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6:28-34 / 야곱과 요셉의 상봉

정인순 2019. 2. 20.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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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과 요셉의 상봉


이근호
2019년 2월 20일        



본문 말씀: 창세기 46:28-34

(46:28)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46:29)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동안 울매

(46:30)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46:31)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46:32)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46:33)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46:34)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언약의 거점’이란 하나님의 일이 실제로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느냐를 세상에 나타내는 방식입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그런 식으로 자기 세계를 형성하고 구축해 왔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 이후, 인간들의 근본된 토지, 곧 땅에 의지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땅이 있고 없고가 생명을 좌우하게 됩니다. 자기 땅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은 자’와 방불한 신세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반대로 ‘내 땅 있음’은 목숨이 부지되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살아 있음은 곧 ‘거주할 땅 제공’으로 파악하려고 합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왔기에 하나님에 대해서 이런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과 그 식솔들은 살 땅이 없어서 애굽으로 내려온 것으로 쉽게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즉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구차없이 애곱에 살겠다는 다짐으로 짐싸들고 고향을 떠난 것으로 보입니다. 자칫하면 ‘땅 주시는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언약을 이해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요셉을 만나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즉 야곱은 죽었다고 여긴 요셉이 살아 있음을 보고 하나님의 언약의 일관성을 이해합니다. 비록 자기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겁니다.

야곱은, 언약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언약의 내용대로 아들 요셉을 통해서 이루심을 알고 자신 및 여러 가족들을 기꺼이 합류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 합류와 거주할 땅을 가진 것으로 종결될까요? 아닙니다. 언약의 거점은 지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물입니다. 야곱은 요셉에 합류하려고 했지, 결코 애굽 나라에 살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땅’과 ‘인물’을 구분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느냐 하면, 신약 시대에 접어들면 땅으로서 언약의 완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특정 지역에 산다고 해서 '하나님께 복받았다‘고 할 수가 없는 초월적 세계가 따로 언약 완성차원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특정 지역에 와서 살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특정 인물, 곧 ‘예수님을 알게 되었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가 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구원의 원리와 적용입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합류하고 싶듯이 요셉도 야곱에게 합류하고 싶어했습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도 애굽나라는 자신의 나라가 아닙니다.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의 특징은, 독자적으로 홀로 살고 싶어합니다. “이 땅에서 조용하게 간섭받지 않고 오래오래 살고 싶어합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독자적인 의식에서 시작해서 독자적인 의식으로 되돌아오는 경로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홀로 사면 죽음이요 더불어 살면 생명입니다. 요셉은 자신이 본인의 성공으로 보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아버지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선발로 미리 애굽으로 내려온 것으로 봅니다. 창세기 45:5에 보면,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미 꿈의 계시대로 되었다면 다시 본래의 것으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처럼 야곱과 요셉은 상호 경쟁적으로 자기가 살아있음을 보이고 그것을 부인합니다. 이게 바로 사적이지 않고 공적에 합류된 모습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현재 속해 있는 애굽과 야곱의 가정과는 어떤 관계가 될까요?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하여금 언약의 가족인 야곱을 맞이하게 하므로서 두 개의 공적 세계가 나타남을 보이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직업’의 차이 때문입니다. 직업이란 사적인 노동과 공적인 사회의 경계선에 위치해 있습니다. 노동이란 개인들이 자연과 마주하면서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것을 말합니다.

