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십자가마을 여름수련회 제 6강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두 분이 아니고 한 분입니다. 그래서 단일신이에요, 단일 신. 주의 자리를 오른쪽에다 낼 줄은 아무도 꿈에도 생각 못했지요. 로봇이 변신하듯이. 하나님은 한 분이에요. ‘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습니다.’ 신은 한 분인데 그 신이 자기 오른편에 포지션을 만든다는 아이디어는 이 세상 어느 민족도 그런 것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신이 둘이든 셋이든 되어야지 단일 신인데 여기서 변신을 해서 “여호와께서(주께서) 내 주에게”라는 시편 110편 1절을 말씀을 다윗언약에 의해서 이렇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주께서 내 주에게”라고 할 때 조건이 있어요. 다윗언약대로 완수하면 주의 자리에 앉는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른 편 자리가 있는 이유가 있어요. 하나님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원수 때문에 그래요. 전쟁상태지요. 창세기 3장 15절에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거기 나오는 이야기를 다윗 언약에서 소급해서 보면 ‘아하, 다윗 언약을 위해서 처음부터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그러한 약속이 되어 있구나.’ 여자의 후손, 뱀의 후손, 그것을 우리가 외운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이쪽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구원은 주께서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원수, 옛 뱀, 악마와의 전쟁의 결과에 의해서 우리는 그냥 전리품이 될 뿐이에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엡 4:8) 에베소서 4장에 나오잖아요.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가 뭐냐, 할 때 “너희들은 전리품으로서만 교회 된다.” 하는 거예요. 어느 누구도 자진해서 나와서 교회되는 그런 법은 없다는 겁니다.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았기 때문에 교회 특징이 뭐냐, ‘믿음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그리스도 하나요.’(엡 4:4-6) 다 하나가 되는 겁니다. 사람들이 여러 명이 되어서 다양하지만 색깔도 모양도 다 다양하지만, 여자든 남자든 헬라인이든 유대인이든 관계없이 다 한 성령으로 마셨으며 한 주님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그것은 이미 다양성, 우리 인간들의 작업의 결과가 아니라 우리 인간을 제쳐두고 오직 한 분, 원수와 대결했던 그 한분의 업적에 의해서 파생된 결과가 교회라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다.’라는 그 정도가 아니고 교회의 머리는 계속해서 자기 지체를 생산하는 생산 활동력이 나오는 것이 교회 머리의 자리에요. ‘내가 존재한다’. 이것은 사는 것이 아니거든요. 진짜 내가 주님의 생산력으로 산다, 이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머리에서 주신 힘으로 매일 같이 살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에 보면 ‘나는 날마다 죽고 죽음에 넘기우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 생명이 날마다 살아나기 때문에 그렇다.’(고후 4:11)고 사도바울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어려움에 처하고 난관에 처하더라도, 우겨 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는 이유는 성령의 능력이 날마다 나를 휘감아 돌기 때문인데 그 성령이 바로 머리되시는 예수님에게서 쉬지 않고 계속 공급이 되기 때문에 그 덕분에 나는 지금 사도 짓을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 대목을 이야기하면서 뭘 끊어버리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하는 것은 다 끊어버리고 사도바울 그 사람이 하는 것을 자기도 흉내 낼 수 있는 요소만 끄집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요단강 세례 받을 때 비둘기가 왔잖아요.
비둘기가 오니까 비둘기가 와서 성령 받은 것은 생각 안하고 예수님 따라 다니면 구원 받을 줄로 알고 있는 겁니다. 정 아쉬우면 비둘기 한 마리 사서 머리에 이고 다니든지. 주께서 주의 자리를 내 놓지요. 만화식으로 표현 한다면 (보이지 않고 숨어 있던 긴 로봇 팔이, 혹은 우주선에서 밖으로 길게 옆으로 활주로 같은 것이 튀어나오는 모양새) zzzzzzzzzz……! 하고 나오는데 주께서 내놓은 주의 개념, 이것이 나올 때 언약 적으로 나오는 겁니다. 이것을 뭐라고 하느냐, 이것을 가지고 아들이라고 합니다.
만들어졌다고 해서 만들어진 모든 것이 아들이 아니고 아들은 다윗언약을 완성해 내는 분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나머지는 마귀자식이 되는 겁니다. 아들 없거든요! 아들 아니거든요! 그것은 자기가 자기보고 아들이라고 우기는 것이고 다윗언약을 완성 안했거든 아들이라는 말을 하지 마세요. 아들은 오직 한 분, 오직 예수님만 아들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뭐냐, 우리는 그냥 양자지요. 왜, 양자의 영을, 아들의 영을 받았기에 그것을 양자라 합니다. 그러면 아들의 영을 안 받았을 경우에는? 아들 아니지요. 아버지는 모른다고 하는데 자기가 자기보고 아들이라고 우기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없는 겁니다.
대통령 아들도 아니면 청와대 가서 아들 왔다고 아무리 우겨 봐도 “나 너 누군지 모른다.” 하는 겁니다. 도무지 모르겠다, 하고 문 팍 닫아 버립니다. 문 좀 열어 달라고 해도 닫히는 문은 도무지 열리지 않습니다. 다윗언약에 계신 분이 문을 열고 안에서 당겨줘야 돼요. 그래서 이러한 이야기를 듣고 “사람 차별하네.”라고 하는데 사람 차별하는 것이 아닙니다. 차별이라는 것은 있음에서 있음이 될 때는 이것과 저것, 이렇게 차별이 되겠는데 애초부터 없을 때는 차별도 없는 거예요. 선택이라는 것은 있음에서 가려내는 것이 아니고 아예 없는데서 선택이 먼저 있었고 그 선택에 합당해서 없던 것을 있게 만드는 겁니다.
