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에 대한 예언
이근호 2019년 5월 1일
본문 말씀: 창세기 49:8-12
(49:8)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49:9)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49:11)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49:12)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평소에 사회에서 사람들은 사람만 상대합니다. 그러다보니 세상 사는 요령이 정립됩니다. 남들에게 잘 보이기 용으로 살면 그만이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나올 것은 자기 내면의 탐욕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에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계시가 우월한 힘으로 작용합니다.
자기 잘남으로 버티는 인간의 본성은 우월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박탈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주님의 공로나 주님의 뜻만 드러나게 됩니다. 성령의 열매라는 것도 그 전제요건이 있습니다. 정과 욕심을 십자가 못박히는 현상과 결과로서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 구약에서도 이 원칙이 연발됩니다. 맏이에게 축복하고 싶어했던 이삭은 막판에 일관성있는 하나님의 결정에 이삭의 뜻은 무산되고 맙니다. 언약을 받은 자가 곧 축복권자라고 여겼던 자가 이삭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뜻을 좌절하는 바로 그것이 복의 원리임을 알리셨던 겁니다.
이 원칙은 요셉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았던 그 사실 자체가 요셉을 꿈의 내용대로 다루시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조치였습니다. 요셉 스스로가 원대한 자기 계획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편하고 싶은 것은 모든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본성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꿈의 내용대로 요셉의 운명을 주도하셨습니다.
이런 사실에 대해서 언약 받은 당사지인 야곱의 문외한처럼 다루어졌습니다. 요셉의 형제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본성대로 움직이고 그것만 챙기면 그만이었습니다. 나중에 야곱이 요셉을 만나고 난 뒤에는 야곱언약이 야곱의 배제를 통해서 하나님 홀로 달성해나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안 야곱은 이제 요셉에게 덮어 씌어진 야곱언약의 성취과정을 그대로 예언의 형식으로 12아들에게 확대시킵니다. 각 아들들이 이제부터는 ‘보편화된 요셉’이 되는 식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훌륭해서 왕가를 이룬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일종의 은사요 기능입니다. 주어진 예언의 계시를 위하여 유다가문은 혹독하게 하나님으로부터 다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예언의 전개과정에서 유다자손들의 뜻들은 가혹하게 배제되고 거부당합니다. 타고난 인간의 욕심들은 하나님의 예언의 우위성으로 인해 욕심이 담고 있던 소원성취는 여지없이 좌절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예언의 내용들은 오직 예언을 주신 주님 스스로의 성과요 공로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다른 지파들은 상대적으로 유다지파에게만 찬양을 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유다지파가 통치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통치라는 것은 다른 지파들이 자발적으로 유대지파에 굴복한다는 말이 아니라 도리어 유다지파가 이스라엘 외부나 내부에 대해서 사정 봐 주지 않는 심판주 역할을 맡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판없이는 통치도 없습니다. 가혹한 심판이 성사되려면 유다지파가 늘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에 우선적으로 희생적이어야 하는 겁니다. 창세기 27:29에 보면, “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삭의 아들인 에서와 야곱에게 있어, 에서는 자기 몸의 결핍을 채우면 그만이었습니다. 하지만 반면 야곱의 관심사는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일에 자기가 참여하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몸 결핍에 우선이었던 형 에서는 그만큼 하나님의 일관된 일에 소홀하고 무관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야곱을 섬지는 족속’이 되어야 하는 저주로 마감되는 운명으로 이어진 성격이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다 지파에 대한 다른 지파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통치란 곧 섬기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償)이라는 것도 내 것 챙기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0:35에 보면, 도리어 주는 것이 복된 자입니다.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또한 고린도전서 9:18에서 사도 바울의 규정하는 상이란, 복음 전파 그 자체입니다.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곧 요셉처럼 섬김의 정신 그 자체가 통치자의 조건이 되고 심판자의 입지가 됩니다. 따라서 유다자손을 통해서 하나님 예언에 입각한 철저한 희생자가 등장하게 되고, 그런 희생자만 유일한 심판주가 되는 겁니다. 이러한 유다지파의 기능은 진정한 완성자를 만나 인수인계가 성사됩니다. 유일한 지파라는 자격으로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실로’라는 지명이 나옵니다. 이 실로라는 지명은 가나안 땅에 입성한 언약궤와 성막이 최종 머무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구현하는 기능이 발휘되어야 될 구심점이 되는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18:1에 보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 땅이 이미 그들의 앞에 돌아와 복종하였음이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정된 공간이 하나님께서 인간과 헤어지면서 그 공간적 의의가 삭제당합니다. 시편 78:59-60에 보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과 만나서 거처를 같이 하신다’는 취지가 있는 실로의 취지는 특정 인물로 완성되어 친히 인간 세상에 대가오십니다.
