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9:10-14 / 자식 없음

정인순 2020. 4. 8.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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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 없음


이근호
2020년 4월 8일               


본문 말씀: 호세아 9:10-14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9:11)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으리라

(9:12)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지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 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9:13)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9:14)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예언이 보편적으로 가슴에 와닿지 않는 이유는, 평소에 우리 자신을 잘못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아픔의 안목으로 자신을 볼 줄 모르고, 십자가 없는 상상의 초월자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정당화하는데 급급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는데 급급합니다.

인간들이 본인을 산 자로 간주해서 늘 꿈틀거리고 행동에 나서는 자신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이는 눈에 들어오는 타인들을 통해서 자신을 비교하면서 모방하는 식으로 자아를 정립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일평생이란 자기가 누군지 정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방법은 타인의 말을 통해서 확증하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을 찾아나서는 이 시도를 흔히들 ‘사랑찾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무조건 옹호해주는 잘나게 살아가는 존재라고 자신을 부추겨주는 이웃을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나무라시고 지적하고 저주하는 대목이 나오면 나 자신과 무관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일방적으로 자신을 좋은 쪽으로 옮겨놓고 성경을 보고 있으니 이것이 성경 해석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은 오늘 본문에서 참으로 냉혹한 미래상을 내어놓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이방민족으로부터 이토록 처참하게 당해야 하는지 납득되지 않을 겁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죽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지은 죄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미 죽음이라는 벌이 확정된 처지에서, 인간은 ‘도대체 무엇을 어떤 죄를 지었기에 죽어 마땅한지’를 알아가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장차 하나님께서 기도하기를 저주를 자청하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14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곧 “내 자식이 없게 하옵소서”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부모로서 자식에게 참사가 일어나는 저주의 환경을 물러주기 싫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태어나서 혹독한 삶을 자식이 살 바에야 차라리 아예 태어나지 않는 쪽이 자식입장에서 나을 지경이라는 겁니다. 무자식 상태가 그나마 위로가 된다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 현 이스라엘의 자식을 지목하고 그들의 죽음과 멸망을 거론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이 생겨나는 원리가 창세기 22:2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이스라엘은 하나님 뜻에 대한 신앙으로 형성된 나라입니다. 신앙이란 그 안에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스케줄이 담겨 있습니다. 그 스케줄이란 첫째 기존의 육의 자식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자식을 새로이 생산케 하신다. 세 째로 그 자식은 육의 아버지 손에 의해서 죽어야 한다.

넷째로 그 자식을 대신해서 희생제물이 동원되므로서, 현실적으로 그 자식은 살아나지만 실제로는 그 자식은 죽은 자식이다는 내용이 이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 원리가 계속 살아있는 곳이 이스라엘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원리’입니다. 언약의 원리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평가하고 바라보게 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언약에 준해서 보게 하므로서, 언약 위반과 언약 성립을 나타나게 하십니다. 즉 언약이 위배되는 사태를 통해서 언약의 성립 상태를 아울러 말해주십니다. 언약 위배는 구약에서의 과거 사건을 통해서 알려주시고, 언약 성립은 미래 신약에 와서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호세야 예언의 말씀 안에서 과거와 미래는 연결되고 그 현재는 예언이 전파되는 그 당시입니다.

반면에 인간에게 있어 시간이란, 과거는 어디까지나 이미 사라져 버린 일들이기에 지금은 없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미래란 아직 오지 않았기에 역시 없는 겁니다. 있다면 오직 현재입니다. 이 현재만 살만하면 살만하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 시간으로 볼 때에, 인간들의 현재란 빠져 있고 과거 미래 사이에 단절되는 빈 칸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본문에서 거론하시는 과거 사건이란 바알브올 사건입니다. 바알브올이라는 모압신을 섬기는 모압의 여인들이 이스라엘의 남자들을 유혹해서 그들의 제사에 참여하게 한 사건을 말합니다. 성경 해석이런 이런 패역한 일에 대해 오늘날 우리 자신들은 상관없다고 발을 빼면 안됩니다.

도리어 그들은 왜 하나님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그 우상섬기는 축제에 참여 했는지를 살펴봐야 합니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의 이야기가 곧 우리 이야기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언약이 없다는데 있습니다. 언약이 빠진 신이 곧 우상입니다. 언약이란 아브라함 언약에 기초한 이삭 언약과 야곱언약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을 죽은 자로 보십니다. 육의 자식 이스라엘을 언약에 해당되지 않는 자식으로 취급하시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라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하늘나라 들어가지 못하면 이는 곧 ‘죽은 자’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비록 죽은 자의 그룹이라도 그들이 하늘나라 백성이 되는 이유는, 희생제물이 그들과 동행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생제물이 이스라엘의 주도권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언약의 완성인 십자가 복음은 한때 기억하라고 준 언약이 아닙니다. 성도가 십자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가 성도를 소유라는 관계가 됩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4:10-11)

즉 십자가는 알고 지나쳐도 되는 그런 과거가 아니라 도리어 유일한 주도적 현재상활이 됩니다. 십자가는 구원이론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를 직접 장악해서 매일의 삶이 십자가 삶이 되게 하십니다. 마치 수영강습을 하기 위해 수영강수는 수영복을 입고 물 속에 뛰어들 준비를 하고 나타납니다.

