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강
로마교회의 신학을 라틴신학이라고 합니다. 라틴신학에서는 원죄개념이 있고 동방신학에는 원죄개념이 없습니다. 원죄개념이 없이 무슨 기독교가 되느냐, 지금으로서는 상상이 안 되지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부터 모든 인간은 죄 속에 갇혀 있다, 이것이 원죄개념인데 동방교회의 신학에 그 개념이 없다면 그것이 무슨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느냐, 동방교회는 다른 것이 있어요. 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신이 직접 사람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거예요. 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던 로고스가 육신을 입으면 그것으로 구원은 충분히 되는 거예요. 그런데 로마서는 그것이 아니고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것을 씻어주기 위해서 법적으로 된다는 보상설, 이것이 안셀무스의 보상설이라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의로운 분이고 자기 백성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값을 치르지 아니하면 죄용서가 되지 않기에 값을 치르는 것이 사랑이고 값을 치러서 그 형벌에 대해서 만족하게 되면 그것이 공의고,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과 공의 그 두 가지를 다 만족시키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 법적으로 된다는 거예요. 동방신학에서는 이렇게 반박해요.
“그러면 묻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으면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올 일이 없겠네요. 아담이 죄를 안 지었으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올 일이 없네”하는 거예요. “일 없지” 하니까 “웃기고 있네.” 하지요. 동방에서는 인간이 죄 짓는 것이 중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인간되는 그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에 죄를 지었던 안 지었던 관계없이 하나님은 사람이 되기로 작정했다, 그렇게 나오는 겁니다. 이 말 들으면 이 말 맞는 것 같고 저 말 들으면 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럴 때 방법은 두 개 다 집어넣으면 되지요. 괜찮다 싶으면 다 집어넣으면 돼요. 괜찮으면 다 담아버려요. 그것이 바로 개혁주의신학입니다.
그냥 괜찮다 싶으면 다 집어넣고 그냥 일괄적으로 “믿습니다.” 하면 끝나는 거예요. 마구 집어넣고 흔들어서 마시듯이 그냥 “믿습니다.”하면 다 되는 거예요. “삼위일체를 믿습니다.” 삼위일체가 뭐냐, 몰라도 돼요. 다만 뒤에 추임새만 붙이면 돼요. 무조건 “믿습니다.” 하기만 하면 돼요. 나중에 알렉산드리아파는 라틴신학으로 붙습니다. 그래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이쪽은 동방으로 따로 나라가 갈라지면서 로마제국을 동방이 계승한다는 식으로 동로마제국이 되고 그것을 비잔틴제국이라 하고 서쪽은 게르만 쪽이 내려와서 나라를 조각내 버렸어요. 이 게르만 족이 프랑크왕국을 거쳐서 다시 프랑스와 이탈리아 독일로서 현재 유럽의 나라들이 됩니다.
유럽의 나라들을 살펴보면 현재 올림픽이 열리고 있는 런던, 프랑스, 독일,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시리아, 이집트, 이 중간에 흑해라는 바다가 있고 저 위쪽에 러시아가 있습니다. 19세기에는 제정러시아, 수도는 모스크바죠, 그리고 폴란드, 헝가리, 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가 있는데 동방에서 전도할 때 이 알바니아 쪽으로 했거든요. 그쪽을 슬라브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어요. 슬라브 민족 전체가 동방교회(政敎會, Orthodox Church)의 신학이 정립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개개인이 신학을 알아서 한 것이 아니고 영주 같은 우두머리가 그 종교를 받아들이면 백성들은 일괄적으로 그 종교를 수용했습니다.
그 이유를 아까 설명했지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국가 없는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를 하나의 큰 테두리로 본다면 나라는 존재는 혼자서는 의미가 없고 이 국가에 대해서 어떤 위치, 어떤 계급, 어떤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서 비로소 그 나가 나다.”라고 하는 거예요. 국가는 하나의 테두리고, 공동의 선이고 나는 그 공동선에 기여하는 하나의 자리를 점유함으로 말미암아 공동선의 혜택과 보호를 받으면서 행복한 삶을 산다, 그것이 교육을 받아서 몸으로 익혀진 겁니다.
그래서 항상 종교라 하는 것은 결국 민족과 결부되는 겁니다. “네 종교가 뭐냐?” 하는 말은 “네 민족이 뭐냐?” 하고 같은 물음이에요. 1800년대에 마냐라는 여자가 있었어요. 나중에 퀴리라는 아저씨와 결혼해서 퀴리부인(Maria Skłodowska-Curie 1867-1934)이 되는데 그 사람이 폴란드 사람이거든요. 퀴리부인이 어릴 때 폴란드가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습니다. 초등학교 교실에서 “우리 폴란드는 절대로 우리 국가를 잊어서는 안 돼.” 하면서 폴란드 역사를 몰래 배우고 있었는데 갑자기 러시아 장학사가 들이닥쳤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미리 준비한 뜨개질 도구를 전부 꺼내놓고 뜨개질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지요.
