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4:6-7 / 죄의 생산

정인순 2019. 11. 6.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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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생산

이근호
2019년 11월 6일              


본문 말씀: 호세아 4:6-7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4:7)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은 공격으로 나옵니다. 말씀을 지켜라 고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지킬 수 없으니 제거하겠다고 공격하십니다. 즉 말씀은 말씀 자체를 위해서 있는 것이지 결코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도 말씀의 구원이지 인간 구원용도가 아닌 겁니다.

하나님께서 법의 한도를 통해서 인간을 법에서 떼내고자 하십니다. 마치 바다가 오염되었을 때에 흡착포를 뿌려서 기름을 그 천으로 빨아들여 같이 버리고자 하시는 작전을 벌리시는 겁니다. 이렇게 일하시는 이유는, 법을 법답게, 말씀을 말씀답게 하지 못한다면 결코 인간이라고 할 수없다고 선언하시는 겁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조치에 대해서 인간들은 평소에 다음과 같이 반발해 왔습니다. 번성하니 이는 우리가 하는 일이 잘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냐는 식입니다. 인간들이 번성을 원하는 이유는 사는 것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그러합니다. 세상 살이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력감을 갖고 있습니다.

자칫하면 자신이 흙이 될 수 있다는 점에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간은 마땅히 흙으로 물질화 되어야 합니다.(창 3:19)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하늘의 법칙을 거부하고 반항하려는 성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조건 살아남는 것이 근원적인 본성으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 힘을 모으려고 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법을 거론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법을 이스라엘은 그런 식으로 활용해 왔던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이스라엘은 이방나라에 없는 특수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제사장 중심 시스템’입니다. 제사장이 없는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일 수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된다는 것은 곧 제사장에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입니다.(레 21:4) 이스라엘이 움직인다는 말은 곧 제사장이 하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일 때나 가능합니다. 제사장을 구심점으로 해서 율법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나 이방민족에서는 제사장을 중심으로 하는 법이 없습니다.

이방민족에게 있어 모든 시작은 “나는 살아남는 것이 내게 합당한 권리다‘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힘을 모으기 위해 지식과 법을 찾게 됩니다. 그 지식과 법으로 자기 번성을 추구합니다. 법의 정신을 구현함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살아남는 것을 진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법정신은 그 출발이 자기 존재의 마땅함에서 비롯됩니다.

제 2차 대전이 끝나고 전범재판을 했습니다. 대표적인 전범이 유대인 600만명을 학살한 바로 그 참혹의 범죄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회개하고 사죄하게 되는지를 세계 모든 사람이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히만이라는 그 전범자는 법정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무죄하다! 사람들은 경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습니다. 자신은 단지 독일법에 따라 살아가는 충실한 공무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비록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줄 모르겠지만 세상 법에 대해서는 죄가 없다. 국가의 법따라 근무하는 공무원에서, 국가법에 태만하고 게으려면 그것이 바로 죄가 될지언정 그 법에 충실했던 내가 어떻게 죄 있다 할 수 있느냐?”고 항변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의 평범성’입니다. 악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유별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지극히 평범한 의인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사회적으로 극악무도한 범죄자를 자신의 반대편에 있는 인물로 세워놓고 사정없이 비판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제사장들이 보여주는 ‘죽음이 현실성’ 안으로 들어가려고 나서지 않습니다.

살려고 합니다. 이게 악입니다. 인간은 자기 주변이 외롭지 않고 그득하기를 원합니다. 인간의 고통과 눈물은 자기를 지키는 자기 영역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의식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해 하나님도 계시고 율법이 있다고 우깁니다. 이게 ‘악’이요 악은 이처럼 도처에 평범한 얼굴로 펼쳐져 있습니다.

모두 많은 주변인들이 자기를 둘러싸게 되면 그만큼 안심이 되고 계속 살 수 있는 확률이 높 아진다고 여깁니다. 자기 주변에 아무도 자기를 주목하지 않고 관심두지 않을 때 사람은 스스로 죽고 싶어합니다. 모든 사람이 떠날 때,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고 여깁니다. 그러니 평소에 얼마나 사람들은 자기에게 힘이 되는 사람들이 자기 곁에 포진해 있기를 원합니까!

