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강, 271강) 역사, 예언자와신탁 190319
녹취:이미아 270강-YouTube강의(역사)20190319-이 근호 목사
제 270강, 제목은 ‘역사’입니다. 성경에서 역사를 둘로 나눕니다. 전역사와 후역사. 역사 이전에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역사라 하는 것은 이전의 역사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 누에고치에서 실이 나오듯이, 조금씩 풀려져 나오는 것을 역사라고 보고 있습니다. 역사 이전에 대해서, 역사 이전이 있다는 것, 역사 이전에서 역사가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느냐? 그렇게 확인할 수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겠죠.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에 있었던 일을, 아무리 남에게 들은 이야기, 뭐 자료를 통해서, 또는 고고학 유물을 통해서 대충 짐작은 할 수는 있어도 실제로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죠. 왜냐하면 인간의 수명이라고 하는 것은 짧고 자기가 경험하는 것도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과연 전에 역사도 모르는 판에, 그 역사가 없을 때 일이 전개된다는 것을 이렇게 주장하려면 거기에 대해서 객관적인 증거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겠죠.
바로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는, 이스라엘 역사가 있거든요. 이스라엘 역사를 뭐로 보느냐 하면은 그걸 하나의 지평이라고 봅시다. 평평한 판이라고 봅시다. 보통 가을밤에 농촌들판에 나가면 그 어두운 평지에 맑은 하늘에서 유성비가 막 떨어지는 것을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하늘에서 막 떨어지죠. 유성비가. 유성이 비처럼 막 내려오는 거예요.
마태복음이라든지 성경 전체를 보게 되면 이스라엘 역사라는 평지위에 초월의 유성비가 떨어지는 거예요. 예상 못한 그런 일들이. 마태복음 2장 같은 경우에는 동방박사가 별을 따라오죠. 역사 위에, 인간들이 예전에 경험해 오지 못한 새로운 경험들이 주어지는 겁니다. 그 주어진 초월적인 그러한 현상들이 이스라엘 역사에게, 지상에 새로운 의미를 가져다주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하면 역사라는 지평위에, 역사가 짐작 못한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이걸 사건이라고 해요. 그걸 무슨 사건이라고 하느냐 하면 계시사건이라고 해요. 계시사건. 홍해가 갈라진다는 것은 그전에 한 번도 없었던 일이죠. 홍해가 갈라지는 것. 여리고성이 무너지는 것도 마찬가지잖아요. 한 번도 없죠. 어린양의 피를 발랐더니만 안 죽었다. 그것도 마찬가지고. 애굽에서 일어났던 열 가지 재앙들도 다 마찬가지고. 아브라함에게 천사 세 명이 찾아온 것도 다 마찬가지고요. 모든 것.
이 모든 것이 역사가 생각지 못한, 초역사적인 것이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 초역사적인 사건이 그게 어디서 도출되었느냐 하는 것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율법과 계시에 의해서 알려줬습니다. 창세전에 하나님의 일관된 원리와 뜻이 있는데, 그 뜻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펼쳐놓고 그거에다가 담아낸다. 또는 그려낸다. 이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며 이스라엘 역사는 뭐와 같은가 하면은, 영화관에 있는 스크린 같은 역할이고 거기에 투영하고 있는 필름의 내용은 창세전에 하나님이 계획 잡은 것이 투영이 되겠죠. 그러면 그 역사와 투영된 하나님의 원역사와 나란히 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펼쳐놓고 뒤에서 야금야금 삼켜버리죠. 없애버리는 겁니다.
옛날에 아이스크림, 아이스케끼, 하드. 처음에 사게 되면 막대기에 아이스크림이 얼어붙어있습니다. 애들이 가만히 쥐고 있지 않죠. 야금야금 먹어버리면, 삼켜버리면 이게 줄어들죠. 역사라고 하는 것은 원역사에 쫓기면서 삼킴을 당하는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라는 게. 누가 쫓아와서 삼켜주는 거예요.
그게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5절,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 뭐라고 하느냐 하면 베드로전서 3장 4절에 보면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 하니” 그대로 있다, 라고 되어 있거든요.
