신종코로나를 보면서 여러분이 어떤 진리 같은 것을 찾아내야 돼요. 그게 뭐냐면 내가 아프고 늙고 죽는 것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러면 누구의 잘못이냐?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 그러면 질문을 바꿔야 되겠죠? 누구의 잘못이냐는 질문지를 고쳐야 돼요. “누구 때문입니까?” 이렇게 고쳐야 되죠. 누구의 ‘잘못’이라는 말을 집어넣으면 악마가 평생토록 그런 식으로 훈육을 시켜놓은 거예요. 완전히 우리 인간을 정신병자 다 만들어 놨어요.

잘못했다는 생각을 자꾸 집어넣는데 반대로 잘했다는 생각도 잘못됐고 잘하고 잘못하고는 아니에요. 늙어가고 있는 것은 잘잘못의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피곤한 것이 잘잘못의 문제가 아니고 누가 끊임없이 손대고 있는 겁니다. 연관되어 있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1장 14절에,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이게 지금 누구의 얼굴이냐 하면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 흔해빠진 인간들 얼굴이 아니고 예수님의 얼굴을 본 거예요. 놀라버렸죠. 인간인데 같은 류의 인간이 아닙니다. 아담류의 인간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뭔가 잘못한 거예요. 같은 인간들끼리 봤으니까 저 얼굴이 인간의 전부고 기껏해봐야 저 얼굴에 머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예수님의 얼굴이 같은 인간인데 우리 인간 얼굴과 같지 않은, 다른 얼굴이 있다는 사실을 이 요한계시록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 여러분 들었으니까 다시 한 번 복습합시다. 얼굴은 뭐라고요? 과거의 누적. 과거가 차곡차곡 쌓인 거예요. 자기의 과거가 자기 얼굴을 만든 겁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그 빛나는 얼굴은 예수님의 모든 성과의 결정판이죠, 집대성이죠.

이걸 고린도전서에서는 뭐라고 하냐면 흙에 속한 얼굴이 있는 반면에 -얼굴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형상, 같은 말이에요- 흙에 속한 형상이 있는 반면에 땅에 속하지 아니하고 하늘에 속한 형상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로서, 실제적으로, 가상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실제적으로 그걸 보여주었다 (고린도전서 15장). 그러니 너희들이 너 자신을 좀 닦달내지 마라. ‘이것은 나 때문이야, 내 책임이야’ 그러지 말라는 거예요.

아까 분명히 이야기했죠? 우리 책임 없습니다. 나에게 다가오는, 내 차를 박았던 그것에 내 책임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인생도 하나의 차인데 우리도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습니다. 왼쪽에서 박을지 앞에서 박을지 뒤에서 박을지 이건 아무도 장담 못합니다. 다만 알아야 될 것은 언젠가는 박혀야 된다는 것, 언젠가는 죽어야 된다는 사실만큼은 우리가 미리 알아야 돼요.

따라서 죽으라는 말은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나를 예쁘게 보겠다는 거예요. 네 얼굴을 어떻게 하라? 포기하라. 네 얼굴에 미련두지 말고 집착하지 마라. 그렇게 집착하게 되면 이렇게 인생 어렵게 사는 것은 다 나 때문이다. 내 탓이다. 내 탓 아니면 남 탓. 눈에 보이는 것은 같은 인간들밖에 안보인다 이 말이죠.

사도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밧모섬에 잡힐 때에 누가 봐도 사도요한은 지금 벌 받고 있고 인생 조졌고 사도 인생 망가졌고 불쌍하고 ‘차라리 저럴 것 같으면 난 인생 안 산다’라고 그렇게 측은한 대상이 되겠죠. 그러나 요한계시록 1장 16절에 보면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차게 비치는 것 같더라” 해가 힘차게 비치는 것 같더라. 해가 하늘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만 예수님 얼굴이 해보다 더 힘차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 얼굴이 우리 얼굴입니다. 그 예수님 얼굴이 우리 얼굴이에요. 요한계시록에서 왜 예수님 얼굴을 보여주는 겁니까? 그냥 죽기를 기다렸다가 나중에 천당 가서 예수님의 영광처럼 하늘의 영광을 입어서 빛나게 하라는, 단순히 그 때, 죽는 날만 기다리라는 뜻이 아니에요.

지금 우리 자신의 패가 버릴 패라는 사실을 알라. 내 인생에 대해서 닦달내지 말고 꼬치꼬치 잘했니 못했니 그거 따지지 말고 그러지 마라. 다른 인생 바꿔봐야 그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그 인생도 삼십 넘어서 계속 주저앉고 있고 하락의 길을 걷고 있는 겁니다. 오죽했으면 ‘서른 즈음에’ 하겠어요? 그 삼십으로부터 점점 더 바이바이하는 거예요. 그저 내리막길로 가는 겁니다. 누구 책임 아니에요.

