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9:1-5 / 사랑의 현재성

정인순 2020. 3. 25.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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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현재성 


이근호
2020년 3월 25일                 



본문 말씀: 호세아 9:1-5

(9:1)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 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였느니라

(9:2) 타작 마당이나 술 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9:3)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9:4)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여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무릇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저희의 식물은 자기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9:5) 너희가 명절일과 여호와의 절일에 무엇을 하겠느냐

사람이 아무리 자신을 살피고 연구해도 진정 죄인임에 대해서 납득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악한 것을 생각해도 그 순간에는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점에서 인간은 여전히 바탕은 선한 자라고 자처하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무리 지적질 하셔도 이스라엘은 이 지적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즉 우리네 인생의 살면서 자신에 대해서 그다지 나쁘다는 생각을 못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펴게 되면 하나님의 비난은 과도하게 심하게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빠졌으며 무엇이 문제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행음했다고 되어 있고, 음행의 값을 좋아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평가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일단 자신이 먼저 있고 그 다음의 하나님의 지적을 분석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이러합니다. 간음과 음행이 성립되려면 사랑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랑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하나님의 말씀대로 열심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시도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못 느끼고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언제 저희들을 사랑했습니까? 저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상대로 사랑하시는 것은 이스라엘이 있기 먼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즉 하나님의 율법이 등장되려면, 다른 동물과는 달리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대들고 반항할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 반영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간음’이요 ‘음행’입니다. 야고보서 4:4에서는 ‘세상과 벗이 되려는 시도’가 간음입니다. 이는 바로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이 세상에 나타나야 하는 이스라엘의 역할이 바로 이런 겁니다.

숨겨진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음행한 자, 간음한 자로 지칭됩니다. 위반을 위해 실체를 드러내는 방식을 채택합니다. 그런데 이 사랑과 미움이라는 이 속성은 영구적입니다. 이들 속성의 영구성을 위하여 인간은 놀랍게도 영원히 죽을 수가 없는 존재들입니다.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을 측정하고 주변 인간들을 측정해서 내린 결론이, “적당히 살다 죽으면 그만이다”고 합니다. 하지만 요한복음 5:28-29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그 분의 부활로 인하여 이 모든 인간들은 안 죽게 되었습니다. 영원히 저주받은 것이 진정한 ‘죽음 개념’의 진수입니다. 즉 자신이 죄 안 지고 있다고 우기는 모든 인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저주의 선재성’에 의해서 모든 개념을 새롭게 정립하십니다.

이렇게 되면, 인간들 자신을 최종 의미 마감으로 여기면서 수립한 모든 개념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율법 완성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에 위배하도록 몰아세우십니다. 그들이 섬김 바알 신은, 대자연을 인격화한 겁니다. 호세아 2:5에 보면,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알신은 대자연의 자연스러운 변화를 내용으로 합니다. 겨울되면 죽었던 작물들이 봄되면 새싹이 올라옵니다. 바로 이러한 영원한 순환에 대해서 인간들은 자신의 영역까지 대자연의 변화에 흡수시킵니다. 왜냐하면 인체의 순환 또한 대자연의 순환과 함께 섞여서 돌아가는 것이 가장 합당하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추구 때가 되면 수확물을 가지고 바알에게 제사를 올립니다. 이는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성의를 표하는 것처럼 대자연의 신인 바알신에게도 그런 식으로 잘보이면 내년에서 풍성한 수확을 제공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겁니다. 이처럼 인간에게 가장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여겨지는 것을 대자연의 질서를 설정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러한 의식은 출애굽기 20:4-5에서 우상이 되는 겁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즉 하나님께서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나타나므로서 벌써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만들었음을 언급하시고 또한 그들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아시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숨겨진 사랑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법의 위반형식으로 나타납니다. 호세아 계시는 호세아 선지자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고멜이라는 음란한 여인과 혼인해서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습니다. 둘째 딸의 이름은 ‘로-루하마’입니다. 셋째 아들의 이름은 ‘로-암미’입니다. ‘로루하마’라는 말은 긍휼을 입지 못한다는 뜻이요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다는 말입니다. 즉 자식을 낳기 전에 어미 내면에 이런 위반성이 담겨 있다가 실제 자식으로 태어난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긍휼함이 없는’ 자식이 ‘긍휼함을 받는 자’가 되면, ‘내 백성이 아닌 자’가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어떤 방식으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호세아 6:1-2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사랑의 선재성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따라서 내 쪽이 보여줄 것은 우리가 율법의 위반자라는 점을 사랑 앞에서 고백하는 겁니다. 바로 이 실재성만이 유일한 현실입니다. 나머지는 다 꿈입니다. 우상인 우리 자신이 꾸는 꿈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위주로 하는 신앙생활 자체가 곧 우상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4강-호 9장 1-4절(사랑의 현재성)2003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9장 1절에서 4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3페이지입니다.

