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송아지의 죽음
이근호 2020년 3월 4일
본문 말씀: 호세아 8:4-7
(8:4)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8:5)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리웠느니라 내 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저희가 어느 때에야 능히 무죄하겠느냐
(8:6)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8:7)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지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사람들이 말하는 현실이란 ‘자기를 위해서’라는 본성을 전제로 한 현실입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상대방이 때리면 아프고, 맞으면 복수하고 싶고, 잠이 오면 잠자고 싶고, 사람들은 이런 것을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이 현실관은 ‘자기를 위한 세상이어야 한다’는 의식을 반영한 현실관입니다.
이렇게 살게 되면 구태여 성경을 들추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제대로 현실에 맞게 살 수 있다고 우기게 됩니다. 즉 구태여 성경을 볼 필요가 없게 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하여’라는 말은 곧 ‘자기 절대화’를 뜻합니다. 최종 의미와 가치가 본인에게 있을 수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지 않는다면 이러한 의식이 아무런 문제가 없어보십니다. 하지만 성경을 펼치는 순간, 이러한 생각은 엉터리입니다. 허구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에 ‘우상’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상’이라고 하나님께서 지적하시는 이유는, 현실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신 겁니다.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현실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인간들이 자기 자신을 절대화하여 매사에 ‘자기를 위하여’를 빼놓지 않고 생각하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인간들의 보편성을 하나님께서 북이스라엘을 통해서 발췌해내십니다. 북이스라엘이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마리아의 송아지’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첫 왕이 여로보암왕이 국가라는 단일체를 구성하기 위해 거기에 맞추어 금송아리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왕상 12:28)
그런데 이 금송아지 제조 취지에 원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기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이 구절에서도 ‘자기를 위하여’가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는 바로 ‘절대 자기’ 혹은 ‘단독 자기’입니다. 즉 자신을 절대화하기 위해 인간은 뭔가를 기대하는데 그 사회적인 최고 등급이 국가입니다. 든든한 국가가 자신이 기대하는 이상을 구현해주리라고 여깁니다. 마음과 마음들이 모여 단결해서 하나의 이상체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자아는 ‘종속된 자아’입니다. 요한복음 21:15에 보면,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마저 자기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서 나온 것임을 고백합니다. 결코 자신은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왕’ 혹은 ‘방백’이라는 단어같은 것은 단독개인들의 대리자로서 존재하는 직위들입니다. 다수의 인구를 오직 하나로 구현하기 위한 자리입니다.
이처럼 국가란 절대자아의 구현체로 등장하는데 이것을 성경적 현실에서는 우상, 곧 금송아지로 표현될 수 있는 겁니다. 자기네들은 궁극적인 신이라고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우상일 뿐인 이유는, ‘자기를 위해서’라는 취지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 여로보암의 금송아지의 본질은 출애굽기 32: 20에서 드러납니다.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시내산 밑에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우상을 만든 것은 모세의 부재(不在) 때문이었습니다. 산꼭대기로 올라간지 40일이 지나도 내려올 줄 모릅니다. 100% 죽은 것입니다.
백성들은 모세가 행했던 그 여호와의 하나님의 기적이 그리웠던 겁니다. 모세의 빈 자리에 그 여호와 하나님으로 채우려고 했습니다. 신기한 능력을 행하셨던 그 여호와 중심으로 앞 일을 헤쳐 나가려고 했습니다. 백성들은 가장 고귀하고 아끼는 것을 여호와 하나님을 위해 내놓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금입니다.
그 금으로 여호와 하나님을 만들고 축제를 벌렸는데 그것이 ‘여호와의 축제날’입니다.(출 32:5) “이 신이 바로 우리를 애굽 땅에서 우리를 구원한 신”이라고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이는 하나님 쪽에서 누가 오시든지 이 백성들의 진심은 통할 것이라고 여긴 겁니다. 하지만 모세가 40일에 만에 내려와서는 그 금송아지를 가루를 만들고 백성들을 다 마시우게 했습니다.