이게 바로 ‘수평적 삶 인식’입니다. ‘수직적 삶 인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번성을 추진하는 그 움직임을 강제로 법으로 스톱시키십니다. 그게 바로 법의 취지입니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고 정지를 시켜놓았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질(質)이 보입니다. 즉 이 순간 하늘에서 뭐라고 이야기하시는가를 들어 보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꾸만 옆으로만 자기 영역을 확대하려고 합니다. 자신이 약해질 때 즉각 도움을 줄 위인들이 많이들 있기를 원하고 그래야 안심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수평적 삶이 악의 평범성이요 그런 인간들이 많이 모일수록 악은 생산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악의 급하게 증거됩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지식이란 권력을 양산합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응축되고 접혀져서 주체로 형성됩니다. 즉 ‘내 편이 많다’는 겁니다. 하지만 정작 하나님의 법은 인간 세계의 도움을 벗어나는 따로 그 완성을 내다봅니다. 진정한 제사장의 출현을 향해 달려갑니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제사장 나라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된 제사장 중심의 나라에서 개인적인 주체를 손을 놔버려야 합니다. 요한일서 5:18-19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 없는 자’로 살아가는 것은 모든 것은 최종 제사장 중심으로 나라와 완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아 6:1-2에 보면,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모두 최종 제사장이신 예수님 덕분이요 작품이요 결과물로서의 천국백성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여서 자유 안에서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강-호 4장 6-7절(죄의 생산)191107-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4장 6-7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4:6-7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는 말은, 인간이라는 것이 그냥 인간이 아니고 하나님의 원칙과 원리, 약속, 그런 것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사람취급을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특히 하나님의 내 백성,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법을 버리니까 거침없이 자기 백성도 버리겠다고 호세아를 통해서 선제공격해 놓으시는 겁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은 이 땅에 대한 공격용이에요. 왜 이 세상을 말씀으로 공격이 가능하냐 하면, 이 세상은 말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말씀 무너지고 말씀이 없으면 그것은 살아도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망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법을 줄 때 우리 구원하려고 법을 준 것이 아니고 법을 구원하기 위해서 법을 줬고요, 법을 건지기 위해서 인간을 법하고 붙여준 겁니다.

법이 법 되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언약대로, 약속이 약속대로 드러나기 위해서 인간을 임시적으로 거기다가 갖다 붙인 거예요. 신약 로마서 3장에도 그런 말씀이 있지만,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법을 줬는데 법을 위반했을 때는 법을 보내서 법을 이행하지 못한 인간을 떼 냅니다.

바다가 기름으로 오염되었을 때 흡착포라는 것을 바다위에 뿌립니다. 그러면 흡착포에 기름이 달라붙어서 흡착포를 수거하게 되면 바다표면에 떠돌던 기름도 흡착포에 흡수되어서 제거되겠지요. 하나님께서 법을 줌으로서 법에 반대하는 존재들, 인간들을 흡착포에 붙여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해서, 하나님이 법을 준 취지를 그대로 드러내기 위해서 방해되는 인간을 제거하는 거지요. 오늘 본문말씀에 지식이 없음으로, 하나님의 법이 없음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통하는 그 관계에 대해서 무지함으로 아주 거침없이 하나님께서는 백성을 제거한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런 말씀에 대해서 사람들은 안 받아들이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이나 율법이나 이 모든 것은 인간중심으로, 인간을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이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구원하려고 법을 줬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계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모든 것을 인간 자기위주로 생각하기 때문에 호세아가 말씀으로 공격해도 호세아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래서 이 법의 한도까지 가요. 법의 한도까지 가게 해서 죄악된 인간을 떼 내게 되면 거기에 뭐가 남느냐? 이 하나님의 법을 제대로 준수하는 유일한 이스라엘, 유일한 인간이 바로 엉터리인간에 가려지지 않고 죄악된 인간을 떼 내는 순간 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이 완성단계로 치달으면서 하나님께서는 무슨 작업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법을 위배하고 가리는 자들을 제거하는 그 작업을 수행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내 법에 대해서 방해하는 것을 방치하시는 하나님은 아니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그런데 그 법의 완성이 뭐냐? 법이 완성된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라고 했을 때 오늘 본문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여기 제사장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제사장이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만들면서 제사장중심으로 만들었어요. 이스라엘을 제사장중심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레위기 21장 4절에 보면 “제사장은 백성의 어른”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른이 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뭔가 보여주는데 그 보여주는 것이 뭐냐 하면, 제사장시스템, 제사장중심체제로 돌아가는 그 모양새가 하나님의 법으로 잘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그래서 이 법이라는 것은 어디로 모이느냐 하면 한 인물에게 모이게 돼요. 제사장의 기능과 역할이 잘 되게 되면 그 이스라엘은 아무 문제없는 겁니다. 그런데 제사장이 중심이 되지 않고 다른데 관심이 있어버리면 그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는 거예요. 제사장이 없으면 이스라엘은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그 제사장제도를 제안한 분이 누구냐? 여호와하나님이거든요. 그런데 이스라엘백성들이 그 제사장중심체제를 거부하고 제사장이 없는 이방나라의 바알신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제사장중심체제가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법을 어겼다고 이야기하고 자기 백성을 망하게 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왜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 사람이 제사장 말도 듣지 않고, 제사장도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이 없어가지고 하나님 앞에 제거대상이 되느냐? 도대체 이 이스라엘 사람은 어떤 연유 때문에, 어떤 이유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법을 버리고 제사장도 버리게 되었는가?

