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태복음

111강 / 마태복음 26:23 (약점과 십자가) / 190528

정인순 2019. 5. 29.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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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미아


대전-111강 마태복음26장 21-25절(약점과 십자가)

20190528-이 근호 목사

 

마태복음 26장 21-25절

21절, 저희가 먹을 때에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하시니

22절, 저희가 심히 근심하여 각각 여짜오되 주여 내니이까

2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24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25절, 예수를 파는 유다가 대답하여 가로되 랍비여 내니이까 대답하시되 네가 말하였도다 하시니라

 

이 대목에 대해서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사람들이 성공할 수가 없어요. 심지어 기독교 2000년 신학 가운데서도 이 대목을 풀어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드신 분이 누구냐 하면은 하나님이거든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지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잖아요. 그런데 뭐라고 야박하게 하시느냐 하면은 차라리 본인 입장에서는 안 태어난 게 좋을 뻔 했다고. 만들어놓고, 자기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닌데, 왜 편애하는 식으로, 한쪽을 미워하는 식으로 그렇게 했을 때에, 하나님의 그런 조치가 착하디착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수긍하기 힘든 거예요.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에 대해서 사람들이 연구하고 연구하다가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신학에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구제해주기로, 이렇게 하자는 의견들이 있었어요. 뭐냐 하면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기여했기 때문에 아마 천국에 갔을 거라고. 왜냐하면 그 수가 아니면 이 가룟 유다에 대한 어떤 적절한, 인간적인, 인간적으로 납득이 안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실컷 부려놓고 차버리면,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버리면, 그 사람입장에서는 얼마나 불공평한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겠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그 불공평함을,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속성으로 같이 받아들이라고 요구를 하신다면, 우리는 딴 거는 받아들일 용의는 되어 있는데, 가룟 유다에 대한 조치도 그걸 정당한 거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때는 우리의 자리에 그 가룟 유다에 대한 조치에 대해서 있을 자리가 없죠. 그러면 95퍼센트는 받아들이고 5퍼센트는 빼놓으면 그게 하나님을 믿는 겁니까? 아니죠. 믿으면 다 믿고 안 믿으려면 말지, 뭐 빼고 보태고 이래서 믿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자기 믿음이 가짜로 들통이 나는 것이 두려운 겁니다. 다 믿겠는데 이건 못 믿겠다. 그럼 하나님께서 “그거 못 믿으니까 니는 믿는 것도 아니니까 믿음이 아니다.”라고 이렇게 해버리면, 그러면 신학자 되려고 신학박사가 되려고 목사가 되려고 노력한 것이, 사람들에게 천당 가라고 복음 전했던 이 수많고 숱한 목회의 수고와 애씀이 허사가 되잖아요. 허사. 그게 아까워서 미치죠. “딴 건 다 믿겠는데 가룟 유다를 이렇게 내치는 것은 너무 심했습니다. 주여!”라고 항변하고 싶은 대목이 이 대목이에요.

 

음식을 먹을 때 목에 몽땅 넘어가면 목이 시원한데, 이게 닭 뼈다귀처럼 가다가 걸려버렸어요. 걸리게 하는 그 대목, 이것이 바로 가룟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주님의 조치입니다. 다시 읽겠습니다. 24절, “인자는 자기에게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자, 이 대목이 어떻게 풀려야 될 수 있느냐, 그거는 우리가 평소에 자기 자신이 십자가에 대해서 뭔가 오해를 갖고 있으면 절대 풀릴 수가 없어요.

 

십자가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면서 십자가에 대해서 안다고 우기는 사람한테는 이것이 하나의 계륵의 닭 뼈처럼 십자가 전체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부정하는 요인이 돼버려요. 인간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에 모든 사람은 십자가를 내가 믿고 싶어 해요. 왜? 십자가 피가 나의 죄를 용서한다고 하니까. 한 번 적어볼게요. 십자가 피가 나의 죄를 용서한다. 분명히 이게 맞는 이야기처럼 들리죠.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다고 돼있기 때문에. 그런데 무엇이 여기서 오해의 소지가 있느냐 하면은 여기 ‘나’가 누구냐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이 아무리 예수님으로 둘러싸여도 나에 대해서 모르게 되게 되면, 그 둘러싸인 예수님, 십자가, 모든 것이 다 거짓이 돼요. 자기 자신의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동원한 것밖에는 안 된다 이 말이죠. “주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모든 일은 주께서 하셨습니다.” 입만 떼면 내뱉는데, 그래서 본인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면 본인에 대해서 몰라요. 내가 누군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저 내가 누군지는 모르겠는데 무조건 주께서 해줬다는 거예요.

 

그래놓고 “나에 대해서는 내가 어차피 잘 알겠지. 내가 아는 나겠지.”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나를 모르니까 십자가도 모르고 예수님도 몰라요. 내가 어떻게 망가져야 되니까. 주님께서 나와 상대해서 십자가 피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나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약점을 상대해서 주님께서 피를 흘리신 거예요. 나의 약점을 상대해서. 그런데 우리는,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무엇을 감추기에 급급해요. 자신의 약점을 감추는데 급급 하는 거예요.

