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298강, 299강), 웃음과 비웃음, 해야 될 일 191217

정인순 2019. 12. 18. 08:33



298강           음성              동영상


299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298강-YouTube강의(웃음과 비웃음)

20191217-이 근호 목사


제298강, 제목은 ‘웃음과 비웃음’. 혼자 웃는 것도 웃음이고 그런데 본인은 웃지 않는데 남들이 웃을 때 그걸 비웃음이라 하죠. 혼자 히죽히죽 웃을 때는 누구도 그걸 탓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갔다든지 어떤 심각한 일을 당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모임에 가서 혼자 집에 있을 때처럼 히죽 웃는다면 주위 사람들이 “너 나 비웃어?” 이렇게 되죠.

비웃음은 어떤 때 생기느냐 하면, 타인이 있을 때 남에게 둘러싸일 때 비웃음이 발생되는 겁니다. 혼자 기분 좋아서 웃는 것을 누가 뭐래요. 그런데 혼자 기분 좋아서 웃더라도 남들과 함께 있을 때 혼자 기분 좋아서 웃어버리면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면 너 왜 비웃느냐고 그렇게 상당히 이질적으로 나오겠죠.

그래서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웃는 것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니고 중립상태. 그 다음에 웃는 것을 +로 보잖아요. 웃으면 +, 울면 -. 혼자 있을 때는 0과 +와 -, 혼자 있을 때 웃는 경우와 우는 경우, 그렇게 구분 되겠죠. 그런데 이게 남들하고 같이 있을 때는 내가 혼자 웃어도 비웃음 되고 울면 또 주책맞다고 뭐라 하고. 같이 있을 때는 중립이 성립이 안되죠. 그 쪽 분위기 맞춰야 되니까.

웃음이라 할 때 남들은 웃지 않는데 혼자 웃을 때는 여기 뭐가 있느냐 하면 ‘본인만이 알고 있는 특이성이 발생되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본인만 알고 있는 것을 자기는 알게 되었을 때 크게 웃는다든지 크게 기분 좋게 되겠죠. 그렇게 될 경우에는 남들 웃는데 같이 웃지 않고 혼자 웃는다는 것은 특별하게 하나님의 간섭 하에 있다고 볼 수가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저 분위기 맞춰가며 살아가는 게 인간인데 남들은 웃을 일도 아니고 남들은 울 일도 아닌데 본인이 어떤 걸 보고 웃고 어떤 걸 보고 운다면 이것은 남들을 다루는 방법 말고 특별히 하나님께서 콕 집어서 자기 자신을 그런 식으로 다룰 수가 있습니다.

보통 울고 웃을 때는 남 눈치보고 울고 웃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모든 인간을 각자 구별해서 만들어놨어요. 남들 웃는다고 따라 웃을 필요 없고 남들 운다고 해서 따라 우는 게 아닌 거죠.

마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활동하기 전에 광야에 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 갔듯이 예수님도 똑같은 절차를 밟을 때, 또는 세례요한이 광야에 갔을 때 그 때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은 단 한명도 없죠. 왜? 하나님께서 특별히 다루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광야에 갔을 때 함께 같이 참여한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혼자 광야에서 낙타털옷 입고 고생했죠.

그래서 진정한 인간됨이라 하는 것은 남들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제가 말씀드리고 있는 거예요. 남들 눈치 볼 필요 없다. 남들의 분위기에 너무 휘둘리다 보면 오히려 속으로 물을 수가 있어요. “여러분, 내가 지금 웃어야 됩니까, 울어야 됩니까?”를 하나님하고 의논하는 게 아니고, 뭐 하나님하고 의논할 필요는 없지만, 다른 사람하고 같이 맞춰서 웃고 울려고 한다 이 말이죠.

왜 그렇게 살아야 되죠? 그것은 자칫하면 뭐가 없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특별히 관리한다는 그 의식이 없으니까 ‘어떻게 살면 되지’하는 정답이 없으니까, 정답을 하나님께 받은 적도 없고 그러니까 남들하고 비슷하게만 살아가게 되면 ‘나보고 욕은 안하겠지’라고 그냥 묻혀 들어가는 식으로. 어쩌면 인생이라 하는 게 평생에 묻히면서 살기를 원하고 있지 않은지. 못 묻혀서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지. 우리가 너무나 소모적이고 세속적이라는 것을 생각해봐야 됩니다.