호세아 9:1-4

“이스라엘아 너는 이방 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네가 행음하여 네 하나님을 떠나고 각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 하였느니라 타작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저희가 여호와의 땅에 거하지 못하며 에브라임이 애굽으로 다시 가고 앗수르에서 더러운 것을 먹을 것이니라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무릇 그것을 먹는 자는 더러워지나니 저희의 식물은 자기 먹기에만 소용될 뿐이라 여호와의 집에 드릴 것이 아님이니라.”

호세아의 말씀에 의하면 이상하게 이스라엘이 나쁜 짓을 한 것처럼 그렇게 느껴지게 될 겁니다. 그런데 이 나쁜 짓이라 하는 것은, 누가 누구보고 지적하느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보고 나쁜 짓이라고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만약에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안 믿는 사람이라면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굳이 내가 왜 죄인인가?’ 라는 생각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사는 이것이 죄입니까? 그렇게 나쁜 짓이에요? 내 스스로 내가 나쁜 사람이다, 나쁜 짓을 했다는 것을 찾는다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 힘으로 우리가 죄인 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쁜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나쁜 짓과 옳은 짓을 본인이 알고 있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번에 나쁜 짓을 했더라도 다음에 착한 일을 하면 되거든요.

그러면 나쁜 사람 되었다가 다시 착한 사람 되면 되기에 영원토록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 우리가 나쁜 짓만 한다는 인식은 우리한테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호세아본문을 보면서 ‘그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못 살아서 이스라엘이 욕 얻어먹는 것처럼 우리도 욕 얻어먹어도 마땅해.’ 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고 회개하고 반성을 합니다.

선지자를 통해서 지적한 것처럼 “저희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하고 막 엎드리지요. “죄송해요. 하나님, 미안해요 하나님!” 하면서 회개를 하는데 우리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주님께서 그 참회와 회개와 반성을 듣고 하시는 말씀이 “너, 내가 호구로 보이지? 내가 그리 만만해? 내가 물로 보이냐?”

너희가 참회하고 회개하고 반성하는 것, 눈물 줄줄 흘리면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이야기하면서 엎드릴 때는 눈물 콧물 막 쏟아내는데 얼굴 들 때는 히죽거리면서 다시 얼굴을 들 수밖에 없지요. 나 이제 회개했으니까 천당 간다고. 그렇게 뻔뻔스러운 낯짝을 드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가 말씀합니다. 인간은 아무리 살펴도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뭘 해도 죄인이 아니에요. n방 아니라 n의 제곱방을 해도, 어떤 짓을 해도 우리는 절대로 자기의 죄를 모르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아무리 하나님이 지적해도 이것 헛방입니다. 인간은 지적당할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도대체 뭘 보고 그렇게 지적을 하는지, 뭐 때문에 그렇게 구박을 하고 화를 내는지 하나님이 화내는 이유도 몰라요. 하나님조차 혼자서 열을 내시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스라엘아, 라고 하면서 뭐라고 하느냐? 너는 나를 배신했다는 겁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하나님이 배신했다고 하는 겁니다.

배신이 성립되려면 그 전에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을 사랑했다는 증거가 있어야 돼요. “사랑했는데 너는 왜 다른 신을 섬겼느냐? 왜 배신 때렸느냐?” 이게 성립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받은 적이 없는데요? 이게 오늘날 교인들의 문제 아닙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면 “예, 사랑할게요.” “사랑하라니까!” “사랑하고 있다니까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언제 사랑했습니까? 하나님이 벌금 대신 내 줬습니까? 언제 사랑했어요? 사랑한 적이 없다니까요. 인간이 인간을 사랑한 적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한 적도 없어요. 사랑을 해야 그 사랑을 알고 네 사랑을 차버리겠다고 하는데 받은 것도 없는데 “난 하나님이 싫어.” 할 그것이 뭐가 있어요? 나는 나름대로 내 인생 살 뿐인데요.

