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이스라엘
이근호
2019년 12월 4일 본문 말씀: 호세아 5:1-2
(5:1)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5:2)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세상 사람들 끼리 이야기를 하면 모두 자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과 관계 맺어지지 않았기에 자기 노력이나 자기 애씀, 혹은 역경 이겨내기 같은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이 모든 것은 자기 잘남으로 결론 맺어집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 친히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면 이방나라처럼 간주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맺음’이 이스라엘의 본질이 되어야 하는데 그 안에서는 ‘하나님의 챙겨주심’, ‘하나님의 건져주심’이 주된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말썽을 일으킵니다. 이들의 자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을 보여주어야 될 자리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이방나라의 권세자들과 같이 백성들을 상대로 해서 자신이 이익을 도모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답지 못한 모습입니다. 곧 이스라엘이 ‘가짜 이스라엘’이 되어 버린 겁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방치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책임자는 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린 조치가 심판이요 징책입니다. 다른 이방민족들이 하나님을 버린다고 해서 심판과 징책을 내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보이는 목적으로 생겨난 나라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을 증거하기 위해서 ‘가짜 이스라엘’로 전환되는 겁니다.
참된 죄라는 것은 이방민족을 통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이스라엘을 통해서만 알려집니다. 이방민족들이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들은 죄가 뭔지도 모릅니다. 죄의 실체는 이스라엘 안에서 하나님께서 생산되도록 하나님께서 친히 작용하시는 겁니다. 참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가짜 이스라엘’로 전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성립합니다.
열왕기하 15:5에 보면, “여호와께서 왕을 치셨으므로 그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어 별궁에 거하고 왕자 요담이 궁중 일을 다스리며 국민을 치리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사랴 왕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른 나라와는 달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친히 치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궁극적 죄를 뽑아내기 위해서입니다.
기본적으로 죄가 나오는 공식은 사무엘상 15:26에 나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이 본문에서 분명히 나오듯이, 이스라엘이나 왕 보다 하나님께서 ‘말씀’ 위주입니다. 말씀을 버린 왕은 가짜 왕이요, 말씀을 버린 이스라엘은 가짜 이스라엘입니다.
왕이 가짜 왕이 되고, 이스라엘이 가짜 이스라엘로 전화되는 그 과정 속에서, 죄라는 것은 어떤 경우를 통해서 정립되는지가 나타납니다. 열왕기하21:16에 보면,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무죄한 자들’의 억울한 죽음으로 인해 죄가 발생되는 겁니다. ‘무죄한 자의 억울한 죽음 사건’이 발생되지 아니하면 죄가 밝혀지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무죄자 자의 억울한 죽음을 부각시키십니다. 요시야 왕 시대에 왕이 모든 우상제단을 다 척결하는 가운데서 남겨 두는 시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과거에 북쪽 왕인 여로보암왕에게 나와서 죽게 된 선지자를 위한 묘실이었습니다. “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가로되 그대로 두고 그 뼈를 옮기지 말라 하매 무리가 그 뼈와 사마리아에서 온 선지자의 뼈는 그대로 두었더라”(왕하 23:17-18)
이스라엘 나라의 최초의 왕은 사울왕입니다. 그런데 이 사울왕은 핋리 가짜 왕이 되어야 합니다. 역대상 10:13-14에 보면,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즉 사울왕은, 무엇이 가짜 왕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먼저 하나님에 의해서 세움을 받은 왕입니다. 이 사울왕으로 인해 사울왕을 대신해서 진짜 왕으로 온 다윗왕은 사울왕으로부터 ‘무죄한 자의 고난’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제사장도 예외가 아닙니다. 엘리 제사장이 가짜 제사장으로서 세움을 입고 제 역할을 제대로 하게 됩니다.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사랑한 자로 엘리 가문을 영원히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보라 내가 네 팔과 네 조상의 집 팔을 끊어 네 집에 노인이 하나도 없게 하는 날이 이를지라”(삼상 2:30-31)
심판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성질을 건드려서 보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마땅히 가짜 인간 흉내를 내기에 본래 가야할 자리가 지옥불인 겁니다. 하나님의 가록한 지옥 형별을 이해하는 자는 어떤 자인가 하며는 자신이 원래 지옥가도 마땅하다는 인식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 자를 하나님께서 챙겨주시는 이 챙기주심의 은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의외에 사랑에 감복하는 겁니다. 열왕기상 17장에 보면, 사르밧 과부가 나옵니다. 그 당시 온 이스라엘이 수년 동안 가뭄에 찌들려도 엘리야 선지자와 함께 있는 이 과부의 집의 곡물통과 기름병에는 바닥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의 ‘내어버려두지 않으심’의 은혜가 얼마나 최종적으로 귀하고 고마울 일인지를 압니다. 반면에 자기 이야기밖에 내놓을 게 없는 자들은 하나님에 의해서 버림받은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옥에 가서 이를 갈며 후회하는 미래상을 알지 못합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버림받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원래 인류 자체가 가짜였습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유증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나무 있는 곳에 추방당했을 때, 인간은 마땅히 지옥불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성도가 자신이 지옥에 가야 마땅함을 아는 것은 무죄한 자의 최종적인 죽음인 십자가를 통해서입니다.
