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한윤범 20190301a 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사물 (강의:이근호 목사)
레위기 22장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그들로 이스라엘 자손이 내게 드리는 성물에 대하여 스스로 구별하여 내 성호를 욕되게 함이 없게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들에게 이르라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이스라엘 자손이 구별하여 여호와께 드리는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지리라 나는 여호와니라”
두 가지를 먼저 생각해야 될 겁니다. 하나는 단일성입니다. 단일성 안에 뭘 품고 있느냐 하면, 최종성을 품고 있는데, 단일성이라 하는 것은, 사람이 백 사람이면 백 사람, 천 사람이면 천 사람의 생각들이 다 다르지요. 부부라도 생각이 다르지요. 자식들도 생각들이 다 달라요. 그런데 딱 하나를 바라본다면 자기 생각이 차이가 나더라도 하나를 쳐다본다는 말은, 그 하나가 품고 있는 그 내용이 각 사람 속에 분배가 되겠지요.
예를 들면 태극기를 바라본다 할 때 남녀노소 관계없이 태극기를 바라보면서 나라 생각할 때 나라 생각이 태극기를 통해서 상상 속에 다 분배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그 순간만큼은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하나의 마음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단일성이라 하는 거예요. 단일성을 최종성이라 했지요.
인간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다, 내 생각이다, 내 해석이다, 라는 것이 용납될 수가 없어요. 성령이 와야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다면 너의 예수가 있고, 나의 예수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단일성이기 때문에. 네가 아는 예수, 내가 아는 예수가 동일해야 돼요. 이게 인간의 능력으로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오늘 본문 레위기도 율법인데 율법은, 인간이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아무리 하나님 쪽에서 단일성을 내세워도 인간은 각각의 마음을 따로 갖고 있다는 겁니다. 따로 갖고 있기 때문에 단일성이 각각의 마음을 용납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그냥 징벌해버리는 겁니다. 이걸 율법이 모든 인간을 저주받게 한다는 뜻이에요.
다시 설명하면 단일성이란 사람마다 생각이 다 다르다 이 말이죠. 각자 나름대로 하나님 섬기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단일성에선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너는 네 식대로 믿고 나는 내 식대로 믿으면 될 것 아닙니까? 그게 안 된다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단일성이 성물로 나와요. 거룩한 물건 또는 물체, 사물로 나와 있지요. 단일성을 하나님께서 먼저 제시하고 난 뒤에 단일성의 취지에 어긋나는 사람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개인이 성의를 표하는 것은 구원받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질 못해요.
사람이 성의를 표한다든지 내 생각으로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지 생각이 뭐냐 하면, 지금까지 살아온 머리에 남은 자기의 기억입니다. 자기 체험이란 말이죠. 그것으로 성의를 다하여 열심을 다하여 하나님을 섬기면 되겠지, 하는 것은 너무 개인구원 입장이에요. 출제자가 문제를 내야지 지가 문제 내놓고 지가 문제를 풀면 말이 안 되잖아요.
나름대로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핑계 없는 사람 누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다 그렇잖아요. 교회 나오려고 했는데 형편이 그래서 못 나왔습니다, 라고 이야기할 때 그런 사람은 교회 나와 봤자 무엇을 기억하느냐 하면, “나, 오늘 교회 나왔다”를 기억해요. 그거는 단일성에 해당이 안 됩니다.
“나는 이십 년 동안 교회 나왔다.” 이것은 하나님이 구원의 근거로 제시한 적이 없어요. 하나님은 최종적인 단일성을 제시한 거예요. 오늘 본문에선 그걸 뭐라고 했던가요? 성물. 다른 말로 하면 거룩한 물건이에요. 거룩한 물체라고요. 거룩한 사물.
그래서 정말 구원받은 교회라면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 “집사님, 십자가 생각했어요?” “나를 부인하라는 십자가 생각하지.” 최 집사님도 십자가, 김 집사도 십자가, 목사인 나도 십자가. 열 명의 교인들이 모여서 뭘 보여준 거예요? 십자가란 단일성을 보여주잖아요. 그 십자가는 뭐냐 하면, 기존의 내 성의와 열심을 다 부정하죠. 왜냐하면 십자가에서는 죽음이니까.
오늘 강의가 또 복잡하고 길어지겠는데. 자, 죽음이 뭔지 생각해보세요. 죽음이 뭐냐 하면, 사라지는 걸 의미합니다. 제 말 틀렸습니까? 맞지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껏 살아있으면서 장례식에서 관 속에 여러분 말고 다른 사람이 누워있는 걸 많이 보셨잖아요. 그런데 내가 그 관 속에 누워있다고 생각해봅시다.
곧 어디로 가느냐 하면, 화장터로 가잖아요. 화장터 갈 때까지는 나는 지금 관 속에 누워있다. 편안하다. 이 냄새, 하다가 불 속에 들어갑니다. 뭐 타는 냄새나는데? 누가 사라집니까? 내가 사라지지요. 십자가 의미가 뭐냐 하면, 너는 없다는 거예요.
없는 인간이 믿는다? 내가 없는데 내 믿음이 무슨 소용 있으며 내가 없는데 내 헌금이, 내 기도와 충성과 내 소망과 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내 믿음 소망 사랑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로 구원받는 거예요. 내 성의로 구원받는 게 아니란 말이죠.
강의 다시 해봅시다. 인간 속에 뭐가 남아있다 했습니까? 기억이 남아있지요. 그러면 나는 나름대로 성의를 표했다는 말은 작년보다 올해가 낫잖아요, 라는 비교의식이 생기겠지요. 작년에는 교회 농땡이 쳤지만 올해부터는 정신 바짝 차리고 교회 나옵니다. 이게 남아있겠지요. 그건 기억이란 말이죠.
작년보다 내가 열심히 한다고 그것으로 구원됩니까? 그건 단일성이 아니고 다양성이에요. 니 경험 다르고 내 경험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한 거예요. 교회 없이 세상에 시장바닥에 나가 보세요. 사람들은 단일성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다양성을 이야기해요.
우리 가정 얼마나 행복하다고? 이렇게 하거든요. 내가 행복하면 다른 사람도 행복합니까? 어림도 없는 소리지요. 자랑질하고 있는 거예요. 이번에 우리 아들 취직 잘 돼서 다음 주에 결혼합니다. 아, 행복해. 이건 누굴 약 올리는 거잖아요. 나의 행복과 다른 사람의 행복이 단일적입니까? 내가 행복하면 저절로 행복해집니까? 그러면 그 행복은 단일성이에요.
지금 김정은과 트럼프 회담이 결렬됐지요. 경상도 쪽에선 지금 좋아서 난리입니다. 고소하다고. 이젠 돈 덜 퍼주겠지, 이러면서. 그런데 서울 쪽에 가면 아쉬워하는 사람들 있을 수 있을 거예요. 이건 다양성이지 단일성이 아닙니다. 사람마다 보는 정치적 해석이 다르고 역사적 견해가 다릅니다. 5.18 이렇게 보던 저렇게 보던 다르다는 건 뭔 뜻이에요? 이건 다양성이라고요.
성경해석 이렇게 할 수 있고, 저렇게 할 수 있습니다. 이건 뭡니까? 다양성이에요, 다양성. 잘 들으세요. 다양성은 보복이 있을 수 없어요. 여기에 징벌이나 저주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 나름대로 나름 성의를 표했으니까. 앞으로 좀 더 잘해. 이렇게 돼요.
시험을 쳤는데 아이큐가 50 안 되는 사람이 수학시험 40점 맞았다. 그런데 아이큐 155 되는 인간이 80점 맞았다. 누가 잘한 거예요? 머리 좋으면서도 농땡이 부렸다는 뜻이고 머리 나빠도 열심히 했다는 뜻이잖아요. 선생님이 이걸 볼 때 농땡이 부린 놈은 두 대 때리지만 얘는 안 때려요. 잘했으니까. 이게 뭐냐 하면, 성의를 감안해주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간을 감안해주십니까? 이것은 너 하는 것 보고 내가 평가하겠다는 게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의 성물은 다양성을 고려하는 게 아니고 단일성으로 묶어버렸어요. 누구든지 이 성물을 건드리면 지옥 가는 거예요. 이건 인간들이 협의해서 된 게 아니에요.
제가 강의하는 걸 보니까 목 쉰 이유를 아시겠지요. 지난번에 목 쉬서 죄송스럽게 생각해요. 어떤 사람이 그래요. 목사님, 목 쉰 강의 들어보니까 도저히 못 듣겠다고 해요. 내가 얼마나 미안한지요. 앞으로 주의하겠습니다.
성물이란 율법입니다. 율법을 준 것을 지키라고 준 것이 아니고 너는 아무리 해도 단일성에 대해서 합하지 못한다. 네가 거기에 합치되어 살 수 없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성물을 제시한 겁니다. 이 성물을 함부로 만지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다고 할 때 그러면 함부로 안 만지면 되지, 조심스럽게 만지면 되지, 성의 있게 만지면 되지, 라고 하는 것은 단일성의 취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거예요.
왜냐하면 단일성은 결국 최종성을 이야기하는데 최종성은 최종적인 심판의 기준을 말합니다. 내가 심판의 기준을 말할 때 성물의 가치를 모르고 만진 인간들은 그 기준에 의해서 전부 다 작살낸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취지입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완벽한 거룩이 아니면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어요. 뭐 성의를 다했습니다. 열심히 했잖아요. 어설픈 그러한 핑계를 대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물에 대해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3절에 보면, “무릇 나의 대대 자손 중에 그 몸이 부정하고도” 부정이란 말이 나오지요. 더럽다 이거에요. 부정하니까 고상하게 여기는데 쉽게 가겠습니다. 네가 더러움에도 불구하고 성물에 가까이 하는 자는 내 앞에서 끊어진다. 하늘나라 백성으로 천국에 안 넣어준다 이 말입니다. 더러운 몸으로 감히 어디를 만져. 내가 그 자를 천국 넣어주나 봐라. 그런 뜻이에요. 이게 최종성이란 말이죠.
