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호세아

호세아 2:8-10 / 허무한 신

정인순 2019. 9. 4.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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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한 신 


이근호
2019년 9월 4일            



본문 말씀: 호세아 2:8-10

(2: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2:9)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2:10)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사적 문제를 공적 문제를 드러내는데 사용됩니다. 뿐만 아니라 신에 관한 영역까지 개인적인 사건이 연결됩니다. 물론 이 개인은 호세아 선지자 가족 중 한 사람, 곧 음녀라고 불리는 호세아의 아내입니다. 이러한 호세아의 계시 방식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낯설게 느껴질 것입니다.

사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으로 마감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적인 문제가 좀 한가롭다면 그 때는 국가나 정치적인 것에 관심을 둘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개인적인 문제가 복잡해지면 국가나 정치권에서 일어나는 것은 관심 밖이 됩니다. 이처럼 현대를 살아가는 표적인 시민생활이란 어디까지나 자기 만족, 자기 편안함 추구입니다.

개인적으로 중간 정도의 생활을 유지하는데도 죽을 힘까지 다 퍼부어서야 겨우 하루하루를 넘깁니다. 마치 오리가 한가로이 물 위에 떠다닌다고 보이지만 물 밑에서 오리가 쉬지않고 물질을 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이 국가문제나 하나님에게 할 말이 없이 일상을 보내는 것은 자기 몸 하나 간수하는 것도 너무나도 힘이 들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에 어떤 비약 같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인사에 지나지 않는 바람피우기가 국가 문제까지 확대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신의 문제와 결부시킵니다. 개인문제가 어떻게 국가문제까지 논리가 이어지는데 그 과정에 대한 설명하는데 있어 예언은 친절하지 않습니다.

국가의 문제가 신의 문제까지 넓여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함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통고하는 겁니다. 인간이 어떤 식으로 대처하든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하시겠다는 계획은 차질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비약처럼 보이는 과정은 모두 하나님의 일로서 다 채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작업은 이러합니다. 잔뜩 같이 놀아난 남자로부터 선물을 많이 받은 음녀를 하나님께서 강제로 납치하듯이 데려옵니다. 그리고 그 남자로부터 받은 것들을 다 벗겨버립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이것들은 모두 바람난 남자의 것이 아니라 나 여호와의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귀한 것들을 박탈당하고 별볼일 없는 몰골의 그 음녀는 그 남자가 보이는 쪽으로 돌려세우면서도 그 남자를 향하여 하나님은 장담합니다. “이 여인에 대한 나의 조치에 대해서 중지시킬 수 있거든 중지시켜 보라”는 겁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음녀의 남자와 은근히 경쟁하십니다. 대비하십니다.

그리고 이 대비성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겁니다. 마치 그 남자가 보란 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의 이름은 인간의 이름이 아닙니다. 그 당시 그 지역에 보편적으로 유행한 신,  바알입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신을 추종한 것은 그 신을 신봉한 결과가 풍요로움을 주고 있다고 소문났기 때문입니다.

원래 신은 오직 한 분 뿐입니다. 다른 신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 세계에 숱한 신들이 있다는 것은 그 신들이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신들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십계명 제 1계명에도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말라”(출 20:3)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신이 없음을 아시고 신들을 많이 허용하신 겁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자신의 반대를 스스로 이 땅에 돌출시키기 위함입니다. 있지도 않는 신을 허락하므로서 그동안 악마가 인간들을 어떤 식으로 통치해 왔는지 그 지배체계를 노출시키기 위함입니다. 인간들이 신을 만들어 섬기는 이유는 사는 것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즉 나를 힘들지 않기 위해 자기 편을 들어주는 절대존재를 상정하게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17-19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한평생을 이런 환경과 처지 속에서 살면서 고통을 면해줄 자기보다 더 큰 능력자를 원하는 겁니다. 그런 신이 필히 꼭 있어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삶의 고통 속에서 필히 구성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속마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바알을 찾은 그 북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음녀를 다시 호세아 가정으로 불러오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음녀가 남편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겁니다.

아이돌 가수를 좋아하는 청소년 딸을 강제로 집에 붙어있게 한다고 해서 그 딸이 부모에게 감사할 마음이 생길 턱이 없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음녀를 그 남자와 떼내게 하므로서, 음녀의 마음가짐이 의미세계로 투영된 것이 바알이요 우상임을 알리고 싶었던 겁니다.