에서와 야곱의 경우를 보세요. 그 전에 이스마엘이 있었습니다.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없는데서 있게 했습니다. 그러면 옆에 있는 이스마엘은 뭐가 돼요? “하나님 아버지, 저 여기 있습니다.” “없거든.” “저 있다니까요?” “없거든.” 개그콘서트에 보면 이런 것이 있어요. 일본여성 하나 등장시켜 놓고는 “너, 갸루상이지?” “저 갸루상 아니므니다. 갸루상 업스무니다.” 꼭 하나님이 언약을 말하는 것 같아요. 있어도 없는 거예요. 있어도 없어져야 날마다 있게 하는 것은 나로부터 있는 것이 아닌 것을 고백하는 겁니다.
말이 어려워요.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재 있는 것이 나로 인해서 있는 것이 아닌 것을 인정하는 것은 내가 있음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있게 하심에 내가 있는 거예요. 그게 참새의 운명이고 들풀의 운명이 아닙니까? ‘오늘 있다가도 내일 아궁이에 집어넣는 들풀도 주께서 기르신다.’는 조건하에 들풀은 들풀인 거예요. 그냥 하나님이 뜯어내 버리면 그것은 들풀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둘 다 없는 거예요. 없는데 리브가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없는 자식이 태어나는데 세트로 태어난 거예요.(창 25:21-23)
에서 없는 야곱 없고 야곱 없는 에서가 없다고 둘 다 짝을 이루어서 같이 태어난 겁니다. 뭘 하기 위해서. 이 원수, 예수님 주께서 이 원수하고 어떤 전쟁을 치르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지상의 밑거름을 그리는데 그 밑거름을 그리는 크레파스와 도화지등이 필요하기 때문에 야곱과 에서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에서는 나라가 에돔이 되고 야곱의 나라는 나중에 뭐가 됩니까? 이스라엘 되는 겁니다. 에돔과 이스라엘이 전쟁상태에 돌입한 그 와중에서,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기 4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이스라엘보고 ‘너는 내 아들이라.’ 하니까 이 이스라엘이 자기가 아들인줄 알고 착각을 했습니다. 착각한 이스라엘은 다 망하지요. 아들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하는 그 아들 기능이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야곱을 통해서 야곱의 자손으로서 예수님이 태어나게 만듭니다. 야곱이라는 것은 뻥튀기 할 때 덮어씌우는 커다란 망태역할, 그게 이스라엘입니다. 뻥, 하면 거기서 예수님이 태어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망태 역할은 점차로 좁아집니다. 점차로 좁아져서 마지막 남은 자가 누구냐, 해서 예수님을 보여주게 되어 있어요. 그러면 그동안 있었던 이스라엘은 “나는 이스라엘 아니므니다.” 그것을 하기 위해서 이 세상 속에 펼쳐져야 되는 거예요. “나는 이스라엘 아니므니다. 나는 교회 아니므니다.” 그걸 계속 해야 돼요. “나는 그리스도 몸이 아니므니다. 내가 그리스도 몸이라고 우긴다면 그것은 거짓말이므니이다.” 이것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교회 되게 하시는 그분의 활동을 우리가 잊어버리고 자꾸 중심을 내가 뭐 하는 것으로 구축하고 덩어리를 따로 장만하려 합니다. 주께서 교회를 만들어나간다는 생각을 해야지 “일단 교회 되면 이것은 제가 알아서 제 선에서 처리하겠습니다.” 이러한 교회는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장 3장에 나오는 일곱 교회가 다 망했다는 사실을 알지요? 망할 수밖에 없지요. 그 땅이 지금 터키 땅인데 터키는 97퍼센트가 이슬람 교인입니다. 이번 강의가운데 나오는 통계 있잖아요, 믿지 마세요. 내 맘대로 내가 알아서 대충 하는 겁니다. 아까 말한 동서로마제국이 갈라지는 연도도 476년입니다. 이것 중요한 것 아닙니다.
조금 더 상세히 이야기할게요. 여기 야곱과 에서, 에서와 야곱이 없는데, 야곱이 하는 말이 “나 여기 있다.”하고 나온 거예요. 그것은 야곱이 실수한 거예요. ‘나 야곱이 있으니까 나 야곱은 축복받는 야곱이고 싶어.’ 그런데 축복이란 아버지에게서 오거든요. 그런데 장자에게 재산이 다 가게 되면 자기에게 돌아올 것이 없다는 말이지요. ‘어떻게 해서든 나는 축복받아야 돼.’ 이겨야 되니까, 이겨서 복을 받아야 되는데 경쟁자 형이 있단 말이죠. “그 형에게 있는 장자권을 내가 빼앗아 오게 되면 나는 그 축복을 받을 수 있다.”라고 이야기했는데 그것이 어린 시절의 철없는 짓이에요.