설교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우리가 이 땅에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게, 이게 무슨 죄가 되느냐는 거지요. 아무리 봐도 죄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배신했다는 말을 본문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1절에 행음했다고 되어 있고, 음행의 값을 좋아했다고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간음했다, 행음했다는 그 말은 하나님 보시기에 이렇습니다. 참 저질이고, 지저분하고, 토해내치고 싶고, 퇴폐적이라는 그런 뜻이거든요. 이 간음이라는 의미를 신약 야고보서에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장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4절에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저질스럽게 토해내치고 싶고 구역질난다는 것은, 세상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을 좋아하고 선호할 때 이것을 간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이스라엘백성에게 행음했다, 간음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랑한 적이 없어요. 사랑했다는 기억이 없습니다. 받은 경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배신해도 배신인줄 모르고, 세상 것을 사랑해도 그것이 간음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뭐냐? 이미 자신들이, 자기들이 있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가 자각되고 의식되니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없을 때에 사랑이 있음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증거물로 이스라엘을 만든 거예요.

이스라엘을 만들고 사랑하라, 가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존재보다, 있음보다 사랑이 먼저 우선되었던 겁니다.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만든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이 다른 신을 섬기면 “너 사랑을 버렸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내가 잘못한 것 그 선에서 멈춰요. 아무리 봐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없다는 거기까지 나아가지를 못해요. 내가 없을 때 사랑이 먼저 있다는 생각을 못하는 겁니다.

로마서 9장, 그 유명한, 믿기 힘들다는 로마서 9장.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사랑이 먼저 있었거든요. 야곱이 태어나기 전에 사랑이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야곱이 먼저 태어난 거예요.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롬 9:11-13)

그런데 야곱이 하나님을 사랑한답시고 본인의 어떤 행위나 언동가지고 “하나님 사랑한 것 맞지요?” 하고 따진다면 아무리 해도 그게 사랑일 수 없고, 그것이 배신일수가 없는 거예요. 더 어렵게 할까요? 더 어렵게 합시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인간의 대표로 삼으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배신할 수 있고, 배반할 수 있다는, 반항할 수 있다는 그 점이 그리스도 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는 겁니다. 개나 소나 하나님께 반항 못해요. 인간만이 반항할 수 있다는 이 점이 숨겨진 사랑과 숨겨진 저주가 나오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더 나아가면 인간은 절대로 죽을 없는 존재가 돼요. 인간은 죽을 수 없는 존재에요. 요한복음 5장 28절에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인간은 죽을 수 없다는 이것이 얼마나 기이한지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인간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는 거예요. 인간은 죽었다고 좋아들 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죽었다고 좋아들 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살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율법의 영원함이고 복음의 영원함이에요. 예수님의 영원함을 위해서, 십자가 부활로 주님의 영원함이 설정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준해서 피조물도 영원히 죽을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미치는 짓이에요, 이것은! 지옥가도 죽으면 돼요. 그런데 지옥가도 안 죽어요. 구더기도 안 죽어요. 벌레 한 마리도 안 죽습니다. 미치고 환장할 지경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왜 자살하는지 알아요? 꿈을 꾸기 때문에 자살하는 거예요. 꿈에서 깬 사람은 절대로 자살 안합니다. 자살한다는 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그것이 현실인줄 알고 있어요. 그게 꿈인데. 이 현실이라는 것이 꿈에 불과하거든요. 꿈인데 현실인 줄 알고 일이 잘 안되고 꼬이니까 죽어버리는 거예요.

죽으면 죽을 수 있습니까? 인간은 못 죽어요. 왜냐하면 율법이 영원하고 예수님이 영원하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어요. 인간은 왜 못 죽느냐? 용도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속성, 저주와 축복이라는 그 속성을 위해서 인간은 자기가 골백번 죽고 싶어도 안 죽습니다. 자살해도 안죽고 밟아도 안죽고.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는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율법에 준해서 새로운 의미로서의 죽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저주를 의미하는 겁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은 뭐냐? 율법이 주어짐으로 말미암아 모든 개념이 율법의 영원성에 준해서 새롭게 정립되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이 이스라엘, 또는 에브라임이죠, 3절에 에브라임으로 되어 있으니까, 그 에브라임 땅, 그리고 여호와의 땅, 더러운 것, 4절에 나오는 전제, 제물, 이 모든 이야기, 이 모든 개념, 행음, 간음, 이방사람, 이런 것은 율법이 이스라엘보다 먼저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또 하나님의 미움이 인간보다, 이스라엘보다 먼저 있었다. 그래서 그 영원히 있었음의 가치를 위하여 이스라엘과 이방사람들이 있어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율법과 말씀을 이스라엘에게 전한 이유가 뭐냐? 하나님께서는, 장래의 것이 전에 있었으니 그 옛것을 다시 찾느니라, 라고 되어 있어요. “이제 있는 것이 옛적에 있었고 장래에 있을 것도 옛적에 있었나니 하나님은 이미 지난 것을 다시 찾으시느니라.”(전 3:15) 장래에 있는 것이 사실은 장래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옛것에 있었는데 장래는 그 옛것을 다시 찾는 식으로 현재에 적용시키는 겁니다.

