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되시는 하나님
이근호 2019년 9월 18일
본문 말씀: 호세아 2:14-20
(2:14)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2:15)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2:1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2:17)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2:18)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2:19)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2:20)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의 하나님됨은 독자적으로 그 정체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대비하시면서 나타내십니다. 그 이유는, 바알신은 인간들이 본능적으로 선호하는 신입니다. 바알 신의 특징은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신입니다. 사람이 소원을 신에게 알리고 호소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내게 유리함’을 포기할 마음이 결코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기만 잘되면 다 잘된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자신이 한결같기를 원합니다. 지금 이대로 유지하면서 최고의 완벽함까지 도달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정녕 되고 싶은 그 위상을 신이 먼저 점유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인간에게는 믿음이 있습니다. ‘나 자신이 잘 될 것이다’는 믿음이 내용입니다.
따라서 믿음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신이 믿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을 믿고 있다는 고백을 뜻합니다. 철석같이 자기에게 자기를 위한 믿음으로 꽉 차 있기에 다른 믿음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바알을 믿는다는 것은 곧 현 자신의 내면 상태를 믿는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신에게 아부를 해도 그것에 멈추지 않습니다.
신을 만족케 하면, 그 이후조치 즉 최종적으로 나에게 유리한 상황이 초래한다는 믿음에서 멈추게 됩니다. 신에서 멈추지 못하고 나에게 와서 최종적으로 멈추는 겁니다. 이로서 나와 신 사이에 연속성이 성립합니다. 이어지는 겁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상상한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레위기 21:14에 보면, “과부나 이혼된 여인이나 더러운 여인이나 기생을 취하지 말고 자기 백성 중 처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아”라고 되어 있습니다.
거룩한 직분을 맡은 제사장 가족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거룩한 하나님께서는 친히 ‘음녀’와 혼인하려 하십니다. 이는 하나님 스스로 시험 속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이십니다. 즉 저주를 자초하시는 겁니다. 스스로 저주받는다는 상황 속에 친히 들어오시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 보기에 법을 위반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일 겁니다. 인간들은 ‘시험에 들지 않기’를 소원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진해서 시험 속으로 들어오십니다. 이는 곧 우리 인간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은 시험들지 않겠다는 그 시험에 빠지지 말라”고 말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법을 대하면서 최종적으로 ‘나에게 유리함’을 기어이 끝까지 챙기는 모양새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알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바일신과 차별화를 시도하십니다. 한결같다고 간주되시는 신이 변화를 일으키십니다. 인간들의 머리로 감히 예상 못하시는 변화를 보여주십니다.
이로서 인간이 자신을 신을 빙자해서 영원토록 고정적 존재로 정립하려는 인간들의 시도가 다 엉터리인 것으로 들통납니다. 변화하는 하나님 따라 인간도 변화해야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변화는 이러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남편으로 오셔서, 존재하지도 않는 아내를 나타나게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남편의 위상으로 등장해서 스스로 시험에 빠져 저주를 받아 죽으십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의 몸에 난 상처입니다. 예수님의 손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이 참된 하나님되심을 증거합니다.(요 20:27-28) 인간들이 믿고 있고 믿고자 하는 모든 신에는 이런 상처가 없습니다. 예수가 되었든 하나님이 되었든 부처가 되었든 용어와는 상관없이 인간들이 원하는 신은 매끈한 신입니다.
비록 상처가 되더라도 그 상처가 계속 부각되고 중심으로 살아 보이는 그런 신을 인간들은 원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나 유리함’으로 마감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남편으로 오신다는 것은, 이미 아내의 등장과 연관성을 지은 나타남입니다. 그리고 그 남편되시는 분이 죽으시고 사흘만에 부활하신다는 것은, 이 본질이 그대로 신부의 본질이 되는 겁니다.