장학사가 와서 “지금 무슨 시간입니까?” 하니까 “우리는 지금 양재시간입니다.” “그래요? 여러분에게 이제 폴란드는 없습니다. 이제 러시아에 속한 겁니다. 얼마나 교육을 잘 받았는지 시험을 해 보겠습니다.” 선생님은 러시아어를 제일 잘했던 퀴리부인을 일어서도록 했어요. “러시아 황제의 계보를 이야기 해 보라.” 남의 나라 황제의 계보를 왜 이야기합니까? 우리나라 식민지 시절에 일본천황계보를 외워보라고 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지금 걸리기만 하면 선생님은 사표제출 할 판이에요. 어린 퀴리부인이 답합니다. “표트르 1세, 예카테리나 1세, 표트르 2세……파벨 1세, 알렉산드르 1세, 니콜라이 1세.” “지금은 누가 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지? 지금은?” “지금은 러시아의 황제 알렉산드르 황제 2세폐하가 다스리고 계십니다.” “고뢔~?” 여기서 그 유명한 개그 “고뢔~?”가 나왔어요. 그래서 무사히 그 교실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중에 퀴리 부인이 되어서 라듐 발견했는데 연구하다 하도 방사선에 노출되어서 암 걸려서 죽어버렸지요, 뭐.
그 당시 러시아에 복속된 나라는 강제로 러시아 말로 주기도문을 외웠어요. 우리 민족이 되려면 종교가 일치 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그래서 개인적인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보통 인간한테는 해당 안 되는 이유가 개인은 국가의 안전과 보전, 국가라는 더 큰 권력 체 밑에서 생존을 누리고 싶은 충동이 있는 이상은 내가 사적으로 예수 믿겠다, 하는 것이 성령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점을 누가 아는가, 이 점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성령을 집어넣어준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사태가 벌어지도록 하느냐?
옛날에는 국가 되기 전에 뭐가 있었는지부터 먼저 봅시다. 옛날에 국가 이전에 부족사회가 있었고 그 이전에 부족연맹이 있었지요. 부족연맹 밑에는 씨족사회, 씨족사회는 어느 시대냐 하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시대의 씨족사회인데 보통 그 시대를 청동기시대로 보지요. 그 이전에는 신석기시대, 그 이전은 구석기시대, 그 전에는 호모 사피엔스, 호모에렉투스, 호모하빌리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런 식으로 죽 거슬러 가는데 진화론에서는 이것을 약 2백만년 전으로 보지요. 호모에렉투스(Homo Erectus)에서 에렉투스라는 뜻은 ‘직립’ 똑바로 서서 걷는다는 뜻이고 하빌리스라는 것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뜻이고 호모사피엔스라는 것은 머리를 쓴다는 뜻이지요.
호모에렉투스는 두뇌의 부피가 500cc인데 호모사피엔스는 1500cc여서 세배나 커지면서 그만큼 두뇌피질이 많아졌고 두뇌피질이 많아진다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더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인간두뇌 속에 제일 밑바닥층위에는 먹고 마시는 충동적인 것만 있다가 점차 세월 따라 진화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합니다. 어쨌든 국가로의 발전이 이어지는데 잉여 생산물의 증가로 세계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4문명(이집트의 나일 강 유역, 인더스 강 유역, 중국의 황하,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유역)이 일어나지요 사실은 기원전 6천년 전경의 아프리카가 가장 먼저고요, 4대 문명의 발상지라 하는 지역들은 기껏해야 기원전 약 4천년 경에서 기원전 2000년경에 일어난 거예요.
씨족연맹이 부족연맹으로 그리고 국가로 발전하면서 어째서 인간은 개인위주가 아니고 단체위주냐를 따져 봐야 합니다. 그것은 종교 곧 신과 관련있습니다. 스페인의 알타미라라는 곳에 동굴이 있는데 거기 보면 사냥하면서 제사하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지요. 호모사피엔스, 현생인류(크로마뇽인)가 머리를 쓰는데 추상적인 신개념이 어떻게 그때부터 있었느냐는 말이지요. 신이라는 것은 인간에게서 쏙 빼내버릴 수는 없는가, 왜 인간 속에 신이 박혀 있는가 하는 겁니다. 그 신 개념이 뭐냐, 하는 거예요.
그래서 문화인류학자들이 조사를 해보니 신(神)개념은 의외로 간단했어요. 경계선 개념이었습니다. 숲에 사는 동물은 숲에만 살고 민간으로는 넘어오지 마세요, 이렇게 되는 겁니다. 숲이 우거졌다, 침침하고 어둡다, 그 안에는 인간을 해코지 하면서도 인간에게 저항할 수 없는 힘센 무엇이 거기에 들어 있다, 그래서 숲속에 들어갈 때는 그냥 가면 안 되고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그 신에게 바쳐야 무사히 나물이라도 캘 수 있고 여러 가지 위험을 방지할 수 있다, 하는 경계선입니다.
여기서 여기까지는 인간의 영역이고 여기서부터는 인간이 손 댈 수 없는 미지의 영역입니다. 미지의 영역을 뭐라고 하느냐, 그것을 그냥 신의 영역이라고 하자, 이게 바로 구약에 나오는 다신사상, 이방종교의 특징입니다. 민수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압 지경을 통과할 때에 이스라엘이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우리가 아무것도, 과수의 열매를 비롯해서 무엇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니까 그냥 이 땅을 통과하게 하라.”고 하는 거예요. 옛날에 애들 데리고 소풍갈 때 과수원을 지나가게 되면 과수 막 따먹었어요. 애들은 먹지도 않을 거면서도 막 따고 그랬어요.
