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순 2020. 3. 22. 19:24



지혜로운 재판 200322


음성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 끔찍한 이야기를 해줄게요. 오늘은 아주 끔찍한 이야기를 해 줄 거예요. 어떤 끔찍한 일이냐 하면 어떤 두 사람의 아주머니가 잠을 자고 있었어요. 두 사람이 잠을 나란히 자고 있었는데 둘 다 방금 아기를 낳았어요. 어떤 아주머니도 아기를 낳고 또 다른 아주머니도 아기를 낳았어요. 그런데 아주머니들이 뚱뚱해. 너무 뚱뚱해. 뚱뚱해가지고 잠을 자는데 한 바퀴 굴러버리니까 애 하나가 그만 찡겨 죽었어요. 숨이 막혀 죽고 말았어요.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뚱뚱한 아줌마가 몸부림 쳐가지고 자기 애가 죽었거든. 자기 애가 죽었으니까 자기가 자기애를 죽인 거예요. 죽였으니까 자기가 놀랐겠지요. 근데 여기 보니까 애기 하나가 남아있어서 보니까 자기 애는 아니고 옆에 잠자고 있는 다른 아주머니 애기가 있어가지고 죽은 애기를 그 아줌마한테 미루고 살아있는 애기를 자기 것으로 살짝 옮겨놓은 거예요. 옮겨놨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애가 둘이 살아있어야 할 애가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있더란 말이죠. 그래서 진짜 살아있는 애기 엄마가 “내 애기 여기 있네.” 하고 가져갔거든요. 세상에 엄마가 자기 애 면상을 모르겠어요? 아직 거기에는 DNA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이야기란 말이에요. “내 애기가 왜 여기 있지?” 하고 가져오니까 그 뻔뻔스러운 다른 아줌마가 하는 말이 “이 살아있는 아기는 나의 아기야.”라고 우겨대는 거예요.


그러니까 엄마는 둘인데 애기는 몇 명? 애기는 하나가 된 거예요. 엄마가 둘인데 애기가 하나예요. 애기 하나에 엄마 둘이 서로 자기 애기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친자 확인 기술이 발달되기 전이에요.


그리고 애기를 죽인 엄마가 힘이 세. 싸움을 잘해. 그래가지고 자기 애라고 고집하면서 한 판 붙을까 이렇게 나오니까 약한 엄마가 할 수 없어가지고 자기 애를 엉뚱한 자기 친구한테 빼앗겼으니까 가만있을 수 없잖아요. 누구한테 호소를 하느냐 하면 그 당시에 이스라엘의 임금인 솔로몬 왕에게 가가지고 “임금님. 내 애기 찾아주세요.”라고 애기 찾아달라고 당부를 했어요.


그런데 생각해보세요. 그 아기를 눌러서 죽일 때 솔로몬은 어디 있었습니까? 솔로몬은 자기 집에 있었지요. 본인이 솔로몬 본인이 그 현장에 없었어요. 거기에는 CCTV도 없어요. 그 애기가 죽었을 때 목격자는 그 나쁜 여자하고, 살아있는 애기, 죽은 애기, 그리고 잠자고 있던 진짜 아기 엄마, 그 외에는 목격자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이 말이죠.


굳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보셨겠지요. 하나님은 빼놓고, 하나님을 재판하는데 증인으로 초청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사람끼리 해가지고 옳다, 옳다 이렇게 했단 말이죠. 그런데 그 현장에 누가 없었느냐 하면 솔로몬은 그 현장에 없었어요. 없는 사람보고 내 애기 찾아내라고 하니까 솔로몬도 기가 찰 일이죠.


그런데 솔로몬은 전에 약속한 게 있어요. “하나님. 내가 백성들이 나한테 와서 난처한 일을 재판하려고 할 때 저한테 지혜주신다고 했지요? 저한테 지혜를 주셔가지고 이건 나의 재판에서 제가 빠지겠습니다. 빠지고 이게 하나님의 재판이길 부탁합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시키는 대로 제가 판결하겠습니다.” 사전에 그렇게 기도한 적이 있어요. 일천번제 하면서 그런 기도를 했다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효력이 있었든지 누가 봐도 그 현장에 없는 저희들끼리 옳다고 하는 그 난처한 사건에 대해서 솔로몬이 드디어 자기 자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다는 자격으로 개입을 했습니다. 그 지혜가 뭐냐 하면 애를 두 토막 내어라예요. 두 토막 내어라. 나한테 텍사스 전기톱이 있다면 이 애를 두 토막 내어서 각각 나누고 싶습니다, 이런 거.