즉 바깥으로 구체화된 우상은 실은 모든 백성들 개인의 내면에 이미 자리잡아 있던 마음이다는 겁니다. 모두가 근원적으로 우상숭배자였던 겁니다. 그리고 모세는 레위지파를 시켜 무려 3000명 가량을 죽게 했습니다.(출 32:28)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믿는 것은 언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지정된 사람들을 속에 집어넣고 그것을 도로 회수하시는 방식으로 구원해내십니다. 집어넣을 때의 현상이 바로 기존의 절대자아를 우상화해 버리시는 겁니다. 인간은 사정없이 언약, 혹은 십자가 앞에서 박살나야 합니다. 사무엘상 5:2-4에 보면,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인격화된 십자가 앞에서 철저하게 무너져야 합니다. 언약으로 인하여 죽은 자는, 이 세상 모두가 죽음을 감추는 다양한 색체임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죽음을 지적하기 위한 용도로 쓰여집니다. 그리고 성도는 이 언약으로 인하여 삽니다. 언약에 의해 죽고 언약에 의해 사는 것을 되풀이하면서 성도는 예수님에게 종속된 자아가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죽음이 깔린 현실만이 제대로 된 현실임을 증언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31강-호 8장 4-7절(금송아지의 죽음)2003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8장 4절에서 7절까지입니다. 구약성경 1263페이지입니다.
호세아 8:4-7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저희가 또 그 은,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나니 파멸을 이루리라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리웠느니라 내 노가 무리를 향하여 타오르나니 저희가 어느 때에야 능히 무죄하겠느냐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나고 공장이 만든 것이라 참 신이 아니니 사마리아의 송아지가 부숴뜨리우리라 저희가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것이라 심은 것이 줄기가 없으며 이삭은 열매를 맺히지 못할 것이요 설혹 맺힐찌라도 이방 사람이 삼키리라.”
4절에 보면 왕이 나오고 방백이 나오지요. 왕과 방백이라는 것은 개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의 대표자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왕과 방백을 주님께서 지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개인적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개인들의 생각이 모아지고 마음들이 모아지는 그 최고등급의 무엇이 있어요. 그게 나라고 그게 국가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서는 모을 수 있는 동일한 생각들이, 사상들이 있어요. 그 사상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우상이라고 하는데 우상이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오늘 본문 4절에도 나오지만, 그 우상이라는 말을 하시면서 그 앞에 먼저 등장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를 위하여’ 우상 앞에 필히 ‘자기를 위하여’가 딱 꽂혀있어요.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우상 앞에 단독적인 개인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단독적인 개인으로 보지 않고 종속된 개인으로 보시는 겁니다. 출애굽기 32장에 우상이라는 말이 처음 나올지 싶은데요. 출애굽기 33장 3절에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이렇게 해서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있을 동안에 백성들이 우상을 만들었다고 질책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질책할 때 우상이라는 말 앞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32장 8절에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이렇게 해서 송아지를 부어 만들었는데 송아지를 위함이 아니고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라고 했어요. 거기에 또 자기, 나지요, ‘자기를 위하여’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와 자기가 집결된 것이 뭐냐? 국가가 되는 겁니다. 국가가 되고 국가가 되는 그 과정 속에서 그들은 단결, 또 단결해야 되겠지요. 마음이 하나가 되어야 국가가 단단해지니까. 그 단결되게 하는 요인을 그들은 신이라고 이야기했고 하나님이 지켜주는 그러한 나라가 될 때 든든하다, 그 말이지요.
영국 국가, 우리나라 같으면 애국가지요, 영국의 국가의 가사, “하나님이여 우리 여왕을 지켜주소서” 하는 거예요. 가락은 어디서 나왔느냐? 프랑스의 왕 루이 14세가 치질이 걸렸을 때 왕을 위로한다고 한 그 가락을 영국이 따와서 거기에 “신이여 여왕을 지켜주소서” 그렇게 된 거예요. 영국국가는 치질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본문 4절에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바며”라고 되어 있어요. 왕과 국가를 세우면서 금은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는데 결국 국가라는 것은 큰 자기, 더 든든한 자기, 나를 대체해도 안전할 수 있는 자기, 그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현실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잠 오면 잠자고 싶고, 때리면 아프고, 맞으면 복수하고 싶고, 배고프면 밥 먹고 싶고, 이런 삶이 진실이고 옳은 삶일까를 생각해 보세요. 때리면 아프고, 잠 오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이것이 진실일까요? 이것이 옳은 삶일까요? 이것은 자기자신에 대해서, 내가 이렇게 왜 잠이 오고, 왜 배고프고, 왜 때리면 아프고, 왜 맞으면 복수하고 싶고, 이러한 생각이 왜 드는지를 본인들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그걸 진실이라고 할 수가 없어요.