즉 그 남편의 아내가 된 자는 남편 덕분에 더 이상 죄로 지적당할 입장이 아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남편으로 인해 완전한 아내 신부으로 등장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서 남편쪽에서 문제 삼지 않는 것을 아내가 문제 삼아서는 아니된다는 말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홀로 사는 존재가 아님이 그 내용적으로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부로 살게 되면 남편을 위한 모든 환경이 아내의 환경으로 공유됩니다. 이는 곧 아내에게 혼수가 주어진다는 겁니다. 그 혼수는 곧 약속의 땅입니다. 애굽에서 볼 때에 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그저 이스라엘에게 주시고자 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내’라는 신부으로 결합된 혼수감으로 공유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19:7-8에 보면,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내가 된 사람들이 보이는 모습은, 전에 아내 아니었던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을 남편으로 알지 못했던 생활은, 자기를 최종적 가치로 생각하는 겁니다. 하나님께 요구하시는 것은 이겁니다. “나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인가 네 자신을 자킬 것인가? 둘 중의 하나만 하라”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좋으심’으로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나에게 유리함’으로 더 미끌어져 가는 생활을 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부된 자들은, 남편 외에 아무런 욕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남편의 상처를 보고 살고 그 상처로 인하여 즐거워하고, 상처를 자랑하고, 상처를 믿는 자들입니다. “내게는 오직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나니”(갈 6:14) 십자가라는 전신 거울 앞에 늘 자신을 비쳐보는 자입니다. 그 십자가에게 멈추는 자들입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신 것도 궁극적으로 혼인식을 위함입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애초부터 천지 창조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을 위한 세상이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음녀가 아니라고 우깁니다. 왜냐하면 최종적으로 자신은 믿는 자로 간주하는데 그 ‘믿은 자’라는 의식 속에서 “나는 문제없는 존재‘로 자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알아보는 자가 자신이 음녀라는 것을 아는 자요, 그 자만이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주님의 신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따로 나만의 정당성을 챙기지 말고 주님만 증거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8강-호 2장 14-20절(남편 되시는 하나님) 19091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2장 14-20절입니다. 구약성경 1258페이지입니다.
호세아 2:14-20
“그러므로 내가 저를 개유하여 거친 들로 데리고 가서 말로 위로하고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 날에 네가 나를 내 남편이라 일컫고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내가 바알들의 이름을 저의 입에서 제하여 다시는 그 이름을 기억하여 일컬음이 없게 하리라 그 날에는 내가 저희를 위하여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곤충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며 또 이 땅에서 활과 칼을 꺾어 전쟁을 없이 하고 저희로 평안히 눕게 하리라 내가 네게 장가들어 영원히 살되 의와 공변됨과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 네가 여호와를 알리라.”
하나님의 후속조치가 계속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후속조치라는 것은 음녀에게, 북 이스라엘에게 “잘해봐라. 열심히 해 봐라.” 그냥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니고, 친히 하나님께서 그 음녀의 남편이 되겠다고 나서시는 겁니다. 원래 레위기에 보면 제사장은 절대로 창기나, 이혼한 과부나, 흠이 있는 여자와는 혼인하지 않도록 되어 있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 흠이 있는 음녀를 아내로 맞이해서 스스로 남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가 시험에 드시는 거예요. 자진해서 시험에 빠지는 겁니다. 여기서 왜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의 법을 위반해서 음녀, 정결한 여인이 아니고 정결하지 않은 여인과 혼인을 하고자 하느냐? 그것을 무엇을 의식해서 하느냐? 16절에 “다시는 내 바알이라 일컫지 아니하리라.” 해서 그 음녀가 무엇이 문제냐 하면, 이방종교 바알을 섬기는 음녀인 거예요.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이스라엘 민족이 할 일이 아니고 이방민족이 하고 있는 일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이방민족이 바알을 섬긴다면, 레위기 20장 2, 3절에 이런 말씀이 있어요.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또 이르라 무릇 그가 이스라엘 자손이든지 이스라엘에 우거한 타국인이든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거든 반드시 죽이되 그 지방 사람이 돌로 칠 것이요 나도 그 사람에게 진노하여 그를 그 백성 중에서 끊으리니 이는 그가 그 자식을 몰렉에게 주어서 내 성소를 더럽히고 내 성호를 욕되게 하였음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방인이 자기의 종교를 유지하면서 이스라엘 속에 들어올 수가 없어요. 이방인이 만약 이스라엘 속에 들어오려면 죽어야 됩니다. 여기서 죽인다는 것은 아까 읽은 레위기 20장 2절의 말씀처럼 돌로 쳐 죽이는 것도 되도 그리고 뭘 죽이느냐 하면, 그 사람의 믿음도 죽이는 거예요. 우리는 생각하기를, 세상 사람들은 안 믿는 것처럼 말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미 믿는 구석이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믿는 것이 있어요. 그 믿는 것이 있으니까, 그 믿는 것이 가득 들어 있는 거기에다가 뭘 믿으라 하니까, 새로 등장하는 믿음과 자기가 믿고 있는 것과 안 맞을 때는 튕겨내는 거예요. 배척하는 거예요. 인간은 다 신자에요. 나름대로 다 신자입니다. 믿는 것이 있습니다.