역시 형은 어디 가도 형이라고, 형이 동생의 그런 모습을 보고 얼마나 같잖았겠습니까? 형이 속으로 “얘야, 형과 동생은 이미 결정난거야. 네가 그렇게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권리를 산다고 해서, 형 아우 바꾼다고 해서 우리 선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냐. 아이고, 바보같이! 그냥 팥죽만 한 그릇 빼앗긴 줄 알아라.”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은 고집을 부리면서 기어이 자기가 형이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형이 되겠다, 하는 것도 야곱의 문제고 형이 되면 절대로 빼앗기는 법이 없다는 그것도 문제고 둘 다 문제가 되는 이유가 자신의 가치를 자기 존재에서 찾으려고 기를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여기 있는데 나는 형이고, 나 여기 있는 나는 동생이고, 나 여기 있는 동생인 내가 어쨌든 형인 존재가 되고 싶다, 존재에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거예요. 둘 다 다 치워버려야 돼요. 다 치울 것을 무엇 때문에 이렇게 야곱과 에서를 태어나게 했느냐, 이게 바로 전쟁이거든요. 영은 무엇과 전쟁한다? 육과 전쟁한다. 전쟁의 대상이 육이기 때문에 육으로 태어나야 되는 거예요. 육의 모습으로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서 육의 모습이 하나님의 하시는 그 일을, 야곱이 얼마나 하늘의 일을 흉내 내고 있다는 것, 종교적인 모습과 신앙적인 모습을 띄면서 근사하게 비슷하게 흉내 내고 있다는 것을 완전히 다 보여줘야 돼요.
축복이라는 것이 뭐가 축복인지를 몰라요. 그저 많이 가지면 축복이라고 아는 이것이 육적인 본성임을 그대로 다 노출시켜야 되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우리들처럼. 성경에서 뭐라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중요하지 않고 예수 믿어서 얼마나 챙겼느냐에 우리는 강조점을 두면서 아부하고 아양 떠는 식으로 교회 와서 찬송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러고 싶은 심정을 우리는 숨길 수 없습니다. 숨기지 마세요.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야곱이 그랬다 그 말입니다. 감사한 것은 그런 야곱도 뭐가 되었습니까? 그런 야곱도 하나님이 찾아오니까 구원받았잖아요.
야곱이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거지요. 구원받았다는 말은 내 있는 존재가 구원된다는 것이 아니고 어떤 역할과 기능을 부여받은 것이 돼요. 뻥튀기 망태, 뻥! 하고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만드는 그런 망태역할로 초청받은 겁니다. 그 망태에 우리도 하인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스도를 보여주는데.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죽 나열되어 있어요. 거기 명단이 나오는데 키순서가 아닙니다. 몸무게 순서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에요. 거기 있는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을 뒷사람이 흉내 낼 수도 없어요.
노아가 방주 만들어서 구원받았다면 방주 전문업체가 분명히 생겼을 거예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선배를 감안해서 구원의 면죄방식을 만들어냅니다. 그런데 그 시대는 방주로 구원받는데 그 다음 시대는 방주로 구원받지 않아요. 그 다음 시대는 자식이 없는 것으로 구원받고, 그 다음 시대는 팔을 어긋맞게 해서 구원받고, 그 다음 시대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인데, 소위 말해 재벌 2세인데 다 포기하고 광야의 길로 나가는 그것으로 구원받고, 그 다음부터는 칼싸움으로 구원받고, 그 다음에는 목 베임으로 구원받고, 이렇게 구원받는 방식이 전부 다 제각각 다릅니다. 그 모든 색깔들을 종합해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 지상 사역을 일일이 떼어서 나누어서 모자이크처럼 부분적으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그 한 부분이 지금 여러분처럼 어떤 분은 녹색, 어떤 분은 빨강색, 이렇게 다 다른 것처럼 전부 다 각자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통일 하지 맙시다. 행동이나 모든 환경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임의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겁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 이야기했듯이 지금 아내와 다시 태어나도 그 아내와 만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했어요. 어떤 목사님은 그것이 듣기 싫어서 녹취하기도 싫다고 했어요. 사람이 ‘아, 그 때 선택을 잘못해서 지금의 마누라를 만났다.’고 하지만 다시 태어나도 그 여자와 반드시 만나서 애 둘 낳았으면 셋도 아니도 반드시 둘 낳게 되어 있어요. 셋 낳으면 하나 죽고 반드시 둘만 남게 되어 있어요.
그것은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발걸음, 우리의 머리카락 빠지는 것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있는 이 자리는 포지션, 주의 자리와 관련된 포지션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고 했지요. 사도바울이 가시가 들어간 것이 아마 전도하기 이 전에 아마 다소라는 곳에서 8년간 있었는데……, 사도바울이 32살 때 회개하고 1차전도가 46년도, 2차전도가 49년도, 3차전도가 52년도, 52년도에 잡히고 62년도쯤에 목 잘려 죽었을 거예요. 아마 사도바울이 예수 믿고 다소에 있는 동안에 사탄의 가시가 들어온 것 같습니다.
왜 그런가, 그때 아마 삼층 천을 본 모양이죠.(고후 12장) 그것을 본 뒤에 까불지 말라고 가시를 집어넣었어요. 우리 같으면 삼층 천 안 보여주고 가시도 안 집어넣는 것이 좋은 거예요. 누가 보여 달라고 했습니까? 일부러 보여줘 놓고 눈 나빠진다는 식으로, 본 것 자랑한다고 가시 넣어놓고, 그러니까 들어온 사탄의 활동인 가시나 보여준 것이나 어느 것 하나 우리 좋으라고 주어진 것은 하나도 없어요. 사적으로 우리 존재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사적으로 우리존재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주신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어느 한 가지도 없습니다. 주님 좋으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뭘 하면 됩니까? 야곱의 역할을 해주세요. 우리의 역할은 야곱이고 야곱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주님의 역할이니까 우리는 실컷 야곱의 역할을 하라는 말이지요. 주변에 에서 있는가 한 번 살펴보고 팥죽을 팔든지, 식사대접을 한 번 하든지, 갖고 싶은 것 있으면 빼 내고 그러다가 얻어맞고 빼앗기고, 하여튼 우리가 할 수 있는 야곱의 일은 다 하세요. 그것이 우리 본성에 맞습니다.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고 “어렵지 않아요!!” 사람이 죄 지을 때 가장 기쁘다는 말이 있잖아요.
