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7 여러 세대
이근호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시작점과 마감점이 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흐르게 되면 인류라는 것도, 이 세상이라는 것도 모두 사라지는 결과를 맞이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시간’을 한시적으로 보는 겁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겁니다. 그리고 ‘시간’은 어디까지나 보조적이라고 합니다.
본질을 실어나르는 환경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 본질을 오늘 본문에서 ‘자비’라고 말합니다. 자비란 어떤 분이 어떤 대상자를 향하여 무상으로 제공되어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제공된 행위로 말미암아 영원히 이별하지 않고 같이 하게 되는 상황을 이어가게 됩니다. 즉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의사를 이 시간 속에 담아서 전달해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살아나심입니다.
이 안에 하나님의 자비가 담겨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그 자비하심이 원인이 되고 예수님에게 일어났던 일이 반복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주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문제는 겉보기에 성도인 자와 그렇지 않는 자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 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예수님과 일반인 사이에 아무런 외형적인 차이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과 같은 겁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남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비하심’이 성도에게 찾아들게 되면 이 세상 것에 대해서 그다지 큰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의 것을 얻기 위해 사람들은 자체적으로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순수한 선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남을 정당함을 만들어내기 위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없어져버리는 겁니다. 즉 스스로 자기를 지켜나가고 자기를 살려나가는 의도를 갖지 않게 되어버리는 겁니다. 성도를 통해서 풍겨 나오는 것은 감사와 고마움은 그 자비에 반응하게 됩니다.
세상과 세대
2019년 2월 27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2:7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사도가 우리에게 한 말이 있다네요. 그는 고린도후서 12:1에 나와있는 것처럼 삼층천을 보고 온 사람입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땅에서 천국가는 방식은 그동안 인간들 끼리 쑥덕거리 그 방식이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 것도 한 것도 없이 천국에 간다는 겁니다. 이것은 그동안 지상에서 거창스럽게 종교 행위를 한 것이 아무 짝도 소용없게 되어 버리는 겁니다.
지상에서 천국으로 가는 방식은 인간들끼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끄집어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무엇을 보여주었던가요? 그분은 길이 없는 그곳으로 나아갔습니다. 죽음의 길입니다. 마치 차가 절벽으로 돌진하는 무모한 짓을 하신 분입니다.
과연 인간들이 예상대로 신은 예수님을 전혀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자신들의 판단이 옳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사흘 후에 그분은 무덤에서 사라졌고, 그분이 남기신 모든 말씀이 다 약속이 되면서 인류의 남은 역사는 그분의 약속대로 진행됩니다. 단축해서 말씀드리자면, 그분은 역사에서 빠져나가서 이 세상을 ‘세대’로 규정하시면서 다시 찾아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세상’과 ‘세대’의 차이점을 무엇일까요? 세상이란 인간들이 상호 협동해서 구성해 나가는 현실체제를 말합니다. 각자 믿을 것은 오직 자기 자신뿐입니다. 자기가 그러하기에 남들도 그러할 겁니다. 따라서 더불어 일하시는 것도 실은 자기 혼자 더 풍성하게 살기 위한 일시적 양보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이 세상 살이가 힘듭니다. 같은 사람들만 상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상호 필요한 것들을 교환하므로서 살아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굴욕적으로, 비굴하게 굴어도 살기만 해준다면 그것으로 일단 인생 성공으로 믿고 싶은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 한 구석에 ‘나의 터’가 안정되게 자리잡기만 하면 그것도 삶이라고 보는 겁니다.
그러나 ‘세대’란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생겨나는 세상을 말합니다. 전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가 그러합니다.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을 조성하시면서 그 안에 필히 집어넣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안식일 제도’입니다. 안식일이란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다 만족스럽게 만드시고 스스로 자신을 기념하고 축하하기 위해 시간을 재료로 만든 법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십계명 안에 제 네 번 째 계명으로 삽입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역사는 이 언약의 준수를 위하여 기차처럼 줄기 차게 달려야 합니다. 그 안식의 날을 위해서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 세대’입니다. 언약의 미완성 시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친히 안식일의 주인이 되시므로 이제 안식일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인물적 개념으로 완성되 었습니다.
