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에베소서

에베소서 6:5-9 / 종과 주인 (사회 속에서의 약속)

정인순 2020. 1. 5. 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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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5-9   종과 주인 


이근호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두 종류의 직원 비유를 관련해 보아야 합니다. 직원 세 명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열 달란트 받은 직원과 다섯 달란트 받은 직원은 주인을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한 달란트 받은 직원은 자기 생각이 우선이고 그 생각 속에 주인의 주인됨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주인임을 포기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마 5:30)

도대체 이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이런 비참한 대우를 받아야 될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의 징벌 조치에 대해서 납득되지 않고 있습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횡포처럼 여겨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이 대목을 우리 인간들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처벌 대상이요 파멸 대상인 것을 자기 정신으로 아는 자들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대하는 것은 야곱이 밤 중에 천사를 만난 것처럼 무시무시한 분을 생각하고 대하는 겁니다.

도저히 더러운 인간의 입장에서 감히 만날 수 없는 분을 만나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이 그리스도를 참으로 만나지 못한 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함부로 염두에 두고 살기에 한 달란트 같은 성향의 인물들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 세상은 이미 각자 주인 행세하는 지옥같은 곳입니다. 주인은 주인대로 종을 자기 물건 다루듯 하면서 협박과 공갈을 종들을 압박하려고 합니다.

거기에 반격해서 종들은 주인을 골탕 먹을 대상으로 여깁니다. 질투심과 열등감에 주체하지 못하는 종들은 지배받고 있는 자아의 이 현실적 굴욕감을 평소에 복수심으로 중무장하고 있다가 수시로 태업하는 식으로 주인의 일을 어렵게 만들고자 합니다.

이러한 자세는 모두 자기가 최종 주인으로 행세하고 있는 살고 있는 양상이며 그리스도 앞에서 저주받을 모습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은 인간들의 이러한 태도가 곧 예수님으로부터 처벌받을 일임을 현장감 있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사회 속에서의  약속


이근호


2020년 1월 12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6:5-9

(6:5)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6)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6:7)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6:8) 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6:9) 상전들아 너희도 저희에게 이와 같이 하고 공갈을 그치라 이는 저희와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고 그에게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일이 없는 줄 너희가 앎이니라

가족 안에서 약속을 구현할 때는 한 ‘개인’이라는 의식보다 서로 이어진 혈육적 관계가 우선됩니다. ‘남편-아내’ 관계라든지 ‘부모-자식’ 과의 관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피어납니다. 하지만 사회에 나가게 되면 더 이상 남편, 아내, 부모, 자식이라는 관계는 소용없습니다.

이 사회 안에는 ‘한 인간’으로 통합니다. 독립된 개체로서의 개인으로 행세하게 됩니다. “나는 누구의 엄마다” 혹은 “나는 누구의 남편이다”가 소용없습니다. “너는 누구냐?”에 대해서 내가 누군지를 사회에서만 통하는 식으로 답변할 게 있어야 합니다. 그게 뭘까요? 이 사회에서 내가 한 개인으로 인정받게 하는 그것이 뭘까요?

그것이 바로 ‘서열화’입니다. ‘계층화’입니다. 이 세상은 뭔가를 기준으로 해서 종과 상전으로 구분지어집니다. 예를 들면, 과(科)에서의 상전은 과장입니다. 과장이 상전이고 나머지는 그 과정의 종이 됩니다. 하지만 부(部)서에 가서 부장이 상전이 되고 과정은 그 부장의 종이 됩니다.

종의 종이 생기게 마련이고 상전의 상전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과연 이 사회에는 이런 서열을 무엇에 준해서 정해지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이 사회를 옳지 않게 봅니다. 수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눈 가림만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식’의 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또한 ‘공갈’과 ‘협박’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이 사회가 수상한 이유는, 상전과 종 사이에 틈이 생기고 그 틈을 기어올라가서 최고 상전이 되겠다는 열망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에게 범죄한 마음으로 무장되어 있습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으로 움직인다는 게 그 증거입니다. 이들 인간 사회에서 ‘상전’이 되는 것을 선(善)으로 여기고 ‘종’이 되는 것을 악(惡)으로 여깁니다.