그러면 최종적인 판단기준을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이 만든 게 아니고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제시한 거죠. 그러면 이스라엘은 이걸 주의 깊게 잘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율법대로 완벽하게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지키면 복 받고 못 지키면 저주받아요. 그들이 저주받았어요, 복 받았어요?
거기에 대한 해답은 다니엘 9장 11절에 나옵니다. “온 이스라엘이 주의 율법을 범하고 치우쳐 가서 주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저주가 우리에게 내렸으되” 해답이 나와 있잖아요. 성경에 해답이 나와 있다고요. 괜히 오늘날 성경을 모르고 자기의 가능성, 성의를 봐주세요. 이런 구차한 소리하면 안 돼요. 성경 자체가 문제를 제시하고 해답은 성경 안에 있어요.
어떤 인간도 아무리 철저에 철저를 기하고 완벽에 완벽을 기해도 인간은 자기가 모르는 자기의 내부가 있어요. 그걸 누가 아느냐? 주님이 알고 있어요. 주님이 알기 때문에 우리 내부의 더러운 것들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서 기어이 우리를 족치기 위해서 저주받도록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우리로 저주받게 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이야기 아닙니까? 너무나 단출하게 깔끔한 결론이에요. 구구한 변명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법을 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현재 저주받고 있다는 저주받을 만하고 마땅히 저주받아야 될 사실을 우리가 도통 멍청한 인간이 돼서 그걸 모르고 있어요.
그걸 제가 주일 설교에서 미개한 사람이라 하는데, 우리가 얼마나 미개한지 자기가 어느 정도 멍청한지를 몰라요. 멍청함의 특징은 뭐냐? 시건방졌어요. 하루 밥 세끼 먹지요. 법 지켜서 먹는 게 아닙니다. 저주받을 만한데도 은혜 주신 거예요. 우리가 잘나서 하루 세끼 먹는 것 아닙니다. 어젯밤에 잠 잘 주무셨지요? 훌륭해서 잘 잔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우린 그것도 모르고 저녁에 조깅해서 잠 잘 잔줄 알고 너무 시건방져서 시건방짐이 한도 끝도 없어요. 전부 다 내가 열심히 해서 이만큼 살아왔다는 겁니다. 말씀? 보지도 않아요. 듣지도 않아요. 말씀공부해도 나오지도 않지만. 안 들어요. 나 혼자 열심히 해서 살았는데 뭘 다른 소릴 들을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성물?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인데? 단일성? 그건 성경에 없는 이야기인데? 이런 식으로. 최종성? 그것도 성경에 없는 이야기인데? 단일성, 최종성, 이런 것은 우리 일상생활에 전혀 모르고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이 세상은 다양하다. 다양하니까 자기 팔 자기가 흔들자. 내 팔 흔드는데 간섭이나 하지 말라.
마태복음 11장입니까 예수님이 그런 말씀했어요. 내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고 내가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아니한다. 이게 뭔 뜻이겠어요?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상 풍경이 그런 모습이었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세상 자알 돌아간다. 혀를 끌끌 차시는 거예요.
마태복음 11장 15절에,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꼬”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했어요. 이 울산바닥 보고. 그러니까 단일성이 그렇게 이야기하는데 다양성은 그 말이 뭔 뜻인지 몰라요. 각자 자기만의 성장해온 기억이 있기 때문에. 기억에 준해서 예수님도 해석하고 성경말씀도 해석하려 하는 거예요.
그게 얼마나 잘못됐는지 제가 계속 설명하려고 합니다. “비유컨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뭘 춤춰요? 미쳤나, 하지요. 오히려 욕합니다. 넌 현실을 모른다. 현실이 얼마나 다양한데 각자 자기 해석이 따로 있다. 얼마나 그런 주장하겠어요.
성경을 해석하겠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 아직 멀쩡하단 뜻이에요. 자, 강의를 잘 들었는지 여러분 생각해보세요. 제가 분명히 했습니다. 하나님이 성물을 제공할 때 성물은 단일성인데 성물을 만질 때는 단일적인 원리가 있어요. 성물이란 최종적으로 이것은 조심해서 만지라 할 때는 그 성물을 제시할 때 이렇게 만지라고 하나의 기준만 딱 제시한다고요.
그 뒤에 아까 강의 전에 읽어보셨잖아요. 무슨 규칙이 왜 그렇게 복잡한지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고 나오지요. 그 기준은 단일성을 더욱 더 단일하게 붙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인간적인 다양한 해석이 끼어들지 않도록 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린 이런 질문해야 돼요. 왜 내 해석은 안 통합니까? 너는 네 자신을 몰라. 너는 저주받은 인간이 저주받은 해석을 내게 되면 그걸 받아주겠느냐는 겁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경해석을 왜 하려고 합니까? 지가 개인적으로 구원받으려 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니까 구원받겠다는 것이 우리가 저주받아 합당한 티를 내고 있는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그런 식으로 하면 누가 구원받겠습니까?” 주님께서 합니다. “오지 마.” 답답한 쪽은 내가 아니고 니가 답답해. 누가 구원받고 누가 지옥 가는지는 인간들은 몰라요. 여러분 제가 질문할 테니까 답변해보세요. 성경에 누굴 꼭 집어서 구원한다는 대목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내가 너만 구원해줄게. 예레미야나 에스겔에 그런 대목이 없단 말이죠. 예수 믿는 자는 구원받는다. 예수 믿는다는 조건은 단일성에서 나온 조건이에요. 다양성을 고려한 게 아니고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단일, 단일, 단일. 내가 준 것, 내가 준 것, 내가 준 것, 그것만 밀어붙여요.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우리 교회 교인은 오천 명이다, 우리 교회는 삼천 명으로 부흥됐다고 하거든요. 여러분 쓰레기처리장 보세요. 쓰레기 많이 모아놨잖아요. 쓰레기를 모아놓으면 그걸 뭐라고 합니까? 그걸 쓰레기장이라 해요. 불쏘시개밖에 안 돼요. 쓰레기 모아놓고 다양성 모아놨다고 다양성 되는 게 아닙니다.
쓰레기 모아봐야 없던 장미 하나 피질 않아요. 단일한 장미꽃이 피질 않는다고요. 그냥 쓰레기 냄새만 날 뿐이에요. 쓰레기 냄새 맡으려면 그런 교회 가시든지. 여러분 입맛대로 여러분 느낌대로 성경해석하세요, 라고 다양성을 허락하는 교회는 쓰레기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쓰레기고, 교인들도 쓰레기고. 쓰레기는 쓰레기만 알아봐서 모이게 돼있어요.
나라는 가치, 내가 살아온 경험, 체험, 나라는 의미를 완전히 개무시하는 교회에 가야 돼요. 천주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인간을 존중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고 인간을 존중해요. 불교의 특징은 뭐냐 하면,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하지만, 니가 부처라는 겁니다. 네가 신이라는 거예요. 둘 다 인간을 존중해줘요.
그러나 개신교는 루터가 말하기를, 인간은 십자가 앞에 죄인이라 했습니다. 나쁜 짓해서 죄인이 아니에요. 어떤 분이 그런 질문했어요. 살인했는데도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까? 오랜만에 들었어요. ‘예’라 하고 답변해줬어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악한 죄를 지어도 예수님을 못 알아보는 죄보다 더 큰 죄는 없습니다.
기준이 살인했나, 간음했나, 묻는 게 아니에요. 내가 준 단일성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게 기준입니다. 성물 하나만 아니고 기준도 단일 기준으로 나오는 거예요. 이게 어렵습니까? 제가 지금 어려운 말을 하는 거예요? 교인수 많으면 진리답습니까? 숫자 많으면 그만큼 진리에 가까운 거예요?
예배당, 큰 부동산은 그만큼 천국 가기 쉬운 겁니까? 그만큼 많이 봐준 거예요. 어중이떠중이 다 오라는 거예요. 어중이떠중이들만 온 거예요, 결국. 내 가치 알아달라고, 중보기도 해달라고 이런 인간만 온 거예요. 나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사람들만 모인 거예요. 교회가 나를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위로 못 받아서 환장을 했어.
위로의 하나님이 계시니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뭐 했다고 위로할까요? 여러분을 위로해드릴까요? 여러분 위로하는 방법은 굉장히 쉽습니다. 새순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 다 망했습니다. 저절로 위로되지요. 사람은 남이 못 돼야 위로돼요. 연예인 가운데 내가 꼴 보기 싫은 연예인, 그런데 그 연예인 얼마 전에 이혼했단다. 얼마나 위로가 되는지요.
뚱땡이 둘이 하노이에서 만나서 뭘 한단다. 그런데 결렬 될 때 갑자기 엔돌핀이 확 돌면서 주님 축복인지 경상도 아니야, 갱상도 사람들 업 되는 거예요. 이젠 돈 안 퍼주겠지, 세금 안 올리겠지, 금강산 한다고 돈 퍼주지 않겠지. 이런 것. 남이 못 돼야 돼요.
제가 오후 설교에서 했잖아요.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못 참는다 했지요. 사촌이 논을 산 건 참을 수 없어요. 지가 왜 논을 사, 내가 논을 사야지. 인간은 이미 자기가 단일성 됐어요. 나만 잘 돼야 돼. 국민소득 3만 불이요? 자기만 3만 불 돼도 남은 만 오천 돼야 돼요.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이미 우리가 신이 돼있다는 걸 몰라요. 그러면 종교는 뭡니까? 내가 신 돼있다는 것을 하나님이라도 나를 좀 부추겨주고 긍정해주고 인정해주고 위로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의 기독교는 천주교와 불교와 똑같이 됐어요. 고객이 위로해달라니까 이제는 단일성 다 때려치우고 다양성으로 가버린 거예요. 전부 다 완전히 쓰레기장이 다 돼버린 거예요.