그냥 있다는 말은 “이것이 회수가 안 된 채로 그냥 이어져간다.” 이런 주장을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이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원역사, 역사 이전의 전역사의 계획이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니가 뭘 안다고?” 하는 식으로, “뭐 옛날부터 줄곧 있어왔었겠지.”라고 그냥 짐작하는 거예요. 자기 시대에 아무런 획기적인 변동이 없으니까.
거기에 대해서 베드로가 하는 말이 획기적인 변동이 있었다. 뭐냐 하면 옛날 사람들도 지금 사람들처럼 그냥 고요하게 있는 그대로 모든 것이 순하게 앞으로, 앞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홍수가 내려와서 모든 것이 물로 심판받아서 멸망했다. 베드로후서 3장 6절처럼. “이로 말미암아 그때 세상은 물의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획기적인 겁니다.
그 멸망할 때 그 멸망에 잠겨버린 것이 뭐냐 하면 사람들이 생각했던 과거역사였죠. 그들의 찬란한 역사. 그 역사가 물이라는 물리적인 현상에 의해서, 난데없는 현상에 의해서 전부 다 몰살당했어요. 그래놓고 그게 하나의 계시가 되는 겁니다. 그 계시의 내용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인정하지 않으면 이처럼 망한다. 이게 의미로 도출된 하나님의 계시에요.
이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은 역사만 있으면 안 되고, 역사와 무엇과 접목이 되어야 하는가? 초역사 또는 원역사 또는 전역사와 같이 만남으로서 계시가 펼쳐지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시를 설명할 때는 그 두 개를 다시 분해해내어야 되죠. 역사도 가져와야 되고 그 역사를 역사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도 같이 거기서 뽑아내어야 되겠죠.
그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세상 모든 것은 예수님 중심으로, 예수님의 언약 완성 중심으로, 십자가 중심으로, 그렇게 이 세상은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뽑아내는 겁니다. 자, 그렇게 될 때에 인간 세상 역사는 하나님에 의해서 당하기만 하는 거죠. 수동적으로. 물을 요청한 게 아니잖아요. 물이 와서 덮쳤잖아요. 그래서 인간역사는 버티려고 했지만 버티지 못하고 물에 당할 수밖에 없죠.
그래서 인간의 모든 역사는 하나님의 계시 앞에 수동적이라는 말을 제가 드리는 겁니다. 수동적이다. 그럼 수동적이라는 그 말속에 누구도 포함이 되느냐 하면은 인간이 자기 애쓰는 것도 포함이 될 수밖에 없죠. 예를 들어서 노래 한번 떠 볼라고 이렇게 시도하는 것.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적극성속에 다 녹아버려야 되죠. 주의 뜻으로 역사는 펼쳐지고, 주의 뜻으로 그것이 회수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뜻으로 내가 이만큼 어떤 일을 했는데, 그 일의 의미는 내 성공이 아니고 하나님의 복음이 와서 이걸 삼켜버릴 때, ‘아, 복음을 위해서 이런 일이 있어야 했고, 생겨야 했고, 이런 일이 나타나야 되는구나!’ 하는 겁니다. 거기에 비해서 과학이나 철학이나 그러한 인간의 학문들은 뭐냐 하면, 없어지기 위해서 만든 학문이 아니고 버티기에 나서죠. 버티기에.
그저 잘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고, 이게 전부니까. “이걸 어떻게 우리 힘으로 버텨보자. 역사는 무너지지 않는다. 역사는 미래에 희망적이다.” 뭐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것은 바로 이미 완전한 종결된 역사, 다시 말해서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복음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고집을 부리는 겁니다.
