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강
지난 시간에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했고 구원론을 하다가 조금 남았는데, 율법 안에 있음으로써 예수 안과 예수 밖에서 한쪽은 율법에 대해 이미 해결한 것이고 한쪽은 율법에 대해 해결하지 않은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했습니다.
예수 안이라는 경계선이 있고, 예수 밖은 율법의 전류가 흐르고, 예수 안은 율법의 모든 것이 축복으로 변하고 예수 밖에서는 저주로 변하지요. 축복과 저주로 변하는 것은 예수님의 새언약이 율법을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안은 율법으로 다루시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이기신 예수님이 다루시고 이쪽은 그냥 율법으로 다루지요.
다룰 때 다루는 방법은 양쪽 다 똑같아요. 율법의 기능은 구약에는 구약 이스라엘을 상대로 했고, 그것이 신약에 오면 모든 인간에게 확대되었는데 확대되면서 나타난 것이 뭔가 하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하지 말고, 할 수 없는 것을 해라!” 라는 명령으로 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늘 거부당합니다. 이제는 할 수 있어 라고 장담하는 것은 도리어 하나님으로부터 거부당할 것만 그만큼 키워 왔는 셈입니다. 왜 그렇게 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확보한 율법 완성은 예수님의 몫이지 우리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믿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예수를 위해 희생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하신 일에 대해 흠집을 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위해 희생하겠다는 것은 예수 안에서 독자적으로 자기 영역을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작업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예수님께 희생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고 반복적으로 타락케 하시는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겁니다.
보통 신학에서는 “타락했느냐? 이제는 너를 그 타락에서 구원했다.”라는 공식을 주입하는데 하나님의 방법은 도리어 계속해서 타락케 함으로써 그 타락케 하는 작용 자체를 구원케 하시는 작용으로 실시하시는 방법을 사용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기존 교회사에 나오는 교회들이 하는 일들이 사도바울의 복음, 특히 로마서 같은 경우와 전해 맞지 않아요.
제가 왜 교회사를 거론했는가 하면, 유럽과 미국이 신자가 많다고 하는데 그들은 믿는 것이 아니고 국가가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 기독교를 도입한 결과지요. 1917년에 레닌에 의해 러시아에서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납니다. 볼세비즘이 전 유럽이 퍼질 때 독일에서는 그것을 강력하게 반대하면서 생긴 당이 있어요. 이게 나치당입니다.
나치당은 볼세비키 혁명으로 노동자의 천국이 되는 그런 사상을 방지하기 위해서 독일에서는 강력한 우파가 등장할 필요가 있었고, 그 때 히틀러가 등장해서 독일 교회(특히 루터교회)에 요청을 했어요. ‘공산당을 막아줄 테니까 우리의 정책에 협조해 달라.’ 그래서 교회가 협조를 했습니다.
교회의 협조를 받은 후에 히틀러는 이런 법을 만들었습니다. 교회의 모든 조직에서 유대인들이 직분을 맡는 것을 금지하는 아리안 법이 통과 돼요. ‘아리안 민족만이 교회에서 성직을 가질 수 있지 유대인들은 안 된다.’ 여기에 대해서 교회는 협조하자는 파와 협조할 수 없다는 파가 나눠졌어요.
마틴 니뮐러라는 사람은 강력이 반대를 했습니다. 독일은 종교성이 있고 종교 세금이 있어서 소득의 0.1%를 세금으로 거둬 그 돈으로 교회 운영 자금과 성직자의 봉금을 지급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국가의 정책을 거부하기 힘들었어요. 거부하면 그 교회에 돈을 지급하지 않으니까요.
전 국민에게 종교 세금을 거둬서 그 돈을 교회 운영을 위해 지급했는데, 국가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국가에서 “이 교회는 국가에서 인정할 수 없는 교회입니다.”라고 판정을 하면, 자금 지원이 끊어집니다. 그래서 국가 정책에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이 있어도 노골적으로 반대할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틴 니뮐러를 앞장 세워서 교회의 뜻을 전했습니다. “‘성경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모두 하나다.”라고 했기에 교회에서 유대인을 배척하는 정책에는 동의할 수 없다. 유대인들도 교회의 직분을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나오면서 교회가 두 패로 갈라졌어요.