진짜 하나님은, 너는 진노 받아 마땅하기 때문에 하루 두 끼, 한 끼 먹는 것도 고마운 줄 알아라, 이게 진짜 하나님이에요. 어젯밤 잘 잤나? 내가 밤새도록 눈 탱탱 붓게 해도 넌 할 말 없어. 네가 욥처럼 온 몸에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어도 너는 왜 이러십니까, 할 쨉이 못 돼. 그 정도 율법을 어기면 저주에요.
우리가 성경을 안 듣고 복음을 안 듣고 그런 말씀 듣지도 않고 그냥 눌러놓고 집에 먼지 나게 쌓아놓고 세상사람 만나니까 이런 소리 안 들리지요. 그게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까? 그냥 안 듣고 안 보면 그만인 거예요? 그게 바로 눈 감고 아옹하는 것 아닙니까. 뒤에서 사자가 오니까 타조가 달려가다가 힘 빠지니까 모레 뒤집어쓰고 사자가 보는 눈알 둘을 모레 속에 집어넣고 이쯤이면 사자가 갔겠지, 이것과 똑같은 거예요.
우리는 말씀은 안 듣고 안 보면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말씀을 안 주는 교회만 찾아가는 거예요. 위로해주는 곳. 날 안 건드려주는 곳, 날 질책 안 하고 안 나무라고 나를 사람 대우해주고.
여러분 그러실 거예요. 목사님도 아시다시피 인간은 원래 그런 것 아닙니까? 지가 돛대고 지 잘났다 그뿐인데 그런 사람에게 복음 전하면 교회에 교인 한 명도 안 남는데 어떻게 합니까? 교인 한 명도 없어도 주의 택한 백성은 한 명도 빠진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됐잖아요? 교회 교인수 한두 명이라도 있어야 됩니까? 없어도 주께서 택한 자 되면 되잖아요. 창세전에. 그게 모여서 교회 아닙니까.
이미 교회 됐는데 무슨 교인수가 필요합니까? 숫자는 주님이 알고 있으면 되지 우리가 구태여 숫자를 헤아릴 필요 없는 그런 교회 돼야지요. 헌금 계산 안 하는 그런 교회 돼야 되지 않습니까? 우리에겐 단일성만 있으면 되잖아요. 여러 교인 중에 하나, 그것 필요 없어요. 단일적인 내용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 단일성은 최종성입니다.
따라서 오늘 내용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봐야 돼요. 첫째는 뭐냐 하면, 이 율법이 어디서 나왔는가, 하는 거예요. 두 번째는 이 율법에 적용했을 때 마지막에 이스라엘에게 일어났던 여파는 결국 이스라엘을 어떤 식으로 멸망케 했는가? 왜냐하면 레위기가 틈 사이에 끼어있으니까, 중간에 있으니까?
창세기 9장 5절에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희 피 곧 너희 생명의 피를 찾으리니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사람이면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그의 생명을 찾으리라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
자, 여기서 묻습니다. 사람이 먼저입니까, 피가 먼저입니까? 창세기 9장에서 사람을 중요시여깁니까, 피를 중요시여깁니까? 피를 중요시해요. 피를 살리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 피 살린다면 주께서는 사람이 죽이는 걸 개의치 않습니다. 피만 살 수 있다면. 이 말이 뭐냐 하면, 예수님만 살 수 있다면 사람들 지옥 보내는 것도 주께서 개의치 않습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내 생각합니까? 우리가 내 생각한다는 것은 예수님 위주에요, 내 위주에요? 내 위주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평소에 사고방식이 얼마나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됩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었거든요. 제가 물어봅니다. 이게 하나의 해석입니까? 에베소서 1장 7절에 나오는 이 말씀이 기껏 어떤 해석 중에 하나일 뿐입니까, 아니면 전부입니까? 전부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도 당신들의 사적인 견해라고 할 때 우리가 무슨 말을 해야 돼요?
사적인 견해라는 말은 그 말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고 사적인 견해가 되면 이게 단일성 될까요, 다양성 될까요? 다양성 되지요. 다양성 해석은 이 땅에 아무 소용없습니다. 오직 하나입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 사함을 얻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피로 죄 사함 얻는가? 논리는 성립될 수 있어요? 그건 논리가 성립 안 됩니다. 논리가 성립 안 되는 걸 약속이라 합니다. 약속인데 앞에 뭐 하나 붙이세요. ‘일방적’ 약속. 일방적 약속 앞에 붙이세요. ‘주님의’ 일방적 약속. 왜냐하면 자기 나라기 때문에. 지 나라에 지가 데려가겠다는데 마귀가 쟤 죄 많이 졌습니다, 강도 짓했어요. 내 나라 내가 가는데 니가 왜?
마귀가 저 사람 강도 짓했습니다, 간음, 살인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악마의 세계에 나름대로 원리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선해야 천국 가고 악하면 지옥 간다가 악마가 꼭 쥐고 있는 본인이 사람들을 낚아채기 위한 유일한 책략이요 무기거든요. 그 악마가 여러분의 양심을 매일같이 아침 눈만 뜨면 여러분을 쑤셔댑니다.
어제 나쁜 짓했지 오늘 복 받을 생각하지 마라. 이게 인과응보라는 거예요. 사람은 착한 일하면 복 받고 나쁜 짓하면 벌 받는다. 이게 인과응보. 그걸로 계속 아담부터 내리 오늘날까지 모든 속속 태어나는 아이들까지 전부 다 영혼을 장악하고 있어요. 정신적으로.
맹탕으로 나오는 게 아니에요. 인간은 벌써 악마의 사고방식을 부여받고 그걸 깔고 그걸 갖고 태어난 거예요. 악마 친화적입니다. 악마의 생각이 곧 인간의 생각, 인간의 생각이 뭐냐? 악마의 생각입니다. 착한 일하면 복 받고 나쁜 일하면 벌 받는다. 그게 옳다는 걸 우기기 위해서 평생토록 거기에 합당한 사례들을 다 모아요. 그렇게 해서 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줄 그런 예들을 모은다고요.
그게 우리 기억 속에 남습니다. 내가 이만큼 사는 것도 내가 어지간히 착해야지, 그러거든요. 내가 얼마나 착했으면 이 정도로 산다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지금보다 더 착했으면 복을 더 받았을 거고 그러면 내가 이렇게 지지리 궁상처럼 안 살 거란 말이죠.
그런 식으로 그런 마음 자세로 회개를 하던 반성을 하던 아무짝에도 소용없습니다. 회개, 반성해봐야 뭐 합니까. 주여, 제가 어릴 때 나쁜 짓만 안 했으면 일찍 예수 믿었으면 복을 받았을 텐데. 백날 회개해도 나온 결과는 악마가 펼치는 악마의 원리만 줄줄 쏟아내고 있어요.
인간의 선할 수 없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선하지 않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인간이 선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느냐? 아주 교묘하게 아주 정교하게 설명해요. 인간이 행함으로 따라갈 수 없는 그 영역의 것은 인간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예요. 이건 제가 사도 바울의 생각(사도 바울의 생각이 주님 생각이에요)을 풀어서 하는 거예요.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걸 따라잡아요. 인간이 행할 수 없는 영역으로 넘어가버리면 그때 인간의 행함은 뭡니까?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돼서 무용지물이 돼요. 이것을 로마서, 갈라디아서에서, 잘 들어보세요. 네가 성령 받은 것이 율법의 행함이냐, 아니면 성령의 선물이냐?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뭔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율법대로 하면 지키면 복을 받아요. 그러면 복을 따니기 위해서 뭘 동원한다? 율법은 자동적으로 행함을 유도하게 돼있지요. 십계명이 그거잖아요. 성물, 내가 성물 정신 차려서 만질게요. 행함이 동원. 그 행함을 할 때 결국 구원문제는 행함이 따라잡아도, 따라잡아도 구원이나 사랑은 어느 범주란 말이죠? 인간이 따라잡을 수 있는 범주가 아니고 훌쩍 그걸 넘어선 거예요. 그 넘어선 증거가 뭐냐?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시고 아무도 갈 수 없는 곳에 혼자서 가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성경을 해석하겠단 의도가 뭐예요? 해석할 때 그냥 해석합니까? 해석해서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내 행함으로 해석한 내가 어쭙잖게 지키면 될 게 아니냐는 거예요. 혹시 이중에서 18급이라도 바둑을 조금이라도 두시는 분 계십니까? 바둑에 흉내 바둑이라는 게 있어요. 하수가 지기는 싫고 고수한테 판판이 깨지니까 비겁한 수를 쓰는 게 뭐냐 하면, 상대방이 두는 수를 고대로 하는 거예요.
인공지능과 바둑 둘 때 요새는 프로기사가 석 점 깔고 둬도 져요. 그런데 얼마 전에 인간이 인공지능한테 이겼습니다. 어떻게 이겼느냐 하면, 비겁하게 진짜 비겁하게 흉내 바둑으로 이겼어요. 이건 바둑이 아니고 기계지요. 너만 기계냐, 나도 기계다. 고대로 하는 거예요, 고대로.
충남 어느 마을에 체험하는 게 있는데 추사 김정희 있잖아요. 서예 체험하는 데가 있어요. 어떤 초등학생이 글씨를 썼는데 추사체처럼 멋지게 썼어요. 놀랍지 않습니까? 초등학생이 어려운 추사체를 정말 잘 썼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유가 있었어요. 추사체에 습자지를 깔아놨어요. 체험학습으로 추사체 본대로 따라하니까 멋진 글씨가 된 거예요.