우상이란 곧 허무하고 없는 겁니다. 하지만 그 ‘없음’을 자아내는 인간의 마음의 경향성은 여러 가지 종류의 신들을 자아내게 됩니다. 음녀를 붙아둠은 이 인간 세계에 인간의 고통을 즐여줄 그 어떤 대책이나 해결책이 없음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 마음이 허구를 추구하기에 아무리 생활이 궁하고 매사가 궁지에 몰렸다고 해도, “나를 고생시키시는 주님의 처신은 참으로 내가 원한 바입니다.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감사할 위인은 없습니다.

요즈음의 바알은 곧 교회당에서 찾고 있는 예수, 성령, 성모 마리아, 성부 하나님 등등입니다. 용어나 명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들이 자신의 고통을 한계를 없애줄 신으로 기대하면서 불어내면 그 모두가 다 바알이요 우상이고 허망한, 있지도 않는 신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참된 신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오늘 본문에서 음녀는 수치스러운 몰골로 전에 좋아했던 남자 앞에 노출됩니다. 바로 이 음녀의 모습을 하나님께서 스스로에게 적용시키시는 겁니다. 즉 참된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잔혹한 일이 일어나게 하시는 겁니다. 더 이상 망한 지경이 아닐 정도로 철저하게 극한 망함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적용시키십니다.

신의 존재가 아닙니다. 십자가 사건을 두고 말입니다. 십자가 달린 그 당사자가 곧 우리의 진 모습인 겁니다. 고생을 안해야 될 존재가 우리가 아니라 마땅히 고생해야하고 저주받아야 할 자인 것을 알려 주시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을 죄지를 지적하시면서 찾아오시고 우리의 가짜 신은 나의 잘남을 방어하기 위한 신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스스로 힘으로 움직이려고 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 안에 있는 십자가가 스스로 움직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6강-호 2장 8-10절(허무한 신)1909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호세아 2장 8-10절입니다. 구약성경 1257페이지입니다.

호세아 2:8-10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저희가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저에게 더하여 준 것이어늘 저가 알지 못하도다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호세아 성경에서 개인적인 연애사를 가지고 범주를 확대시켜버립니다. 그래서 어떤 개인적인 남녀간 애정문제가 아니라, 나라전체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을 섬기는 국가적 분위기로 전환시키는 겁니다. 개인적인, 사적인 문제가 국가적인 공적인 문제로 확대대면서 그 해석에 의해서 중간에 비어 있는 많은 내용들을, 뭔가 채워야 될 것을 채우는 식으로 이해할 것을 우리한테 요구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나 우리는 호세아의 이러한 계시를 접하면서 사적인 문제는 사적인 문제로서 끝나버리고 국가의 문제는 국가의 문제로 따로 처리하기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나고 국가는 국가에요. 그 둘 사이를 한 통으로 연결 지으려면 거기에 많은 내용들을 담을 수 있는 어떤 체험이라든지 경험 같은 것이 우리에게 무척 부족합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이 말씀은 아주 과한 도약, 해석의 비약, 점프, 뛰어넘는 해석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지요. 그러면, 호세아가 어느 선에서 나무라느냐 하면, 어떤 개인적인 연애사건, 바람난 이야기를 국가적으로, 공적으로 확대하지 못했다고 우리를 지적하는 겁니다. “나는 개인에 대해서, 윤리도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네가 속해 있는 국가의 분위기가 망하는 쪽으로 가고 있는데 네가 왜 그걸 몰라?” 그런 식이에요.

그러면 우리는 국가가 망한다는이 평소 우리의 일상적인 삶에서는 잘 감지가 안돼요. 나는 내 일 하기 바쁜데 국가걱정까지 할 게 뭐가 있습니까? 국가걱정은 누가 하느냐 하면, 60넘어서 은퇴해서 할 일이 없어서 tv조선 틀었다가, jtbc 틀었다가, 욕 한번 하고, 케이블 tv채널을 온통 돌아다니면서 누워서 보고, 엎어져서 보고……, 이렇게 심심풀이 하는 사람들이나 나라가 어떠니, 청문회가 어떠니, 하지 다른 사람은 청문회 그거 관심도 없어요.