그때 모압은 이스라엘에 저항했지요. 왜냐? 그 땅이 누구 땅이냐 하면, 자기도 범접 못하는, 자기들의 신이 사는 모압 신의 땅이기 때문에 그래요. 모압의 그모스, 암몬의 밀곰, 이런 신들이 다 국가 마다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옛날에는 곰 같은 동물이 신으로 많이 등장했어요. 단군신화에도 곰이 등장하잖아요. 그래서 한국말에서 ‘고맙다’는 말은 ‘곰답다’는 이야기입니다. 꼭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고맙다’ 하는 것은 ‘당신에 내게 베풀어주는 이것은 신의 은총입니다.’ 하는 ‘곰답다’에서 왔다는 연구가 있는데 이것은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모압지방을 통과하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허락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도 마음대로 범접하지 못하는 신이 사는 곳을 인간이 들어가서 어지럽히면 신이 화를 내서 갑자기 천둥번개가 친다든지 비가 안 온다든지 하는 우환이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 뮈토스(신화)의 세계에서는 신은 신대로 놀고 우리 인간은 인간끼리 놀자, 이것이 에피쿠로스학파의 특징이에요. 이것이 당시에 스토아파와 라이벌 관계에 있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주의인데 그냥 먹고 즐기자는 것이 아니고 “신은 인정하되 신은 인간에게 관여하지 않는 신이다.”라는 신입니다. 신은 인정하되 그 신은 인간에게 관여하지 않는 거예요.
현대철학으로 본다면 칸트철학과 마찬가지입니다. 신은 신대로 놀고 우리 인간은 인간들끼리 놀면 되는 거예요. 어떻습니까, 여러분! 구미가 확 당기지 않습니까? 신은 신대로 놀고 우리는 우리끼리 놀고, 그러면 그 반대편에 서 있던 라이벌 학파인 스토아학파는 뭐냐하면, 신이 섭리해서 운명적으로 우리를 관여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신이 관여하기 때문에 우리는 로고스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로고스는 신에게서 나온 성품이기 때문에 우리는 신 앞에서 겸손하게 마음을 낮추면 된다는 거예요. 지난 광주강의에서 한 내용을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공리주의,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을 공리주의라 합니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뭐냐,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은 ‘쾌락-고통=행복(쾌락에서 고통을 뺀 이것이 행복’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행복 하고 싶어서 사는데 어떻게 하면 되는가? 고통을 줄이든지 아니면 쾌락을 늘이든지 하면 되지요. 이혼을 했다(고통이 늘어났다) 싶으면 골프를 쳐서(쾌락을 늘여서) 행복이 늘어나게 하는 방식을 취하면 되지요. 행복이 그거라는 거예요. 그래서 스토아학파에서는 어떻게 하느냐, 쾌락을 증진시키려면 뭐가 필요합니까, 돈이 필요하거든요. 돈이 없는데 어떻게 고통을 줄이고 쾌락을 늘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는 마음을 낮추면 되는 겁니다. 절제지요.
갑자기 절제가 나오니까 성령의 열매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절제를 하게 되면 어지간한 고통도 “그래, 나 보다 못사는 사람을 생각해서 견뎌야지.” 이렇게 하면 행복해진다는 겁니다. 뺄 것이 별로 없으니까. 그게 바로 스토아학파에요. 이 스토아학파가 인간 속에 로고스로 자리 잡게 되면 그것이 플라톤이 말한 상기설(想起說)이 됩니다. 기억나게 하는 것, 어떤 기억, 인간은 흙이고 모방에 불과하지만 인간 안에 로고스(영혼)이 있는데 그것은 신이 갖고 있던 신의 성품이 우리 안에 잠재된 채 들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교육을 하게 되면 인간 속에 잠재되어 있는 착하 성품, 거룩한 성품을 개발해 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이것과 유사한 교육이론이 바로 존 듀이의 교육학이론입니다. “교사는 간섭하지 마라.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질을 마음껏 개발해 주라.” 그렇게 되는 겁니다. 미국의 교육학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교사는 될 수 있는 대로 간섭하지 말고 그가 갖고 있는 소질이 무엇인가를 개발함으로써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 자의식을 빨리 정착시켜서 훌륭한 이 나라의 시민으로, 여기 국가가 또 튀어나오지요, 국가의 궁극적인 목적인 최고의 선한국가가 되는데 서랍에 있는 자기 자리로 정착해서 기여할 수 있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박태환은 수영만 잘해야 되고 연애하고 돌아다니면 안 된다는 식이에요. 수영하는 그것이 자기 자리가 되는 겁니다.
자기목적에 합하여 잘했을 경우에 그것을 ‘선’이라고 하는 겁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선한 것은 뭐냐, 역량껏, 욕심내지 말고 해라.” 이렇게 하니까 또 로마서 12장이 생각나지요. ‘믿음의 분량대로 살아라.’라는 것이 나오지요. 그것과 또 연관되는 거예요. 스토아학파의 ‘선’을 보면 잠언서가 또 생각납니다. ‘가난한자도 부한 자도 다 하나님이 합당하게 지으신 것이다.’ 잠언 서에 나오는 그 이야기도 스토아학파에서 나온 그 이야기와 유사하다면 이제 성경 볼 필요도 없이 철학만 하면 그 안에 다 포함이 되는 거예요. 플라톤의 ‘상기설’이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잠재적 자질로서 누구나 다 신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교육을 통해서 신의 성품을 닮도록 할 수 있다.”라고 할 때 그 상기, 깨닫게 해주고 기억나게 해주는 그 능력이 로고스인데 어거스틴(354-430)이라는 유명한 철학자가 이것을 무엇으로 봤느냐하면, 그것을 ‘성령의 조명’이라고 본 거예요. 이것이 어거스틴이 조명설(照明說)이에요.