그 취지가 근거가 되는 심판을 행사하시기 위해 맹수 사자와 같이 맹렬한 심판주로 오시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5:5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 책과 그 일곱 인을 떼시리라 하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봐주는 것도 없고 사정봐주지 않는 가혹한 심판을 행사하시는 분이 바로 유다의 자손으로 실시됩니다. 젖과 포도의 축복은 모두 이 왕지파에 합당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예언 앞에 늘 자신의 뜻이 좌절되는 바로 그것을 복으로 여길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88강-창 49장 8-12절(유다에 대한 예언) 1904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8-12절입니다. 구약성경 78페이지입니다.
창세기 49:8-12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에게 야곱이 이런 축복을 했다는 것은 야곱언약이 품고 있는 그 내용이 한껏 펼쳐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것은 사람이 유다자손에게 복이 온다고 해서 유다자손이 대단한 사람이고 훌륭한 사람이고 인격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고 하면 곤란합니다. 우리가 보통 세상에서는 누굴 상대하느냐 하면, 사람 대 사람이 상대해요. 피곤하지요.
사람하고 상대하다 보니 그 사람에게 보여주는 식으로 살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보여주는 것은 뭐냐 하면, 그 사람을 의식해서 보여주는 거지요. 그 사람을 의식한다는 것은 나 이만큼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로 잘났어, 하는 그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고 말았어요. 누가 이기는지 경쟁하는 거지요. 그러나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야곱이 아들에게 축복하는 것은 신약으로 말하면 성령의 은사라는 겁니다.
은사란 말은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그 사람을 통해서 드러나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이 필요한데 그 사람이 스스로 자기가 잘 보이려고 하고 자랑거리로 삼는 것을 제거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거예요. 예를 들면 십자가 옆에 있는 강도가 구원을 받았다면 직업이 강도고 나쁜 사람이라는 통념, 누가 봐도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자신의 공로만, 자신의 은혜만 마음껏 드러나는 거예요.
이것이 십자가 옆의 강도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성령의 은사라는 이름으로 드러나는 겁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온유와 자비와 양선과 형제우애, 이런 것이 있는데 갈라디아서에 보면 반드시 전제하는 것이 뭐냐 하면, 너 자신을,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러한 일로 인하여 결과로 드러나는 것이 성령의 은사에요.
그것이 성령의 축복이라면 야곱이 유다에게 축복했을 때 유다 저 사람은 훌륭한 사람이라는 인식을 하면 안돼요. 훌륭하기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기능이 달라서 그래요. 하는 일이 달라서 그래요. 그 예는 요셉의 경우에 분명히 나왔습니다. 열 차례 가까이나 요셉에 대해 언급하면서 요셉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에요.
요셉은 남이 갖지 않는 것을 추가로 짊어지고 간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괴롭히고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이웃에게 바깥으로 전달되는 작동에 요셉이 말려든 겁니다. 요셉이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요셉과 상관없이 하나님이 훌륭한 분이지요. 하나님이 훌륭한 분인데 그걸 누가 방해하느냐? 나도 같이 훌륭하다, 가 방해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대단하고 훌륭한데 나도 같이 훌륭하다고 해줘, 라는 이것이 하나님의 훌륭함을 아주 가까운 그 안에서 방해가 되고 훼방질이 되는 마귀 짓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일 비슷하게 나올 때에 그 사람보고 훌륭하다고 하지 마세요. 남의 사정을 우리가 모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쥐어 터졌는지, 얼마나 쥐어 터졌기에 저런 일을 하는지 우리는 모르지요.