이로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들 속에서만 유일하게 십자가가 살아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아무리 가난하고 아프고 망해도 십자가로 구원하시는 주님께 감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8강-호 5장 1-2절(가짜이스라엘)1912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5장 1-2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5:1-2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패역자가 살륙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징책하노라.”
본문에 보면 제사장이 나오고, 그 다음에 이스라엘 족속이 나오고 또 왕족이 나오지요. 그리고 그들에 대해서, 호세아를 통해서 하나님이 예언하시기를 심판이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바라보면서, 관계하시면서 제사장을 세우고 왕족들을 세워놓은 그 이유가 뭐냐?
세상나라, 이스라엘 말고 세상나라에 진정한 심판, 그리고 진정한 구원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아직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구약시대기 때문에 이스라엘에게만 심판과 구원이 뭔지를 알려줬습니다. 심판과 구원을 알려주기 위해서 필요한 직분들이 있었는데 그 직분들이 뭐냐? 제사장들이고, 이스라엘족속이고, 왕족입니다.
제사장과 왕족은 그리고 백성들은 전부 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하에 한 나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드실 때에 그냥 만드는 것 자체로서 구원이 되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들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굉장히 감사가 절로 될 수밖에 없겠지요.
이 말은, 이스라엘을 만들었다는 그 자체가 ‘더 이상 너희들에게만 심판이 없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께서 다루시면 굉장히 고맙겠지요. 하지만 구약의 이스라엘 자체가 분명히 이스라엘 맞아요. 하나님이 직접 만든 참된 이스라엘 맞습니다.
그런데 그 이스라엘이 뭐로 변해야 되느냐 하면, 가짜 이스라엘로 변해야 돼요. 진짜 이스라엘 맞는데 그 진짜 이스라엘은 왜 만들어놓았는가? 가짜 이스라엘을 만들기 위해서 진짜 이스라엘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다른 나라하고의 차이점은 이렇습니다.
보통 이방인들, 우리같은 이 세상 사람들은 어떤 이야기를 할 때에 자기 입에서 나오는 모든 이야기가, ‘자기가 그동안 힘쓰고, 애쓰고, 용을 써서 내 인생이 역경과 고난 가운데서 이런 노력을 해서 이만큼이라도 살아왔다.’는 그러한 내용이 주된 내용이에요. ‘내가 내 운명을 이렇게 개척했다. 내 인생을 나는 이렇게 꾸려나갔다.’ 들어보게 되면 전부 다 자기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만들어진 나라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해야 될 일은 뭐냐? 우리가 이렇게 애썼다, 노력했다, 이렇게 수고했다, 나는 이렇게 역경을 이겨냈다는 자기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그 관계이야기가 이스라엘을 통해서 유일하게 흘러나와야 돼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만든 나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가짜 이스라엘이라 하는 것은 이겁니다. 이방나라하고 같이 되어버린 거예요. 방금 제가 이방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산다는 것을 말씀드렸지요. 무심코 누구 이야기를 할 때 자기 이야기, 자기 과거 이야기, 자기스토리만 계속 흘러나오는 거예요. 혼자서 애썼다는 거예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혼자서 애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애썼다, 하나님이 수고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때문에 힘들어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민족과의 그 관계가 나와 줘야 그게 제대로 이스라엘의 취지가 맞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나오지 않고 이스라엘 스스로 고생했고, 내가 수고했다고 나오면 하나님께서는 그 이스라엘을 가짜 이스라엘로 전환시키고 마는 거예요.