여러분, 성경말씀 그대로 예수님 흉내 내면 구원받습니까? 제가 몇 년 전에 설교에 대해서 그런 강의를 했어요. 설교 잘하는 설교할 것 없다. 만약에 설교시간이 15분이라면, 예를 들어서 오늘 본문 레위기라면, 여러분 제가 레위기 22장 1절부터 설교를 하겠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고 15분 동안 24장까지 읽지 않겠습니까? 읽었습니다. 그리고 설교 끝, 했습니다.
자, 설교 잘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뭐 최고의 설교는 성경말씀에 더 보태지 않는 것이라면서요? 빼지도 않고 안 보탰다면 신학교 뭐가 필요 있어요. 목사 뭐 필요 있어요. 낭랑한 목소리로 성경 읽으면 은혜 받고 눈물 흘리고 그럴 건데, 최고의 설교 아닙니까? 그러면 설교할 필요 없지요. 그것 들으려고 교회 뭐 하러 옵니까? 지가 집에서 성경 보면 되지. 성경 읽으면 지가 설교한 게 돼요?
성경말씀 그대로,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을 그대로 본받으면 거기에 뭐가 개입되느냐? 자기 해석이 들어가겠지요. 이래야 본받는 거다. 이래야 주님을 모방하는 거다, 라고 누가 그렇게 결정한 거예요? 본인이 결정한 거죠. 본인이 마귀 들려서 절대자니까. 내 구원, 내가 알아서 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해석해서. 그러면 낭랑한 목소리로 성경 읽고 예수님 행동하면 되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피로 용서받는다는 말은 뭔 뜻입니까? 인간의 행함이 따라잡았다, 못 따라잡았다? 못 따라잡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그동안 십자가 달려서, 필리핀에서 하고 있어요. 십자가 만들어서. 웃겨요. 그 나라는. 필리핀이 천주교 믿는 나라거든요. 민다나오는 이슬람교, 반란군 있지만.
십자가 고난 체험하는 거예요. RH+ A형, B형 안 받습니다. 주께서 내 피 안 받습니다. 채찍으로 부족하다고 때려봐야 구원 안 돼요. 예수님의 피만 돼요. 어린양의 피만 된다고요. 이게 해석문제에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자가는 우릴 저주하는 거예요. 율법의 완성이니까.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니가 나쁜 짓해서 나쁜 사람 되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우리는 나쁜 사람이었어, 태어날 때부터 악마의 마음을 가지고 저주받기로 태어났어, 라고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이 율법이고 그게 십자가에요.
그럼 거기에 대해서 옳소이다, 하고 예수님의 단일성에 대해서, 첫째 시간 결론입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단일성에 대해서 우리가 뭐라고 합니까? 방금 옳소이다, 하게 되면 그 사람은 지금 자기 다양성을 주장한 거예요, 아니면 포기한 거예요?
너, 나, 난 너와 다르니까 특별나. 난 너보다 우수해. 사람과 비교한 게 아니고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 앞에서 홀로 자기가 비교하지요. 그 순간 남과 비교한 다양성은 본인한테 의미 있어요, 없어요? 의미 없지요. 그게 바로 성도 아닙니까. 왜냐하면 말씀은 지키는 것이 아니고 말씀 스스로 살아서 움직이니까.
해석을 하겠다는 말은, 죽은 말씀인데 내가 정신 차려서 지킬 때만 이 말씀은 열매와 성과를 얻는다. 이런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그 말, 십계명에 나오잖아요. 이 말은 백 사람에게 해석해보라고 하세요. 다 다르지요. 그건 거짓말 아니지. 화이트 거짓말이지. 사람마다 뉘앙스가 다 달라요. 단일성이 아니지요.
그러면 거짓말하지 말라는 제대로 율법적으로 지킨 경우는 어떤 경우냐? ①평생 한 번도 거짓말 안 했다. ②선의로 거짓말 한 적은 있지만 나쁜 의도로는 거짓말 안 했다. 첫 번째는 이러나저러나 거짓말 안 했다. 두 번째는 선한 의도에서는 거짓말했지만 나쁜 의도로는 거짓말 안 했다. ③거짓말 한 적이 있는지 모르지만 정신 차리고서는 거짓말 안 했다. 내가 무심코 무식해서 몰라서 어릴 때 나중에 철이 들고 보니까 거짓말인지 알았지만 내가 그 순간에는 의도적으로 거짓말 안 했다. ④번은 뭐냐? 제가 죄인입니다. 몇 번입니까?
거짓말하지 말라고 율법을 준 이유가 뭐라고요? 저는 제 주장, 악마적인 마음을 갖고 태어나서 나는 내 주장을 감히 시건방지게 십자가 앞에서 떠벌였습니다. 내가 이만큼 인생사는 것도 내가 열심히 살았습니다. 내가 주의하고 바르게 살았기 때문에 이만큼 살았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어요. 이것이 얼마나 시건방진 것을 십자가 피 앞에서 저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바로 피가 살아 있는 거예요. 그 사람에게 주의 의가 살아 있고 율법의 완성이 살아 있어요. 이걸 의인이라 하는 겁니다.
주님은 의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지요. 죄인이라고 고백한 사람이 아닙니다. 주께서 죄를 만들어내요. 우리가 죄를 고백해도 그 죄 개념이 사람마다 다 달라요. 또 다양성이에요. 그때는 틀렸고 지금이 옳다. 홍상수 감독 영화 제목처럼 이렇게 핑계 댈 수 있어요, 인간은.
따라서 옛날에는 복음 몰랐는데 지금은 복음 안다고 하지 마세요. 복음 아는 이것도 주님 보시기에 어설프고 복음 몰라도 어설프고 내가 아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내 안에서 자동적으로 저절로 주님의 손에 의해서 활동성에 의해서 저절로 피를 증거하는 운반체로 만들어낸 이걸로 이미 구원의 관계에 돌입된 거예요.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고 더 할 게 뭐가 있어요. 무슨 해석을 하고 행함을 추구합니까? 이것도 개인적인 사견이에요?
다시 창세기 9장으로 돌아갑시다. 제가 물었던 게 있지요. 인간이 우선이 아니고 뭐가 우선입니까? 피가 우선이에요. 그 피가 뭔지 이 피를 마시는 자는 죽여 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면 사람들은 짐승의 피나 사람의 피를 안 마시면 되겠네. 이러지요. 안 마신다고 구원받습니까? 이 피가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노아가 방주에서 나올 때 정결한 짐승의 제물에 근거해서 그 피 안에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물이 담긴 피에요. 그냥 피가 아니라니까요.
뭔 뜻인지 여러분 이해 안 되지요. 뭐냐 하면, 학교 마치고 노래 부르면서 집에 오는데 집에 경찰관들이 들끓고 엄마 우는 소리 들릴 때 갑자기 멀리 살던 삼촌들도 있단 말이죠. 그리고 삼촌이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말리는 거예요. 알고 보니까 동생이 홍역으로 죽었단 말이죠. 홍역은 어른들한테는 저항력이 있지만 아이들은 취약하지요. 예방주사 맞아도 취약해요.
동생이 홍역으로 죽었을 때 엄마는 아직도 학교에서 안 돌아온 형이 생각나겠지요. 그러면 형은 격리돼야 되겠지요. 들어오지 마. 멀리 가있어, 라고 하잖아요. 창세기 9장에서 짐승의 피를 먹지 말라, 사람의 피를 먹지 말라는 것은 그걸로 율법의 내용이 종결된 게 아니고 종결은 나중에 이 말씀대로 오실 예수님의 십자가 피가 본 내용의 전부에요.
왜? 단일성은 어디로 향한다? 최종성이니까. 그래서 그전부터 이스라엘, 노아한테 피 먹지 말라고 격리시켜 놓은 거예요. 네가 행함으로 터치하고 관여할 사항이 아니라고. 율법이란 것은 오실 분의 표상이에요. 구약성경이 일찍 온 것은 그리스도가 멀었고 차츰차츰 점점 가까이 가면서 구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누구에 대해서 증거 한다고요? 예수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90301b울산강의-레위기 22장 : 거룩한 사물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합시다.
성물이 단일성으로 준 것도 중요하지만 특히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는 이게 물체라는 것에 의미가 있어요. 성물, 물건이잖아요. 물건이란 뭐냐 하면, 보이지 않는 분이 슬그머니 자기 물건을 소지품을 남겨놓은 거예요. 하나님은 빠져버리고. 하나님은 숨겨져 있고 물건으로 하는 거예요.
그 물건을 만질 때 잘못 만졌을 때 규칙과 함께 담아서 물건을 앞에 세워버려요. 그러면 사람들 보기에 하나님 뜻이라 하는 것은 상당히 간편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가까이 느껴질 수 있어요. 왜냐하면 성물이 있다는 자체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굉장히 좋은 장점처럼 보이지요. 애들한테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그림으로 보여주고 손으로 만지게 하면 그야말로 체험할 수 있게 하면 이해가 되겠다 하겠지요. 그런데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율법에 대해서 이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우리는 저주받기로 태어났고 우리는 뭘 해도 저주받아야 되고 인간은 어떤 수단을 해도 천국에 못 간다는 것을 느끼라고 그렇게 준 거예요.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뭘 걱정하느냐, 설마 우리를 버릴 리가 있겠는가? 왜냐하면 버릴 것 같으면 아예 이런 거룩한 물건을 우리 앞에 제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미 거룩한 물건을 줬다는 말은 우리는 괜찮다는 그런 뜻으로 오해한 겁니다.
