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의 죽음
이근호 2019년 7월 3일
본문 말씀: 창세기 49:29-33
(49: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49: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49:31)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49: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죽음’이란 인간에게 마땅한 하나님의 조치입니다. 전혀 이상할 게 없습니다. 죽음을 기피하는 인간의 본성이 수상합니다. 벌써 인간들이 현실과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죽음은 인간이 싸워야 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어야 할 숙명같은 겁니다. 그 어느 인간도 예외없이 다 죽습니다.
이 필연성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 죽음 말고 또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일방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인간이 나서서 저지하거나 변경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이 언약 안에 담겨 있습니다. 언약이 죽음을 앞장 세워 이 세상에 등장하는 것이 이 숙명성이 적절한 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자기의 죽음을 ‘조상에게로 돌아간다’고 말합니다. 곧 ‘조상의 그룹에 합류한다’는 겁니다. 그 징후성이 약속의 땅에 남겨져 있다고 말합니다. 그곳이 곧 막벨라 굴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유해를 그 막벨라굴에 묻어달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곧 야곱의 모든 일대기가 하나의 정방향을 갖고 일관되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즉 야곱의 일생은 방향성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방향성을 지니고 삽니까? 야곱의 죽음은 이 세속에서 말하는 일반적인 죽음이 다가 아닙니다. 야곱의 죽음은 서로 다른 두 가지 성질의 죽음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죽음은 흙의 본성으로 환원되는 겁니다. 흙이 되기 위해 애초부터 흙으로 태어난 겁니다.
따라서 항상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발악하거나 버틴다고 해서 이 하나님의 조치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야곱에게는 또 다른 죽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언약 속으로 들어가기 맞이해야 될 죽음’입니다. 이 죽음은 언약이 이 세속에서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야곱이 막벨라 굴에 최종적으로 안장되기를 고집하는 이유는, 막벨라 굴이 하늘의 초월성을 지상에 새기는 흔적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헷사람으로부터 막벨라 굴을 값을 주고 산 것은, 자신이 나중에 매장되기 위함이 아닙니다. 아내 사라의 죽음 때문입니다. 즉 ‘죽음 사라의 공간’이 곧 막벨라 굴입니다.
아내 사라가 표현해야 하는 언약의 요소는, 육에 속한 사람은 일체 하나님의 언약의 세계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라는 ‘태가 죽은 여인’입니다. 임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곧 육 속에서, 육으로 표현할 수 있는 언약의 본질을 이 여인은 ‘태의 죽음’으로 나타낸 겁니다.
만약에 없던 자식이 새로 등장한다면 이는 죽음밖에 없이 이 세상에 비로소 생명이 생겨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이러한 언약이 지닌 생명성을 지키기 위한 공간이 바로 막벨라 굴입니다. 즉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장소가 생겨나게 되었다는 겁니다. 사라의 죽음은 곧 언약의 영원함을 뜻합니다.
바로 여기에 합류하겠다는 것은 이미 야곱의 몸이 언약 성취를 향하여 언약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막벨라굴이라는 과녁을 향하여 야곱은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야곱은 끝까지 자식들에게 유언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언약완성의 세계로 움직이는 것이 과연 야곱의 능력일까요?
아닙니다. 이미 과녁에 꽂혀 있는 그 언약완성의 화살이 과녁에서 뽑혀 야곱의 본질에 이미 날아와서 꽂힌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세속 안에 살면서도 하늘의 초월을 향해 질주할 수 있게 한 힘입니다. 이로서 야곱은 세속과 초월, 양쪽 다를 보여주고 그 두 개의 영역사이를 구획하는 경계, 혹은 장벽의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야곱 이 후에 이 장별, 경계 역할을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적 단일체제가 하게 됩니다. 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세상은 초월적 언약세계의 실재함을 보게 되고, 동시에 이 인간 세계가 마땅히 죽어야 하는 세계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애굽나라에서 나오게 되면서 비로소 생겨나는 이스라엘 국가는, 기존은 세속 국가의 생리로 인하여 압제를 당했습니다.