국가 정책에 반대하는 파는 고백교회입니다. 고백교회는 “당신과 정책을 같이하는 것보다 우선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신앙을 고백하는 이것이 진실로 교회의 바탕이 된다.”는 그런 뜻에서 고백교회입니다. 이 고백교회에서 배출한 유명한 신학자가 있습니다. 칼 바르트.
여하간 이 고백교회가 국가 정책에 반대하면서 많은 교회들이 고백교회를 떠나게 되고 고백교회는 그 규모가 상당히 작아졌습니다. 사람들은 신앙의 중요성을 말하지만 돈이 지급되지 않는 교회를 계속 유지할 수 없었기에 고백교회를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돈을 주는 것이 아니고 히틀러가 돈을 주는 현실을 당시 사람들이 외면할 수 없었지요.
교회를 운영하려면 전기세, 관리비, 성직자 봉급 이런 비용이 들고, 또 교회에는 많은 세금 감면 혜택이 있었는데 교회가 국가 정책에 반대하면 이런 모든 혜택을 받을 수 없으니 쉽게 반대를 못한단 말이지요. 그래서 대다수가 고백교회를 떠나게 됩니다.
그러나 마틴 니뮐러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끝까지 남아서 저항을 하는데 점점 나치당의 횡포가 심하니까 본 훼퍼는 히틀러 제거에 나섰습니다. “당신은 목사로써 어떻게 살인을 계획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본 훼퍼는 대답하기를 “많은 사람이 탄 차를 미친 사람이 운전하는데 그냥 둘 수 없다.”고 하면서 히틀러 암살을 계획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나치당에 의해 죽습니다.
이런 것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교회가 표면으로 내세우는 구호는 대단히 복음적이고 성경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배후에는 복음이 없고 오직 이득을 얻겠다는 그런 심보가 강렬하게 펼쳐진 것이 그동안 이어져온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들이 그렇게 뭉치게 된 것은 첫째 시간부터 이야기한 로고스고, 이 로고스는 칸트에 의하면 이것은 ‘인간의 이성’인데, 인간의 이성은 그냥 이성이 아니고 신의 이성, 신의 거룩, 신의 온전함 이런 것의 일부를 우리가 할당 받았다는 인식이 있는데, 이것은 십자가와 관계 없이 타고난 인간의 종교심입니다.
내 안에 있는 선한 것을 개발해서 신의 선한 것을 마중 나가서 신도 선하고 나도 선하니까 죽어서 신과 함께 거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교회에 나갑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구원 방법은 율법을 줘서 “그렇게 착하고 선한 것 같으면 이 율법을 한 번 봐라.”고 주시지요.
그러나 이 율법을 그냥 들이대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그냥 문자로 들이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피하고 싶은 것은 드러내고, 우리가 드러내고 싶은 것은 안 받고. 어떻게 하든 반복적으로 우리는 타락한 존재, 아무리 노력해도 타락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인생인 것을 폭로하는 것이 이 율법입니다.
이 율법적 기능이 예수 안에서 여전히 작용하면서 예수님의 일방적인 공로와 마주치게 만들지요. 이렇게 해서 구원 받는 겁니다. 타락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아담의 타락이 지금 나의 타락으로 더 구체화 되고 현실화 되면서 구원되고 있는 거예요.
본 훼퍼(목사)가 히틀러 죽이는 그런 일에 가담하면 곤란하죠. 왜냐하면 심판하는 것은 주께 있습니다. 본 훼퍼가 그런 행동을 한 것의 이면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하면, “전통이 있는 루터교회 개혁주의 고백교회를 히틀러가 나치당을 만들어서 그렇게 무시하는데 대다수 교회는 굴복했다. 나는 굴복하지 않고 그들을 제거하겠다.”
우리가 넉넉히 구원 받았으면 무시당해도 되잖아요. 이번 강의의 주제는 “이렇게 값진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는 무시당해도 된다.”는 말입니다. 이곳에는 군 입대를 압둔 청년도 있는데, 군에 가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무시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한 번 체험을 해보세요. 무시 안 당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렇게 무시당하게 하시는 그것이 주님께서 이미 준비해 놓은 구원의 넉넉함이 훼손되지 않는다는 거예요. 우리가 무시당하면 당할수록 구원은 충분하고 넉넉함은 더욱 드러납니다. 넉넉히 무시당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그 사람은 어디를 가도 자유인입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하는 자는 도리어 예수님에 의해서 무시당한 사람입니다. 강의 마지막부분에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구 무시 당합시다!” 이 한 가지만 알면 돼요.