그런데 그들은 성물을 통해서 주께서 주신 취지를 몰랐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한 것이 성물에서 나오느냐, 아니면 그 성물을 지키는 인간에게 나오느냐고 묻고 있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운 말이지요. 하나님이 제시한 거룩한 물건 속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과 구원과 거룩과 온전함과 의가 거기서 나오느냐, 아니면 그 성물에 대해서 제대로 처신했을 때 인간 쪽에서 나올 수 있느냐, 라고 묻는 거예요.
자, 어느 쪽에서 나오겠습니까? 인간 쪽은 안 나오지요. 성물을 줬다는 것은 성물만 준 게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는 모든 것도 그 성물 중심으로 새로운 원리를 너희들을 통해서 새롭게 구상하겠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사랑과 구원은, 적어볼게요. 사랑은 필요하지요. 천국은 사랑의 나라니까. 사랑과 구원, 구원도 필요하지요. 천당 가야 되니까. 사랑과 구원, 천국, 부활 다 마찬가지입니다. 대표해서 사랑과 구원은 인간이 행하지 않는 순간에도 살아 있다.
사랑과 구원, 하나님이 원하는 의, 거룩, 이 모든 것은 인간이 행하지 않더라도 이미 거기서 살아 있는 거예요. 그걸 이스라엘 사람들은 몰랐던 겁니다. 그들은 조건부로 생각했어요. 주의 말씀을 줬기 때문에 지시에 따를 때 우리가 지시에 합할 때 비로소 의가 되고 사랑이 되고 구원이 되고 거룩이 된다고 생각한 거예요.
하나님도 인간 없이는 제대로 될 일이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것도 부정적이 아니고 긍정적으로. 자기 자신을 좋은 역할 맡은 걸로 생각한 거예요. 안 되는 역할 맡은 걸로 생각하지 않고 되는 역할을 맡은 것으로 생각한 겁니다. 그것은 아담에 속한 인간이 태고난 거잖아요.
사람이 살 때 힘이 되는 경우가 어떤 경우입니까? 자기가 쓸모 있다고 여기고 자기가 가치 있다고 여길 때는 사람은 어떤 고난도 이겨냅니다. 그래, 안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는 존재지, 라고 버틸 수 있어요. 나의 의미를 누가 가졌다면, 가져간 사람에 대해서 비겁하게 물러서거나 주저앉을 순 없다는 겁니다.
이걸 이번 수련회 아가에서 했었는데요. 그게 뭐냐 하면, 내가 있음에 내가 사는 게 아니고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 때문에 내가 사는 거예요. 그걸 존재의 이유라고 하는 겁니다. 내가 이렇게 힘들게 살면서도 버틸 수 있는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야. 언젠가는 만나겠지. 김종환의 <존재의 이유> 물안개 필 때 사랑을 위해서 나오는 것 있지요.
그래서 사람은 사랑 없이는 못 살아요. 고린도전서 16장 22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살아도 그건 산 게 아니다. 주를 사랑한다는 말은, 주를 이용하겠다는 말과 정반대말이에요. 나 잘 되기 위해서 주가 있다는 말, 그것이 아니고 이제는 상황이 뒤집어졌다는 거예요. 내가 어떤 형편에 있던지 제 형편에 대해선 신경 안 쓰겠습니다. 주님만 계시다면 저는 어떤 지경에 있더라도 저는 감사하겠습니다. 이게 사랑이죠. 이게 사랑입니다.
그 비슷한 사랑이 뭐냐? 여자들이 아기를 낳고 난 뒤에, “아기야, 걱정하지 마라. 내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네 분유 값은 댈게.” 그런 장렬한 마음, 그것이 바로 어렴풋이 유사한 사랑이라 할 수 있어요. 오늘 3‧1절 기념일이니까 말씀드립니다만 윤봉길 의사가 집을 나서면서 썼던 한시가 있어요. 그 시 내용이 뭐냐 하면, 남자가 밖에 나가서 뜻을 이루지 아니하면 집으로 돌아와선 안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홍커우 공원에서 벤또 던지고 죽어서 돌아왔잖아요.
사랑의 특징이 뭐냐 하면, 둘이서 하지만 하나가 사라지는 경우가 되는 거예요. 분명히 둘인데 각자 보기에 자기는 제로로 만들었으니까 나는 없앴으니까 누구만 남아요? 내가 사라지고 상대방만 남는 게 사랑이에요. 그러나 외부인이 볼 때는 둘이 남았지만 둘 사이에 들어가 보면 항상 저쪽은 남아있고 내 쪽은 저쪽만 있고 그래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해야 되는데 주님께서 어디로 사라졌습니까? 죽음으로 사라졌어요. 내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살아 있다고 사랑하느냐? 이렇게 묻는 거예요. 이건 인간의 능력으론 안 되지요. 바로 죽었던 분으로부터 연락이 와야 돼요. 그게 성령입니다. 죽었던 분에게서 연락이 오게 되면 산 사람에게 신경 안 써요. 살아 있다는 나한테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죽으신 분이 나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있어요.
아까 이야기했듯이 죽음이란 사라진 거라고. 우리는 사라지신 분을 사랑합니다. 그래서 안 사라진 것은 상대적으로 우리는 사랑할 필요 없어요. 미워해야 돼요. 한쪽을 사랑하면 한쪽은 미워하게 마련입니다. 천하 자식이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했습니다. 그렇다고 가족을 미워하고 그러면 안 되지요.
왜냐? 없는 분에 의해서 주신 거라면 일종의 성물이니까. 이제 성물 이해되시죠. 성물이란 없는 분이 자기 자신을 내세워주신 거예요. 그렇다면 내 주위에 있는 가족이나 자식도 이걸 뭐로 보자는 거예요? 성물로 보자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인간이니까 사랑하자는 그런 인간적인 사랑을 말하는 게 아니고 반드시 주님이 개입해서 주님이 집게가 돼서 주님 사이에 연락이 될 때 비로소 우리 가정을 통해서 인간이 행하지도 않았는데 살아 있는 그 사랑과 하나님의 구원과 의와 거룩이 그 가정에서 피어나는 겁니다. 행하지도 않았는데 있어요.
그런데 교회 다니는 불신자들은 내가 그 말씀을 지켜야 거룩이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거룩은 주님 소유가 아니고 누구 소유가 되겠습니까? 그 말씀을 지켰던 내 소유가 돼버려요. 내 소유가 되니까 자기 자신이 아까워도 못 죽어요. 그동안 너무 충성한 게 아까워서 그 충성한 게 나의 것이 됐으니까. 너보다는 내가 낫다는 거예요. 왜? 나는 충성을 했다는 거예요.
자기를 부인하라 했는데 십자가는 반드시 앞에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 보라했는데 자기를 긍정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거예요. 엉터리 십자가에요. 그래놓고 한다는 말이 십자가 안다는 거예요. 십자가 알았으니까 이제는 부활 바라보자.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십자가라 하는 것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해서 내가 있더라도 나는 죽은 자로 간주하는 게 십자가입니다.
어떤 부부가 둘이 너무 사랑했어요. 아내는 아파서 강원도 홍천에 있고 남편은 약값 댄다고 서울서 아르바이트하고 온갖 것, 중국집 배달 등 열 몇 가지해요. 한 달에 한두 번 그 바쁜 중에 아내를 만나려고 밤에 차타고 와요. 만나고 헤어질 때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과 헤어짐이 아쉬워서 이렇게 해요. 당신 타고 가는 차를 보니까 마치 영구차가 나가는 것 같다고 해요. 오늘 제목으로 할까요?
참, 그 남편에 그 아내에요. 얼마나 남편을 사랑했는지. 그 여자가 누구냐 하면, 김종환의 아내에요. 당신 차 볼 때 영구차를 본다는. 우리는 매일같이 나를 실어 보내는 나의 영구차에 대해서 익숙해져야 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날 의식하는 순간 주님의 사랑은 날아가 버리고 그 앞에 나는 나만을 사랑하게 돼있어요.
그래서 성경 보면서 날 위로하려고 성경 봐요. 이미 자기만 사랑하기로 작정했기 때문에. 레위기를 보면서, “주님, 나한테 뭐 해줄 건데요?” 맨날 지한테 뭐 해줄 것만 생각해요. 죽으라고 준 책을 살아 있는 나를 더 살려고 성경책을 들여다보고 있는 거예요. 위로해주세요, 복 주세요. 성경 보고 복 받았다는 소리할 수 있도록 해주세요. 교회 다니고 살림살이 나아졌다는 소리 듣게 해주세요. 맨날 자기만 생각해요.
이제부터 더 어려운 것 하겠습니다. 여러분 어려운 것 따라와야 돼요. 성물이죠. 성물은 사물이죠. 물건이니까 물체니까. 사물체계 또는 사물세계라 할 수 있어요. 사물계, 실제로 손에 만져지는 그런 것으로 주께서는 자기 자신을 율법으로 내세웠습니다.
주님께서 왜 물체로 주셨느냐 하면, 물체는 만질 수가 있어요. 물체를 만지게 되면 그 물체를 함부로 만지는 쪽이 있을 것이고, 함부로 안 만지는 쪽이 있을 게 아니겠습니까? 함부로 만지면 하나님 나라에서 끊어진다는 거예요. 함부로 안 만지면 하나님 나라에서 계속 유지가 된다는 겁니다. 굉장히 하나님이 간편하게 하면서도 엄중하게 이야기하시죠. 물건을 주고 상당히 살벌하게 이야기하신 거죠.
그런데 학개를 잠시 보겠습니다. 학개를 보면 이 사물적 조치가 이스라엘 전체를 어떻게 망하게 했는지 나옵니다. 구약성경 1311페이지 학개 2장에 보면 10절부터 여러 절 되는데 제가 죽 읽어볼게요. 긴데요.