이방민족이요? 다 믿어요. 뭘 믿는가? 오늘 본문에 보면 바알을 믿지요. 바알을 믿는 거예요. 바알을 믿든 뭘 믿든 자기가 믿고 있는 것이 있다니까요. 이미 여호와가 아닌 다른 것을 믿고 있는 그 음녀와 하나님께서 지금 남편이 되겠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철석같은 자기 믿음은 그냥 믿는 것이 아니고 자기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뭔가 방어벽, 강렬하게 외부와 차단한 채 자기믿음을 지키기 위한 강력한 무기가 장착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달래줘도 그 사람은 자기 믿음을 포기하거나 그걸 버릴 의사는 전혀 없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신을 믿을 때, 하나님을 믿든, 바알을 믿든, 몰렉을 믿든 신을 믿을 때 항상 그 의도하는 것이 결국은 ‘어느 쪽이 자기에게 유리하냐’ 하는 겁니다. 내가 유리하게 하는 것이 마지막 종착점이에요. 자, 어떤 사람이 바알이라는 신을 믿는다. 그러면 바알이라는 신을 믿을 때 나름대로 바알이라는 신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성심성의껏 자기 마음을 정돈하고 조정하겠지요.
“나는 바알신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나는 바알신을 위해서 모든 것을 헌신하겠습니다. 나는 바알신을 위해서 어떤 것도 할 수 있습니다.” 언뜻 들어보면 바알신에게 유리한데서 멈춰진다고 생각하지만 이게 브레이크가 없어서 멈춰지는 것이 아니고 죽 미끄러져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내가 바알신에게 이정도로 했으니……’ 그 다음에, 또 그 다음에 점점 여분이 끼어들어요.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나 유리한 쪽으로 해주세요.”라는 거기서 멈춰요.
하나님에 유리하다고 모든 아양을 떨면서 결국 마지막을 추적해보면, ‘하나님께 잘해주면 결국 나한테 유리하다’는 쪽으로 스톱이 된다고요. 그러니까 이것은 어려운 말로, 하나님과 믿는 나 사이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연속성이라고 합니다. 끊어진 것이 아니고 이어진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바알을 믿는 그 음녀에 대해서 자진해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아내가 되겠다고 나서시는 것은, 하나님 스스로 고정된 하나님이 아니고 변화하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바알은 고정된 하나님이에요.
왜 인간들이 고정된 신, 꿈쩍도 안하는 신을 왜 믿느냐 하면, 믿는 내가 달라지고 변화되기 싫어서 그래요. 나는 한결같은 나 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신도 변치 않는 신이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세요. 뭔가 하나님이 행동에 나서지요? 행동에 나선다는 것은 변화가 일어난다는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나는 꿈쩍도 안하면서 ‘나는 달라질 것이 없어. 나는 한결같아.’라고 여호와를 그런 식으로 믿는다면 여호와 쪽에서 먼저 변화가 일어나요. 달라짐이 일어나요. 그러면 하나님은 이런 분이라고, 선입감으로 하나님은 이런 분인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어? 우리가 생각한 하나님아 아니네?’ 그렇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어길 리가 없는데 하나님 쪽에서 먼저 율법을 어겨버리면 이것은 무엇을 요구하느냐 하면, 우리보고 율법을 어기라고 초청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요. 하나님이 시험에 스스로, 시험이란 유혹이죠, 죄지요, 하나님이 스스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그 유혹에 자진해서 빠진다는 것은, 그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으로 하여금 ‘시험에 들지 않는 시험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 되어버려요.
좀 깁니까? 천천히 할까요? “시험에 빠지지 않겠다는 그 시험에 빠지지 말라. 변화되지 않으려는 고집을 부리지 말라. 그것은 교만이다.” 왜? 하나님 쪽에서 먼저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도 하나님 편에서 같이 움직여야 돼요. 우리는 움직임 없이 여기에 존재하고 있으면 그 자체가 우리의 영원한 본질이기를 원하는데 인간의 본질됨은 변화 속에서, 과정 속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지 한자리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것을 그 사람의 본질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밭에서 열심히 농사짓는 사람과 집안에서 화투만 치는 사람의 차이점. 그것은 간단하지요. 농사짓는 사람은 아침 일찍부터 호미 들고, 쟁기 들고 밖에 나가서 움직이잖아요. 화투치는 사람은 일어나서 소주 한 잔 먹고 화투치다가 그 자리에서 자고, 또 일어나서 화투치고, 꿈쩍도 안 해요. 뭔가 변화가 있어야 본질이 나타나는데 화투치는 인간은 도박이나 하면서 계속 거기에 앉아 있으니까 그게 자기자신인줄 알고 있어요.