자, 시편 2편 4절에 보면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기름부은 자를 땅에 탁 두시고 그 기름부은 자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일 때. 그 기름부은 자, 메시아죠, 하나님의 아들 또는 성도라 할 수 있는데. 성도도 기름부은 자 맞아요, 왜냐하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받은 적 있을 때에 니가 그렇게 닮고 싶었던 그 세상이 얼마나 너한테 비웃음을 주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하게 합니다.

혼자 집에서 성경공부 한다든지 성경을 볼 때는 혼자니까 주변의 시선이 없으니까 내가 지금 은혜 받았는지 지금 내가 성도인지, 그건 얼마든지 자기의 감정을 조작해낼 수가 있어요. 또 혼자서 기도하고 하다보면 은혜 막 되잖아요.

그런데 문제는 진짜 은혜냐 은혜 아니냐 하는 것은 혼자 독방에서 기도한다고 될 문제가 아니고 사람 있는 곳에, 교회나 사람 있는 곳에 툭 던져지듯이 우리가 한번 나가보자 이 말이죠. 직장에 나가듯이. 나가보게 되면 진짜 은혜 받은 사람은 시편 2편 4절의 말씀처럼 세상은 내가 하는 일에 비웃을 준비가 되어 있음을 한번 발견하는 계기로 삼으면 돼요.

왜냐하면 성경말씀대로 세상은 되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있는 사람은 어떻다? 주변에서 비웃게 된다는 원리. 그 원리잖아요, 시편2편 4절이. 그런데 그동안 우리는 남들한테 비웃음당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하고 가슴 졸이면서 살았습니까? 그리고 남들이 비웃게 되면 ‘내가 뭐 잘못한 일 있나? 내가 해서는 안될 짓을 했나?’

십자가마을 같은 경우에도 마찬가지에요, 여러 사람들의 모임이니까. ‘내가 복음도 아닌데 복음이라고 우기지 않았나?’ 복음이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꼭 남들 눈치 봐야 돼요? 그럴 필요 없잖아요. 복음 아닌데 복음이라 해가지고 남한테 내가 상처주면 어떻게 하냐는, 그런 쓸데없는 걱정.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시키는 것 같으면요, 남들의 호응이 그다지 필요치 않아요. 주께서 시키는 것 같으면 본인만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 되는데 주님이 시키는 일이 아니고 내가 뭔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조작을 하다보니까 뭔가 내가 제대로 했다, 안했다 그 결과를 타인의 반응을 통해서 점검하려는 그런 시도를 할 수가 있어요.

그러면 맨날 하루하루 살면서 맨날 고개 돌리면서 눈치 보기에 바빠요, 눈치 보기에. “여보 내가 지금 잘했어?”, “목사님, 저 믿는 것 맞아요?”, “지금 제가 제대로 인생 천국가고 있는 것 맞습니까?” 맨날 묻기에 바빠. 만약에 그런 사람에게 “당신 지금 지옥가고 있습니다”그러면 엉엉 울고 또 난리. 그런 일 없었지만 예를 들면. 진짜 “당신은 지옥갑니다” 말하고 싶어요. 일부러 골탕 먹이게.

자꾸 주변에 맞추려고 그렇게 할 필요 없다 이 말이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주님은 단독이었고 세례요한도 단독이었잖아요. 뭐 그렇다고 외롭다고 자꾸 짜증낼 필요 없고요. 그렇다고 ‘서글픈 내 인생, 남들이 호응하지도 않는 인생 왜 사냐’ 이렇게 자책할 필요도 없고.

주께서 주시는 그 기쁨과 웃음은 그 누구에게도 빼앗겨서도 안되고 빼앗길 필요도 없고요. 그리고 그들의 반응과 혼탁하게 섞일 생각하지 마세요. 니가 비웃든지 니가 왜 웃냐고 놀리든지 관계없이 나와 주님과의 관계에서 감사하고 기쁘고 하면 그냥 감사의 기쁨, 즐거움의 노래, 그리고 고마움의 마음. 그걸로 밀어붙여야죠.   



