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
이근호 2019년 8월 25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24:6-7
(24:6)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24:7)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인간들은 자신을 무한과 상대할 수 있는 자로 자부합니다. 무한을 만지고 접촉하는 방식은 계속해서 앞으로 새로운 희망을 걸어 넣고 그것을 성취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바깥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바로 애굽적 사고방식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애굽과 이스라엘을 사이를 구분하십니다.
이 구분에 대해서 이스라엘 자신들도 과연 이 하나님의 구분에 따를 수 있기를 여호수아를 통해서 당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현재→미래 라는 식으로 세상을 이끄시는 것이 아니라 사건→사건→사건 이라는 방식으로 이끄십니다. 이것은 인간이 익히 아는 시간의식을 거부하시는 방식입니다.
인간들은 자신들의 시간의식 속에서 계속해서 무한한 세계를 닿고자 하는 희망을 담는 방식으로 구성합니다. 즉 그들에게 있어 ‘의미 있는 사건’이란 오로지 자신들의 무한함에 이르고자 하는 그 시도에서 나오는 사건일 뿐입니다. 자신들의 그러한 시도가 일거에 무너지는 사건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7절을 보세요.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었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흑암이 있고 바다가 그들 애굽 군대 위에 덮쳤습니다. 비로소 그들은 죽어가면서 그들의 희망사항, 즉 저 앞서 있는 히브리인들을 몰살하겠다는 계획은 하나님의 추가적 사건에 의해서 무산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추가적인 사건이 그 전에 있는 이스라엘과 애굽 사이의 대치관계를 해석해주는 새로운 사건이 됩니다. 뒤에 일어나는 사건이 앞의 사건을 해석해주는 겁니다. 그래서 이러한 일연의 사건의 끝에는 복음의 완성이 있습니다. 자, 복음이 완료될 때의 효과가 무엇일까요? 로마서 1:16을 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여기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즉 복음만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합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을 당할 것들입니다. 이런 복음을 빼는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 애굽적인 해석이며 이 해석은 미래에 무한함을 염두에 두고 그 무한함과 지금을 시간상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입니다.
애굽 식의 해석의 예를 들면 이러합니다. 신명기 33:19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 어느 이스라엘의 석유회사를 운영하는 사업가가 있는데 그 회사는 유전탐사 및 발굴을 하는 회사입니다.
그 회사의 회장이 우연히 신명기 33:19을 보면서, 이스라엘 앞 바다에 천연가스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걸었고 탐사에 나섰더니 과연 량의 매장량을 자랑하는 천연가스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또 그 회장이 이번에서 신명기 33:24를 보았습니다.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
그래서 이 석유회사 회장은 아셀 지파의 땅인 이스라엘 북부 지역에 집중에서 탐사를 계속 했더니만 거기서 막대한 매장량의 원유가 묻혀 있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석유을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자,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할 수 있을까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해석은 필히 인간의 시간 의식을 피해 주님이 주신 그 다음 사건으로만 해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9:33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십자가 사건으로 인하여 모든 의미는 최종 완결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받아주시는 사람은 딴 것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에 기초한 십자가 복음뿐입니다.
결코 석유가 아닙니다. 건장이나 돈도 아닙니다. 선행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이 십자가는 사건이기에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다 적용됩니다.
이 십자가 안에서 모든 것은 동시적입니다. 동시성에 대한 또 다른 예는 요한복음 4:51-53에 나옵니다. “ 내려가는 길에서 그 종들이 오다가 만나서 아이가 살았다 하거늘 그 낫기 시작한 때를 물은즉 어제 제칠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 아비가 예수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 말씀하신 그 때인 줄 알고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
또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 여인이 나옵니다. 그 여인은 과거에 5명의 남자와 혼인했고 지금은 여섯 번째 남자와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여인의 용도는 그런 과거 이력이 아니라 ‘지금’입니다. “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요 4:23)
사건 안에서 영원히 ‘지금’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사건으로서는 ‘수치’가 없는 겁니까? 그것은 약속 안에 수치를 두지 않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무엘하 12장에 보면,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찾아와서 예언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밧세바와 동침해서 낳게 된 아이가 시름시름 죽게 될 때, 다윗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하여 금식하면서 그 아이가 낫기를 원했습니다. 죄는 본인이 지었기에 하나님께서는 억울하게 태어난 아이에게 억울한 죄를 묻지 않기를 기도한 겁니다.