애를 두 토막 내라는 말은 애를 죽이란 말이 아니고 공평하게 하자. 공평하게 해서 두 토막 내어서, 시체가 되겠지요. 시체를 내어서 반반 가져가게 되면 공평하다. 이 말은 어느 누구도 제 삼자가 나서서 이 애기는 누구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나는 내가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애를 두 토막 내는 것입니다. 애가 두부 입니까? 콩자반입니까? 애를 왜 두 토막 내어요?


여기서 그 재판을 보고 재판을 듣고 각자 마음에 두 아줌마가 둘 다 마음에 정리가 되어야 돼요. 한쪽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느냐 하면 진짜 엄마는 어떻게 정리했느냐 하면 그 때 왕의 말은 진짜 그대로 시행해야 돼요. 왕의 말이 시행된다면 결국 이건 내한테 돌아오는 것은 내 애의 시체 반 토막만 돌아올 건데 내 것이 아니라도 좋다, 살아만 다오. 살아만 다오. 좋다. 내가 양보할 게. 엄마 됨을 양보하더라도 우리 애가 살기만 한다면 생명이 부지가 된다면 내 이번 재판에 졌다. 내가 이겼다 안 할게. 졌다. 하고 무릎을 꿇는 거예요. 내가 졌다. 니 해라. 그러나 애기는 잘 키워줘. 이런 식으로, 이렇게 했어요. 그 현장이 아니고 따로 불렀겠지요. 진짜 엄마는 “제가 양보할 테니까 애만 잘 키우기 바랍니다.”하고.


그 다음에 나쁜 아줌마 불러가지고, “나쁜 아줌마. 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나쁜 아줌마는 애 키울 마음도 없어. “남의 애가 싫어. 내 애가 이쁘지 남의 애는 안 이쁘다고요. 나는 왕의 말이라면 꺼뻑 엎어집니다. 왕의 말은 지혜롭기 때문에 정의롭게 그냥 시키는 대로 두 조각 냅시다.” 이렇게 했다고요. “두 조각 냅시다.”


서로 잘났다고 주장할 때는 서로 차이점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판결이 개입되니까 서로 같은 주장을 한다고 생각했던 두 아줌마 사이에 서로 차이나는 의견들이 거기서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차이남. “내가 질 테니까 니 이길 생각이 없으니까 나는 저 여자하고 경쟁해서 안 이길 테니까 애만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이건 희생입니다. 희생.


이 희생은 뭐냐 하면, 나는 세상을 내 위주로 살지 않겠습니다. 지금 재판이 뭐냐 하면 애를 두 조각 내라고 하니까 다시 재판을 애기 엄마는 원점으로 돌리는 거예요. 괜히 재판한 거예요. 재판해가지고 애 죽일 것 같으면 차라리 재판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좋지요. 그러니까 뭐냐 하면 잘잘못을 따진다는 자체가 내가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이겨야 속 시원하다는 자체가 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님 보는 관점하고 달라요.


진짜 엄마는 원상복귀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재판하기 이전으로, 재판하나마나, 재판하고 자기 애를 죽여라 하니까 그냥 가져가라는 거지요. 그런데 재판 과정을 통해서 그동안 내 아기라고 주장했던 그 여자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애 죽여도 상관없어요. 나만 정당하면 되니까 나만 나쁜 여자라고 소리 안 들으면 애 죽든 말든 상관없어요.”라고 자기 의로움을 주장할 때 솔로몬은 “재판 안 끝났다. 새로운 증인이 발생되었다. 증인이 누구냐? 증인이 너희들이 바로 증인이다.”


증인이 뭐냐 하면 차이남, 이 세상에는 같은 인간만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벌어진 사건을 통해서 차이나는 확연하게 차이나는 두 종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은 천국 가는 백성은 지옥 가는 사람과 달라도 뭔가 달라야 돼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재판하고 자기 잘난 체 하는 그 자체를 우리가 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재판하지 말고 있는 것이라도 고마워하고 감사해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