노인네가 20퍼센트, 30퍼센트 되니까, 나라 거의 절반가까이가 노는 사람들이니까 그런데 관심 있지 다른 사람들은 거기에 관심을 둡니까? 안두지요. 대학생은 왜 자꾸 관심을 두느냐? 대학생은 할 일이 없거든요. 대학생은 노는 그것이 자기 할 일이기 때문에 그런데 관심이 있지 직장생활에 들어가면 정치니 그런데 관심 없습니다.

현재 내가 처해있는 국가도 관심이 없는데 호세아까지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의 내용을 보게 되면 뭔가 우리한테 직설적으로 와 닿지를 않습니다. 8절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저에게 준 것이요.”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게 오늘날 우리한테는 또 납득이 안되는 거예요.

우리가 아는 상식이라는 것은, 곡식이라는 것은 넓은 농토가 있고 거기에 봄에 씨를 뿌리고 트랙터니 여러 장비들 사용해서 농부들이 신경 바짝 쓰고 혼신의 힘을 다해서, 비가 오는지 안 오는지 그런 것 다 신경 써서, 그래서 가을에 추수해서 곡식이 생산되고, 농협에서 일부 수매하고 나머지는 시장에 내다 팔아서 농사꾼이 산다. 그리고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유통과정을 통해서 마트에서 농산물을 구입해서 산다.

이게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이에요. 농부가 농사지어서 상인을 통해서 돈 받고 파는 그것이 곡식인 줄로 압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나서시는 거예요. 나설 자리도 아닌데 나선다는 말이지요. 하나님 내가 곡식을 주었고 내가 기름을 주었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지 않는 분이.

“언제 했는데요? 언제 하나님이 우리한테 줬습니까? 하나님은 교회에서 만납시다. 농토에서 만나지 말고.” 농토에서 농사지어서 곡식 나오면 우리는 마트에서 돈 주고 샀을 뿐이지 곡식을 하나님이 직접 천사 보내서 딩동~, 하고 “안녕하십니까? 택배입니다.” 이렇게 곡식 준 예가 없어요. 우리의 일상적인 것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바로 호세아에서 말하는 것이 그겁니다. 우리가 표준적인 시민상, 시민생활,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외부가 보이지를 않아요. 남들처럼 평범하게 보통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 그것으로 살기를 자족하게 되면 우리 인간세계 바깥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행사하시는지 전혀 감이 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표준적인 일상, 보통적인 일상생활을 하는 순간 우리의 모든 관심사에서 하나님이 배제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하나님을 찾기에는 우리가 일상생활을 유지하는데 드는 비용을 얻는데도 우리는 하나님 찾는 데까지 신경을 못 쓰게 되어 있습니다.

흔히 말하지요. 연못가 오리가 평온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리가 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물 밑에서 부지런히 발길질을 하듯이, 그저 말하기 편하게 우리는 평범하고 표준적인 시민생활, 일상적으로 남들처럼 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 남들처럼 사는 그것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수백차례 거짓말해야 됩니다.

숱한 갈등을 일으켜야 되고, 더러운 소리 다 들어야 되고, 굴욕적인 태도 갖춰야 되고 ‘에이, 진짜 가족만 없으면 사표 대번에 냈다. 이 소리 들으려고 내가 살았나.’ 뭔가 오리가 물 밑에서 죽을 똥 살 똥 하는 것처럼 그렇게 물 밑에서 물질을 해야 겨우 물에 뜨듯이 오늘날 우리가 그것과 똑같아요.

국가니 하나님이니 신경 쓸 여유가 없어요. 일상생활만 유지하는데 온 몸의 에너지 진을 다 뺍니다. 학생들 공부하는데 피곤하다 하지만 직장생활 하는 사람은 집에 오면 퍼져 버립니다. 너무 힘들어서요. 가정주부야 뭐 편안하지요. 처녀 때는 직장생활이 힘들지만 가정주부 하면 갑자기 살이 쪄요. 47킬로가 74킬로가 됩니다. 얼마나 편했으면. 낮에 10시부터 수다 떨고 그러니까. 보통 경력단절이라 하는데 경력단절이 아니고 그냥 놀았지요.