성령의 조명, 세상적인 지식은 인간의 로고스가 담당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구원받는 은혜에 관해서는 성령이 조명하게 되면 다시 기억이 나게 해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는 겁니다. 많이 알고들 있지요. 감리교, 침례교, 성결교, 그리고 장로교는 개혁주의 계통을 밟습니다. 개혁주의, 곧 칼빈과 루터는 어느 계통을 경과했느냐 하면 사도바울로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에 유일하게 인정하는 사람은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에서 그대로 붕 떠서 닿은 것이 루터, 그 루터를 베낀 것이 칼빈, 이렇게 되는 겁니다. ‘사도바울 – 어거스틴 – 루터(칼빈)’ 그 칼빈에 의해서 개혁주의가 ‘기독교강요’로서 신학으로 정립되게 되는데 그 뿌리를 캐보면 그 원조가 어거스틴이 나오고 그 어거스틴은 어디서 나왔는가, 어거스틴이 사도바울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그것은 칼빈과 루터의 자기네들 생각일 뿐이고 실상 어거스틴은 플라톤에서 나왔어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나왔어요. 또 스토아학파에서 나왔다는 말이지요. 시대 시대의 논리는 플라톤이 담당하고 윤리에 관한 것은 스토아학파에서 나온 거예요. 스토아학파의 윤리가 뭡니까, 절제하고 마음을 낮추면 행복 안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결국 사람 사는 이유가 뭐냐, 하나님을 믿으면 행복해집니다, 그것이거든요. “행복하소서.” 결국 그거예요. ‘행복하소서’에 대해서 싫어하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 아무도 없잖아요. 그러면 다 기독교신자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자식아, 네가 이렇게 부모 속 썩이고 교회 안 나가는데 너도 교회 나가서 하나님 믿어라.” “어머니,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네 속에 이미 하나님의 영혼이 있는데 마음을 낮추고 나 죄인이다, 이렇게 하면 나쁜 친구들도 떠나가고 너는 이제부터 행복해질 수 있는 거야.” 행복 못해서 환장을 했어, 환장을!
“어머니, 행복은 무엇입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네 자리 찾아가는 거야.” “제자리가 뭡니까?” “욕심내지 말고 실력껏 해라. 공무원시험에서 일곱 번 떨어지거든 그거 하지 말고 치킨집을 하든지 다른 것을 해라. 네 자리를 빨리 찾아가라. 결혼을 안했거든 얼른 시집이나 가서 애나 순풍순풍 낳고 그저 시부모 잘 섬기고 치매 걸리면 등 떠밀어서 요양원으로 보내고, 그렇게 살면 훌륭한 며느리가 되니까 그렇게 살아라. 제발 네 자리 좀 찾아가 줘. 그것이 주께서 주시는 역할이다.” 그 역할을 가지고 휘포스타시스(hypostasis)라고 합니다. ‘위격(位格)’이에요, 위격. 삼위일체에 나오는 그 위격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 위격을 페르소나(persona), 하나의 인격이라 하는데 그 ‘휘포스타시스’라 하는 위격이란 하나의 신분이에요.
삼위일체 속에 그 신분이 결정되어 있어요. 누구 신분, 성부는 하나님이니까 빼놓고 또 성령은 영이니까 그 분도 빼놓고 인간이 관여할 수 있는 하나님은 누구밖에 없습니까? 성자지요. 성자 예수님이 갖고 있던 그 위격, 신분이라는 위치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위치니까 신자가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누구를 롤 모델로 삼으면 되지요? 예수 그리스도의 그 본성과 존재성을 모델로 삼아서 예수님이 삼위일체 속에서 갖고 있던 그 위치, 그 역할을 우리가 성령을 통해서 그대로 본받게 되면 우리도 예수님 못지않게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가 되는 위치에 있게 되는 겁니다. 그 위격을 강조한 사람이 ‘둔스스코투스Duns Scotus, Johanes (1266-1308)’라는 신학자고요, 토마스 아퀴나스를 반대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전에 중간에 하나 빠진 것이 있는데요, 지금 신론을 하면서 ……, 이제부터 어려운 것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신론을 정립할 때 초반에 제일 어려웠던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했잖아요. 이때 철학자들이 제일 난처했던 것은 이 천지를 창조하면 악은 어디서 튀어나오느냐?’ 하는 문제에요. 악은 어디서 나왔게요? 악은 악에서만 나왔다고 하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일자(一者)가 아니고 이자(二者)가 되니까 그것은 로고스가 용납을 못해요. 시어미 둘 섬기려면 골치가 아파요, 하나로 모아야 돼요. 대통령도 둘 되면 곤란하잖아요.
결국 마지막 오디션도 두 명이 최종 남게 되지요. 여러 명이 하게 되면 골치 아파서 안 되니까. 왜 골치 아픈가, 이 로고스가 불안정해서 안 되겠어요. 신이라는 것은 자기 안정하기 위해서 신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 분입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세분 같으면 시어미가 세분인 셈인데 이쪽 시어머니 섬길 때 저쪽 시어머니 삐질 텐데, 몸은 하나지 하나님은 세분이지 이것은 미치고 환장할 짓이 아닙니까? 그래서 동방신학에서는 성부를 하나님의 대표자로 세우는 거예요. 이것이 동방신학입니다. 그런데 라틴신학, 로마신학에서는 최종대표를 정하기를 성부와 성자 성령 다 똑같이 하자고 정한 거예요. 최종대표는 성부가 아니고 성부와 성자와 성자가 똑같이 대표자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동질본질’이라는 단어를 여기에 사용하는 겁니다.
성부가 대표자가 되면 성령은 어디서 오는가? 오직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이 동방신학, 곧 정통(Orthodox)한 교회신학인데 종교개혁 할 때 동방정통스교회는 영향을 안 받았어요. 왜 영향을 안 받았을까요? 그들은 국가가 교회고 교회가 국가기 때문에 자기 국가를 스스로 깰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래 민족국가 자체가 정통이기에 손 댈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그 동방교회에서는 성부께서 성자를 통해서 성령을 주신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로마 라틴교회에서는, 그것이 아니고 “성령은 성부에서도 나오고 성자에서도 나온다.” 하니까 동방신학에서는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라고 말합니다.