사람이 건드릴 때 건드리면 반응을 나타내고, 반응을 나타낸다면 건드리기 이전의 그 사람과 건드릴 때의 그 사람이 차이가 나겠지요. 그 차이 속에서 인간의 진면목이 나오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은 그냥 하늘에서 팔짱끼고 계시는 여호와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지상에 와서 일을 벌일 때 거기서 움직임이 생기고 변화가 생길 때, 그 변화는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하시는 변화이기 때문에 인간의 요구사항과 전혀 관계없어요.
인간이 ‘그랬으면 좋겠다.’ 와 전혀 관계없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어떤 움직임을 줘버리면, 그 움직이기 전의 하나님이 계속 그대로 가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움직임이 드러났을 때 우리는 예상 못한, ‘하나님에게 이런 면이 있었어? 하나님이 이렇게 움직이는 거야?’ 깜짝 놀라는 거예요.
사람이 기도원에 가서 열심히 기도하면 ‘나는 기도 잘하는 진짜 성자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기도원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옛날에 헤어진 자기 애인이 쫓아와서 시비를 건다면? 지금 정숙한 상태에서 도 닦으러 왔다가 갑자기 시비를 걸면 자기 성질이 다 나오겠지요. “돈 줬잖아. 왜 더 달라고 하는데?” 해서 갑자기 기도 생각하다가 돈 이야기가 막 튀어나오겠지요.
그렇게 건드릴 때, 흔들어댈 때 우수수, 하고 떨어지는, 내가 감추어놓은 진짜 나의 본질은 변화 속에서 일어나는 거예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한 그 법안에 스스로 뛰어든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해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저주의 자리기 때문에, 망하는 자리고 죽음의 자리기 때문에.
인간은 안 죽으려고 하나님 믿거든요. 그런데 하나님 쪽에서 먼저 죽겠다고 나설 때 누가 그 하나님을 따라갈 수 있습니까? 그래서 인간은 믿는데 뭘 믿느냐? 바알을 믿는 거예요. 여호와라는 이름의 바알, 예수라는 이름의 바알, 삼위일체라는 이름의 바알, 성령이라는 이름의 바알, 교회라는 이름의 바알종교를 믿는 거예요. 바알신전을 믿고 바알신전에 출석하는 겁니다.
왜? 그 바알에는 상처가 없기 때문에. 깔끔하거든요. 깔끔해요. 상처가 없어요. 상처투성이의 신이 아닙니다. 자진해서 자기의 법을 어기는 그런 신이 아니거든요. 훌륭한 신이고, 거룩한 신이고, 완전한 신이거든요. 존재자체로서. 그러나 주님은 존재가 아니고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지요.
하늘에 계신 분이 이 땅에 내려오신 거예요. 하늘의 영광 그대로 내려온 것이 아니에요. 죄 속에 풍덩 뛰어든 겁니다. 다이버가 절벽에서 뛰어내리듯이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뛰어내린 겁니다. 이 시험밖에 없는, 유혹만 넘실대는 이 지옥 같은 세상에 그냥 하나님이 뛰어든 거예요. “음녀 기다려라. 내가 갈게.” 뛰어든 거예요.
이 말은, 음녀가 되지 아니하면 누구도 하나님의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가 없다. 음녀가 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신부가 아니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모든 인간은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부처를 믿든, 바알을 믿든, 예수를 믿든, 혹은 아무것도 안 믿어도 인간은 믿는 구석이 있어요. 아버지를 믿는다든지, 제사를 지내면서 조상을 믿는다든지, 친구를 믿는다든지, 자기의 우정을 믿는다든지, 정, 초코파이를 믿는다든지, 뭘 믿는 것이 있어요.
믿는 순간 인간은 누가 뭐래도 자기는 의인입니다. 죄인이 아니에요. 자식을 사랑할 때 자식을 사랑하는 엄마는 자식을 사랑하는 순간, 자신은 의인이라고 인정합니다. 내가 자식을 사랑하는 순간, 죄인이라는 의식은 전혀 들지 않습니다. ‘내가 왜 시험을 받아? 내가 왜 나쁜 존재야? 아니야. 내가 내 자식 젖먹이는 것을 봐. 이래도 나빠? 자식 키우기 위해서 시장바닥에서 찬바람 부는데 콩나물 파는 내 모습을 봐. 이래도 내가 나쁜 엄마야?’