그처럼 성경은 오늘날 우리와 동떨어진 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동떨어진 그 이야기를 왜 성경에서 하는지를 봐야 되겠지요. 여기 주인공이 나오는데 음녀라고 하는 호세아의 부인이 주인공으로 되어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했듯이 주인공은 그냥 매개체에요. 연산자라고 했지요. 매개체로서 그냥 자기자신의 일상적인 것 밖에 모르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까지 관계를 이어주기 위해서 등장된 인물이 음녀라는 겁니다.

음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사적인 문제가 아니고 그 당시 이스라엘의 공적인 문제라는 것을 말해주는 거지요. 음녀가 뭐냐? 이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전에 어떤 남자를 사귀었는데 그 남자가 나에게 생계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제공했다. 따라서 나는 그 사람을 떠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 와서 하는 말이, “곡식과 새포도주와 기름은 네가 좋아하는 남자가 음녀 너에게 제공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너에게 제공한 것이다.” 할 때 음녀에게 그것이 안 먹히겠지요. 나에게 사랑의 대가로 다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아니다. 그게 아니기 때문에 내가 진짜 그게 아닌지 확실하게 보여줄게.”라고 하면서 8절에 나옵니다.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준 것이라고.

음녀가 좋아하는 남자 이름이 나와요. 그 이름이 ‘바알’ 바알은 하나의 개인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고 신의 이름이 바알이에요. 바알신의 성전을 만들기 위해서 이스라엘이 금가락지 은가락지 빼서 “우리에게 축복 주시옵소서. 축복 주시옵소서. 옆 나라처럼 잘살고 부강한 나라 되게 해주옵소서.”

그 부강한 나라들을 잘 살게 해준 그 신의 이름이 바알신이거든요. “그 바알신을 우리도 공히 섬기니까 저 나라처럼 잘살게 해주세요.”라고 했던 그것이 전부 다 여호와 하나님이 너에게 준 은과 금이고 곡식이라는 말이지요. 9절, 10절에 보면 “그러므로 그 시절에 내가 내 곡식을 도로 찾으며 그 시기에 내가 내 새 포도주를 도로 찾으며 또 저희 벌거벗은 몸을 가리울 내 양털과 내 삼을 빼앗으리라 이제 내가 그 수치를 그 연애하는 자의 눈 앞에 드러내리니 저를 내 손에서 건져낼 사람이 없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음녀라고 하는 호세아의 부인은 하나의 개인입니다. 개인을 연애하게 만들어서 그 연애한 그 음녀가 하는 처신이나 연애하는 남자에게 받은 그 모든 사적인 상황을 가지고 하나님께서는 뭘 이야기하느냐? 너희 북쪽 이스라엘, 물론 남쪽도 마찬가지지만, 북쪽 이스라엘이 다른 잘사는 옆 나라가 부러워서 하는 짓거리가 호세아의 바람난 부인이 하는 짓거리와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까지 이야기하게 되면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어디까지 확대되었느냐?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나라에 문제가 있다는데 까지 확장되었지요. 그런데 이방나라라고 하지 않고 8절에 보면 ‘바알’이라 했어요. 바알은 신의 이름이거든요. 신의 문제에까지 확대하는 거예요. 개인에서 국가, 국가문제가 아니고 이것은 신의 문제, 절대자 문제, 누가 참된 신이냐의 문제까지 음녀의 움직임을 통해서 내용, 의미를 팽창시키는 겁니다.

팽창시킬 때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빼앗는데요. 빼앗는 이유가, “음녀야 이제 네 남편에게 돌아와야지.” 이게 아니에요. 이게 아니고 그 음녀가 저쪽 남자에게 받았던 명품 가방부터 고급의상 등 남자가 준 것을 다 도로 빼앗아버리면 그 초라하고 별 볼일 없는 그 여인네의 가련한 그 모습, 허접한 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그걸 누구한테 보이냐 하면, 네가 연애했던 그 남자가 보는 쪽으로 그 음녀를 딱 비치는 거예요.

비치면서 그 남자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어이! 호세아 부인하고 연애질 했던 남자! 네가 준 것 이 여호와가 다 빼앗았다. 그러니까 네가 이 여자, 네가 연애했던 이 호세아부인을 다시 데려가서 옛날처럼 옷 입히고, 맛있는 것 사주고, 명품 가방 사주고 그렇게 해보지 그래.” 거기에 반응한다 할지라도 건져낼 사람이 없다고 했어요.