299강-YouTube강의(해야될 일)

20191217-이 근호 목사


제299강, 제목은 ‘해야될 일’. “‘예수 믿고 내 존재가 구원받는다’라고 한다면 그럼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요?” 라는 질문은 아마 수백차례 넘게 제가 들었던 이야기에요.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면, 십자가 믿고 구원받았으면 가만히 있으면 되겠네’ 하는데 성경에 보면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장 17절)고 되어있죠.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러면 가만있으면 되겠네요? 그렇지 않죠. 끊임없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에 성령이 계시고 성령은 예수님뿐만 아니고 주변 상황까지 바꾸어줍니다. 바꾸어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멈추지 않고 일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 하시죠.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이 말씀은 ‘내가 일해서 아버지께 영광 돌린다’가 아니고 지금 보조가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아버지가 일하시니”. 아버지는 가만히 있고 아들이 일 다 하는 게 아니고 아버지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아버지와 아들 같으면 가족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가족이 하나의 목표, 하나의 목적 완료를 향하여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면 예수님이 그렇게 일하시거든요.

그러면 성도에게 성령이 왔다. 그러면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성령을 주셔서 예수님이 일한 것처럼 성도도 똑같은 관계에 있습니다. 본인이 가만있고 싶어도 계속 일을 하게 하셔요. 그렇게 되게 되면 내 존재가 구원받았다는 그 존재는 날라가 버리고 그 사람의 하는 일을 통해서 구원된 여부가 나타나겠죠.

간단하게 말해서 복음이 드러나는 쪽으로 일하게 되면 그건 성도고 복음이 안드러나게 되면 그것은 성도가 아니겠죠. 제가 복음이라고 이야기했어요, 방금. 교회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가정에 충실한 걸 말하는 게 아니고 직장에 충실한 걸 말하는 게 아니에요. 복음이 나오게 되면 그것은 성령의 일이고 복음이 안나오게 되면 이것은 육의 일이죠.

갈라디아서 6장 8절에 나온 말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성령의 일은 영생을 거두고 육의 일은 썩어질 것을 거둔다. 사도 바울이 중간지대를 없애버려요. 아예 칼로써 두부를 잘라버리면 매끄러운 면만 있을 뿐이지 중간이 없잖아요. 망치가지고 두부를 깨면 왼쪽, 오른쪽, 중간에 깨진 부분이 있지만 날카로운 칼로 베어버리면 이쪽 아니면 저쪽이잖아요.

이 세상에 성령 받은 사람이 많겠어요, 현재 안받은 사람이 많겠어요? 육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겠습니까, 영의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겠어요? 자연적으로 숫자로 봐서는 육의 일이 많겠죠. 물론 우리가 그 숫자를 하나님이 아니니까 정할 수는 없지만. 뭐 예수님이고 복음이고 간에 하나님조차도 안믿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요.

그렇게 볼 때에 ‘저 사람은 어떻고 나는 어떻다’ 존재가지고 비교하면 안되고 남하고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나는 구원받는다고 그렇게 자기가 장담하거나 결정지을 문제가 아니에요. 남하고 비교하지 말고 ‘지금 내가 무엇을 뿜어내면서 살아가고 있는가’ 라는 것을 봐야 됩니다.

디모데전서 4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사도바울이 제자라고 선언한 사람이 나타납니다. 이름이 디모데에요. 이 디모데는 4장 16절에,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 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그 다음에 “구원하리라”라고 되어 있어요. 구원하리라.

하나님의 구원의 일에 너는 벌써 종사자로, 직원으로 뽑혔다는 겁니다. 단순히 인간적으로 ‘사도바울의 제자다’ 그걸로 끝인 게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직접 성령의 은사를 주셔서 디모데로 하여금 어떤 일에 참여하게 했냐면 구원의 일에, 달리 이야기하면 복음 전파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게 한 겁니다.

그러면 아버지가 일하시고 아들이 일한다면, 그러면 뭐도 움직여야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일할 때에, 지금도 일하시거든요. 그러면 예수님께서 복음 가지고 일을 하신다 이 말이죠. 이 복음가지고 일하실 때 예수님은 안보이잖아요. 그리고 복음도 안보이죠. 복음이라고 하면 어디 실체로 드러나는 게 아니잖아요. 안보이죠.

