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 휼
이근호 2019년 10월 2일
본문 말씀: 호세아 2: 21-23
(2:21)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2:22)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2:23) 내가 나를 위하여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그 날’이라고 해서 미래의 어느 시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왜 호세아 시대에는 이 좋은 결과가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그것은 지금은 긍휼이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마련되려면 기존에 기대하는 모든 것들이 다 무너져야 합니다. 순수한 긍휼에는 인간들의 그 어떠한 예상이나 기여함이 섞여 들어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즉 ‘긍휼’이라는 위상에서 나올 원칙은 하나님께서 결코 인간과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배제하시고 난 뒤라야 제대로 긍휼을 담으십니다. 이 과정에 있어 인간은 필히 죽어 마땅한 존재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배제하고 자연과 상대로 일을 하십니다.
긍휼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절차가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해서 어떠한 존재일까요? 자연에 복속됩니다. 인간은 사별은 계절변화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사이에는 으깨지는 곡물과 같습니다. 즉 “누가 죽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이 가을이다”가 중요한 겁니다. 우리 자신이 죽든 말든 자연은 나름대로 움직입니다.
이 대자연을 움직이는 데에서는 배후 인물이 계십니다. 이 자연의 배후인물이 대자연의 움직임 안에서 직접 대자연 속에 나타나십니다. 그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대자연과 결합되는 표준적 인물입니다. 이 원리는 원래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질서에 부합된 겁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되 그 원리는 ‘하나님의 형상’로 집결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것은 인간의 자연물, 곧 피조물로서 재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형상’ 중심의 새로운 창조 세계건설에 나서심을 말씀하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이 일관성 있는 계획의 일환으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배제하고 자연을 움직여 나가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늘을 건드리시고, 하늘은 땅을 건드리는 식으로 이 땅에 긍휼을 생산하십니다. 이 하늘과 땅은 나름대로 용도가 있고 기능이 있는 겁니다. 그동안 대자연에 대해서 인간들은 오해를 하고 있었던 겁니다. 대자연이 인간 생존에 필요한 자원이 되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죽이시는 대상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이 사실을 인간들은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고 반발합니다. 인간은 자연을 이기지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자연을 이기려고 덤벼듭니다.
자연은 자연 나름대로 본래의 기능과 용도가 따로 있는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드러내는 겁니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롬 8:19-20) 이는 인간의 의도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의 의도에 대해서 엘리사의 종 게하시를 통해서 잘나타납니다. 열왕기하 5:20에 보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가 스스로 이르되 내 주인이 이 아람 사람 나아만에게 면하여 주고 그 가지고 온 것을 그 손에서 받지 아니하였도다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가 저를 쫓아가서 무엇이든지 그에게서 취하리라 하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에게 있어 심각하고 진지하고 중요한 일은 자기 생존이며 자기 것 챙기는 일이었습니다. 반면에 엘리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라 나하만 장군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복음 전파에 있어 엘리사는 자기 자신조차 드러내지 않고 말씀만 전달했습니다. “요단강 물에 일곱 번 씻어세요”라고 말입니다.(왕하 5:10)
엘리사는 자기 자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지시하는 하나님이 더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엘리사의 태도는 오늘 본문에 나오는 호세아의 심정입니다. 호세아는 게하시와는 달리 철저하게 하나님의 사환이요 종이 되는 겁니다. 대자연을 통해서 등장될 그 메시야의 모습을 호세아가 제대로 미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늘과 땅은 무슨 신호와 징후를 보여줍니까? 시편 85:10-12에 보면,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시리니 우리 땅이 그 산물을 내리로다”고 되어 있습니다.
기존의 대자연은 제대로 하나님의 형상 역할을 못한 인간 때문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로서 망하지만 마지막에는 불로서 망합니다. 반면에 긍휼을 생산하기 위한 하늘과 땅은 미리 예수님의 긍휼을 보여주는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호세아가 바람난 자기 아내를 데려오는데 있어 ‘값’을 치뤘다는 것은 하늘의 의와 땅의 진리가 결합된 모습니다.
성도는 이 절차에 의해 ‘이스르엘’로 나타납니다. ‘이스르엘’은 ‘심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바탕으로 해서 새로운 택한 나라를 만드신 겁니다. 이 일을 위해 성도는 필히 죽음 코스를 밟아야 하고 경유해야 합니다. 하늘은 땅을 부정하지만 그 부정당한 땅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불신자들, 곧 지옥으로 가야만 하는 자들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이 그들 공간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들을 스톱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포토라인입니다. 심판에서 진전이 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쓰고 종교적으로 경건함을 추구해도 그것으로 심판의 포토라인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반면 천국가는 자들은 긍휼로 인해 심판의 선을 넘어버린 자들입니다. 이들은 죽은 자들이었는데 오로지 주님의 긍휼, 곧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인하여 천국에 들어가게 된 자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필히 긍휼받은 티를 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 어떤 경우라도 자신의 행함이나 자기 것을 소중하게 내세우지 않는 자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께서 친히 심어주심만 증거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녹취:오용익 9강-호 2장 21-23절(하나님의 관심사) 1910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2장 21-23절입니다. 구약성경 1259페이지입니다.