직업이란 그 사적인 노동이 사회에서 분업의 일종으로 받아들여질 때, 그 사회가 인정해주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34절에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즉 애굽 사람들이 생각하는 공적 사회란 곧 자신들이 스스로 인정하는 사회 뿐입니다. 그들은 목축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농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크고 넓은 범위 안에 모든 것을 다 담는 애굽나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네들이 선호하는 직업에 동화되는 조건하에 야곱가족을 애굽의 일환으로 여길 참입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동화되는 것을 도리어 요셉이 중간에 나서서 바로왕과 조율에 나섭니다. 애굽 사람들이 목축업을 싫어하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도리어 그 차이를 분명히 해두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애굽 사람들이 기피하는 목축이라는 직업으로 인해 새롭게 애곱 안에 형성되는 공적사회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이 지리적 거점이 결코 본질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겁니다. 고센이라는 특정 지역에 살면서도 이스라엘은 초-『지리적 거점으로서 언약을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야곱이라는 인물 중심입니다. 언약은 결코 개인이 따로 사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사적인 것은 곧 ‘타인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언약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공적 사회에서 성도는 자기쪽에서 던지 질문은 없습니다.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그 해답을 도로 끌어 모을 자기만의 자리를 따로 두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언약 안에서는 더 이상 사적인 것은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언약의 인물 앞에 할 말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그 분 앞에서 자신을 더 이상 챙기지 않는 것, 챙길 필요가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성령받은 사람의 특징입니다. 새로운 공적 세계를 위해 사적인 것을 아낌없이 버리는 겁니다. 이로서 이 세상에 는두 개의 공적 세계가 언약으로 인하여 발생되고, 과연 우리가 성도인가를 지옥가는 사람들, 성령받지 못한 자들이 우리를 기피하므로서 그들로 통해 증명되고 확인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성도라고 떠벌릴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세상이 성도를 잘 알고 있음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78강-창 46장 28-34절(야곱과 요셉의 상봉)

190220-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6장 28-34절입니다. 구약성경 74페이지입니다.

창 46:28-34

“야곱이 유다를 요셉에게 미리 보내어 자기를 고센으로 인도하게 하고 다 고센 땅에 이르니 요셉이 수레를 갖추고 고센으로 올라가서 아비 이스라엘을 맞으며 그에게 보이고 그 목을 어긋맞겨 안고 얼마 동안 울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요셉이 그 형들과 아비의 권속에게 이르되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가나안 땅에 있던 내 형들과 내 아비의 권속이 내게로 왔는데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리니 바로가 당신들을 불러서 너희의 업이 무엇이냐 묻거든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 가볍게 보게 되면 과거에 일어났던 한 가정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 옛적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라는 식으로 소개할 뿐이지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오늘날 우리를 천국 보내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그 점을 생각해 봐야 돼요.

우리하고 상관없어 보이는 어느 나라, 그것도 옛날에 일어났던 그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천국을 알려주고 천국의 원리를 알려주는 동기와 힘으로 작용한다면 우리가 상당히 큰 은혜를 받는 겁니다. 그 때 그 가정에게 작용했고 간섭했던 하나님의 그 뜻이 그대로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되는 겁니다.

그래서 남의 이야기라고 할 수가 없어요. 가정에서 일어나는 것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다루는 원리를 발췌해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도라면 하나님의 어떤 특정한 원리원칙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는데 그 원리원칙을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미리 접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을 할 때 일관성 있게 일을 하시거든요. 그 일관성이 과거에 야곱가정에 이렇게 적용했고 오늘날 같은 천국 가는 백성이기 때문에 동일하게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기백성을 다루는 원리를 어떤 식으로 찾아낼 수 있는가?

30절에 보게 되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이스라엘이……, 야곱이지요.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내가 네 얼굴을 보았으니 지금 죽어도 가하도다.”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지요. 여기서 우리는 야곱과 요셉이 서로 살았다는 것에 대해서 경쟁관계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야곱입장에서는 요셉이 살아 있는 그것으로 내가 살아 있음을 대신할 만하다, 라고 보는 거예요. 네가 살아있다면 내가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말은, 내가 살아있는 것이 네 앞에서는 이제는 그 값어치를 다 했다. 이제는 내가 꼭 살아야 된다고 고집부리기를 원치 않는다. 그런 고백을 내놓은 거예요.

야곱입장에서는 뭐냐? 요셉 네가 살아 있으면 이제부터는 야곱 너의 살아 있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야곱이 요셉에게 와서 합류한 겁니다. 야곱이 자기가 살던 세계를 버리고 요셉이 있는 곳에 도달함으로서 야곱은 하나님의 뜻의 일관성을 이제는 실질적으로, 현실적으로 접하게 된 것을 감사히 여깁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요셉이 살아 있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야곱에게는 더 이상 자기목숨이라는 것이 더 이상 자기 짐으로 작용하지 않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이 땅에서 천국 생활하는 것이 뭐냐 하면, 천국생활이란, 예수님 살아 있으면 그 앞에서 내가 살아 있는 것에 대해서 어떤 부담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살아있다면 그 앞에서는 나의 인생 같은 것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거예요. 그 정도로 내 인생보다 주님의 삶, 내 삶보다 주님의 삶, 내 목숨보다 주님의 생명이 더 귀하게 보일 때에 그것이 지금도 동일하게 우리에게 작용한 결과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한번 따져봅시다. 우리가 살면서 하루하루 걱정하는 것이 그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죽으려고 걱정 근심하는 겁니까, 살려고 걱정 근심하는 거예요? 묻는 내가 나쁘지요. 살려고 걱정 근심하는 거예요. 어떻게 죽을까, 그것 때문에 걱정 근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살려고 걱정 근심하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단독의식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창세기 3장에서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그 때부터는 자기가 자기한테 전부가 되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곧 나의 죽음으로 나 자신이, 나라는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러면 이 세상 모든 의미가 죽도 밥도 아무것도 안 된다는 거지요. 기어이 내가 나를 살려내야 비로소 이 세상에 내가 사는 목적이 발생된다고 보는 거예요.