몰래 먹는 떡이 맛있다니까요. 떡 주면 “누굴 돼지로 아나?” 그런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떡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감춰놓으면 그것이 더 맛있어요. 그러니까 즐겁게 죄를 짓는데 그 죄짓는 것도 주께서 허락을 해 줘야 됩니다. 괜히 남 죄짓는 것 흉내 내지 마세요. 괜히 제주 올레 길에 서서 기다리지 말고, 그것은 그 사람 몫입니다. 집에서 죄 지을 수 있는데 뭐하려고 거기까지 가서 죄를 짓습니까? 평소에 하던 대로 하면 다 죄를 짓는데. 어디서 본 영화 흉내 내는 식으로 하지 말고, 현재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그 삶으로 야곱의 역할을 다 해주시면 됩니다.
야곱의 역할을 다 해주시면 우리는 뭘 알 수 있느냐, ‘아, 죄 짓는 것도 내 맘대로 안 되는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삭개오가 예수님 만나고 난 뒤에 뭐라고 했느냐, “내가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습니다.” 하지요.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퍼뜩 떠오르는가 하면, 삭개오가 “네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 하는 이야기를 듣고 “네 배나 갚겠습니다.” 했다는 말이지요. 그 때 우리는 일단 네 배를 갚아주면 구원이 나에게 주어지는 줄 알고 있어요. 이런 통박을 또 굴려요.
네 배 갚는 것은 삭개오고요, 우리는 구원받고 난 뒤에 불현 듯 돈 안 갚은 생각이 나서 오히려 네 배나 감사할 수가 있어요. 그것은 우리 몫이고 남의 면죄 받은 통로, 환경을 우리가 본받는다든지 따라가지 마세요. 테레사 수녀 따라가지 마세요. 사람들이 자꾸 모범적 모델을 생각하는데, 현재 여러분을 여러분 자신이 시시하게 볼지 모르지만 주께서는 절대 여러분을 시시하게 안 봅니다. 왜, 주님이 친히 만든 작품이기 때문에. 머리 훌렁 벗어져도 “아이고, 예쁘다. 머리숱이 왜 그렇게 많나?” 이렇게 이야기 한다는 말이지요. 뭐든지 보기에 심히 좋아 보이지요.
거지 나사로가 뭐가 보기 좋겠습니까? 그런데 천사를 보내서 vip 모시듯이 모셔갑니다. “거지 나사로님, 제가 모시겠습니다.” 하고 모셔갔다고요. 거지 나사로가 믿음이 좋아서 아픈데도 꾹 참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긁었어요. 가려우면 긁고 헌데 있으면 또 긁고 안 아프면 그냥 퍼지고 더우면 그저 덮고, 그렇게 하시되 그렇게 누릴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축복인 것을, 이것이 주께서 사용하시는 환경, 내 환경이 아니고 주님이 환경이라는 것인데 그 환경의 주체를 내 쪽으로 가져올 필요 없어요. 내 쪽에서는 그냥 누리고 즐기기만 하면 되지요.
그래서 우리가 즐겁다고 해서 그 즐거움을 또 기대하지 마세요. 기대하게 되면 어느새 또 대상이 바뀝니다. “그때 주께서 이렇게 해서 참 재미있었는데…….” 하지만 예수님은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러니까 과거에 좋았다고 해서 그것을 지금의 즐거움으로 가져오지 마세요. 과거에 어느 바닷가에 갔을 때 좋았다고 해서 그 바닷가에 또 가보세요. 가 봐야 재미 하나도 없어요. 스티로폼만 둥둥 떠다니지 재미 하나도 없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늘 변화하는데 그 변화조차 주께서 주신 변화입니다.
중요한 것 해보겠습니다. 시편 110편에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 하셨도다.”라고 했는데 여기서 “까지”라는 것은 묵시적 시간입니다. 역사적 시간 개념으로는 모릅니다. 이렇게 “앉으라” 했다는 말이지요. 여기서 새로운 개념이 나옵니다. 어떤 개념이냐, 인간의 몸에서 나오는 개념이 아니고 예수님의 활동과 몸에서 나오는 개념이 인간이 알고 있는 성경 단어를 통해서 이것이 다 녹아지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다윗언약, 다윗언약 하는데 다윗언약이 뭐냐, 다윗 언약에 하라, 하라, 하는 것이 있느냐? 없습니다. 다윗언약은 이렇습니다. ‘내가 다윗의 자리를(포지션입니다), 주의 자리를 영원히 할 때까지 나는 다윗 자손을 떠나지 않으리라. 이것을 나의 성실함으로 이루리라.’ 시편 89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영원히 노래하며 주의 성실하심을 내 입으로 대대에 알게 하리이다 내가 말하기를 인자하심을 영원히 세우시며 주의 성실하심을 하늘에서 견고히 하시리라 하였나이다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나의 택한 자와 언약을 맺으며 내 종 다윗에게 맹세하기를 내가 네 자손을 영원히 견고히 하며 네 위를 대대에 세우리라 하셨나이다(셀라).”(1-2절)
여기에서 ‘~까지’라는 것은 단지 시간상의 마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지속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완성을 보기 전까지는 내가 너를 포기하지 않겠다, 그 말입니다. 완성하고 난 뒤에는 손 떼고 포기한다는 뜻이 아니잖아요. 완성할 때까지 주께서 알아서 다 마감한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다윗언약입니다. 그러면 다윗언약대로 예수님은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볼 때 일단 껍데기로 본다면 그 예수라는 껍데기 안에 다윗언약이 살아 있어요.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살아 있습니다. 이 말은 ‘주께서 내 주에게’ 맹세하신 원수와 싸워서 승리했다는 그 내용이 예수님 안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들어 있으면 예수님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우리 몸에 퍼져요. 그러면 우리가 우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마귀를 이겼던 주님의 능력이 우리를 지키게 됩니다. 그런데 마귀는 무기가 있어요. “너 죽는다! 너 이러면 죽어!”라고 하는 거지요. 이것을 설명하고 이번 시간은 마치겠습니다. 제가 진작 이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아주 벼르고 있었어요. 어떤 사람이 “나는 믿음이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말이지요. 그러면 제가 묻지요. “국가가 신앙을 버리라고 강요해도요?” 국가가 너무 거창하면 집에 있는 아버지가 신앙 버리라고 해도 신앙을 지킬 것이냐. 또는 아내, 남편이, 자식이 신앙을 버리라고 해도?