제가 하나의 문장을 말씀드릴 테니 이 문장이 진실인지를 여러분이 판정해 보세요. 오늘 저녁뉴스에 “수요일 현재 세계 94개국에서 한국민 입국을 거부했습니다.” 이게 진실일까요? 이게 현실일까요? 지금 제가 잠시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게 진실이고 현실일까요? 이것은 헛소리입니다. 현실이 아니에요. 이것은 진실이 아니고 허구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은 단독적으로, 홀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래요. 94개국이 한국민의 입국을 거부했다. 이것이 현실이고 진실인 것처럼 하지만 이 말을 하는 쪽과 그것을 듣는 쪽이 어떤 반응을 나타낼 때 그 반응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진리라고 할 수가 없고 허구라고 판정을 내리는 겁니다.
이래서는 무슨 뜻인지를 잘 모르겠지요. 세계 94국이 한국민 입국을 거부할 때 거부한다는 소식을 듣고, 또는 잠 오면 자고, 배고프면 먹고, 때리면 아프고, 그럴 때에 이렇게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 성경을 펼칠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전혀 없는 거예요. 때리면 아픈 것이 맞고, 잠 오면 잠자는 것이 맞지, ‘이게 왜 그럴까? 이것은 허구일거야.’라고 성경을 펼칠 이유가 없는 거예요.
‘세계 94개국이 한국민의 입국을 거부한다. 이것이 진실이 아닐거야. 성경한번 찾아보자.’ 하고 성경을 찾을 이유가 없지요. 90여국이 한국민 입국을 거부하는 것과 성경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게 관계가 있어야 돼요. 관계가 있어야 되는데 성경하고 관계가 없다고 여기는 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단독개인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보시기에 개인은 절대로 단독개인이 아니에요. “누가 시키더냐 누가? 그 일을, 그 생각을 누가 시키더냐?”고 묻는 거예요. 어디에 나오느냐? 성경을 펼치면 나와요. 성경을 안 펼치면 몰라요.
요한복음 21장 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보고 예수님께서 물었어요. 나중에 부활하셔서. 베드로야 네가 이 제자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니까 베드로가 하는 말이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주께서 아시나이다.” 베드로가 주님 부활하고 나서 만났을 때 절대로 개인 단독으로 하지 않습니다. 종속된 개인으로 이야기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짜 현실은 주께서 사랑하도록 하셨잖아요.” 이게 현실이에요. 내가 사랑하면 사랑합니다, 가 현실이 아닙니다. 성경을 펼치지 않으면 94개 국가가 한국민의 입국을 거부한다는 이것이 진실인 것처럼 보이지만 왜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되고, 왜 우리는 이런 이야기가 이해된다고 여깁니까?
내가 그래야 될 조건 같은 것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안 펼치고 나온 겁니다. 성경을 펼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왔어요. 94개국이 “한국민은 입국하지 마라.” 이 말을 제가 줄여볼까요? 이렇게 됩니다. “악착같이 살아라.” 이거거든요.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돼.” 이거라는 말이지요. 그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돼.’ 성경 어느 구절에 그게 나옵니까? 그게 어디가 진실이에요?
‘단독적인 나는 악착같이 살아남아야 돼. 이 코로나 분위기속에서 살아남아야 돼 죽으면 안 돼.’ 이게 성경 어디에 나옵니까? ‘잠 오면 자고…….’ 아니에요. ‘잠 오게 하셔서 잠자게 하셨습니다.’ ‘배고프면 밥 먹고…….’ 아니에요. ‘배고프게 하셔서 하나님이 주신 밥을 제가 먹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종속된 개인이에요. 단독개인이 아닙니다. 나 혼자 개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요. 문제는 하나님이 사람을 안 믿어요. 교회마다 자기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를 믿습니다.” 하는데 주님은 인간을 안 믿어요. 주님이 믿는 것은 언약입니다. 주님은 주님을 믿어요.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요. 사람을 안 믿어요. 사람 배후에 누가 있기 때문에 안 믿어요.