모르니까 예의상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봉사도 다 하시고.” 이렇게 하지만 본인은 지금 봉사할 마음이 손톱만큼도 없는데 주님께서 목 졸라서 봉사하고 있는 거예요. 왜? 그게 정설이니까. 하나님은 그런 식으로 일하니까 그렇습니다. 지금 이 축복하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이 훌륭해서 축복한다 하지 말고 야곱이 뭘 뒤집어썼어요. 귀신 뒤집어 쓰이듯이 뭘 야곱이 뒤집어썼는데 야곱이 뒤집어 쓴 것을 가지고 야곱언약이라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야곱에게 찾아와서 야곱인생을 함부로 다루시고 갖고 노시는 거예요. 창세기 27장에 보게 되면, 나이가 많아서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삭이 축복을 하는데 사전에 축복 주기로 이미 결정이 된 겁니다. 맏이 되는 에서에게 복을 다 넘겨주기로 사전에 이야기가 되어 있어서 형식만 남은 거예요. 형식도 야곱이 못하는 형식, 에서만 할 수 있는 사냥의 고기를 가지고 내게 먹게 해주면 내가 복을 준다는 식으로 완전히 짜고 치는 고스톱입니다.
이것은 뭐 구태여 축복 주는 형식을 취한다는 자체가 이상할 정도에요. 그냥 줄 수도 있는 문제인데 격식을 갖춘다고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런데 축복을 줄 때 축복의 내용은 이미 결정되어 있어요. 그 축복의 내용을 보게 되면, 오늘 본문 내용과 유사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부터 먼저 보게 되면 8절에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유다 이름 자체가 찬송이고요.
그 다음에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이거 하고 창세기 27장 29절에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하고 이삭이 에서인줄 알고 축복한 내용이 이거예요.
이삭이 자기가 지금 맏이 에서한테 한다고 철석같이 믿고서 축복한 내용입니다. 야곱이라고 생각도 못했어요. 그런데 축복받는 이 야곱은 에서인 듯, 에서 아닌, 에서 같은 야곱,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말이지요. 이삭언약이라고 합니다. 이삭이 받은 하나님의 언약이 이삭언약인데 언약을 받은 자가 언약의 실행자가 아니라는 사실이에요.
언약을 받은 자가 언약의 실행자가 아니에요. 언약을 주신 하나님이 실행자가 되는 겁니다. 이삭언약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이삭이 방해가 돼요. 그 이삭을 닮은 자가 누구냐 하면, 맏이 에서입니다. 에서가 사냥을 하고 돌아오는데 배가 고팠던 모양이지요. 평소에 형이 배가 고프면 뭐든지 먹을 것을 찾더라 하는 반복적인 행위를 사전에 유념했던 야곱은 호시탐탐 야곱이라는 그 이름, ‘빼앗는 자’ 그대로 뭘 빼앗으려고 했어요.
그래서 에서가 돌아오는 시점에 온통 팥죽 냄새를 다 피워놓았다는 말이지요. 팥죽이라는 것이 냄새가 그렇게 나는지 아직도 저는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만 냄새가 날 수도 있겠지요. 저도 어릴 때 팥죽 많이 먹었는데 냄새가 난다는 기억은 별로 없어요. 동글동글한 덩어리만 먹고 싶지 냄새는 잘 모르겠는데 그 팥죽 냄새에 반해서 짐승처럼 에서가 팥죽 달라고 덤벼듭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게, 성경에서 이상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지만 여기서도 이상한 것이, 어떻게 음식과 장자 됨이 딜, 그게 교환의 대상이 되는 겁니까? 참 이상하지요. 음식과 옷을 바꾼다면 물물교환이 되는데 음식과 운명하고 바꾸는 것이 과연 성사될까요? 에서는 무엇이 급하냐 하면, 현재 내 몸이 필요한 것을 달라고 했고 야곱은 뭐냐?