출애굽기 1:16에 보면,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고 되어 있습니다. 곧 세속 국가는 노동력 생각이 곧 국가라는 이념을 공고히 한다고 여겼던 겁니다. 자기네들을 살게 하는 힘의 생산과 축적인 그들의 모든 행위의 방향성이었습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이미 자신들이 죽은 자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인정해야만 했습니다. 죽음의 천사가 당도하는 그 문에 ‘어린양의 피’를 바르므로서 이미 언약적 ‘죽음’을 자신들의 공간으로 생각한 겁니다. 즉 이미 죽었기에 죽지 않는 겁니다. 반면에 세속국가인 애굽은 자신들이 사는 것이 마땅할 정도로 자신들이 멀쩡하다고 우깁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심판과 그 심판 속에서의 구원을 생산하는 나라입니다. 즉 이 죽음의 세계 속에서 생명의 흔적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이들의 사명입니다.
애굽나라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국가’라는 허상적 이념을 유일한 현실로 여기에 거기에서 빠져나가지 지도 못한 반면에 이스라엘은 언약적 죽음으로서 이미 이 현실로부터 빠져나온 자들입니다. 자신들의 솜씨나 능력으로 빠져나온 것이 아닙니다. 언약의 자체적 효력으로 빠져 나온 겁니다.
이 언약의 최종성은 야곱의 죽음 이후 예수님으로 모든 내막이 드러납니다. 예수님 오시기 직전에 세속성과 초월성 요소를 함께 지닌 채 태어난 자가 있었습니다. 그자는 세례요한입니다. 누가복음 1:13에 보면,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기가 없는 가정에 하나님의 초월성의 요소가 지닌 아이가 등장하므로 서 곧 오실 예수님의 성격을 가장 가까운 간격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세례요한 입장과 동일합니다. 성령이 찾아오시므로서 이미 성도는 초월성과 육적인 세속성을 함께 지니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삶을 통해서 성도는 근원적인 세속성을 죽을 때까지 계속 뿜어내게 됩니다. 모든 게 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자신들의 모든 행동과 태도가 오직 자기 자신의 만족과 행복에 쏠려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실을 ‘죄’라는 이름으로 배출해내는 겁니다. 살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것들로 인하여 언약완성으로 인해 주어지는 생명을 모독하게 되는 겁니다.
죽어야 비로소 멈추는 죄의 흘림, 바로 이점을 인식하며 사는 그들이 것을 죄라고 인식하는 그들이 천국 백성들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흙으로 흙답게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94강-창 49장 29-33절(야곱의 죽음) 190703-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29-33절입니다. 구약성경 79페이지입니다.
창세기 49:29-33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거두고 기운이 진하여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이 마지막에 죽는 대목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죽는 시점에서, 죽는 그 자리에서 봤을 때 인간은 처음부터 인간 같지도 않았다는 거예요. 인간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죽는다는 것은 그냥 창세기 3장에 이미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흙이라고 지목하는데 우리는 인간이라고 억지로 우기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고집이 센지요. 우리가 마귀를 닮아서 우리도 한 고집하지만 주님의 확정지어진 그 질서와 원리를 우리가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처음부터 인간을 흙으로 봤다는 것은 네 눈에 네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살아 있는 듯이 보이지만 기어이 너로 하여금 너의 참된 모습, 곧 흙이니 흙이라는 사실로 기어이 만들고야 말리라, 라는 하나님의 작용이, 우리가 의식하든 하지 않든지 지금도 소나기처럼 우리에게 퍼붓고 있습니다. 피할 수가 없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은 어디서 발견해야 되느냐 하면, 살아 있는 내가 얼마나 설치고 잘났느냐를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논하면 안 되고요. 하나님의 뜻은, 내가 죽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변치 않음을 발견해야 됩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이 그 죽음을 자기인생의 최종적인 목표처럼 자식들에게 유언을 해요.
그냥 사는 것 위주로 살다가 힘 빠져서 죽었다, 가 아니라 내가 그 열조의 돌아가는 목표를 가지고 평생 나는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 살아왔다. 그래서 나는 그 죽음의 의미, 사실은 중첩된 의미인데 그 죽음의 의미에 합류하는 것으로 나는 내가 이 땅에서 할 일은 제대로 다 한 셈이 된다는 말입니다.