오늘날 성도하고 성도 아닌 사람과의 차이가 뭐냐? 복잡하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만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본인 이야기 나오면 그것은 성도 아니고요. 본인 이야기가 아니고 어떤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나를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몰아넣고, 이끄시고, 키워주시고, 살펴주시고, 인도하셨다고 그분 이야기, 주님이야기가 나오면 그것이 참된 성령 받은 성도라 할 수 있어요.
성령이 있어야 성도고,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되게 하는 그 기능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제사장과 왕족들을 지적을 하는 것은 그 이스라엘이 이방나라화 될 때, 다시 말해서 참된 이스라엘이 가짜 이스라엘 될 때 어디서 문제가 발생되느냐 하면, 하나님과 직접 통해야 될 그 직분을 가진 제사장, 그리고 하나님의 지시를 따라야 될 왕과 왕족이 하나님관계가 절단되고 끊어져버리면 그것은 이방나라처럼 백성들을 자기를 살찌우기 위하여 잡아먹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미스바’나 ‘다볼’이라는 이 지명이 뭐냐 하면, 소위 그 당시 제사장이나 왕족이라는 권력자들이 백성들을 등쳐먹던 장소에요. 유인해서 백성들의 토지나 재산을 빼앗든지 해서 이스라엘을 자기들의 나라로, 권력자들을 위한 나라처럼 전환시켰던 일들이 났던 곳이에요.
미스바나 다볼은 이방제단에 제사를 드려서 복 받기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사기를 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잘 보여서 복을 줄 테니까 너희들이 재산을 아낌없이 우리에게 바쳐라.”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빙자해서 그들이 살궁리를 했고 권력을 강화시켰던 그런 짓들을 한 곳이 바로 미스바와 다볼이라는 곳입니다.
여기 누가 합세했는가? 제사장들과 왕족들, 권력자들이 끼리끼리 다 해먹은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방치하거나 모른 척할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자체가 하나님을 드러내기 위한 나라기 때문에 하나님을 드러내는데 방해되는 것을 주님께서는 그냥 가만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러면 이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원래 보여줘야 될 것은 뭐냐?
이 많고 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유일하게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두어주었다는 거예요. 챙겨주신다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끄셨다는 거예요. 이방민족 한가운데를 통과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 챙겨줘서 이방민족들이 살고 있던 이 약속의 땅, 아직도 포로 잡혀가기 전이기 때문에 약속의 땅에 살고 있으니까, 그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친히 전쟁을 벌여서 이방민족을 붙여서 그들이 지도록 조치해서 이 땅을 거저 주셨다는 겁니다.
그만큼 챙겨주신 거지요. 챙겨주셨다면 오늘 본문에서 심판은 뭐냐? 심판은 바로 챙겨주심의 반대말, 그냥 버려두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거예요. 그게 심판이에요. 성도가 되었다면, 자기가 정말 진정한 성도라면 자기에게 어떤 경우가 될 때 가장 처참하고 비참한 경우가 되는가를 성도라면 알아야 돼요.
그게 뭐냐? 몸 아프고, 가난하게 되고,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 배척당하는 것, 이것보다 더 큰일은 없습니다. 가장 심각한 일은 하나님께 버림받는 거예요. 성경에 보면 마태복음 8장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아브라함과 백부장 이야기하면서 10절에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칭찬하시고 11절에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불지옥으로 심판할 때 사람들을 보게 되면 가장 이해 못하는 점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그렇게까지 인간들을 혹독하게 처벌할 이유가 과연 있겠습니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강력하게 지옥불에서 못빠져 나오도록 해서, 한 십년 있다가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고 영원토록 지옥불에서 고통하거든요.