하나님의 일관성, 하나님의 원래의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뜻은 변함이 없다는 그 뜻을 원했던 겁니다. 맏이에게 복이 주어진다는 것. 하나님의 복 주시는 기능에 자기가 포함되고 싶어 하는 마음입니다. 이걸 달리 이야기하면 에서라는 인간은 그냥 사람만 상대한 반면에 야곱은 하나님을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 같으면 무엇을 원했겠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대하고 목표로 해서 일관성 있게 일하고 계실까, 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아버지가 살아 있는 한 복을 주는 것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아들 둘 한테 일어날 일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아직까지는 그 시기는 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 시기에서 하나님의 일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태어날 때 하나님이 정해준 그 일, 흐름, 그 노선이 있는 거예요. 그 노선자체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자기에게 필요했고, 그걸 쉽게 말해서 하나님의 약속이라 하지요, 그 일에 필요했고 에서는 자기 배고픈 그것만 해결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더 알기 쉽게 말하면 에서는 돈을 원했고 야곱은 하나님의 복을, 영생의 복을 원한 겁니다. 그래서 성경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긴 것으로 되어 있지요. 왜냐하면 에서가 야곱을 섬기니까 결국 마지막에 이긴 것으로 되지만 그러나 이겼다고 해서 오늘날 현대인들이 돈보다 영생을 더 원하겠습니까?
넓은 길보다 좁은 길을 더 원하겠습니까? 자기재산보다 예수님을 더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그러니까 에서와 야곱에서 우리는 에서를 특이하다고 보면 안 되고요, 에서가 큰 잘못을 했다고 보면 안 되고요, 야곱이 참 특이한 사람이라고 보셔야 돼요. 야곱은 인간이 갖고 있는 동물적인 본성을 벗어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갖고 있는 이 특이성이 요셉 때에 오면 어린요셉에게 하나님이 꿈을 꾸게 합니다. 다른 형제들은 인간들만 상대하면 돼요. 왜? 너도 인간이고 나도 인간이니까 인간들만 상대하면 그만인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요셉은 뭔가 하나님이 안겨준 것이 있어요. 그걸 약속이라 해도 되고 꿈이라고 해도 괜찮아요.
이것은 하늘에서 주신 거예요. 하늘에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요셉이 하나님을 상대하고 싶어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요셉을 인간적으로 살지 못하도록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의 관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요셉이 국무총리를 꿈꾼 것이 아니에요. 요셉이나 다른 형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자기 몸 편한 게 최고에요. 그다지 욕심내기도 싫어요. 힘들어요. 국무총리 되어서 뭐하려고요.
그러니까 요셉은 편하게 살고 싶어도 자기의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를 않습니다. 지금까지 설교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성도의 특징은 뭐냐? 본인의 뜻이 있어요. 그런데 그 뜻대로 안되게 해주신다는 것. 귀신이 씌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 뜻대로 안되게 해준다는 것, 내 뜻대로 고집하도록 그냥 방치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성경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성경이 아예 찾아와요. 찾아와서 성경을 연구하지 않더라도 나 자신이 성경속의 인물이 되어버리고 성경의 말씀에 부합되도록 강제로 이끄시고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아이고 믿음이 좋으네요.”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요.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고 본인은 본인 자신의 모든 뜻이 삭제당하고 강제당하고 배제당하기 때문에 그게 굉장히 아프고 고통스러운 겁니다.
남들은 훌륭하니 존경의 예를 표합니다만, 그렇게 예의상 이야기를 한다지만 본인은 그렇지 않아요. 힘들어요. 그래서 이야기했지만 남의 사정을 모릅니다. 지금 야곱이 가졌던 그 특이성이 요셉의 꿈으로 요셉을 인도했고 그로 말미암아 요셉의 삶과 그 외 형제들의 삶이 확연하게 다르게 되어버렸어요.
그 다음부터 어떻게 되느냐? 야곱이 요셉을 통해서 야곱언약이 이루어진 것을 알고 그 야곱언약, 요셉의 꿈을 기반 해서 그 요셉의 꿈을 열 두 아들에게 할당하고 배당을 해줘버려요. 그러면 열 두 아들은 뭐냐? 요셉의 일반화가 되는 겁니다. 이스라엘 내부에서. 요셉을 미워했고 요셉을 질투해서 팔아넘겼던 그 다른 형제들이 이제는 각자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을 할당받는, 무지개 같은 색깔의 일부를 할당받는 입장에 놓인 겁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꿈에 의해서,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서 요셉이 심하게 다뤄졌다면 이제는 누구차례냐 하면, 야곱의 열두 아들 차례입니다. 요셉이 갔던 길을 그들이 가야 돼요. 따라서 오늘 본문 보면서 ‘야, 유다 훌륭하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유다가 훌륭한 것이 아니라 유다는 이제 죽었어요. 이 예언의 말씀에 입각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유다는 자기 뜻대로 살 수가 없습니다.