이게 필로꾸베(Filioque, 아들로부터)논쟁인데, ‘아들로부터 나온다.’는 문구를 집어넣자는 거예요. 동방교회에서는 “아들에서 성령이 나와 버리면 성령께서 두 군데서 나온다는 말인가? 성부 한 곳에서 나와서 아들을 통해서 성령이 나오신다, 이렇게 해야 맞지.”라고 한 거예요. 성령이 성부에서도 나오고 성령이 성자에서도 나온다면 성령이 ‘이번에는 아버지에게서 나왔나, 이번에는 아들에서 나왔나?’ 성령 본인조차 헷갈린다는 말이지요.
예를 들면, 냉장고를 한 대 받았는데 이게 장인이 보냈는지 장모가 보냈는지 분명치 않아서 아파트 주소 따라 처갓집에 가 봅니다. “냉장고 한 대를 장인어른이 보냈습니까, 장모님이 보냈습니까?” 물어보니까 장인이 하는 말이 “내가 우리 집사람한테 사위네 냉장고 하나 바꾸라고 해서 보냈다.” “그래요??” 하면 이해가 쉽게 되는데 “장모님이 보냈습니까, 아니면 장인어른이 보냈습니까?” 하니까 장인과 장모가 서로 “내가 보냈거든!” 하면서 부부싸움을 할 판국이라.
냉장고가 두 대면 말이 되는데 냉장고는 딱 한 대만 왔으니까. 서로 보냈다면 도대체 누가 보낸 겁니까? 이게 오늘날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개혁주의 신학입니다. 이 ‘필로꾸베’를 칼빈, 루터도 동의헸습니다. 어거스틴이 하늘 같은 선배이니까요. 거기서 어긋나면 이단입니다. 교인들은 그 내막도 몰라요. 왜, 모태신앙이니까. 그런 것은 필요 없어요. 삼위일체를 믿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다녀온 그 교회를 믿고 그 당회를,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를 믿습니다. 그래서 목사나 장로가 기도할 때 맨날 ‘당회로부터 어린아이까지’를 집어넣어서 기도하지 예수님이 누군지를 말을 안 해요. 어제 오후에 우리교회에 주께서 보내신(필로꾸베) 분이 오후예배 기도를 했어요.
기도내용은 간단합니다. “말씀이 역사하사 우리의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까지 우리이 모든 것을 쪼개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성경구절이 들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평소에 성경 구절을 품고 산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품고 산다는 것을 믿음이 좋다는 것과 동의어로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제가 분명히 이야기했어요. 그냥 품고 사시는 거예요. 분명히 다시 이야기합니다. 품고 사셨던 거예요. 그것은 어떤 점에서 다른 사람에게 좋으냐 하면 사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전제함으로써 다같이 그 말씀을 너나눌 수 있어 좋은 겁니다. 사람들이 살기가 바쁜데 언제 말씀 봅니까, 그런데 그 장로님이 기도시간에 말씀이 이렇게 들어가게 되면 잊어버렸던 그 말씀을, 플라톤의 뭐? 플라톤의 ‘상기설’, 또는 어거스틴의 ‘성령의 조명설’에 의해서 다시 기억이 나서 은혜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겁니다.
제가 기도내용에 성경구절을 넣어서 하면 구원받는 장로님이 된다는 그런 말을 안했지요? 그 이야기를 안 한 거예요. 자꾸 오해들을 하시는데 오해들 하지 마세요. 누가 구원받고 안 받고는 같은 피조물이 관여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동방교회 입장에서는 서방교회와는 달리 법적인 것이 아니에요. 법적인 것이 아니고 신비적입니다. 신이 우리에게 임한 거예요. 그래서 모든 교회 이벤트, 행사, 쇼 같은 거지요. 러시아의 문학가 톨스토이나 토스토예프스키의 경우에는 정교회에서 하는 모든 것은 종교쇼로 봤습니다. 토스토예프스키의 경우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통해서 그리스정교회를 권력단체의 하수인으로 본 겁니다. 또 토스토예프스키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도 반대했습니다.
톨스토이는 평생 동안 정교회와 싸웠습니다. 톨스토이의 신학은 뭐냐, “산상설교로 돌아가자.”는 겁니다. 자기가 시범을 보이겠다는 겁니다. 대지주의 아들이었지만 그 받은 유산을 몽땅 다 다른 사람에게 나눠주었어요. 바보 같은 짓을 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마누라와 평생 싸웠어요. 그리고 죽을 때는 거지꼴로 죽었습니다. 자식들도 아버지를 안 좋아 했어요. 아버지가 유산을 처리할 때 자식의 허락을 받아야 됩니다. 왜, 일부 거기에는 자기 몫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자기 것이 아닙니다. 일부 자식들 몫이 들어 있어요. 큰 아들, 둘째 아들, 딸까지 법적으로 다 들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아내 것에 해당되는 몫만큼만 기부하고 그 나머지는 손대지 말아야 됩니다. 그것 잘못돼서 삼성 가는 지금도 싸우고 있잖아요. 톨스토이나 토스토예프스키는 뭐냐하면 “성경을 봐라. 기독교는 하나님의 그 나라와 의를 이 땅에 세우는 것이다. 어떻게 세우는가, 산상설교는 폼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키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대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가난한 자들을 그냥 도우라.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릴 때 사람은 행복해진다.’” 이것이 무슨 철학입니까? 아까 배웠지요? 이것이 스토아철학이에요. 왜 그렇게 해야 되는가? 신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이 스토아 철학이에요. 성령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역사를 건성으로, 표피적으로라도 볼 기회가 없잖아요. 그런데 이 시간을 통해서 교회사의 내막을 돌아보게 되면 우리가 현재 하는 짓을 같은 인간인 선배들이 이미 다 해 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잘 팔리니까 수도원에서 아이콘(성화)을 만들어서 팔았어요. 성지순례 때, 그림도 팔고 또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해서 수도원을 유지했거든요. 올레 길은 우리가 처음이 아니고 이미 저 사람들이 다 했다니까요. 유럽에 무슨 성지순례가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유럽의 교회들이 성인들을 계속 추대해왔다는 점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유럽의 성지는 성인이 나올 때마다 성인이 나온 그 고향, 학교, 일가친척, 주변의 모든 것들이 포함되어서 다 성지가 되는 겁니다. 돌아보는 거지요.