그것이 7절에 나옵니다. “저희는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하니 내가 저희의 영화를 변하여 욕이 되게 하리라.” 여기 번성한다는 말이 나옵니다. 번성한다는 말은 뭐냐 하면, 양으로 따져서 양적으로 세상이 풍부해지게 되면 세상사는 재미가 난다는 그런 뜻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양적으로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서 그 많은 사람들과 같이 사는 것을 ‘우샤우샤’ 하면서 그렇게 좋아하고, 그냥 몇몇 소수인간끼리 사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불안해하는 이유가 뭐냐?

인간은 이 세상사는 것이 극히 고통스럽습니다. 고통스럽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고통스러운 것을 해결하려고 애를 써요. 인간이 사는 것이 고통스럽고 고생스러운 이유가 있어요. 창세기 3장에 보면 나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인 것 같은데 점차 뭘로 변하느냐 하면, 물질로 변해요. 흙으로 변한다고요.

인간이 흙으로 변하면서 거기에 고통이 발생되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도 흙이 되어가면서도 억지를 부려가면서 흙이 되지 않기 위해서 아직 흙이 되지 않은 같은 인간들을 그냥 끌어 모아서 그것이 큰 힘이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안 죽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계속해서 번성하고, 또 번성하고, 번성하기를 원하지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너희가 번성함으로 죄를 지었다면, 법을 어겼다면, 하나님의 지식을 버렸다면 결국은 하나님의 지식이란 뭐냐? 양적인 번성과 대조가 되는 개념으로 지식개념을 딱 수립하는 거지요. 하나님의 지식개념이 양의 번성과 대조가 된다는 것, 양이라 하는 것은 계속해서 움직임을 보여주는 거예요. 변화를 보여주는 겁니다.

‘더 끌어 모아야 돼. 더 많아야 돼.’ 내 주변에 많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많아야 된다는 움직임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정지시켜 버리면 그게 뭐가 되느냐, 그게 바로 지식이 돼요. 뭔가 형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물체가 있다. 교통경찰이 보고 있는데 뭐가 휙 지나가더라는 말이지요. 움직임이지요.

그러면 경찰이 강제로 “스톱하세요.” 해서 보니까 그게 오토바이더라. 워낙 빨라서 오토바이인지 자전거인지 아니면 차인지 분간도 안 되는데 정지시켜 보니까 그것이 오토바이인 거예요. 그 실체가 드러나는 거예요. 양이라 하는 것은 뭘 숨기느냐 하면, 우리가 번성하는데 어떤 속성을 가지고 번성하느냐는 그것은 뒷전이고요, 그냥 크기만 하면안심이 되는 거예요.

사람이 고통스러울 때, 외로울 때 혼자 고통스럽고 혼자 외로우면 정신적으로 더욱도 고통스러워하지요. 그럴 때는 으샤으샤, 많이 모이면 내 고통도 상당히 완화가 되면서 어떤 큰 힘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됩니다. 큰 힘 속에서 내가 물질이 되는 것을 좀 지연시킨다. 혹은 그것을 잊어버릴 수 있다. 그러한 위로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사람이 혼자 끙끙 앓을 때는 자살의 충동을 느끼지만 주위사람들이 많이 나를 사랑해주고, 전화도 해주고, 찾아와주고, 위로해주게 되면 ‘그래. 아직도 내 가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구나. 내가 여기서 그냥 죽으면 안되지.’라고 버티는 거예요.

옛날 수십 년 전부터, 물론 조선시대부터도 그랬지만, 여자들이 임신해서 아기를 낳았는데 남자는 그 여자를 차버리고 자기혼자 살겠다고 나가버렸을 때, 물론 여자도 자식을 버린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자식을 버린다든지 그 남자만을 찾고 있지는 않아요.

