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순 2019. 7. 7. 13:39



거지와 부자 190707


음성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랜만에 두 사람 오셨는데 오랜만에 왔기 때문에 그동안 못한 거 다시 이야기해야 되겠지요. 어디서부터 다시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난 시간 것 이야기해봅시다. 지난 시간에 나사로가 죽었는데 다시 살아났습니다. 사람들의 관심사는 뭐냐 하면 나사로가 죽었는데 살아났다는 거예요. 사람들의 관심사가, 그리고 마르다와 마리아의 관심사도 우리 오빠가 어떻게 죽었는데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에 둔 거예요.


예수님은 화가 났지요. 화가 나서 우신 거예요. 왜 관심사가 너희 오빠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그런 거에 관심 두고 우리 집안 잘 되는 데, 그런 데에 왜 자꾸 관심을 두느냐? 예수님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도대체 신경 없지? 너 관심 없지? 그치? 예수님, 살려주신 분은 관심 없고 살아난 오빠한테는 “오빠!” 하고 달려들고.


그 정도로 우리는 우리밖에 몰라요. 우리밖에. 성경을 아무리 봐도 관심이 나밖에 몰라요. 예수님한테 관심을 가져야 되는데 예수님보다 내가 더 중요해서 그래요.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나사로로 하여금, 일부러 아픈데 안 갔어요. 안 가고 난 뒤에 나중에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안 갔어요. 왜냐 하면 죽었을 때 “스톱! 내가 살려줄게.” 그래야 되는데 그 때도 안 갔어요. 죽은 지 나흘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충분히 썩을 대로 썩었다. 이제는 썩어서 냄새난다. 이제는 천하 누가 와도 썩은 시체를 도로 살려낼 순 없다. 하고 전부 다 모든 사람이 낙담할 때 “이제는 오빠는 영원히 갔다. 살려낼 수 없다.” 모든 사람이 자기들의 생각과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지혜에 의해서 모든 것이 끝났을 때 주님이 하는 일은 인간의 지혜와 지식 그 너머에서 일을 해버려요.


“자. 니가 이것까지 아나? 손 떼지. 니가 이제 주저앉았지. 그래. 니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다 믿었어? 그게 전부야? 그게 다야? 그렇다면 내가 일할게.” 니 믿음조차도 니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야. 니가 나를 그동안 사랑했다는 사랑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이 중요하지 니 사랑 니 믿음 니 소망도 안 중요하다는 것을 주님께서는 충분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나사로를 죽은 지 나흘 되었는데 다시 살려냈습니다.


제가 분명히 예수님이 중요하다고 여러분한테 이렇게 이야기를 했지요?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이 성경 알고 또 혹시 여러분 아는 사람이 죽었거든 주님 와서 살려주면 좋겠다고 하지 마세요. 죽이는 것도 주의 뜻이고 살리는 것도 주의 마음대로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이고 살리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 본문에 들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집을 나간 자식, 이것도 했구나. 이건 뭐냐 하면 지난번에 한 건데 집을 나갔는데, 아들이 둘 있었어요. 여러 번 빠져가지고 내가 헷갈린다. 아들이 둘이 있었는데 하나는 아버지 앞에 지키는 효자 같고 한 쪽은 아버지를 빨리 벗어나서 도망치고 싶었던 거예요. 그런데 누가 봐도 이건 아버지 재산 가지고 도망치고 그걸 다 날려버린 아들이 나쁜 아들이고 아버지 곁을 지키는 아들이 착한 아들로 보였는데 하나님께서는 도리어 뭐하고 하셨는가 하면 돈 가지고 도망치고 다 날려버린 탕자가 바로 하나님 예수 믿는 사람답다는 거에요.


왜? 자기가, 집 나간 아들은 자기가 죄인인 걸 알고 하나님의 집이 얼마나 좋은 걸 아는 반면에 이 큰 아들은 “내가 이렇게 아버지께 효도했으니까 내가 잘 났지.” 라고 그걸 유지하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고 지옥 가고 탕자 같은 아들은 천국 간다 이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뭐겠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 앞에서 “구원 받을 수 없는 인간입니다.” 하는 것을 자인하는 거예요. 그래서 탕자 되어서 다 떨어 먹고 오니까 거지 꼴로 오니까 아버지는 거지고 뭐고 냄새 나고 그런 건 생각하지 않고 “아이고. 내 아들 왔나!” 이렇게 반기는 좋아하는 그 모습, 그 그림입니다. 그게 탕자 이야기예요.