하나님 내가 그렇게 의도적으로 보란 듯이 수치스럽게 만들어낸 그 상황을 가리기 위해서 옛날 사귀었던 그 바알이라는 남자가, 그게 신이거든요, 바알이라는 남자가 자기가 연애했던 여자를 옛날처럼 꾸밀 수 있는 능력이 있거든 발휘해 보라는 겁니다. 없다는 거예요. 이게 오늘 내용이거든요. 형식적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 들으면 좀 이상하지요.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뭐가 이상하냐? 여러분이 생각해 보세요. 남자와 마음이 통해서 바람난 자기 아내를 억지로 데려왔다 칩시다. 그 남자가 준 것도 다 빼앗아버렸다 칩시다. 그러면 그 남자 사랑했던 자기 아내 마음이 본 남편을 사랑하겠어요? 다시 자기 남편을 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고, 말 듣고 싶어 하고 그러겠어요?

사랑이라는 것이 억압하고 압박하고 고문하면 또다시 없던 사랑이 생기는 겁니까? 오기만 더 생기지요. 방탄소년단 좋아하고 남자 아이돌 좋아해서 공부는 하나도 안하고요. 아이돌 가수에 빠져서, 청소년 때 광팬이 되어서 공연한다 하면 아버지 카드 훔쳐서 5만원 긁고 손에 분홍빛 뭐하나 들고, 수업시간 빼먹고, 거기 가서 흔들면서 노래 따라 부르면서 놀고 있을 때 아버지가 보다보다 못해서 자기 딸의 머리 홀라당 밀어버리고, 휴대폰 압수하고, 앞으로 1년 동안 외출금지 한다고 해서 그 딸이 “아버지 너무 좋아요.” 그렇게 하겠느냐는 말이지요.

턱도 없는 소리. 아버지 죽이고 싶다 하겠지요. 아무리 사람이 궁지에 몰렸다고 하더라도 여호와를 사랑하는 쪽으로는 넘어올 수 있는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는 거예요. 아무리 힘들어도, 사업이 부도났다, 가장에 우환이 있다, 애가 아프다, 자기 몸이 아프다, 어떤 경우라도 그래서 ‘여호와 믿자’ 라고 한다는 그것은 가짜여호와에요.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 음녀를 궁지에 몰아넣고 공개적으로 망신시키느냐? 사람을 궁지에 몰아넣는 이유가 뭐냐 하면, 이 바알자체라는 신이 없어요. 그것은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라고요. 하나님이 원래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은 한 분이세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이 인간세계가 엉망진창이 되고, 마귀로부터 죄가 오니까 신이 하나가 아니라 신들, 복수, 신이 여러 개가 되어버린 거예요.

출애굽기 20장 3절에 보면,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십계명 외울 때 제일 먼저 나오지요. ‘하나님을 섬기라’가 아닙니다. ‘신을 섬기라’가 아닙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는 왜 그리 신들이 많은지. 그 많은 신들이 이사야에 보면 전부 다 헛방이에요. 헛방, 헛방.

여러분, 비눗방울 안에 뭐가 들었습니까? 없어요. 그냥 막이에요. 동그란 막이 비눗방울이에요. 비눗방울 안에 뭐 들었나 싶어서 만져보면, 톡 터져버리면 아무것도 없어요. 신들이라는 것은 전부 다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허상들이에요. 허상들이 신의 이름으로 그렇게 많은 거예요. 그러면 그 허상은 도대체 어디서 양산된 신이냐?

그걸 알리기 위해서 음녀를 가지고 자기의 본성과 욕망, 자기의 뜻대로 안되도록 압박을 가해버리면 거기서 그 여자, 그 음녀가 평소에 자기욕구에 부합되는 신들을 찾아다녔다는 그것이 밝혀지는 계기가 되는데 그게 바알이에요. 그 바알을 요즘 식으로 하면 예수고, 삼위일체고, 성부하나님이고, 성령이에요. 왜? 인간들이 찾는 예수, 성령, 성모마리아, 삼위일체는 뭐냐? 이 시대에 바알과 같은 맥락이고 같은 개념입니다.