진짜 너무나 고통스럽고 날 차버린 남자, 날 버린 남자가 너무나 야속하고 미워서 그냥 약 먹고 죽고 싶지만 못죽는 이유는 ‘내가 죽으면 저 자식들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겁니다. ‘저 자식들, 저 자식들 불쌍해서 어쩌나.’ 죽고 싶어도 못죽고 기어이 시장바닥에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기어이 자식을 살려내지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네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있지요.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내 자식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아무리 창피스럽고 남들이 욕하는 일을 할지라도 자식 얼굴 봐서라도,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것을 봐서라도 여기서 일어서야 된다는 생각이 있는 겁니다.

그만큼 인간의 고통이라는 것은 숫자가 많을수록 고통이 완화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양이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변사람들을 의식할 수밖에 없거든요. 번성한다는 것, 숫자 많이 모이면 서로 얼굴을 쳐다보니까 이걸 가지고 수평적 삶이라고 해요.

수평적 삶인데 여기서 이스라엘의 지식이라는 것은 수평적 삶이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네 운명이 옳은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 삶이에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연결되고 서로 통하는 어떤 기준점, 그게 바로 여기서 말하는 법이요, 지식이 되는 겁니다. 그게 제사장제도에요.

이것은 이방나라와 달라요. 이방나라는 전쟁을 하든지 뭘 하든지 간에 그냥 같은 인간들의 떼거리가 많으면 충분하게 살만큼 살수 있다고 본 겁니다. 성경 사무엘상 17장에도 그런 것이 있는데요. 골리앗이 많은 군대를 끌고 와서 이스라엘 앞에 섭니다. 누가 봐도 덩치 큰 골리앗을 내세우지요.

여럿이 싸움할 것도 없이 사나이답게 일대일로 붙어서 이긴 쪽이 다 먹기! 사나이답게! 칼 들고 우르르 붙지 말고 그냥 이쪽 대장 나가고 그쪽 대장 나와서 이긴 쪽이 한방에 다 먹기. 됐나 안됐나, 이렇게 나온 거예요. 힘의 논리입니다. 양의 논리에요. 번성의 논리입니다. 그게 이방나라의 원칙이에요. 이방나라와 이스라엘의 차이는 뭐라고 했습니까?

제사장제도,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통하는 유일한 하나님의 구원의 원리가 있는 거예요. 천국의 원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원리가 따로 수직적으로 수립되어 있어요. 장대처럼, 막대기처럼 수립되어 있는데 이방민족은 그게 없어요. 하나님이 주신 약속이 없다고요. 약속이 없으니까 기껏해야 자기주변에 힘 있고 능력 있는 사람만 우글거리면 그걸로 사는 재미가 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옛날 수십 년 전만 해도 환갑잔치 크게 했어요. 자식 일곱이나 여덟이 죽 앉아서 차례대로 절하게 되면 환갑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이 다 부러워했어요. “세상에, 여섯 명이나 낳았어도 누구 하나 소아마비 걸린 사람도 없고 도중에 누구 하나 죽지도 않고 어째 복이 저리도 많은지. 저 애들을 봐라. 얼마나 자식들이 많으냐?” 여섯이나 일곱씩 되니 넉넉하지요. 여생이. 그게 이방민족이에요. 수평적 삶입니다.

자기주변에 힘 있는 사람이 많다는 그것 때문에 딴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그게 바로 바알신을 섬기는 이방민족의 특성이지요. 수평적 삶.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그것이 뿌듯하게 느껴지는 겁니다. 양입니다. 하지만 본문 7절에 있는대로, 그 자체가 번성할수록 내게 범죄한다.

이 말은, 죄라는 것은 내가 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에요. 단순히 죄를 드러내고 저지르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죄는 생산하는 거예요. 내가 번성하면 동반해서 죄도 같이 번성되는 겁니다. 혼자 죄짓는 것이 아니고 둘 셋이 있으면 계속 둘 셋이 같이 죄를 짓는데, 두 배 세배가 아니고 둘이 있으면 4배가 되고 세 명이 있으면 9배가 될 정도로 죄가 등장합니다.

그래서 아가씨들보고 이야기하는 것이 있어요. 결혼할 때 제발 담배피우고 술 먹는 남자하고는 상대하지 말라고요. 선도 보지 말라고요. 왜냐하면 술집에 가서 지은 죄는요. 두 배가 아니고 곱의 곱으로 짓게 되어 있어요. 허당과 허세와 허풍으로 가득찬 장소가 술집이에요.