따라서 부지런히 상전을 목표로 살아가니 ‘눈가림’ 할 수밖에 없고, 또한 상전된 입장에서 더 상전을 추구하니 공갈이나 협박을 할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상전이 상전됨으로 주위에서 인정받는 객관적 증거는 바로 돈입니다. 돈이란 ‘인간 노동력’의 결과물‘입니다.

사람들은 지는 것이 익숙해지지를 않습니다. ‘가진 자=승자=선한 자=복받은 자’는 공식이 통합니다. 이게 사회입니다. 이는 곧 스스로 노력하고 절약하게 되면 사회에서 인정받는 선한 자가 될 수 있음을 희망을 갖게 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 타인의 노동을 타인이 모르는 방식으로 갈취내지는 착취하게 됩니다.

이것이 자본주의 생리입니다. 자본주의는 돈이 우선이지 사람이 우선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은 생각하기를, 자신의 정당한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서 정당한 노임을 받기에 법적으로 하등 하자없이 ‘자유로운 주체’가 행사한 적법한 교환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기업을 비롯해서 모든 조직은 필히 ‘확대재생산’을 추구하게 마련입니다. 1년만 장사하고 그만둘 일을 하기 위해 사업 벌리고 노동자들을 모집한 게 아닙니다. 내일을 기약하면서 지속적으로 자금을 따로 모아두어야 합니다. 그게 ‘자본’입니다. 본위아니게 착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반 가정도 마찬가지고 모든 세상이 다 그러합니다. 수녀원이나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는 바로 상전이 되는 것이 곧 구원이요 복받은 것이요 선한 자라고 인정받는다는 잘못된 서열화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상전과 종으로 틈이 갈라지고 차이가 나는 것은, 선과 악의 인식 때문이라면 그 인식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인정하지 않는 인식입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선과 악 사이를 구분하는 그 인식 자체가 이 땅이 하늘과 틈이 생긴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산가족을 상봉하면서 자식잃은 부모는 ‘착한 아들’을 찾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들’을 찾습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서 인간 세계는 악마로 인해 잘못된 서열화가 움직이고 있음이 나타납니다.

빌립보서 2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니 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빌 2:6-9) 하나님이 찾으시는 참 백성은, 주님이 보여주시는 이 서열화를 따로 보조 맞출 수 있는 백성입니다. 낮은 곳이 구원의 장소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라면 어디든지 구애받지 않고 즐겁게 움직이는 자를 말합니다.

복음 알고 난 뒤에, 세상 살기 힘들어서 칵 죽고자하는 자가 백성이 아닙니다. 이는 자기를 위해 죽고자 하는 자일 뿐입니다. 참 백성은 복음을 위하여, 약속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백성은 어떤 식으로 생산이 될까요? 구약 이스라엘 나라의 특징은, 율법을 지키면 살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죽은데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나라가 지키고자 함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자 하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부부의 관계에서 가족의 관계로 그리고 사회의 관계로 약속 작용을 진행시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세상에서 형성된 ‘자아됨’은 세상에서 돈 우선으로 살아가는 개별자가 가정 속으로 그 정신이 들어오고 부부사이에도 끼어들어오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경제자립이 되지 않는 자식은 자식도 아니요, 돈 못벌어오는 남편은 남편도 아닌게 되는 겁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교회에서 언급해도 이런 자아성이 이미 사회에서 만들어졌기에 신앙생활이란 기껏 해봤자 오락에 불과합니다. 오락이란 자아의 가치를 안 다치고 자신을 좋은 미래와 현재 생활을 기대하는 놀이를 말합니다.

인간의 자아상이란 하나님이 주신 고통속에서 형성됩니다. 그 고통을 이겨내면서 구성되는 것이 자아상이기에 이 세상에 그런 자아상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자신을 기어이 상전부류로 간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과 하늘 사이에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이 세상에서 치워버렸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힘으로 하늘나라에 올 수 있는 발판은 상실되었습니다. 종교나 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대체하는 것들입니다. 그야말로 자체 오락입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이런 마음에 구멍을 뚫는 겁니다.

인간이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인간을 따라붙입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의 완성인 십자가라는 선물이 인간의 마음을 관통하고 그 관통된 사랑을 따로 개별자들이 통합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룹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사회 속에서 비로소 자기 주제를 알고 오직 물로 포도주되게 하신 그 예수님의 피만 드러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