 

이걸 논리로 따지면 굉장히 어려운데 쉽게 가겠습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에게 내가 큰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 못할 짓을 했어요. 큰 실례되는 짓을 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 앞에서는 큰소리를 치지만 그 사람 앞에서는 어떻게 되겠어요? 고개 숙이든지 뭐 이러고 피하겠죠. 그러면 안 된다는 거예요. 진짜 인간의 행복은 천방지축 까부는 나를, 시건방 떨고 잘난 체하고 자만하고 교만한 나를 진정으로 인간 만드는 것은, 내 약점을 쥐고 나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내 앞에 등장했다는 그것이 우리의 최고의 행복이에요.

 

최고의 행복은 뭐냐 하면은 나에게 고삐를 걸어준 사람. 그분이 나를 함부로 해도 그게 좋아. 함부로 다루어도 그게 나에게는 영광스럽고 고맙고 과분해. 왜? 내가 한 짓이 있기 때문에. 그분에게 한 짓이 있기 때문에. 이제는 그분이 사라지면 겁이나. 그분이 없어지면 내 인생이 안 돼. 왜? 그분이 계속 내 앞에 있어서 나를 밟아줘야 돼요. 일종의 매조키즘의 심리일수도 있는데.

 

사람의 본성은 선악과 따먹고 이미 악마가 되었어요. 악마의 특징은 뭐냐 하면은 신처럼 되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독립해서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겁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사니까 부모님이라고 더 이상 간섭하지 마세요. 부부가 결혼할 때에 서로 사랑한다고 하잖아요. 언제부터 이 사랑이 식어지느냐 하면은 각자 독자적인 자기의 일에 바쁘다보니까 그 다음부터는 결혼이라는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거예요.

 

연예인들 보면 누구하고 뭐 사귀고 어쩌고 쭉 하죠. 근데 좀 있으면 갈라섰다는 거예요. 왜? 이유가 뭐냐? 서로 하는 일이 바빠서. 서로 하는 일이 바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잡힐 약점이 없는 거예요. 니 없이도 독자적으로 내 돈 내가 벌어서 살아갈 수 있는데, 내가 뭣이 못나서 너한테 매여서 살 필요가 뭐가 있느냐 하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것은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 고려시대 사람들, 옛날 우리시대 이전의 사람들이 있잖아요. 우리시대도 마찬가지지만. 그 사람들이 결혼할 때에 결코 결혼이 행복한 결혼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왜냐 하면은 이것은 여자들이 밥 빌어먹을 데가 없어서 취직한 거예요. 시집에. 시아버지는 사장님이에요. 시어머니는 사모님이고. 자기는 하녀로 팔려간 거예요. 농경시대기 때문에. 농경시대는 일꾼의 숫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일꾼해주면 밥 먹여줄게.

 

그래서 이런 노래가 있잖아요. 고개고개 넘어가도 또 한 고개 남았네~ 넘어가도 넘어가도 끝이 없는 고갯길~ 세상살이가 인생살이가 고추보다 맵다 매워~ ‘고추’유지나의 노래. 그 여자들의 시집살이가 얼마나 힘든지 고추보다 더 맵다는 말이 뭐냐 하면은 시집이라는 거대한 가문, 뼈대, 그 뼈대를 위해서 뼈를 묻어야 돼요. 딸을 낳으면 안 돼요. 아들을 낳아서. 이 시대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만, 여자를 동물과 인간 사이에 중간 경계지점에 여자를 집어넣었어요. 인간을 대표하는 것은 여자가 아닙니다. 남자가 대표해요.

 

그래서 출애굽에 보면 열 가지의 재앙을 할 때 바로가 찔끔찔끔 양보를 하잖아요. 김정은이처럼 찔끔찔끔 양보를 하는데, 나중에 막판에 가서는 뭐가 나오느냐 하면 “남자는 가라. 하지만 여자하고 가축은 놔두고 가라.” 그 다음에 또 재앙을 때리니까 “그래. 남자, 여자 너희끼리 가라. 하지만 가축은 놔둬라.” 이 말은 뭐냐, 여자가 어디에 끼인 존재냐 하면은 동물과, 동물은 자연입니다. 자연과 인간의 문화와 문명 사이에, 그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그 연결고리의 역할이 바로 여자의 역할인 것입니다. 여자는 동물에 속하면서도 인간성이 많이 누락된, 인간성이 많이 빠져있는 덜 인간적인 요소로 간주한 겁니다. 성경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메시야가 누구의 후손으로 태어납니까? 바로 여자의 후손으로 태어나잖아요. 애기를 낳으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전부 다 남자의 세계에요. 여자는 뭐냐 하면은 남자의 징후, 증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남자의 증상. 징후니까 증상이죠. 남자한테 붙어있으면서 남자가 어떠하냐를 보여주는 계기판 역할을 하는 거예요. 여자가. 창세기 3장에 여자는 혼자 못 살아요. 남자를 사모하면서 살아요. 여자의 운명은 남자한테 달렸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자체가 남자의 세계기 때문에, 여자로 태어난 자체가 이거는 모자란 인간으로 간주해서, 남자 쪽에서 여자를 보호함으로서, 여자가 고유 가치를 지닌 것이 아니고, 여자를 보호하니까 얼마나 착한 남자냐, 해서 이 가정에 복을 줘요. 그래서 옛날 여자들은 아무리 시집살이로 고생을 한다고 해도 꼭 참아야 될 이유가 그 복된 가정의 소속이고 가구기 때문에, 같이 더불어 복 받을만하거든, 끽소리 말고 남자가 바람을 피우든 바람을 날리고 오든 뭐하든 니는 그걸 못 본 체하고 남자이름의 자식, 남자 성을 가진 자식이나 충성을 다하라. 이게 여자의 팔자고 운명이에요.

