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욥기

욥기 4:12-21 / 인간의 신비체험

정인순 2020. 1. 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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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신비체험 

 

이근호
2020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4:12-21

(4:12) 무슨 말씀이 내게 가만히 임하고 그 가는 소리가 내 귀에 들렸었나니

(4:13) 곧 사람이 깊이 잠들 때쯤 하여서니라 내가 그 밤의 이상으로 하여 생각이 번거로울 때에

(4:14)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러서 모든 골절이 흔들렸었느니라

(4:15) 그 때에 영이 내 앞으로 지나매 내 몸에 털이 주뼛하였었느니라

(4:16) 그 영이 서는데 그 형상을 분변치는 못하여도 오직 한 형상이 내 눈 앞에 있었느니라 그 때 내가 종용한 중에 목소리를 들으니 이르기를

(4:17) 인생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그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

(4:18) 하나님은 그 종이라도 오히려 믿지 아니하시며 그 사자라도 미련하다 하시나니

(4:19) 하물며 흙 집에 살며 티끌로 터를 삼고 하루살이에게라도 눌려 죽을 자이겠느냐

(4:20) 조석 사이에 멸한 바 되며 영원히 망하되 생각하는 자가 없으리라

(4:21) 장막 줄을 그들에게서 뽑지 아니하겠느냐 그들이 죽나니 지혜가 없느니라

인간은 영물입니다. 자신을 그냥 흙덩어리로 보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참으로 자신을 흙덩어리 본다면 누가 자신을 치고 때린다고 할지라도 반항하지 않을 겁니다. 사람은 외부의 자극이 없으면 자신이 얼마나 자기 본위로 사는 지를 느껴지지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엘리바스의 경험은, 평소에 인간이 얼마나 본인위주로 사는 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체험된 것들을 솔직하고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말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나 진리가 될 수가 없습니다. 순수하거나 진심으로 말했다고 해서 그것이 진리는 아니라 그저 인간의 한계성만을 드러낸 것뿐입니다. 인간에게는 물러서고 싶지 않는 마지노선을 뒤로 두고 삽니다.

즉 “모든 것을 양보해도 그것만큼은 도저히 못참겠다”라는 한계선을 두게 마련입니다. 아무리 영적 존재로부터 신비로운 체험을 겪어도 체험이 끝나면 항상 끝에 묻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는요? 나는 어떻게 되는데요?”라고 자기 걱정으로 돌아서게 마련입니다. 이러한 자기 본위는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드러납니다.

혼자 있을 때는 우주의 신비까지 다 꿰뚫어낼 것 같지만 옆에 막상 다른 사람이 있으면 결국 귀찮게 마련입니다. 사이가 좋아서 며칠 지낼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얼마나 안 가서 사람과 사람이 엮인다는 것은 개나 고양이하고 사는 것보다 더 힘든 일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각자 현존 몸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긴긴 과거의 계열과 만나기 때문입니다.

즉 상대방의 과거를 다 용납하고 받아줄 수 있을 정도도 우리 자신의 과거에 여유가 없는 겁니다. 그저 양보와 양보를 거듭하지만 결국에는 참지 못하고 한계선을 긋게 마련입니다. 인간은 영물이기에 이러한 과거사에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체험들이 일방적으로 왜곡된 해석으로 변모된 채 장착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인간은 가련한 티끌과 하루살이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상당히 겸손해보이고 깊은 경건함을 드러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마저 영물로서 인간이 해낼 수 있는 한계점이 됩니다. 특히 ‘티끌’이라는 주장은 1665년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으로 정리될 수가 있습니다.

그 방정식은 이러합니다.  F = g입니다. 여기서 f= 물체 사이에 서로 당기는 힘입니다.
M, M = 각 물체의 질량입니다. r= 물체 사이의 거리입니다. G= 뉴턴 상수로 불리는데 그 값은 G=6.67259×10-11 Nm2· kg-2입니다.  이 공식에서 알 수 있는데 ‘모든 물체’ 속에는 인간도 들어갑니다.

이 세상에는 신이 주신 힘이 작용하는데 이것은 두 물체 사이의 질량의 곱에 비례하고 상호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겁니다. 이 원리와 원칙에 대해서는 하나님 스스로 마저 부정할 수 없다는 겁니다. 하물며 인간이 받았다고 여기는 신비체험으로 감히 이 확실한 법칙에 대들 생각 말아야 합니다.

즉 인간에게 있다는 감정이나 애정이나 느낌이나 신분이나 성격이나 인격이나 믿음, 소망, 사랑 같은 것도 우주를 움직이는 원리에서 전혀 무용지물인 것이 드러납니다. 인간이 자신의 품위 같은 것은 세상에 내세우려고 한다면 이는 ‘허무한 티끌’에 불과한 것으로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즉 오늘날에 있어 과학보다 더 신적 계시적이 또 없을 겁니다. 종교를 대신해서 이미 과학이 진리 대변자로 굳어졌습니다. 종교계의 주장은 과학계의 주장 앞에서 맥도 못춥니다. 기가 죽기 마련입니다. 실제적인 성과는 실적을 과학만큼 내놓지 못하고 있기에 무슨 대외적으로 큰 소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경제에 관한 것도 과학적인 통계학이 설명의 주류를 차지합니다. 전 인간의 모든 삶의 영역이 가장 확실한 영적 계시인 과학이 다 차지하고 말았습니다. 욥의 친구인 엘리바스의 주장은 기껏 초기 계시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 계시마저, 혹은 과학적 계시마저 배후에 악마가 작용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명기 18:14-15에 보면,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복술자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지 아니하시느니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지정해주신 이 선지자 말고 다른 선지자는 어떻게 될까요? 신명기 18:18-22에 보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자기가 과거에 받은 신비체험을 가지고 욥을 책망하려고 신적 근거를 마련해서 충고하려고 했을 때, 욥의 태도는 간단합니다. “참으로 경솔하다”는 겁니다. 즉 나의 고통체험을 내가 설명하려는 것조차도 주님이 주신 고통에 비하면 참으로 경솔한 일이라는 겁니다.(욥 6:3)

곧 욥과 욥의 친구와의 체험 해석의 차이점은 욥으로 하여금 자기 정당성을 위한 그 어떤 마지노선을 결정짓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정도도 자신은 설명조차 할 수 없는 실제 계시가 주어진 겁니다. 욥의 친구 엘리바스는 자신이 받은 체험이 권위를 가지고 욥을 훈계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 눈 앞에 벌어진 욥의 고난 자체를 하나님의 계기로 받아야 하는 겁니다.

인간의 마지노선은 오늘날에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란 인간의 무지함과 자기 정당화를 맞이하시면서 하나님께서 보여줄 최후의 계시입니다. 더 이상 인간은 자기를 지키기 위해 최후의 마지선(한계성)은 없습니다. 성도는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체험을 접게 하옵소서.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