옛것의 아주 간단한 예는 4절에 보면 나오지요.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그리고 그 앞에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전제라는 것은 민수기 28장 8절에도 있고 여기 ‘거상’이라는 것, 상가집에 들른 사람은 일주일동안 자가 격리해야 돼요. 신종코로나 같아요. 상가집에 간사람, 죽음과 접촉한 사람은 일주일 후에 바깥활동을 해야 부정 타는 것이 감염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인간의 죽음조차도 개인이 죽었다, 슬프다, 가 아니라 그 죽음조차 율법이 어떤 내용인가를 시그널로, 알려주기 위해서 어떤 이들은 죽어야 되고, 어떤 이들은 출생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철저하게 이스라엘 자체는 인류를 대표해서 율법의 내용이 어떻게 반복적으로 이 영원세계까지 전달되는가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알려주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에 있어서 간음했다는 것은 뭐냐? 내가 너를 사랑한 적이 있었다는 거예요. 사랑한 적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이 뭔지, 전에 뭘 사랑했다는 것인지 전혀 납득이 안 되지요. 어떻게 사랑했느냐 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신을 섬길 그 때 하나님이 질투하심으로 나타나면서 ‘아,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사실을 확인케 하는 겁니다. 옛것이 반복되니까.

이스라엘 초반기에 출애굽기 20장 4절부터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전에도 설명했지만 설명이 좀 필요하겠지요. 우상이라는 것이 나를 위해서(for me), 뭐든지 나를 위한 우상이에요. 의미가 좀 담겨 있어요. 일단 읽어보겠습니다.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질투한다는 말을 했어요. 질투한다는 것은 특이점이에요. 특이점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을 다 내가 사랑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랑자체가 특이한 거예요. 결혼할 때 보통 사랑해서 결혼한다 하잖아요. 기본적으로는 사랑해서 결혼하는 거예요. 그런데 사랑은 아무 이유가 없어요. 그리고 조건을 초월합니다. 조건 따져서 사랑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에요.

총각 처녀들이 여기 앉아 있지만, 결혼할 때, 남자들이, 아가씨가 공직에 있고, 약사쯤 된다고 해서 조건보고 결혼하지 마세요. 그런 조건도 자기조건이 될 때 넘볼 수 있지만. 저 사람과 결혼하면 어떤 경제적인 이익을 보겠다든지, 재벌끼리 정략적인 결혼을 한다든지, 그런 짓은 해서는 안돼요. 사랑으로 해야 되는데, ‘이 사랑은 한 15년 갈걸?’ 그런 것도 조건이에요. 사랑은 순간적으로 빵, 하고 터지는 겁니다. 그냥 빵 하고 터지는 거예요. 앞 뒤 없어요. 그냥 터져 나오는 거예요.

사랑의 특징은 조건이 없는 거예요. 그걸 특이점이라, 또는 특이성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랑을 해봐야 뭘 알죠. 사랑의 특징은 모든 변화의 고정점을 찍는 거예요. 인간은 가만 놔두면 모든 것이 흘러가거든요. 시간이든 공간이든 흘러가거든요. 그런데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해버리면 당신과 함께 있음, 그리고 내일은 없어요. 그리고 큰 집 넓은 집도 필요 없어요.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음. 그걸로 끝이에요. The end.

그걸로 끝입니다. 당신과 함께 있음, 그걸로 끝이에요. 이게 원래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 창세기 28장 16절에 야곱이 형을 피해서 외가집으로 도망치고 있는데 그 때 하나님이 갑자기 꿈에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내려옵니다. 천사가 내려와서 계시를 할 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야곱이 잠이 깨어 가로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 그게 사랑이거든요.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신다. 여기 계신다는 현재성, 여호와의 현재성이에요. 그게 신종코로나 한 복판이라도 괜찮아요. 대구 동산병원한복판이어도 괜찮고, 청도대남병원 한복판이라도 상관없어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사랑이 있는 곳이고 그걸로 족해요. 그걸로 끝났습니다.