 

이 여자의 운명과 팔자를 누가 전수하느냐 하면 여자가 여자한테,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전수한다고요. “니가 여자의 범주를 벗어나지 마라. 안 그러면 니는 죽어. 니는 세상에서 안 돼.” 그래서 옛날 일제시대 그 전부터는 배우면 안 돼요. 여자가 똑똑하면 안 돼요. 여자의 행복은 등신 되는데 있지, 똑똑하면 여자의 행복은 그걸로 끝났습니다. 다 바보같이. 그런데 남자가 바보 같으면 어떻게 되느냐, 여자는 똑똑한데 남자는 바보 같으면 어떻게 하느냐, 똑똑한 여자가 자기의 영광을 자기한테 돌리지 말고, 모든 것을 다 바보 같은 남편을 부추겨주는 보조적인 역할을 할 때 여자가 덩달아 존경을 받는 여자다. 이래 되는 거예요.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뭐 이런 거 있잖아요.

 

그게 전통적으로, 제도적으로 계속해서 인간사회에서 지녀온 겁니다. 여자들 바보 아니야? 좀 배워가지고 그걸 넘어서면 되지 않겠느냐? 라고 하겠죠. 넘어서봤자 이게 뭐냐 하면은 그 형식 자체가, 틀 자체가 남녀가 구성된 것이 그거밖에 없기 때문에, 그걸 여자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자 같은 여자가 되는 거예요. 여자의 가치가 남자가 하는 일을 잘 했다는 이유 때문에 존경받는 거예요. 여자 고유가치가 애초부터 없다니까요.

 

어? 여자가 바둑을 잘 두네! ‘최정’이라는 우리나라 바둑기사가 있는데, 이 여자는 여자대회에 안 나가고 남자대회에 나가서, 계속해서 지금 수억 하는 세계대회LG배에 본선에 올라가 있어요. 32강에서 이겨서 16강, 옛날 세계챔피언이었던 스웨 선수를 이겼어요. 내일 되면 또 8강을 합니다. 그래가지고 지금 난리가 났어요. 여자가 이렇게 바둑을 잘 둔다고요. 여자가.

 

보통 여자는 남자하고 할 때는 두 점 나야되는데. 여자가 지금 세계정상인 남자를 이기니 난리가 난 거예요. 여자의 게임은 없어요. 여자의 게임도 있긴 있지만 대부분 남자하는 게임에 여자가 파고드는 거죠. 필드하키나 전부 다. 여자게임은 이쁜 것 있잖아요. 물속에서 춤추는 게임 그런 것 밖에 없고요. 아니, 여자가 트랙터를 몰아! 이런 것. 이제는 여자의 전유직업이었던 해녀마저 남자가 뛰어들어서 해남이라는 것이 또 등장했죠.

 

남자가 여성을 좋아하기 때문에 여성으로 하여금 미스코리아라는 것을 만든 거예요. 미스트롯도 만들고. 남자가 원하기 때문에. 남자의 노리갯감이에요. 여자가. 그리고 그걸 누가 전수한다고요? 여자가. 자기가 경험한 게 있기 때문에, 이 세계가 어떤 식으로 단단히 굳어져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철딱서니 없이 남자의 세계에 까불면, 아무도 널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 여자는 운명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세뇌 받았기 때문에 여자는 남자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이 유일한 낙이에요. 남자한테 사랑 못 받으면 자식한테도 사랑 못 받고. 남편한테 버림받고 자식한테도 버림받으면 이 여자는 인생 살 이유가 없어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노래에 이런 노래가 있어요. 한 많은 미아리 고개라는 노래가 있거든요. 한 많은 미아리고개의 옛날버전이 뭐냐 하면은 철사줄로 꽁꽁 묶여 남편이 가는데 여자는 남편이 그리워서 엎어지고 자빠지고 하는, 미아리고개가 그 이야기거든요. 그런데 새로운 버전은 뭐냐 하면은 갈 테면 가라 나 혼자 산다. 그거에요. 가사가. 여러분 백날 여자가 하면 뭐합니까? 방탄소년단 브라질공연에 무려 10만 명이 오는데. 남자는 거의 안 와요. 전부 다 여자들만 오는데. 여학생들만 오잖아요. 이게 방탄소년단이 그 방탄소년단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에게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독자적으로 산다가 되는 거예요. 여자도 “아유, 하나님! 나도 남자로 태어났으면 내 지식과 내 용모 같으면 이 세상에서 큰일을 하고 대통령감일 텐데.” 뭐 그런 이야기를 하죠. 여자가 또 남자답고 왈가닥 같으면, 뭔가 여장부 같은 것이 있잖아요. 아휴, 남자로 태어났으면 큰일 냈을 거야. 뭐 국회의원을 하든지 큰일 했을 거다. 참 아깝다는 거죠. 이게 뭐냐 하면 남자에게든 여자에게든 간에 남자 자체가 모델이 되어 있어요. 창세기 4장에 나옵니다. 라멕. 라멕이 남자든 여자든 모든 것을 다스리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유월절에 빠져나올 때도 여자가 하는 게 아니라 남자가 나서죠. 남자가 나서서 가장역할을 하는데, 왜냐하면 남자에게는 여자에게 없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할례에요. 그래서 십보라가 모세에게 뭐라고 했습니까? 당신은 피 남편이다. 당신 덕분에 우리가 좀 살자. 그래서 십보라가 할례를 행함으로써 남자가 살면 같이 살아가는, 남자가 살았기에 남자에게 복속된, 예속된 나도 같이 살아서, 사나죽으나 우리 남편만을 위해서 사는 게 여자의 운명이고 팔자고,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여자와 남자가 선악과를 따먹은 벌이라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십자가를 이해할 때에, 방금 제가 한 이야기로 항상 출발해야 해요. 인간은 독자적으로 산다는 것으로. 그러면 산다는 것은 저주가 팽팽한 이 세상을 극복해야 살 수 있거든요. 그러면 저주를 극복하는 방법이 뭡니까? 복이죠. 복을 받아야 살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복을 받으려면, 인간은 선악과를 알기 때문에 어떤 때 저주가 오고 어떤 때 복이 옵니까?