부부싸움도 무시당하자고 마음먹으면 일어날 일도 없어요. 가정사와 모든 일이 “그래, 내가 무시당할 게.” 이런 식으로 살면 세상에 걱정거리가 뭐 있겠습니까?
이제 성령론을 하겠는데, 성신과 성령의 차이를 먼저 알아야 돼요. 성령은 구약에 안 나오고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처음 출발합니다. 그 전에 마리아가 잉태할 때 나오지만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할 때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면 성령이고, 다른 선지자가 등장하면 성신입니다.
성신이 등장할 때는 미완성이란 뜻이에요. 구원에 보탤 것이 남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이 와버리면 더 이상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보탤 것이 없다는 뜻이에요. 아무것도 보태지 말란 말이죠.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세례주실 그분이 온전한 것을 준비했기 때문에 내 쪽에서 뭔가를 꼼지락거린다든지 내 쪽에 구원 받을 사전의 정지작업을 한다든지 그런 짓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 정지작업까지 주께서 준비하시는 겁니다.
율법을 보내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철저하게 타락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폭로하는 그것이 구원의 정리정지작업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와요. “율법이 옴으로써 모든 사람들은 율법을 못 지킨다.” 이 정도라면 제가 말을 안 합니다. “율법이 옴으로 사람들은 율법 지키느라 수고한다.” 그 정도가 아니에요. “율법이 옴으로 모든 사람은 율법이 갇혀 있게 되었습니다.” 이게 사도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2절에 그 말씀이 나와 있어요.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율법은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둡니다. 이렇게 되면 어느 인간도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도바울의 모든 명령이나 규칙들도 바로 이 율법적 기능을 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이란 반드시 율법적 기능과 더불어 복음이 나옵니다. 만약에 그냥 십자가를 믿게 되면 그것은 십자가 믿는 법을 지킨 것이 돼요. 십자가 믿는 행위를 한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의 행함으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일하심으로 구원 받습니다. 그러면 신약의 성령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과 더불어 완성상태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작동이 복잡한 TV를 구입했을 때 TV기사와 함께 물건이 와요. 그러면 집에 있는 할머니들은 포장이 뜯는 것은 할 수 있지만 TV 선을 연결하고 리모컨을 작동하고 채널을 조정하고 하는 것은 모릅니다.
TV를 가지고 온 기사가 TV를 놓고 그냥 가지 않습니다. TV를 볼 수 있도록 모든 장치를 완벽하게 해 줍니다. 그리고 리모컨 조정하는 방법과 TV 조작방법 등을 자세히 알려준단 말이지요. 그렇게 설치하는 기사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성령께서 예수님을 앞장세워 들어오십니다.
들어오시면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모든 것을 예수님이 이루십니다. 이 성령을 다른 말로 보혜사라고 합니다. 이 보혜사는 예수 그리스도만 관계하지 이만희 목사(자신이 보혜사라고 주장하는 사람)와는 관계 안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관계해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완성자가 되고 모든 것은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 말은, 나(예수님) 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다시 오실 때 예수님은 올라가신 그대로 다시 오시게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뭔가?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어떤 인간이 등장하더라도 다 가짜임을 알라는 것입니다. 마호메트가 등장하고 문선명이 등장하고 그 어떤 사람이 등장해도 전부 가짜입니다.
제가 가짜로 통일교 문선명을 거론했는데 사실은 지금도 교회 간판 걸고(대한예수교 장로회 등) 그리스도를 가리고 성령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내서 순복음과 관련시키면서, 성령을 예수님 믿는 것과 분리해서 ‘우리 교회 믿기’로 바꿔치기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교회 유지와 성령과 관련시키는 인사들은 100% 가짜들입니다.