그러면 보이는 것은 뭐냐 하면, 성령 받아가지고 지금도 예수님의 영, 성령에 의해서 계속해서 활동하는 그 사람만 보이겠죠. 물론 활동한다 해가지고 아침에 몇 시에 기상하고 몇 시에 자고 스케쥴대로 ‘이것이 복음의 스케쥴이다’ 이런 건 없어요. 하루 종일 잠잘 수도 있고 아파서 병원에 입원하는 일을 복음적으로 행할 수도 있고. 그 상황과 그것을 행하는 타이밍은 인간 소관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가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로마서 10장에 나와요. 10장 13절에 보면 구원을 어떻게 받게 하시느냐 하면 이렇게 해요.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그렇게 해놓고 그 다음에 14절,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인간성 좋다든지 그 사람이 나한테 뭔가 재정적으로 보탬이 되겠다든지 저 사람은 나에게 행복을 제공한다든지 저 사람과 있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 그런 관계가 아니고 사람 대 사람의 관계는 반드시 “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답변이 있어야 돼요.

부부로서 둘이 연을 맺었다. 나한테는 아내가 있고 아내한테는 남편이 있다. 그러면 “얼마나 행복하십니까?” 라는 질문은 세상적인 질문이에요. 그건 의미 없어요. 행복해도 지옥갈 수 있으니까. “무엇이 나오던가요?”라는 질문. 그냥 뭐 방귀만 나오더라. 이러면 곤란하죠. “무엇이 나오던가요, 평소의 행동을 통해서?” 또 질문, “무엇이 나오기를 원하십니까, 배우자를 통해서?” 배우자는 결혼하면 늘 같이 지내는 사람이니까.

그러면 이번엔 배우자 말고 자식한테, “자식을 통해서 무엇이 나오던가요?”, “딸을 통해서 무엇이 나오던가요?” 아니 “아들을 통해서 무엇이 나오기를 부모가 원하십니까?”라고 물을 수 있죠. 교회 가면서도 관심은 애 공부 잘하는 데에 관심이 있다면 부모가 복음은 뒷전이고 뭐가 나오기를 원해요? 성적표 좋게 나오기를 원하죠, 자식한테. 그러면 그 사람한테는 뭐가 나옵니까? 사적인 욕망을 기대하겠죠, 욕망.

자, 그게 주의 일일까요? “아휴 하나님 자식 보내주셔가지고 내가 열심히 학원 보내가지고 애 성적 올랐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일일까요? 그게 영생을 거두는 일일까요? 이게 성령의 일일까요? 아니면 썩어질 육을 거두는 일일까요? 썩어질 육을 거두는 일을 하겠죠. 자식도 문제지만 부모 자신도 자식한테, 아까 첫 번째 298강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세상이 원하는 것을 기대했다면 그것은 영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이 아니에요.

여기 로마서 10장 보게 되면 15절에,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그러니까 누구신가 보내셨다는 거예요, 누구를. 성령 받았다는 말은 성령만 달랑 받아 천당 가라 이걸로 끝나는 게 아니고 이 땅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을 보내신 것처럼 이 땅에 성도를 보내신 거예요. 이 땅에 신자를. 왜 보내실까요? 해야될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버지가 일하시고 예수님이 일하시니까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와야 된다? 복음이 나와야 되는 거예요. 맨날 마이크 쥐고 복음 이야기, 신학 강좌 하라는 게 아니에요. 행동이나 모든 그러한 속에서 무엇을 기대하고 있고 무엇을 보고 싶어 했느냐. 무엇을 원하고 있느냐. 그것은 복음이 나오기를, 이 세상에서 썩어질 것이 아니고 성령께서 일하시는 흔적이 나오기를 기대해야 되겠죠.

그러면 기대대로 안되면 어떻게 하냐? 그것은 안된다는 것 자체가 욕심이죠. 왜? 주께서 일하시면. 우리가 놓쳤지. 주께서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모든 일에서 복음이 나오도록 되어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앞으로 그 복음 나오는 모습을 보면서 한번 기대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