 

선하면 복이 오고 나쁜 짓하면 저주받죠. 그러니까 자기 자신에게 뭘 자꾸 없애야 돼요? 자신 속에서 뭘 제거해야 됩니까? 약점을 삭감하고 제거해나가야 되겠죠. 빡세게 기도하고 열심히 헌금하고 교회에 충성해서, 뭐 예수님이고 뭐고 거기에 관심도 없어요. 뭘 제거하는데 급급합니까? 나에게서 흠집을, 나의 바이러스, 병균 같은 것, 나에게서 치부가 되고 치졸이 되는 그런 것들을 계속 없애나가는 거예요. 인간의 운명이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자, 가룟 유다를 봅시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따랐잖아요. 모든 걸 버리고 따랐다고요. 왜 따랐습니까? 따랐다는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가 아니에요. 예수님 덕분에 자신의 선함을 극대화시키고 싶은 거예요. 예수님이 메시아라고 하니까 그 옆에 붙어있으면 나도 어디에 간다? 천국에 갈 거라고 여긴 거예요. 이 가룟 유다의 이러한 예수님을 이용하겠다는 심보가 오늘날 기독교를 만든 게 아닙니까? 오늘날 기독교, 교회 이게 뭐예요? 예수님하고 관계없어요. 자기영광이에요. 자기가 선한 사람이 되고 싶은 거예요.

 

선해야 뭘 받습니까? 선해야 복을 받으니까. 뭐 시키는 대로 성경보라면 성경보고 성경공부 참석하라면 성경공부 참석하고 예배참석 다 하겠다는 거예요. 그저, 그저 나를 우수한 존재로, 오늘 제목을 우수한 존재라고 할까? 우수한 존재로만, 그걸 내가 이해하니까 하나님도 내가 인정한 만큼 나를 우수한 존재로 인정해달라, 확인해달라는 겁니다. 그러한 목표가 없이는 열심을 안 내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인간인 자기에게 이익이 없는데 왜 열심을 내요? 참, 그 교회에 가니까 은혜가 되더라. 뭔가 이상해? 수상해?

 

아까 첫째 시간에 이야기했죠. 성령을 욕되게 하지 말라고 했죠. 주님의 영광을 갉아먹지 말라는 뜻이거든요. 주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라. 주님의 영광이 십자가에 나타났다. 그러면 십자가를 노출시키려면 나는 잘나야 돼요? 못나야 돼요? 못나야 돼요. 제가 시편 51편 이야기를 했잖아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상한심령이라. 상한심령.

 

제가 지난번에 설교한 것을 다시 하겠습니다. 그 부분 중에. 보통 오후예배 때 그런 이야기를 했죠. 애를 귀엽다 하면서 “아빠가 좋아? 엄마가 좋아?” 이렇게 묻는데, 그렇게 묻지 말고 “아빠 되기를 원해? 엄마 되기를 원해?”라고 물어야 그 애의 솔직한 면을 끄집어낼 수가 있어요. 인간은 누구를 좋아하지 않아요. 이용대상이라고요. “아빠처럼 될래. 나는 엄마가 모델이야.” 이게 태어난 인간의 본심에 부합이 돼요.

 

인간은 자기를 좋아해요. 자기 외에 안 좋아합니다. “니가 좋아? 남이 좋아?” 애한테 물으려면 그런 것을 물어야 돼요. 목사가 “예수님이 좋아요? 여러분이 좋아요?”라고 물으면 그건 너무 노골적인 문제죠. 그건 우리가 좋지, 예수님이 왜 좋아요? 나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아직도 필요한 존재라고 간주해서 옆에 붙어있는 거죠.

 

가룟 유다는 지금 떠나려는 사람이에요. 관계청산하려는 사람입니다. 관계청산. 인간대 인간의 관계는 언약적 관계에요. 언약적 관계기 때문에, 언약적 관계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비언약적 관계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도와 비성도의 사이에는 비언약적 관계로 맺어져있습니다. 안 믿는 동창생, 안 믿는 친구, 언젠가는 이게 갈라서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성도와 성도 사이에는 언약적 관계기 때문에, 본드가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의 마지막이 뭡니까?