호세아 2:21-23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내가 응하리라 나는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에 응하고 또 이것들은 이스르엘에 응하리라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던 자를 긍휼히 여기며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게 향하여 이르기를 너는 내 백성이라 하리니 저희는 이르기를 주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
21절에 보면 “그날에 응하리라.” 좋을 결과를 지금은 아니고 그날에 응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은 왜 안 되지요? 호세아 당시에는 왜 하나님이 좋은 결과를 주시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23절에 답이 나와 있습니다. 아직 긍휼이 마련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환경이라 하는 것은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긍휼중심으로 제공되기 때문에 환경이 좋은 것이 아니고 그보다 우선적으로 하나님이 긍휼하심, 불쌍히 여기심이 사는 환경보다 소중하고 더 귀중한 겁니다.
아직 긍휼을 마련할 때가 안 되었어요. 왜냐하면 호세아는 구약이기 때문에. 이 구약말씀이 그냥 약속인데 이 약속이 나중에 성취가 되면 호세아 2장 23절의 말씀처럼, 그 때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이 장만이 되고 마련이 될 거예요. 그 때 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긍휼 마련하는데 있어서 인간은 어떤 식으로 기여하는가?
21절부터 보게 되면, 그날에 내가 응한다고 한 것은 무슨 뜻이냐? 인간을 배제한다는 겁니다. 인간하고 상대하지 않는다는 거지요. 교인들이 오해하는 것이 하나 있어요. 하나님은 인간하고 일한다는데 하나님은 인간하고 일하지 않습니다. 인간을 배제하고 일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하고 일하는가? 오늘 본문대로 하나님은 대자연과 일하지요.
일단 하늘에 응하고, 하늘은 땅에 응하고, 땅은 누구에게 응하는가? 땅은 “이스르엘에게 응하리라”고 되었는데 여기서 이스르엘은 뭐냐 하면, 하늘에 하나님이 응했고, 그것이 땅에 응하는 그 절차가운데 최종성과물로 나올 때 그것이 바로 이스르엘이 되는 거예요. 인간이 처음부터 하나님과 협조한다든지 동업하는 것이 아니고 ‘너는 결과나 얻어먹으라’ 하는 식으로 배제해 버리는 겁니다. 인간 빼고 일하시는 거예요.
하나님 홀로 일하시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이 관여하면, 되도 않는 것이 잔소리를 해대서 안돼요. 조금 해놓고 자기가 뭐 한 것도 없는데 논문 제 1저자로 기재되는 수가 생겨버립니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비커 가져 오너라.” 비커 가져왔다고 논문 제1저자 되거든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인간은 완전히 제켜놓고 일방적으로 해줘야 뭐가 성립되느냐? 긍휼이 긍휼답게 빛이 난다고요. 아무것도 아닌데 ‘아이고 불쌍한 것.’ 이렇게 해서 불쌍히 여겨준 겁니다. 불쌍히 여김에 충실히 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인간의 도움이 필요치 않습니다. 인간을 제켜버리지요.
그러면 자연하고 일을 하신다는 이 뜻, 그러면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자연의 일부로 들어가게 돼요. 자연의 일부로 들어가게 되면 인간이라는 것은 자연의 거대한 톱니바퀴 속에서 분해되어야 되고 죽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배제한다는 그 취지는 뭐냐?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죽어 마땅하다는 겁니다.
“깝죽대지 마라. 너는 죽는 것이 네 할 일이야.” 죽는 것이 할 일이에요. 이리 까불고 저리 까불어도 결국 죽잖아요. 죽는다는 것은 대자연의 일부입니다. 인간이 사멸한다는 것은 계절변화와 같은 거예요. 계절이라는 톱니바퀴에 휩쓸려서 ‘누가 죽었다’가 아닙니다. ‘지금이 봄이야?’ 이게 더 중요한 거예요. ‘지금이 여름철이야? 매미가 우네?’