레위기 25:8-10에 보면,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지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구 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지며 제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그 기업으로 돌아가며 각각 그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희년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당도하시므로서 완성을 맞이하게 된 겁니다.(눅 4: 18-19,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즉 천국에 들어가는 방식은 주님께서 이루어놓은 성과를 바탕으로 그저 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역사의 굴레를 빠져나가시면서 십자가를 통과했지만 그 십자가의 길은 예수님을 뒤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사라져버린 천국문입니다. 아무도 천국갈 수 없는 입장에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오순절날 예수님의 약속대로 성령이 오고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님이 세상을 보는 그 안목을 공유하게 된 것입니다. 이 점을 사도는 고린도전서 2:11-12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즉 예수님께서 성도에게 묻는 것은 ‘네 인생사에 대해서 네가 책임지라’가 아닙니다. 단지 “은혜를 받았느냐?” 여부입니다. 은혜 외에는 아무 것도 묻지 않습니다. 이처럼 성도란 세상을 살면서 사람들하고 상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홀로 있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삽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 ‘예수 안’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사람을 구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처럼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사랑받기로 예정된 자를 찾으려 나서서 이 사실을 알리려는 겁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고 말입니다. 지옥을 샅샅이 뒤져서라도 하나님께서 따로 숨겨놓은 하나님의 백성을 찾으러 나서는 자입니다.
일종의 ‘보물찾기’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성도들을 금방 이 세상에서 데려가지 않는 겁니까? 그것은 지금 이 세상은 오늘날의 성도가 속해 있는 세대입니다. 이 세대에서 성령받은 사도의 역할을 또한 성도가 해야 합니다. 마치 지나 간 학창시절을 생각하면서 철지난 교복을 입어보는 것처럼, 성도도 세상적 안목이 무엇인지를 이미 구원받은 상태에서 재현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취하는 여유로움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여유롭게 순교했고, 거지 나사로가 끝까지 거지였지만 그는 단지 혼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반면에 부자는 돈으로는 여유로웠지만 지옥에 가서도 세상적 안목 그대로 혼자였습니다.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하는 것은 이방인의 사고 방식입니다.
주님께서 필연적으로 친히 기르시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 나라의 의’를 그리워하는 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모든 나의 일이 내가 나서서 해결해야만 하는 생각이 얼마나 세상적인 것임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4강-엡 2장 7절(세상과 세대) 1902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2장 7절입니다. 신약성경 311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2: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니라.”
지난 시간에, 성도는 이미 하늘에 앉혔다, 하늘에 안착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참 누가 들어도 어이가 없는, 정말 어이가 없는 이야기에요. “교회 가서 목사한테 지도 잘 받고 열심히 사시면 아마 죽어서 좋은 날 볼 겁니다. 노력하세요. 애쓰세요. 분투하면서 자기를 절제하면서 사세요. 악은 버리고 선을 택하고 나쁜 짓 하지 말고 바르게 사세요. 주의 천국에, 착한 사람 모이는 그 장소에 들어갈 겁니다.”라는 이야기가 우리에게 쉽게 납득이 돼요.
그런데 한 것도 없는데 벌써 하늘에 도착을 했다면 기분 좋은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객관적인 확실한 근거가 제시되어야 되겠지요. 왜냐하면 지금 오늘날 교회가 이야기하는 것과 너무 다르니까.
“날마다 여러분의 체질을 개선하시기 바랍니다. 점점 더 여러분을 갈고 닦으시기 바랍니다. 도 닦으시고, 나쁜 일 했으면 그 독소를 배출하시고, 선한 사람으로 날마다 전환될 때, (그걸 성화라 하는데) 거룩하게 될 때 여러분은 거룩의 나라에 합류됩니다.”라는 이야기가 우리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고 또 교회에서 그렇게 이야기해주니까 사고가 맞다고나 할까요?