이게 뭐냐? 혼자서 출발해서 결국 모든 목표가 자기에게로만 모든 것이 응집이 되고 도달되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보내게 되면 예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 앞에 등장했다면 그 다음부터 우리는 예수님 자신의 죽음과 경쟁관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내가 살아있는 것이 내 사는 이유, 목적이냐? 아니면 주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내가 살아있는, 내가 아직도 안 죽고 있는 이유가 되고 목적이 되느냐를 묻는 거예요. 경쟁관계에 있으니까, 내가 더 귀하냐, 주님이 더 귀하냐의 경쟁관계에 속하는 겁니다.

성령이 와서 주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그 주님의 여정, 노선, 생명,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가 보는 것이나 악마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보시기에 주님의 일에 꽂혀 있고, 주님이 더 소중하고, 우리 자신보다 더 주님이 관심 있게 모든 일의 중심이 되어서 돌아간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우리가 그동안 내 인생에 대해서 갖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은 주님 앞에 내려놔야 되겠지요. 그러한 천국의 원리를 오늘 본문 30절에서 야곱이 요셉 맞이하면서 다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 대목을 다시 읽어봅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이르되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고” 요셉을 주님으로 바꿉시다. 주님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나는 그 얼굴 보았으니 죽어도 가하다.

주님이 살아계시고 부활했다면 나는 이제 그 사실을 알았으니까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사도들이나 선지자들이 갔던 길이 바로 그 길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사도바울의 고백이 그 고백이에요.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죽을 인간이 무슨 고민이 있으며 죽을 인간에게 무슨 걱정이 있습니까?

걱정근심은 어떻게든 나만 살고자 하는데서 나오는 거예요.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의 생각은 한결같아요. 전부 다 똑같습니다. 조용하게 오래오래 사는 것.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의 공통점은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조용하게, 한가롭게, 여유 있게, 오래오래 사는 것. 어디서? 이 땅에서.

따라서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자기와 경쟁해요. 죽어가는 자기와 오래살고 싶은 자기와 경쟁하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야곱은 그런 경쟁, 자기가 자기 자신과 경쟁하는 그런 경쟁관계는 끝났습니다. 요셉을 만나는 순간 자진해서 두 손 들고 자기포기 선언을 해버리지요. 그렇다면, 야곱은 ‘요셉으로 인하여 살았다. 하나님의 모든 것이 언약대로 이루어졌구나.’ 하고 감사하면 될 텐데 그런데 왜 요셉은 야곱과 경쟁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 봐야 돼요.

아버지가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왔다면, 요셉 같으면 거들먹거리고 ‘역시 내가 아버지보다 낫지’ 이럴만한데 왜 요셉은 아버지와 합류하려고 했던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요셉도 마찬가지로 야곱을 경쟁관계로 보는 겁니다. 요셉은 지금 애굽에 자기 혼자 있어요. 애굽에서 결혼한 부인도 있고 애도 있지만 어쨌든 자기혼자 있어요.

혼자 있기 때문에 혼자 있는 것은 죽음이고 함께 있는 것은 삶이 되거든요. 요셉이 기다렸던 것, 요셉은 자기가 직접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적이 없어요. 자기에게 주어진 모든 상황과 인생 그것은 자기가 받은 언약의 성취가 아니라 아버지가 받은 언약의 성취입니다.