요새는 연로하신 분이 자식 말을 그렇게 잘 듣데요? 아마 재산을 이미 다 줘버린 모양이에요. 죽을 때까지 자식 재산 주면 안 된다니까요. 뭘 쥐고 있어야 이것이 미끼가 되어서 자식들이 벌벌 떨지 자식 다 주고 나서 아무것도 없으면 그 다음부터 자식들에게 천대받는 것만 남아요. 신앙이 있다고 했을 때에 주께서는 과연 신앙이 있는지 없는지를 국가의 이름으로, 가문의 이름으로,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나 남편의 이름으로, 자식의 이름으로 압박을 가할 때에 두렵지 아니하겠느냐, 하는 겁니다.
신앙이 있다 할 때 이 말이 ‘주께서 신앙을 주셔서 주의 것’이 되었느냐, 그럴 경우에는 안 두려운데 내가 내 신앙을 나를 지키기 위해서, 신앙이라는 것이 있어야 나를 지킬 수 있다고 자부해서 신앙을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내가 지키고 있는 신앙은 어디서 파토 나고 다 깨지느냐하면, 주변에 깔려 있는 이런 압력에 의해서 몽땅 다 깨지는 거예요. 그러면 그렇게 깨져서 자기가 믿음 없음이 들통 나는 것이 겁나기 때문에 더욱 더 어디에 매이느냐 하면, 신앙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국가가 가정에 매이게 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는 처녀가 자기는 불교집안인데 자기 혼자 교회 나왔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면서 사는데 결혼 할 때 예수 믿는 가정과 결혼하고 싶어 하는 이유는 이제 가정적으로 내 믿음이 가짜가 아님을 커버해줄 수 있는 권력단체로 작용한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 집에 시집가려고 시도하게 되는 거예요. 진짜로 믿음이 있는 사람은 보살하고도 결혼할 수가 있습니다. 진짜 믿음 있는 사람이 보살하고 결혼한다면 제가 주례를 설 용의가 있습니다. 기독교 가정을 선택했다는 것은 내가 믿음을 그대로 지켜 왔는데 행여나 어떤 돌발사태가 벌어져서 더 이상 내 힘으로는 내 신앙을 지키는 것이 힘이 부치게 되면 주변의 힘을 도용해서 그 힘을 의지해서 내 신앙을 유지하려는 계산으로 믿음의 가정에 들어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거 믿음, “아니거든요!!” 이런 식으로,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일종의 반복된 교육, 학습의 효과였습니다. 교회 다니면서 집안에서나 교회 밖에서 겪는 외로움, 혹은 설움에 대한 보상을 교회 가서 목사님이나 장로님의 칭찬으로 받으려다 보니 그런 것이 자기 몸에 생리처럼 박혀서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처럼 오해한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고자 한 것은 그것이 아니고요, 더 중요한 것은 그동안 기독교 국가라는 것, 만약 한국이 불교국가라서 핍박이 있다면 사람들이 미국이나 호주나 기독교를 옹호하고 기독교 믿게 되면 물건이라도 하나 더 팔아주고 공무원 취직도 할 수 있고 승진도 잘 되는 국가에 가려고 할 때, 그것이 과연 신앙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신앙 없지요. 왜 그런가, 신앙이라 하는 것은 원조가 있는데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주변에 마귀가 포진된 이유가 있어요. 그것은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주변에 은근히 돌이 떡 되게 하고 기적을 베풀어서 추종세력, 팬클럽이 여기 저기 많이 생겨나고 그 다음에 결국 노리는 것은 세상 부귀영화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을 주께서 이미 아시고 악마가 그렇게 자리 잡고 있는 그 포지션, “그 악마의 나라에 지금 너희들은 살고 있다.”는 것을 미리 보여주기 위해서 광야에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 번씩이나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그것을 시험, 테스트, 유혹이라 하거든요. 예수님에게만 유혹입니다. 믿음이 진짜 있는 사람에게만 유혹인데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이 있는 체 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일상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유혹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그래서 목사님들이 심방을 갈 때는 과연 저 분이 축복을 받고 싶어 하는지, 아니면 진짜 유혹을 축복으로 생각하는지 그것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심방을 해 보셔야 돼요. 그럴 때는 신명기 28장을 들춰야 돼요. 그 중에서 15절을 읽어야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심방 받는다고 생각하고 들어보세요. 제가 신명기 28장 15절을 여러분 집에 심방 가서 읽는 거예요. 제 좌우로는 좌청룡 우백호처럼 할 일 없는 권사님들 대동해서 죽 앉아 있는 거지요.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네가 성읍에서도 저주를 받으며(그러니까 마트에가 가서도 저주받는 거예요. 선반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머리가 깨지는 저주를 받는 거예요.) 들에서도 저주를 받을 것이요(신월동 뱀 있잖아요. 괜히 길거리 가는데 누가 풀어놓은 뱀한테 물리는 것 같은 재수 업는 것) 네 몸의 소생과(자식이 밖에서 보이스 피싱에 걸려서 돈 2천만 원 뜯기는 것)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우양의 새끼가 저주를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남편이 술 먹고 들어와서 마구 두들겨 패는 것)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쓰레기 잘못 버렸다고 이웃집과 싸우고 주차문제로 시비 붙어서 싸우는 것).”