배신이 뭐냐 하면, 거기서 두리번거릴 때 배신이 성립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여기 있음, 그 현재성에서 딴 생각 품을 때, ‘내일은 복 주시렵니까?’ 라든지, 또는 ‘내가 미국 가서 살면 인생 잘 풀리게 해주시겠습니까?’라는 그런 것 있잖아요. 그것, 간음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반항하기 때문에, 사랑을 훼방하기 때문에, 방해하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의 특이점을 방해할 때 전부 다 간음이 되어버려요. 이미 주신 사랑은 네가 두리번 거릴 하등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나를 위한 나가 아니고 그분, 그 사랑을 위해서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이 여기 있음을 위하여 내가 있다는 것, 그래서 성도가 있거든요. 그게 언약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인간적인 삶에서 제일 좋은 것은요. 어느 날 갑자기 ‘주님이 여기 계시는구나.’ 그래서 마태복음 17장에서 베드로처럼 여기가 좋사오니, 그런 말을 하고 그냥 죽으면 돼요. 죽으면 된다고요. 마태복음 17장 4절에서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했잖아요. 그런데 마태복음 26장 74절에 보면 베드로가 뭐라고 하느냐? 나 저사람 저주한다고 했어요.

너무 오래 살아서 문제가 된 거예요. 차라리 그 때,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할 그 때의 주님의 현재성으로 땡, 치고 the end, 끝나면 돼요. 베드로 개인적 입장에서는 그 산위에서 내려오지 말고 그냥 굶어죽으면 돼요. 산에서 괜히 내려왔어요. 괜히 내려와서 베드로 입에서 딴 소리가 나오도록 만들었습니다. “나 저 예수 저주한다.” 마태복음 26장 74절에 보면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사랑이 없어졌네요. 사랑이 없어져 버리면 본인이 우상이 돼요. 왜냐하면 ‘내가 당신을 위하여(for you), 주님을 위하여, 그 사랑을 위하여’가 끊어져 버렸으니까 남는 것은 뭐냐? 나를 위하여. 이게 바로 간음이에요. 그걸 간음이라고 출애굽기 20장에서는 그걸 가지고 우상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너를 위하여 신을 섬기지 말라고.

오늘 본문 9장 2절에 “타작마당이나 술틀이 저희를 기르지 못할 것이며 새포도주도 떨어질 것이요.” 이렇게 죽 나오는데 그것은 호세아 2장 5절에서 13절의 내용을 그대로 되풀이한 거예요. 호세아 2장 5절에 보면 “저희의 어미는 행음하였고 저희를 배었던 자가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대저 저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연애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저희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느니라.”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세상에 for you,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이 없어진 거예요. 없어지니까 뭐가 없어지는가 하면, 내가 죄 지었다는 것을 아무리 찾아도 죄지은 이유를 몰라요. 사랑이 먼저 선행해야 내가 배신자가 되고 반항자가 되는데 나는 나에게 충실했다는 말이지요. 오늘날 현대인이 다 그렇잖아요. 자기 일에는 되게 충실하잖아요. 자기 일에 충실한데, 나에게 충실한 이것도 하자가 되고 이것도 잘못이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오히려 따질 거예요.

‘나는 한평생 열심히 날 위해 살았는데 이것도 문제가 된다면 나 어쩌라고?’ 이렇게 나올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바알이라는 우상이 성립이 되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좀 난해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크게 난해한 것은 아니에요. 인간은 본인이 고정점이 되어버리면 주변에 있는 대자연은 살아 있고 변화하는 것으로 보여요.