“당신을 뭘 믿습니까?” “나는 내 자식을 믿습니다.” 믿는 구석이 있다니까요. 안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 믿는 순간 자기는 의로운 존재로 탈바꿈 되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주님은 그걸 흔드는 거예요. 변화하는 쪽에서 먼저 변화해가지고 너의 변화를 유발시키고, 그 변화 속에서 과정을 보여줄 때 비로소 진짜 네 모습은 거기서 등장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아무리 성경에서 음녀라고 해도 음녀는 없습니다. 전부 다 자기 딴엔 나름대로의 훌륭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음녀 되지 아니하면 아무도 하나님나라의 예수님의 신부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없는 음녀를 만들어요. 이게 뭔 뜻이냐? 신랑이 있고 신부가 있어야 결혼식에 들어가는데 현재 신랑도 없고 신부도 없어요.
신랑도 없고 신부도 없는데 없는 신랑이 등장해서 없는 신부를 새롭게 만들어내는 방식을 여호와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그 예수님이 오실 때 하나의 남자로 오신 것이 아니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남자가 아니고 남편으로 오시는 거예요. 아내가 아직 발생되지 않은 상태에서 남편만 존재하는 남편으로 오는 겁니다.
그 남편이 이 세상의 죄에 뛰어들어서 죽어버려요. 죽게 되면 남편의 이름의 자격으로 죽기 때문에 그 남편이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게 되면, 이게 호세아 6장에 나오거든요, 사흘 만에 살리는데, 하나님께서 남편의 입장에서 죽었다가 남편으로 살게 되면, 남편만 사는 것이 아니고 없던 신부도 새롭게 만들어져서 혼인잔치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새판이 등장하게 되는 겁니다.
음녀는 없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잘났기 때문에 음녀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음녀하고 혼인한다 했어요. 그러면 음녀를 만들어야 될 것이 아닙니까? 만드는 것은 남편 쪽에서 음녀를 만들어야지요. 만들려면 남편이 음녀가 음녀 되게 했던 시험, 악마의 유혹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스스로 시험의 대상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죄로 죽어야 되지요.
요한계시록 19장 9절에 보면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입은 자들이 복이 있도다.” 여기 청함이 있다는 것은 음녀로 호명을 당한 자를 말해요. “너는 음녀야. 음녀였어.”라고 호명을 당한자만 혼인잔치에 들어가는 거예요. 제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립니까? 그러면 이 새로운 남편에 걸맞는, 합당한 새로운 아내가 어떤 아내냐?
설교를 다시 해보겠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믿든 뭘 믿든 항상 ‘하나님에게 유리함’으로 멈추지 않아요.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멈추지 않고 어디까지 쭐떡 미끄러지느냐 하면, “하나님 믿으면 나에게 어떤 유익이 돌아옵니까? 얼마나 유리합니까?”에서 멈춰요. ‘하나님이 정당하다’에 멈추는 인간이 없어요. 하나님이 정당하다고 아부를 하든지 내가 인정을 해줌으로서 그 결과가 뭐냐? ‘그러니까 나는 정당하다’에 멈춰요. 음녀 아니지요.
하나님을 어떻게 과정으로 집어넣든 그 종착점은 ‘나 잘났다’로 인간은 끝나는 거예요. 이것은 악마의 유혹으로 선악과 따먹은 특징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서 새로이 신부된 음녀의 특징은 뭐냐 하면, 예수님만 보인다는 거예요. 스톱이 어디서 되느냐 하면, 나는 정당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정당하면 그것으로 오케이라는 겁니다. 주님이 정당하면 그걸로 오케이라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은 이겁니다. “말씀을 드러낼래, 너를 드러낼래? 말씀을 지킬래, 너를 지킬래?” 둘 중 하나만 하라는 겁니다. 말씀 지킨다고 핑계대고 너 지키지 말고. 말씀 지킨다고 핑계대고 너 지키면 그것은 상처가 없고, 고통이 없고, 죽음이 없는 바알종교에요. 아무리 그 이름을 예수라 붙이고, 삼위일체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 만군의 하나님이라고 이름을 붙여도 그 내용 자체가 바알이에요.
이 땅에 오신 주님, 하나님은 상처가 있는데, 죽음이 있는데 하나님이면서도 하나님의 정한 그 법에 의해서 자진해서 저주를 받았는데 인간들이 선호하는 그 하나님은 상처도 없고, 고통도 없고, 죽음도 없고, 저주받음도 없고, 스스로 버림받음도 없는 신이에요. 똑 누굴 닮았는가? 인간들이 원하는 그 신을 닮았어요. 나도 하나님처럼 완벽에 완벽, 또 완벽, 어떤 흠도 없는 그 완벽이 나의 이상형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간의 자기기대상에 부응되는 신, 인간들이 얼마든지 만들어내지요. 그게 바알이고 그게 몰렉이요. 그 바알, 아까 레위기 20장에서 본 그 바알,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던 그 사람이 이스라엘에 들어오려고 하면 이게 죽어야 들어와요. 죽지 않으면 이스라엘 그 집단에 못 들어옵니다. 죽었으니까 아예 못 들어오겠지요.