보통 사람은 늙으면 죽는다, 할 때의 죽음은 숨 끊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열조에게 돌아간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완성상태로 돌아간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 완성이 죽음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죽음이 인간입장에서는 두 종류의 죽음이 돼요. 늙어가지고 죽는 일반적인 죽음이 있는 반면에 인간이 영생의 출입구로서, 영생의 공간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작용으로서 죽음이 있는 겁니다. 그 죽음은 무슨 죽음이냐하면, 언약의 합류한 죽음, 약속에 합류된 죽음, 또는 약속에 포함된 죽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일반적인, 흙에서 와서 흙으로 가는 그런 죽음의 노선에서 벗어나서 죽기는 죽지만 영생에 골인하기 위한 죽음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야곱은 몸을 가졌기 때문에 야곱의 몸은 비록 죽지만 야곱의 몸에 하나님이 야곱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약속이 찾아오게 되면 야곱은 중첩된 모습을 보입니다. 육의 죽음과 언약의 완성으로서의 죽음, 평소에 인생을 살면서 이 둘이 중복되어 있던 거예요.
중복되어 있다는 말로 해도 되고요. 같은 취지로 이렇게 이야기해도 됩니다. 야곱의 몸은 세속적이었다. 하지만 야곱 몸 안에는 세속과 더불어서 하나님의 신성함, 거룩함, 또는 초월함이 같이 병행되어 있었다. 그렇게 해도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내가 죽어서 내 무덤에 간다고 하면 될 텐데 야곱이 그렇게 유언하는 것이 아니고 특정 지점을 지명해서 반드시 그곳에 묻어달라고 이야기합니다.
29절에 보면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내 열조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부여조와 함께 장사하라.” 자기의 마지막 유언으로서, 내가 열조에게 돌아갈 텐데 헷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묻어달라고 합니다. 헷사람 에브론 밭, 세속적인 사람이지요. 언약이 찾아오지 않은 사람, 언약과 무관한 사람이 됩니다.
세속적인 사람이 땅을 갖고 있는데 30절에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 소유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은 그냥 육적인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조상,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뀐 그 분, 따라서 이것은 초월적인 요소입니다.
아브라함이 몸을 갖고 있지만 그 몸속에 하늘의 요소가 같이 중첩되어 있다고 보시면 되는 거예요. 그 아브라함이 밭을 매장지로 샀는데 이것은 놀랍게도 자기 죽음을 대비해서 밭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은 누구의 죽음을 대비한 것이냐? 자기 죽음이 아니라면 누구의 죽음이냐? 창세기 23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나이 많아서 127세에 살다가 죽었어요.
“사라가 일백 이십 칠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의 향년이라.” 사라가 죽고 난 그 때에 아브라함이 비로소 사라를 매장할 매장지를 사라가 죽었던 그 동네의 헷사람에게서 사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 약속에 있어서 죽음이 곧 생명이라는 것이 언약의 내용 안에 들어 있거든요.
그러면 사라의 공간, 죽은 사라의 공간을 마련한다는 것은 죽음밖에 없는 이 세상에 영생의 공간, 영생의 출입구를 아브라함이 마련한다고 그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세속적인 세상은 영원한 심판이고 저주입니다. 창세기 2장에서 창세기 3장으로 넘어오면서 하나님께서는 세속적이고 저주받은 이 땅에 사는 존재가 감히 생명나무를 먹기 위해서 하늘나라로 오는 것을 적극 저지하기 위해서 천사까지 지키면서 못 오게 하셨어요.
영원한 저주, 영원한 심판이 인간에게 당연한 조치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 같지도 않은 거예요. 인간이 죽어서 세월의 퇴적물로서의 흙이라면 그 과정은 하나의 쓰레기죠. 인간은 죽기 위해서 태어났고 계속 정상적으로 가동이 되어서 하루하루 살면 사는 만큼 죽어가고 있고 그 가운데서 인간이 살아보려고 애쓸 때 그런 것이 다 쓰레기 같은 짓들이고 결국은 하나님이 이기지요.
약속이 이기는 겁니다. 이겨서 인간은 ‘역시 흙이었네. 흙덩어리였네. 물질덩어리일 뿐이었어.’ 인간이랍시고 “저는 어떻습니까? 제가 이렇게 훌륭합니다.” 하는 것은 다 헛소리에 불과했다는 겁니다. 흙이 잘나봐야 흙이지 뭐 흙 잘난다고 천사되는 것은 아니거든요.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방금 이러한 이야기를 용납 못하지요.
세속적인 세상에서는 하늘의 요소가 빠져 있기 때문에 그저 노력하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 인격을 지키면 서로가 서로를 칭찬하면서 훌륭하다, 잘났다, 이렇게 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갇혀 있는 세대에서나 통용되는 헛소리인 거예요.