그들은 공부를 안 해서 그런지, 머리가 나빠서 그런지 본의 아니게 그들이 하는 모든 작태는 지난 2,000년 동안 천주교를 그렇게 욕하고 그들로부터 벗어나서 개혁주의라고 자체하면서 그들은 점차 구약 성경의 형태로 갔던 동방교회, 천주교 그 시스템을 그대로 도용합니다. 왜요? 다수 대중이 원하는 것을 제공할 때 집단적으로 기독교에 입문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공부를 해서가 아니라 하다보니까 어느 새 목사는 특이한 복장 로만 칼라를 하는데, 로만 칼라는 로마식 칼라입니다. 그런데 감리교 신부가 로만 칼라를 하니까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감리교의 원조가 로마인가?’ 이런 의문을 가지요. ‘서울 칼라’라고 하든지 ‘세종시 칼라’라고 할 수도 있는데.
영국 성공회의 경우는 복장만 특별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이면서 목사라고 하지 않고 신부라고 해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는데 교회 달력이 따로 있어요. 교회의 절기를 표시해 놓고, 그 절기를 지킵니다. 그리고 교회 강대상 뒤쪽에 절기에 따라 휘장을 바꾸기도 하고 바꿀 때마다 헌금을 합니다. 그러면서 성령께서 그렇게 했다고 주장합니다.
성령은 성령 오신 날을 지키지 않습니다. 성령 본인이 절기를 안 지켜요. 독일은 국경일(공휴일)이 성인축제일, 성령강림일, 부활절, 성탄절 이런 날입니다. 옛날 전통적인 기독교 축제일에 맞춰서 지켜온 것인데, 이것이 구약 식입니다. 구약은 성령이 아니고 성신의 시대였습니다.
성신과 성령이 불완전과 완전함의 차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성신이 오면 어떤 점에서 불완전하냐? 성신이 활동하는 에스겔, 예레미야, 모세, 다윗 이런 사람들은 그 시대에 주어진 하나님의 언약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말이 좀 어렵지요?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란 사람이 나와요.
제가 기드온을 알게 된 것은 젊은 시절 교회 다닐 때 이웃 교회와 축구시합을 하면서 처음 알았어요. 그 때 교회 출석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목사님이 굉장히 강조를 했어요. “우리는 기드온 군사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는 기드온이란 이름을 처음 들었어요. 빵집 이름 같기도 하고 선교단체 이름 같기도 하고.
그 때는 성경 내용을 몰랐으니까 기드온이 누구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나중에 성경을 보니까 기드온이 방앗간 주인인데 비급한 사람이에요. 하나님이 시키는 일을 하기 싫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회피하려고 했어요. 기드온은 나름대로 정당성이 있습니다. 제사장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니에요. 그냥 농사짓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 자기보다 믿음 좋고, 믿음 있는 척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자기는 평범한 농부인데 “왜 저에게 찾아오십니까?” 하나님의 뜻은 이것입니다. “네가 가장 못났기 때문에 찾아왔다.” 라는 취지로 찾아오셨어요. “네가 전혀 신앙과 무관한 사람이기에 적임자였다”는 거지요. 기드온의 하는 모든 행세가 무엇을 대변하는가 하면 당시의 전혀 믿음이 없는 일반적인 이스라엘의 신앙상태를 보여주는 표본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믿음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한 사람을 뽑아냈는데 그가 바로 기드온입니다. 그런 자(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일을 시키니까 하긴 해야겠는데 불안해서 새벽에 아무도 몰래 가서 바알 신당을 훼파했는데, 아침에 난리가 났지요. “누가 바알 신상을 깼느냐? 범인을 잡아라!” 그렇게 해서 추적을 하니까 기드온이 한 것이 밝혀졌지요.
주께서 일을 시켜도 그 주님을 믿지 못했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시험하는데 그 수준이 어떤 것인가 하면, 양털을 놓고 “양털에는 이슬이 내리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내리지 않게 하옵소서.” 지금 생각하면 약간 촌스럽고 어린애처럼 순진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 같으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겠습니까?