“다리오 왕 이년 구월 이십사일에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학개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맞지요. 찾아보니 나오지요. 그 말씀이. 지금 하나님이 물었어요. 여러분 답변해보세요. 제가 물은 게 아니고 주님이 물었습니다. 되겠느냐고 묻는 것은 백발백중 정답은 뭡니까? ‘아니요’라고 대답해야지요. 성물이 되겠느냐? 성물이 안 됩니다. 이렇게 답변을 유도하게 되지요. 하나님께서. 그 다음에 봅시다.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사물이니까 만짐이 가능하지요)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예’라고 부정합니다. 맞습니다, 라고 했지요.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의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따라서 너희들은 부정하고 부정하니까 하나님의 율법의 뜻에 따라서 저주받아야 돼, 라는 결론이 나온 겁니다.
이게 얼른 보니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요. 지금 하나님께서 물체, 사물을 가지고,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모든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저주받은 줄 모른다고요. 자기가 태어날 때부터 저주받아야 합당하고 하루 세 끼고 햇빛이고 공기고 필요 없어요. 가뭄 들고 개죽음 당해도 우린 할 말 없어요. 그런데 문제는 자기가 그런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을 시인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앞으로 착하면 될 것 아닌가. 선악론을 갖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잘하면 되지, 성심성의껏 하면 되지 이렇게 나오지 백날 해봐야 소용없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그렇게 되면 자살하기 때문에.
그런데 주님께선 추궁해나가는 겁니다. 어떻게? 만지고, 만지고, 만지는 거예요. 계속해서. 주님이 주신 사물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잘못된 만짐은 더러움이 돼요. 참,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하나님 뜻은 뭐냐 하면, 잘못 만지면 더럽다. 이걸 어떻게 바꾸느냐 하면, 더럽기 때문에 네가 함부로 만질 수밖에 없도록 내가 유도할게, 라고 된 거예요.
미칠 지경이에요. 하나님 앞에 잘해줘도 소용없어요. 하나님 쪽에서 우릴 뭐로 몰아갑니까? 더러운 본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상황을 그렇게 몰아가요. 20대에 교회 나와서 주일학교 교사하고 성가대하고, 어느 총각인지 모르지만 저런 믿음 좋은 처녀 데려가면 복 받은 거라고 주위에서 서로 중신 넣으려하고 괜찮은 총각 소개시켜주고 했어요.
결혼하기 전에 믿음 좋고 봉사 다하고 했지요. 결혼하고 난 뒤에 집안 다행스럽게 행복하고 따박따박 남편 월급 잘 주고 일찍 들어오고 아무 탈 없고 애들 잘 보고 살림도 남편이 다 알아서 설거지 다해주고 아내는 쇼핑하고 돌아다니고 친구 만나 수다 떨고 카페에 있어도 가정 잘 돌아가요. 남편이 양보해서 그렇겠지만.
그런데 그 아가씨 믿음 좋습니까? 믿음 좋은 거예요? 그래서 믿음 좋아지겠습니까? 20대에 성가대하고 주일학교 할 때 자기 본색을 알았어요, 몰랐어요? 몰랐지요. 선악구조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지금은 가정형편이 그래서 시집도 못 가겠지만 잘만 하면 괜찮은 총각 물을 수 있다.
하나님이여, 저 성가대 봉사하는 것 보이지요? 괜찮은 총각, 다른 건 욕심내지 않겠습니다. 키 크고 인물 좋고 성격 좋고 믿음 좋고 돈 되고. 맏이 아니고 시어머니, 시아버지 일찍 돌아가시고 남편 유전자 좋아서 선천적인 병 없고 오직 나만 사랑하고. 다른 것 안 바라고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얼마나 열심히 기도했겠어요. 주위에서 자기 보고 믿음 좋다고 하니까 믿음 좋은 사람이 기도발 나올 것 아닙니까. 주위에서 다 그렇게 하니까. 그럼 하나님께서 왜 그런 총각 만나서 결혼케 했습니까? 니 본색은 절대로 주님의 뜻은 따라 본 적도 없고 따를 능력도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한 거예요. 그게 주님의 구원의 방법이라니까요. 안 믿어지지요.
목소리도 아픈데 제 얘기 할 것도 없어요. 호세아 봅시다. 호세아에 구원의 방법이 너무나 명백하게 나와 있습니다. 1257페이지. 왜 자꾸 선지서를 들추느냐 하면, 오늘 본문이 사실은 예수님 십자가에서 완성이 돼요. 그 중간에 선지서가 나오잖아요. 과정을 거쳐야 할 것 아닙니까.
호세아 1장 7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구원할 때는 칼이나 전쟁이나 말과 병거로 구원하지 않는다고 나와 있지요. 세상에선 힘을 원하지요. 능력 원하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활과 칼로 하지 않지요. 뭐로 하느냐? 긍휼히 여기죠. 불쌍히 여긴단 말이죠.
그러면 구원하는 방법이 불쌍히 여기는 거라면 그들은 뭘 해야 됩니까? 여기에 호세아라는 선지자가 누구와 결혼했느냐 하면, 창녀와 결혼해야 돼요. 완전히 바닥을 쳐야 돼요. 창녀와 결혼했다고 하니까 호세아가 마음이 넓어서 창녀와 결혼했구나. 이렇게 생각 안 하고 직업이 창녀지 얼굴이 예뻤겠지. 창녀인데 창녀 중에 제일 예뻤겠지. 너 같은 창녀는 처음 봤다. 성격 좋고 얼굴 예쁘고.
직업만 창녀지 나머지 요소는 일반 다른 여자들보다 뛰어나게 아름답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망가지고 망가진 여자로 보시면 돼요. 행 더럽고 성질 더럽고 지밖에 모르고요. 이스라엘이 감추고 있는 본색을 여자라는 인물에 다 담고 그 인물과 호세아가 결혼한 거예요. 이건 뭐냐 하면, 누가 봐도 도저히 긍휼을 받을 쨉이 된다, 못 된다? 긍휼 받을 쨉이 못 되기 때문에 긍휼로 구원하신 거예요.
그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 구원할 방법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고. 율법을 왜 줬습니까? 네가 어느 정도로 엉망진창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준 거예요. 깨끗하다고요? 그러면 내가 철저하게 사물체로 전달되는 거룩을 거기다 집어넣어봐?
여러분, 제사장이 자기가 성물을 쌌던 옷이 우연히 컵에 닿을 수가 있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주신 정해놓은 사물체계에 보면 성물에 더러운 것이 닿으면 그 더러운 것이 또 더러운 것 하게 되면 이미 저주가 임한 것이 다른 것에 저주를 오염시키는 거예요. 율법적으로 보면 저주가 저주를 오염시키지만 복음적 관점으로 보면 처음부터 저주받기로 돼있는 것이 발각되고 발각되고 노출되고 노출되는 방법을 사용하시는 거예요.
얼마나 주님께선 용의주도하게 일하시는지 몰라요. 뭐 예수 믿어서 구원받는다고요? 아니요. 집에 가만히 있어 보세요. 저주되게 하실 겁니다. 하나님 방법이 저주되게 하시고 저주의 힘이 어디서 나왔다? 십자가에서 나와요. 성물에서 나와요. 단일성에서 나온 거예요. 그게 최종성이고 유일한 기준이고.
심판 기준이 우리로 하여금 너 지옥 가야 돼, 라고 할 때 옳소이다. 그러면 천당 가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런 고백했다고 천당 가는 게 아니고 네가 저주받았다고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이 임해야 가능하거든요. 세상에 성령이 임하지 않았는데 자기 맨 정신으로 나는 지옥 가야 된다고 떠벌이는 사람 없어요.
다 지 잘난 맛에 살아가는 겁니다. 교회 가보세요. 다 지 잘난 맛에 살아간다고요. 그래서 교회 가면 눈치코치 하잖아요. 너보다 내가 낫다 이 말 아닙니까. 아이고, 인간 돼서 저렇게 할까, 하잖아요.
학개 다시 하겠습니다. 학개 이야기는 뭐냐 하면, 성전을 소홀히 한 겁니다. 하나님의 건물을. 너희가 성전을 소홀히 했다는 말은, 성전은 원래 거룩한 곳이에요. 거룩한 곳이 허물어지도록 방치했다는 말은, 성전 그까짓 것, 다시 말해서 거룩 그까짓 것, 단일성 그까짓 것, 요새 말로 십자가 복음 그까짓 것 없어도 나는 얼마든지 떵떵거리면서 행복하게 잘 먹고 건강하게 잘 살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뭉친 거예요. 이스라엘이 그 당시에.
여러분, 선지자를 보낸다는 것은 하늘에서 예수님 보낸 것과 같은 취지입니다. 그들이 정상적으로 돌아올 것 같으면 선지자 안 보내요. 선지자가 왔다는 것은 문제 있다는 겁니다. 지적사항이 있다는 거예요.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성경을 보고 찬송가를 불러도 은혜 안 되는데 어느 순간에는 어떤 구절 하나가 가슴에 와 닿지요. 이거 천사 보내신 거예요. 감사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은혜로 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내가 주제넘게 시건방졌다는 것을 그 순간에 깨닫는 거예요. 주제도 모르고 내가 까불어도 너무 까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겁니다.
그럴 때는 주변에 자기 환경과 처지가 갑자기 우울해지던가요, 안 그러면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오던가요? 기쁨과 감사가 터져 나와요. 바보같이 이런 은혜를 받아놓고 이런 복을 받아놓고 내가 뭐 하러 사소한 일 때문에 머리 싸매고 고민하고 걱정하고 염려하고 벌벌 떨면서 부들부들 떨면서 공포에 사로잡혀서 도대체 이런 복을 받아놓고 망했다고 철딱서니 없이 그 말이 왜 튀어나오느냐. 후회되면서 감사되는 거예요.