그런데 그 아니는 결국 죽게 됩니다. 다윗왕의 간절함을 곁에서 누구보다 잘 보았던 신하들이 왕이 큰 좌절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다윗은 담담하게 결과를 받아들입니다. 다윗이 여기서 알게 된 것은, 자기를 통해서 일어난 모든 일이 자기의 잘못에서 시작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속에 이미 함유된 일이 자신을 통해 펼쳐졌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무엘하 12:24-25에 보면, “다윗이 그 처 밧세바를 위로하고 저에게 들어가 동침하였더니 저가 아들을 낳으매 그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사 그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심을 인함이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은 아이나 솔로몬이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 ‘다윗언약의 자손’인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자신은 죄를 지었지만 그 죄를 통해서 ‘수치없는 복음’을 나타내는 용도로 자신이 사용되어 진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애굽과 다른 이스라엘의 본질입니다. 이 본질은 그 어느 시대든 동시적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날마다 주님이 주신 십자가 사건 안에 놓여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249강-여호수아 24장 6~7절(동시성) 201908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24장 6~7절입니다. 구약성경 357페이지입니다.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 내가 애굽에서 행한 일을 너희가 목도 하였으며 또 너희가 여러 날을 광야에 거하였었느니라”
우리가 성경을 해석한다고 할 때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해석할 수 있는 사태와 상황을 주께서 추가로 주시는 겁니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뜻대로 안 되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사람에게는. 그것은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어서, ‘내가 여기 있다’라는 것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있고 여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덮여 있는 겁니다.
만약에 하나님의 약속이 덮였다면 내가 있는 것은 약속 밑에 깔려서 내가 있다는 것이 별 의미 없어요. 다만 덮어진 주님의 약속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고 지금도 어떻게 현실을 유발하고 있느냐 가 중요하지 그 밑에 깔린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얘들아, 잘먹고 잘살아”라고 할 것 같으면 애굽에서 나올 필요가 없고 애굽과 이스라엘을 구분할 필요도 없습니다.
애굽 사람은 지옥 가고 이스라엘 사람은 천국 간다는 말이 맞는 이야기 맞는데 어떻게 그렇게 되고 왜 그렇게 되는지 그런 걸 모르면서 저 사람은 지옥 가고 나는 천국 간다고 한다면 이거는 말이 안 되죠. 이거는 그렇게 이야기하려면 우리에게 뭔가 덮쳐지는 게 있어야 해요. 뭔가 덮이는 게 있어야 해요. ‘아, 내가 천국 가고 내가 지옥 가는 것이 아니고 나에게 덮어진 것이 나를 천국으로 인도하고 내게 덮쳐진 것이 나를 지옥으로 인도하는구나’라고 되는 거예요.
그러면 뭘 덮쳤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주시고 그 말씀의 해석이 우리에게 덮쳐진 겁니다. 내가 해석한 것이 아니고 해석 자체도 말씀처럼 똑같이 덮쳐진 거예요. 그 해석을 위해서 오늘 본문이 나와 있습니다.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바다에 이르게 한즉 애굽 사람이 병거와 마병을 거느리고 너희 열조를 홍해까지 따르므로, 너희 열조가 나 여호와께 부르짖기로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라는 이 말씀에서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면 애굽사람과 비교시키는 식으로 해석 가능합니다. “애굽 사람은 흑암 저쪽에 있고 너희들은 흑암 이쪽에 있다”라는 겁니다. 비교해보고 대조해 보라는 겁니다. 저들과 너희와 차이가 있는지.
그 차이를 밝혀내는 것이 해석입니다. 차이를 밝혀내는 거예요. ‘아무리 봐도 저 사람 사는 방식이 나와 똑같고 사고방식이 똑같고 출세 좋아하고 성공하는 거 좋아하고 몸 건강한 거 좋아하고 뭐 다를 게 없네. 똑같네’라고 하면 이제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해석이 안 되는 거예요. 뭔가 차이가 있어야 해요. 그 사람에게 덮쳐진 것과 나에게 덮쳐진 것이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구원한 자이기 때문에 색다른 것이 덮치게 한 겁니다.
그 색다른 것이 뭐냐는 겁니다. 색다른 게.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고 하시겠지요. 이제부터 그 색다른 것을 제가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뭐가 색다르냐 하면 애굽 사람들은 시간 적으로 비동시적이에요. 어려운 용어 하나 나왔습니다. 비동시적. 이스라엘은 동시적입니다. 동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이 흘러도 똑같은 상태가 동시적입니다. 시간이 흘러도 똑같은 상황이 계속 유지되는 것을 동시적이라고 하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도. 심지어 과거에도 마찬가지였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앞으로도 마찬가지로 똑같을 때 동시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럼 동시적이라는 말을 했을 때 그냥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고 쉽게 예를 들어야 하겠죠. 삼촌과 나와의 사이에 3촌 사이입니다. 그러면 2년 전에는 뭐였는가 하면 삼촌 조카죠. 그러면 오늘은 뭐냐 하면 삼촌 조카죠. 그럼 내일 되어도 삼촌 조카이지요.