그런데, 죽어서도 못 들어가는데 죽었어도 들어오게 하시는 분, 나름대로 못 들어가니까 하나님이 죽어서 이스라엘 되게 하시는 거예요. 너희들은, 현재 북 이스라엘은 바알을 믿거든요. 바알을 믿는자가 어느 땅에 사느냐?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 산다고요.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이사야 61장, 62장에 보면, 오늘 호세아도 마찬가지지만, 그게 뭐냐?
약속의 땅이 혼수입니다. 지난 본문 12절에도 나와 있고, 오늘 본문 15절에도 나와 있어요. “거기서 비로소 저의 포도원을 저에게 주고 아골 골짜기” 아골골짜기는 환란의 골짜기에요. 환란의 골짜기, “아골 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저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후견자가 되리라. 친히 보호자가 되리라. 다시 말해서 남편이 신부에게 결혼만 하는 것이 아니고 혼수를 주는 거예요. 혼수를 주는 그 격, 차원이 뭐냐? 남편, 내가 만족스러운 차원으로 해놓고 새로운, 그 음녀라는 자기의 신부감을 그냥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남편인 내 만족을 위해서 만들어낸 그 신혼살림에 그냥 살게 하는 거예요.
이 기쁨이 여러분 잘 이해 안 됩니까?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여자 분이 빌딩이 네 다섯 채 있고 하여튼 엄청나게 재산이 많아요. 그런데 그 여자의 남편이 자기보다 열여덟 살 아래에요. 그것도 중국 사람이고. 그 남편은 소득이 없어요. 자기돈 3천만 원 외에는 없어요. 임대료도 전부 다 여자에게 들어가요.
그럴 때 자기보다 열여덟 살 많은 아내가 재산이 많아요. 그러면 남편이 할 일은 뭐냐? 그냥 살면 돼요. 애나 낳아주고, 가끔 소파나 새로 들여놓고 그러면 돼요. 함 소원 집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살면 돼요. 아, 남자 입장에서는 진짜 최고에요. 최고!
우리 아는 어떤 친척이야기인데, 자기 아내가 그 어렵다는 거제도 공무원시험에 합격을 했어요. 남편이 그 소리 듣고는 “나 이제 놀래. 아내가 버는데 뭐.” 이것이 농담인지 아니면 그 농담 속에 진담이 섞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차피 한 몸인데 누가 하나만 번다면 나는 놀아도 괜찮잖아.’ 라는 이 더러운 심보. 그 심보가 더럽던 어쨌든간에 하나님께서 지금 하시고자 하는 일이 그거예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혼수를 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사야 61장 10절에 이렇게 되어 있어요.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이사야 61장 10절이거든요. 이사야 62장 4절에 보면 “다시는 너를 버리운 자라 칭하지 아니하며.” 그러니까 버리운 자를 데려온 거예요. 신부를. 신부한테 손톱만큼도 돈을 받은 것이 아니고 버리운 자에요. 버리운 자를 데려온 거예요. 그 신부가 어디에 사느냐? 황무지에 살아요. 그러나 황무지라 칭하지 아니하고 ‘헵시바’, 다시 말해서 “나의 기쁨이 너한테 있어.”라고 일방적으로 기쁨을 집어넣고 그리고 그 땅을 ‘쁄라’라, ‘쁄라’라는 것은 ‘결혼한 여자’
5절에 보면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쁄라’라, 하나님이 친히 자기 신부를 그렇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만드는데 여기에 혼수감으로 등장한 것이 약속의 땅이고 자연세계에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 창세기 1장에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시가, 말씀이 점차점차 전개되면 될수록 창조의 목적은 결혼이었다는 겁니다. 결혼, 혼인이었다는 겁니다, 창조의 목적이.
다시 말해서 혼자 사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 아니고, 둘이 한 몸 되어서 사는 것이 창조의 목적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천지창조는 뭐냐? 두 사람을 휘감아 도는 하나님의 신혼살림, 혼수감이 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21장 1, 2절에 보면,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자,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이게 왜 있는지 모르지요? 이게 혼수감이라는 생각을 못하거든요.
그런데 2절을 보니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신부가 저 혼자 좋으라고 단장하는 것이 아니고 단장을 해주는 분이 누구냐? 남편이에요. 남편이 왜 자기 신부를 예쁘게 단장하느냐 하면, 남편의 자기 기쁨이 되기 때문에, 아내가 자기의 기쁨이 되기 때문에 아내한테 해주는 그것이 곧 자기를 위함이거든요.