그러면 요셉입장에서도 누구하고 합류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야곱의 가정과, 야곱의 그 언약이라는 열매 안에 요셉이 합류해야 돼요. 아버지 야곱을 만남으로서 요셉은 더 이상 자기가 할 도리는 다 한 겁니다. 요셉은 요셉으로서의 독자적인……,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독자적인 것은 위험하다 했지요.

독자적인 세계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는 어디까지나 야곱의 세계의 일원일 뿐이라는 사실을 나중에 가서도 요셉이 고백을 하게 되고 그리고 그 전에 창세기 45장 5절에서도 고백을 하지요.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앞서 보냈다는 것은 따로 요셉세계를 구축하겠다는 마음을 요셉이 안 갖고 있다는 뜻이에요. 원래 원 바탕은 아버지 야곱의 세계에요. 야곱세계에서 원정대로, 선발대로 요셉이 하나 삐어져 나온 거예요. 따라서 야곱은 요셉을 만나기를 원했고 요셉은 아버지를 만나기를 원했고. 그래서 양쪽 다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합류해서 결합해서 사는 거예요.

이것이 언약 안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런 이야기, 하나님께서 한 가정에서 약속대로 이루어서 헤어졌던 가정이 다시 만나는 일에 무사히 이루어졌구나, 이렇게 간단하게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있는데 문제는 처음에도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개인가정사가 아니고 하나님의 천국에 들어갈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보편적 원리가 되려면 여기에 나오는 이 등장인물에 우리 자신을 교체해서 대입해도 딱딱 다 맞아떨어져야 되는 거예요.

맞아떨어지려면 우리가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옛날에 야곱이라는 가정이 하나 있었는데 가나안 땅에 살다가 아들 하나가 애굽에 팔려가서 거기서 대성공을 해서 애굽이라는 남의 나라에 살았다. 그래서?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렇게 끝나면 안 되겠지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성공했다는 것이 옛날에 우리가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단독적으로 살고자 하고 오래오래 조용하게 여유롭게 살고자 할 때 그 거점이 뭐냐 하면, 이 땅이에요. 땅에 거점을 두고 이 땅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러나 언약의 거점은 땅이 아니에요. 땅이 아니고, 지리적요소가 거점이 아니고 인물이 언약적거점이 됩니다.

인물이 언약이 거점이 된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에서는 애굽이라는 나라가 실제로 있고 그리고 가나안 땅이 실제로 있어서 모든 것이 실제적으로 보이겠지만 신약에 오게 되면 언약의 나라, 영의 나라라는 것은 인간들의 눈에 보이는 실제적인 것으로 대체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영적인 세계니까 비실체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다면 구약에서도 어떤 요소를 여기서 뽑아내야 되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분명히 외형적으로서는 실제로 있는 애굽나라, 실제로 있는 가나안 땅에서 이사해서 애굽에 살았다, 이것이 실제로 보이지만 그것을 언약의 전부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오늘날 영적인 세계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에 실제로 보이는 것이 언약의 전부라면 우리는 전부 다 애굽나라에 일단은 이민을 가서 이집트의 백성이 되었다가 거기서 다시 가나안땅으로 나오는 절차를 밟지 아니하면 천국을 못 간다는 그런 논리가 되어버리지요. 눈에 보이는 실체적인 것을 통해서 비실체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로 실제적으로 애굽나라, 실제적으로 어떤 인물이 움직일 때 그들을 통해서 신약에서나 적용되는 영적인 세계, 초월적인 세계의 원리가 여기서 뽑아져 나와야 된다는 그 말입니다.

흔히 이야기하잖아요. 쉽게 말해서,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습니다, 할 때 하나님 보여주면 믿겠다는 말은 뭐냐? 자기의 육신을 갖고 있다는 것, 눈에 들린다, 보인다, 만져진다는 그 실체를 계속 붙들고 있는 거예요. 붙들고 있는 상태에서 내가 천국 간 것을 확인하고 싶다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원리에 어긋나는 거예요.

하나님께서는 외형적으로는 실체가 있지만 본질상, 내용상 그것을 뛰어넘는 초실체적이고, 비실체적인 것이 그 가운데서 뽑혀 나와야 돼요. 요셉이 사전에 바로왕과 조율을 해서 이들이 고센 땅에 살게 되었습니다. 고센 땅에 살게 되었다는 것은, 목축지가 많고, 나중에 애굽에서 탈출할 때 애굽의 국경선 근처의 지역이기에 빨리 빠져나가기 쉽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언약의 거점이 지리적인 것에 국한되어버립니다.