그렇게 하나님이 연약한 인간을 상대로, 아무것도 아닌 쓰레기같은 인간을 상대로 혹독한 처벌을 감행한다는 것이 인간입장에서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는 거예요. 그렇게까지 심하게 혹독하게 다루실 이유를 도대체 공감을 못하겠다는 겁니다. 지금껏 교회에서나, 교회 밖에서 만나본 사람들에게 이해가 안되는 것이 뭐냐? 지옥불에 사람들을 집어넣을 때 너무 심하지 않느냐, 하는 생각들을 다 갖고 있어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 8, 9절에 보면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형벌도 10년, 20년, 백년 살고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희망이라도 있지요. 아예 희망이 없어요. 들어갔다 하면 끝이에요. 영원토록 형벌 받아요. 천년만년이 아니고 더 길어요. 끝이 없어요. 끝 자체가 없어요. 지옥에 한번 들어가면 그것으로 종신형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 싶어도 ‘예수 안 믿는다고 영원한 지옥불에 가두는 그런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 의심이 든다는 겁니다. 사람이 아무리 자기한테 혹독하게 하고 못되게 굴어도 막상 나쁜 짓 하고 들키고 난 뒤에 용서해달라고 빌면요, 어느 정도 자비를 베풀고 인자를 베푸는 것이 인간들 속에도 남아 있는 양심이라는 것이 있거든요.
‘측은지심, 남을 불쌍히 여기는 그런 마음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에게 선한 마음을 주신 하나님이 선한 것이 분명하다면 인간들이 자기 아들 예수 안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영원한 형벌에 두 번 다시 못빠져 나오도록 가둬놓고 지옥불에 집어넣어버린다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냐? 진짜 하나님이 그런 분이겠는가?’라고 하면서 도대체 믿기지를 않는 거예요.
사람들이 성경말씀을 안 믿고, 하나님을 안 믿고, 예수 안믿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믿지 못할것만 제공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인간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를 진짜 인간으로 알아요. 진짜 인간으로 알기에 진짜 하나님하고 진짜 인간하고 같이 대화나 해보자는 거예요.
무엇이 진리고, 무엇이 하나님의 계획이며, 하나님의 계획을 죽 한번 펴보라는 말이지요. 화투판에 화투를 죽 펴듯이, 포커판에 포커를 펴서 어떤 패를 갖고 있는지 펼쳐보게 되면 우리가 어지간하면 하나님을 안 믿겠습니까, 한 번 펼쳐보라고, 좋게 대화해보자고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믿을만하면 얼마든지 믿을 용의가 되어 있다는 것이 인간들의 이성적인 생각이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그들의 잘못이 뭐냐? 본인이 가짜인간이라는 것을 몰라요. 인간 맞지요. 분명히 인간이에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담의 자손 그 인간을, 아담을, 아담의 분신들을 가짜 아담으로 바꿔놓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이에요. 왜냐하면 진짜 아담은 따로 있기 때문에 그래요.
본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몰라요. 하나님께서 가짜하고 이야기할 것이 뭐가 있겠어요? 해봐야 가짜니까 엉터리만 믿지요. 악마가 이야기하는 것만 믿고 정작 주님이 이야기하는 것은 안 믿을 수밖에 없어야 그게 가짜가 가짜다운 거잖아요. 믿을만한 증거를 줘도 인간은 못믿어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제가 강의하고 설교하니까 들리는 소리가 어떤 사람들이 저를 공격하고 불평한대요. 어떻게 불평하느냐? 이근호 목사는 잘 믿는 사람도 다 신자가 아니라고 하더라고 하는 거예요. 잘 믿는 사람도 신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라는 거예요. 뭘 보고 잘 믿는다는 거예요? 가짜면서. 가짜가 믿어봤자 가짜천국이고, 가짜가 믿어봤자 가짜 예수지요. 다른 예수다, 그 말이지요.
본인이 가짜라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입장에서 아무리 교회 나가고, 하나님 믿고, 예수 들먹이면서 거들먹거려도 그것은 그 자체가 가짜 인간이고, 가짜 교회고, 가짜 예수에요. 그들이 가고자 하는 것은 가짜 천국이고. 그러면 진짜는 어디 있습니까, 묻고 싶지요. 진짜는 가짜를 통과해야 진짜가 나와요. 가짜가 되지 않고서는 진짜가 안나오는 법입니다.
그러면 가짜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 가짜 인간과 진짜 인간, 가짜 제사장과 진짜 제사장의 차이점이 뭐냐? 사무엘상 15장 2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하고.”
다시 읽습니다. 중요하기 때문에요. 중요한 정도가 아니고 핵심이에요.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라고 되어 있어요. 사울을 왕으로 만든 분이 하나님이에요. 사울 본인이 왕 되고 싶어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이 사울을 왕 되게 하셨어요.