그 다음에 부자와 나사로.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뭐냐 하면 어떤 두 사람이 근처 이웃에 살고 있었어요. 이웃에 살고 있는데 한 사람은 뭐냐 하면 한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부자예요. 세상 사람들은 누굴 부러워했겠는가? 부자를 부러워했어요. 뭐라고 부러워했겠어요? “아이고. 하나님께 복도 우예 그렇게 많이 받았지? 나도 저 부자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부자처럼 사니까 모자라는 게 없고 넉넉하게 살고 부자도 거기에 덩달아 으스대면서 살았어요. “나 부자다. 나 부자다.” 하면서 굉장히 자신만만하게 으스대면서 살았거든요.


그런데 그건 축구에 전반전 있고 후반전 있지요? 전반전 이야기예요. 둘 다 전반전하고 쉬고 15분 후에 하는데 전반전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전반전은 부자가 백이라면 가난한 사람은 빵점이에요. 그런데 후반전에서 부자는 빵점이고 후반전에서 거지 나사로는 만점이에요. 만점.


죽고, 둘 다 죽었어요. 둘 다 죽고 난 뒤에 부자는 어디 갔느냐 하면 부자라는 이유 때문에 지옥에 갔고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다는 이유 때문에 천국에 간 거예요. 왜냐하면 가난한 사람은 이 세상에 의지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늘나라 외에는 믿을 만한 게 좋아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나사로라는 이름이 하늘나라만 의지한다는 이름의 나사로예요. 하늘나라만 찾는 거예요.


근데 부자는 돈이 많아서 떠나기 싫어. 세상이 너무 좋아. 세상이 너무 좋고 죽으면 아까워. 돈 놔두고 죽으려면 너무 아까워 죽겠어. 그래서 억지로 끌려서 지옥 온 거예요. 그런데 가난한 사람은, 거지 나사로는 천국 가는 게 그렇게 좋아요. “이제 내 있을 곳에 왔구나.” 하고 “반갑다. 천국아. 기다렸다.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이구나.” 하고 거지는 소망을 가지고 있고 부자는 눈에 보이는 게 소망이 다고. 죽는 순간 소망도 끝났어요.


여러분들은 어떤 소망이 있어요? 학교에서 여러분보고 “너 커서 뭐 될래?” 선생님이 물으면 뭐라고 이야기해요? 커서 뭐 될래? 미스코리아? 미스코리아는 돈이 있어야 돼. 너 커서 뭐 될래? 축구 선수 될래? 방탄 소년단 될래? 연예인 될래? 뭐 될래? 축구 선수? 손흥민처럼 그렇게? 손흥민 죽는다. 손흥민이 되든 뭐가 되든, “세상에서 커서 뭐 될래?” “커서 천국 갈래.” 이렇게 되어야지. 손흥민보다 천국이 더 좋다.


여러분들이 세상에서는 여러분들을 세상사람 만들어요. “세상에서 뭐 될래?” 그 질문 자체가 잘못 되었지요. 세상에서는 뭐 되는 것도 없어요. 뭐 되더라도 다 무효, 다 끝나는 거예요. 세상에서는 뭐 되는 게 없어요. 세상은 죽기 위한 연습하는 곳이 세상이에요.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비교한 것은 사람이 딱 두 종류가 되는 거예요. 두 종류. 축구 선수냐 아니냐의 두 종류가 아니에요. 선생님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남자냐 여자냐가 아니고 천국 갈 사람이냐 지옥 갈 사람이냐,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두 종류 중에 어느 거 하고 싶어요? 천국 갈 사람 되고 싶어요? 지옥 가는 사람 되고 싶어요? 천국. 아멘입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그래서 이 두 사람, 부자와 나사로는 인생을 처음 할 때는 그럴싸해보였어요. 대단하다. 참 부럽다. 그럴싸해보였는데 나중에 인생을 다 마치고 난 뒤에까지 이어져보니까 나중에 하나는 지옥이고 하나는 천국입니다. 이 말은 거지는 비록 거지이지만 천국에서 당겨주는 사람이에요. 영입한다고 하지요. 천국에서 계속해서 잡아당겨주는 사람이고, 이 부자는 지옥에서 계속 쫙쫙 “넌 지옥 와.” 하고 지옥에서 당겨주는 사람이에요.


지금 여러분들은 어디서 여러분들을 당기고 있습니까? 천국에서 당깁니까? 천국에서 당기면 여러분은 하나님 말씀이 좋아져야 돼요. 지옥에서 당겨져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하나님 말씀을 싫어하는 사람입니다. 싫어하게 되어있어요.


바라기는 말씀에 의해서 천국의 말씀이 여러분들을 계속 끌어당기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에 많은 것, 좋은 것 있지만 하나님 말씀이 딴 것보다 더 좋다는 것을 깨닫는 어린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