이왕 하나님을 시험하려면 로또복권 구입해서 ‘이것 대박 나면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해서 돈도 챙기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도 경험하고 이렇게 하겠지요. 기드온이 양털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처음에는 양털에 이슬이 맺히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맺히지 않게 해 달라고 했고,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남자답게 이제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가면 되는데 한 번 더 시험을 합니다. 두 번째는 반대로 “양털에는 이슬이 없고 다른 곳에는 이슬이 내리게 하옵소서.”라고 요청했어요. 하나님이 그 요구도 들어주셨습니다.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고 하나님이 시키시는 데로 했습니다. 이 말은, 성신시대는 명령이 인간의 내부에 오지 않습니다. 인간의 심령까지 오지를 않아요. 율법은 율법 밖에서 놀고 율법을 지켜야 할 사람은 강제적으로 믿음 없는 사람을 뽑는 식이에요.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의 성신이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것까지 하지만 그 지키는 당사자도 자기 내부까지 그 율법의 완성이 스며들지를 않습니다.
십계명이 살아서 십계명에 박혀있던 글자가 우리 마음을 돌판으로 사용해서 새기는 것은 신약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새언약 시대입니다. 새언약 시대는 십계명이 우리 내부에 오게 됩니다. 그런데 저 밖에 있는 율법은 우리가 꼴보기 싫으면 율법을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우리 내부에 장착하시면 말씀을 보려고 하지 않아도 말씀 자체가 생산되어 불현듯 말씀이 생각나게 해서 우리의 심령과 골수를 수시고 다녀서 말씀 앞에서 항상 벌거벗은 채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히브리서 4:12-13에 나오지요. 그렇게 만드는 것은 성령시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드온은 농사를 짓다가 주의 일에 나서게 되는데, 이것이 구약 시대라면 우리는 농사짓는 중에도 주의 일을 하는 현장이 됩니다. 구약 시대는 집에 있을 때는 주의 일이 아니고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고 봉사를 하면 주의 일이 되겠지만, 신약 시대는 사우나에 가서 탕에 몸을 담그고 있을 때에도 주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돼요. 성령이 임하였기 때문에 그래요.
성신의 시대에는 신성한 일을 특별히 따로 만들어요. 성령 시대는 따로 만들 필요 없이 현재 우리가 하는 일상적인 모든 것이 주께서 일하시는 현장으로 성령께서 그렇게 전환시키고 마는 것입니다.
수능 시험 치는 광경을 뉴스를 통해 보니까 시험 시간 전에 모든 학생이 기도를 해요. 전부 교회 다니는 아이들 같아요. 막상 시험시간이 되어 문제를 못 풀면 ‘사바사바 분신사바’ 주술을 외우면서 어느 것을 찍을까 고르고 있어요. 그런 아이들이 시험 전에는 다 기도하고 있더란 말이지요. 이게 바로 성신 시대의 모습입니다..
다급할 때, 위기 때, 어려울 때 기도하게 되면 비로소 내 밖에 있기에 내가 호출해야 돼요. “하나님이여, 오셔서 도와주소서!” 호출하면 쪼르르 달려와서 “뭘 도와줄까?” 이것은 성신 시대고, 성령 시대는 호출하기 싫어도 호출하게 만들어서 호출한 사람까지라도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너를 쟁기로 파낸 하나의 사건인 것을 깨닫게 하는 것, 모든 것을 소급해서 결과와 원인을, 시작과 끝 전부를 주님의 일로 깨닫게 하는 것’이 성령의 시대입니다.
그리고 성령시대의 특징은 성경을 오래 본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가 되는 시대는 아닙니다. 기도를 오래 한다고 그것이 주님과 은밀히 교제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몸이 갖고 있는 구약 시대의 습성이 그대로 발휘된 겁니다. 진짜 성령 받고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내가 기도하지 않을 때도 주께서 기도하고 계시고, 내가 주님을 찾지 않을 때도 주님은 은혜를 내려주신다는 것을 소급해서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고전15:10)”임을 깨닫지요.
내 밖에 계시다가 호출할 때 오시는 분이 아니고 호출하기 이전부터 내 자리를 주님의 자리 자리로 삼아서 일하십니다.
기드온 이야기를 계속해 봅시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전쟁에 나갑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을 앞세우셨기에 기드온은 어쩔 수 없이 떠밀려 갑니다. 마치 일요일에 아버지가 소파에 누워 뒹굴고 있을 때 아이들이 팔을 잡아끌면서 “아빠! 놀이동산에 놀러 가요.” 하면 아버지가 밀리잖아요. 이처럼 기드온이 밀려가 나갑니다. 그 때 전쟁에 나갈 사람이 22,000명이 나왔습니다.