장사는 안 되지 종업원 둘 있지 돈 달라고 해대지 이놈의 장사 왜 했나 싶고. 누구 가정 이야기하는 것 아닙니다. 이렇게 해도 십자가 피로 용서받은 걸 생각하게 되면 까짓 것 망하는 세상 이 맛도 경험해볼만하지 뭐. 장사 안 되는 맛도. 이미 게임 오버인데요. 끝난 게임 아닙니까? 천당 가는 게임 끝났잖아요. 죽어도 천당이잖아요. 거지 나사로처럼.
남은 지옥 같은 세상에서 어떤 경험인들 못해요. 이런 경험, 저런 경험 해보지요. 그런 경험 속에서 내가 얼마나 부족하며 내가 얼마나 문젯거리도 아닌 걸로 머리 싸매고 망연자실 걱정 근심하는지 그런 것들도 체험해보는 주께서 주신 체험이기 때문에 괜찮아요. 아까 했잖아요. 사랑과 구원은 내가 행하지 않더라도 한다고요.
그래서 이런 말씀 있어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이제 이 말씀의 의미하는 바를 아시겠지요. 네가 행한 것과 주님이 주신 사랑은 별개 문제다. 이미 행함 없이 사랑을 받았으면 그까짓 것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고, 그까짓 것 겉옷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줘라. 그까짓 것 그게 뭔 대수냐 그 말이죠. 뭐 그렇게 심각한 문제냔 말이죠.
세월호 애 빠져죽었다. 세월 따라 갔겠지. 니 자식 안 죽었거든 그런 소리하지 마라? 내 자식 죽으면 그때 아는 거예요. 내 죄를 깨닫게 되면 초연하게 될 수 있어요. 남의 사정도 모르고? 그래 너는 내 사정 아냐 말이죠. 은혜를 아는 내 사정 알아? 함부로 이야기하지 말라고요? 왜 함부로 이야기 좀 헐란다.
이게 뭐냐 하면, 최종성이잖아요. 모든 걸 아는 사람은 함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서 함부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 최종성, 모든 인간은 어떻게 해도 지옥이다. 어떤 것을 해도 죄다. 헌금해도 기도해도 강의해도 설교해도 죄다. 은혜 받아도 죄다. 모든 게 죄 입장이거든요. 왜? 거룩은 없으니까. 거룩은 내 행함과 관계없이 이미 선물로 주어진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체가 사물체로, 인간의 육체 자체가 사물 아닙니까. 사물체에서 짜내니까 한 자로 뭐가 나왔습니까? 피가 나왔잖아요. 사물이잖아요. 피로 말미암아 추상적인 죄가 없어진다는 거예요. 어떻게 사물과 추상이 연결됩니까? 인간의 논리로 풀 수 없어요, 이게. 보통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통 네가 잘못 만지면 죽는다든지, 문둥병이나 유출병이나 뒤에 나오지요. 성물을 먹지 못할지니. 좀 먹으면 어때? 그런 생각해보세요. 성물을 만지면 네가 죽는다고 했거든요. 과학적 사고방식으론 성물을 만지면 여기서 안 좋은 바이러스가 나와서 그게 잠복돼 있다가 며칠 뒤에 죽든지 이러잖아요.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정녕 네가 죽으리라 해서 그 날 당장 죽었습니까? 안 죽었지요. 각종 바이러스 그런 것 없어요. 아담이 구백 살 이상 살았잖아요. 오래 살았어요. 창세기 5장 4절에,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매 그가 구백 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살기도 오래 살았다.
따먹는 날에 안 죽고 930년까지 왜 길게 끌고 갑니까? 그 자체가 결국 죽잖아요. 죽음이 기다리면 이미 죽은 자에요. 죽을 때 되면 930년 남아있지 않습니다. 없어져요. 달랑 하루만 남아있어요. 죽는 그 날만 남아있어요. 그러면 뭐와 같으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돌아서면 아무것도 없어요. 지난날만 있지 사진첩에만 있지 진짜 현장에는 늙어가는 내 모습만 있지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성경을 볼 때는 이렇게 보셔야 돼요. 이미 죽었다 치고 봐야 돼요. 이미 죽었으면 유령이지요. 유령이 날아다니면서 성경보시면 돼요. 어린아이들 학부모 모임이 있지요. 학교에서 학부모 모임 있다고 하면 유령이 돼서 날아가세요. 학교 가서 유령인 체 다과회 앉아서 유령인 체 건의하세요. 맞벌이하는 데 애들 오래 붙들고 공부하라 하고 일찍 와서 사고 날까 걱정된다고. 방금 이야기하신 분 누굽니까? 김 유령입니다.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모든 성경은 죽은 자가 이야기하는 거예요. 예수님이 이야기하니까 죽은 자가 이야기하고,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자기가 죽었어요. 죽은 자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실은 우리 보기에는 살아 있는 것 맞지만.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려오는 겁니다. 그만큼 여유가 있다는 거예요. 제가 지난 낮 설교에서 했잖아요. 스데반 집사와 거지 나사로가 여유 있다 했지요.
사물체에서 성물을 함부로 만지지 말라. 끊어진다고 했을 때 이런 것 먹지도 말라는 말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인간을 하나의 사물로 보는 겁니다. 그것은 장차 하나님이, 육체가 없으신 하나님이 사물로 오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겁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을 앞당겨서는 성물이 된 거예요.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것과 성물을 잘못 만지면 먹지 말라는 것을 먹으면 지옥 간다는 것과 같은 걸로 봐라 이 말이죠. 왜 그렇게 하느냐? 인간 자체를 하나님이 사물로 신체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을 신체로 봐야 될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죽는다는 것을 신체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에서 살아 있다는 것을 호흡해서 숨이 나오면 살아 있는 거고 호흡에서 숨이 끊어지면 죽은 거예요. 요새는 병원에서 심전도를 갖다 놓고 조사를 하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 돌아가실 때 완전히 숨이 끊어졌어요. 돌아가셨다고 간호사가 적고 있는데 의사가 기다려봐라. 심전도 보니까 살아 있어. 그 모습을 계속 보고 있는데 심장은 뛰고 있는데 우리 느낌으로 뛰고 있는 게 아니고 그래프로 나타나는 거예요. 좀 지나고 나니까 그래프가 일직선으로 되는 거예요. 간호사에게 수습하라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했던 어머니가 이틀 전에도 이야기했거든요. 살아 있었어요. 날짜를 적용하니까 돌아가셨어요. 오늘 며칠입니까? 3월 1일 아닙니까. 살아 있어요. 그런데 날짜만 지나가면 우리는 일직선으로 그어져요. 죽었어요. 죽은 자는 죽음의 믿음과 소망, 사랑 아무것도 없습니다.
살아 있을 때 주님이 그 사람 속을 통해서 무엇을 발현했는가가 중요해요. 예수님의 피가 살아 있을 때 나오도록 고백돼 있었는가가 그게 중요한 겁니다. 본인이 한 게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래서 치매 걸려도 구원받습니다가 되는 겁니다. 오늘 제목을 치매와 구원?
치매 걸리면 예수고 뭐고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도 구원받습니다. 왜냐하면 평소에 그 사람을 통해서 무엇이 발산되느냐?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발산돼있거든요. 어떤 식으로? 나는 지금 죽어도 마땅하고 나는 죄인이라는 것이 정신 멀쩡할 때 죽어가면서 계속해서 그 모습이 발현되어 나왔거든요.
내가 행함으로 이렇게 산 게 아니고 은혜로 살고 햇빛과 공기도 주께서 한 것도 없이 그냥 공짜로 줬다는 것, 안 줘도 되는데 매일같이 미세먼지 극히 나쁨이 돼야 됨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사흘에 한 번은 숨 트게 하잖아요. 사흘에 한 번은 저쪽에서 편서풍 안 불어오잖아요. 한 번쯤은 울산도 괜찮아지잖아요. 울산도 일주일에 한 번은 날 좋을 때 있을 걸요? 날 좋은 게 정상이 아니고 나쁜 것이 정상으로 볼 정도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됩니다.
레위기 다시 봅니다. 문둥병자나 유출병자나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이게 중요하지요. 유출병, 문둥병, 인간이라 하지 말고 신체란 말이 맞는데 신체 또는 사물로 봅시다. 성물 자체가 물체기 때문에 인간도 같이 물체로 보자. 물체 대 물체로 언급은 이게 접촉이 가능하기 때문에 주께서 아주 쉽게 하나님의 거룩을 표현해주는 거예요. 거룩인 것과 아닌 것과.
거룩이 거룩이 아니고 거룩이 있음으로서 거룩을 잘못 되게 만지면 거룩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뭐가 돼요? 거룩이 아님이 비로소 그 현장에 나타나는 겁니다. 제가 말로 하니까 어렵지만 여러분 감은 오지요. 우리가 더럽다는 걸 몰라요. 거룩이 나타났을 때 더러움을 알아요. 우리 인간끼리 있으면 자기가 죄인인 걸 몰라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야 알아요.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간끼리 죄인이라는 것은 상대적이에요.
여기 4절에 나오는 문둥병자, 물체거든요. 물체라 해서 물체입니다. 이 물체는 그 당시 사회에서 어떤 거냐 하면, 문둥병자나 유출병 피가 흐르는 이 사람들은 신의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평판이 이스라엘 사람이나 고대 민족들에 퍼져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건강치 않기 때문에. 건강하지 않은 사람, 그걸 고질병, 난치병이지요.