그래서 성경에 있는 모든 단어와 의미는 세상적인 안목으로 알 수 없고 성경 속에서 찾아야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북 이스라엘을 ‘송아지’라고, ‘사마리아의 송아지’로 왜 표현했을까? 북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자체를 사마리아의 송아지라고 표현을 할 때 성경을 덮어버리면 무엇을 모르게 되느냐? 사마리아의 송아지라는 단어조차 우리에게 생소해요. 금시초문이 돼버린다고요.
쉽게 말해서 사마리아의 금송아지 없어도 ‘나는 밥이나 먹고 돈만 벌면 그만이지. 신종코로나 피하면 그만이지’라고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그들은 그게 바로 생생한 현실이라고 우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된 것은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네 배후에 내가 있다. 이 주님이 있다.” 그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을 펼쳐서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성경 속에서 무엇을 현실이라고 규정하던가? 어떤 단어를 가지고 현실을 설명하던가? 하나님은 어떤 단어를 가지고 현실을 설명하던가? 그리고 하나님은 사마리아의 송아지를 단어를 가지고 현실을 설명하는데 세상 사람들은 사마리아의 송아지를 빼고 현실을 설명하고 있잖아요. 그러면 둘 중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성경을 안 펼쳐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살다 죽으면 그만이라 이렇게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5장 28절에 보면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하나님의 생각하는 현실과 인간이 생각하는 현실이 얼마나 달랐으면 주님께서 먼저 기이하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이야기하겠습니까? “내가 이제부터 기이한 이야기할게”
뭐라고 하느냐?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예수님 자신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온대요. 무덤 속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대구에서 봉사하고 있는 간호사들이 요한복음 5장 28절을 기억하면서 봉사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코비드19’라는 신종코로나 그것과 싸우지요. 그러나 사마리아의 금송아지에 의하면 바이러스와 싸우면 안돼요.
우리 자신과 싸워야 돼요. 우리의 절대적개인, 단독개인과 주님은 싸우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이러스는 뭐냐? 주께서 퍼뜨린 가시와 엉겅퀴지요. 이 세상을 힘들게 살라고 확 뿌려놓은 거예요.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그렇게 된다면, 사마리아의 금송아지만 아신다면 한국민을 세계 94개국이 입국 거부한다는 뉴스의 이 멘트는 헛소리가 되는 거예요. 이게 아무 문제꺼리도 안되는 이야기에요.
그러면 이 사마리아의 금송아지가 뭐냐? 먼저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금송아지부터 먼저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마리아의 금송아지는 북이스라엘 첫 번째 왕 여로보암이 금송아지를 만들었거든요. 그것은 만들 때 모형이 있어요. 출애굽기 32장에 나오는 그 금송아지,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섬기던 금송아지를 말하지요.
출애굽기 32장 2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40일 있는 동안에 밑에서는 모세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모르겠지요. 아마 죽었다고 여겼을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갔을 때 여호수아 빼놓고 나머지 아론을 비롯해서 모든 백성들은 산 밑에 있었습니다. 산 밑에서 모세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 우리 자신을 집어넣어 보세요. 건방떨면서 모세생각하지 말고 우리는 산 밑에 있는 일반백성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들의 경험상 인간은 물이 있으면 겨우 일주일, 물이 없으면 사흘 만에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상식입니다. 그런데 40일 동안 소식이 없었어요. 백프로 죽은 겁니다. 이것은 죽은 거예요. 달리 딴 생각을 할 이유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을 믿습니다. 자기의 상식을 믿고 자기의 체험을 믿어요.
모세 없습니다. 모세는 이미 죽은 거예요. 모세가 일을 할 때 여호와 이야기를 하면서 홍해도 가르고 애굽에다 열 가지 재앙도 줬다고요. 그런데 지금은 모세가 죽어버렸잖아요. 모세가 부재하다는 말, 없다는 말이지요. 모세한테 그렇게 한 것이 누구냐 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모세한테 그렇게 하도록 하셨잖아요.
그러면 백성들 입장에서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단결하기 위해서는 모세와 함께 있었던 그 여호와 하나님을 모세가 없는 입장에서 모세의 자리에 그 여호와 하나님이 있을 필요가 있는 겁니다. 이걸 이데올로기라 해요.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이념이에요.