날마다 깨져야 돼요. 자기 뜻이.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소방관에 지원을 했는데 소방관에 지원할 때 “엄마, 나 소방관에 지원했어.” 하면서 소방관의 한 달 월급이 어떻고 위험수당이 얼마고 죽죽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우리 아들 촌에서 고등학교 나왔지만 이제는 소방관이 되어서 공직에 있구나.’ 동네 입구에 플래카드 붙였지요. 누구 아들이 9급 소방직에 합격, 했는데 제천에서 불 끄다가 죽어버렸다.
월급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가 불 속 기어들어가라고 주는 월급이거든요. 부모는 좋지요. 따박따박 통장에 월급이 들어와서 좋은데 아들은 불만 나면 불구덩이 속으로 제일 1번으로 뛰어들어야할 입장이라는 말이지요. 소방관 말고 간호사가 뛰어 들어갈까요? 어부가 뛰어들까요, 농부가 뛰어들까요? 소방관은 불나면 제일 먼저 불 속에 뛰어 들어가라고 있는 것이 소방관이에요.
혜택은 다른 사람이 입고.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일종의 상입니다. 세상의 상은 내 것이 되지만 그것은 저주받은 에서가 그 짓 하는 거고요. 그러나 복을 받은 자의 상은 뭐냐 하면, 사도행전 20장 35절에서 말씀하는 것처럼,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했어요. 교회에서 상이라고 한다면 받아 챙기는 것부터 먼저 생각한다고요.
그러나 받아 챙기는 것이 아니고 주는 거예요. 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하는 이것이 상이 되는 겁니다. 고린도전서 9장 18절에서 사도바울의 상은 뭐냐? 자기가 질문을 해요. 사도바울 스스로.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이렇게 스스로 질문을 던져놓고 답을 스스로 해요. 내 상은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복음 전하는 것 자체가 상이라는 겁니다. 내가 힘들게 고생할 테니까 너희들이나 천당가거라. 이렇게 그런 일을 하는 것 자체가 상이 되는 겁니다. 누가 이 상을 원하겠습니까? 상이라고 하니 보너스, 한우갈비 세트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받은 한우갈비세트 남 줄 수 있는 거예요. 주는 것이 복이 있으니까.
상이라는 것이 뭐냐? 줘놓고 대가나 반대급부가 전혀 기억이 안 나는 것이 상이 되는 겁니다. 줬으니까 30배, 60배, 백배, 그것 계산하는 그것은 상이 아니에요. 주는 것이 아까워서 몇 달, 몇 년 우려먹고요, 부모가 자식한테 돈 좀 보태놓고 십년, 이십년 우려먹어요. 키울 때 3억이 들어갔느니 하고 나중에 월급 받거든 이자까지 쳐서 한 달에 백만 원씩 내놓으라는 이런 식으로 계산하는 것은 상이 아니지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딜이라는 것, 야곱이 형과 딜, 교환한 것은 뭐냐? 에서는 자기를 챙겨서 자기가 강화되는 거예요. 더욱더 만족스럽게 되는 것을 에서는 추진했다면 야곱은 하나님이 장차 이 땅에 와서 참여하는 그것을 원했던 겁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자가 되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옆의 강도가 되든, 세리가 되든, 창기가 되든, 그 사람은 상 받은 자요 복 받은 자에요. 남들이 뭐라고 비난하든 간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얼마나 원망했겠습니까? 내가 뭘 잘못해서, 나보다 못한 인간들은 눈 버젓이 뜨고 사는데 나는 뭘 잘못해서 날 때부터 소경인가? 그러나 그 사람이 예수를 만나고 난 뒤에 바로 소경된 그것이 상이 된다는 사실, 그게 믿음인 것을, 그걸 누가 알았겠어요. 맨 날 남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남과 비교해서 내가 더 낫다. 그렇게 하지 말고.