개코도 없는 것들이 술 한 잔 들어가면 허세가 들어가서 “친구 아이가! 좋은 정보 줄 테니 나에게 투자해라.” 이게 전부 다 어디서 이뤄집니까? 술 안먹으면 그런 현상이 없는데 같은 술친구들이 그런 짓을 한다고요. 술친구, 술집, 허세 부린다고 담배는 꼬나물고.

담배피우고 술 먹는다는 것은 가짜자아상 구축하는 것 외에는, 양적으로 번성하는 것 외에는 다른 인생관이 전혀 없다는 뜻이에요. 지금 이 방송을 듣고 있는 술 담배하는 사람들 다 끊으세요. 자기의 뚜렷한, ‘나는 가난하고 망하고 죽어도 괜찮아.’라는 수직적인 영적관계가 되어있는 사람 같으면요, 술 담배 할 필요 없어요.

술 담배는 뭐냐? 내 노리개감 될 수 있는 어떤 힘 있는 내 주변사람들 많이 끌어 모으기 위해서 유인책을 쓰는 것이 술 담배에요. 술 담배 안하면 대화가 안통하고 술 담배 아니면 친구가 없고. 이게 무슨 뜻입니까? 그게 친구겠어요? 내게 이용 좀 당하라고 미끼를 던지는 거지요.

“우리 남편 술 담배 하는데 나는 너무 좋아.” 이것은 문제 있는 것 아니에요? 그 사람의 권력과 돈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시 말씀드릴게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은 돌이 되고 흙이 되고 물질이 돼요. 인간이 없어진다고요.

내가 없어진다는 것이 그렇게도 고통스러운 거예요. 사람이 왜 웁니까? 내가 없어지는 위기가 왔기 때문에 우는 거예요. 현재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된다는 그것이 인생의 실패처럼 느껴져서 마구마구 분통해서 우는 거예요. ‘왜 내게 그런 비극이……’ 이러거든요. 원래 하나님의 뜻은 흙이 되어야 되는데.

그래서 인간들은 인간을 찾아다니면서 물질이 아니고 인간인양 여기면서 뭘 이용하느냐? 법을 이용하는 겁니다. 법을 통해서 인간은 날마다 자기를 조작해요. 내가 아닌 다른 나로 행세하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서도 돈을 모으면 돈 있는데 친구가 모일 것이고, 그러면 나 자신의 공간은 번성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돈 앞에서는 남자 여자라는 자연적구분도 의미 없어요. 우리 집 앞에서 윷놀이 도박판이 벌어졌어요. 한 무리는 여자들, 다른 쪽은 남자들이 모여서 하는데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텐트 쳐놓고 밤 9시까지 하거든요. 여기 설교하러 오는데 계속 하고 있었어요. 누가 사기를 쳤는지 갑자기 어떤 남자가 고함을 치면서 이럴 수 있느냐고 하는 거예요.

제가 이런 소리 하면 “목사님은 신고정신이 그렇게 대단하면서도 집 앞에서 벌어지는 윷놀이 도박판은 왜 신고를 안합니까?” 할 수도 있는데, 그 윷놀이도박판에 참가한 사람들의 평균 나이가 80이에요. 80노인들이 10원짜리 놀음하는 것을 어떻게 신고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그게 낙이라 매일같이 밤중까지 불 켜놓고 윷놀이하는데 여자패와 남자패가 무리지어서 하고 있어요.

왜? 왜 그렇게 열심히 합니까? 80이 넘어서까지. 돈, 돈 때문에, 10원 놓고 하는 그 돈 때문에. 돈 앞에는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오직 돈이 전부에요. 돈이, 힘이 전부에요. 인간은 그 법을 통해서, 나에게 돈이 생겼다는 것, 법을 가지고 자기를 증명하고 정당화를 주장합니다.

그 법을 주께서 흡착포로 사용해서 죄를 흡착해서 떼 내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자기자신의 힘을 모으기 위해서 법을 이용하는데 그 법이 오늘 본문에서 지식입니다. 지식이라는 것은 곧 뭘 낳느냐? 권력을 생산해요. 지식이 권력을 생산하고 그 권력에서 새로운 주체가 생산되는 겁니다.