하지만 수영을 배우겠다는 학생들은 집에서 입는 홈드레스를 입고서 손에는 노트와 볼펜을 들고 와서는, ‘수영을 잘하는 법’을 이론적으로 배우겠다고 나서는 태도는 옳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가 주도해서 성도의 인생을 십자가 속으로 몰아넣습니다. 이미 모든 인간은 죽은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십자가 영이 임할 때 비로소 알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자신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 나타나는 겁니다. 예수님의 대신 죽으심만 나타나기에 성도 본인은 무능하고 쓸모없는 존재임을 알아 늘 그리스도만을 감사하고 십자가만 자랑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증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과거도 주님의 과거요 우리의 미래도 주님의 미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6강-호 9장 10-14절(자식 없음)20040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9장 10절에서 1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4페이지입니다.

호세아 9:10-14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으리라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찌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저희를 떠나는 때에는 저희에게 화가 미치리로다 내가 보건대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여호와여 저희에게 주소서 무엇을 주시려나이까 청컨대 배지 못하는 태와 젖 없는 유방을 주시옵소서.”

에브라임의 미래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미래상이 어떻게 처참한가 하면, 기도를 할 때에 뭐라고 하느냐? 자식을 임신하지 않게 해 달라, 또는 임신하더라도 젖 없는 유방을 주셔서 조산하도록, 그래서 더 이상 애를 키우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하게 될 것이라는 겁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하나님이여, 저주를 저에게 퍼부어주옵소서. 더 이상 자식들 보기에 부끄럽습니다. 자식에게 물려줄 세상이 아닌 것 같아요. 이런 세상을 자식에게 물려주느니 차라리 자식이 없게, 임신하지 않게, 그래서 자식이 없는 상태가 차라리 낫습니다.” 하는 저주스럽고 비참한 기도를 하게 된다는 겁니다.

상당히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이는 내용을 호세아가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 예언의 내용이 상당히 투박하고 냉혹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 내용이 우리한테는 참 낯설어요. 낯설다는 말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 익숙하고 친숙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나 자신을 볼 때 아침부터 거울을 보고 늘 자신을 비춰보기에 친숙하고 익숙해지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보일까? 그것은 말씀을 통해서 알아야지 우리가 자신을 옹호하고 변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0-14절을 통해서 우리자신이 어떤 형편인 것을 보게 되면 우리도 생각하기에 내가 너무 낯설어요.

내가 그렇게까지 엉망이었나?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말았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라는 고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형편없는 존재가 나였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는 항상 나에게 우호적이거든요. 나는 항상 나에게 우호적이고 나를 옹호한다면 어떻게 호세아 9장 10절에서 14절의 이런 하나님의 계시가 성경에 적혀 있겠습니까?

이건 누구 들으라고 준 성경이에요? 우리보고 들으라고 준 성경 아닙니까? 매직으로 처참한 이 내용 지워버릴까요? 그럴 수가 없다는 말이지요. 다 나에게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 와서 죽음을 당하신 예수님의 안목으로 볼 때 지금 나는 어떤 식으로 보일 것인가? 그 내용이 호세아 9장 10절에서 14절까지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나와 있는데 이걸 한 단어로 축약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이렇게 하면 아주 간편해요.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약속을 던져놓고 그 약속을 스스로 성취해나가시는 작업을 통해서 비로소 자기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호세아를 통해서 예언을 던져놓고 그 예언대로 필히 당연하게 그렇게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차갑고 투박한 이 말씀은 우리한테 해당되지 않기를 고대하면 안돼요. 필히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겁니다. 피할 수가 없어요. 왜? 이 말씀이 우리보고 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서 가슴에 와 닿지를 않고 납득이 안되는 이유는, 평소에 나에게 친숙한 나와 하나님 보시는 나와 너무 격차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성경말씀에 주님께서 누굴 보고 욕을 하는데 ‘설마 나보고 욕하지는 않겠지. 나는 빼주세요.’ 이것은 반칙입니다. 주께서 뭔가 욕설을 하고 “독사의 새끼들아!” 할 때는 저 바리새인보고 하지 나보고는 욕을 안 할 것이라고 그렇게 일방적으로 분류를 하시면 곤란합니다. 우리보고 하는 이야기에요.