그걸 어려운 말로 ‘이데올로기’라 하는데 우리말로 ‘이념이지요. 우리말로 이념이라 하는 것은 망상입니다. 허상인데 사람들에게 이것이 전부에요. 현실화된 이데올로기를 더 크게 넓게 이야기해서 두자로 그걸 국가, 혹은 국가 이데올로기라 하는 겁니다. 국가라는 것이 있음으로서 자기존재의미를 찾는 것, 소속감을 느끼는 것, 그게 유일한 현실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허상이에요.
국가 이데올로기 국가이념에 의해서, 안중근, 이봉창, 이런 사람들, 벤또 폭탄 던지고, 권총 쏴서 이토오히로부미 이런 사람들 죽이고 했잖아요. 그런 것이 다 부질없는 짓이에요. 국가 이데올로기보다 규모가 작은 것을 두고 가족이데올로기라고 합니다. 가족 이념에 빠진 것, 평생토록 자기가족, 가문, 조상제사 지내기 위해서 옛날 여자들은 시집 왔잖아요.
그런 것들이 다 헛된 짓 하다가 헛되게 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누가복음 1장 13절에 보면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의 이야기입니다. 세례요한은 애기 못 낳는 집안이에요.
가족이데올로기 이념 속에서 그 아버지 사가랴는 자식이 없습니다. 자식 없는 가족이데올로기, 대가 끊어진 그 집안에 세례요한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태어났을 때 과연 세례요한이 사가랴 집안사람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세속적인, 육적인 가족이데올로기, 가족이념 속에 하늘의 요소, 초월적인 요소, 신성한 요소, 거룩한 요소가 삽입된 겁니다.
세례요한이 사가랴 집의 가족으로서 예수님을 증거 한 것이 아니고 이미 세례요한은 신성한 요소를 가지고, 그걸 선지지라 하거든요. 물론 몸이야 흙으로 만든 몸이지만 신성한 요소를 가지고 자기 뒤에 오시는 하늘의 요소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에서 왜 이런 이야기를 했겠어요?
인간의 가족위주, 자기가문위주로 산다는 것이 쓰레기 같은 삶이 된다는 거예요. 거기에 갇혀 있지만 거기서 못 빠져 나오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막벨라 굴을 강조하고 주목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비정치적이에요. 비세속적이고. 특정 무덤을 강조하는 것은 세속의 세상, 세상의 국가 이데올로기라는 그 정치, 그 정치로부터 벗어난 시선을 가지고 세상을 보라는 말이지요.
이 세상이 어떻게 좋은 세상이 되느냐? 잘 먹고 잘 사는 세상이 되느냐? 그런 관점이 아니라 이 세속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초월성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 것인가? 섞일 수 없는 것이 함께 섞여 있을 때 그 섞여서는 안 되는 초월성을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발견할 수 있느냐, 찾아낼 수 있느냐는 그걸 주목하라는 거예요.
좀 더 알기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막벨라 굴을 강조한다는 것은, 자기가 이 세상을 한평생 살았다, 가 아니라 나의 삶은 어떤 방향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그 방향성이 목표로 하는 과녁이 있는데 막벨라 굴에 들어가는 거예요. 막벨라 굴에는 언약에 의해서, 언약에 사로잡혀서, 살아 있을 때 미리 언약이 임해서 천국에 갈 사람은 다 모여라. 집결장소가 되는 겁니다.
굴은 그냥 굴이에요. 이 세상에 있는 굴이에요. 세속성 속에 초월성, 하나의 어떤 장소를 값을 주고 하늘나라의 소유권이 행사되는 유일한 장소, 막벨라 굴이 되는 겁니다. 그 죽음에 아브라함도 묻히는데 제일 먼저 그의 아내가 묻히지요. 사라라는 것은 여자의 후손의 그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남편 없이, 그 때는 남편의 이름이 아브라함이거든요, 그 육적인 남편과 상관없이 아기를 가진 거예요.
사라는 자기 몸을 빌려줬지만 거기서 나온 자식은 이삭, 곧 하나님의 약속에 속한 자식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이 주도권을 쥐고 자기 아내 몸을 사용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자식을 가질 수 없는 자는 누구냐? 사라냐? 아니면 아브라함이냐? 둘 중에서 사라가 자식을 가질 능력이 없는 자에요. 이미 태가 죽었으니까. 태가 죽은 자로부터 자식이 나온다면 그 자식은 어디와 연계가 되느냐 하면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곧 태가 죽었다는 것과 연계가 돼요.
