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50:15-21 / 요셉의 용서

정인순 2019. 7. 17. 2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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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용서



이근호
2019년 7월 17일         



본문 말씀: 창세기 50:15-21

(50:15)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아비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50: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가로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하여 이르시기를

(50: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다 하라 하셨나니 당신의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의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50:18) 그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가로되 우리는 당신의 종이니이다

(50: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50:21)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아버지 야곱이 죽고 난 뒤에 자식들만 남아 있는 상황입니다. 이미 형들에게 당한 아픔을 품고 있는 요셉으로부터 무슨 보복이 주어질지 있습니다. 형들 입장에서 자신들이 요셉에게 당해도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아버지 야곱에 생전에 당부한 것이 무효로 돌아갈 수가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있을 겁니다. 그 복이 자기 대에 와서 무산되는 것을 요셉의 형들은 원치 않습니다. 과연 복을 받은 당사자가 사라져도 그 후대에서 그 복이 유효할 수 있을까요? 형들은 요셉에게 우르르 몰려와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버지 야곱이 ‘요셉아 형들을 용서하라’고 하신 바를 잊지 말아야 달라고 합니다.

과연 요셉의 형들이 단순히 살아남기 위해 요셉에게 호소를 하는 것일까요? 그리고 요셉은 자기 위신을 유지하는 차원에서 형들을 용서하겠다는 겁니까? 아닙니다. 요셉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대신하겠습니까!” 즉 요셉은 단순히 돌아가신 아버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형들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형이나 자신들이 다같이 ‘하나님의 용서하심의 혜택’ 안에 놓여 있음을 인정합니다. 즉 누가 누구를 용서할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개인적인 원한을 품을 여지가 하나님께서 아버지에게 언약한 내용에는 들어있지 않다는 겁니다. 개인의 가치를 지키고 유지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대드는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우선 요셉의 형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요셉에게 죄를 지었습니까? 창세기 37:23-24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적극적으로 죽이고 합니다.

형들 세계에서는 요셉의 ‘버려져야 할 패’입니다. 그들이 왜 동생에게 그토록 몹쓸 짓을 했느냐고 다그치면 아니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격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야곱은 유난히 요셉만을 사랑해서 요셉에게만 고유한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형들은 그 사랑의 채색옷을 상징적으로 여겨서 분노하는 겁니다. 어느 한쪽으로 편향된 사랑은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하여금 분노를 자아내게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느 누구나 자신이 최고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묻지도 따지지 않고 각자의 본인에게 본인만큼은 제일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당연해 보이는 이런 보편적 성향이 하나님 기준으로 볼 때에 그것이 죄가 될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사람보다 먼저 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자기를 지키기 위해 사수하는 삶의 기준보다 먼저 하나님의 기준이 있었던 겁니다. 야곱이 일방적으로 한 아들에게만 사랑을 하므로서 다른 이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 기준이 아니라 자기 기준을 폭로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된 겁니다.

마치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과 아벨의 관계와 같습니다. 인간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고 여기기에 자기에 대해서는 철저와 완벽을 기하려고 합니다. 실수를 줄이면서 하나님 보시기에게도 인정받을 존재가 되고 싶었던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점이 실수이요 죄이었던 겁니다.

인간은 자신을 당연히 선한 존재로 간주하기에 선의 중심노릇을 하게 됩니다. 자신의 의견이나 자신의 행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선하지 않는 경우는 당연히 없다고 여깁니다. 일단 나는 무조건 선하고 그 다음에는 선한 내가 선하지 않는 것과 선한 것을 구분할 권한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성도는 바로 이런 선악적 상황을 벗어나 하나님의 기준이 기다리는 지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겁니다. 물론 모든 인간들은 죽게 되면, 자기 위주의 삶은 이유 물문을 막론하고 지옥에 빠져야 할 이유임을 그때 가서 알게 되겠지만 이 사실을 미리 알게 된 자는 오직 성도들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을 백성들에게는, 평소의 자신들의 생각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려준 경우를 미리 당하게 하십니다. 마치 형들로부터 피해입은 요셉을 형들 앞에 내세워놓으신 경우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음과 같은 고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앞에서 제가 하나님에게 죄인인 것이 참으로 마땅하지요. 그렇지요?” 요셉처럼 예수님께서도 언약 안 들어올 자들에게는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십자가 죽으심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인간들이 매일 자기에게 충실하고 자기에 대한 철저한 관리 덕에 질좋은 존재로 변모되어 하나님 나라에 가려고 하는 그 일들로 인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겁니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좋다는 것은 모조리 긁어서 자기 완벽에 보탬 되게 하는 재료로 이용합니다. 예수님의 피도 믿어주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정하다고 고개 끄덕입니다. 그리고 난 뒤에, “나는 복음마저 수용하므로서 보다 완벽해졌다”고 자부합니다. 이게 바로 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보내셔서, 악을 선으로 바꾸이고자 합니다. 즉 인간들이 여기는 그 선이 실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그 선(=악)에 의해 ‘버릴 패’로 여긴 그 분을 다시 버린 형들에게 세워두신 겁니다. 그리고 요셉은 말합니다. 이런 구원의 계획은 결코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나왔다고 말입니다.

좋은 것을 자기에게 장착하려는 바로 그 자체가 악입니다. 인간은 다른 기준으로 바뀌어져야 합니다. 그 일은 인간이 해내지 못하고 성령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7-28) 

십자가를 성령님을 통해서 알게 되면, 죄인인 입장에서 그 어떤 삶의 환경도 과분한 축복임을 알고 감사로 모든 것을 수용하고 감당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당연히 잘났다고 여기는 자아가 당연히 죄인인 것을 알게 하신 주님께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