자칫하면 이 가야산 이곳도 성지가 될 수가 있어요. 여러분하기 나름입니다. 여름에만 오지 마시고 4월이나 7월에도 와서 둘러보는 거예요. ‘내가 이 사우나에서 은혜 받았는데.’ 하면서 둘러보는 거지요. 사람들이 느끼는 모든 뮈토스 적인 신비감은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고 느껴지는 이런 것을 통해서 되는데 동방신학이 그것을 가지고 집단화 즉 국가 전체를 신자로 만드는데 어렵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무식한 사람들, 짐승 잡는 도살자나 고상한 철학자나 상관없이 인간의 기본적인 것은 신과 합일하고 싶은 그 욕망, 그것을 가지고 플라톤은 인간의 영혼, 또는 플로티노스의 경우는 삼중신 표현한 거예요. 세명이 신이 하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결국 신을 찾고 결국 인간의 모든 안식은 신의 품안에서, 하나님의 품 안에서 누린다.” 이것을 누가 이야기했습니까? 이것을 누가 이야기해서 유명해졌습니까? 어거스틴이 이야기해서 유명해졌습니다. 이런 것이 액자로도 많이 팔렸을 거예요. “내가 신의 품안에 있기 전까지는 안식을 누리지 못했는데 신의 품 안에서 비로소 안식을 누렸다.”는 겁니다. 많이 행복들 하세요. 행복이란 쾌락에서 고통만 제거하면 되니까요. 부부가 서로 싸워서 불행하다. 그러면 행복의 방법은 뭡니까? 고통의 요소, 즉 이혼하면 되겠지요. 얼마나 간단합니까?
하지만 실은 고통이 내부로 들어가서 흐릅니다. 이것을 가지고 ‘내재적 신론’이라 합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입니다. 플라톤 철학과의 차이점이에요. 플라톤은 “세상의 모든 것은 아무것도 아닌 허상이다. 잊어버려라.” 이렇게 됩니다. 성경 야고보서에는 “인생은 있다가 없어지는 안개다.”라고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은 목적을 갖고 있다. 목적이 있는 이상 우리는 거기를 향해서 달려가야 된다.” 어디를 향하여? ‘신을 향하여.’ “그냥 달려가면 안 되고 점점 더 신을 모방한 영혼을 가지고 달려가게 되면 그만큼 우리는 선해지고 선한만큼 우리는 유용하고 유용하면 신의 축복을 받아서 우리는 행복해진다. 목적 없는 인간은 인간도 아니다. 목적 없는 인간은 개나 소나 마찬가지다. 인간은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이란 신을 향한, 저 높은 곳을 향한 선한 목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베낀 사람이 누구냐, 토마스 아퀴나스라는 사람인데 천주교의 대부, 천주교의 멘토, 지금의 모든 천주교의 신학을 제공하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그것을 이야기한 거예요. 그래서인지 천주교는 부동산을 아주 많이 가지고 있어요. 교회에 제일 위에 누가 있습니까? 교황이 있지요. 교황은 교회의 머리가 돼요. 처음에는 교황제도가 없었습니다. 황제의 정치적 술수에 의해서 교황제도가 만들어졌거든요. 황제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교황제도가 있어야 된다고 주교들이 부추겼어요. 처음에는 주교가 있었고 주교 다음에 요새 말로 하면 목사인 사제가 있지요. 주교는 디모데전서이 용어로 하면 ‘감독’이고 주교 다음의 사제는 목사, 또는 목자, 그 다음에 부제라는 것이 있는데 이 부제라는 것이 뭐냐, 성령을 받아서 교회 봉사하는 사람, 현대교회로 하면 이것은 집사쯤 되겠지요.
사도행전에 보면 일곱 집사가 나오지요. 그것을 그대로 하는 겁니다. 그 다음에 평교인 들이 있고, 그래서 계급이 형성되는 겁니다. 이 계급이 형성되면서 제도가 구약의 제사제도로 바뀌었습니다. 미사가 제사거든요. 예배가 아니고 제사입니다. 이 차이점이 뭐냐, 예배라는 것은 그냥 집에 있어도 되는 것이 예배지요. 그런데 모여서 형식을 갖추게 되면 그것은 제사형식을 취해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구약 때 보면 구약 백성들이 자기 집에서 모였습니까, 아니면 성전에서 모였습니까? 성전에 모였지요. 신약 때 집에 모인 것과 퍽 대조적입니다. 모여서 제사형식을 갖추면서 예가 된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감독이 구약의 제사제도로 변경을 시켜 놓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은혜가 오는 통로를 독점한 거예요. 다른 통로로서는 복을 받을 길이 없습니다. 마치 구약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활동한 것처럼. 제사복장을 하고 제사 제도를 갖추고 제사의식을 하니까 그때서야 국민들이 기독교에 대해서 수긍이 되는 거예요. 신약 적으로는 안 믿던 사람이 구약 적으로 해서 믿었다는 그 말은 그것이 믿음이다, 아니다? 믿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이다, 아니다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눈에 딱 보이니까, 촛불 켜고 구약 복장을 하고 설쳐대니까, 제사장은 거룩하고 자기는 속되고 더럽고, 이러니까 그것이 비로소 ‘아, 교회 와야 구원받는구나.’라는 식으로 아는 거예요.