이거는 시간과 관계없이 똑같아요. 그 관계가. 이걸 동시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참 쉽지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때 이런 관계로 구원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로마서 1장 16절을 한번 보겠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라고 했어요. 여기에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여러분들은 후딱 지나가고 그러시면 안 됩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인간은 이 땅에 살면서 얼마나 저지레와 실수와 자기 보기에도 얼마나 낯뜨거운 짓을 많이 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미안해하지 말란 말이죠. 그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지 못하겠다는 그런 소리 하지 말란 말입니다. 얼굴을 들라고 복음을 준거예요.
복음을 준 것은 하나님 앞에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기위해서 준겁니다. “앞으로 잘할게요. 최선을 다할게요”라는 그런 장담도 하지 마세요. 하나님을 우리를 모릅니까? 다 아는데. 환경 바뀌면 최선이고 뭐고 다 없어져요.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죄짓고 난 뒤에 제일 먼저 느낀 것이 뭐냐 하면 부끄러움입니다. “하나님 부끄럽습니다”라는 그런 거죠.
로마서 9장 33절에 보면 “보라 내가 부딪치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었나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자손이고 이미 아담이라면 당연히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수밖에 없어요. 어설프기 짝이 없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께서 시온에 복음을 줘버리면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게 복음이에요. 기쁜 소식이에요.
조기축구회 하는데 우리 팀이 상대 팀에 10대 0으로 졌어도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그렇게 져도 천국 가니까. 10대 0으로 져도 천국 가요. 요즘 참 은행 대출받아서 주식투자 해서 목돈 마련했다는 사람들 꼴 좋게 되었어요. 년 초에 2500하다가 이제 1900까지 떨어졌거든요. 존 에프 케네디가 이런 말을 했답니다. “나를 위해서 조국이 무엇을 해줄지를 기대하지 말고 조국을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할까를 생각하라”라고. 조국을 위해서.
주식을 투자하는 것이 뭐냐 하면 내가 주식 해서 떼돈 벌어야 남들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성이 아니고 계속해서 추구해야 하고 미흡함을 메워나가야 해요. 오늘은 뭘 좀 할까, 떡볶이 할까, 뭘 할까, 계속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이렇게 함으로 남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인생을 살아보자는 겁니다. 그러지 말자는 거죠. 그건 비 동시성이에요. 이건 애굽의 주특기예요.
지금 이스라엘은 뭐와 비교해야 하느냐 하면 애굽과 비교해야 해요. 애굽. 여호수아의 설교를 다시 보겠습니다. 거기 7절 끝에 보면 “내가 너희와 애굽 사람 사이에 흑암을 두고 바다를 이끌어 그들을 덮었나니”라고 했어요. 죽었단 말이죠. 쉽게 말해서 그들 위에 짠물이 덮치는데 그들이 안 죽을 수가 있어요. 자기들이 물고기도 아니고. 그러니까 이 자체가 이 애굽 사람들, 이 군인들이 평소에 부끄럽지 않은 삶, 인간다움에 충실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겠습니까? 나름대로 가정교육 받으면서.
그런데 그것이 인간들 보기에 멋있고 대단해 보이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수치스러운 대상이 되어 버린 겁니다. 그것과 비교하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그것과 비교하라고. 그들은 아무리 잘 먹고 잘살아도 바닷속에서는 물고기만도 못해요. 바닷속에서는. 하나님의 심판 속에서는. 그게 뭐냐 하면 약속의 덮침입니다.
해석할 때 하나님의 약속으로 덮쳐야 해요. 약속으로 덮쳐야 약속 밑에서 내가 재산이 얼마이고 한 달 수입이 얼마인 지로는 우리가 부끄러움을 이길 수가 없어요. 얼마나 벌어야 우리가 덜 부끄러움을 당합니까? 뭐 몸이 아프니 건강하니 하는 그런 것 가지고 으스대고 할 필요 없어요. 강의하면서 나이 칠십 먹은 노인이 거기서 자기 권력 자랑하고 힘자랑하면서 “내가 이 정도다. 이 정도로 강건하다”라고 하다가 경찰에 쫓기다가 굶어 죽은 사람 있잖아요. 구원파 유병헌.