다시 말해서 이 세상 모든 인간은 흙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데 죽을 수밖에 없는 곳에 천사 세 명이 찾아와서 약속을 남기니까 거기서 생명이 생기더라, 그 말이에요. 이게 비정치적이거든요. 비이데올로기적이에요. 비사상적이고요. 제가 만약에 어떤 신학교교장이라면 목사가 될 사람에게 이런 것을 가지고 시험을 내고 싶어요. 목사다우냐 아니냐를 묻는 시험.
교육기관에 종사하는 비정규직의 파업과 막벨라굴과의 연관성을 논하라. 그런 문제. 우체국직원의 파업과 막벨라굴의 의의를 서로 연관 지어라. 이런 문제. 답변은 간단하지요. 우체국 파업은 정치적이거든요. 허상에 불과한 이데올로기. 그게 있어야 우리가 산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원래 산 적이 없었는데. 한 번도 산 적이 없었는데. 한 번도 흙이 아니었던 적이 없었거든요.
인간의 인간다운 권리를 회복하자고 하는데 인간은 한 번도 인간 같은 적이 없었어요. 처음부터 흙이었고, 끝까지 흙이었고, 고집스럽게 흙이었어요. 세속자체에서 만들어낸 초월성은 의미 없습니다. 세속자체에서 만들어낸 천국, 교회, 기독교, 종교, 초월, 세속에서 만들어낸 메시아, 전부 다 엉터리인 이유가 정치적이고, 육적인 살고자 하는 본능과 결부되어서 그래요. 이게 전부 다 엉터리거든요.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달라져야 되는데 그게 아니고 아브람은 유지하면서 천당은 가려고 하는 거예요. 야곱이 이스라엘로 달라져야 되는데 야곱이 달라지지 않고 야곱으로서 천국가려고 시도하는 거예요. 이것은 생명 가는 길을 차단한 하나님의 취지를 완전히 모독하는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뀐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았기 때문이 아니고요, 밤중에 하나님이 찾아와서 그래요. 세속 속에 하나님이 찾아와서 그래요.
그리고 야곱의 아버지도 그 막벨라 굴에 들어갑니다. 그 막벨라 굴은 뭐냐? 이 세상 모든 남성의 세계는 거기에 들어갈 수 없고 여자로 인하여, 임신하지 못하는 죽은 태죠, 죽은 태에서 나온 자들만 막벨라 굴에 새로운 죽음의 의미를 지니고 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야곱의 예언은 뭐냐 하면, ‘나, 나 잘 살았지?’가 아니라 나 지금 어디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방향성을 갖고 있어요. 야곱이 방향성을 갖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이 2019년도를 살고 있으면서 무슨 방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삽니까? 우리의 방향은 항상 과거에요. ‘펀드 몇 개 넣었나? 오늘 주식 지수가 2006인데 값이 얼마나 떨어진 거야 대체?’ 우리의 방향성은 최종목적지가 나예요. 나의 풍부함, 내가 살만한 여력을 얼마나 내 창고에 끌어 모았는지가 방향성이에요.
누가복음 12장에서 어리석은 부자가, 양파농사가 잘 되었는지, 마늘농사가 잘 되었는지, 감자 농사가 잘 되었는지, 창고를 지어 놓고는 하는 말이, 자기가 자기한테 “내 영혼아, 염려하지 마라. 이제 편히 먹고 살게 되었다.” 방향성이 자기에게 골인한 거예요. 주님께서 하는 말씀이, 오늘 밤에, 오늘 밤에, 구체적으로 새벽 2시 42분 25초, 오늘 밤에 네 영혼 데려가면 저것이 누구 것이 되겠느냐?
우리는 이 세상의 세속적인 이념에 휘둘려서 같이 놀아난다고 방향성 없는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는 보람과 의미라는 것은 전부 다 자기한테 꽂혀 있어요. 자기가 과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야곱은 자기가 과녁이 아니에요. 내가 아니에요. 나 말고 어떤 여인의 무덤입니다. 우리 조상, 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아기를 낳았던 그 여인의 공간.
어떤 인간도 육적으로 자식을 가질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언약의 현실성, 언약의 능력에 의해서 새로 태어난 그 자리, 요즘 말로 하면 십자가지요. 그 막벨라 굴에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어떻게 해서 인생의 방향성이 그쪽으로 꽂히게 되었는가? 그것은 야곱이 열심히 그 쪽으로 달려가서가 아니라 그 화살이 최종적으로 꽂혀 있는 그 과녁, 그 과녁에서 화살이 도로 뽑혀 나와 가지고 야곱을 향하여, 야곱을 과녁으로 삼아 꽂혀버린 거예요.