이게 오늘 본문에서 은사에요. 그러면 유다가 받은 은사가 뭐냐 하면, 심판하는 은사를 받았습니다. 누굴? 외부세력뿐만 아니고 이스라엘 내부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원수를 치고 박살을 내는데 어느 정도의 분노로 심판하느냐 하면, 마치 사자가 화를 낼 때 나오는 분노차원에서 유다는 심판을 행사합니다.
본문 8절에 보면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찌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이스라엘의 원수가 아닙니다. 유다의 원수에요. 유다의 원수라는 말은 다른 지파가 다 포함되는 겁니다. 네 아비의 아들들이 내 앞에서 전한다.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어느 누구도 유다지파 외에 이스라엘에서 심판의 역할을 하는 지파는 아무도 없다.
다른 지파의 운명은 뭐냐? 유다지파가 제대로 심판을 행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그들의 운명도 같이 결과로 결정되는 거예요. 유다지파가 충실히 심판을 해줘야 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이 어떻게 구원받느냐의 운명의 결정은 주님께서 십자가로서 구원받을 우리 자신을 충분하게 심판을 해줘야 돼요. 저주를 해주셔야 돼요.
우리의 모든 뜻을 완전히 작살내주는 그것이 성사가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세리가 되고 창기가 되고 강도가 되더라도 구원에 성공하는 겁니다. 그게 십자가에요. 십자가 앞에서는 아무도 의인이 없습니다. 죄인밖에 없어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조금이라도 내가 잘한 것을 찾아내려고 애를 씁니다. 옛날 초등학교 때 친구의 통지표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친구의 통지표는 일관성이 있어요. 가, 가, 가, 가, 가.
국어 가, 산수 가, 자연 가, 체육 가, 가, 가, 가, 가. 집안도 좀 못난 집안이에요. 애가 공부할 마음도 없어. 가가가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친구는 수수수수수, 이렇게 나오는 친구가 있어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가가가가가가, 입니다. 가가가가가가가가가가. 그래놓고 구원되었을 때에 우리는 유다를 찬송할 수밖에 없어요. 더 정확하게 말해서 그 유다지파에서 나오는 자손을 찬송하지요.
유다의 자손, 다윗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바로 메시아를 찬송하는 거예요. 이것은 은사입니다. 유다가 훌륭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 꿈대로 요셉을 이끌었듯이 유다에게 하나님께서 준 그 꿈이 마치 유다를 요셉처럼 다루어서 그 꿈이 스스로 꿈을 성취시킨 거예요. 오늘날 성도에게 딱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성도의 매사가 자기 뜻대로 안됨으로 말미암아 성도를 선택하신, 성도를 일관되게 구원하신 주의 뜻은 아주 충분하고 적절하게 잘 성공되고 있습니다. 아무 일 없어요. 괜찮다는 말이 맞아요. 만사가 오케이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요. 우리는 범사에 감사해야 돼요. 주의 하시는 일은 하자도 없고 실수도 없습니다.
어느 정도로 심판이 맹렬하냐 하면, 봐주는 것이 없거든요. 9절에 “유다는 사자새끼로다.” 사자새끼라 하는 것은 심판자를 짐승으로 표시하면 사자가 돼요. 요한계시록 5장 5절에 보면 “장로 중에 하나가 내게 말하되 울지 말라 유대 지파의 사자” 사자는 lion이지요. 동물원의 사자. “유대 지파의 사자(라이언) 다윗의 뿌리가 이기었으니”
이것은 심판을 무사히 마쳤다는 겁니다. 악마한테 이겼다. 옛 뱀한테 이기고, 악마한테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죽음을 이기고, 귀신들을 이겼다는 겁니다. 그것도 심판으로 이기신 거예요. 자비가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일절. 창세기 49장 9절에 보면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버려요.
낱낱이 찢어버립니다. 그래서 유다를 심판한다는 말은 우위에 있다는 거거든요. 그 우위에 있는 자리를 왕이라고 해요. 그래서 10절에 보면,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 홀이라는 것은 임금님의 지팡이가 홀입니다. 임금님만이 가질 수 있는 지팡이가 유다지파를 떠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 남쪽 유다지파의 왕만을 왕으로 인정하는 겁니다.