성경해석은 내가 어떻게 했다가 아니라 뭐가 덮쳤느냐입니다. 오늘 여호수아 본문에 보면 광야가 덮치는 거예요. 광야. 바다가 덮치죠. 광야가 덮치죠. “네가 옛날 애굽 같으면 벌벌 떨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라고 하시는 거예요. 왜 벌벌 떨면서 어쩔 줄 모르는 상황 속에 집어넣느냐 하면 그런 상황 속에서도 부끄러워하거나 너 자신을 챙겨서 뭔가 멋있게 되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왜냐 하면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너를 건져냈기 때문에.
너 좋으라고? 아니. 너 구원 되라고? 아니.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드러나게 하기위해서. 네가 아니고 약속이 빛이 나기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부끄러움 없는 이 복음이 빛나게 하기위해서 그렇게 한 거예요. 그렇게 성경해석을 해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 같은 성경을 보면서도 희한하게 성경해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떤 예를 하나 들겠어요.
예를 들으시면서 이 해석이 맞는지 여러분 한번 들어보세요. 신명기 33장 19절~24절을 해석한 사람이 있는데 루스킨이라는 유대인이에요. 이 사람이 2003년도에 기보토 올람이라는 석유회사를 세웠는데 그 사람이 석유탐사 및 개발하는 회사를 이스라엘에 세웠는데 우연히 성경을 보다가 신명기 33장 19절을 보게 되었다는 겁니다.
19절에 뭐라고 되어있느냐 하면 “그들이 열국 백성을 불러 산에 이르게 하고 거기서 의로운 제사를 드릴 것이며 바다의 풍부한 것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하리로다”라고 되어 있어요. 바다의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한다는 말, 그것도 풍부한 모래라는 말에 힌트를 얻어서 지중해 이스라엘 앞바다에서 석유가 대박 났습니다. 천연가스.
“거봐, 성경 말씀 맞잖아. 바다의 모래에 감추인 보배를 흡수했잖아”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24절도 봤어요. “아셀에 대하여는 일렀으되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로다”라고 되어있어요. 여기서 기름이라 하는 것은 석유를 말하고 그 발이 기름에 잠길 것인데 아셀이 어디냐 하면 이스라엘 북쪽 지방이에요. 아셀 지파. 거기에서 또 대박이 터졌습니다. 이번에 석유가 나왔어요.
주식투자 할 것 없어요. 성경 탐구하게 되면 돈벌이가 여기서 막 생기네요. 자, 강의 시간은 아니지만 제가 일방적으로 그냥 물어봅니다. 속으로 답변해 보세요. 이 해석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사실 제가 답변하는 것도 우스워요. 제가 실컷 답변 다 했거든요. 십자가가 빠진 거예요. 십자가가 빠지면 수치스러워요. 하나님께서 안 받아 줍니다.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나는 너희에게 예수님 죽인 것과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하노라”라고 했어요. 복음으로만 수치를 당하지 않아요. 석유 해서 부자 되었다고 주께서 “아이고, 대단하구나”라고 영접해주시지 않습니다. 인간은 시간 의식이 있어서 자꾸 과거보다 더 나은 미래를 추구해요. 그래서 항상 미흡함이 있어요. 그러나 동시성은 시간의 연속이 아니고 사건의 연속이에요.
주께서 계속 주시는 사건이 어디로 인도하느냐 하면 십자가로 인도하는 겁니다. 주님의 십자가로. 네가 뭔가 대단한 인간으로 너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의 해석 자체가 잘못된 해석이라는 겁니다.
그러면 또 애굽적인 시간성과 사건성. 사건은 나열이 아니고 사건은 동시성이에요. 한번 사건이 일어나면 과거 현재 미래가 동일한 사건으로 지배되는 겁니다. 시간은 과거는 잊어버리고 과거는 지나갔고 현재 앞으로 잘하면 된다는 것은 시간의 양상이에요. 되도록 어려운 용어를 안 쓰려고 합니다. 그 예를 들겠습니다. 요한복음 4장 51~52절에 보면 왕의 신하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신하의 아들이 병이 들었어요. 그래서 예수님에게 부탁하기를 와서 좀 고쳐달라고 했어요. 와서 고쳐달라고.