제가 수백 번 이야기했습니다. 성경을 보시면서 하나님이 뭔가 지적을 할 때 그 지적당한 사람은 나와 상관없다고 하지 마시고 그 지적을 하는 그 지점에 후딱 본인을 세우세요. 하나님의 지적, 바리새인을 보고 지적하든 가룟유다를 보고 지적하든 그 지적하는 그 지점에 후딱 나를 세우세요. 베드로보고 하나님께서 나무랄 때 베드로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우리가 서 있어야 돼요. 그럴 때 비로소 그 지적하는 모습을 옆에 서서 구경하지 말고 직접 맞닥뜨리는 겁니다.

예를 들어 주부들이 수영강습을 받으러 갔어요. 수영강사는 복장 다 갖추고 곧 물에 들어갈 자세로 수강생들 맞이하는데 아줌마들은 집에서 입던 홈드레스 입고 그대로 와 노트 펴놓고 하는 말이 “물에서 뜨는 방법을 이론적으로 설명해주세요. 50미터를 헤엄쳐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자기는 긴 홈드레스 입고 앉아서 폼 다 잡고 수영강사만 수영복 입고 물에 뛰어들어서 왔다 갔다 하면 그걸 동영상으로 찍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이것은 뭐와 같으냐? “하나님이여, 저를 구원하소서. 구원은 해주시되 나는 건드리지 마세요.” 누가 하늘에서 수영복 입고 오셔서 이 땅에서 천당 가는 것 시범조로 보이시면 우리는 그것을 공부해서 노트에 적고 동영상도 찍어서 ‘아, 주님께서 저렇게 하셨구나.’ 이렇게 해서 주님덕분에 구원받겠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나는 건드리지 말라는 거예요. 나는 욕 얻어먹을 사람이 아니니까,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고 하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인간이 평생 살면서 하는 일이 뭐냐? 저에게 누가 물으신다면 저는 이렇게 답합니다. “인간이 평생 하는 일은, 내가 누구냐를 알아가는 일을 평생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냐를 어떻게 아느냐? 내가 누구냐를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을 가지고 두자로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것은, 진짜 내가 누군지를 몰라서, 그 사람을 통해서 제대로 나에게 내가 누군지 좀 알려줬으면 좋겠어요.

결혼도 안하고 혼자 처녀로, 총각으로 비실비실 늙어가는 사람들은 그 이유가 뭐냐? 계속 착각만 하는 거예요. 옆에서 당신 이런 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해주면 흐뭇하겠는데, 나한테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지적해줄 수 있는 친절한 사람을 못 만나고 있으니 나이 30이 되어서도 결혼하고 싶고, 40이 되어도 결혼하고 싶고, 내가 아는 어떤 사람은 60대가 되어서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60이 넘어서도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뭐냐 하면, “진정 내가 누군지를 옆에서 이야기해주면 그 때 내가 고개를 끄덕일게. 내가 나에게 뭐라고 하는 것은 나도 지겹다. 옆에서 너 이런 사람이라고 해주면 그 때 내가 안심을 하고 그래. 그런 사람이면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 이러고 싶은 거예요. 그것 때문에 결혼을 하는 거예요.

문제는 그 지적을 하는 사람이 내 맘에 딱 들도록 지적을 해주는 조건하에 결혼하고 싶어요. 연애하면서 “당신은 인간도 아니야. 개야.” 이런 사람하고 결혼하겠어요? “세상에 이렇게 예쁜 공주님을 처음 봤어요. 반했어요. 나는 미치겠어요. 당신 때문에 잠을 못자겠어요.” 그 소리를 들을 때 그 여자는 제대로 나를 평가해주는 남자를 만났다고 해서 ‘그 사람하고 결혼해볼까?’ 하지요.

물론 부대조건이 따라요. 키 크고, 인물 되고, 성격 좋고, 돈 되고, 이미 집한 채 마련해놓고 있고. 직업도 공기업이나, 약사나, 의사, 공무원이나, 교사 그 정도. 어쨌든간에 그런 조건보다 더 우선되는 것이, 내 맘에 쏙 든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나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은데 정말 내 마음에 들도록 당신은 이런 존재라고 이야기해줄 때 그 사람과 평생 살 수 있는 우선조건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같이 살다가 연애할 때 하는 소리 따로 고, 지금에 와서 딴소리 하게 되면 ‘갈라설까? 헤어질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라 하는 것은 평소에 내가 누구냐를 지적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 그런데 성경을 보니까 예수님이 그 일을 해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은 그 일을 어떻게 해주시는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십자가 앞으로 나와!” 예수님께서 수영복을 입으신 거예요. 그리고는 “십자가 앞으로 나와.” 그리고 “구원받는 것은 내 식대로가 아니면 구원은 없다.” 그게 바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 나 있는 곳에 너도 함께 있게 하겠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면 나와 함께 영생을 얻으리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씀이지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그런데 오늘 호세아에서 우리를 지적하는 이 말씀에 대해서 우리는 자꾸 외면하려고 해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너무나 나를 붕붕 띄워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다 보니 십자가에서 주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 그것은 뒷전이고 나에게 좋은 소리 해주는 사람의 말이 나의 진짜 모습인양 자꾸 오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 우리교회도 지붕에 십자가 있지요? 저 뒤에도 십자가 있지요? 여러분, 십자가 없이는 구원 못 받습니다.” 맞는 소리 같지요. “여러분이 십자가 믿어 죄씻음 받으시고 그 다음부터는 그 십자가는 잊으시고 이제는 부활에 참여해야 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해야 됩니다. 이제 십자가는 거쳤고 이제부터 십자가는 잊어버리고 부활의 새생명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키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시면 천사처럼 천국에 가고 상급도 받습니다.”