내가 잘되기 위해서 내가 믿어주는, 내가 그리워하는 신. 그래서 바알은 뭐냐? 인간의 자기그리움입니다. 인간은 왜 신을 그리워하지 않고 자기를 그리워하는지. 그 이유가 성경에 나옵니다.

창세기 3장 17절-19절에 보면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그렇게 해서 겨우겨우 먹는데 그래도 저주가 끝나지 않았어요. 그러다가 결국은 죽음으로 끝난다. 이게 저주입니다.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한마디로 말해서 “인간아, 하나님이 너를 고생시킬거야. 힘들게 살게 만들 거야.” 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울기 시작하잖아요. 태어나면서부터 고통을 직감하게 되고 고통을 연발연발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고통 중에서 인간이 찾고자 하는 신은 어떤 신이겠어요? 1번. “내가 고생하는 것은 마땅하니이다. 하나님이여, 날 고생시키니 참 잘했습니다.” 그런 신을 찾겠어요? 아니면 “이 고생은 부당합니다. 내가 뭐 잘못했다고 이렇게 인생을 힘들게 살아야 됩니까?” 이것은 2번.

어느 신을 인간이 자동적으로 찾겠어요? 2번이라는 말이지요. 힘드니까 힘들지 않는 신, 그게 바로 호세아당시의 바알이고 요즘당시의 교회에서의 예수가 되는 거예요. 그걸 또 “아부지~, 주여~, 아버지~” 이 신을 호세아로 번역하면 바알, 바알~. 부처 찾다가 예수 찾는 것, 그것 인간 달라진 것이 없어요. 노림수는 달라진 것이 없어요. ‘옳은 신 믿고 고생 면해보자. 불행 끝 행복시작. 팔자 한 번 고쳐보다.’ 그게 바알신입니다.

중보기도요? 그게 무슨 의미 있는 줄 압니까? ‘내가 기도한다고 고생하면 기도 좀 덜 하는 내 자식 좋은데 가겠지.’ 이게 중보기도 아닙니까? ‘내 자식 천당 가겠지. 구원받겠지.’ 천주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복된 여인 중에 계시는 성모마리아여. 예수를 잉태한 성모마리아는 복되도다.” 이것부터 시작해요. 그렇게 해서 성모마리아에게서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예수님에게 기도해달라는 그것이 천주교입니다.

바알종교하고 다를 바 하나도 없어요. 자, 바알종교는 뭐냐? 신이 없어요. 바알이라는 신이 없다는 말이지요. 없는데 그 이방민족이 바알신을 만든 거예요. ‘아세라’ 라고 하는 그 신의 부인까지 만들었어요. 신 만들고, 부인 만들고, 신들이 한 두 가지가 아니고 그 바알유의 신들, 바알과 같은 내용을 가진 신들을 마구마구 지역마다, 시간대마다 신들을 계속해서 생산한 겁니다.

그런 모든 신들의 공통점은 뭐냐? 그 신은 나의 괴로움을 들어줄 절대자, 전능하신 분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그 공통점을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로 묶어 버립니다. ‘그 신은 허구다. 없다.’

제가 몇 년 전에 누구와 대화를 하는데 이런 내용이 있었어요. “목사님이 복음위주로 설교한 것이 맞습니다. 맞지만 그래도 교회가 사람을 편하게 하고 사람을 기쁘게 해줘야, 그래서 일단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 다음에 복음 전해야 그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목사님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그것을 안 하고 그냥 복음 전하면 어떻게 후배목사들이 목회의 어떤 희망과 비전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나에게 대항했어요.

그래서 제가 갈라디아. 1장 10절을 이야기했어요.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을 좋게 하는 것과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이 둘 다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가 없다는 말이에요. 사람을 좋게 하든지 안 그러면 하나님을 좋게 하든지. 사람을 좋게 하려면 하나님을 좋게 하는 것을 포기하든지, 하나님을 좋게 하려면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을 포기하든지 해야 된다는 말이지요. 사도바울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이 후배목회자가 이 갈라디아서 1장이 왜 기억이 안 나고 왜 관심이 없느냐 하면, 온통 관심이 복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죄를 위해 희생하신 주님, 주님의 희생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증거하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교회가 하고 싶은 거예요, 교회가. 교회를 하고 싶어요. 교회를 하려면 누가 와야 돼요? 손님이 와야지요, 손님이!