그리고 요한복음에 보면 “너희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니까 네가 누구의 죄를 사해주면 죄가 사해진다.”(요 20:23)’는 사죄권이 등장한 거예요. 그래서 고해실안에 사제가 삐딱하게 앉아 있고 밖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게 되면 “사도신경 스무 번 외우시고 기도문 외우시면 됩니다.” 라고 영적 처방전을 끊어주지요. 어떤 영화에 보면 마약 판매하는 갱들이 갑자기 고해하는 척 하다가 고해실 안의 사제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 장면도 있어요. ‘야, 성당도 저렇게 당하는구나.’ 하고 봤는데 신부가 북한에 왔다 갔다 하고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하는 정부에 반대데모를 선두에 서서 해도 다른 사람이 손을 못 대는 것은 이 사람이 신의 패밀리 같은 거기 때문에 저지는 해도 아예 말릴 수는 없는 거예요. 장가도 안간 사람들이죠.
그 카리스마, “나는 하나님 외에, 예수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그 것, 내 배 째라는 식이지요. 그런 식으로 북한에 왔다 갔다 하고 해군기지 건설하는 것 반대하는 거예요. “내 배 째라. 나는 고아와 같다. 내가 죽으면 너희가 무사할까 보냐.” 그런 큰소리를 치는 것, 그러니까 마귀 들린 사람들은 거기에 그만 기가 죽지요. 거기에 기 안 죽는 사람은 성령 받은 사람밖에 없습니다. 이 사람들이 사실은 다 철학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이렇게 해서 체계를 갖추게 되면 그 당시 농노가 있던 사회에서는 이 주교제도에 단체로 가입을 하게 되면 신자 되는 혜택을(사실 전 국민이 신자니까 혜택이랄 것도 없지만)을 입게 되는데 그 대신 연줄이 있어야 돼요.
애들 세례줄때나 결혼식 할 때 초야권 같은 것,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관계는 봉건사회에는 계속 있어왔던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굳건하게 있었던 그 기독교 국가가 어떻게 해서 오늘날 이렇게 개판이 되었습니까, 어떻게 해서 거기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휘포스타시스(위격)에 있어요. 위격이란 뭐냐, 개인적인 개성을 인정해주자는 거예요. 하나님은 세분이지만 각자 개성이 있다는 거예요. 주님이 개성을 갖고 있을 때 영광이 된다면 우리도 개성을 갖고 있을 때 영광이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지가 따로 있지만 우리의 의지도 따로 있어서 우리의 의지로 뭘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는 것이 둔스 스코투스라는 사람, 즉 토마스 아퀴나스 이후에 나온 사람이 드디어 불을 지폈습니다.
이것이 ‘의지주의’인데 “인간의 의지, 인간의 자율적인 선택도 하나님의 선택의 한 모양새가 된다.”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따로 있고 우리는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곧 하나님의 선택이 된다. 마음껏 선택하라. 그러면 그것을 곧 하나님의 선택으로 간주해준다.” 하는 거예요. 그것을 그대로 인수한 사람이 윌리엄 오컴이라는 사람입니다. 윌리엄 오컴이 등장해서 “모든 법을 초월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지요 곧 우리의 의지다.” 그렇게 된 거예요.
그 당시 성령 안 받은 사람 없고 다 받았어요. 전부 다 안에 로고스가 있기 때문에 다 받은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성령 받은 사람의 모든 의지가 곧 하나님의 의지가 된다.” 이것이 윌리엄오컴의 주장인데 여기서 오컴의 제자가 누구냐, 마르틴 루터라는 사람입니다. 수녀와 결혼함으로서 나의 수녀와의 결혼이 곧 하나님의 선택인 것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행동하는 양심가, 행동하는 개혁가. 여기에 불이 붙은 것은 농민들, 이들에게 불이 붙었습니다. 마르틴 루터 킹, 흑인 해방운동가와 이름도 비슷하잖아요. 농민해방, 흑인해방, 그런 것도 비슷하잖아요.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95개조의 교황과 그 당시 교회에 대한 반박문을 써 붙여놓았어요. 거기 써 붙여 놓은 것, 그것 성경 아니거든요! 성경 아닌데 뭘 자극했겠어요? 나의 선택과 나의 개성도 곧 누구의 지시와 누구의 명령도 받을 필요 없이 그 자체가 신의 뜻이 될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그것의 몸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온 이 휘포스타시스가 실체라는 말인데 그것을 후대의 철학자들은 무엇을 바꾸는가, 그 유명한 ‘주체’라는 말로 바뀌는 겁니다. 주체로 바뀌면서 사회가 완전히 뒤바뀌는데 드디어 근대시민국가로 바뀝니다. “귀족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누리는 것을 우리도 누릴 자격이 있다.” 거기서 나오는 문화가 로코코문화라는 겁니다.