잘난 내가 되기 위해서 법에 호소하고, 그 법은 나의 정당성, 남은 죽더라도 나는 생존해야 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법을 동원한다는 그 말입니다. 교회, 어느 단체, 어느 직장, 모든 사회단체가 다 그래요. 학교, 군대, 병원, 교도소, 교회, 성당, 절간, 정당, 국회, 공직사회, 어느 단체든, 심지어 가정에서도 자기가 행동해놓고 법을 핑계 삼아 그것을 정당화하는 겁니다.

아이히만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유대인 6백만을 폴란드의 수용소에 집어넣어서 다 학살한 사람이거든요. 히틀러는 권총자살하고 2인자인 그 사람은 도망을 쳤는데 수배를 했어요. 이스라엘 정보부가 나중에 찾아냈어요. 무려 16년 만에 찾아냈는데 아르헨티나에 가서 숨어 있었어요.

전혀 관계없는 지구반대편에 숨어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드디어 전범재판을 시작했습니다. 열 두가지 죄목을 가지고 그 사람에 묻습니다. “당신은 6백만의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할 말이 있나?” 하니까 그 사람이 재판장에 하는 말이 “나는 무죄다.”

왜 무죄냐? 아이히만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나는 하나님 앞에서는 죄인이다. 하지만 법 앞에서는 죄가 없다. 나는 공직자로서, 독일의 공무원으로서 독일 법으로 나에게 죄를 묻는다면, 독일법에 의해서 내가 게을렀으면 죄가 되는데, 법을 준수하지 않고 태만했으면 그것이 죄가 되겠는데, 국가가 명령하는 공직의 법에 충실했다는 그것이 어떻게 죄가 되느냐? 나는 죄가 없다.” 했습니다. 끝까지 나는 죄가 없다고 했어요.

그 사람은 그렇게 성격이 악한 사람인가? 아니에요. 광산노동자출신이고 책 외판원 하다가 밥 먹고 살기 위해서 그냥 나찌당에 들어갔다가 그 당시 나찌당에서 유대인들을 학대하고 제거할 때 좋은 아이디어를 제시해서 출세를 했던 사람이에요. 유대인을 쫓아내기 위해서 관공서를 하나로 묶어서 한 자리에서 유대인을 추방할 수 있는 법을 만들자고 제안해서 나찌당에서 급승진을 한 사람이에요

그 사람은 유대인포로수송담당이었고 단 한 사람도 유대인을 직접 죽인 적이 없는 사람이에요. 죽이라고 명령은 했지만 직접 죽인 적은 없어요. 학살을 하라고 명령을 한 사람이지요. 딱 한 번 수용소에 가본 적이 있는데 그 수용소가 너무나 끔찍해서 자기는 못가겠다고 한 겁니다. 자기는 벌레 한 마리도 못죽여요. 너무 심약해서.

그런데 6백만을 죽인 겁니다. 왜? 국가의 법대로 해야 되는 것이 공직, 공무원의 도리기 때문에 나는 죄가 없다. 그냥 평범한 아버지에요. 마음씨 착한 아저씨고. 그래서 한나 아렌트라는 유명한 여성정치학자가 당시 뉴욕 특파원으로서 아이히만 전범재판을 취재하면서 이야기했습니다. “악은 평범하다.”

이게 굉장히 중요해요. 악은 유별나지 않고 굉장히 평범한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그 자체가 주변에 있는 어떤 법들을 통해서 나는 살만한 이유 있다고 내세우는 것, 나는 존재해야 된다는 정당성을 내세우는 그것이 바로 악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고 어떤 법을 줘도 하나님의 법을 어겼다는 이것은 일방적인 하나님의 생각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을 인간은 모르고 인간들은 생각하기를, ‘법을 준 것은 내가 인간으로서 법대로 살게 되면 하늘의 축복과 생존에 필요한 것들, 특히 돈의 혜택을 주께서 주시겠지.’ 내 생존, 내 존재를 우선시하고 주변의 법들을 차용할 때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는 지식을 버린 거예요. 제사장중심체제를 버린 거예요.