목축지가 많아서 목축하기 좋고, 어차피 탈출할 것이니까 그들과 동질성을 이루면 안 되고 이질적이어야 되고 쉽게 빠져나가기 위해서 국경선인 고센 땅을 그들에게 주었다, 라고 설명을 해버리면 오늘날 이 시대에 우리는 천국가기 위해서는 어느 땅, 어느 지리적 거점에 살면 천국가기 쉽습니까, 라는 질문도 얼추 성립이 돼요.

쉽게 말해서 북한에 가서 천국 갈 것이 아니고 북한에서 탈북해서 남한에 살아야 천국 가는 하나님의 뜻에 더 깊이 있게 들어온 셈이 된다는 이런 설명은 상당히 잘못된 설명이에요. 지리적거점이라는 것을 뛰어넘어야 돼요. 벗어나야 된다는 말이지요. 외형적으로는 그렇게 보이더라도 본질상 지리적인 요소가 절대적인 것이 아니고 전부가 아닌 거예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설명해야 되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개인적으로 사는 것을 사적으로 봅시다. 그리고 여럿이 사는 것을 공적으로 봅시다. 사적으로 자기 이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이것은 창세기 3장 이후에 인간이 범죄 한 본성이에요. 개인적으로 나만 잘되고, 나만 오래살고, 땅 가지고 이 땅에서 여유롭게 살면 그만이라는 것.

그래서는 안 되고 누굴 만나야 되는데 누굴 만난다는 자체가 사적인 것을 넘어서 공적인 세계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구원이라 하는 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느냐 하면, 사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공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야곱을 만나기를 원했고, 야곱이 요셉을 만나기를 원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기언약을 그대로 성취했다는 그것에 대해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요셉을 만나기를 원했고, 요셉이 야곱을 만난 이것은 사적인 나의 공적이나 공로가 아니고 저 아버지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이 그저 나를 모델로 삼아서 성취한 것뿐이기에 우리는 그 아버지의 가족과 아버지의 혈족에 합류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관된 일의 마무리다, 이렇게 요셉은 생각한 겁니다.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공적인, 더불어 사는 그 속에 자기가 포함되어 있음을 스스로 자인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따로 뽑아져 나오면 이것은 구원이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사적에서 공적으로 넘어가는 것이 구원이라면 그 구원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신 힌트가 뭐냐?

32절부터 34절에 있습니다. “그들은 목자라 목축으로 업을 삼으므로 그 양과 소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왔나이다.” 하는데 여기에 직업이 나와요. 직업이 뭐냐를 생각해 봅시다. 직업이라는 것은 사적과 공적의 경계선상에 있는 것이 직업입니다. 인간은 개인적으로 자연에 반해서 노동하게 되어 있고 그 노동하는 그것이 공적사회에서 다른 사람이 원하는, 다른 사람이 필요로 하는 일에 종사할 때 그것을 직업이라 할 수 있는 거예요.

직업이라 하는 것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의 경계선에서 공적과 사적이 접합되는, 만나는 지점에 직업이 형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그 직업이 34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당신들은 고하기를 주의 종들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목축하는 자이온데 우리와 우리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소서.”

그 다음이 중요해요. “애굽 사람은 다 목축을 가증히 여기나니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되리이다.”라고 했어요. 목축하는 그 직업에 대해서 애굽나라 사람들이 뭐라고 평하느냐 하면, 가증한 직업이라고 본 거예요. 배타시하고 경멸하는 직업에 목축이 해당되는 겁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 일관되게 이 시대에 오늘날 우리 성도에게 적용되는 원리를 어떻게 말할 수 있느냐? 내가 구원받았다, 안 받았다는 것을 내 입으로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면 누구 입으로 해야 되는가? 지옥 가는 사람들 입을 통해서 경멸히 받고, 가증히 여기는 평가를 받을 때 우리는 성도라고 할 수가 있는 겁니다.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지금 아주 정교하게 하나님께서 일을 하십니다. 언약의 완성자리가 약속의 땅이 아니고 놀랍게도 애굽땅에서 요셉은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꿈의 내용대로 아버지가 절하고 많은 사람들이 절하는 그런 사람은 가나안 땅이 아니고 애굽땅에서 되었어요.