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 뭐가 생각나느냐? 마치 유치원 운동회가 생각나요. 유치원운동회에서 어떤 순서가 있느냐? 트랙을 돌다가 중간에 놓인 찹쌀떡을 손 안대고 입으로 물어서 마지막 골인지점까지 가야 상품 준다는 게임이 있잖아요. 트랙을 막 돌고 있는데 앞에 십자가라는 것이 있는 거예요. “십자가를 믿고, 그 다음에 잊어버리고 부활에 참여하시면 골인됩니다.” 이런 순서를 줬다는 거예요.

십자가 믿는 것은 뭐냐? 아동들이 입으로 찹쌀떡 하나 물고, 먹을 것 먹었으니까 이제는 마음껏 달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게 바로 크나큰 오산이었습니다. 한국교회 거의 모든 교회가 그렇게 가르쳐요. <마스크>라고 하는 외국 영화가 있어요. 호기심으로 어떤 가면을 썼는데 그걸 벗기려 하니 그 마스크와 몸체가 하나가 되어서 벗겨지지가 않네요. 쓸 때는 자기 맘대로 썼는데 벗겨지지가 않아요.

내가 내 능력으로, 선택으로, 결정으로 십자가를 믿으면 그것은 하나의 찹살 떡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일단 썼다가 벗을 수가 있어요. 그래도 똑같은 ‘나’지요. 그러나 십자가 마스크에 덮여버리면 이제는 누가 주도권을 쥐느냐 하면, 예수님의 피가 주도권을 쥐어버려요.

예수님의 피가 주도권을 쥐면 내가 십자가를 장착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가 나를 집어넣어버리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말씀 그대로 되어버립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십자가 믿을 때 죽은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애당초 우리가 죽은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를 알고 보니 십자가 덮이는 순간 죽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볼 때 죽은 자로 봤다는 사실을 십자가를 통해서 그 때 안 거예요. 성령을 통해서. ‘아 이미 죽었구나.’

그래서 우리나라에 신종코로나로 죽은 사람이 몇 명이고 미국은 몇 명이니 하는데 그 숫자 의미 없습니다. 인간은 코로나 안 걸려도 이미 죽은 존재에요. 그게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 모든 자가 다 죽은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여러분, 우리가 우리자신을 볼 때 죽은자로 보겠습니까? 우리 자신을 송장으로 봅니까? 그리고 제 아내가 또는 여러분의 남편이 결혼할 때 우리를 죽은 시체로 보고 결혼한 겁니까? “나 시체와 결혼한다. 너 좀비거든.” 이렇게 결혼하겠습니까? 안하지요. 물론 살다보면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이런 경우는 허다하고 갈수록 많아지지요. “꼴보기 싫으니 나가 죽어라.” 이런 일은 있지만 결혼할 때부터 나를 죽은자로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낯설어요. 굉장히 낯섭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은 어떻게 구성되느냐 하면, 창세기 22장 1-2절에 의해서 구성이 되는 겁니다. 창세기 22장 1절부터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자기자식을 죽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거예요. 아브라함은 아기를 가질 수가 없어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자식이 없으니 자식이라는 말을 떼버리면 그냥 없는 거예요. 자식이 없는데 하나님의 천사 셋이 와서 없는 자식을 만들었어요.

그러면 아브라함은 그 없는 자식을 굉장히 사랑하는 겁니다. 자식이 없다고 있게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없는데서 있게 했고 그 있는 것을 이제는 도로 없애라는 겁니다. 아브라함 손으로. 주실 때는 하나님의 손으로 주셨지만 죽일 때는 인간 아버지 네 손으로 죽이라는 겁니다.

없는데 생겼다. 좋구나, 했는데 내가 좋은 것을 내 손으로 내가 없게 만들 때 이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이미 죽어 있는 인간을 하나님이 살리는 방식에 대해서 이삭을 통해서 그걸 알려주시는 거예요. 자식이 없는데서 있고, 있는 것을 죽이시고, 그 다음 또 한 가지, 죽을 뻔 했는데, 죽어야 되는 것이 마땅한데, 죽이라고 해놓고 그 다음에 그 옆 수풀에 있는 양을 대신 바꿔치기 해서 살리는 방식이에요.