리 승만 시대나 박 정희 시대 때 북한이 있는 이상은 남쪽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에요. 그걸 이데올로기라고 해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이데올로기는 “나는 뭘 믿습니다”가 아닙니다. “나는 뭐가 싫어요”가 이데올로기에요. 나는 어떤 것이 싫어요, 가 이데올로기에요.
한식집에 가서 “너는 뭐 먹을래?” 할 때 “이거 먹을래.” 하는 것은 자기의 본심을 다 드러내 못하고 있어요. “개고기는 안 먹습니다. 그리고 곱창, 오리고기도 별로 안 좋아하고요. 오리는 그럭저럭 먹을 수도 있는데 하여튼 개고기는 절대 안 먹습니다.” 그러면 나머지기는 다 먹을 수 있다는 거예요. 곱창도 그렇습니다만 나머지는 다 먹을 수 있다는 거예요.
인간은 뭔가 싫어하는 것이 있어요. 이미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벗어나서 하나의 마음이 되어서 고생고생 하면서 홍해를 건너왔잖아요.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마음, 심정은 뭐냐? 이제는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신이 아닌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신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단결이 되니까. 그래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에요.
“우리교회는 예수중심이다.” 그게 금송아지라니 그게! “우리교회는 오직 예수님만!” 그게 금송아지에요. 신천지가 이 만희 믿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신천지 예배당 보세요. 중앙에 뭐가 있습니까? 십자가 있어요. 신천지가 십자가 믿는 그것이 우상이라는 그 말이지요. 왜냐?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위한 것이 아니에요. 신천지의 단결을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이게 하나의 집단이 돼요. 그 집단은 국가가 최후등급이기 때문에, 국가가 든든한 백그라운드가 되기 때문에 국가, 정치권에 로비를 하는 거예요. 우리 신천지를 지켜달라고. 통일교가 국가에 로비하고. 여호와증인도 로비하고. 전부다 우리교회, 우리집단을 지키기 위해서 보다 더 높은 권력체, 정치권에 로비를 해서 지켜달라고 하는 것, 나를 지키는 그것이 바로 우상이에요. 나를 지키는 그것이. 모든 교회가 우상이라고 보면 됩니다. 모든 교단과 교회가.
모세는 죽었어요. 그래서 금송아지를 만든 거예요. 이름을 여호와라고 했어요. 금송아지를 만들어놓고 금송아지축제를 벌인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축제를 벌인 거예요. 32장 5,6절 “아론이 보고 그 앞에 단을 쌓고 이에 공포하여 가로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이튿날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아론이 주도해서 여호와축제를 즐긴 거예요. 금송아지보고 금송아지축제를 한 것이 아니라 여호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싫어하느냐? 여호와가 싫어해요. 싫어하는 방법이 뭐냐? 출애굽기 32장 20절에 “모세가 그들의 만든 송아지를 가져 불살라” 불살라요. 그다음에 “부수어 가루를 만들어” 가루를 만들지요. 그리고는 “물에 뿌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마시우니라.”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바깥에 있는 그 금송아지, 실은 네 마음속에 있는 금송아지가 구체화된 것이 바깥에 있는 금송아지에요. 네 안에 ‘자기를 위하여’, 출애굽기 32장 8절의 말씀처럼 네가 생각하는 여호와는 너 자신을 위한 여호와라는 말입니다. 단독개인을 위한 여호와에요. 그들은 그것을 현실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나 무엇이 현실이냐? 그 단독개인을 아주 박살을 내서 가루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현실이에요. 우상을 깬다는 것은 우상을 깨는 것이 아니고 나를 깨는 거예요. 나를 깨버리면 나는 죽은자가 되는 겁니다. 성도에게 언약이 온 것은 언약 믿고 천당 가라는 말이 아니고 언약이, 절대적 나, 단독 나를 언약이 절구가 되어서 아주 산산이 깨는 거예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그러면 나는 죽지요. 가루가 되었으니 죽잖아요. 죽은 인간을 언약이 또 살려내요. 매일같이. 왜 그렇게 하느냐? 세상 모든 것이 죽음의 다양한 색채임을 지적하는 하나님의 개인적용도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의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것. 세상의 모든 것이 죽음의 색채입니다. 여러분이 저를 볼 때 죽은자로 보시고 저도 여러분들 공동묘지로 봐요.