적은 수십만이 되는데 22,000명으로는 게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러이러한 사람들을 돌려보내라고 해서 10,000명이 남았어요. 그런데 그것도 많다가 하면서 물가로 데려가서 또 나눕니다. 그래서 겨우 300명만 남았습니다. 남은 자들이 침착하거나 전쟁에 나갈 의지가 탁월해서 남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이들이 침착해서 뽑혔다면 이 전쟁은 주의 일이 아니라 침착한 사람의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큰 일 날 소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무릎을 꿇고 물을 먹었는데 300명은 전방을 주시하면서 손으로 물을 떠서 먹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전쟁은 ‘침착의 전쟁’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전쟁입니까? 침착한 사람들 때문에 전쟁에 이긴 거예요? 그렇다면 침착한 사람과 다수의 적들이 한 번 싸워보세요. 누가 이기는가?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입니다. 제일 작은 수를 뽑은 것입니다.
제일 작은 수는 없는 쪽이 있는 쪽을 이긴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속에 의로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없는데 죽으니까 천국에 가 있고, 교회 목사는 어떻게 그렇게 착한지 천사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지옥에 가 있고. 이것은 없는 것으로 있는 것을 부끄럽게 만드는 거예요. 무시당하는 세리, 창기가 소위 의롭다고 여기는 바리새인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가있는 겁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개한테도 무시당하던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 품에 안겼지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아무 것도 없는 존재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머리 둘 곳도 없고, 참새보다 못해요. 심지어 목숨까지 내놓고 떠났습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천국 가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아요.
마치 남자 목욕탕 같아요. 아무것도 안 가져가도 다 줘요. 여자는 바구니에 수건도 넣고 화장품도 넣고 가지고 가지만 남자는 그냥 가면 수건도 있고, 로션도 있고 다 있습니다.
기드온은 떠밀려서 갔기 때문에 전쟁의 모든 승리는 주님의 승리가 되고 그 칼은 여호와의 칼이 되는 겁니다. 여호와의 칼이 놀라운 사실은 지상에서는 ‘기드온의 칼’이 되는 거예요. 기드온은 군인이 아닙니다. 농사꾼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용사가 된다는 것은 그 배후에 누가 숨어 있느냐?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찬양했던 ‘주의 이름’만이 용사인 것이 구약의 핵심적인 요소로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기드온이 과연 완성태냐? 메시아냐? 아니지요. 기드온은 메시아가 아닙니다. 기드온을 흉내 내면 안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교회 오지 말고 방앗간부터 가야 돼요.
AD 200년경에 마귀와 싸운다가 사막에 간 사람이 있었어요. 오늘 같은 날씨에 사막에 가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모래찜질하기 위해서. 그런데 사막에 가서 귀신을 쫓아낸다는 거예요. 그 사람은 본인이 귀신인 것을 몰라요. 본인이 귀신입니다. 뭔가를 채우려고 하지 마세요. 그렇다고 비우려고도 하지도 마시고. 비운다고 하니까 법정 스님이 생각나는데, 요즘 하버드 대학 졸업한 젊은 중이 나와서 만날 마음 비워라고 하는데 그것은 스토아 학파가 한 주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토아 학파에 대해서 공부한 거예요. 성령님의 사역을 스토아 학파가 주장하는 윤리로 이해하는 비非-복음적 사고방식을 복음으로 지적해야 합니다.
“마음을 낮춰서 행복에 이르는 것은 인간 속의 로고스의 작용이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교회. 신학자들이 이 로고스 작용에다 성령으로 대체하면 그것이 성경적인 안목인줄 알았던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피를 우리 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가해자-피해자 구조 안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마음을 낮추어도 여전히 죄인입니다. 복받을 자격없습니다. 마땅히 무시당해야 합니다. 복받을 수단으로 무시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완성이라는 말은 우리가 나름대로 기대하고 있는 완성을 항상 공격하는 그런 완성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완성은 신에 점점 가까이 다가가면 완성에 가깝다고 여깁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신은 나를 신처럼 대우해 주는 그런 것을 완성이라고 본단 말이지요. 그러나 성령께서 하시는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길 준비가 되어 있느냐? 그리스도를 섬김 마음이 있는 사람만 천국에 가야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저 멀리 있고 내가 나에게 가장 가까이 있어요. 그래서 성령님은 이것을 그냥 두지 않지요. 왜냐하면 이런 인간을 천국에 보내면 천국이 예수님의 나라가 아니고 인간들의 나라가 된단 말이지요. 그러니까 무슨 조치가 있어야지요.