그 이야기를, 호세아의 이 공격성발언을 오늘날 모든 인간들, 심지어 교회도 마찬가지고요, 도무지 무슨 소리를 하는지를 못알아들어요. ‘내가 어딜 봐서 죄인입니까? 하나님의 법을 지켰기에 하나님이 복 주셔서 이만큼 내가 생존하고 있는데 아직도 생존하는 내가 왜 죄인이어야 합니까? 나중에 늙어서 죽기는 하겠지요. 하지만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죄지은 것이 있더라도 선을 향하는 방향성자체가 선하다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그 마음가짐으로 이미 나는 죄인이 아닙니다. 나는 거룩한 사람으로서 바르게 살아갑니다.’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악의 평범성이에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죄도 모르면서 죄 값으로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정당하고 나는 죄인 아닌 것을 증명하기위해서 독일에서는 유대인들 잡았습니다. 예수 죽인자들이기에 벌 받아도 마땅하다. 신의 처벌이 마땅하다고 했거든요.

이 말은 우리하고 똑같아요. 고유정이 어떻고, 남편의 아들을 죽인 인간, 모텔에서 일하다가 숙박비 안준다고 사람 죽이고 시체토막내서 한강에 버린 인간, 권력을 이용해서 사모펀드 하다가 걸려서 검찰에 소환되면서 환자 행세하는 인간……, 하나의 적을 끄집어내서 그들을 비판하고 공격함으로서 상대적으로 내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그것이, 그런 평범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바로 지옥 갈 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법을 모독한 거예요. 제사장, 늘 어린양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것, 왜 어린양을 잡아서 늘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그 수직적인 하나님의 법칙과 단절된 겁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을 줘서 죄 아니라고 우기는 인간들을 율법의 흡착포를 가지고 죄로 들춰내면서 전부 다 인간들을 망하게 해버려요. 없애버립니다.

제사장 없는 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다.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니듯이 제사장이 없는 것은 이스라엘 아니에요. 그것은 이방나라에요. 이방나라는 나 하나 살기 위해서 주변의 사람 끌어 모으고 그것이 번성하면 그것을 마치 축복인양 여기는 겁니다. 마치 교회가 사람숫자 많아지면 하나님께서 이 교회를 긍정적으로 천국 가는 단체로서 인정해주는 것처럼 너도 나도 그렇게 오해하는 것과 마찬가지에요.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있다(마 18:20)고 할 때, 그리고 예수님께서, 적은 무리여 걱정하지 말라고 하나님나라는 너희 것(눅 16:32)이라고 할 때 주님의 그 취지가 뭡니까? 이 세상에서 호세아가 자기편이 많았습니까? 진짜 수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악의 평범성 때문에, 평범한 이 세상의 보편적 악 때문에 너의 수직적인 그것을 굉장히 미워할 거예요. 그리고 핍박할 거예요.

왜? 그쪽은 힘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이 별로 안모이니까, 허전해 보이니까, 자기를 지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자들이 많이 없어요. 그래서 마태복음 7장에 보면, 멸망하는 길을 주께서 제시했습니다. 멸망하는 길은 어떤 길인가? 많은 사람이 가는 길이 멸망하는 길이에요.

이것은 초등학교 1학년생에게 문제로 내고 싶어요. “어린이 여러분, 다음 두 개의 길 중에서 어느 것이 지옥 가는 길입니까?” 한쪽은 아스팔트가 좍 나서 사람들이 늘어서 있고, 저쪽 길은 울퉁불퉁해서 핵핵거리고 이마에 땀 흘리면서 작대기 짚고 겨우 몇 명, 그것도 가다가 중간에 다 탈락해서 몇 명 가지도 않는 길을 제시해요.

그래놓고 “다음 중 영생으로 가는 길은 어느 길입니까?” 주님께서 초등학생에게 문제 내듯이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한쪽은 번성했어요. 큰 목회하고 있습니다. 한쪽은 있는 교인도 다 가버렸어요. 심지어 목사 부인도 삐져서 가버렸어요. 그런 교회 많습니다. 목사 부인도 다른 교회로 가는 사람들 많아요. “당신의 복음을 이해 못하겠다.” 이런 식으로. “왜 우리가 죄인인데? 왜 당신은 맨날 죄인이라고 해?”

진짜 호세아 앞에 서면요, “망하리라” 예요. 호세아는 말씀이 공격하고 있는 거예요. 왜? 중지되어 있으니까. 하나님이 보기에 모든 개념이 중지되어 있어요. 번성하면 다 듣기 싫어요. 그저 사람들 끌어 모으기 바빠. “아니야, 잠시 스톱해. 스톱해보고 정지시켜봐. 지금 위에서 뭐라고 보는지.” 네가 지금 밥 먹고 사는데 바쁘다 보니까 네 실체가 그림자처럼 흐릿해져요.