자연이 살아 있어요. 자연이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그 자연의 변화를, 자기 자신이 중심에 있으니까 내가 그 자연의 질서 같은 것, 이런 원칙 같은 것을 본인이 파악을 해야 대처가 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이 자연의 살아 있는 순환구조를 어디서 찾느냐 하면, 인체의 순환구조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의 인간이 먹고, 마시고, 살고, 태어나고, 죽고 하잖아요. ‘나도 자연의 일부다.’ 다시 말해서 ‘나에게 일어나는 일의 순환이 곧 자연의 순환이 될 것이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삯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부활로 보고, 겨울에 죽지만 봄이 되면 부활한다. 이 신을 무슨 신이라고 하느냐? 이걸 바알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신이 있어서 자연을 변화시키고 순환시키듯이 그 자연중의 하나인 나도 변화되고 순환된다는 겁니다. 이것은 대자연에 인격을 부여하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나에 대해서 파악하는 것과 자연 파악하는 것이 수월하기 때문에 그래요. 대자연의 움직임과 내가 살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과 같이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것이 수월합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땅에 가게 되면 그 땅의 신에게 잘 하지요. 신을 섬길 때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어른을 섬길 때 맛있는 것을 주잖아요. 옛날 고대인들도 어느 땅에 가면 그 땅의 신에게 맛있는 것을 줘요. 그런데 그 신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의 조상신이 발달해서, 조상신이 내용이 좀 깊어져서 그 땅, 그 지역의 신이 되는 겁니다. 절대자가 되는 거예요. 죽은 조상신과 연계되어 있다는 겁니다.

사람이 죽으면 조상이 되거든요. 그 조상이 잘 봐주게 되면 우리 후손도 잘되고. 그처럼 자연은 옛날부터 하등 모순점이 없어요. 인류역사의 문화인류학적인 공부를 좀 해보면, 인간들은 자연을 아주 편하게, 그렇게 골치 썩지 않고 흐름대로 잘 섬겼어요. 그렇게 잘 섬긴 것이 조상숭배, 제사입니다.

어떤 사람이 방송에 나와서 이런 소리 하거든요. “여러분, 제사 안 드릴 수 있어요? 어떻게 며느리가 제사에 참석을 안합니까?” 거기 나온 패널들을 향해서 자기의견에 동조하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떻게 며느리가 그 귀한 제사, 그것도 일 년에 세 번밖에 안 되는 제사에 왜 빠집니까? 그것은 며느리 노릇을 못하는 거지요. 그렇지요? 그렇지요?”라고 이만기가 계속해서 동조하라는 듯이 발언했어요. 거기에 기독교인들도 있는데 그것은 무시하고 계속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야 설명이 되니까. 내가 여기에 있는 것, 내가 살아 있는 것은, 자연이 살아 있는 것이 정당한 것처럼 자연의 일부인 나도 여기 있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내 앞으로의 운명은 그렇게 된다는 거지요. ‘죽고 난 뒤에 조상은 살아 있듯이 내가 죽으면 내 후손들이 날 섬길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가 죄지었다는 것이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자연 따라 사는 그게 뭐가 나쁩니까? 자연이 흘러가는 대로. 자연 따로 나 따로가 아니거든요. 내가 돛대가 아니니까. 내가 자연의 일부지 아주 특이한 존재가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죽으면 흙으로 돌아간다. 얼마나 자연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당신이 죄인이오.” 하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율법은 어떠냐? 호세아 자체가 호세아 가정이야기입니다. 호세아 자기 집안이야기에요. 호세아 집안 이야기를 통해서 율법은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가?

호세아 9장 오늘 본문을 봅시다. “저희가 여호와께 전제를 드리지 못하며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바도 되지 못할 것이라 저희의 제물은 거상 입은 자의 식물과 같아서” 자, 하나님의 제사에 대해서, 제사 자체가 율법이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나 율법에 대해서 이스라엘사람들이 거기에 관여하지 못한다는 거예요. 너희들은 제사에 들어가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우상을 섬기면.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 입장에서는 우상을 섬기기 때문에, 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서 뭘 보여주는가? 우상을 섬김 때는 어떻게 되며, 우상을 안 섬기고 정상적일 때는 어떻게 되느냐를, 두 가지의 양면을 다 보여주는 역할을 하라고 이스라엘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중에 누가 있느냐 하면, 호세아 가정이 있는 거예요.

호세아가정에서 율법은 어떻게 성취되는가? 그것은 자식을 낳아봐야 된다는 겁니다. 호세아는 인간의 내면 안에 들어 있는 것, 자기가 죄 아니라고 하니까, 하나님 보시기에 그 안에 죄가 들어 있는데 자기는 죄인 줄 모르겠는 거예요. 자연스럽게 살았기 때문에. 그러면 자식을 낳아보게 되면 자식이라는 것은 내면적인 것이 외형으로 튀어나왔잖아요.

그래서 호세아 1장으로 다시 돌아가 보면,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여자를 통해서 아들 둘 딸 하나를 낳습니다. 첫째는 아들, 둘째는 딸, 세 번째는 아들이 돼요. 첫째는 아들, 이스르엘. 흩어질 것이다. 두 번째는 딸, 그 이름이 로루하마. ‘로’ 아니라는 뜻이고, ‘루하마’는 긍휼을 입는다. 딸을 낳았는데 긍휼을 입지 못하는 딸을 낳아요.