구원되는 방법이 복잡해요. “현재 있는 나를 구원해달라.” 애초부터 그 스케줄은 없어요. 하나님의 계획 속에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나 여기 살아있습니다. 건져주세요.” 그런 것은 없어요. 일단 하나님은 나를 살아 있다고 보지 않고 죽었다고 봐야 비로소 네 구원이 보인다는 겁니다. 살아있다고 한다면 주님의 스케줄이 전부 다 무효가 되어버려요.

하나님은 여기 있는 것, 내가 여기 있음을 없애버립니다. 죽어 마땅한 것으로 봐서 죽게 만들어요. 그래서 죽게 만드는 것을 어떻게 죽게 만드는가? 아브라함 같은 경우에는 원래 자식이 없어요.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은 자식으로 간주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여기 있는 것으로 간주하지를 않아요. 마치 이스마엘 같아요. 아까 제가 말씀드렸지요. 주님께서 뭔가 아니라, 할 때 남의 이야기로 흘려듣지 마시고 아니라, 하는 그 장소에 나를 꽂아 넣으세요. 어떤 이유로, 뭐 때문에 주님께서는 이 이스마엘을 아니라고 하느냐? 그 이유를 알아서 이삭의 의미도 알고 아브라함의 의미도 알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해석에서 자꾸 장애요소가 되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 아니라 하는 것을 남의 이야기로 듣는 그것이 해석에 방해가 돼요. 아니라고 할 때 그 아니라는 자리에 나를 놓으세요. 놓게 되면 왜 이스마엘은 안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어요. 이스마엘은 육에 속했기에 안돼요. 혈육에 속했기에 안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 호세아 9장 11, 12절에 보면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 가리니 해산함이나 아이 뱀이나 잉태함이 없으리라 혹 저희가 자식을 기를찌라도 내가 그 자식을 없이하여.” 혹시 자식이 있더라도 내가 그 자식을 죽인다는 겁니다. 앗수르 군대에 그 자식들이 다 몰살당하도록 내가 밀어붙이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어요. 그러나 이스마엘이라는 그 자식은 아브라함의 의사고 사라의 의사지 하나님의 의견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의견을 시도하기 전까지는 먼저 인간의 의견 “이것은 내 자식입니다.”라는 것을 치워버리는 절차입니다. “이스마엘은 내 자식입니다.” “아니야.” “이 진주는 내 딸입니다.” “아니야.” 치워버리는 거예요. 이 진주라는 어떤 사람의 딸이 있을 거예요.

그것은 내 자식이 아니에요. 그것은 이스마엘이에요. 왜? 사람은 흙에서 났어요. 육에서 난 것은 육일뿐이에요. 영으로 나야 되지 육으로 난 것은 하늘나라 못갑니다. 아무나 넣어주는 것이 아니에요. 하늘나라 못가는 이유는 처음부터 생명나무 가는 길을 끊어놨기 때문에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입장에서의 자식들은 하늘나라 못가요.

못 가는데 어떻게 하느냐? 언약으로 가는 겁니다. 언약으로 가려면 언약이 아닌 것이 뭔지를 알아야 돼요. 언약에 위배되는 것이 뭔지를 알아야 돼요. “내 딸은 내 자식이 아니다.” 치워버린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자식이 없네요. 있어요. 뭐냐? 이삭이라는 거예요. 없는데서 이삭을 줘버립니다.

그러면 ‘나는 자식을 하나 얻었구나.’ 자식을 얻은 것이 아니고 왜 이스마엘은 자식일 수 없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이삭이라는 자식을 하나님께서 친히 다루면서 나보고 죽이라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내가 내 딸을 죽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죽여요? 내 자식인데? ‘하나님이 주실 때는 영원히 가지라고 준 것인데 이걸 왜 죽이지?’ 죽일 때 네가 놓친 것이 있다는 거예요. 그냥 줬다고 해서 내 자식이 아니고 바꿔치기라는 요소가 포함이 되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 딸이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을 받아서 예수님의 몸과 같이 주님 안에서 구원받을 때 비로소 내 자식은 내 자식이 아니라 뭘 로 바뀌는가? 주님의 자녀로 바뀌는 겁니다. 주님의 자녀로 바뀌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자녀를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하, 내가 내 새끼다, 내 자식이라고 옹호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지 내 솜씨 내 능력으로 낳은 것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걸 호세아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호세아에서 에브라임, 이스라엘은 이스마엘 계통이 아닙니다. 이스마엘 계통은 모압 암몬이에요. 이삭계통이 이스라엘, 에브라임이거든요.