‘누가 죽었다’ 하는 것은 인간사회에서나 유명한 것이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죽었다는 것은 의미 없는 거예요. 어떤 인간이 죽어도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대자연의 톱니바퀴에서 인간은 하나의 먼지처럼 휩쓸려서 같이 돌아가 버리지요. 인간은 빠지고 대자연이 인간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통해서 무엇을 남기고자 하는가? 인간이 자기가 중심이 될 때 대자연을 뭐라고 생각했느냐? 자연에서 빼먹을 것이나 빼먹고, 자연은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규칙을 가지고 고정되었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것을 과학이라고 이야기하지요.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면 자연이 참 비웃습니다. 개코도 모르는 것이 아는 체 한다고 대자연이 비웃어요. 강아지는 인간주인을 위해서 있다고 하면 강아지가 웃습니다. 강아지는 결국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에요. 여러분이 강아지가 인간을 이용한다는 생각을 해봤습니까? 가만있어도 사료 주니까. 철딱서니 없는 인간은 그래놓고도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고 있으니 강아지는 싱긋이 웃지요. 웃을 뿐이에요.
그걸 생물학에서 약간 눈치 채고 하는 말이, ‘동물과 자연은 서로 교환한다. 상호작용한다.’ 그런데 개 키우는 사람이 상호작용하려고 키우는 것이 아니잖아요. 자기의 울분과 외로움을 털어놓기 위해서 반려견을 키우지 않습니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자연을 다룰 때 어떻게 다루는지 나옵니다. 유명한 말씀인데 베드로후서 3장 4절에 보면, 만물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만물이 움직여요. 움직이는데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또는 언약, 약속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가만 있던 물이 갑자기 불어나서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덮쳤습니다. 이게 노아홍수사건이에요.
베드로후서 3장 5, 6절에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만물은 그냥 있다.” 고정되어 있다고.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물이라는 것은 어떤 용도가 있는데 그 용도는 뭐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능을 하게 되어 있어요. 이 대자연이.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거기서 대자연이 움직인다는 것은 결국 이 자연은 배후의 어떤 분이 계신데 그 분의 움직임을 보여주는 하나의 시그널이 되는 겁니다. 징후와 징조가 되는 거지요, 이 자연이라는 것이.
그래서 이 자연을 움직이는 분이 따로 계시다는 겁니다. 골로새서 1장 16절에 보면, 세상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를 위하여 만들어졌다는 겁니다. 보이지 않는 형상이라 했고 보이지 않는 분을 위해서 만들어진 이 대자연이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보이는 자기를 위해서 ‘자연아, 이 해와 별과 달아! 너희는 나 인간을 위해서 좀 협조해 달라.’ 하는 식으로 인간은 자연을 생각한 거예요.
창세기 1장에 봐도 인간을 먼저 만든 것이 아닙니다. 인간을 먼저 만든 것이 아니고 자연을 이미 먼저 만들었고, 그 다음에 마지막 날에 인간을 만들었어요. 인간을 제일 꼴찌에 만들어놓은 겁니다. 그리고 인간을 만들어놓았을 때 인간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인간은 하나님형상과 더불어 있기 때문에 인간과 이 하나님의 형상과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는 이 자연의 큰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 1장이 있는 거예요.
창세기 1장의 그 내용이 로마서 8장 19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지향하면서 대자연은 같이 움직이고 있고, 어떤 특정한 방향을 향하여 쏠릴 때는 쏠리고 안정될 때는 안정되고, 이렇게 누구의 지시를 받고 있는 인상을 줍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날에 내가 하늘을 먼저 건드리겠다고 하는데 다시 설명 드립니다. 인간은 철저하게 배제된다 그 말입니다. 인간은 여기서 빠지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빠진다면 이스르엘은 어디서 생겼느냐 하는 거지요. 이스르엘이라는 뜻이 어떤 성경에는 ‘심으심’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에도 그게 나와요.
23절에 “내가 나를 위하여 저를 이 땅에 심고” 라고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계획은 이렇습니다. 간단하게 알기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대자연을 움직이는데 그만한 목표가 있고, 목적이 있고 취지가 있었던 거예요. 그게 뭐냐? 대자연을 통해서 어떤 표준적인 인물을 이 땅에 배태하고 남기는 일을 해요.
내가 친히 심어놓은 내 나라 이스르엘, 나중에 예수님이 되는데요, 예수님을 심었고, 심어놓은 예수님을 중심해서 새로운 이스르엘이 나타나는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21절을 다시 봅시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라고 하지요. 그날에. 여기서 내용들을 보고 다시 그날이라는 것이 어떤 날인가를 보게 되면 그 날이 밝혀져요.
그날은 뭐냐? 기존에 있는 인간중심의 땅과 인간중심의 하늘이 다 날라 간 그날에. 심판의 날이지요. 이 자연이 인간으로 말미암아 망가졌어요. 로마서 8장 19절을 이야기했지만 20절에 보게 되면, 피조물이 인간들의 범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황폐하고 썩어지게 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썩은 것은 뭐냐? 긁어내야지요. 다 뜯어내야지요.