그런데 잠시 스톱해 보세요. 위에 계신 분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지금 하루하루 생활이 너무 바빠서 위에 계신 분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몰라요. 무슨 생각 갖고 있는데? 호세아 오늘 본문 이야기 아닙니까? 번성할수록 죄가 더욱더 생산된다. 많아진다는 것.

자, 그렇다면 진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자기 긍정하는 법을 뜯어내버려요. 뜯어내 버리면 뜯어낸 다음에 호세아가 예상하고 있는 법의 완성은 뭐냐? 그것은 법위반 없는, 즉 죄가 없는 상태, 그것이 온전한 지식이고 온전한 제사장중심체제입니다.

요한1서 5장 18절을 듣게 되면 이해가 되실 거예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율법을 뜯어가 버렸어요. 율법을 뜯어가면서 인간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인간 아니에요. 물질이기 때문에 흙으로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그 뜯어가는 과정이 하나님의 법의, 약속의 완성되는 과정속에 있어요.

그러면 법은 누구를 지향하느냐? 누굴 겨냥하느냐? 진짜 법을 지킨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 됨으로 모든 것이 목표가 되고 거기서 완료가 되어버려요. 예수님이 제사장이 되어버리면 예수님에 의해서 그 마음을 받은 사람을 가지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해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 사람이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내가 구원받는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고 악한 자가 우세냐, 하나님의 계획의 완성이 우세하냐의 그 어른들의 싸움의 결과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겁니다. 내가 율법을 몇 개 더 지키고 덜 지키고의 문제가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기대를 안해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줘봤자 이스라엘은 결국 망했잖아요. 이스라엘 인간이나 우리 인간이나 아담의 후손으로 똑같은 본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아무리 법 줘도 그 법을 자기정당성으로 취하지 내가 이 법 앞에서 흡착포가 되어서 죄인으로 망할 인간이라는 것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존재는 없어요.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 죽여주옵소서.” 이런 인간은 없어요. 어쨌든 간에 살아보려고 애쓸거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너무 법이 강하니까 ‘에이 여호와 버리고 바알 섬기자.’ 세상 번성하는 것으로 사는 보람과 행복과 재미를 느끼는 그쪽으로 이스라엘이 다 가버린 거예요. 그리고 이스라엘은 법을 가지고자기 행동을 정당화하고요. ‘잘 사는 것 보니 법 지킨 것 맞잖아. 가난했으면 내가 어겼다 하겠는데 잘 사는것 보니 되어가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아가는 증거잖아.’라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번성을 복으로 여기고 있는 거예요. 어디서? 교회에서. 교회가 그렇게 이야기해요. 만사형통하고 번성하게 되면 그것을 복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호세아는 그게 아니에요. 죄가 번성한 거예요. 네가 번성한 것이 아니고 죄가 번성한 거예요. 오만이 번성하고 교만이 번성한 거예요.

요한1서 5장 19절에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세상자체가 악한자에게 속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거예요. 그리고 하나님에게 속한 자는 죄 없어요.법이 없어서 죄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뭐가 있느냐? 법의 완성인 사랑이 있기에, 사랑받고 있기에, 죄가 없는 거예요. 그 사랑은 요청한 적도 없고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그냥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거예요. 그 사랑 앞에 우리는 자진해서 나의 모든 시도를 무의미한 것으로 그냥 놔버리지요.

어떤 한국영화에 보면 오토바이 타면서 폼 잡는다고 핸들에서 양손 다 놓고 높이 쳐들고 가는 장면이 있거든요. 주님 앞에서 오토바이 핸들 놓듯이 그냥 놔버려요. 그리고 현재의 우리의 모든 몸뚱이는 이제 구닥다리니까 주께서 철거해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는 겁니다. 이 몸이 죽는 것을.

호세아 6장 2절에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제 삼일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 앞에서 살리라.”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지킬 수가 없는데 진짜 제사장이 오셔서 법을 지키게 되면 어떤 결과를 낳는가? 다시 3일 만에 살아나는 부활의 생명을 얻는 혜택이 호세아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약속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그 약속을 성령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면 더 이상 나 자신의 인생이나 운명에 대해서,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손을 놓는 것처럼 손을 놔버리는 거예요. 어떤 경우라도 감사하고 그게 사랑인줄로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결과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공격으로 다가오는 것의 이유를 깨닫게 하옵소서. 우리들이 원하는 식으로 인생을 산다는 것이 하나님의 제사장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죽으심을 모독하고, 그저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바알 우상을 섬기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다시 한 번 우리 자신을 돌아보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