그런데 이삭계통인 에브라함이 뭘 놓쳤느냐 하면, 언약을 빼버렸어요. 하나님이 바꿔치기 한 그 내용을 빼먹었어요. 자기는 여호와 안다는 거예요. 이만하면 하나님의 백성이고 약속의 땅에서 사니까 이제는 되었다는 여긴 모양이지요. 그게 된 것이 아니에요. 내가 여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이 나와 함께 존재해야 돼요.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어야 그게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야 하면 바꿔치기 한 분이거든요. 아까 마스크 이야기했지요. 십자가로 인하여 십자가를 써버리면 내가 십자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 그 의미에 의해서 내가 소유당하는 겁니다. 주님을 위해서.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죽고 주님은 날마다 사는 거예요.

그게 사도바울의 편지 여러 곳에 나와 있어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고. 고린도후서 4장 10, 11절이 대표적인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를 죽을 육체로 간주한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규정해놓고 너는 죽을 육체인데 살아가는 이유가 예수님의 생명 때문에 살아간다는 겁니다. 로마서 7장에서 성령 받은 사도바울이 이런 고백합니다. “나는 선하고 싶다. 하지만 내 안에서 선보다 누가 더 우세냐? 악이 우세”하는 거예요.

성령 받은 사도가 하는 말이, 나는 선하고 싶은데 선보다 악이 더 우세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오니까, 율법이 오니까. 그럴 때 자기는 뭡니까?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라도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구원하랴. 그래놓고 돌아서서는 주 예수로 인하여 찬양한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롬 7:19-25)

매일같이 그래요. 선하고 싶어도 악이 우세해요. 나는 그 말씀을 지키고 싶어도 그 말씀을 못 지킴이 더 강렬하게 작용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사도바울이 좌절하지 않고 감사하는 것은 뭐냐? 자기자신의 솜씨가 아니라 그래야 예수 그리스도가 바깥으로 토해지기 때문에. 그래야 자기증거가 아니고 예수님 증인이 되거든요.

그렇다면 오늘 호세아 본문에서 왜 자식을 죽여 버리는가? 그것은 새로운 자녀가 어떻게 바꿔치기해서 나타나는지를 알려줄 때 비로소 너희들은 자식이 죽는 이런 시련과 고난가운데서 메시아가 우리의 영원한 아들이고 구세주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광야, 사막에서는 물이 급하지 않습니까? 물이 급한데 ‘아 물먹고 싶다.’ 할 때 포도원이 있다면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이런 식으로 나는 너를 특별대우 했다는 겁니다.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농사지으면서, 고생고생 하면서 첫 열매 맺기를 반겼다는 거예요. 그 정도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졌도다.”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그냥 우상이 아니고 사랑하는 우상같이 가증하여졌다. 이 이야기가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에브라임은 자기자식들을 앗수르에 포로 잡혀 다 죽게 만드는 계기가 되는데요. 그러면 바알브올 사건이 과연 무엇인가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약간 난해한데요.

인간의 몸은 쾌락위주기에 현재만 전부에요. 과거라 하는 것은 지나간 것이고, 미래는 오지 않았으니 현재가 중요하다고 본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옛날 지나간 이야기 바알브올사건을 계속 거론하고 내세우고 있어요. 그 이유가 뭐냐? 인간에게는 현재라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과거의 바알브올사건, 그리고 미래의 예수님의 십자가, 미래에 메시아가 십자가에 돌아가심으로서 죄씻음이 되잖아요. 과거의 바알브올사건과 미래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그 미래와 과거 사이에 빈 현재는 뭘 로 채우느냐? 주님의 언약안의 과거와 언약안의 미래를 연결시킨 주님의 현재만 연결되지 인간들의 욕망은 지난 과거와 장차의 미래를 연결시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인간이 생각하는 시간은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없는 것이고요. 인간의 시간에서 ‘미래는 있지만 그것은 기다리면 오게 되어 있고, 중요한 것은 현재가 중요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네가 없다고 여기는, 이미 지나갔다고 여기는 바알브올사건을 절대로 나는 지나간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 생생하게 살려두겠다는 겁니다.

그것은 뭐냐? 미래의 메시아 때문에. 그래서 미래에 메시아가 오시는 그것이 바알브올 사건을 전제로 해서 미래사건이 주어지는 겁니다. 미래사건은 예수님의 십자가고 십자가는 죄씻기 위해서 피 흘리는 사건이거든요. 그러면 죄가 성립되어야 돼요. 인간은 아무리 반성해도 죄를 몰라요. 미래에 과거사건의 죄가 성립되려면 하나님의 언약이 그 현장에 들이닥쳐야 그게 죄가 되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제가 지금 세 번째 이야기합니다. 성경에서 뭘 지적하거든 내 이야기 아니고 저건 나쁜 사람의 이야기라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우리는 언약 안에 못 들어가요.