혹시 언약전하면 죽은자라도, 혹시라도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그 말 맞네.’라고 살아 있는 사람, 죽어 있는데 언약으로 인해서만 살아 있는 사람, 언약에 의해서만. ‘언약에 의해서만’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나로 인하여 영광 받는 그런 것은 성경에 없습니다. 그리되면 나는 우상이 되어버려요.
현실은 뭐냐?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봉사를 하든지 설교를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돼요. 그러면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가 먼저 나올거냐, 내가 나올거냐?’ 에서 여기서 주님께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나를 박살내지요. 그걸 가지고 주인과 손님, 주객이 바뀌었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죄인이 아니라는 겁니다. 나는 주님의 노비고, 누구의 노예고, 누구의 종인 거예요.
그런데 이 종이 육신이 있으니까 자꾸 주인노릇 하는 거예요. ‘잠 오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고 싶다.’ 이럴 때 이미 자기가 주인이에요. ‘때리면 아프고, 맞으면 복수하고 싶다.’ 이게 이미 내가 주인이라니까요. 94개국에서 한국민이 입국을 거부한다. ‘아이고 어쩌나, 어쩌나? 어떻게 해?’
독일의 어떤 새댁은 애를 낳아야 되는데, 사정이 있어서 꼭 엄마가 와서 해줘야 되는데, 그래서 엄마가 비행기 표를 끊어놨는데 독일에서 입국거부를 해버리면 이것은 보통문제 아니지요. 그러니까 자기 딸이 곧 독일에서 애는 낳아야 되고, 비행기 표도 이미 끊어놓았는데, 그래서 가려고 하는데 뉴스 시간에 94개국에서 한국민의 입국을 거부한다니까 ‘아이고, 이거 어쩌나 걱정되네.’
이 전체 그림이 뭐냐? ‘우리 딸, 손자, 그리고 나는 죽으면 안 되는데.’ 와 관련되어 있는 생생한 현실로 다가오는 거예요. 나는 죽으면 안 된다는 거예요. 신종코로나 주님이 다 퍼트려 놓았는데. 사마리아의 금송아지라는 것은 의미를 빼고 현실을 판단하는 거예요. 저는 그걸 허구라고 봅니다. 성경말씀 빼고 보는 것을 허구라고 해요.
사람이 개인적으로 죽는다는 그것도 허구에요. 개인적으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게 되면 아담 안에서 이미 죽은 자에요. 그리고 죽어도 죽은 것이 아니에요. 예수 안에서 이미 산거예요. 하여튼 성경을 죽어라고 안 믿어요.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살았고 너희생명은 하늘에 있다고 아무리 해도 이것이 쌩뚱맞은 이야기처럼 들리고, 기침 조금만 해도 죽는 줄로 알고, 이게 현실인줄 알고 겁이 나서 어쩔 줄을 몰라요.
‘주여, 제가 주님을 믿는데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은 인간이 믿는다 해도 인정 안하고요 안 믿는다도 해도 그거 뭐 인정 안해요. 주님은 우리 안에 언약을 집어넣어놓고 그 언약을 손수 만들어내요. 열매를 맺고 키우는 거예요.
그래서 애들 가스펠송에 이런 것이 있어요. “싹트네~ 싹터요.” 그런 노래가 있어요. 애들이 하는 것을 봤습니다. 주님은 우리 속을 아예 어항으로 생각하고 주님이 그 안에 뭘 하나 던져놓고 주님이 스스로 자기가 던진 그것을 자기 것으로 회수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복음을 건져내십니다.
우리의 하나의 용도에 불과하고 하나의 재료에 불과한 겁니다. 역할에 불과한 거예요. 죽어도 괜찮은 거예요. 우리 안에 생명이 있으면. 여러분이 전염병이 퍼졌을 때 갑자기 기침이 나고 열이 난다. 이걸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합니까? 외부에서 와서 하잖아요. 인간이 아무리 자기가 버티고 싶어도 외부에서 어떤 현상이 덮쳐버리면 자기는 어떤 대처를 할 수가 없어요. “꼼짝 마라.”에요.