왕 되게 한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네가 가짜가 되는, 가짜왕의 역할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왕이 되게 하신 거예요. 진짜 왕은 뒤에 나오는 다윗이기 때문에. 그런데 진짜 왕이 가짜가 되는 그 과정 속에서 정작 하나님의 뜻이 발췌됩니다. 그게 뭐냐? 말씀이 우선이라는 거예요. 왕이 말씀을 버렸으므로 이스라엘왕이 되지 못한다고 되어 있거든요.
이 말은 뭐냐? 이스라엘 왕 뿐만 아니고 이스라엘 자체가 말씀을 버리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네가 위주가 아니고 말씀이 너보다 우선이라는 거예요. 말씀을 위해서 네가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선악과 따먹지 말라는 그 말씀을 위해서 인간을 만들어놨어요. 그런데 인간이 이미 선악과 따먹었잖아요. 그러면 그 인간은 진짜 아담에서 가짜 아담이 될 수밖에 없고,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리고 진짜 아담,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오시지요. 그러면 아담과 예수님사이에 뭐가 있느냐? 왜 인간은 가짜인가를 말씀이 중간중간 개입해서 하나님은 어디까지나 말씀중심이지 만들어진 인간중심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구약과 신약이 펼쳐지는 겁니다.
설교 처음부터 다시 해볼까요? 어떤 사람이 누군가 만날 때, 그래서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자기 스토리, 나는 이렇게 고생했고,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살았다고 나온다면 거기서는 어떤 말씀, 또는 하나님과 본인과의 관계가 전혀 없어요. 자기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백프로 가짜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성도겠지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내가 진짜 인간이라 여기고, 내가 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했지만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성령으로 주님께서 개입하셔서 너는 가짜고 진짜는 주님이다, 라는 것을 깨닫게 하셨습니다.”라고 예수님의 스토리, 예수님의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 사람은 바로 성도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역대상 10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사울왕에 대한 이야기인데요.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사울이 신접한 여인을 찾아갔어요. 물론 하나님께서 일부러 그렇게 하셨어요.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게 했어요. 점치는 여인, 굿하는 여인, 죽은 사람 불러내는 여인을.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 사울이 가짜 역할을 충실히 하기 위해서. 왜 사울왕은 가짜역할을 해야 되는가? 진짜 숨겨진 죄의 실체는요, 이방나라가 아무리 죄를 지어도 그들은 죄의 궁극적 실체를 몰라요. 진짜 죄는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 이스라엘 안에서만 진짜 죄의 실체가 드러나는 겁니다. 다른 나라는 죄가 뭔지를 몰라요.
죄가 뭔지도 모르고 죄짓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이유 때문에, 함께 하는 나라라는 이유 때문에 그 나라를 통해서 진짜 죄, 진짜 의, 진짜 천국, 진짜 영생, 진짜 메시아를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걸 보여줄 때 하나의 과정이 필요한데 그게 뭐냐? 이스라엘이 가짜로 전환되는 과정이 꼭 필요한 거예요.
제사장은 가짜가 되어야 되고, 왕은 가짜들이 되어야 돼요. 그 가짜의 근거는 제가 아직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열왕기하 21장 16절 “므낫세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유다로 범하게한 그 죄 외에 또 무죄한 자의 피를 심히 많이 흘려 예루살렘 이 가에서 저 가까지 가득하게 하였더라.” 무죄한 자의 피를 많이 흘렸다. 여기 무죄한 자가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의 왕이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그 이스라엘왕은 무슨 일을 할 수밖에 없느냐? 억울하게 죽는 무죄한 자의 희생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 무죄한 자의 희생이 없으면 본인들이 가짜인 것을 모르게 되어 있어요. 자기들이 가해자라는 인식이 없게 되는 겁니다. 열왕기하 23장 17, 18절에 봐도, 거기에 요시아왕이 나오는데 요시아왕이 산당들과 우상제단들 전부 다 없애버립니다. 없애는데 예외로 딱 하나의 장소는 없애지 않았어요.