생각이 맞으니까 ‘그래, 잘 왔어. 노력해야지. 좋은 날 있을 거야.’라고 하는데 그게 아니고 생뚱맞게 이미 하늘에 앉혔다고 되니까 이것은 내가 평소에 시도하는 모든 시도에 대해서 무용지물이 되는, 뭔가 혼이 나갔다 할 까요, 쇼크, 충격이 되는 겁니다.
지금 사도가 우리한테 할 말이 있다는 거예요. 사도가 이야기할 때 좀 외면하지 말고, 얼굴 돌리지 말고 들어보라는 겁니다. 이미 사도는 고린도후서 12장 1-3절에서 전체를 봤어요. 하늘나라를 봤다는 말이지요. 하늘나라 본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에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그 방식까지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던 그 방식이 아니었다고, 지금 우리한테 할 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굉장히 많습니다.
우리 인간의 힘으로,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성경말씀 지키고 율법대로 살고 그래서 들어갈 것 같으면 성령이 오실 이유도 없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이유도 없다는 거예요. 예수님이 오셨다. 성령이 오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가 하는 시도가 틀렸다는 거예요. 이게 잘못되었다는 겁니다.
옛날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갖고 있던 그 사고방식을 그대로 무한적으로 계속 반복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런 식으로는 육에서 육으로 끝날 뿐이지 교회 와서, 사실 교회는 노는 데잖아요, 평생토록 교회 와서 노닥거리고 놀고 있는 거예요. 오락이나 취미생활 한 것에 불과한데. 오래 했다고 집사 시켜주고, 오래 했다고 장로권사 시켜주고요.
그게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겁니다. 이미 하늘에 앉아야지. 이미 앉았다는 사실, 그걸 우리들이 받아들여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미 하늘에 앉혔다면 그 다음에 나오는 변화가 있는데 그 변화가 7절에 나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수 안’이라는 단어 나오지요.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은혜지요. 자비, 은혜, 같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여기 ‘세대’라는 새로운 단어가 등장합니다. 이미 하늘에 앉은 사람이기 때문에 세상을 볼 때 더 이상 세상으로 보지 말고 세대라는 단어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이 역사에서 빠져나와서 다시 찾아올 때는 세대를 가지고 찾아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어떤 식으로 노력하면 천당 가느냐, 그것은 집어치우고요, 그런 생각은 아예 먹지 마시고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하는 그런 생각은 좀 하지 말고, 예수님이 뭘 했는가에 주목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사람들은 죽은 것으로 보지만 성경에서는 빠져나간 것으로 봐요. 갇혀 있는 공간에서 빠져나왔다는 말이지요.
빠져나왔다는 말은, 눈에 보이는 이 세계 바깥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세계로 아무도 갈 수 없었는데 개구멍 빠져나가듯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서 빠져나갔다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도 십자가 안으로 들어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이 땅에서는 십자가라는 구멍이 없어요. <트루먼 쇼>라는 영화가 있지요. 출생할 때부터 거대한 세트장에서 태어난 사람이 서른 몇 살까지 활동하는 것을 계속 생중계로 전 세계에 내보내는 쇼가 있었던 거예요.
나중에 커서 보니까 내가 세트 안에 갇혀서 한평생 살아왔고 이웃은 전부 다 엑스트라였음을 발견한 그 영화거든요. 인간은 죽는 것은 알아요. 장례식에 참석하니까 죽는 것은 아는데 죽고 난 뒤에 어디에 가는지 그 점에 대해서는 몰라요. 사는데 신경 쓰지 죽고 난 뒤까지 신경 쓸 수가 없어요.