대자연이 그러한 징조, 시그널을 보냈는가? 보냈지요. 노아홍수였습니다. 노아홍수는 이유가 있었어요. 땅에 있는 인간들이 하나님의 성에 차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생각은 뭐냐 하면, 저 보이지 않는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지는 않아요.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존문제였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는 항상 매일같이 쫓기는 것이 있어요. ‘내가 뭐 먹고 살지?’ 쉽게 말해서 ‘이 땅에서 직장 없고 일거리 없으면 나는 죽는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직장을 얻고 돈을 벌어야 해.’ 이게 인간에게는 아주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러한 심각한 문제를 오히려 성경은 구체화시키지요. 그 구체화시키는 예가 열왕기하 5장 20절에 나옵니다.
여기에 세 사람이 등장하는데 무대장치가 아주 멋지게 세팅이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무대를 마련하는데 등장인물 셋을 등장시켜서 그 셋의 관계, 주고받는 대화 속에서 다 정리를 하신 겁니다. 하나는 문둥병 걸린 아람나라의 나아만 장군이 등장하지요. 그 다음에 엘리사가 등장하지요. 그 다음에 등장하는 사람이 누구냐? 제가 이야기하는 게하시, 메니저죠, 비서 게하시가 등장합니다.
아시다시피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 만나서 치료받으려고 했습니다. 엘리사를 한의사로 보고요. 한의사에 대해서, 요새 고객들이 얼마나 잘 알던지 한의사에게 물어볼 것도 없어요. “여기에 침 놔주세요.” 처방을 알아서 지가 다 해요. 나아만 장군도 똑같이 했어요. “나에게 안수하고 기도해주면 내가 병 낫는 그 정도 상식은 내가 알고 왔습니다.” 하고 들이밀지요.
그런데 그 엘리사는 고약 하나 붙여주지도 않아요. 그것도 안하고 침도 안 놔요. 꼭 어느 한의사 같아요. 상종을 안 해요. 네가 아는 방법은 의도적으로 피해버립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하고 상대 안하기 때문에. 제가 아까 기도할 때 한 것처럼, 인간은 기도 가지고 뭘 얻을 것을 얻고자 하는 쿠폰처럼 사용하는데 인간의 믿음은 받지를 않습니다. 그 믿음 있음을 피해버리지요.
인간의 믿음은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인간을 배제한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라는 그 원리에 어긋나요. 심판의 대상하고 협의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이야기합니다. 아까 설교할 때 빨리 지나갔는데, 인간은 이 자연 속에서 죽어 마땅합니다. 죽어 마땅함은 계속 죽은 인간으로 되어야 돼요.
죽은 인간이 펄떡펄떡 산 낙지 되어서 돌아다니면 안 되거든요. 죽은 자를 죽은자로 철저하게 대우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원칙이에요. ‘메멘토 모리’라고 하는 것이 있지요. 죽음을 기억하라고. 인간은 자기가 죽은 자이기 때문에 인간이 내놓은 어떤 것도 하나님께서는 안 받습니다. 거부합니다. 정성도, 헌금도, 전도도, 교회 봉사, 목사섬기기, 어떤 것도 안 받아요.
그런 것을 자꾸 거론하는 것은, 교회가 장사하려고, 치킨집도 아닌 것이 장사하려고 그 짓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그런 것 안 받습니다. 인간에게 의도가 있거든요. 그 의도가 뭐냐? 죽은 자로서 하나님의 계획에 맡겨야 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고 뭐고 나사는 것이 우선이에요. 내 조상이 따먹든 말든 그것은 나는 모르겠고 지금 내가 아프고, 내가 건강하지 못하고, 내가 돈 없고, 내가 사는데 지장 있다는 이것이 중요하다는 거예요.
이걸 가지고 진지함이라고 하는 거지요. 인간에게 가장 진지한 것은 뭐냐? 내가 얼마나 잘 먹고 행복하냐, 그게 진지함이에요. 그 진지함을 대변해서 보여준 것이 누구냐? 바로 엘리사의 종, 엘리사의 비서 게하시입니다. 여기서 게하시의 이야기를 길게 한 것은, 엘리사의 뜻과 게하시의 뜻을 대비시키는 겁니다.
엘리사는, “나 만날 생각하지 말고 요단강 물에 일곱 번 들어갔다가 그냥 집에 가세요.” 당신나라의 강이 아니고 엘리사가 사는 이 이스라엘 요단강에 잠겼다는 자체가 당신은 당신의 생각으로 인하여 당신은 치료대상이 아니었음을 아는 것이 치료에요. 내가 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의 힘으로서는 그 굴레에서 못 빠져 나가요.