그러면 그 이야기 할 때가 과거였고 오셔서 고쳐주시면 현재가 되는 그런 순서가 되지요. 그럴 때 예수님께서 “갈 필요 없다. 너의 아들이 살았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도무지 믿지 아니했는데 뭐라고 했느냐 하면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와서 고쳐주세요”라고 할 때, ‘죽기 전에’라는 ‘전에’는 시간이죠. 그런데 주께서 “네 아들이 살았다”라고 예수님은 동시성을 내뱉었는데 왕의 신하는 시간성을 말하는 거예요. “주께서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하면 미래에 이렇게 될 거다”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 못 모시고 가서 물었죠. 그리고 아이가 살았다는 것을 듣고 낫기 시작한 때를 물었죠. 52절에 “어제 제칠 시에 열기가 떨어졌나이다 하는지라”라고 되어있어요. 그때가 언제냐 하면 예수님 말씀하신 바로 그때예요. 2000년 전에 십자가 이야기했어도 동시성 속에서는 그것이 우리 해석으로 덮쳐버리면, 십자가가 덮쳐버리면, 두꺼운 십자가 이불을 덮어버리면 이십 년 전과 후의 어떠한 부끄러운 짓도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겁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예수 믿었다. 이제 잘해보자. 착하게 살아야지. 실수하면 안 돼’가 아니라니까요. 이건 애굽 적이고 애굽 식이에요. 또 예를 들면 요한복음 4장인데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찾아왔을 때 예수님께서 “네 남편을 데려와라”라고 하셨습니다. 그 여자의 남편이 다섯 명이고 지금 물갈이해서 여섯 번째 거든요. 여자가 매력적인가 봅니다.
그렇다면 이게 뭐냐 하면 과거와 과거가 아무리 있고 현재가 있더라도 이 자체로써 그 여자는 자기의 욕망을 만족시킬 수 없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예수님 만나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바로 이때란 말이죠. 성령과 진리로 예배드릴 때가 바로 이때란 말이죠. 이때. 갑자기 내 몸의 중심으로 내가 잘 되려는 그런 시간성은 날아가 버리고 동시성이 다시 말해 주님의 사건 성이 덮쳐버린 거예요. 그 여자에게.
그러니까 그 여자는 ‘신 봤다’라는 식으로 예수님 만나고 물동이 버려두고 동네로 가서 예수님을 증거 합니다. 더이상 내 인생에 대해서 내 미래에 대해서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수치를 당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면 악마는 뭘 노리겠습니까? 매일같이 우리에게 찾아와서 윤리 도덕으로 쑤시겠죠. ‘똑바로 해, 인간아. 이래가지고 하나님께 복을 받겠다고? 하는 짓거리 하고는’이라고 맨날 내가 나의 원수예요.
맨날 내가 나에게 지적질해요. ‘이게 예수 믿는 사람 다운가?’라고. 과거는 봐줄테니 앞으로 잘하라는 시간성을 계속 남겨두는 거예요. 어제보다 나은 내일을 기대하며. 이거 많이 듣던 소리 아니에요? 성경 보면서 하나님이 지정한 장소에서 발이 기름이 잠긴다는 말이 멋진 해석이라 생각하며 뚫어 보니까 석유가 터졌고 그래서 주의 말씀이 살아있다는 식으로 주를 증거 하고 말씀을 증거 한다면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십자가 복음이 빠진 거예요.
그러면 십자가 복음은 구약을 통해서 어떻게 추가되는가? 바로 사무엘하 12장 24절에 나오는데 이 이야기하고 마치겠습니다. 12장 이야기가 뭐냐 하면 바로 밧세바와 다윗이 간음한 사건이죠.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건이 덮쳤다는 말은 그 자체가 말씀의 해석이라고 했죠. 나에게 어떤 사건이 터지는 것은 그 자체가 내가 미처 모르는 말씀을 제대로 해석하라고 주신 덧붙여진 또 하나의 사건이에요.
사건의 연속이니까. 내가 망하고 내가 우수하고 하는 그건 시시한 이야기예요. ‘내가’를 빼시고 주께서 무슨 해석을 준비했느냐를 생각하면 되지 내가 우사당한 그런 거 생각하시면 안 된다니까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데 주께서 또 내가 모르는 말씀을 더 깊이 해석해서 과연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한 거예요.