성경전체가 바로 그걸 설명하는 겁니다. 이미 모세는 부재, 죽은자에요. 그런데 40일 만에 나타났어요. 하여튼 40일 만에 돌판을 두 개 들고 왔어요.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안다, 생각하지만 모른다 치고, 모세가 갑자기 돌판을 들고 나타나더니 그 돌판을 깨면서 금송아지 다 갈아마시게 하고, 레위인들로 형제들을 죽이게 하는데 거기서 많이 죽었어요.
출애굽기 32장 27, 28절에 보면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며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레위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 행하매 이 날에 백성 중에 삼천명 가량이 죽인바 된지라.”
삼천명을 죽였어요. 단결돼도 모자랄 판에 3천명을 죽여 버렸어요. 모세가! 모세는 단독결정을 한 것이 아니에요. 배후에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이게 현실이에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약간 어려운 것을 해야 되는데 여러분이 좀 참아주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부정한다는 말인가? 다 깨버리고 이스라엘나라 자체를 없애려 한다는 말인가, 라고 할 수 있을 거예요.
4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의 모르는 바며” 자 그렇다면 이스라엘나라자체를 “나에게 그런 나라는 없다.” 하고 하나님이 아예 없앨 것이냐? 왜 그렇게 없애느냐?
사무엘상 5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가지고 다곤의 당에 들어가서 다곤의 곁에 두었더니 아스돗 사람이 이튿날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았는지라 그들이 다곤을 일으켜 다시 그 자리에 세웠더니 그 이튿날 아침에 그들이 일찌기 일어나 본즉 다곤이 여호와의 궤 앞에서 엎드러져 얼굴이 땅에 닿았고 그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문지방에 있고 다곤의 몸둥이만 남았더라.”
블레셋 사람이 여호와의 전쟁무기처럼 여기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고 여긴 그 작은 상자 있잖아요, 그 작은 상자를 포획했어요. 포획해놓고 어디까지나 작은 상자니까 별것이 아니라고 봤지요. ‘이번 승리는 우리민족 다곤신의 승리’라고 여겨서 그 상자를 전리품으로, 기념물로 다곤신전에 갖다 두었는데 아침에 보니 그 다곤 신상이 자빠지고 엎어져서 손모가지 발모가지 다 떨어져 나가고 깨졌다는 그 말이지요.
그러면 광역수사대에서 수사할 때 cctv를 달아보자는 겁니다. 이게 두 번에 걸쳐서 일어났거든요. 한번은 신상이 넘어져 있으니까 ‘이게 바람 불어 넘어졌나?’ 하고 다시 일으켜 세웠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날 더욱 더 처참하게 다곤 신상이 다 깨졌어요. 그러면 cctv를 달아보는 거예요. 보게 되면 고양이가 왔었는지 멧돼지가 왔었는지를 알게 아니겠습니까?
고양이도 들어온 적이 없고 멧돼지도 들어온 적이 없어요. 마치 다곤신도 살아 있는 것처럼, 놀랍지 않습니까, 우상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마치 언약궤에 누군가 앉아 계시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그 어떤 인물이, 우상, 신상은 인간이 만든 딱딱한 물체지만 어떤 인격화된 대상을 향하여 손모가지를 다 부러뜨려 놓았으니까, 그게 인간의 모습이니까, “에라 죽어라!” 하고 몸뚱이를 다 분열시켜 놓았다는 말이지요.
블레셋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이 블레셋사람들의 마음가짐, 사고방식, 그들의 기억 체험, 삶의 모습, 오늘날 현대인이에요. 오늘날 과학인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현대인들입니다. 예수? 하나님? 그건 아주 우습게 봐요. ‘예수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소문은 들었다.’ 그러면 끝나는 거예요. 자기 일상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살아 있는 주님이에요. 소문에 그런 줄 알고 있다는 그것으로 끝나지 자신의 절대적인 개인, 단독개인은 절대로 안 깨졌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겁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뭐냐? 하나님의 백성은 고맙게도 나를 날마다 가루로 만들어가지고 거기에 하나님의 살아 있는 주님에 언약에 의해서 ‘너는 죽어 마땅함’을 깨닫게 해주는 그런 관계,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리고 또 십자가 앞에서 나의 손모가지 발모가지, 완전히 자빠지고 엎어져서 단독적으로 절대적인 나, 나를 위한 나는 존재할 가치조차 없음을 깨닫게 하시는 이 살아 있는 성령의 역사, 이게 바로 참된 이스라엘이 아니고 뭐겠어요? 이게 바로 백성 아닙니까? 이게 백성이거든요.