내가 성경을 몇 번 읽었고, 내가 복음에 대해서 알고, 복음에 대해서 강의하고 설교하고, 신학을 몇 년을 하고, 이게 바로 내 구원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는 거예요. 그딴 게 필요 없는데, 나는 그딴 게 주의 일에 필요하다고 여기는 고집 같은 것 있잖아요. 그게 이단이지 딴 게 이단이겠습니까? 그게 이단인 거예요.
어떤 빅데이터에서 정보를 얻어야, 자꾸 얻어야 뭘 안다는 겁니다. 젊은 새댁이 뭘 안다고 애 탈장에 대해서 인터넷을 찾아보고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는 거예요. 그냥 엄마에게 물어보면 되지. 그러다가 애 더 아파봐야 ‘아, 내가 뭔가 경유를 해야 되는구나.’ 나도 죽었고 죽은 자에서 태어난 자식도 내 자식이 아니고 이미 죽은 자식이라는 것, 내 자식으로 죽고 주님의 것으로 돌려받는 식으로 내가 자식을 품에 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알아야 돼요.
뭔가 성도와 성도의 관계에서는 그냥 인간들이 갖고 있는, 품고 있는 어떤 자기의 것으로 주고받고 교환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세상에서, 직장생활에서나 하라는 그 말이지요. 천국 가는 성도들끼리는 뭔가 한번 당하고 와야 돼요. ‘나 있는 그대로 받아 달라.’가 아니라 ‘주님한테 얻어터져버린 나, 주님 앞에 죽은 자로 간주된 나를 받아주세요.’ 그렇게 돼야 돼요. 서로가.
그래서 부부도 주 안에서 사랑하라고 하지요. 주안에서. 서로 죽은 자인데 ‘주님께서 봐줘서 지금 같이 살고 있지 내일은 보장 못한다.’ 그렇게 살아야 돼요. 하나님이 나를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요소가 빠져버리면 세상 보는 해석에 있어서, 어떤 사건을 해석하거나 해독하는데 있어서 하나님을 경유하지 않는 해석이 나와 버려요.
그것은 자기중심이고 그렇게 되면 뭐가 진지하냐? 자기 하는 일이 굉장히 진지해져 버려요. 그 이야기를 좀 더 합니다. 게하시가 뭐라고 하는가를 봐야 되는데요.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선물을 가져왔는데 절대 받지도 않고 그냥 고국으로 돌려보냈어요. 그러니까 게하시가 ‘저런 싸가지 없는 인간이 다 있나? 무겁게 가져왔으면 좀 주고 가지.’ 이래가지고 나아만을 뒤쫓아 갑니다.
“아저씨, 아저씨. 우리 주인님이 가져왔던 그 선물 달라고 했으니까 저에게 주세요.” 나아만 장군은 애초에 병 고침 받고 고마웠으니까 “당연히 드리지요.”라고 했어요. 열왕기하 5장 23절에 보면 “나아만이 가로되 바라건대 두 달란트를 받으라 하고 저를 억제하여 은 두 달란트를 두 전대에 넣어 매고 옷 두벌을 아울러 두 사환에게 지우매 저희가 게하시 앞에서 지고 가니라.”
그러니까 이 게하시에게는 무엇이 중요한 문제고, 게하시 인생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뭐냐? 내가 돈이 있어야 산다는 이것이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 거예요. 이게 뭐냐? 엘리사와 바로 옆에서 도와주는 비서 사이의 갭입니다. 두 사람이 있는데, 엘리사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냈는데 바로 옆에 있는 게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차단하고 오직 자기 진지함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게하시같은 이 사람들이 오늘날 교회를 가득 채우고 있어요. 왜냐하면 교인들이, 성경이 얼마나 위험한 책이라는 것을 몰라요. 성경은 스릴러물이에요.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이야기인지. 베드로후서 3장 7절에 보면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간수하신바 되어” 이게 얼마나 진지한 말입니까?
이것보다 더 심각한 말이 어디 있어요? 성경은 내용이 무시무시한 책이에요. 성경을 대할 때 안일하게 대하는 것은, 아예 성경을 개무시하고 안 믿으니까 사는 게 그렇게 편해요. 아예 성경대로 안 믿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성경 안 믿고 뭘 믿는가? 교회 믿기로 작정을 했거든요. 교회 2층으로 세우고, 교인들이 얼마나 오고, 세미나 열어서 우리교회 괜찮은 교회라고 선전하고…….
지금 목사들에게는 교회가 심각해요. 성경내용이 심각한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만든 가게가 심각해요. 정말 성경말씀이 진지하고 심각하다면 우리는 나의 개인적 사정은요, 이것은 고려대상도 아니에요. 그 심각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인생 살면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시답지 않은 일이에요. 예를 들어서 어떤 사람이 길 가면서 크래커 먹는데 반을 흘렸다. 보니까 7살 먹은 애가 크래커 반을 흘리고 가더라는 말이지요.