요한계시록 6장 마지막에 보면 마지막 때에 불신자들에게 무서운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 해같이 빛나는, 해보다 더 생생한 주의 얼굴이 나타났을 때에 거기에 깔려죽는 사람이 하는 말이 16절,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예수님의 그 태양같이 빛나는 그 광채와 진노에서 ‘산들아 바위들아, 그동안 내 얼굴에 집착했으니까 이 얼굴을 좀 가려서 주님의 그 빛나는 얼굴 앞에 내가 얼마나 초라한지를 안 들키게 해 달라’ 이런 식으로 탄식을 하고 있죠.

우리가 낮에 해를 볼 때, 오늘은 구름이 깔려서 해가 없습니다만 해를 볼 때에 차마 못 보죠. 있지만 못 보잖아요. 그만큼 우리는 아직도 인생을 다 산 게 아니라는 사실. 다 산건 아니지만 우리의 도달지점은 미리 알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자기 책임을 너무 통감하지 마시고 일찍부터 천국생활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주께서 이끄신다. 이미 그 고정점을 향하여 가고 있다고 생각해서 남 탓하지 마시고 특히 내탓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311강-YouTube강의(증거 로마서 10:15)

20200505-이 근호 목사


제311강, 제목은 ‘증거’. 뭔가 증거한다. 증거한다는 것은 본인이 주인공이 아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대표적인 사람이죠. “너는 누구야?” 할 때 세례요한의 답변은 “나 아니야”. 질문하는 사람의 질문과 답변이 서로 비껴가고 있는 거예요.

세례요한보고 “너 누구야?”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무슨 뜻이냐면 나는 제사장인데 나는 이런 사람인데, 나는 항상 내가 누구냐에 대해서 항상 신경을 바짝 쓰고 살아가는데 너도 마찬가지 아니겠어. 그러니 나는 이 정도인데 ‘너는 누구야?’라고 묻는 거예요. 사람이 질문할 때는 자기에게 구축된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서 질문하지 않거든요.

나는 이렇게 살아가는데 너는 누구야? 나는 지금 신종코로나 겁나서 마스크 쓰는데 너는 뭔데 마스크 안 써? “마스크 쓰세요.”라는 말은 뭐냐? ‘나는 쓰고 있는데 너는 뭔데 안 써?’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 인간은 뭔가 질문할 때는 ‘나는 이런 식으로 인생을 이렇게 정리했는데 이 정리에 준해서 너는 누구야?’ 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세례요한은,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범주 안에 없어. 나는 아니야.”라고 이야기해요. 세례요한은 ‘나는 ~이다’에 ‘아니야’가 들어가 버린 거예요.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은 ‘나는 이렇다’라고 자기가 이미 여기에 있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해서 이렇다고 하는데, 세례요한은 나는 있어도 나는 없다고 여기고 그렇게 나를 보라는 겁니다.

답변이 참 엉뚱하죠? 나는 여기 있는 줄 너희들이 알지만 나는 여기 있는 나를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너희들에게 안 보이는 분을 증거하기 위해서 여기에 내가 있다는 겁니다. “나는 그 분의 소리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례요한이. 세례요한이 그렇게 얘기할 때 누가복음 같은 데에 보면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러면 성령, 성령,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참 성령 언급을 많이 하는데 성령은 무엇이냐? 성령은 ‘아니다. 나는 자체로서는 아무것도 아니다’를 증거하는 것이 성령이고 그것을 매개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말씀 잘 들어야 돼요.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고 앞에 전제되는 것이 있어요. ‘나는 ~이다’가 아니다 를 시발점으로 해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따라서 ‘나는 ~이다’ 해버리면 누가 가리워지느냐 하면 예수님의 증거가 다 실패하는 겁니다. “나는 누구다. 나는 목사다” 이러면 예수님의 증거가 실패하는 겁니다.

“너 신학교 나왔지? 너 나중에 목사 되지? 너 목사 맞지?”, “나 목사 아니거든! 주님께서 목사 되게 하셨거든.” 그래서 주님을 증거하는 거예요. “너 요번에 강원도 고성에 산불나서 집 홀랑 태웠지?” 물으면 “내 집 안태워졌거든! 주께서 주님의 집 태워버렸거든. 내 집 아니었거든. 주님의 집인데 주님의 집을 홀라당 산불 내서 다 태워버렸다.” 그러면 집 태우고 주님 증거하고. 주님은 남는 장사고 나는 집 홀라당 다 태우고. 그게 바로 세례요한이 가는 길이었습니다.

자 세례요한의 주님과의 관계를 확장시켜 봅시다. 범위를 넓혀봅시다. 로마서 10장에 나옵니다.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이 말은 보내심 없이 제대로 주님 증거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둔 적이 없다.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 증거한다고 성령 받아서 주님 증인이라고 나대는 거, 나는 그런 인간을 둔 적이 없다는 겁니다.