베드로후서 3장에 보면 물이라는 것이 장차 올 불의 심판의 예비적사건이었다고 이야기를 해요. 물로서 남녀 차이 없이 몽땅 다 수몰돼 죽는 것처럼, 장차 하나님께서 마지막 준비된 것은 뭐냐 하면 불의 심판입니다. 불의 심판으로 모든 것은 다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이 계시를 미리 아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에 의해서 역사가 어떻게 끝나도 살아남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도들입니다. 271강-YouTube강의(예언자와 신탁)20190319-이 근호 목사
제 271강, 제목은 ‘예언자와 신탁’입니다. 보통 우리가 옛날 역사 속에서나 또는 신화 속에서 예언자라고 하는 것은 일단 키가 훤칠하고 그리고 턱이 좀 빠져야 돼요. 수염은 옵션으로 있어야 되고. 그것도 수염을 염색을 안 했는지 허연 수염. 반지의 제왕에 보면 ‘간달프’라는 어떤 영감이 하나 나오죠. 예언자. 모세가 들고 있던 지팡이 들고. 얼굴 모습이 길쭉한 모습이에요.
동글동글한 개그맨 같은 예언자는 이게 권위가 영빨이 안 보여요. 예수그리스도가 그림에 나오는 모습도 비슷한 거고. 예언자는 우선 인물빨로도 보여주고 예언자의 발언 하나하나가, 어떤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권위가 있어야 된다는 식으로 그림들을 그렇게 그려놓는데, 그거 화가한테 속은 겁니다.
예언자는 인물하고 전혀 무관합니다. 신장하고도 무관하고. 수염이 났느냐, 피부의 톤이 어떠냐, 그거하고 전혀 무관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을 선지자라고 보면 돼요. 선지자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임했느냐, 아니냐로 구분 지으면 되는 겁니다. 사사들에게 성신이 임하죠. 그 시대의 예언자라고 하면 돼요.
성신이 임했다, 성령이 임했다고 하는 것은 뭘 전제로 하느냐 하면은 인간 쪽에서 뭔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이 말입니다. 인간 쪽에서 궁금해 하는 것을 제시하지는 않아요. 인간이 궁금하다고 하나님 쪽에서 답변해줄 하등의 의무가 없어요. 하나님의 예언이 임하면 새로운 궁금증이 발생되는 거예요.
이거는 뭐냐 하면 내가 평소에 궁금한 것을 채워주는 식의 예언이 아니라 “아, 인간이 이런 것 꼭 궁금해야 해?” 새로운 질문이 등장하도록 하는 예언. 그런 낯선 질문은 자기가 평소에 안 하고 싶었던 질문이 나온 거죠. 사울 같은 경우에 “주여, 누구십니까?” 질문을 사울이 하잖아요. 이게 평소에 궁금하지 않았어요.
그거는 자기는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히 예수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궁금증을 유발하면서, 그러한 질문을 하게 된 본인을 본인 자체가 예상 못한 자아상이에요. 이거는 변합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성신이 임해서 내가 평소에 궁금하지 않았던 궁금증까지 나에게 생겼다는 이 자체가 내 인생 누가 다루고 있다는 뜻이에요. 누가 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기드온 같은 경우도 그런 예가 되겠죠. 기드온이 농사짓는 사람이지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근데 갑자기 성신이 임해버리니까, 졸지에 자기가 평소에 매진하던 그 일과는 전혀 딴판의 일을 하게 된 거예요. 그러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기도 놀라죠. 삼손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에요. ‘나 같은 인간을 쓸 가치가 있나?’ 오히려 남들은 으쌰으쌰하고 추앙할지 모르겠지만, 정작 본인은 “주님, 저 쓸모 있기는 있어요?”라고 외치는 것. “분명히 죄인인줄 알았는데 이 죄인도 쓰시는 겁니까?”라고 하는 것.
자기가 알던 나를 포기하고, 이제는 나마저도 내가 낯설 정도로 자기 자신이 달라져야 되죠. 이러한 예언이 신탁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은 예언자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이 평소에 예언자가 되고 싶어서 사전에 예비공부를 한다든지, 거기에 대한 맞춤식으로 어떤 교육적인 코디를 받은 적도 전혀 없죠.