배가 고파도 ‘주께서 배고프게 하셨구나.’ 내가 잠이 안오면 ‘주께서 잠못자게 하셨구나.’ 종속개념이에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아닙니다. 주께서 사랑하게 하셨잖아요.” “네가 저 형제를 사랑하는구나.” “아닙니다. 주께서 사랑하게 하셨잖아요.” “네가 좀 봉사하네.” “아니요. 주의 주신 힘으로, 주님의 힘으로 했기 때문에 주로 말미암아 영광이 되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하게 하셨습니다.”
나 아닙니다. 날마다 나는 죽어 마땅하고 죽어 마땅한 것을 날마다 세워주시니 이것은 단결이 아닙니다. 이것은 이미 살아계신 생명입니다. 단결이 아니에요. 호세아의 말씀의 취지가, 이것이 뭔가 부숴놓고 왜 부수었는지를, 왜 무너뜨렸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고, 그 이유를 두고 ‘옛날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 못됐어.’ 하지 말고 그 이유를 지금 내가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면, 인간은 자기자신부터 출발해서 가족이고, 사회고, 교회고 하지만 더 최상급의 조직은 국가입니다. ‘국가가 요새 왜 저래?’ 하지요. 그 국가, 국가가 최상급이에요. 무정부주의는 미친 인간들입니다. 무정부주의라는 것은 카오스, 혼란만 더 야기할 뿐입니다. 어떤 국가도 국가에요. 살던 국가가 마음에 안들어서 이민을 갈지언정 국가 없는 나라를 생각을 못하거든요. 이걸 오늘 본문에서 왕 없는, 그리고 지도자 없는, 그리고 방백이 없는……. ‘나의 지도자 없는 삶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사람들이 사는 현실입니다.
그런데 사사기 8장에 보면 기드온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기드온이 일한 것은 단독 개인으로 한 것이 아니에요. 천사가 와서 하게 하신 겁니다. 기드온사사에게. 기드온은 방앗간 주인이에요. 아무것도 할 줄 몰라요.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군사도 처음에 2만 2천명이 모였는데 너무 많다고 다 보내요. 달랑 3백 명 가지고 13만 5천명을 이겼어요.
기드온은 알아요. 이겨놓고 내가 이겼다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본인이 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마음가짐이 성도에요. 내가 하루하루 살지만 절대로 내 솜씨와 내 결정과 판단으로 절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매일같이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사사기 8장에 보면 기드온 이후에 슬슬 또 이스라엘이 망하기 시작합니다. 27절에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서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 집에 올무가 되니라.” 그 전에 8장 1절에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이런 식으로 나와요.
“네가 왕이 되려고 하는구나.”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기드온 죽고 난 뒤에 남은 가족끼리 누가 왕이냐, 왕 싸움 하고 있습니다. 이게 뭐냐? 왕이 없음으로 사람들이 자기 소견대로 행했다는 그 내용이 반복해서 나오는 겁니다. 인간의 이데올로기, 우상성, 나를 지키기 위해서 절대적인 나를 대체물로, 내 속에 있는, 내가 왕이고 싶고 내가 절대적인 신처럼 살고 싶은 그것이 바깥으로 구체화한 것의 최상등급이 뭐냐? 국가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조직이에요. 나를 위하여 이 조직을 원하는 나를 날마다 깨뜨려 줄 때 우리의 왕이 있습니다. 그 왕은 우리의 영원한 왕 예수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분의 백성입니다. 우리에게는 새로운 왕국이 있어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나라, 우리는 그의 백성입니다. 성도의 모습은 왕이신 예수님, 주님께서 하신 그 십자가의 죄씻음과 은혜를 증거하는 일이 백성이 할 일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참된 이스라엘, 참된 주의 백성은 주님처럼, 이 땅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시키는 일을 수행함으로서 자기자랑이 아니라 주님만 증거하는 그것인줄 아오니 우리가 주님 증거하는 이 사실만 해도 너무나 감사하고 고마워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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