말을 줄여서 이야기하겠습니다. 밧세바와 다윗이 간음을 했는데 마침 임신이 되었어요. 마침. 이건 다윗의 솜씨도 아니고 밧세바의 솜씨도 아니고 그냥 사건이에요. 그래서 아기를 낳았단 말이죠. 그런데 그 아기가 죽지는 않고 시름시름 죽어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옛날 자기 방식으로 생각한 거예요. ‘아이고, 내가 죽어야 하는데 나 때문에 죄도 없는 이 아이가 죽는구나. 주여, 차라리 나를 죽이지 왜 아이를 죽이십니까’라고 열심히 기도합니다. 살려달라고.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십니까? 아이를 살려주지 않고 죽여버리죠. 죽고 난 뒤에 후회하고 가슴을 칠 거라고 그 시대 현장에 있던 신하들이 예상했어요. ‘아이고 세상에 그 아까운 아들을 위해서 금식까지 하고 기도했는데 아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죽었으니 얼마나 상심을 하겠느냐’라고 생각을 했었는데 다윗은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온 겁니다.
죽었다는 말에 “그렇구나”라고 담담해요. “가슴 아프지 않습니까?”라고 신하가 물으니까 “내가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하겠느냐”라고 남의 이야기 하듯이 말하더란 말이죠. 그리고 난 뒤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사무엘하 12장 25절입니다. “다윗이 그의 아내 밧세바를 위로하고 그에게 들어가 그와 동침하였더니”,이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가 아들을 낳으매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사랑하사 선지자 나단을 보내서 이름을 여디디야라 하시니 이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 여디디야라는 이름이 뭐냐 하면 여호와께 사랑을 입었다는 거예요.
누가 사랑을 입었어요? 간음한 다윗이 사랑을 입었고 간음 당한 밧세바가 사랑을 입었어요. 자 이거는 뭐냐 하면 내 죽은 자식도 내 자식이 아니고 이 솔로몬도 다윗 내 자식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그 덮쳐진 약속, 다윗 약속이 자생적으로 스스로 하나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새 생명을 만드는 작업에 멈춤이 없다는 것을 다윗은 해석자로 거기에 참여한 거예요.
내가 내 구원이 아니라 이 내 몸은 주의 몸으로 주의 관리의 몸으로 이미 넘어간 상태라면 내 구원이 아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구원이 내 몸을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고 모든 사건이 수치가 없는, 저따위 몸도 십자가 피 앞에서는 일체 거기에 대해서 내가 죄를 묻지 않는 그러한 모델로써 우리를 채택한 거예요. 뭐 많이 봐주는 것처럼 제가 이야기하는데 이건 봐주고 말고 할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건 제 이야기 아닙니다.
다윗이 사랑을 입었다니까요. 다윗이. 죽은 우리아는 억울해도 할 수 없죠. 살인자가 사랑을 입었다니까요. 그게 준비된 복음이에요. 수치를 당하지 않는 복음이에요. 다윗 때나 지금이나 동시성이에요. 똑같아요. 똑같은 언약의 똑같은 효과를 받는 겁니다. 저는 이걸 공유라고 하고 싶어요. 공유. 공유라는 것이 뭐 유튜브에 떠다니는 동영상이나 음성을 복사해서 공유하잖아요. 공유. 나만 갖지 말고 너도 같이 갖자는 공유.
예수님의 그 다윗의 경우를 우리는 공유하도록 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같이 성도이기 때문에 같이 공유하도록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 공유가 뭐냐? 공유란 뜻은 어떤 동영상을 우리가 복사했다면 이건 시간성이 없어요. 똑같은 동영상이니까. 십자가라는 동영상이 우리 안에서 작용하니까.
사람이 아무리 이쁘고 건강해도 우리가 세월이라는 변수를 빼먹으면 안 돼요. 아무리 착실하고 성실하고 정신 바짝 차리자 아무리 해도 넉넉하게 잡아 나이 90 넘으면 본의 아니게 운전하다가 사람 죽일 수 있어요. “나는 운전할 때 실수 전혀 없다”라고 하면 부인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친구들은 산에 가서 자는데 이 사람은 아직도 방에서 잔다고 저지레 한다고 핀잔 듣겠죠.
인간은 아무리 정신 차려도 뭐는 못 이깁니까? 시간을, 세월을 못 이깁니다. 그래서 주께서 준비한 것은 동시성입니다. “네가 90이냐? 네가 송해냐? 네가 80이냐? 70이냐? 내가 그거 상관 안 할게” 지금. 지금 이 순간, 왜냐 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지금 이 순간 네가 수치 함이 없는, 주님의 복음 앞에 수치 함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여디디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여호수아가 과거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당시 현재 이야기를 했듯이 날마다 말씀이 여호수아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이야기고 십자가가 지금 나의 이야기인 것을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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