 

여기에 언약의 마지막이 나오죠. 28절을 누가 읽어보세요.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언약의 피죠. 언약의 피를 받은 사람이 성도다 이 말이죠. 그러면 성도는 뭐냐 하면은 언약으로 맺어졌기 때문에 언약 앞에서 개인은 뭐냐, 자기의 약점이 노출된 사람이에요. 이 사람도 약점이 노출되어 있죠.

 

그러면 성도와 성도가 만날 때는 뭡니까? 자기의 약점을 언급하는 거예요. 나 이렇게 못났다고. 나 이렇게 나밖에 모른다고. 그런 관계. 참, 그렇게 보면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허술한 구조로, 곧 무너질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시겠죠. 교회가 교회된다는 것은 목돈을 바치는 관계로 이루어져요. 목돈 바친 사람은 그 교회에서 잘 안 나가요. 푼돈이나 아예 돈을 별로 안 낸 사람은 쉽게 나가고 삐지면 나가요.

 

근데 목돈 낸 사람은 삐져도 잘 안 나가요. 3,4대 아버지가 장로부터 온 사람은 잘 안 나갑니다. 뼈를 묻었기 때문에. 삐져도, 목사 니가 나가라고 하죠. 이 관계가요, 돈, 자본의 관계에요. 교회라는 게. 자본 없이는 교회가 안 되기 때문에. 초창기에 교회 설립할 때 초창기투자금을 누가 많이 냈나? 이래 나와요. 홀 정할 때 누가 목돈 냈나? 이래 나옵니다.

 

목사가 복음 못 전한다고 욕하지 않아요. 목사가 돈 떼먹을 때 욕해요. 교인들이 복음을 알아요? 장로들이 복음을 모릅니다. 목사가 들어와서 헌금을 많이 내게 만들고, 알뜰살뜰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서 희생하고, 월급 지 스스로 자취 안 흘리고 삥땅 안 하면, “아이고, 우리 목사님 예수님 닮았어. 예수님 종 같아.” 이러고 있단 말이죠.

 

옛날에 버스 탈 때 안내양이 있었죠. 좋은 안내양이 뭡니까? 오라이~~ 이거 잘 하는 게 좋은 안내양이 아니에요. 돈 삥땅 안 하는 게 좋은 안내양이 아닙니까? 뭐 협동조합 한다고, 협동조합에서 돈 아끼는 이사장이 최고 이사장이에요. 고개 끄덕이시는데, 고개 끄덕일 수밖에 없죠. 뭐. 만났다 헤어질 때는 돈 때문에 만나고 돈 때문에 헤어지는 겁니다. 돈 끄집어내지 않을 때는 만나요. 그러나 돈 문제 끄집어내면 헤어지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부부가 이혼할 때도 마찬가지에요. 세상 관계는 돈입니다. 돈은 다른 말로 뭐냐 하면 돈은 힘입니다. 돈=힘

 

하나님의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졸지에 이 세상은 세상이 아니라 광야로 돌변해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광야에서는 돈이 귀합니까? 만나가 귀합니까? 만나가 돈보다 더 귀한 거예요. 이 교회에 돈이 얼마고 얼마나 예배당을 잘 지었고 헌금이 얼마냐가 아니라, 만나가 만나대로, 만나는 지상에서 생산 못하고 공장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내려오는 거예요. 세상에 없는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그게 교회입니다. 만나입니다.

 

교회 크게 하려고 이 핑계대고 저 핑계대고 성경 핑계대서 돈 끌어당기면 그거는 교회 아니에요. 돈 모았다고 교회되면 돈 떨어지면 다 나가버립니다. 또 바보병신들만 낚여가지고. 보이스피싱이 와가지고 또 돈 내죠. 십일조 안 내면 지옥 가는 줄 알고. 시어머니가 며느리한테 너는 남자한테 움푹 빠지라고 이야기한 것처럼, 기성 목사가 초짜 목사한테 그걸 계속 가르치는 거예요. 그런 식으로. 그렇지 않으면 니가 이 바닥에서 목사질을 못하게 만들겠다고 하는 거예요.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상대하지 않고 우리의 약점을 상대하는 거예요. 약점을 그동안 감추었던 거예요. 근데 창세기 3장에 보면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난 뒤에는 뭘 느꼈습니까? 수치를 느끼잖아요. 그러면 그 전에 창세기 2장에 보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죠. 둘 다 벌거벗었어요. 둘 다. 옷이라는 인공적인 제품이 없잖아요. 여기 인공적인 제품 없잖아요. 천상의 것, 주님의 것만 있다 이 말이죠. 인공적인 것이 가미가 안 되어있죠. 그냥 태어난 대로, 만들어진 그대로 있잖아요. 그게 수치스럽지 않은 거예요. 그게 부끄럽지 않은 거예요.

 

성령이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주님이 언약으로 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부끄러움이 없는 그 상태로 되돌려가는 거예요. 그러면 뭡니까? 수치가 있음을 고백할 때 그걸 감사히 여겨야 될 게 아닙니까? 여기 김치공장 사장님이 계시지만, 배추가 펄펄 살아서 숨 쉬고 있을 때 뭘 뿌립니까? 소금을 뿌리면 지가 알아서 기어들어가죠. “잘못했습니다.”하고 기어들어가죠. 매일같이 소금뿌리는 분이 있어야 돼요. 매일같이.