참, 이거 12월에 주례할 것을 미리하고 있어요. 남편은 가지는 기쁨이 아니고, 뭘 해주는 대상이 있음 자체가 남편의 기쁨이 되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남편이 아내를 맞이하는 것은 퍼줌으로서 퍼주는 그 자체가 자기에게 기쁨이 되는 것이 남편의 역할이고, 기능이고 할 일이다, 그 말이지요. 남편의 운명이고요. 물론 현실적으로는 찾지 마세요. 현실은 지옥이니까 찾지 마세요. 그런 남편은 없습니다.
아내의 기쁨은 자기가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한 게 없는 게 아니고, 제로정도가 아니고 아예 마이너스지요. 일 저질꾼이에요. 일저질꾼. 가만있으면 괜찮은데 그게 아니고 일을 저질러요. 하는 행세가 율법을 다 어겨요. 율법에 다 위반돼요. 그런데 남편을 잘 만나가지고, 남편을 멋진 남편 만나가지고 남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내야, 내가 문제 삼지 않거든 너도 네 스스로 끙끙대면서 문제 삼지 마라. 너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잖아. 너는 너 혼자 사나? ‘내가 이런 잘못을 하고 이런 죄를 짓고 이런 저지레를 하다니.’ 이렇게 네가 혼자 살면서 끙끙거리는 버릇은 남편 앞에서는 모독이고 실례”라는 거예요. 네가 우수하고 훌륭하고, 음녀도 아니고, 정결하고, 그런 조건을 구비했기 때문에 구원한 것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주님의 죽음과 상처가 빠져있는 부부입니다. 상처가 빠져 있는 결혼이에요. 주님의 상처가 왜 생겼느냐? 주님의 창자국과 못자국이 왜 생겼습니까? 왜 주님이 도마보고 “만져봐라” 할 때, ‘내가 너의 구주가 되고 구원자가 된다.’는, 오늘 본문대로 한다면, ‘내가 너의 일방적 신랑이 된다.’는 증거는 뭐냐? 상처에요, 상처. 못자국의 상처와 창자국이라는 상처인데 우리가 믿고자 하는 신에게는 그게 없어요. 바알에게는 그게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하나님도 그게 없어요. 오늘날 교회의 하나님은 십자가라 해놓고 붕 떠버려요. 십자가를 살리는, 상처를 살리는 교회가 아니고 그걸 무마하고 덮어버리는데 급급한 교회에요. 오늘날 교회가, 2천년 교회가 그래요. 십자가만 자랑해야 될 텐데 십자가를 자랑하는 게 아니고, 마지막 브레이크가 고장 났으니까, 하나님 좋다고 해놓고 결국은 ‘나 잘났다’로 끝나버리는 교회. 이것은 바알종교입니다. 바알제단이에요. 교회가 아니고. 대한 장로회 바알교회, 대한성결교바알교. 천주교가 아니고 바알교에요. 사람 좋게 하는 교회.
인간은 나 잘난 맛에 살아가요. 어떻게? 단독적으로. 결국 시험에 든다는 말은 뭐냐?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이 시험이에요. “하나님 좋으면 나는 좋습니다. 주님만 있으면 나는 족해요.” 이래야 되는데 브레이크가 고장 나서 멈추지를 않는다니까요. “하나님, 내가 이렇게 하나님에게 좋게 하는데 하나님은 나에게 뭐해줄래요?” 이런다고요. “내가 당신에게 해주면 당신은 나에게 뭐 해줄래요?”
그런 식으로 해놓고 우리는 문제없다는 거예요. “왜 그러면 너는 하나님 믿고 뭔가 얻어 챙기려고 하느냐?”고 물으면 인간들의 속마음은 전부다 공통적으로 딱 하나입니다. “나 잘났거든. 나 잘난 존재거든요.” 음녀가 아닙니다. 아주 나름 정결해요. 훌륭하다니까요.
그러면 음녀는 언제 생기는가? 주님의 상처 앞에서 비로소 내가 음녀라는 것을 발견하지요. 십자가 앞에서, 그 피흘림 앞에서. 그런데 피흘림의 그 거울 있잖아요. 큰 거울, 전신거울. 그걸 왜 자꾸 치워버립니까? 그걸 치워버리면 나는 남편이 사라지는데요? 나는 남편 없이 그냥 혼자 사는 재미로 사는 사람밖에 안되는데요?