그게 법무부장관 수사보다 더 심각한 문제입니까? 아니지요. 아무것도 아니지요.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데 누가 페이지를 넘기면서 부스럭거렸다. 그 소리 들은 사람이 자살할 일입니까? 아무것도 아니지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내 가정에 일어나는 문제, 내 몸이 아픈 문제, 크래커 땅에 떨어진 것이나, 책장 넘길 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 그것보다도 못해요. 이 성경 내용에 비하면.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에 진지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에 심각하고. 우리는 대결상대도 없는데 대결하고 복수하고 그런 겁니다. 제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 중 하나가 ‘나 상처 받았어요.’ 하는 말이에요. 주둥이를 그냥……. 당신은 상처받을 권한 없어요. 뭐 있어야 상처를 받지. 당신이 뭔데 상처를 받아요? 이 게하시가 상처 받았어요?
상처를 받다니! 죽은 놈이 무슨 상처를 받아요? 죽은 시체인데. 오늘 평소보다 말이 좀 험한데. 왜 내가 흥분하고 그러지? 난 당신에게 상처를 받았다고요? 당신이 뭐 대단한 고려자기라도 되고 ……, 그건 좀 비싸기는 하다만, 고려자기쯤 그 사람이 비싸요? 아니잖아요. 우리는 죽은 자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느 정도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배제하고 일합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면 우리는 심판에서 스톱돼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룰 때 있는 것을 심판해 버립니다. 있는 것을 심판하고, 심판 다음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마련해야 되는데 심판에서 스톱된 사람은 지옥 가는 사람이에요. 모든 인간은 심판에서 스톱될 수밖에 없는데 긍휼이라는 이것은 특혜를 베푼 거거든요.
긍휼의 근거는 신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를 흘려줘야 그 피에 근거해서 긍휼이 주어지는 겁니다. 긍휼을 딱 쪼개보면 그 안에 예수님의 살과 피가 들어 있어요. 왜냐? 그게 새 언약이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피조 된 이 세상이 불로서 망한다, 심판한다. 사실은 거기서 스톱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긍휼을 입은 자는 심판에서 부활이 되어버려요. 이것보다 더 심각하고, 이것보다 더 소중하고, 이것보다 더 중요하고, 이것보다 더 감격스럽고 감사할 일이 또 있겠습니까? 개인적인 상처요? 이것은 그 앞에 대지도 마세요. 성경내용입니다. 이게.
예수님이 살았다. 그 다음에 예수님이 죽었다. 그리고 긍휼을 만들었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 부활했다. 긍휼의 부활에 참여하는 자가 성도고 참여하지 못한 자는 거기서 스톱이 된다니까요. 심판과 저주에서 한발자국도 떼지를 못해요. 왜? 그들이 갈 운명이 그 선에서 멈춰요. 포토라인이에요. 기자들이 거기서 더 가면 안돼요. 거기서 스톱해야 돼요. 그 선을 못 넘어요.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 선을 선행으로 넘어보겠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하나님, 내가 50년 동안 섬겼잖아요, 아프가니스탄 선교했잖아요, 뭐 했잖아요……. 자기가 한 것을 다 끄집어내서 저주와 심판을 넘어보려고. “제가 믿씁니다!” 쌍시옷 하면서 기도하고, ‘믿으라, 하는 것은 다 믿겠습니다. 십자가 피를 믿습니다, 새 언약 믿습니다.’ 어디서 들은 것은 있어서 좋은 것은 다 끌어당겨서. 하여튼 인터넷이 문제에요. “복음 설교 열두 개 들었습니다.” 했는데 백날 하니 뭐합니까? 자기가 중요한데요.
자기가 어떤 입장인지도 모르는데요. 자기가 망하지를 않았으니 문제에요. 계속해서 하나님,하나님, 하지만 정작 진지하고 중요한 존재는 하나님 보다 본인이 더 중요해요. 그러니까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분명히 게하시가 엘리사하고 일을 했지만 게하시는 계속해서 게하시로 남는 거예요. 나중에 게하시는 문둥병 걸리지만.
바로 옆의 엘리사하고 소통이 없어요. 연결될 수가 없어요. 단절되어 있어요. 이게 구약입니다. 엘리사가 하나님이고 게하시가 인간세상을 대변한다면, 호세아에서는 하나님이 하나님이고 호세아가 게하시 같은 입장에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 호세아는 어떠냐?