가게 열었으면 손님도 왔다갔다 하는 그런 손님은 안돼요. 단골손님이 있어야 돼요. 손님이 와야 전문직종으로 목사가 목사답게 남들 앞에 목사답다. 교인 몇 명이고, 헌금 얼마 나온다고 해야 인간사는 것이 사는 것처럼 되거든요. 그게 호세아에서 음녀라고 하는 거예요. 표준적인 보통 평범한 삶을 영위하는 인간으로서 힘든 인생 살면서 나름 그나마 그걸 쥐려고 하는 거예요.

목사가 그 모양인데 다른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지요. 결국 그 목사는 뭐냐 하면, 모순 없는, 하나님이 잘해주면 복주는 그런 직설적이고 모순 없는, 내가 사랑하면 ……, 사랑하지도 않지요. 무슨 바알을 사랑해요? 나를 사랑하지요. 내가 그리우니까. 내가 좋으니까. 나를 사랑하니까. 내게 필요한 명품과, 좋은 옷과, 곡식이 필요해서 신에게 잘해주면 신도 나에게 잘해준다는 그 소문이 이웃나라에 파다하니까 ‘나도 그 이웃나라 신을 섬기면 이 나라도 부강 되겠지.’라고 그 국가단위로, 전체가 다 그런 분위기로 넘어간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호세아부인을 음녀라 해서 대표자로 보내서, 음녀로 하여금 연애하는 사적인 일을 통해서 국가단위로 의미를 확대시키고 그 의미를 가짜신, 허구적인 신, 있지도 않는 신의 의미에까지 확대하는 겁니다. 왜냐?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가짜와 대비해서 등장하기 때문에. 너희들이 하는 것은 고생 많은 인생에서 고생을 덜어보자는 식으로 신을 믿는 하나님이라면, 그게 우상이라면, 그게 바알이라면, 그러면 진짜 여호와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를 생각해 보았느냐, 하는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그렇게 인간들이 상식적으로 알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니에요.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아이돌 가수에 빠진 애를 아무리 윽박지르고 포박해도 아빠 엄마 사랑하지 않는다고요 아무 음녀의 모든 것을 빼앗아서 부끄럽게 만들어도 오기만 더 높아질 뿐이지 자기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이라는 이 담, ‘아, 부끄럽다. 언제 만회하지? 인생 언제 회복하지?’ 이렇게 여전히 자기 사랑이 있지, 내 사랑 포기하고, 이쪽 담을 넘어서 남편 사랑하는 것이 되지를 않듯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그것은 우상이다. 그것은 기복신앙이다.” 백날 이야기해도 결코 그렇게 해서 사업부도 나고, 가정 우환 나고, 파탄이 난다고 할지라도 주님 사랑하는 그런 능력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믿어주면 잘 되게 해주겠지.’ 주님께서 “잘 될 턱이 있나?” 잘 안 해줘요. 다시 말해서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 고생하는 세계에서는 고생을 마땅히 해야 됩니다. 왜? 그게 여호와다우니까. 그게 하나님의 조치에 합당한 거니까. 고생 덜어보겠다고 교회 나오면 안돼요. 몸 아프다고 교회 나오면 안돼요.

고생하게 되면 “잘하셨습니다.” 그래야 돼요. 내 대책? 내 해결책? 없습니다. 어떤 50대 전기공인데 식구가 있어요. 노모가 있는데 병들었지요. 형이 있는데 형이 루게릭병이라 해서 병들었어요. 그래서 그 50대 전기공이 스무 살 때부터 그 전기기술로 무려 30년 동안 루게릭 병 걸린 형 돌보고 몸 아픈 홀로 된 어머니도 모셨어요.

어머니가 현재 88세였고 형은 자기보다 좀 많으니까 50대 후반이나 60대 초반쯤 되었겠지요. 30년 섬기다가 이젠 지쳐버렸어요. 그래서 그 엄마도 죽이고, 형도 죽이고, 자기는 한강에 투신했습니다. 며칠 전 사건입니다. 30년 섬겼어요. 하다하다 도저히 감당이 안돼요. 대책이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해결책 있습니까? 없었습니다.