성령이 그 조치를 완전하게 해 내십니다. 하자 없이, 실수 없이 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접목된 영이기 때문에 “네가 갖고 있는 포부와 기대를 완성적인 차원에서 내가 잘라 줄게.” 이런 작업을 성령께서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어거스틴의 조명론과 반대되는 사도바울이 말하는 성령님의 적용입니다.
성령님의 적용이 성경에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찾아보고 강의를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7절입니다. “우리가 이 보베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우리를 보고 질그릇이라고 해요. 지금은 성신시대가 아닙니다. 기드온은 성신 받아도 다시 집안에 문제가 있었어요. 성신 시대는 찾아 왔다가 떠나고 맙니다. 성신은 왔다가 머무는 것이 아니고 떠나가 버려요. 다 이용했다고. 그러나 성령 시대는 우리 자리를 예수님 자리로 바꿨기 때문에 떠날 이유가 없어요.
7절에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여기서 우리가 혼란스럽습니다. ‘능력이 크다’는 겁니다. 어느 정도? 제가 언젠가 설교한 적이 있어요. 예수님 십자가 달릴 때 사람들이 예수님 눈을 가리고 뺨을 때립니다. 그래놓고 “우리 중에 누가 당신을 때렸는지 알면 메시아로 믿어줄게” 라고 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신은 초월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주님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초월(내 능력은 이것까지인데, 메시아는 이것 이상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고 여기는)에 가담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인간들 게임에 말려드는 것이기에. 그러면 어떻게 하는가? 예상 못한 능력으로 기존의 능력을 날카롭게 담아버리면 이쪽 능력에서 저쪽 능력으로(우리 행함으로) 건너올 수 없도록 차단시키는 식으로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계신데 베드로가 가다보니까 분명히 땅에서 출발한 발걸음이 뭔가 이상해요. 가다보니까 물위를 걷고 있는 거예요. “내가 미쳤지!” 하는 순간 물에 빠졌어요. 베드로로 하여금 초능력은 내가 기대한 것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출발함으로 말미암아 내가 염두에 둔 하나님이란 개념 자체를 완전히 박살내는 식으로 초능력이 오는 겁니다.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잡으려고 거물을 던졌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어요. 어떤 분은 말하기를 베드로가 멍청하게 배 왼쪽에만 계속 그물을 던져서 고기를 못 잡았다고 해요. 베드로가 명색의 어부인데 배 왼쪽에만 거물을 던졌을 리가 없지요. 앞뒤 좌우 다 거물을 던졌어요. 그래도 고기를 잡지 못했습니다. 왜? 예수님이 못 잡도록 했으니까 못 잡았지요.
그런데 주님이 찾아오셔서 “배 오른편에 거물을 던지라.”고 하시니까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예상 밖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하는 말이 놀랍습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눅5:8).” 이 말을 한 것이 기적입니다. 왜냐? 어느 누구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나는 죄인입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주님, 저에게 저주를 퍼부어도 합당합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구원받고 천국 가고자 하는 것이 전혀 불가능한 일이고, 나에게 원초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이 드러나니까 차마 그런 말을 못합니다. “내가 모든 겸손을 다 보일 테니까 저를 천국에만 넣어 주세요.”라는 것이 우리가 기껏 생각하는 우리가 소지한 종교적인 능력입니다.
주님은 그 능력을 쳐버립니다. “네가 원해서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게 찾아옴으로 갈 수 있는 나라다.” 그 나라가 천국이란 말이지요. 그래서 그 나라에 간 사람은 면류관도 주께 반납하고 우리는 죄인의 괴수 신분으로 천국 갈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무시를 당하세요. 어떤 무시를 당해도 상관없을 만큼 우리는 넉넉한 주님의 사랑(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정도로 잘 생겼으면 남들이 무시(무슨 소리를)해도 괜찮아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단절을 주어서 우리가 기대하는 천국은 마귀가 시나리오를 짜서 영화로 만든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
문학 이론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모든 문학에서 제일 많은 공동 요소를 뽑아봤어요.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의 문학이라도 동일한 흐름으로 전개시키는 틀을 밝혀냈어요. 네러티브(narrative) 이론인데, 이것이 뭔가 하면 처음에 영웅이 등장하고 그 영웅이 고난 받고 결국은 역경을 이기고 자기가 기대했던 그 이상의 성과를 얻는 것. 이것이 모든 인간들이 고대하고 기다리고 듣고 싶어하는 드라마이고 영화입니다.