바알브올 사건이 민수기 25장에 있는데 1-5절까지 보면 “이스라엘이 싯딤에 머물러 있더니 그 백성이 모압 여자들과 음행하기를 시작하니라 그 여자들이 그 신들에게 제사할 때에 백성을 청하매 백성이 먹고 그들의 신들에게 절하므로 이스라엘이 바알브올에게 부속된지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의 두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하여 여호와 앞에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여호와의 진노가 이스라엘에게서 떠나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사사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관할하는 자 중에 바알브올에게 부속한 사람들을 죽이라 하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싯딤이라는 지역은 사해북쪽에 있는 모압지역입니다. 이럴 때 ‘아 이것은 남의 이야기야. 이것은 내 이야기 아니야.’라고 빼지 마시고 왜 그들이 바알브올을 섬길 수밖에 없었는가, 라는 그것에 우리가 동조해야 돼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 따먹었을 때 ‘아이고, 그것은 과거 이야기고 나는 선악과 구경도 못했어. 얼마나 탐스러웠는지 나는 보지도 못했어.’라고 하지 마시고 그 선악과 따먹을 수밖에 없었던 그 심정, 그 마음을 우리가 같이 공감해줘야 돼요.

그게 언약 안에 있는 우리의 마음이에요. 그래서 9절에 “그 염병으로 죽은 자가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신종코로나 같아요. 2만 4천명이 전염병으로 죽었어요.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볼 때 ‘이스라엘이 우상섬기는 범죄를 해서 하나님이 죽였구나.’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고요. 절대로 성경 볼 때 그렇게 생각하시면 안돼요. ‘왜 그들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는 것을 왜 굳이 그들은 우상을 섬겼느냐?’ 그 마음씨를 이해를 해줘야 돼요.

왜? 그들도 아담후손이고 우리도 아담후손인데 공통점이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그래야 성경이 해석이 됩니다. 왜 그들을 죽였느냐? 그건 제가 언급을 했어요.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살려주시고 애굽에서 나오게 하시고, 광야에서 먹을 것 주셨다.” 아무리 이야기해도요 그것은 지나간 과거입니다. 인간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아요. 인간은 현재, 현재, 현재만 보고 살아갑니다.

현재에 마음 당기는 대로 살아간다고요. 과거에 결혼할 때 무슨 약속을 해도 그것은 과거고 지금 당신과 나는 어떤 사이냐, 그게 인간에게 확 다가오는 겁니다. 지금 현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이 70이 될 때까지 나는 한 여자만 바라보고 바람피운 적이 없다.”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아직 안 죽었어요. 아직 80이 남았고, 90이 남았어요. 장담하면 안 된다니까요. 과거에 뭘 안했던 지금 뭘 하고 있는가가 중요해요. 지금 어떤 마음인가? 그 마음은 본인이 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정해요. 인간이 죽는 이유는 다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바로 죄값으로 죽습니다.

그렇다면 나이 70이든, 80이 되든 십계명에 나와 있는 모든 말씀은 우리에게 이미 그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 우리의 벌은 ‘죄 값으로 죽는다’가 확정된 입장에서 이미 죽어야 될 인간으로서 남아 있는 것은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내가 하나님 앞에 처벌받는가?’ 하는 그 문제만 남은 겁니다.

그걸 시범조로 누가 보여주느냐?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이 민수기 25장에서 우상을 섬기면서 우리의 속에 있는 마음가짐을 대변해서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은 사람이 무려 2만 4천명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음행을 하고 우상숭배 할 때에 거기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더 이상해요. ‘같은 인간인데 그 좋은 것을 왜 안 해?’ 그들이 그런 짓을 한 것은 좋아서 한 거예요.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그 마음가짐이 확 다가와서 그런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왜 우상을 섬겼는가? 그리고 그 우상에는 뭐가 없는가? 우상은 “너는 지금 살아 있다”고 지적해주기 때문입니다. 우상의 특징은 언약이 없어요. 언약은 뭐냐? 너는 죽은 자인데 내가 너를 매일같이 살려낸다는 것이 언약이거든요.

그런데 우상에는 뭐가 없느냐? “너는 죽을 필요 없어. 너는 당당하게 살아 있어. 따라서 살아있기에 너 원하는 대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돼.” 살아 있다는 거예요. 육이 살아 있으니까 육이 살아 있는 인간을 송장이나 시체라고 하면 기분 나쁘잖아요. 우상은 그 당시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한 거예요. 인간을 기분 좋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뭘까요? “당신은 살아 있습니다.” 그게 가장 기분 좋아요.

사도바울처럼 “당신은 죽었고 당신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습니다.” 그게 우리를 기분 좋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성령 받은 사람에 한하는 이야기에요. 성령이 오기 전까지 구약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것은 뭐냐? 누가 옆에서 나를 보고 “대단합니다. 대단해요. 훌륭해요. 정말 인물 좋습니다. 정말 말씀도 왜 그렇게 잘하시는지. 아멘, 아멘.”