사라에게 주어졌던, 태가 없는데 자식을 낳았다는 언약의 원리가 하나의 과녁이라면 그 과녁의 능력이 꽂혀 있는 아브라함의 화살을 뽑아서, 이제는 대를 이어서 그 다음에 후손 대대로 펼쳐지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이 이삭에게, 그 다음에 야곱에게, 그 다음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 그들의 가슴에, 영혼 속에 꽂히는 거예요.
그 능력이, 죽었다가 산다는 그 부활의 능력이 꽂혀 버리면 그 사람은 그 때부터 하나님의 언약의 최종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방향성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 이야기가 갈라디아서 3장 16절부터 나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오직 하나, 화살이 하나지요. 하나의 화살이 꽂히는 거예요. 곧 그리스도라. 17절에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진다는 거예요. 야곱이 죽고 난 뒤에, 막벨라 굴에 묻히고 난 뒤 약 400년 후……, 그 다음에 요셉, 막벨라 굴은 아니지만, 요셉은 일단 세겜에 묻히지만, 요셉이후 후손들이 요셉의 뼈를 가지고 막벨라 굴이 있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는 그 과정이 바로 ‘출애굽’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벗어나서 살았다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방향성을 갖고 있는 그 삶이 이제는 이스라엘이라는 단일집단화 된 아브라함의 자손화 되어서 그들은 어떤 방향을 갖게 되는데 그 방향은 조상들에게 약속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땅, 이삭에게 약속한 그 땅, 야곱에게 약속한 그 땅, 막벨라 굴이 있는 그 땅, 죽은 사라, 죽은 여자, 여자의 언약적 생명을 보호하는 무덤이 있는 그 무덤중심의 땅을 향하여 그들은 한걸음 두 걸음 나아가는 겁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이스라엘, 야곱의 열 두 아들로 펼쳐진 그 지파는 애굽에서 계속 살면서 심한 고난을 받게 됩니다. 고난을 받으면서 아브라함언약에 의해서 생겨난 자식인데도 불구하고 애굽이라는 세속한테 심한 굴욕을 당하는 일들이 벌어져요. 그렇다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세속과 초월함, 이 둘이 있는데 세속과 초월함속에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이나 열 두 아들이나,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이라는 집단의 참된 의미가 뭐냐?
그 의미는, 이 세속과 그리고 초월함, 하늘의 요소가 엄연히 존재함을 양쪽에 경계선으로서, 경계로서 양쪽 세계를 다 보여주는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이 이스라엘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멕시코로부터 올라오는, 온두라스, 과테말라, 특히 멕시코로부터 들어오는 이민을 막기 위해서 뉴멕시코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잖아요. 그 장벽의 역할이 이스라엘의 역할, 오늘날 성도의 역할이에요.
양쪽 세계가 분명히 있고 그 둘 사이에, 절대로 세속에서 초월함 쪽으로 결코 들어갈 수 없음을 이미 그쪽 초월함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이 마음껏 보여주는 거예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상당히 어렵지요? 쉽게 예를 들면, 출애굽 때 있었던 첫 번째 유월절,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 사람을 살해하는 그 사무라이 같은 천사들이 피를 보고 넘어간 집은 맏이가 살고 그렇지 않은 집은 죽었다는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의 일, 그 일을 생각해 봅시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문지방에 부적을 단 것이 아니에요. 그리고 자기가 잘했다고, 자기가 착한 일을 한 리스트, 자기가 훌륭하게 살았다는 리스트, 자기가 훌륭하게 살았다는 자기의 품위를 그 문 앞에 내세운 것이 아닙니다. 뭘 세웠느냐 하면, 죽음을 내세웠어요. 자기와 함께 살던 그 어린양의 죽음, 피를 문지방에 발랐습니다.
이 말은 뭐냐? 나는 어린양의 죽음 안에 있습니다. 곧, 우리는 지금 무덤 안에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미 우리는 죽었는데 그냥 자살한 것이 아니고 어린양과 함께 죽었습니다. 그 표시를 한 거예요.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네가 죽음을 보지 않고 넘어간다는 그것은 하나님 쪽에서, 의에서 오는 일방적인 약속입니다.