이제 현실로 돌아옵시다. 세상의 부부는 그런 남편 없어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하나의 동업자, 하나의 거래지요. ‘내가 너에게 잘해주면 너는 나에게 얼마나 잘해줄 거냐?’ 남편도 아내한테 그냥 순수한 마음으로 주지 않아요. “내가 이정도로 너에게 명품가방 사주고 밥 먹여주고 월급도 꼬박꼬박 다 줄 테니까 너는 무조건 남편인 나에게 꾸벅 엎어져라. 내가 너보고 돈 벌러 나가라는 소리 안할게.” 그것도 빈말이지만. 입만 열면 거짓말이니까.
하여튼 남자들에게 가오라는 것이 있잖아요. 가오라는 것이 있어서 “걱정하지 말고 애나 잘 키워라. 그 대신 너는 나를 남편으로 받들고 모셔라. 필요한 것은 내가 다 줄게.” 그러면 여자가 어떻게 합니까? “아니오.” 합니까? 어차피 거짓말인데 “응!” 하는 거예요. 챙길 것은 일단 챙기고 보지만 본심은 그게 아니에요. ‘내가 니끼가?’ 그게 본심이에요. 본심은 아니지만 일단 받아 챙길 것은 다 받아 챙기는 거지요.
이 세상의 혼인이라 하는 것은 서로가 자기가 우상이 되어서 서로 마지막에 ‘나만 유리하면 오케이. 나만 손해 안보면 돼.’라는 인간들끼리 모이는 것이 이 세상 결혼입니다. 왜? 이미 범죄 했기 때문에 그래요. 각자가 하나님이 아니거든요.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바알종교와 여호와의 차이점은 곧 뭐냐? 현재 나라는 인간과 하나님과의 차이점을 같이 비교하고 연결하면 밝혀낼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몸에 상처가 있는 반면에 우리는 상처 입는 것을 마치 인생실패로 여깁니다. ‘내가 뭐가 못나서 상처를 받아? 내가 뭐가 못나서 일찍 죽어야 돼? 내가 뭐가 못나서 망해야 돼?’ 이런 고집, 이런 고집이 바로 음녀였던 겁니다. 이게 음녀인 거예요. 정말 신부될 자격도 없고 아무리 해도 천국의 그 혼인잔치, 정결한 양의 신부가 될 수 없는 입장이거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손가락을 우리 입술에 대고 “쉿! 그 입 다물라. 내가 다 해줄게. 그 더러운 몸만 오라. 내가 해결 다 했어. 내가 문제 삼지 않는데 네가 왜 스스로 문제 삼아?” 그것은 옛날 버릇이 그래요. ‘나 잘해야 되는데, 완벽해야 되는데, 나 착한 일 많이 해야 되는데, 내가 죄 지으면 안 되는데, 아이고, 마귀의 시험에 빠졌구나.’
그 시험에 안 빠지려는 그것이 시험이에요. 주께서 이미 시험에 빠진 자를 신부로 맞이했는데 우리는 자기가 시험에 안 빠진 존재이기 때문에 신부가 된 양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이유가 뭐냐 하면, 십자가로부터 세상을 새로 볼 줄을 몰라서 그래요. 하나님은 저기 존재하고 계시고 나 여기 존재하니까, 좋은 게 좋으니까 “좋은 게 좋지요, 하나님? 잘 해 드릴게요. 복 주세요.”우리는 그것밖에 몰랐어요.
그것은 바알종교인데! 그것은 바알신인데! 그것은 이스라엘에서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그런 종교, 그런 사람은 죽어야 돼요. 이스라엘에 들어오려면. 왜? 이스라엘은 어린양의 피가 중심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귀한 신부라고 한다면 이제는 나 자신이 귀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못난 나에게 귀한 것 주셨구나.’
귀한 것 주셨으면 누굴 쳐다봐야 돼요? ‘역시 나 잘났다’를 봐야 되겠어요? 아니면 주님만 고마워해야 되겠습니까? 그저 남편 외에는 아무런 욕심이 없는, 그리고 내가 어떤 모습이라도 그 자체가 주님께서 좋아라, 하시면서 예수님 자신의 긍휼과 사랑을 덧입고 있다는 이 사실을, 하나님께서는 바알종교와 비교하면서 오늘날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자꾸 독립해서 살려는 이 타고난 버릇, 우리 힘으로 고칠 수 없고 그러면서도 잘난 체하면서 이게 뭐가 문제냐, 따지면서 살아왔습니다. 주여, 그것이 음녀의 모습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것이 바알종교인줄을 몰랐습니다. 주여, 그런 인간을 깨닫게 하셔서 아내로 삼아주시니 이제는 주님만 쳐다보면서 주님 기뻐하는데서 멈추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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