 

나 복음 전한다, 뭐 어떻게 한다, 할 때에 놀고 있네. 내가 네 과거를, 나는 지난여름에 니가 한 일을 다 알고 있어, 라고 하시는 그런 분이 있어야 돼요. 그런 분이 없으면 여러분들은 진짜 가룟 유다입니다. 예수님이 그 역할을 하거든요. 예수님이. 독자적으로 독립하지 말라고. 니 까불지 마! 니를 내가 안다고. 내가 알아. 지금 당장 죽어도 할 말이 없을 인간이 어디서 잘난 체 해?

 

누군가는, 소의 고삐라는 것이 있죠. 고삐. 고삐가 뭐냐 하면 소의 코에 끼워서 까불면 땡기는 그 기구가 있잖아요. 십자가가 우리의 고삐가 되어야 해요. 주님은 우리보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귀엽다고 오는 게 아니에요. 우리의 죄를 딱 걸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걸린 것을 감사하고 고마워하고. 그때 나에게 지적질하고 나를 우습게보고 나를 함부로 대하는 그 사람에게 우리가 할 말은 뭐냐, “사랑합니다.”에요. 그게 사랑이에요. 그게 부부간의 사랑이에요. 사랑합니다. “제발 떠나지 마세요. 나 당신 없으면 인간이 안 됩니다. 당신 없으면 내가 잘난 체 하기 때문에 인간 자체가 안 됩니다. 계속해서 함부로 대해주시고 계속해서 나를 밟아주세요. 주여!”

 

가룟 유다가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까? 안 했었습니까? 못하죠. 못한 거예요. 이용한 거예요. 오늘날 교회하고 똑같아요. 목사가 복음적으로 교인들 밟아버리면 그 목사 못 견딥니다. 잘립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피 믿어서 구원받겠다고 잘난 체 하고 돌아다니는 것, 그거 예수 아닙니다. 그거 십자가 아니에요. 조작된 거예요. 하나님에 의해서 마귀를 허락한 거예요.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십자가는 사실은 개인문제에요. 그 개인이 모여서 집단이 되지만. 그래서 개인구원은 없고 집단구원인데. 집단구원이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찾아오되 그 관계성, 그 관계성이 똑같이 적용될 때 그 두 사람의 관계는 성도관계, 언약관계로 맺어지는 겁니다. 십자가만 자랑하는 관계로 맺어지는 겁니다.

 

다시 이야기하면 창세기 2장에는 뭐였다? 수치를 안다? 모른다? 수치를 모른다. 나의 약점을 쥐고 있고 그분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면서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로 계속 살아주시니 감사합니다.”라고 할 때에, 그 사람 앞에 나설 때 우리는 수치를 느낍니까? 안 느낍니까? 안 느껴요. 고마움이 느껴지죠. 고마움이.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해서 “주여, 제가 나쁜 짓을 했습니다.”라고 하는, 이거는 지금 주님하고 남남이에요. “주여, 제가 이렇게 나쁜 짓을 하다니! 제가 실수했습니다.” 이래 나오면, 그거는 지금 주님하고 거래하고 있는 거예요. 그거 예수 이용하지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나쁜 짓 했다고, 자기 자신이 상한심령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고, 주님 앞에 쪼르르 달려와서 자랑질 해야 돼요. 또 다시 이렇게 개판인 것을, 죄인 중에 괴수라는 말이 성경에 문자로만 있는 줄 알았는데, 주여, 이게 실감나대요. 뭐 이런 식으로.

 

아까 심은경이 ‘하얀 나비’ 노래 부르는 것을 봤잖아요. 악바리처럼 애를 키우겠죠. 실제로 그런 일도 많고. 특히 그런 일이 부천이나 부평 쪽에 많아요. 왜냐하면 피난민들이 그쪽에 많이 살기 때문에. 6.25 때. 저 남쪽에는 자갈치시장에 있고. 대구는 어중간해서 다 올라가버리고. 서울은 경기도 쪽 부천, 부평 쪽에 피난민들이 많이 살아요. 그래서 어떤 국회의원이 부천, 부평이 후지다고 해서 욕을 먹은 적이 있거든요. 다음부터 표 안 찍어준다고. 사실 말이 맞잖아요. 그쪽에 있는 사람들.

 

사람은 가난하면 가난한 사람들끼리 모여야 살맛이 나요. 뭐 가난한 사람은 근처에 오지도 못하겠지만. 집세 때문에. 자기가 어느 정도 못 살아도 못 사는 것이 아니고 얼추 사는 것처럼 보인다니까요. 지하에 있잖아요. 반지하나 지하. 그 동네에 가면 다 그렇게 살아요. 꿇리지 않죠. 다 같이 담배 피우는 동네면 다 같이 담배 피워도 괜찮아요. 근데 고급아파트에서 담배 피우면 큰일 나거든요.

 

그 동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죄를 알겠습니까? 아니죠. 악바리만 남죠. 나라에서 안 도와주나? 이렇게 악바리만 남지. 청와대 앞에서, 국회 앞에서 데모하자. 이거만 남지. “주여, 나로 하여금 죽음과 맞닿게, 죽음을 누구보다도 깊이 있게, 죽음이 주는, 아슬아슬하게 죽음과 병행해서 살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미리 이렇게 살지 않죠. 그런 사람에게는 조금만 어떤 좋은 일이 생기면 그걸 굉장히 감사하게 여깁니다.