그러면 애굽 땅에서 최고가 된 거예요. 최고 높은 권한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야곱의 입장에서는 어디로 와야 되느냐 하면, 그 애굽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전부 합류를 하는데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들이 애굽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요셉에게 합류하기 위해서 그들은 자기고향을 떠나서 요셉에게 모여든 거예요.

그러면 누가 봐도 ‘아, 언약에 속한 야곱의 가족은 애굽나라라는 지리적 공간에서 언약의 거점이 되었구나.’라고 쉽게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누가 봐도 고센 땅이니까, 실제로 지리적으로 있는 땅이니까, 그 땅에서 이스라엘이 사니까 그 땅이 이스라엘 땅이라고 생각한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언약의 거점은 지리적인 것이 아니고 인물이라 했어요. 특정인물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요셉에게 결합되기를 원했지만 요셉은 반대로 아버지의 인물에 요셉이 합류되기를 원해요. 비록 쫓겨났지만, 아버지의 가정으로부터 쫓겨났지만, 물론 아버지가 쫓아낸 것이 아니고 형들이 쫓아냈지만, 이제 성공한 입장에서는 그것을 다시 아버지에게로 되돌려주고 싶은 거예요. 아버지의 언약의 결과고 효과니까.

그 합류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공적세계가 발생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지리적으로는 애굽나라가 과연 하나님이 원했던,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살던 그 지리적인 거점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거예요. 그것은 아닙니다. 애굽나라는 아니에요. 그러면 애굽나라 안에 고센 땅에 살면서도 애굽나라 고센 땅이 거점이 되지 못한다면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의 거점은 어디냐?

그것은 인물이에요. 그런데 그 인물이 요셉이냐? 일단은 요셉입니다. 일단은 요셉인데 요셉에 합류하고 난 뒤에는 그 다음부터는……, 애굽사람들이 요셉에 대해서 대 환영을 해요. 가뭄 속에서 자기민족을 살려냈으니까 대환영을 하는데 문제는 그 직업인데, 직업이라는 것이 사적인 세계와 공적인 세계의 경계선에 위치한다고 했습니다.

요셉의 가정이라고 해서 온 사람들의 직업이 뭐냐? 목축하는 거예요. 34절에 보면 이것은 애굽사람들이 의도적으로 경멸히 여기고 가증히 여기는 거예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면, 비록 고센땅이 이집트땅에 속하기는 속하지만 애굽 사람이 보기에 그 고센땅을 뭐로 보느냐 하면, 우리가 배타시하고 미워하고 싫어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사는 땅으로 보는 거예요.

그들은 정착농경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직업이 나의 공적세계를 이루는 겁니다. 애굽사람 보기에는 애굽나라가 자기에게 정당하고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고, 자기의 안녕을 보장할 수 있는 거점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애굽사람의 거점으로부터 배타시 되는 장소가 고센 땅으로 돌변하고 말았어요. 거기에 언약백성들인 야곱의 식솔들이 살다보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뭐냐 하면, 고센 땅에 대한 그 뉘앙스가 애굽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싫어하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우리가 옹호하고 우리가 수용할 수 없는 직업을 갖고 있는 사람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애굽 땅에서 두 개의 공적거점이 발생되는 겁니다. 이게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결과에요.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하지요. 성도를 이 땅에 살게 할 때 성도의 각자의 직업들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애굽사람이 야곱의 식솔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목축을 하고 그들이 농경에 동화되지 않고 따로 논다는 바로 그 점으로 인하여 애굽사람들은 요셉은 좋아하지만 요셉의 가족에 대해서는 그 직업을 버리지 않는 한 호감을 줄 수가 없는 입장입니다.

왜 그러냐? 야곱 그 사람들은 이 땅이 알고 있고, 이 땅이 생각하고 있는 것으로는 도저히 생각 못하는 새로운 공적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고 저는 그것을 영적세계라고 보고 싶습니다. 실체를 통해서 비실체를 끄집어내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저는 그렇게 보는 거예요. 야곱이 요셉에게 합류할 때 야곱은 요셉에게 어떤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누굴 만날 때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그쪽 세계에 함몰되어 있고, 푹 잠겨 있고, 이미 안겼다. 마음 푹 놓고, 안심 푹 놓고 잠겼을 때는 질문이 없는 법입니다. 합류라는 것이 그런 거예요. 요셉이 아버지를 만날 때 아무 질문도 하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하지 않아요. 왜? 그리웠으니까. 보고 싶었으니까. 함께 있음에 그것으로 더는 소원이 없으니까. 그게 전부니까.