그 사람 교회 나온다고 형의 병 낫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 교회 나온다고 88세 된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짐 하나 덥니까? 그런 일은 없어요. 해결책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아픔과 괴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도리어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에게 너무나 잔인하게 처리하신 하나님이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제쳐두고도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에게 잔인하게 행동을 해버린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음녀를 움직여서 그 내막을 현실화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우상이라는 것을 유발하게 만들었어요. 바알이 없는 신인데 인간으로 하여금 바알신을 섬기도록 유도를 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이 원래 하나밖에 없는데 하나의 하나님이 자기의 가상적인 경쟁자들을 인간을 통해서 의도적으로 허상들을 만들도록 용납을 한 거예요.

그리고 용납된 그 우상을 통해서 진짜 있는 적, 다시 말해서 악마죠, 악마가 인간을 어떤 식으로 지배하고 있었던가를 밝혀내는 그 작업, 그 계획의 실행방안을 하나님은 호세아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한 겁니다. 이게 하나님의 작전입니다. 호세아가정에서 적어도 호세아가 선지자죠.

그 호세아의 격에 맞는 여자가 아니라 정반대편에 음녀와 혼인하게 하고, 그 음녀가 바람나게 만들어서 여자의 움직임을 따라서 현재의 사람들이 있지도 않은 신을 섬기게 되는 그 인간의 내부의 본성을 바깥으로, 국가라는 이름으로, 사회라는 이름으로, 시민사회,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의도적으로 확대시키도록 하나님께서 계획 잡은 겁니다.

있지도 않은 신, 사실은 인간 본인의 욕망인데 신으로 욕망을 투여해놓고, 그게 진짜 여호와고, 삼위일체고, 예수고, 성령이고, ‘아버지~ 하나님’이고, 그런 식으로 자기 내부가 바깥으로 나오도록 유도하신 거예요. 그 유도한 결과가 뭐냐? 너희들은 어떤 능력으로도 진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너희에게는 아예 없다.

그러면 여기서 단절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이 호세아를 따라서 누가 오시는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납니다. 호세아의 아픔을 통해서. 바람난 자기부인을 보고서 그것을 다 알면서도 허락하는 그 아픔을 호세아라는 이 말씀을 그대로 육신에 담아서 오신 분이 예수님 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뻔히 우리를 알아요. 네가 어디에 바람난 줄 알아요. 어디에 지금 정신 팔려 있는지 알아요.

우리가 어떤 신을 원하는지를 알아요. 네가 기도할 때 무슨 꿍꿍이로 기도하는지를 다 압니다. 알기 때문에 예수님 쪽에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존재, 예수님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잔인하게 버리고 쳤던 그 사건, 그 십자가, ‘아버지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스스로 희생이 되신 그 십자가 사건, 그 달리신 분이 유일한 하나님이이에요.

이 인간세상, 우상밖에 없는 인간 세상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하나님은 십자가입니다. 예수의 존재, 하나님의 존재, 아닙니다. 십자가에요. 그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나만 사랑했고, 나만 그리워했고, 나만 옳다고 우겼는지, 자기정당성만 우겼는지 우리는 알아야 돼요.

그러면 십자가 용도가 뭐냐?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 스스로 지키려고 하는 그것을 지적하지요. 따라서 십자가는 먼저 우리 죄를 지적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 죄를 지적하고, 우리의 우상은 나를 수비하고 방어하는데 급급해요. ‘더는 봉사 못합니다. 주일날 오전 한 번 나오면 되지 더는 못합니다.’ 계속해서, ‘더는 못합니다. 헌금 십일조 냈으면 되었지 더 달라고 한다면 나는 난처합니다.’

계속해서 자기사수, 자기방어. 벌거벗지 않기 위해서 갖은 애를 쓰는 거예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미 내 모습이 네 모습이다. 나는 십자가에서 벌거벗었다. 네가 보기에 수치스럽지. 나 하나님이야. 너희는 수치스럽지 않는 하나님을 찾잖아.” 내가 너에게 알려주는 하나님은 우리가 감히 감당 못할 수치를 미리 다 보여준 하나님, 그 외 다른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꽂히게 하옵소서. 나만 아는 저희들, 나밖에 모르는 저희들, 나 잘난체 하는 저희들 속에 이제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놀라운 변화가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