바로크라는 것은 프랑스왕궁의 화려한 문화가 바로크라면 니들만 누리나, 우리도 누리자 해서 대중적이면서 천박한 문화스타일로 나온 그것이 로코코라는 것입니다. 기묘하고 뒤틀린 선들로 표현되는 문화로 가면서 대중화 되고 그래서 “돈 있는 자는 누구나 귀족이 될 수 있다.”는 사상이 일어나면서 이탈리아 북부의 피렌체, 십자가운동 당시에 돈벌이 톡톡히 했던 무역상들의 그 피렌체 같은 도시들로부터 ‘내 느낌대로 살기, 내 느낌대로 성경해석하기 운동’, 바로 르네상스, 문예부흥운동이 일어나는 겁니다. 르네상스가 뭐냐 하면, 성경해석에 대해서 교회에서 내려온 전통적인 성경해석 말고 내가 느낀 마리아, 내가 느낀 예수, 내가 느낀 하나님에 대해서 그걸 그대로 그림으로 그려내는 거예요.
아담을 귀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소외된 인물로, 아주 고통스럽게 보이도록 그림으로써 고통스런 자기 처지를 그런 식으로 묘사해서 화폭에 담는 겁니다. 기독교를 안 벗어나는 척하면서 거기서 개인적인 개성을 돋보이게 만드는 거예요. 마리아를 그리던 그림을 모나리자로 그려버려요. 비록 눈썹은 없지만. 눈썹 없는 여인을 그림으로 말미암아 기존의 단아하고 단정했던 것을, 마리아가 차지했던 그 극단의 아름다움을 개인적인 아름다움으로 바꿔치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에피쿠로스학파지요. 뭐냐, 신을 안 섬기겠다는 것이 아니에요. 신을 섬기되 “신은 어른들끼리 노세요.” 둔스 스코투스의 이론에 의해서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우리가 감사로 영광 돌리면서 살겠습니다. 우리의 직업 하나하나가 소명된 것이고 귀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한 겁니다. 그 때부터 현미경이 만들어져서 들여다보기 시작했고 목성의 위성이 두 개인지 세 개인지 갈릴레오가 보기 시작했고 그래서 갈릴레오의 상대성원리가 나와서 그때부터 “모든 등속 하는 입장에서는 같은 물리법칙이 통한다.”고 했고 그 후에 유일한 등속을 가진 것은 오직 빛 밖에 없기에 아인슈타인은 “모든 인간의 시계가 같이 가지 않는다.”고 한 겁니다.
아인슈타인에 따르면(상대성 시계 속력공식) 옆에 같이 살아도 시계가 달리 간다는 말입니다. “공간의 속도가 시간의 속도를 잡아먹고 우리는 지금 절대시간이 아니고 시간 속을 여행하고 있기에 시간을 믿지 말라, 공간도 믿지 말라.”고 한 겁니다. 만약 속도가 모두 공간을 통해 움직이는데 사용되면(빛의 속도로) 시간을 통해 움직일 속도는 하나도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지금 우리는 어디로 여행하는지 분간도 못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어요. 이러한 로고스가 지금은 과학이라는 것, 과학이라는 이름의 로고스가, 국가 대신 이 과학이 우리를 지켜주고 우리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이성으로 지금 자리 잡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요? 내가 보기에는 아인슈타인을 믿고 물리법칙을 믿는 것으로 보여요. 하나님을 믿어요? 아닐걸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따로 놀고 이 땅에서 우리가 일구어낸 과학의 발전을 우리가 믿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뿌리까지 캐내니까 우주의 역사는 137억 년 전부터 있었고, 그때에 빅뱅이 있었고 평행우주론이 나오고 그런 가운데서 하나님 이야기, 그것은 옛날의 신화적인 이야기일걸, 이제는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놀고 그저 착함으로써만 하나님을 믿지 그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겨놓으라는 이야기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이미 과학이라는 이름의 로고스에 지배를 받고 있는 거예요. 과학이 로고스, 진리가 되는 겁니다. 과학이 아니면 진리가 아니에요. 뭐가 되었든지 과학적으로 수학적으로 이야기를 해야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겁니다. 경제도 통계를 내놓고 이야기를 해야지 통계 없이는 아무 이야기도 못하는 시대에 와 있어요.
이러한 분위기가 그 당시에도 있었는데 거기에 대해서 교회가 나름대로 성경책에 나오는 내용을, 그런 철학을 이용하면서 뭔가 그런 철학과 독특함, 개성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뭔가 한소리 해야 될 텐데 그 한소리 한 것이 뭐냐, 하나님은 유에서 유를 만든 것이 아니고 없는데서 있는 것을 만들었다는 망발을 해버렸어요. 이게 망발이 되는 거예요. 하나님은 없는데서 만들었다,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이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기독교 신자면서도 납득이 안 되는 이유가, 없는데서 있다면 있음 안에 없는 요소가 있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있는 것은 없어지지 않아요. 형태만 바뀔 뿐이지, 우리의 몸은 바뀔 뿐이지 없어지지는 않아요.
그러니 기독교가 성경에 나오는 대로 말은 해 놓았는데, 없는데서 만들었다고 해 놓고는 뒷감당이 안돼요. 뒷감당이 안 되니까 삼위일체를 만들어서 삼위일체의 언어를 가지고 믿고 따라오려면 따라와 봐, 해서 그것을 가지고 소위 신학자들만 따로 은둔하듯이 그들만이 아는 대화로 삼위일체논의를 전개하기 시작하고 민중들은 우리 위대한 신학자들을 따라오기만 하라는 식으로 겨우 숨통을 트는 짓들을 그들이 담당했습니다. 쉬었다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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