세속적인 이스라엘 사람들, 원로들이 모여서 회의해서 제안한 의제가 아니에요.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인간의 지혜가 아니에요. 인간의 지혜는 요만큼도 포함이 안 되어 있어요. 어린양의 피로 죽는다 할 때 인간의 지혜는 다 빼야 돼요. 나의 지혜가 문 밖에 있는 피를 대신할 수가 없다는 그 말입니다.
그 피를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그 피가 나를 구원해요. 예수님의 피 믿는다고 자랑질 하지 말고 예수님의 피만 자랑해야 된다니까요. 이거 참 중요한 건데요. 정말 중요한 건데요. 왜 사람들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고 생각 못하고 예수 피를 믿는 내 믿음이 나를 구원한다는 그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인간이 못돼 처먹어서 그래요. 아주 성질이 더러워서 그래요. 악마의 마음이라서 그래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를 멀쩡하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멀쩡하니까 멀쩡한 인간이 멀쩡한 생각을 하게 되면, 이 정도 생각은 하나님께서 긍정적으로 받아주겠지,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사라의 태가 죽었다는 말은 더 이상 아브라함의 자식은 필요치 않다는 거예요. 이미 죽은 아내에서 새롭게 임신이 되었다는 말은, 일체 인간적인 요소가 거기에 섞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멀쩡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제가 이야기했잖아요.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인간 같지도 않다는 뜻이라고요. 사람 같지도 않아요. 사람이라고 가치를 부여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죽어 마땅한데 무슨 인간이에요? 죽어 마땅한데! 역시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이야기에요.
어떤 형제간이 있는데 동생이 예수님에게 고자질을 합니다. “형은 사기꾼입니다. 내 돈을 가져갔습니다. 이 억울함을 풀어주세요.” 할 때 주님께서는 자기편을 들어주는 줄로 알았지요.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영생은, 생명은 네 소유와 상관없다. 네가 형에게 네 돈 받아낸다고 그게 생명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내가 그것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오히려 그것을 피하기 위해서 온 거예요. 우리가 남에게 돈을 받을 자격이 있다? 자격이 없어요. 돈 떼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자꾸 멀쩡하다고 생각하지 말고 바보 등신이라고 생각하세요.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면 사는 게 오히려 이상해요. 바보 같은 인간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이것은 기적 같아요.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뭘 한 것이 있어서 삽니까?
이것은 분명히 주님 살아 계신 것 맞지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우리는 방향성을 가져야 되는데 자기가 멀쩡하다고 여기니까 방향성이 나로 스톱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내가 나의 종착점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멀쩡하다고 여기니까 기도하면서 고집을 부려요. 멀쩡한 내 뜻대로 멀쩡하게 되어야 된다고 하고, 뜻대로 안되면 왜 멀쩡한데 뜻대로 안되느냐고 주님께 대들고 반항하고요.
하지만 멀쩡하지도 않으면서 멀쩡하다고 한 집단이 있었으니 그 집단이 바로 애굽입니다. 애굽나라, 다시 말해서 세속적인 것과 초월적인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하는 방법을 통해서 분명히 그 차이점을 명백하게 보여주겠다는 거예요. 그 출애굽이에요. 애굽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그러나 어떤 인간도 자기가 멀쩡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국가이데올로기, 또는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몸부림친다고 해도 절대로 못 벗어나요. 갇혀 있습니다. 못 벗어납니다, 우리는.
내가 나를 위해서 사는 것 외에 다른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생각나지도 않아요. <기생충>이라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를 보면서, 상당히 함축된 내용이 많은데, 어떤 아주머니들이 그 영화 보고 나오면서 그 영화가 상 받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는 거예요. 왜 상 받는 이유를 모르냐 하면, 그 영화는 사회적으로 가진 자와 가난한자가 갈등을 일으킨다는 그 내용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그 아주머니는 사회문제에 대해서 60평생 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왜? 자기한테 꽂혀 있으니까. 어떤 아주머니는 이렇게 이야기했어요. “그 영화를 보고 어떻게 느꼈습니까?” “아, 사람을 마지막에 왜 그렇게 죽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자기자식새끼만 생각하고 살기 때문에 조금만 그 범위를 넘어도 그게 왜 중요한지를 몰라요.