이 신명기 28장 15절부터 19절까지 액자로 해서 붙여놓고 사는 사람 봤습니까? 이것을 액자로 만들어서 개업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거예요. 대전에 이 종분 집사님 바이올린 학원 개업한다는데 이것을 액자로 만들어서 선물로 주면 좋겠어요. 왜 사람들은 그렇게 일방적이고 편파적입니까? 주께서 하는 이것은 왜 빼고 이야기합니까? 신명기 28장의 앞부분만 이야기하는 이유가 뭐예요? “들어가도 복을 받고” 이것은 ‘나는 복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냐 하면 예수님이 당했던 세상하고 자기가 꿈에 그리는 세상하고 차이가 나도 너무 차이가 나는 거예요.
같은 세상인데 세상을 보는 눈이 왜 그렇게 예수님과 다릅니까? 다르면서도 우기는 것은 “나도 믿음이 있다”는 소리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예수님이 보는 세상을 같이 봐야지. 예수님의 주변에는 악마가 배치되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된 것이 자기 주변이 다 복 주는 사람만 있어요. 뭐가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된 거지요. 한스 큉의 책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속는 것은 ‘제발 좀 속여 줘’ 해서 속는다는 겁니다. 사람이 속는 것은 누가 망상과 환상으로 나를 좀 기분 좋게 안 속여 나, 해서 속는다는 거예요.
그것이 잠언 서에 보면 나옵니다. “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잠 11:27) 믿음이 있는 성도는 “주여, 제발 제가 와장창 깨지는 일이 좀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깨지는, 내 모든 교만이 다 깨지는, 그런데 교만은 깨져봐야 합니다. 물론 그래봤자 밑에 있는 교만이 또 올라오지만. “매일같이 내가 만든 나 됨이 깨지는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기도를 굳이 안 해도 이미 다 준비되어 있어요. 실제로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심방을 해도 이처럼 예수님이 심방하는 것과 오늘날 당회장 목사님이 좌청룡 우백호 거느리듯이 별 할 일도 없는 사람들 죽 대동하고 하는 심방하고는 그 질이 다릅니다.
저주를 이야기함으로 말미암아 ‘네가 갖고 있는 것이 어떤 보호막 속에 싸여있는, 네가 스스로 꾸며낸 그것으로 유혹을 자처한다.’고 하는 거예요. 유혹을 자처하는 그것이 아니면 나는 그냥 그저 사는데 주께서 나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찾아오는 거예요. 얍복 강가로 야곱을 찾아오셔서 야곱이 깨졌고, 사울을 찾아와서 사울로 하여금 눈이 멀게 만들고, 잘 살고 있는 어부 베드로를 찾아와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는데 예수님 죽을 때 보니 사람 몇 명 낚지도 못했어요, 낚기는 뭘 낚아요, 예수님 혼자 가버리니 뎅그러니 남게 된 베드로가 사람 낚는 것은 못하겠다, 하고 다시 ‘고기나 잡으러 간다.’ 해서 평소 하던 대로 고기나 낚으러 간 거예요.
뭘 하든지 ‘내가 사람 낚는다.’는 것을 주께서 저지하고 주께서 날 통해서 사람 낚게 했을 때 비로소 그때부터 사도베드로가 되는 겁니다. 내가 사도로서 사람 낚겠다는 것은 아직도 사도 아니에요. 다락방에서 기도하든지 뭘 하든지 성령을 불같이 받든지 해서, 이제부터는 나는 쓰인다는 사실, 쓰이는 입장에서 ‘이것 쓰이게 해주세요, 저것 쓰이게 해주세요. 이왕 쓰일 것 나는 재벌 3세하고 결혼해서 쓰이게 하옵소서.’ 이것을 우리가 생각하면 안돼요. 그래서 저는 말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여러분이 늘 기도하면서 사세요. 결혼을 앞두고도 기도하시고 늘 기도가 일상화 돼야 됩니다. 그게 나훈아의 노래에 나오는 ‘무시로’라는 거예요.
무시로 늘 기도해서 사셔야 되는데 그렇게 기도해줘야 어느 것 하나 응답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만끽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어느 것 하나 응답 안 됨으로 말미암아 주에게 쓰이고 싶다는 거예요. 만약에 내 기도가 응답되어 버리면 내가 주님을 개 끌 듯 주님을 부리면 이것은 주객이 전도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하시되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가 있잖아요. 하고 싶은 것,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부흥되도록’ 하는 이런 것 있잖아요. 전부 다 하세요. 다 해놓고 그게 되나 한 번 보세요.
혹시 되거든 내 기도 덕분이 아니고 내가 하기 전에 주님이 기도한 덕분에 된 줄로 아시고 그냥 얻어먹는 처지라는 것을 느끼시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고, 무시로 기도해야 합니다. 늘 헌금하시고, 그래서 헌금의 효과가 아예 없다는 것을 늘 온 몸으로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또 행여나 행운 찾아올까 싶어 내다가 또 실망하고, 이렇게 잔뜩 자기한테 실망을 해야 돼요. 6페이지를 봅시다.