열왕기상 23장 17, 18절에 보면 “요시야가 이르되 내게 보이는 저것은 무슨 비석이냐” 하고 물으니까 “성읍 사람들이 고하되 왕께서 벧엘의 단에 향하여 행하신 이 일을 전하러 유다에서 왔던 하나님의 사람의 묘실이니이다.” 이것은 옛날에 여로보암시대 때, 요시아보다 옛날 사람이지요, 약 300년 전쯤의 일인데 그 옛날 남쪽에 있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지시를 받고 북쪽의 여로보암왕에게 장래를 예언하고 책망하기 위해서 갔던 그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사람이 북쪽에 갔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죽었던 선지자의 묘에 대해서 요시아왕이 “다른 것은 다 허물되 이것은 허물지 말라.” 왜? 그것은 억울한 죽음이니까. 억울한 죽음이 있어야 그 주변이 죄의 극치로 다 드러나기 마련이에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그 무죄한 죄, 억울한 죄를 유발시키고 생산하고, 그리고 아까운 생명을 하나님께서 애매하게 죽게 만드는 이유는, 바로 죄라는 것은 장차 하나님께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모든 인간으로부터 십자가에 죽는 억울한 그 죽음이 하나님보시기에 하나님이 정말 말씀하고자 하는 죄의 극한입니다. 진짜 죄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아까 여러분이 보았다시피 데살로니가후서 1장 8, 9절에 보면, 예수를 믿지 않는자가 영원한 지옥불에 가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예수님이 모든 인간이 가짜라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유일한 사건을 짊어지고, 그 사건을 다 이루신 분이에요. 다른 어떤 인간을 만나도 죄라는 것을 제대로 몰라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서만 우리가 가짜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구약에 있는 모든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아가 억울한 죽음을 통해서 인류가 하나님 앞에 지옥가도 마땅한 존재, 가짜 인간의 집합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구약이 전개되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아까 했던 질문이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고 무슨 억하심정이 심해서 영원한 지옥불에 보내는가? 너무 혹독한 처사가 아닌가? 너무 가혹한 처벌이 아닌가?’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리고 성도라고 생각하면서 ‘그래. 하나님께서 일부러 지옥을 만들어놨다면 우리는 이 지옥을 만드시고 처벌하시는 하나님의 그 처벌에 공감해줘야 우리가 성도답다.’라고 할 때 하나님의 그 가혹한 처벌에 같이 동참하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상상력을 다 동원해요. 그 상상중에서 대표적인 상상이 뭐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채찍을 맞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 아픈 만큼 복수하기 마련이니까 ‘네가 나를 때렸으니 네 쪽에서도 한 번 당해봐라.’ 그래서 때리다 보니까 너무 심하게 때려서 지옥불까지 들어갔다. 그래서 우리는 ‘나도 예수님처럼 한 번 당해봐서 아, 이 아픔이 주께서 인류를 지옥불에 보내시는 그 아픔과 일치된다.’라는 것을 몸소 체험하고 싶어하는 그런 충동이 일어나겠지요. 그것을 해마다 필리핀에서 하고 있습니다.
메리 깁슨이라는 배우가 감독이 되어서 만든 이라는 그 영화도 하이라이트가 뭐냐 하면, 채찍에 납을 달아서 예수님의 등짝을 때릴 때마다 살점이 뚝뚝 사방팔방으로 튀어나가는 그 장면을 극화시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이렇게 고생을 했으니까 너희들이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하나님을 우리가 이렇게 때렸으니까 이제부터 반성하고 “우리가 때렸습니다. 잘못했습니다.” 회개하게 되면 우리는 지옥을 만드신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어서 동의하고 믿게 된다. 그런 쪽으로 유도하는 영화에요. 한 20년 전에 만들어진 영화, 저도 그 영화를 봤습니다.
굉장히 가학적인 영화였어요. 그러나 그거 다 엉터리입니다. 그럴 것 같으면요 구원받기 쉬워요. 일단은 한두 달간 병원에 입원할 요량을 하고 십자가를 만들어요. 예수님이 취했던 십자가와 동일한 나무모양을 만들어서 타잔처럼 팬티만 입고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다가 그 무게에 못이겨서 한 번 쓰러져 보는 거예요. 예루살렘에 가보세요. 예수님이 쓰러진 곳, 예수님이 쉬었다 가신 곳, 이런 식으로 열 다섯 곳을 만들어서 팻말을 다 해놨어요. 예수님 재판정부터 갈보리언덕까지. 그 동영상도 제가 찍어서 올려놨습니다.