세 번째는 아들을 낳는데 ‘로암미’ ‘암미’라는 것은 내 백성이라는 뜻인데 ‘로’(아니다) 했으니까 내 백성 아닌 아들을 낳아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면, 호세아 가정을 통해서 율법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 나타날 때 지금 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한다, 라는 백성을 호세아 몸의 자손을 통해서 잉태케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일반사람들이 대자연을 보면서 그들에게는 대자연이 신이에요. 대자연이 신이고 대자연의 원칙과 원리에 의해서 자기 자신의 신체에서 나오는 행동, 좋은 분에게 뇌물을 바치고 제사를 바치고 경건하게 하면서 “이러면 기쁘시겠지요, 신이시여! 이러면 우리의 소원을 들어주겠지요, 신이시여! 당신이 신이며 어떤 원칙으로 일한다는 것은 우리가 대자연을 통해서 빠삭하게 꿰뚫고 있으니 다음에 농사지을 때 제대로 비 오게 해주시고 그래서 곡식이 나오고 포도주가 나온다면 그걸 아낌없이 일부 떼어서 당신 몫으로 드리겠습니다. 오 신이시여! 우리와 친하게 이대로 평화롭게 살아갑시다.” 하는 것이 인간들의 우상입니다.

자기위주거든요. 자기신체에서 일어나는 변화, 자기가 무엇을 안다는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자연을 빌어서 자기가 우상신을 만드는 거지요. 우상이라 하는 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신이 있는 거예요.

그러나 숨겨진 진짜 하나님의 신은 뭐냐? 호세아 가정에 자식새끼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거예요. 율법이 인격화 될 때 율법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인간의 아이디어에서는 상상도 못한 거지요. 하나님의 법에서 그들은 제사만 드리면 되는지 알았어요.

마치 기존의 신에게 제사 드렸으니 우리도 여호와께 제사 드리고 예배드리면 된다고 생각했지 내 몸에서 태어난 내 자식이 하나님께 제거되고 잘려서 하나님께 버림받는 자식이 될 줄을 몰랐지요. 왜? 내 내면 자체가 하나님께서 받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을 입지 못하는 자식이 내 안에 있다는 말은, 비로소 자식을 낳아볼 때 나는 하나님 앞에 잘린 사람이라, 하나님의 율법으로 볼 때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겁니다. 그게 호세아에요.

호세아 그 가정을 통해서 그 특이성이 드디어 윤곽을 드러내는 겁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알지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나이까” 어떤 긍휼도 없고, 어떤 자비도 없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언질도 없고 그냥 저주받으신 거예요.

갈라디아서 3장에 보면 예수님은 저주받으신 겁니다. 저주는 어느 경우에 받느냐 하면, 율법에 위반했을 때나 저주를 받아요. 이게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영원히 지옥 가서 천국 못 갔습니까?”라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사랑과 저주,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대표해서 저주가 무엇이며, 죽음이 무엇이며, 심판이 무엇인가를 예수님이 대신해서 보여준 거예요.

마치 그 당시 호세아를 통해서 자식을 낳았는데 그 자식이 하나님 앞에 긍휼을 입지 못하는 자식을 낳고, 내 백성 아니라는 자식을 낳듯이 율법은 이 땅에 자손을 통해서, 실제로 어떤 인물을 통해서 드러나는 놀라운 기적적인 사태가 호세아가정에 나타난 겁니다.

그런데 호세아 가정에서 이렇게 자식을 낳았다는 말이지요. 로루하마, 딸이고요, 로암미, 아들이에요. 그런데 호세아 2장 1절에 “너희 형제에게는 암미라 하고 너희 자매에게는 루하마라 하라.” ‘로루하마’가 아니고 ‘루하마’에요.

그러니까 이 말은 뭐냐? 하나님께서 내 백성 아니다, 그리고 긍휼함을 입지 못한다고 해놓고서는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긍휼을 주셔서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시고, 2장 1절에서 ‘암미’라 하고, 내 백성이라 하고, 또 ‘루하마’라고, 긍휼을 입은 자라고 전환시키는 거예요.