호세아는 게하시처럼 되지 않지요. 아낌없이 그대로 이 대자연속에 하나님께서 나를 선지자 되게 했다는 이 사실에, 호세아는 거침없이 주저 없이 자기인생을 하나님의 말씀에 맡겨버립니다. 게하시같지 않고. 그 호세아의 모습이 뭐냐? 장차오실 메시아의 모습이에요. 예수님의 모습이에요. 아버지의 뜻이 있음에 아낌없이 아버지의 뜻에 다 바치는 겁니다.
호세아가 바람난 자기부인을 데려오되 그냥 데려오는 것이 아니고 값을 주고 데려온다는 거예요. 값이라 하는 것은 뭐냐?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대속이라 해요. 값을 주고 사오는 거예요. 값을 치르고 사오는 거예요. 이걸 호세아가 먼저 보여주는 거예요.
예수님 오시기 전에 호세아가 그 귀한 돈을 가지고 값을 치를 자격도 안 되는 바람난 자기 아내를 값을 치르고 데려왔을 때에 그 호세아의 모습은 ‘철저하게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나도 중요하게 여깁니다. 하나님이 덜 중요하게 여기는 나를, 하나님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 앞에서 나를 덜 중요한 것으로 제가 인정하겠습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냥 시키는대로 살겠습니다.’ 이것이 호세아의 모습입니다.
그 호세아의 정신이 이스르엘을 낳고 결국은 이스라엘을 낳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하늘에 응하면서 그 계획이 시편 85편 10절, 11절에도 그 내용이 나와 있어요.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진리는 땅에서 솟아나고 의는 하늘에서 하감하였도다.”
여기서 하늘과 땅이라 하는 것은 그동안 인간중심에서 봤던,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하늘과 땅, 기존의 인간들이 자연을 고정적으로 봐서 얻을 것 얻겠다고 과학적으로 개발하고 분석하고 법칙을 만들어냈던 그 자연관이 아니고요, 그런 것은 하나님이 물과 불로서 싹쓸이 하고, 여기에 땅과 하늘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생각하는 하늘, 예수님을 이 땅에 오시게 한 그 하늘과 그 땅을 의미하는 거예요.
그래서 의가 바라보는 하늘, 진리가 바라보는 땅, 하늘과 땅이 그냥 하늘과 땅으로 줄곧 가는 것이 아니고 거기서 뭔가 배태하고 양산하고 생산이 돼요. 하늘은 의를 낳고, 땅에서는 진리를 낳는다면 그 진리와 의가 같이 낳게 되는 중심인물, 표준적인 인물이 있을 거예요. 그분이 시편 85편대로 오신 예수님이지요.
예수님이 의고 진리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 오실 때 애들도 알아요. 동방박사가 내비게이션이 있었습니까, 뭐가 있었습니까? 구글이나 다음 지도가 있었습니까? 동방박사가 세계 최초의 내비게이션을 이용해서 왔지요. 동방박사의 존재는 내가 별을 따라왔다는 자기존재가 아니고, 철저하게 어떤 내가 만나야 될 그 분에게 미리 앞당겨 종속당하는 존재였습니다.
내가 나중에 만날 분, 나중에 눈으로 얼굴과 얼굴을 맞댈 그분, 지금은 보지 못하지만 미리 앞당겨서 이끌림을 당하는, 그 자체가 내비게이션 모양새를 보여주는 존재가 동방박사지요. 그분이 오늘날 저와 여러분들입니다. 이 대자연속에서 하나님께서 이상스럽게 남들과 같이 살지 아니하도록 하는 것. 남들은 전부 다 자기의 생존이 우선이거든요.
교회 나와도, 기도해도, 전부 다 자기행복, 자기 배부른 것, 자기 출세하는 것, 자기 취직하는 것, 전부 다 자기영광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런 무리에서 주께서는 우리한테 그걸 허락을 안 하네요. 교회도 장사 안 되고. 뭔가 자꾸 발을 빼라는 거예요. 사람이 이 땅에서 잘되면 이 땅에 미련을 두게 되어 있어요.
아들이 너무 예쁘고, 딸이 너무 예쁘면 하나님 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게 되어 있어요. 한 번 탈장이 일어나 봐야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아, 이게 그냥이 아니고 이미 내가 죽은 자라는 그 소스를 뿌리고 와야 돼요. 그걸 덮어 쓰고 와야 돼요. 내가 나가 아니라 죽은 나로서 내가 다시 인수인계 받는 것, 내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으로의 내가 되어야 돼요.
이미 그 작업은 나를 구원하기 위함이 아니라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자연속의 하나의 징후, 시그널, 징조로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고, 생겨나서, 존재하고 살아가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이게 골로새서 1장 16절의 말씀이잖아요.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함이다. 남들은 그게 안보이지요. 왜 안 보이느냐? 본인이 펄펄 살아 있으니까 안 보이는 거지요.