그래서 내가 아멘,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 만희 무리처럼 하지 말라고. “당신 없으면 주의 일 안 됩니다. 당신을 보내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주 넘어뜨리려고 환장을 했어요. 주께서 택한 백성, 저와 여러분 아니면 택한 백성 구원 안 됩니까? 우리는 언약적으로 이스마엘이에요. 죽어 마땅합니다. 육이에요.

따라서 우리는 무능해요. 무능하기 때문에 죄짓는 것도 당연하고 죽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무능하고, 아무것도 아니고, 송장이고, 그냥 시신에 불과한 거예요. 에스겔 37장처럼 하나님께서 뼈에게 말씀을 주심으로서 살아났지 말씀 없으면 죽은 자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상은 그 요소가 없어요. 언약적요소가 없어요. 아브라함에게 네 자식을 바치라는, 죽음을 통해서 나를 다시 재조명하는 것이 없어요. 살아있기에 살아 있는 그 인간들이, 당신은 훌륭하게 살아 있다고 자꾸 하는 거예요. 죽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사람 손에 맞아죽은 그 예수님이, 너는 어떤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그런 요소가 가짜 신에게는 없다니까요.

십자가가 빠져버린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불교에요. 십자가를 과거로 돌려버리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에요. 마스크 못 벗는다 했잖아요. 그냥 찹쌀 떡 하나 입에 물고 달려가면 되는 그런 것은 없어요.

빌립보서 3장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하든지 십자가로 달려간다. 왜? 십자가에 있어야 부활이 되니까. 십자가를 벗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에 있어줘야 매일같이 주님은 긍휼을 베푸시는 분이고 매일같이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해주시는 분이에요. 그리고 나는, 주께서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그 죄인과 짝이 맞아줘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만 증거되고 자랑하게 됩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언약을 알기는 알았는데 언약의 깊이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살아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의 신은 죽은 신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사건을 시편 106편 28, 29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저희가 또 바알브올과 연합하여 죽은 자에게 제사한 음식을 먹어서 그 행위로 주를 격노케 함을 인하여 재앙이 그 중에 유행하였도다.” 이 말을 쉽게 하면 그들은 언약이 없는 신을 좋아했다는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빠진 신, 아브라함을 대신해서 이삭이 희생되었다는,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서 자식이 희생된 그 내용이 빠져 있는 신 십자가 없는 신, 그 신이 바로 우상입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십자가만 자랑한다 했어요.

고린도전서 2장 2절에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갈라디아서 6장 14절에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는 말이 뭐겠어요?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것은 그 앞에서 쓸모없는 인간을 천국백성 만들어내는 부지런한 작업에 대해서 내 노력과는 견주지 못하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행동 자체를 교만하다고 본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에 11절에 나옵니다. “에브라임의 영광이 새 같이 날아가리니” 없어져버려요. 13절에 “에브라임은 아름다운 곳에 심긴 두로와 같으나”

두로라 하는 것은 섬이 있고 섬 안에 성채가 있어서 거기만 특별한 대우를 받는 듯이 아름다워요. 그런데 두로 같이 특별대우를 해줬건만 “그 자식들을 살인하는 자에게로 끌어내리로다.” 내 자식 죽여 주세요, 하고 내어준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언약이 없기 때문에. 구약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이렇게 냉혹하게 죄를 율법으로 지적하는 것이 언약이라면 언약의 완성은 뭐냐? 십자가입니다.

죽어 마땅한 너희들을 내가 대신 피 흘림으로 살려냈다는 미래의 그 메시아의 언약을 위해서, 그 언약과 연결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망가져야 되지요. 그 망가진 이스라엘이 남의 이야기입니까? 오늘날 우리 이야기에요.

우리가 기쁘고 감사한 것은, 나 자신이 대단하다가 아니라 나 자신이 지금이라도 유혹 받으면, 지금이라도 누가 붕붕 띄워주고 주의 종이라고 하면 껌뻑 넘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요소가 지금은 없습니다만 내년이 되고, 또 70 넘고, 99세 되면 어떤 마음가짐이겠어요? 아무도 장담 못해요. 아담의 육이기 때문에.

따라서 자신만만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날마다 저 낮은 곳으로 주께서 주신 인생을 통해서 에브라임이 작살나는 그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내 이야기이며, 내 자식도 죽어 마땅하다는 것이 호세아의 예언에 합치되는 결과라는 겁니다.

날마다 우리가 내 자식 살려달라고 하지 말고, 내 자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발산되고 예수님의 광채가 비취게 해달라고, 복음이 나올 수 있는 식구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너무 좋게 평가했습니다. 십자가지신 주님께서 이 세상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느냐를 말씀을 통해서, 호세아의 언약을 통해서 알았사오니 그저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용서만 자랑스럽게 기쁘게 나타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