 

사함을 받은 자가 어떻게 한다? 많이 사랑하게 되죠. 사함을 받은 자가. 자기 주제파악이 된 사람. 세리와 바리새인 가운데 세리가 서울대 합격하고 저쪽 바리새인은 서울대 불합격했어요. 아무것도 한 것 없이 그냥 죄인입니다, 라고 엎드렸을 뿐이에요. 근데 그 모습이 우리 모습이어야 된다는 거예요. 어디 앞에서? 언약구조 안에서.

 

언약구조 안에서 우리는 뭐냐, 주께서 우리 약점을 꽉 쥐고 있는 거예요. 그 약점이 주님 손에 가있다는 것을, 그걸 굉장히 감지덕지하게, 고맙게 여겨야 돼요. 이 말은 내 약점을 내 손에서 처리하거나 관리할 이유가 전혀 없다. 주님이 꽉 쥐고 있으니까. 나의 본색을 쥐고 있으니까. 나의 근원적인 핵심을 그쪽이 꽉 쥐고 있으니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막사는 일만 남아있어요. 막사는 것. 막사는 것만 남아있어요.

 

그런데 그 막사는 것도 언약을 위해서 막살아야 하기 때문에, 가룟 유다뿐만 아니고 열두 제자에게 어떻게 합니까? 예수님을 배반하고 도망치게 만들어버렸어요. 그러면 그 열두 제자가 나중에 열두 사도가 되는데, 지금은 가룟 유다 빼고 열한 사도, 그들이 나중에 자기 자랑을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자신들의 어떤 약점을 주님 앞에 쥐임을 당한 거예요? 나는 예수님을 배반했다. 뭐가 무서워서? 이 세상이 무서워서.

 

이 세상이 광야로 안 비친 거예요. 광야에 사는 것은 만나만 있으면 돼요. 국회의원, 서울대학 뭐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광야는 만나만 있으면 살아요. 그러나 세상에 살려면 얼추 높은 계급에 좀 들어가야 돼요. 왜? 낮은 계급은 경쟁이 너무 심해서 안 돼요. 모든 사람에게 물어보세요. 사람의 행복은 뭐냐, 내 행복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 행복입니다. 자유거든요. 자유가 행복이에요. 왜? 신은 원래 자유로운 존재가 신이에요. 신이라고우기면서 부자연스러우면 이건 종이 되기 때문에 안 돼요. 뭐든지 할 수 있어야 돼요.

 

그럼 뭐든지 할 수 있으려면 뭐가 넉넉하고 풍부해야 돼요? 돈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신이 신답게 행세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에 누구를 부러워합니까? 부자를 부러워하는 거예요. 그럼 부자가 돈을 갖고 있잖아요. 그러면 내가 자유롭게 되어서 우리는 누구의 자유권에 들어가야 돼요? 부자권에 들어가야 되는 거예요. 자진해서 부자의, 딸랑딸랑 종이 되어야 돼요. 거기서 뭐가 떨어져도, 뭐 콩고물이나 부스러기나 상에서 떨어지는 떡 부스러기라도 있기 때문에. 부자에게 가서 거기에 누워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맨날 돈 없는 자기들끼리 해가지고는 경쟁이 너무 심해요. 부자들 들어가는데 너나 나나 전부 다, 여기 부자 끈 하나 쥐기 위해서,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 하는 거예요. 어떤 사람은 공부를 잘해서, 어떤 여학생 같으면 인물이 뛰어나가지고, 어떤 몸매가 있으면 몸매로 밀어붙이는 것, 어떤 것은 말 잘해서 유튜브에서 말로 밀어붙이는 것, 아나운서로, 노래 잘해서 가수로 출세하겠다는 것, 운동해서 운동으로 뛰어 들어가겠다는 것, 여자골프 이런 것. 어떻든지 간에 이 중심권을 들어가 보려고 오늘도 과외 받고 뭐 이렇게 합니다.

 

외국에 나가서 보면 외국유치원은 가르치지도 않아요. 그냥 놀아요. 그냥. 왜? 경쟁대상이 없기 때문에. 복지가 잘되어있기 때문에 뭐든지 해줘요. 그래서 외국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가 이렇게 놀아도 되는가? 라고 여깁니다. 빨리 한국에 들어와야 돼요. 한국에 들어와서 우리가 지옥인 것을, 자기가 지옥에 걸 맞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신이 아닌 것을 알아야 돼요. 돈 없으면 인간 대우를 못 받는다는 것을 즐감해야 돼요.

 

그리고 그것만이 유일한 현실이라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돈 있는 세상만 세상이지 돈이 없으면 지옥이지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온 몸으로 이게 느껴야 돼요.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누구한테 있다? 내가 스스로 독자적으로 신이 되려는 나의 이 썩어빠진, 상한심령이 있음을 알아야 돼요.

 

만나란 바로 내가 엉터리일 때 만나가 의미가 있는 겁니다. 내가 잘나면 만나가 의미가 없어요. 내가 잘난 존재면 돈이 필요하지 만나가 필요 없습니다. 만나가 필요한 사람은 나는 순 약점만 있고, 죄인 중에 괴수고, 내 재주는 죄 짓는 재주밖에 없음을. 그 죄가 뭐냐, 나는 나밖에 모르고 나만 방어하고 나 사수하고 나 잘난 체 하는 그것만, 하루 온종일 그것만 생각하는, 나의 약점이 안 들키기만을 원하는, 그게 바로 나의 죄거든요.