본인이 살아있으니까 살아 있는 본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기도? 내가 했다. 내가 붙지요. 헌금? 내가 했다. 내가 붙지요. 인생 어떻게 살았나? 내가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 했습니다. ‘내가 그만큼 그나마도 건전하게 살고 그다지 큰 죄를 안 지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우리가정 건사하고 산다.’고. 그런 생각을 계속해서 품고 있는 거예요.
안 들키려고 애써봐야 들키거든요. 뻔하거든요. 이상하게 주여, 주여, 해도 전부 빈말이고요. 실제로는 뭐냐? 내가 조심하고, 자신의 건전함과 자신의 우수함을 나름대로 열심히 지켜낸 덕으로 나 이만큼 이정도의 가정행복을 유지하고 있다는 의식이 더 강렬하게 다가오는 거예요. 내가 가장 진지하고 내 문제가 가장 심각해요. 그래서 누가 건드리면 상처받았다고 이야기해요. 진짜 성질 같아서는 상처 좀 더 냈으면 좋겠어요.
하나님이 준비하신 계획은 그거 아닙니다. 이 거지같은 인간, 쓰레기 같은 인간에게 그 쓰레기 같은 인간이 귀한 것이 아니고 거기에 담는 긍휼이 더 귀해요. 하나님이 마련한 긍휼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하심을 담는 겁니다. 여러분, 다 송편 빚어봤지요? 송편이 찹쌀이 맛있다 하는 것은 어른들 이야기고, 애들은 찹쌀, 그게 맛있는 것이 아니에요.
송편 안에 팥이 들었는지 콩고물이 들었는지, 우리 어릴 때는 햇빛에 막 비춰 봐요. 콩고물 들은 것은 안 먹고 맛있는 팥 들어 있는 것만 골라먹으려고 햇빛에 막 비춰본다고요. 우리는 주님의 긍휼을 입은 송편이라면 긍휼이 들어 있는 티를 냅시다. 자기 잘난 체하지 말고. 게하시처럼 본인에게 진지하지 마세요. 진지해도 주님이 진지하게 봐야지 내가 나를 진지하게 보면 안 됩니다.
바로 이것이 내 백성 아니었던 자를 강조하지요. 23절에 보면 “내 백성 아니었던 자”에요. 내 백성 아니었다는 이 절차와 이 과정, 이것 놓치면 안 됩니다. “나는 주의 백성 아닙니다.”를 가져와야 돼요. 그게 믿음이에요. “나는 주의 백성 아니고 나 믿는 자 아닙니다.” 그걸 가져오라고.
그걸 긍휼이라는 그 대작업, 그 프로젝트를 위하여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우린 믿음도 없어서 마땅히 지옥가야 되는 그 절차를 필수적으로, 이것은 선택과목이 아니고 필수과목이에요, 필수적으로 그걸 겪게 하는 거예요.
아니었는데 주님의 긍휼을 담는 송편 되기 위해서 구차 없이 그 길을 주께서 가게 하신 거예요. 그리로 몰아세운 겁니다. 얼마나 주님의 일이 용의주도합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하고 똑같아요. 나밖에 몰라요. 내가 제일 소중해요. 그런데 주님의 계획에 의해서 우리가 주님의 긍휼을 담는 ‘딸랑딸랑’, 주님의 계획이 담겨있는 그런 모습으로 살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죽은 우리는 누가 관리하느냐? 죽은자 유품관리는 주님이 알아서 해요. 죽은자를 유품관리해서 송편에 속 넣듯이, 죽은 자에 긍휼을 담아놓고 그 긍휼이 어디서 나왔는가의 그 나온 원천지로 가도록 벡터, 어떤 방향성을 갖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더 이상 미련 둘 이유도 없습니다. 이 땅에서 성공할 이유도 없고, 이 땅에서 승자가 될 이유도 없고, 더구나 이 땅에서 누굴 향하여 복수나 보복도 하지 마세요.
이 땅 사람들과 상종할 가치도 없기에 그들과 상대하시면 되는 겁니다. 주께서 주신 환경 속에서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내가 저런 모습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지만 게하시 보면서 내가 게하시와 똑같은 것을 확인하면서, 웬 은혜인지, 주님의 긍휼만 높이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들에게 없는 것을 집어넣어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긍휼이 오기 전까지는 내가 심각했고 내가 제일 중요했었습니다. 그런데 웬 은혜인지, 불쌍히 여김이 오는 순간 주님의 운반체가 되었고, 동방박사가 되었고, 우리가 엘리사가 되었고 호세아로 사용되는, 주님의 희생과 표준을 증거하는 사람이 되게 한 것을 하나님 앞에 오히려 더 감사하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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