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통 저주
이근호 2020년 1월 8일
본문 말씀: 호세아 6:3-5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오심은 새벽 빛 같이 일정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리라
(6:4)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
(6:5)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저희를 치고 내 입의 말로 저희를 죽였노니 내 심판은 발하는 빛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만나겠다고 오신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면 인간은 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거룩하기에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동안 인간들은 하나님을 하늘에 모셔놓고서는 자기네들 아쉬운 것이 있으면 마구 호소에서 필요한 것을 얻고자 하는 식으로 하나님과 관계 맺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직접 이 인간 세상에 오지 않으신 것을 다행으로 여겼던 겁니다. 하지만 이제 인간들이 원하지도 않았지만 직접 이 땅을 방문하시겠답니다. 그리고 이 계획은 인간의 요구나 반대에 의해서 변경될 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그 어떤 차질이도 없이, 흔들림이 없이 요지부동, 일관성있게 밀어붙이십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하나님과 인간이 만납니까? 그것은 특정 공간이 아니라 특정 시간성을 통해서 만나십니다. 그것이 바로 ‘제 3일’입니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이 시간성으로 인해 인간 세계는 온통 저주의 바다임이 다 드러납니다. 마치 노아 홍수 때, 노아의 눈으로 봐서 그동안 인간들이 저주했던 모든 곳이 물바다가 되어 넘실거리는 것처럼, 이제도 이 세상 모든 곳이 저주의 화염으로 넘실거립니다.
저주 아닌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이 저주요 모든 사람이 저주받은 사람이요 모든 일들이 다 저주스러운 일들 뿐입니다. 이 말은 곧 하나님 방문에 맞추어 인간들은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나름대로 일생을 착실하고 반듯하게 살아와서 저주라는 점은 변함이 없습니다.
아침 태양이 떠 오르기 직전, 새벽은 온통 깜깜한 것처럼, 이 세상은 전부 정전사태가 일어난 것처럼 적막할 뿐입니다. 나름대로 요란스럽다고 자부들 하지만 그것은 옆에 있는 인간들과의 만남으로 다소 변화가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세상의 저주스러움은 한결같이 요지부동입니다. 아예 다른 생각을 먹지 말아야 합니다.
이사야 6:5에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마저 집단 속에 포함시킵니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으롭퉈 멸망당하는 이유는, 다윗계통의 왕이 그들에게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 나라를 측정하고 예측하기를, 자기민족에게만 특별히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졌고 자기네들만이 차별나게 열심히 하나님의 법을 준수하기에 안 망할 줄 알았던 겁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런 생각은 하나님이 주신 집단적 규정이나 집단적 기준이 아니라 그저 ‘나의 나라만 잘되면 된다’는 개인적 규정과 기준을 계속 붙들고 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적 기준에 묶여 살아가게 됩니다. 성령받지 못한 사람들의 특징은 개인적으로 케리어를 끌고 다닌다는 겁니다. 자기 뒤에 개인적인 수레를 평생 질질 끌고 다닙니다. 그 수레나 케리어 안에는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에게 충성과 봉사과 성심성의껏 헌신했던 성과들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것이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본인의 역사에 대해서 측정하거나 결정하거나 예측할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그 방식은 이러합니다. 신이 보기에 착하고 바르게 살게 되면 미래가 내 소원대로 잘 풀린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사적(私的) 기준으로 자기 역사를 평하는 겁니다.
개인기준의 오류는, 무조건 자신을 착한 사람 분류로 집어넣고서 세상을 평한다는데 있습니다. 즉 자신이 저주받는 것이 참으로 합당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이스라엘 역사 내에 합승하셔서 이스라엘 역사를, 인간들이 예측하지 못하는 방향으로 이끄십니다.
마치 열차 두를 복합하고 마주보면서 연결해서 운행하는 것처럼,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오는 이스라엘 역사 내에 율법을 주시면서 미리 탑승하시고, 다른 한편에서는 천국에서 통하는 시간으로 이 이스라엘 역사와 맞닥뜨리게 하십니다. 여기서 충돌이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제 3일’에 일어날 사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과연 인간들은 저주받아 마땅함을 만천하에 다 드러내시는 사건입니다. 이 일을 위해 마태복음 3장에서는 세례 요한이 옵니다. “하나님 나라, 곧 저주스러운 심판의 때‘가 가까이 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잘되어야 한다는 사적인 자기 규정을 적용하는 바리새인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가차없이 ’독사의 자식‘이다고 저주를 퍼붓습니다.
기준은 이러합니다. 그 어떤 인간이라도 이제 세례 요한에 의해서 새롭게 제시된 집단적 규정에 몸을 던지라는 겁니다. 그게 물세례입니다. 이 세례요한 때부터 세상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침노를 받고 와해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스라엘로 천국은 성립됩니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마 11“12)
또 다른 하나님의 오심은 사도행전 2:1-3에 나옵니다. “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불의 혀’란 곧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미리 알게 된 상황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는 겁니다.
즉 파도치는 것을 멀리서 보게 되면 요령 부려서 피할 수 있지만, 파도가 만들어 그 현장 한복판에서 온통 파도로 뒤집어쓰게 됩니다. 이제 성도는 온통 하나님의 저주를 온몸으로 뒤집어쓴 존재가 됩니다. 마치 호주산불 속에서 온통 화상 입은 코알라 신세가 된 겁니다. 세 번째 오심의 경우는 갈라디아서 3:23에 나옵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이라는 원칙을 아브라함에게 주시고, 그 다음 430년 후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십니다. 그러면 이 ‘율법 열차’는 저주와 멸망의 길을 내닫게 됩니다. 즉 이 세상은 그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저주에게 벗어날 길이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갈 3:22)이 바로 이 이야기입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도덕률로서 개인적으로 방어에 나섭니다. 이런 술책이 율법에 의해서 다 소용없는 것으로 판명됩니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성령받은 성도는 개인적인 기준이나 규정을 자기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잭팟처럼 자기 내부에서 터져 나온 그 십자가 피를 뒤집어쓰고 그것에 모든 것을 던진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잘남을 변명으로 여기면서 저주와 싸우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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