예수님이 누군가 연구하고, 하나님이 누군가 연구하고, 삼위일체 연구하고, 신학공부하고. 이것은 지금 무슨 뜻이냐 하면, 신앙이 없다는 뜻이에요. 어떤 의미에서 성령을 안 받았다는 뜻입니다. 신학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직도 성령을 안 받았다는 증거예요. 뭐 그리 할 말이 많고 따질 것이 왜 그리 많습니까?

뭐가 천국이며, 뭐가 믿음이며, 그거 알아서 뭐할 건데요? 그 정보를 알아서 뭐할 겁니까? 그걸 알아야겠다는 말은 뭐냐 하면, 여전히 창세기 3장의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나의 인생을 포기를 안 하겠다는 뜻이거든요. 내 잘남을 포기 못하겠다는 뜻이에요.

지난 1월에 아가서 강의했지만 사랑하는데 꼭 말이 필요합니까? 사랑이 무슨 말이 필요해요? 사랑합니까, 라는 말도 필요 없어요. 사랑합니까, 라는 말을 한다는 자체가 사랑 안한다는 뜻 아닐까요? 항상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은 뭘 지키라는 것이 아니고 사랑이 주어졌을 때 결과적으로 우리가 느껴지는 것을 그 후에 느끼라고 준 거예요.

아, 이런 느낌이구나. 주를 사랑하라는 말은, 아, 이런 느낌이구나. 믿으라고 하면, 아, 이게 바로 믿음이구나. 그냥 확인하는 차원에서 주어진 겁니다. 야곱과 요셉 둘 다 지금 어디를 쳐다보느냐 하면, 야곱과 요셉을 보면서 그 중간, 두 인물이 서로 결합이 될 수 있도록 어떤 중간매질, 중간의 연결고리로 개입된 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하나님의 언약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실제로 살아서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외형적으로 보여주는 그것, 목축하는 직업을 가지고 애굽에 살면서도 애굽사람과 섞이지 않도록 따로 고센 땅에 집결지를 마련해주도록 사전에 요셉이 바로 왕과 조율이 다 되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두 개의 공적세계를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고 활동에 나선다는 겁니다.

지금 이 시대는 땅에 거점이 있고 그리고 땅과 상관없는 영적세계, 두 개의 현실 층이 중복, 중층 되어 있는 거예요. 다층구조를 형성하고 있어요. 두 개의 현실이 중복되어 있다는 말이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 이게 같이 있어요.

같이 있어서 내가 구원받았는지, 천국 가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땅을 바라보고, 땅에서 모든 소망과 소원을 땅에 두고 사는 사람, 땅에서 사적으로 행복을 추구하고, 또는 공적으로 모여도 사적인 거예요, 사적인 이유 때문에 서로 협력하는 그들로부터 낯설다, 이상하네, 너의 모든 행동을 경멸한다, 가증스럽게 여긴다, 라고 그들이 평가를 해줘야 돼요.

지옥 가는 사람들이 평가를 해주면서 “너는 나와 대화가 잘 안 통하네. 너는 관심사가 엉뚱한데 있구나. 너는 다른 사람과 좀 다른 것 같아.” 그들이 부정적인 언사를 사용하면서 평가를 해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는 성도의 자세고 본질이고 위상입니다.

야곱은 일체 자기주도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요셉도 마찬가지로 자기주도권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천국은 뭐냐 하면, 천국의 원리란 일체 인간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나라, 그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인간을 사용해서 다 이루신 나라, 그게 바로 천국입니다.

따라서 사적인 것을 제거해버리고 공적인 것을 드러내는 외형으로서만 개인을 사용하는 현실이 분명히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이 가정에 일어났던 그 원리가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되어서 우리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서 이 땅에서 여전히 살고 있는 자유로운 백성인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를 위해서 이 땅에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고 주신 하나님이 아니라, 주께서 십자가지신 것이 아니라, 천국의 원리를 우리를 통해서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살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님 저희들 홀로 살게 마시고, 홀로 자기의 행복과 이익을 탐하지 말게 하시고, 자신만의 목적을 위해서 살지 않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