치리자의 지팡이, 심판을 행사했으니까 심판을 완료했을 때 주어지는 자리가 왕의 자리니까 왕이 있다는 말은 계속해서 심판이 영원토록 멈추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주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신다고 해서 이제는 구원받았는데 주님과 막 먹자. 그런 것은 없어요. 왜 주님하고 막 먹어요? 여전히 심판주지요. 심판주라는 이유 때문에 우리는 감사하지요.
왜? 우리들만 아는 사항이니까. 우리들만 아는 비밀이니까. 주님이 심판주라는 것을. 이 말은 뭐냐? 주님 외에 심판할 자격자가 없다는 말이고 주님 외에 그 누구로부터도 협박이나 공갈을 받을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사채업자에게 공갈 받지 마세요. 사채 쓰실 분들도 아니지만. 돈 없으면 못 갚지요 뭐.
파묻는다고 하면 ‘묻어라. 왜? 마지막 때 부활하니까.’ 마지막 날 부활하잖아요. 사채업자 드라마에 나오잖아요. 산으로 끌고 가서 파고 묻잖아요. 묻으면 우리는 거기가 부활의 자리에요. 내 목숨가지고 마귀한테 구걸하지 마시라 그 말입니다. “목숨만 살려주세요.”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아달라는 그 말입니다.
제발 검찰청 앞에서 수갑 차고 얼굴 피하지 말고, 모자 눌러쓰지 말고. 그럴 필요 없어요. 왜? 걔들은 심판자가 아니에요. 우리 주님이 심판주고 주님의 심판 그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심판자 되심이 여기에 장착되었다는 것은 오늘 본문 유다언약에 대한 소지자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미 품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다음에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실로라 하는 것은 어느 특정지명이거든요. 길갈 위의 지명인데 실로라는 장소는 뭐냐? 언약궤가 거기에 안치된 장소, 성막과 언약궤가 안치된 장소입니다. 여호수아 때 보면 회의할 때마다 언약궤 앞에서 회의 한다고 실로에서 했습니다.
여호수아 18장 1절에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실로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일관성 있는 취지가 약속의 땅에서 완성의 모습을 보이는 장소, 그게 실로라는 장소에요. 그런데 그 실로에 접근하기 까지가 아니고, 실로가 어떤 인격 같아요. 실로가 뚜벅뚜벅 오시기까지 미친다.
실로가, 어떤 지명이 걸어서 다가오신다는 뜻이에요. 실로가 오신다. 울산이 오신다? 말이 안 되잖아요. 대구가 오신다? 서울이 오신다? 이상해요. 우리가 서울에 간다. 이것이 굉장히 상식적인데 포항이 오신다?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실로라는 것은 어떤 공간이거든요. 구약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제한되어 있어요.
실로가 보여줬던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이 이제는 장소에서 뭘 로 변하냐 하면, 어떤 특정한 인물로 전환되는 시점이 온다는 거예요. 그 내용이 시편 78편 60절에 나와 있습니다. 59절부터 보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 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합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어떤 장소에 정착하고 어떤 장소를 실제로 역사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 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그 능력된 자를 포로에 붙이시며 자기 영광을 대적의 손에 붙이시고.” 이스라엘과 함께 어떤 공간을 점유했던 하나님께서 ‘난 이제 이스라엘과 안 논다’ 해서 떠나버렸어요. 그러면 공간적의미의 실로는 이제는 그 기능이 다한 거예요.
그러나 구약이기 때문에 실로가 품고 있던, 실로가 함축하고 있던 그 모든 언약적인 예언의 완성은 나중에 어떤 인물이 되어서 직접 이 땅에 완성의 상태로서 이 땅에 방문하는데 그 방문하는데 있어서 열두 지파 가운데 유일한 접촉지파, 접촉자는 누구냐? 바로 유다지파가 된다는 겁니다. 유다지파만 하나님의 실로가 품고 있었던, 실로라는 지명이 품고 있었던 성막,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영원히 거주한다는 거처의 개념이 유다지파를 통해서 드디어 인수인계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그걸 예언한 겁니다. 따라서 오늘 이 예언의 특징은 뭐냐? 전에는 요셉중심이었지만, 야곱이 요셉 죽었다 했을 때 죽은 자식 요셉이 애굽에서 혼자 설쳤지만 여기서는 유다지파 중심으로 가는 거예요. 모든 지파가 유다를 결과적으로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유다에게 이러한 기능에 걸맞도록, 격에 맞도록 어떻게 하느냐?