 

십자가와 관계 맺어지게 되면,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는 가식과 위선으로 몰두하게 됩니다. 누가 내 약점을 캐내지는 않는지. 도대체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얼마면 내 약점을 입다물어주겠어? 이렇게 나가요. 그러나 십자가와 관계 맺어져있으면 이제는 노골화됩니다. 내 주변에 나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더는 소원이 없다. 나를 좀 자근자근 밟아주시고. 조금만 이렇게 잘났다 싶으면 여지없이 또 밟아버리고. 서로의 약점을 쥐는 관계를 유지하시기 바랍니다. 수치를 모르는, 서로가 지적질 할 게 없음을 깨닫는 만남. 이게 바로 사랑의 만남입니다. 사랑의 만남.

 

약점이 많아서 함부로 하자가 아니에요. 약점이지만 십자가를 보여주는 약점이기 때문에 천하보다 귀한 분이죠. 그래서 성경은 귀하다를 어디다가 붙이느냐 하면은 탕자에게 붙입니다. 잃어버렸다가 얻은 것, 잃어버렸다가 얻었을 때 그게 귀한 것이죠. 사람은 귀하지 않지만 그게 귀한 거예요. 그것의 쉬운 예가 뭐냐 하면 요르단 수도가 암만입니다. 암만에 가면 어떤 예술이 있느냐 하면은 조그만 병에다가, 색깔 있는 모래가 접시에 담아있어요. 색깔 있는 모래를 순서대로 하나씩 집어넣어서 병에다가 낙타 같은 것을 조각한다고요. 그러면 병에서 보면 이 순서가 보여요. 순서가. 낙타가 그려진 순서가 보인다고요. 어떤 경과가 실감나게 눈에 보이잖아요.

 

우리 성도는 뭐냐, 십자가가 우리 몸에 배어있음을, 경과를, 꼭 모래가 담긴 예술병처럼,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손질하고, 어떤 식으로 이루어간다는 그 경과를 투명하게 보여주는 병으로 사용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뭐에 증인이 된다? 예수의 증인이 된다는 거예요. 예수의 증인. 근데 우리는 이 말씀대로 돌아가게 되면 또 검은 것으로 덮어버려요. 이 자체가 우상이 되는 거예요. 나 예수 믿는다. 우상 돼버렸어요. 경과를 보여줘야 하는데 예수 믿는 내 존재를 보여줘 버리면 이 경과가 안 보이잖아요. 천으로 덮어버렸으니까.

 

성령께서 와서 이걸 들춰버립니다. 주님 때문에, 주님이 네 수치를 꽉 쥐고 있기 때문에, 니가 이렇게 성도가 된 거예요. 가룟 유다는 이 관계가 없어요. 가룟 유다하고 다른 제자들하고 다를 바가 없어요. 똑같아요. 똑같습니다. 근데 가룟 유다는 주님 앞에서 내친 거예요. 왜? 가룟 유다에게는 빠져있는,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그림이 없어요. 아무리 이래 봐도 그리스도가 빠이빠이 한 사람이에요. 그런데 가룟 유다의 병속에 남아있는 것은 뭐냐, 지 잘남이 남아있겠죠. 얼마나 잘났으면 스승 팔아먹었다고 자살까지 하겠습니까?

 

그러면 가룟 유다의 마지막 색깔 모래는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자살모래가 들어가는 거예요. 목매어 자살하는 모래. 주께서는 이것을 비언약의 대표자의 계시로 활용해버립니다. 그런데 여기에 베드로라면, 베드로가 세 번씩 주를 부인했잖아요. 부인했는데, 사랑의 관계로 보게 될 때, 제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주님이 먼저 저를 사랑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이 오셔서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의 잘남과 나의 의미를 내 쪽에서 만들 필요조차가 없는 거예요.

 

만나 먹었으면 인생 실패한 것이 아니에요. 이미 성공이 완료된 겁니다. 우리 안에 십자가 들어오면 완료된 인생이에요. 완료된 인생이기 때문에 이 병을 가지고 어디에 굴려도, 이 병은, 십자가의 언약적 기능은 계속 발산되게 되어 있어요. 그동안 여러분들을 괴롭히는 사람들을 여러분들이 본능적으로 멀리했을 거예요. 그런데 멀리하지 마세요. 괴롭히려는 사람에게 당할 때 괴롭히는 사람을 주님이 보냈다는 생각을 한번 해보세요. 주님이 보낸 고삐일 수가 있고, 주님이 저 사람을 통해서 나에게 소금 뿌려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잘난 너야! 평균적으로 잘난 너야! 니가 평균보다 못해!” 배추에 숨죽이듯이 뿌리게 되면, 우리는 내가 더 이상 내가 내 수치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매사가 감사거리고, 고마움거리고, 하나님의 은혜의 덩어리인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이제는 성공실패, 선악이라는 것을 넘어서버렸거든요. 왜냐하면 처음에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니까. 자기 자신에 대해서 더 이상 이제는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주님과 더불어 약속합시다.

 

자,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를 늘 지적질 해주시는 분이시기에, 그때마다 주님을 사랑하라고, 반응과 고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세상 살아가면서 남들 앞에 근사하게 보이려고 힘든 인생을 살아왔습니까? 그 가식과 위선적인 것을 이제는 그만두게 하여주옵소서. 주님에 의해서 주님의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림을 그리게 하여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