본인만 중요하기 때문에. 본인은 왜 중요시해야 됩니까? 자기는 멀쩡하거든요. 자기는 자기를 정상이라고 여기거든요. 그러면서 지금 죽어가고 있습니다. 교회 와서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 정월 대보름, 그리고 동해바다 해 뜨는 것 보는데 “MBC에서 나왔습니다. 뭘 빌었습니까?” “남편 사업 잘되고, 아내 건강을 위해서요.”
그거하고 교회하고 차이점이 뭘까요? 똑같은 거예요. 초월성이 하나도 안 들어 있어요. 그 멀쩡한 애굽에서 한 일은 출애굽기 1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1장 17, 18절에 보면,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을 어기고 남자를 살린지라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 이같이 하여 남자를 살렸느냐.”
그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요, 16절에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 왜 그러냐 하면, 여자는 인력자원을 생산하는 기능을 갖고 있어요. 계속 여자를 낳는다는 것은 인구를 증가시키는 거예요. 인력이 그 당시에는 국가를 움직이는, 국가 이데올로기를 움직이는 기계에요.
멈포드라는 학자는 그걸 ‘거대기계’라 했는데 고대사회는 인간자체가 기계에요. 인간의 만남, 연결이 공장처럼 돌아간다는 그 말입니다. 인구가 있어줘야 전쟁할 때나, 궁전을 짓거나, 탑을 세우거나, 성전을 지을 때 노동력이라는 에너지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인구가 많으니까. 그래서 이 사람들은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사용한 거예요.
이것은 뭘 의미하느냐? 애굽나라는 살기 위한 생산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와 대조가 되는 초월성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은 무슨 생산이냐? 그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을 생산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심판과 구원을 생산하는 겁니다. 생산하면서 생산하는 모든 원리는, 죽은 자가 살아난다는, 사라의 공간에서 나오는 힘이 앞당겨서 그들의 영혼에 꽂혀서 이끄시는 화살역할을 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이스라엘과 애굽이 만남으로서 계속 경계 지워지는 겁니다. 구분이 지워지는 거예요. 그 구분을 구약에서는 두 자로 거룩이라고 해요. 분리되었다는 거예요. 세속과 분리되었다는 겁니다. 착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은. 분리된 거예요. 사고방식이 이쪽은, 모든 세상은 자기영광, 자기만족, 행복을 위해서 그 방향으로 꿈지럭거리고, 하나님의 성도는 방향이 죽기 위해서, 죽어야 영생을 얻을 것이 아닙니까, 물론 이미 영생 얻었지만, 사도바울의 소원처럼, 어서 주와 함께 만나기 위해서 그쪽으로 방향이 움직여 가는 거예요.
그냥 움직여 가면 개인구원밖에 안되니까 주께서는 그 성도로 하여금 그 전에 육적으로 나왔던 부정적인 요소, 부정적인 것, 세상과 다를 바 없는 요소를 계속해서 배설물로 발산시키면서 데려가는 거예요. 성도는 뭐냐? 날마다 죄만 짓는 거예요.
속에 들어 있던 내부의 죄가 주님의 화살에 의해서, 영생의 능력, 효과에 의해서, 아하, 이것도 죄고, 세상에 미련 갖는 것도 죄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곧 악이라는 것,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것은 다 하늘로서 온 것이 아니고 떨어져 나가야 될, 미련두지 말아야 될 세상에서 온 것이구나. 요한 1서 2장 16절 말씀.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것은 우리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세속적으로 살 뿐이에요. 하지만 언약대로 경계선 역할을 하는 것, 우리의 진정한 소망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주와 함께 거하는 거예요. 이것을 야곱은 유언으로 남깁니다. 자기의 삶의 방향성을. 다시 말해서 야곱은, 나는 죽지 않는다. 다만 합류될 뿐이다.
그겁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리고 오늘 본문의 야곱의 하나님이에요. 야곱을 살려내시는 하나님, 세례요한을 살려내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깊숙하게 스파이처럼 이 세속에 들어가서 그쪽에서 뽑아내는 것이나 우리한테 뽑아내는 것이나 똑같이 더러운 것, 마귀적인 것을 둘 다 뽑아내면서, 저쪽은 몰라요, 자기가 비정상이라는 것을 모르고 우리는 미리, 절차상 미리 죽었기 때문에, 죽은 자로서 언약 때문에 살아 있기 때문에, 언약이 살아 있으니까 그 조건 하에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과거를 계속해서 현재에 내 버리고 살아가는 중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삶 자체가 우리의 유언이 되게 하옵소서. 매일매일 우리가 유언을 쏟아내되 그것이 하나님의 언약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