다시 정리합니다만 사죄의 방식은 우리한테 허용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사죄 받은 결과물이에요.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는데, 주님이 이미 용서했는데 뭘 또 용서해요. 우리는 사죄 받은 결과물로 살면 되지 새삼스럽게 사죄 받는 방식을 우리가 자꾸 찾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찾아다닌다는 것은 그만큼 용서 안 받았다는 증거밖에 안되거든요. 교재에서 “바울의 복음”을 봅시다. 여기에 (1) 우주론, (2) 인간론, 이런 순서로 되어 있는데 사도바울이 이런 식으로 ‘우주론, 인간론’ 이런 것 언제 했습니까? 한 적이 없어요.
그러면 사도바울은 뭘 했느냐? 제가 총신 졸업하면서 쓴 석사논문이 있습니다. 은근히 석사학위 자랑하는 것은 아닌데, 제가 박사는 안 받았습니다. 그만큼 마음을 많이 낮춘……(???) 논문 제목이 “약속과 언약의 관계”에요. “로마서에 나오는 약속과 언약의 관계”가 제 논문 제목이었습니다. (*정확한 제목은 이 근호, 『로마書에 나타난 바울의 約束觀』, 총신대학교, 1988년, 국회도서관청구기호, 227.1 ㅇ614ㄹ) 사도바울은 조직신학을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약속 안에 구약의 약속들이 여기에 어떻게 층층이 달성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그림을 그렸어요. 십자가를 그려놓고 “십자가 약속 안에 구약의 언약들이 층층이 달려와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여기에 소속 된다.”라고 한 겁니다. 이렇게 해 놓고 노아방주는 노아방주를 그냥 보지 말고 십자가로 먼저 와서 십자가의 의미를 가지고 노아방주를 해석해야 그 해석이 다시 십자가로 돌아온다, 한다고 설명한 논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약속에 대해서 한 거예요.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갈 1:9)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여기서 사도바울의 복음이 중요합니다. 약속이 등장하게 되면 약속 주변에 있던 것은 다 뭐가 되느냐, 이 주변에 있던 것은 다 죄가 되는 겁니다. 이 죄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죄 개념이 무엇을 추가 되느냐 하면, 있음은 없음이 되고 산 것은 죽은 것이 되는 여기에 죄들이 포함이 되면서 사도바울의 개념 하나 하나가 사도의 입에서 탁탁 터져 나와요. 있음은 없음으로, 살아 있음은 죽음으로, 그런데 사도바울이 말한 다른 복음은 뭐가 빠져 있느냐하면, 죄를 여기에 집어넣지 않고 그냥 있는데 죄 있는 인간, 살아 있는데 죄 있는 채로 살아 있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죄 있는 인간, 죄가 있는 채로 살아 있기 때문에 이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 할 것인가, 거기서 나온 것들을 사울은 이미 경험했어요. 뭘 경험했습니까? 사도바울은 본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이지요. 바리새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면서 뭘 느끼냐, 죄를 느낍니다. 죄를 느끼니까 ‘살아 있는 내가 죄가 있다. 아, 나는 용납 못하겠다. 내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내속에 있는 죄를 어떻게든 제거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더욱더 매진하고 열심을 내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만 뭐든지 할 용의가 되어 있다는 식으로 해서 내 속에서 죄가 사라지게 하는 방도를 사용했었는데, 바로 그것이 약속이 아닌 비약속이고 비 복음이라고 이제는 과감하게 제대로 전파할 수가 있는 겁니다.
전파하면서 뭐라고 이야기했느냐하면, 의미심장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유대인에게 보낸 사도가 아니고 이방인들에게 보낸 보냈다.’(갈 2:8)고 했지요. 첫째 시간에 이야기한 것을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현재 교회는 유대인교회가 아니고 이방인 교회입니다. 맞지요? 유대인 말고 언약이 없는, 구약이 없고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의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그런 사람들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 율법이 없기에 율법을 지켜야 되는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의인이 되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습니까? 누가 왔지요? 그분이 찾아왔지요. 누가 찾아왔습니까? ‘내 말을 듣고 성령세례를 받은 자는 의인이 되고 구원’이 되는 겁니다. 빌립집사가 전도한 에티오피아 내시의 경우는 이방인입니다. 내시니까 직업으로 보면 별로 좋은 직업은 아니지요. 내시가 이사야 53장을 보다가 난데없이 빌립집사가 나타나고 “이분이 누구십니까?” “이 분이 예수십니다.” 해서 세례 받고 성령 받고 성도 되었어요. 성경 펼치는 것도 율법입니까? 아니거든요.
율법 안 지켰는데도 불구하고 천국 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이방인 교회의 특징이에요. 그러면 사도가 전하는 복음 안에 뭐가 빠져 있어야 돼요? 율법을 안 지켜도 의인이 도 되는 교회가 이방인 교회지요. 율법을 안 지켰음에도 불구하고 의인 되었다면 그 율법을 누가 지켰다는 말입니까? 율법은 다 지켜야 되니까, 그런데 그 율법은 누가 지킨 거예요? 누가 우리 대신 지켰다는 사실을 본인이 수용하면 그것이 율법외의 한 의로서 주께서 한 화목제물로 의인 되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좀 뻔뻔스럽지요.
그런데 이것이 뻔뻔스럽다고 욕할 문제가 아닌 것이 성령이 아니고서야, “저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했고 위반한 것에 대해서 제 쪽에서 어떻게 회복할 길이 없습니다.”라는 이것을 성령이 아니고서야 고백할 위인이 없습니다. 인간은 나름대로 로고스가 있어요. 나름대로 자기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체는 선하다고 보는 겁니다. 말이 어렵지요? 선과 악을 판단할 그 정도의 의지와 선택권과 이성에 대해서는 인정해 달라는 겁니다. 내가 나쁜 짓은 안하겠는데 ‘나쁜 짓이다, 선한 짓이다. 다시는 나쁜 짓 하지 않고 선한 짓을 해야지.’라는 그 의지와 결심만큼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해 줘, 그 말입니다.