11절, 12절에 보면 포도와 젖에 관한, 젖과 꿀이 흐르니까, 포도와 젖에 관한 내용을 전부 다 유다중심으로 풍성하게 혜택이 주어진다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 포도에 관한 것이 계속 나옵니다.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약속의 성취는 유다 자손을 통해서 이어진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땅은 젖과 꿀이 흐른다고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 그 약속은 점점 더 세밀하게 구체화되는데 전에는 아브라함자손에게, 라고 포괄적으로 이야기했지만 좀 더 세밀하게 하면 이제는 유다자손, 유다후손을 통해서, 왕의 역할을 하는 유다자손의 왕의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한 것이 매치가 되고 구현이 되는 거예요.
그 일을 할 때 유다는 심판자, 어떤 위험한 지경이 되었을 때 제일먼저 치고 나가는 그 일을 하게 됩니다. 사사기 1장 1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묻자와 가로되 우리 중 누가 먼저 올라가서 가나안 사람과 싸우리이까.” 여호수아가 죽고 난 뒤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 물었어요. 가나안 사람들과 싸워야 되는데 누가 먼저 싸울까를.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지명을 합니다. “유다가 올라갈찌니라.” 유다가 선봉장이 되어서 올라가서 이스라엘적과 싸웁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적이 바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도 있어요. 그 때도 유다가 나서게 되지요. 유다가 나설 때 그 유다에게만 언약이 주어지는 것을 가지고 다윗언약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나중에 다윗의 나라가 곧 유다나라, 정통성을 가진 유일한 이스라엘이 되는데 그게 유다나라입니다. 그 유다나라에서 메시아가 나타나게 되지요. 오늘 설교를 마감하면서 정리한다면, 하나님이 유다자손에게 준 것은 항상 전제적으로 뭐냐? 심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자새끼라. 그리고 우리는 그 심판자에게 물어뜯기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됩니다.
이스라엘이지요. 이방인 우리가 아니고요. 이스라엘 중에서도 유다입니다. 유다의 자손에서 나오는 예수님만 우리를 물어뜯을 수 있는 권한이 있어요. 그러면 우리는 뭘 하면 되느냐? 주님한테 물어뜯기면 되는 거예요. 온 천지에 사자한테 물어뜯긴 자국, 엉덩이고 가슴팍이고 주에게 물어 뜯겨야 돼요. 뜯길 때마다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온 자국이 주님이 손댄 자국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친히 간섭한 자국이에요. 파스는 열 댓 장 붙여 놓았지만. 인생 자체가 주님한테 어느 한구석 손 안댄 구석이 없는 식으로 누더기가 된 채 우리가 자신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제 자기에 대한 찬송이 아니고 오직 나 말고 유다의 자손 메시아, 다윗 자손인 주님에게만 오롯이 찬송이 간다는 하나님의 예언이 어설픈 우리를 통해서 성취가 되는 겁니다.
그동안 우리는 에서처럼 내 몸 하나 챙기면 남는 장소로 여겼습니다. 평소에 사람과 사람만 상대하다 보니까 남에게 안지는 것을 오기처럼 여겼어요. 그러나 진짜 축복된 사람이라 하는 것은 죄인을 주의 마음으로 다뤄주신다는 것, 이제는 내 마음이 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주의 마음이 주장할 때, 그런 마음이 내 속에 들어왔다는 것, 그것이 주류가 되고 내 뜻은 밀리게 되는 상황이 내 안에서 벌어진다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몰랐습니다.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고 얻을 것 챙기면 내 것 만들면 그것이 이익인 줄 알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사람이 아니라 비언약사람의 몰골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주께서 쓰시는 대로 쓰이는 그것이 이미 구원받은 사람의 자태이고 모습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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