예수님이 힘들어서 쓰러진 곳, 예수님이 힘들 때 어떤 사람이 물을 건네서 마신 곳, 구라도 그런 구라가 어디 있는지 다 그런 식으로 해놨어요. 그 아픔을 감정적으로 이입하기 위해서. 같이 공감하게 되면 믿음이 크게 늘어날까 싶어서 그렇게 하는데 그것 다 마귀짓입니다. 대체 우리가 얼마나 아파야 예수님 아픔에 일치되겠어요?
그런 시도 하지 마세요. 그거 시도해봐야 로또 당첨되면 그 아픔 다 잊어버리고 ‘감사합니다’가 터져 나오는 것이 인간이에요. 그러면 왜 그렇게 지옥불을 만드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뭐냐? 하나님께서 건져줬다는 거예요. 챙겨줬다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지옥불이 원래 가야 될 원래자리에요. 그게 정답이에요. 인간은 원래 지옥가야 돼요. 가짜니까.
이스라엘이 왜 좋으냐 하면, 가야 되는데 너희만큼은 내가 버려두지 않고 챙겨준 거예요. 제가 아까 말씀드렸지요. 인간에게, 성도에게 가장 무서운 경우는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것이라고. 그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에요.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버림받는 거예요. 재벌이 되어도 버림받으면 그것은 소용이 없어요. 인생 끝장 난 거예요.
그리고 몸이 아프고 가난해도 안버려지면 그것은 복받은 겁니다. 땡잡은 거예요, 그것은. 최고의 행운이에요. 거지 나사로가 버림받지 않았어요. 나사로의 뜻이 ‘하나님이 나를 구원한다.’는 뜻이에요. 아무리 거지가 되어도 버리지 않는다면 그것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버려진다는 말은, 원래 인간에게 합당한 원래 자리가 지옥입니다. 왜? 창세기 3장에서 두루 도는 화염검으로 이미 생명나무 보지 못하도록 차단시켜 버리고, 저주받는 것이 우리 인간의 운명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우리의 자리가 무슨 자리냐 하면, 저주받는 자리, 지옥자리가 원래 자리에요. 그것을 이상스럽게 여기지 마세요. 그것은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에게 버림받아 지옥 가는 이것은 우리의 원래 자리를 찾아가는 거예요. 마귀와 한통속이 되었기 때문에 마귀를 위해서 만든 지옥에 우리가 합세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거예요.
오히려 이상한 것이 뭐냐 하면, 가야될 지옥인데 건져준 것이 이상하지요. 안가게 해주신 것이 이상한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건져줬건만 가짜 제사장, 가짜 왕족으로 전환되어서 하나님께 버림받고 심판받는 겁니다. 그러면 제사장은 어떻게 되는가?
사무엘상 2장에 보면, 한나라는 여인이 아기를 못낳아요. 아기를 못낳는데 아기를 낳게 됩니다. 그 아기 이름이 사무엘이에요. 사무엘상 2장 29,30절에 보면 “너희는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그 다음에 잘 들어보세요.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찌게 하느냐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전에 네 집과 네 조상의 집이 내 앞에 영영히 행하리라 하였으나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결단코 그렇게 아니하리라.”
엘리제사장의 집을 저주해버립니다. 저주한다는 말은, ‘이제부터 너하고 안 논다. 내가 놔버리기 때문에 본래의 네 자리로 가라’는 말이지요. 본래의 자리가 뭐냐? 저주의 자리지요. 하나님께서 챙겨주지 않는 그 자리로 돌아가라, 그 말입니다. 가짜지요. 가짜가 자기자리 찾아가는 것이 뭐가 이상해요? 당연한 거지요.
‘하나님이 지옥의 형벌을 만들어서 지옥불에 간다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조치가 참 정당하고 당연한 겁니다.’ 하는 마음은 어떤 사람에게서 나오느냐 하면, ‘원래 나는 지옥에 가야 됩니다. 그게 내 자리입니다.’ 하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의 조치가 충분히 공감이 되고 동참이 되는 거예요. 오히려 챙겨주는 그것보다 더 귀한 복이 없기 때문에.