그것이 하나의 씨앗이 되니까. 아낙사고라스가 그랬죠. 아낙사고라스가 말하기를 “인간 속에는 씨앗이 있다”는 겁니다. 그 씨앗은 착한 신과 연계되어 있는 씨앗이 되어서 그 씨앗을 노력해서 발현시키는 만큼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선비, 군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돈이 되는 거예요. 섭씨 36도의 더위에도 갓도 안 벗고 사람 불러 가면서 ‘이리 오너라.’ 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안동에 가면 있어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선비답게 살고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씨앗이 누구에게나 다 있다는 겁니다.
누구나 있기에 그것은 교육을 통해서 개발하게 되면 누구나 선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이 모이면 그것이 선한 공동체가 되고 살기 좋은 세상이 된다, 소위 안철수의 생각, 그런 식이지요. 그런데 성령을 받게 되면 안철수고 김철수고 관계없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죄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죄밖에는 지을 것이 없다, 율법을 두 개든 세 개든 백 개 든 적게 지켜도 못 지킨 것이고 많이 지켜도 못 지킨 것이고, 그것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을 하는 겁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다시 자기 의로움으로 돌아올 길이 아예 차단되어 있어요.
이방인의 교회가 누구를 부끄럽게 한다? 유대인의 교회를 부끄럽게 해서 이방인을 보고 “아이고, 우리가 메시아를 죽였구나.” 회개케 해서 온 이스라엘을 구원받게 한다는 것이 로마서 11장 25,26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라고 우긴다고 교회가 아니에요, 대한예수교 장로회 간판 걸고서. 그런데 그중에 진짜 교회가 등장해 버리면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고 자칭 목사입네, 장로입네, 이렇게 우기다가 진짜 순수하게 “나는 뭘 해도 죄인입니다.”라고 나오면 그 앞에서 다 낯 뜨거운 거예요. 물론 성령 받아야 낯 뜨겁지 성령 안 받으면 낯 뜨거운지도 모릅니다.
‘너도 나처럼 돼 봐라. 너도 나처럼 그런 생각 다 없어진다. 나도 한창 젊을 때는 개혁주의 외쳤다. 지금에 와 보니 개혁주의 그거 아무 소용없더라. 그거 해 봐야 복도 못 받고, 나가면 복이 아니라 나가면 사기당하고, 들어오면 복이 아니고 들어오면 집에 불나고, 아무 소용도 없더라.’ 이렇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런 가운데서 성령이 임해버리면 이방인 교회가 이미 유대인 교회가 되어버린 그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두 증인(계 11:3)으로서 활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아주 유명한 증인이죠, 두 증인. 죽기 위해서 증언해야 될 사람들.
막상 말씀이 입에서는 달았지만 속에 들어가니까 쓰게 된 사람, 이것은 자기 운명이라 어쩔 수가 없어요. 에스겔처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말씀은 좋았는데 그 때부터 뭔가 내장에 탈이 생겨서 꼬였는지 어쨌는지 속이 안 좋아요. 말씀이 들어가니까 속이 안 좋은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그게 바로 주님의 이방인 교회입니다. 바깥에 있는 사람은 “당신 구원받아서 좋겠지.” 하면 이방인 교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 때문에 좋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주’라는 것을 알게 된 이것이 기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끝까지 교회를 안 믿습니다. 끝까지 교회를 안 믿어요. 왜, 믿을 분이 따로 계시기 때문에 끝까지 교회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자, 예수 믿었으니 교회 믿자, 이런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도신경 끝부분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제하는 것을 믿”는다고 되어 있지요. 성도는 그것을 안 믿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으면 이미 그것은 공회 속에 포함되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 따로, 교회 믿는 것 따로, 이것이 성령 받은 사람에게는 있을 수가 없는 거예요.
내가 교회인 것은 아니에요. 내가 교회가 아니고 나는 주님을 믿는 사람이고 주님을 믿는 사람인데 그게 교회가 되는 거지요. 주어와 술어를 ‘내가 교회’라고 바로 당기지 말고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고 주님을 중간매체로 집어넣으란 말이지요. 이렇게 주님을 믿게 되면 주님을 믿는 그것이 교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슨 여지를 남깁니까? 내가 만약에 주님 안 믿고 교회 믿으면 항상 잘렸다, 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 자체 내에 포함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었으니 이제는 교회 믿어야지, 라고 하거든 주께서 나보고 “너는 신자 아니다.”라고 이야기 해주세요, 라는 데까지 우리가 이미 예상하고 믿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사람에게 사랑의 대상이 둘이 될 수 없거든요. 주님을 사랑하면 나를 미워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주님 대신 또 믿을 만한 것들이 없습니다. 그것은 교회를 사랑 안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이미 교회 사랑하는 것으로 주께서는 주의 개념 속에, 주의 자리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 되고 살아 있는 것이 죽은 것, 죄악된 것이 된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주시면서 이미 우리는 새로운 개념, 주님 안에 있게 되고 주님 안에서 살게 된, 사랑하는 주님 안에서만 우리는 있고 사는 사람들, 이 작업에 우리가 종사했기 때문에 우리는 육적인 본성을……이야기 이상하게 되는데 끝까지 잘 들어야 됩니다, 육적인 본성을 마음껏 발휘하세요.
마음껏 드러내세요. 드러나는 것을 우리가 말릴 수는 없습니다. 아닌 척 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마음껏 드러내면서 주의 성령과 항상 마주치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쉬었다가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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