로마서 1장에 보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자 이렇게 될 때, 사도바울이 나 사도되었으니까 뭘 해야지, 라는 게 아니라 사도바울에게는 뭐가 엄청난 낯선 환경으로 여겨지느냐 하면은 평소에 자기가 사도가 되려고 부지런히 노력했는데 드디어 그 열매가 열렸구나, 하는 식이 아니고 난데없이 사도가 된 거예요.
그 난데없이 사도가 되었다는 말은 지금껏 자기가 살아올 때 내가 이렇게 됐으면 하는 기대가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되고, 이렇게 성공하고 싶고, 이렇게 나는 남 앞에 인간답게 살았다고 남한테 내놓을 것을 만들기. 이게 있었는데 그거하고 사도됨하고 이걸 저울에 달았을 때 어느 게 월등하게 무게가 나갑니까?
내가 소박하게 평소에 나는 이런 인간이 되겠다, 라는 그런 게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살아가면서 자기 인생의 계획이 있을 게 아닙니까? 그 계획 잡은 거, 자기가 예상한 그것과 지금 그리스도의 사도된 것하고 어느 게 비중이 크냐, 이 말이죠. 무게가 어느 게 나가냐 이 말이죠.
당연히 하나님의 신탁, 하나님의 예언이 담겨있는 사도가 된 게 더 크겠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사도 앞에서 나의 인생의 계획 같은 것은, 이거는 당연히 짓밟히고 깨어지고 무시당해도 나는 상관치 않겠습니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그다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으로 내 인생의 계획이 무산되는 것을 섭섭하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라는 태도를 갖고 있어요. 이게 사도바울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의 사도의 내용 속에는 나는 이런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라는 게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어요. 없고, 나라는 자기 계획이 나온 것이 아니고 누구 이야기냐,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이 아들에 관하여” 이래 되어 있어요. 아들에 관하여. 2절에 보면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사도바울의 인생의 달라짐을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실제로 그런 일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없고 제가 억지로 예를 든 겁니다. 집에서 강아지 키웠는데 조그마한 라디오가 있다고 봅시다. 작은 녹음기나 이런 거. 그 녹음기에 뭐가 저장이 되어 있느냐 하면 계란이 왔어요~ 계란이 왔어요~ 그게 녹음되어 있다고 봅시다.
계란주인이 개하고 살면서 그걸 방치하고 놔뒀는데, 뭐 고양이나 개가 그걸 삼켰다고 합시다. 그러면 고양이나 개 안에서 뭐가 나오겠습니까? 계란이 왔어요~ 라는 소리가 나오겠죠. 이거는 자기소리가 내 소리가 내 소리가 아니라 이 말이죠. 녹음된 주인의 소리가 계속 반복해서 나오는 거예요. 그게 계란장사면 계란소리가 나올 거고, 중 같으면 목탁 염불소리가 나올 거고. 그것도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계속 나올 거라 이 말이죠.
그러면 그 개나 고양이가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자기소리로 멍멍 짖지 못하고 딴소리가 계속 나오니까. 계란이 왔어요~ 계속 나오거든요. 보통 인간은 누구 소리가 나와요? 본인 소리가 나와야 되거든요. 본인이 나 잘났다, 나 남한테 꿇리지 않는다, 나 이만큼 착실하게 살았다, 나 너한테 밑질 것 없다, 이런 소리가 나와야 되는데, 무슨 소리가 나오느냐 하면은 아들이야기가 나와 버린 거예요.
좀 엽기적인 예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아들이야기가 나오고 그 아들이야기를 전하라고 사도바울을 하나님의 충실한 개처럼 데리고 다니는 거예요. 몽키, 몽키, 원숭이처럼. 서커스의 원숭이처럼 충실하게 그 안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게 하느냐 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리만 나오도록 하시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바로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과 함께 영생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조건이 뭐냐 내 소리를 죽이고 내 소리를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아들이라는 그 작용 안에 나의 것은 완전히 개무시 하는 거예요. 이 개무시를 개가 들으면 기분 나쁘겠지만, 하여튼 고양이 무시하듯이 무시하는 겁니다.
이런 작용을 통해서 사도로 하여금 사도답게 오직 아들에 관한 복음만 나오게 주께서 그렇게 이끄시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