‘마법의 성’이죠. 산 넘고 물 건너 마법의 성에 찾아가서 공주를 탈출시킴으로 자기의 존재가치를 높일 때 그 속에서 인간은 대리만족을 느끼면서 카타르시스를 얻으면서 예술과 문학에 흠뻑 젖게 되지요. 모든 인간이 이런 마음을 갖고 있어요. 이것을 익히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이 원하고 기대했던 메시아와 전혀 다른, 사람에게 희망과 낭만을 제공하고 긍정적인 사고를 주는 것과는 정반대의 메시아를 하나님이 보냈습니다. 그것도 성령에 의해서.
그래서 예수님은 성령 안에서 꼼짝 마라입니다. 예수님이 성령을 다루는 것은 십자가 지고 부활하셔서 주의 자리에 앉아 있을 때고, 십자가 지시기 전에는 성령이 시키는 대로 해야 돼요. 질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못해요. 성령이 임해야 됩니다. 오병이어를 행하는 것도 성령이 임해야 돼요. 십자가 죽는 것도 성령의 힘에 의해서 죽게 되어있고 살아나는 것도 자기 힘으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성령께서 마련한 것이 뭐냐? 준비된 말씀에 입각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경로였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것은 그분의 삶을 우리에게 적용시킵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죄로 태어났기 때문에 영웅이 되고 싶습니다. 그 영웅이 되고 싶은 마음을 충분히 노출시키면서 그것을 꺾어버립니다.
우리가 기대한 것은 꺾어버리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케 하고 체험케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러했고 12제자가 다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상한 것인데, 만약 예수님이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인물이 좋고 자라서 키가 180Cm에 배에는 초콜렛 복근이 있고 머리가 좋아서 카이스트 졸업했고 삼성그룹에 취직해서 부자로 살다가 죽을 때도 평안하게 죽었다면, 우리에게 찾아온 성령도 우리를 천재되게 하시고, 키다리 되게 하시고, 대기업의 주인이 되게 하시는 그런 식으로 갑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인(성령)을 잘못 만났습니다. 이 땅에 머리 둘 곳도 없고,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겨우 12명밖에 안 되는 제자들마저 다 떠나가고, 죽임 당하기 전에 옷 벗기고 뺨 맞고 창에 찔려 피 흘려 십자가에서 죽었어요. 로마 군병들은 승리했다고 기뻐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단절된 상태에서 아무도 손댈 수 없는 다른 영역에서 부활의 능력으로 등장할 때, 그 형상을 우리에게 입혀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준비된 구원의 축복입니다.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가느라 고생했는데 이제는 예수로 인하여 하늘의 형상을 입었으니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의 그 길에 동참한 것으로, 그것이 기적과 기적의 연속인 것을 알아가면서, 이 과정에서 주님의 십자가 피가 얼마나 대단한 용서인지를 알아가면서 타락의 모습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남이 나를 무시하기 전에 내가 나를 무시하는 그런 인생을 살아가라는 것이 사도바울의 복음입니다.
악이 있는 곳에서 구원은 항상 새롭게 개시된다는 사실, 악에서 벗어나면 구원도 없다는 사실, 가장 악에 가까울 때 가장 구원에 가깝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런 복음에 사람들이 찾아오겠습니까? 안 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2,000년 역사가 사람들의 영웅이 되려는 마음과 가짜 복음이 결탁해서 교회가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이 바빠 예수님 가신 길을 생각 못했습니다. 성경의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성령에 의해서 주님의 일생이 우리 속에 주인공으로 자리 잡으셔서 매사가 내 뜻대로 되지 않게 해주시고, 그것 자체가 기적인 것을 저희들이 느끼기 원합니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삶을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그런 삶을 포기하고, 무시당해도 되는, 성령 안에서 사랑의 이름으로 저희와 항상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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