아까 세례요한 이야기 다시 해볼까요? “나는 아니다”할 때 로마서 10장에서는 그걸 뭘로 바꾸느냐 하면 보내심을 입었다고 표현하는 거예요. “나는 아니다”와 같은 말은 “누가 나를 보냈다. 보내심을 입었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자, 그럼 보내셨다는 말의 반대말은 뭐냐? “나는 누구다”라는 말과 똑같은 말이 돼요.

여기 나라고 하는 것을 분석해보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과거가 쌓이고 쌓인 거죠. 과거에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공들였습니까? 참 누구라도 자기 과거 이야기하라고 하면 소설책 10권 이상 나옵니다. <태백산맥> 그건 아무것도 아니야. 대하장편소설 나와요. 어느 누구도. 골목식당의 족발집 하는 사람도 술 한잔 먹고 자기 과거 이야기하라고 하면 책10권 나옵니다.

인간은 누구나 남한테 자기 과거 이야기하고 싶어서 환장을 했어요. 사람을 왜 만납니까? 왜 술 한잔 먹고 만나서 밤늦도록 이야기합니까? 지 과거 이야기하는 거예요. 결국 그걸 압축해보면 뭡니까? “나는 누구다.”이거에요. 지금도 장날에 그런 게 있는지 모르겠는데 옛날 저 어릴 때 장날이나 길에 보면 쌀을 동그란 데에다 집어넣고 압축기로 누르면 편평한 피자판같이 나오죠. 이게 자아에요. 과거를 압축해버리면 지금의 자아가 되는 겁니다. 이건 누구 증거하겠어요? 그 압축된 거 증거하겠죠. 나 이렇게 고생했다 저렇게 고생했다.

TV 아침 드라마 보세요, 전부다 그 이야기 아닙니까? 죽었다가 살아 돌아오고 희한한 일 벌어지는데 전부다 자기 과거 이야기에요. 과거 이야기 듣고 또 눈물 흘리네. 눈물 흘리면서 그래 아버지 혼자, 일찍이 아내 죽고 아들하나 참 잘 키웠다. 세상에 어떻게 저리 잘 키웠노. 자기 아버지는 파주에서 미용사 하는데 아이고 이번에 트롯트 우승해서 1억타고 차타고 신발 200켤레 타고. 이제 장사가 너무 잘 되가지고 오지 말라고 미장원 잠시 그만두고.

이 전부다 무슨 이야기에요? 과거 이야기에요. 누굴 증거합니까? 자기 증거하는 거예요. 참 예배당 이쁘다. 세상에 그 목사님이 개척교회해서 새벽기도마다 전도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노. 그러면 그거 누구 증거하는 거예요? 교회라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잘났다는 것을 증거하는 겁니다.

그런데 보내심을 입은 사람에게는 그 보내심이라는 계통에서 누가 내려오느냐 하면 아까 세례요한이 성령 받았다 했죠. 성령님이 누구를 그대로 반복시키냐 하면 예수님의 생애를, 보내심을 입은 사람에다가 그 줄을 타고, 호스를 타고 그대로 집어넣어버려요. 그렇다면 보낸 분이나-예수님이죠- 보내심을 받은 자나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의 고난과 환란과 아픔을 반복하는 거예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제가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고생해서 주님의 증인되면 나한테 돌아오는 이익은 뭡니까? 도대체 뭘 주시려고 나를 그렇게 고생시키셨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하죠. 여기 로마서 10장 15절에 보면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그러면 복음 전하는 사람에게 나이키 한 벌씩 준다는 뜻이에요? 안그러면 태국, 중국 발마사지 가끔씩 해준다는 뜻입니까? 아름답다는 의미가 뭐냐? 그것은 여기 10장에서는 안나오고 15장에 나옵니다. 15장 21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와요. 상당히 어려운 말씀인데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깨달으리라” 야, 이게 바로 성과에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런 생각합니다. ‘저 사람 내가 복음 전해봐야...저 사람 복음 받아들이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이런 거. 마치 요나가 니느웨에 복음 전해놓고 ‘너희들 구원 안받을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복음을 받아들일 때 바로 말씀대로 진행되는 거예요. 말씀이 뭐냐?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누굽니까? 저와 여러분 아닙니까? 언제 우리가 예수 믿으려고 환장했습니까?

“주의 소식을 받지 못한 자들이 볼 것이요 듣지 못한 자들이” 그 다음에 “깨달으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우리는 몰라요. 그러나 주님은 아시거든요. 주님이 오셔서 그 사람에게 꽂아버리는 거예요. 미션 임파서블이라, 정말. 미션 임파서블. 뭐 높은 건물 타고 내리고 온갖 거 하지만 가서 돌아올 성과는 뭐냐 하면 지옥 갈 사람이 주님의 택한 백성이라는 것을 통보함으로써, 알려줌으로써 안들을 사람이 들어버리는 놀라운 변화.

거기에 우리가 동원된다는 겁니다. 동원 예비군처럼 우리가 동원되는 거예요. 뽑힌 거예요. 사적으로 우리가 챙길 수 있는 나이키 한 벌도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참여하게 된, 그것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상이라고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