여러분 주변에 dna 잘못 돼서 약하게 태어나서 골골한 사람들 있지요. 병원에 가도 병명을 모르겠다는 사람이 한두 명 본 게 아니죠. 많이 봤지요. 병명을 모르겠습니다. 아프다 하는데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람 많잖아요. 그럴 때 우리의 느낌은 뭐냐 하면, 저주받았구나. 그러니까 이 기준은 뭐냐 하면, 멀쩡한 자기를 기준으로 삼을 때 병이 날 희망이 안 보이거든요. 그때는 뭐냐? 사람의 손을 떠났다 이 말이죠. 다른 말로 하면 신의 저주를 받은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베데스다 못가에 못 고치는 사람들 옹기종기 모여 있었습니다. 선착순 한 명이죠. 왜 두 명이 안 되느냐 하면, 물이 움직일 때 한 명만 받아줘요. 한 명으로 물 움직임의 효과가 다했어요. 자비의 연못이라 하는데 자비니까 보너스를 주는 거예요. 이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네가 아파도 싸다. 네 죄가 아니면 네 조상의 죄 때문에 너는 분명히 그런 벌을 받아야 된다는 거예요.
율법에 보면 조상이 잘못하면 그 죄가 몇 대까지 삼사 대까지 가요. 십계명에 나와요. 어떤 사람이 날 때부터 소경됐다는 말은 태어나서 죄 지을 일은 없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날 때부터 소경된 것은 부모의 죄를 물려받은 거예요. 그러면 십계명의 원칙대로 조상 하나가 죄를 지으면 그 죄가 삼사 대 가는 거예요.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한 겁니다. 아까 첫째 시간에 했지요. 인간의 해석은 옳다, 그르다? 그르지요. 잘못된 참고로 십계명을 해석했고 하나님은 그런 잘못된 해석을 유도했고 그 잘못된 분위기에 물체적 접촉 관계를 충분히 이용한 거예요. 유출병, 문둥병 사람 손 못 댑니다. 건강한 사람 입장에서 저주받은 거예요.
그쪽이 저주받아줘야 자기 건강한 걸 저주의 반대말이 뭐다? 복이죠. 자기는 복 받은 거예요. 복 받아서 행운을 받아서 건강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가 잘난 거예요. 그래서 그걸 하나님은 어떻게 이용하느냐 하면, 네가 만약에 죄를 범하면 네 건강을 잃어버린다는 쪽으로 하나님이 이용해요. 왜냐? 인간은 물체기 때문에.
요한복음 8장에도 그런 말씀 나오지요. 간음한 여인에게 네가 다시는 이런 짓을 하지 않도록 죄 짓지 말라고 하지요. 십자가 전입니다. 유대인의 사회에요. 인간은 신체로 돼있고 거룩은 거룩한 것과 접촉하면 거룩이 되지만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부정하게 된다는 그것이 잘못된 해석이 꽉 차있던 그런 시대에요.
오늘 본문에서 유출병자에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 다음에 뭡니까? 정하기 전에는 성물을 먹지 말라고 했지요. 아예 못 먹는 게 아니고 어떤 조건을 달아요. 뭡니까? 깨끗하게 하기 전까지는 성물을 먹지 말라 했지요. 먹으면 죽어요. 그러면 하나님의 계획은 드러났네요.
자, 거룩이라 해놓고 거룩에 접근해서 인간은 물체고 거룩도 성물이니까 추상이 아니잖아요. 구체적 물건, 성물이니까 물체와 물체가 접촉하게 되면 여기서 거룩이 발생되잖아요. 하나님께선 이렇게 하면서 중간에 조건을 집어넣습니다. 이러이러한 자는 거룩한 성물을 먹지 못한다. 만약에 먹으면 네가 저주받는다고 돼있거든요.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 거룩한 것이 등장했다는 말은, 인간은 요구받게 돼요. 네가 거룩 쪽에 설래, 아니면 저주 쪽에 설래? 라는 요구받는 게 돼버려요. 그러면 인간은 오해하기를 지금 자기를 중립으로 보는 겁니다. 말씀대로 제대로 살면 내가 거룩해질 수 있구나, 라는 가능성을 기대하겠지요. 중립 쪽에 있으면서 내 선택에 의해서 어떤 괜찮은 결과가 주어진다고 생각하겠지요.
오늘날 교인들이 말씀 볼 때 다 그런 자세로 보잖아요. 나는 괜찮은데 이 말씀 지키면 복을 더 받고 어기면 내가 벌 받는다. 그 정도는 각오 돼있다는 마음으로 오잖아요. 그 생각이 잘못된 거예요. 아까 했잖아요. 하나님이 율법을 준 것은 너의 그런 시도 자체가 마귀적 사고방식이다. 저주받을 마귀적 사고방식이란 걸 알고 율법을 거기다 맡긴 거예요.
하나님께서 문둥병자와 유출병자는 어떻게 해야 된다? 이것을 정하게 깨끗하게 하고 난 뒤에 만질 수 있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면 여기서 갑자기 뭐가 들어갔어요? 문둥병과 유출병을 정하게 하는 방법이 뭐냐? 이게 사물이 돼요. 어린양을 잡으니까. 어린양이 또 사물 아닙니까. 물컹물컹한 짐승이잖아요. 전체가 지금 물체들이 배치돼있어요.
제단도 돌로 만들었으니까 물체지요. 물체니까 실제로 공간을 차지하게 되고 정한 시간에 따라서 칼로 짐승을 잡는 것도 피를, 피로 말미암아 죄 용서받는다는 피가 또 물체잖아요. 신약에서는 그게 물체가 아니고 십자가 사건이지만. 그걸 피라는 물체란 용어로 사용해버린 거예요. 왜냐하면 그 안에 십자가의 능력이 거룩하지 못한 우리를 행함과 관계없이 자체가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에 피로서.
다 이해되는 걸 제가 무례한 욕심으로 생각하고 그냥 나가보겠습니다. 어린양을 예를 들어서 정결케 한다면 어린양이 소위 멀쩡한 사람한테는 소용없어 보이지만 문둥병, 유출병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무슨 분류다? 이미 그 당시 사회에서 저주받은 자로 분류된 사람이죠.
저주받은 자도 거룩에 참여할 수 있다는 조건을 거룩이 등장하면서 조항으로 이미 제시되고 그럼 사람은 어디 주목해야 돼요? 나는 문둥병 아니니까 기분 좋다, 먹자. 이러면 안 되고 정결케 할 때 여기에 뭐가 들어가느냐 하면, 희생이 들어가요.
여러분 오늘 아침, 점심 드셨지요. 그럼 거기에 뭐가 들어가겠습니까? 예수님의 희생이죠. 그러면 그 희생은 멀쩡하고 잘난 사람한테는 의미가 없지요. 그럼 우린 뭐냐? 문둥병자 되도 상관없고 유출병, 고질병 되도 우리는 어쩔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는 태어난 게 죄인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그 밥 안에 뭐가 들어있다? 그 피로 용서한 십자가의 은혜가 담긴 채 우리에게 밥을 먹으라 한 거예요. 그러니까 밥 속에 십자가가 들어있는 거예요. 밥을 씹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를 씹는 거예요. 십자가를 먹고 마시는 거예요. 먹든지 마시든지 복음을 위해서 사는 거예요, 우리가.
문제는 우리가 돌대가리라서 그게 생각이 안 난다는 것. 우린 밥 먹고 빨리 볼 일 보기에 바쁜 거예요. 반찬 없다고 투정부리기 바쁘고 국 식었다고 짜증내기 바빠요. 싫으면 니가 국 끓여 먹든지. 니는 손발 없나. 밥을 주는 것은 여자의 할 일이다. 헌법에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무나 노는 사람이 밥 해야지요. 맞는 말입니까. 건강한 사람이 밥해야 되고 할 일 없는 사람이 밥해야 되고. 점점 그렇게 될 겁니다.
성물 안에는 율법이 들어있고 율법의 내용은 피입니다. 노아언약에서 정결한 피가 담겨있고 피를 성물이란 물체로 안에다 앙꼬처럼 담아놓고 그 성물로 알기 쉽게 유치원 아이들처럼 정말 어린아이처럼 가르치는 거예요. 이것 함부로 만지면 안 돼. 더러운 사람은 못 만져. 하지만 네가 정결한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면 저 거룩한 걸 만질 수 있어.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만졌으면 거룩이 된 거죠. 제대로 만졌다칩시다. 그러면 거룩이 돼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만질 때 정결한 예식은 생각 안 하고, 아이고, 귀찮아 죽겠어. 성물 또 먹나. 맛도 없는 것 또 먹나. 만약에 제사장이 또는 여기 제사장 자녀 가운데서 그 뒤에 나오는데 설정한 사람이나 흠 있는 사람은 더럽히지 말라는 하여튼 조건이 많아요. 자꾸 조건이 늘어나요.
조건이 늘어난다는 말은, 전에 거룩하면 됐지 또 거룩 되겠지. 이게 안 통한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물체는 오래 안 남아요. 그 성과가. 여러분, 안식일 지키고 끝났습니까? 돌아올 안식일 또 있어요. 저번 안식일 지켰으면 구원된 겁니까? 다음 안식일 조져버리면 그건 다시 파멸이에요. 이게 바로 구약시대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어떻습니까? 단번에 너희가 거룩함을 입었노라. 거룩을 소유한 게 아니라 거룩이 덮쳤느니라. 예수님의 피로. 이게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사가 구원되지 못한 문둥병 같은 우리를 자기희생으로써 하나님,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우리를 완전히 덮어서 커버했으니 우리의 자랑은 오직 십자가뿐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우리가 지혜로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일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제시한 그 일 그 속에서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 줄 알았사오니 그저 주님의 희생만 생각하고 주님의 십자가의 고마움을 표하는 성도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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