분명히 아기 낳을 때는 긍휼함이 없어요. 그리고 아들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것은 뭐냐? 인간들이 아무리 살펴도 인간들은 자기 잘못, 죄를 알지를 못하는 겁니다. 인간은 자기 죄를 모르기에 결국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고 그것이 결국 하나님에 대한 반항형식으로 나설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호세아에게 낳은 자식이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긍휼함을 입지도 못하는데 또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떤 계시를 주느냐 하면, 백성 아닌데 백성 되게 하고, 긍휼함이 없는데 긍휼함을 입게 해주도록 율법이 계속해서 진척이 되고 진행이 된다는 사실을 알려줘요.

그게 바로 호세아 6장에 나옵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그리고 1절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찢어놓고 도로 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라는 존재가 우리자신을 위해서, 나를 위해서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위하여, 찢었다가 다시 살리시는 그 사랑을 위하여 우리한테 어떤 찢어짐의 변화, 그 과정과 다시 회복됨의 과정을 우리한테 박아 넣으려 하는 거예요. 우리에게 새겨 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우리는 그 대상일 뿐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뭔가 들이닥쳤어요. 뭔가가.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서 도망쳤어요. 죽기 살기로 도망쳤는데 뭔가 야곱이 가는 길을 가로막습니다. 사다리를 통해서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그 천사가 하는 말이, 야곱아, 일은 내가 한다는 거예요, 내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다 해요. 요한복음 1장에 보면 주님 인자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듯이.

그 말은 주님께서 알아서 다 하셔요. 알아서 다 하니까 야곱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에게 일하는 그 일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야곱은 뽑힌 거예요. 뽑혔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이 내가 나름대로 나 살기 위해서 어떤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아니고 바로 여기, 하나님이 일하시는 여기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계신 곳을 증거하기 위해서 뽑혀 나온 나도 거기 함께 있는 거예요.

이것은 증거 해야 될 나가 주님이 거기 계심으로서 같이 한 세트가 되어서 같이 있는 거예요. 이게 성도의 존재이유입니다. 딴 것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여기에 있어요. 여기에. 그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면 세상은 뭐냐? 대자연의 변화는 뭐냐? 신종코로나는 뭐냐? 그냥 꿈이지요. 꿈에서 깨어나야 돼요. 꿈에서 깨나야 내가 죽고 자시고 지옥가고 천국가고 할 것이 없어요. 그것은 주님의 몫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 구원받아야 되는데, 꼭 천당 가야 되는데.’

그것 자체가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그 자체가 나를 우상으로 만드는 거예요. 나를 위해서 예수님이 계신 것처럼 되어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을 모르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찢어짐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십자가에 죽은 의의도 모르고 부활의 의의도 모르는 사람이에요.

따라서 제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한가지입니다. 우리는 찢어짐이 없이는 다시 살리심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내 육신대로 산다는 것, 바르게 산다는 것, 성실하게 산다는 것, 아무리 봐도 내가 죄지은 것을 모르겠다, 하는데 성도의 특징은 죄를 아는 것이 아니고 어떤 다른 선택지가 없도록 자꾸 궁지로 몰아세웁니다.

우리 주님께서. 자꾸 몰아세워요. 뭔가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쓰는데 그거 아무짝도 소용없습니다. 내가 손에 장을 지져볼까요? 그거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어떤 궁지로 몰아세워서 다른 선택지가 없어요. 그렇게 되어야 돼요. 우리는 이렇게 못돼먹어야 되고, 이렇게 나는 나밖에 몰라야 돼요. 그런데 그것이 율법에 의하면 그게 바로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했고 주님의 사랑을 잊어버린 모습인 것을 우리가 안다면 그게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끝으로 전에 제가 인형 이야기를 했지요. 애들 인형 쑤시면 알라~뷰, 알라~뷰, 한다고요. ‘I love you’ 가 아니고 “알라~뷰, 알라~뷰!” 쑤시면 복음이 탁탁 튀어나와요, 복음이. 이 옆구리에서도 복음이 나오고 저 옆구리를 쑤셔도 복음이 나온다는 말은, 궁지에 몰렸다는 것,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것, 누르면 “주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살린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내 안에서 살아나셨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이 함께 있는 현재성, 바로 여기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계획 잡을 필요도 없고, 목적이 있을 필요도 없고, 바로 여기에 주께서 친히 일하신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혼자 돌아볼 때 정말 죄지은 것이 없기에, 회개할 거리도 없고 주님 앞에 반항할 의사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반항조차도 주의 율법을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라면 주의 사랑만 증거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