그래서 사무엘상 2장 30절에 보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 이 시점에서 아까 읽었던 사무엘상 15장 26절을 다시 읽어봅니다.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나는 왕과 함께 돌아가지 아니하리니 이는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
이 원칙은 지금껏 하나님이 양보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챙겨주신 자에게 증거가 있다면 무엇이냐? 열왕기상 17장 14절에 보면, 거기에 사르밧 과부가 나와요. 엘리야 선지자도 나오지요. 14-16절에 보면,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는 다하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저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저와 엘리야와 식구가 여러날 먹었으나 여호와께서 엘리야로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3년 6개월 동안 가뭄이 들어서 완전히 모든 것이 초토화된 이 마당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준다는 의미가 뭐냐? 엘리야와 함께 했던 그 사르밧 과부한테는 밀가루통의 가루가 다하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나오게 하시는 것, 지금 일용할 양식을 매일같이 주신다는 그 말입니다.
지금 일용할 양식을 주시는 것처럼 ……, 오늘 여러분 저녁 굶고 왔습니까? 저녁 아직 안드셨을 수도 있겠다만, 그러면 하루 세끼 굶습니까? 하루 세끼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하는 그 말은 우리가 지금 양식을 안 받아도 되고, 지금 죽어서 지옥가도 마땅한데 사르밧 과부를 챙겨주심처럼 매일같이 챙겨주시는 증거가 우리에게 주시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사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판의 조치에 동의하는 사람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버리지 않는 사람이에요. 세상에 나가 보세요. 출세지향적이고 성공지향적이고, 조기교육이다 해서 모든 관심사가 부자 되는 것, 잘먹고 잘 사는 것, 그것밖에 더 있어요? 전부 다 마이스토리, 나의 이야기밖에 없잖아요. 나의 소망, 나의 기대, 나의 희망, 그것만 챙기잖아요.
이 마지막 시대를 로마서 1장 24절이 잘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더러움, 그들의 더러움에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두는 거예요. 버림받는 거예요. 그 끝은 하나님의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데 사람들은 몰라요. 그리고 로마서 1장 28절에 보면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거 뭐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지요. 목사가 하나님 이야기, 예수 이야기를 하면 미안하다니까요. 좋은 아버지 되기, 출세하기, 복받기, 그런 이야기 안하고 예수님 이야기를 하면 어떤 때는 미안할 정도에요. 왜? 안들으니까. 복음을 듣기 싫어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마음을 갖고 교회 오든지 빠지든지 하거든요. 귀신을 속이세요. 다 드러나는데?
하나님께 버림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모르고 ‘내가 하나님 섬기니까 보상해내세요.’ 하고 땡깡부리는 거예요. 가짜 인간이, 감히 가짜 인간이, 지옥갈 가짜 인간이 진짜 하나님하고 맞상대하려고 덤벼들어요. 지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안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해결책을 준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은 자기말씀의 해결책만 줬을 뿐이에요. ‘어떤 경우라도, 지옥 보내서라도 나는 말씀자체를 완결시키겠다. 성취시키겠다.’ 하나님은 그 고집뿐이에요.
말씀이 우선이지 우리가 우선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인들은 자기가 우선이에요. 춥다고 교회 안나오고, 무슨 핑계를 대고 교회 안나오고요.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내어버려두사. “내가 아예 너 버려놓았다. 이를 갊이 있으리라.” 결국 지옥가면 후회막심이지요. “이를 갊이 있으리라.”
진짜 중요한 것을 눈치 못채고, 감이 다 떨어져서 그것도 모르고, 헛되고 헛된, 더욱 더 자기를 지옥가게 할 수밖에 없는 돈의 유혹, 권력의 유혹, 자기자랑, 자기스토리, 자기 잘남, 거기에 몽땅 자기의 몸과 마음과 정욕을 다 던져놓고 ‘나 이만큼 괜찮게 되었다. 나 이만큼 노력해서 이만큼 성공했다.’ 그 이야기 빼놓고 다른 이야기 들려오던가요?
이 가짜세상 속에서, 그래도 하나님께서 성령 주셔서 꾸준히 사랑하는 자를 버리지 않는 이것보다 더 큰 보물은 없음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파악하게 하옵소서.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것들이 자기 잘난 이야기밖에 없다보니 우리가 같이 병들었고, 가짜인줄도 모르고 그게 진짜인줄 알고 같이 따라가고 추종했고 부러워하지 않았습니까? 차라리 강도와 세리와 거지를 부러워할 수 있는 그런 자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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