< 디스커버리>라는 영화가 있는데, 어떤 과학자가 죽고 난 뒤의 사후의 세계를 밝혔어요. 영화의 내용에 그게 나와요. 사람들은 과학만 좋아하기 때문에 과학적으로 밝히고 난 뒤에 자살자가 급증했습니다. 확실하게 그 쪽 세계가 있다면 지긋지긋한 이 세계를 떠나서 그쪽 세계에 빨리 가려고 자살자가 증가했는데 5백만이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내용이에요. 과학으로 밝혀놓으니까. 사후의 세계에 내가 갈수만 있다면 이 지긋지긋한 세계에 구태여 이 몸 달아 하면서 고생할 이유가 없다는 거예요. 그 쪽이 좋다면 고생 덜하고 빨리 가는 것, 조기졸업, 또는 제대를 빨리 하는 것, 이 땅의 교도소복역을 단축해서 빨리 가는 방법으로 내가 내 몸을 죽여 버리면 그쪽 세계에서 편히 쉬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에서 자살자가 급증했다는 것이 영화내용입니다.
영화내용은 아니지만 사람은 이 지구를 떠나서 더 넓은 곳에 가고 싶어 해요. 달나라 가는데 한 50억 있으면 간답니다. 인간은 자꾸 뭔가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그 빠져나가는 방식이 이 땅에서 살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하기 때문에 빠져나갈 수가 없습니다. 방식 자체가 사람들이 너와 내가 동의하는 방식 가지고는 안돼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으로 익히 알 수 있는 그 범주 안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서는 저쪽 세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행함으로는 구원되지 못한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러면 믿으면 될 것이 아닌가? 믿음도 행함인데요. 행함이라는 것은 뭐냐? 나로부터 출발하는 모든 것은 나를 이 세상 바깥으로 데려가지 못한다.
심지어 예수님조차 십자가 질 때 혼자 힘으로 진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만 십자가 졌고 지고 난 뒤에 십자가는 다시없습니다. 빠져나온 구멍은 있는데 “주님이 저쪽으로 갔다. 가자” 하고 가는데 벌써 그 구멍은 막혀 버렸어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막혀 버렸어요. 주님은 이야기했습니다. “따라오지 마.” “저 제자인데요.”
제자고 뭐고 간에 갈 수 없어요. 주님 가신 길을 졸졸 따라서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 따로 대우하고 우리 따로 대우해요. 둘 사이를 구별시킵니다. 들어갈 구멍이 없어요. 십자가를 백날 져보세요. 자기를 때리고 채찍질하고 백날 해봐야 소용없어요. 행함으로 갈 수 있는 곳이 없어요.
그러면 뭐냐? 제자들은 성령이 오기를 기다렸고 오순절 날 성령이 와서 그들은 갔습니다. 이게 성경의 코스입니다. 그렇다면 에베소서에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이렇게 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사도는 하지 않습니다. 하지를 않고 사도는 뭘 하는 사람이냐?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혹시 있을 수 있는가를 찾는, 찾아서 통지하는, 연락하는 연락책이 사도바울이에요. 예수님의 사도니까. 일종의 탐지견, 또는 수색 팀, 사람 찾기, 보물찾기 하는 식으로 지옥을 샅샅이 다 뒤집어요.
지옥을 샅샅이 뒤집어서 혹시나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이 혹시나, 이 ‘혹시나’에 줄 그어놔야 돼요, 없는 것을 아는데 혹시나, 없는 줄 알아요, 아는데 혹시나 하나님의 자기백성 있을까 싶어서 찾아 나선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본인이 사람을 구원하지를 않아요. 사도는 남을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일체 없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저 사람! 이 사람! 그리고 저 사람” 주께서 찍어놓은 사람에게 찾아가서 “혹시 그 사람이 그 사람이십니까? 혹시 주님이 아는 그 사람 맞아요? 혹시 주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한 사람 맞습니까?”라고 연락을 가져가는 사람, 일종의 전령이지요, 그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베드로가 사도바울 편지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해요. 베드로가 사도바울은 아니지만 자기는 같은 사도로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의 편지는 사람의 지혜로 적은 것이 아니고 이 에베소서가 성령으로 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사람만 이해가 되도록 되어 있다고 베드로후서에서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래서 하늘에 앉혔다는 이 말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이성이나 신학을 배워가지고는 도저히 수용이 안 되는 어이가 없는 이야기입니다.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어디를 둘러봐서 이게 하늘입니까? 앰뷸런스 앵앵거리는 이게 무슨 천국이고 하늘에 무슨 앰뷸런스가 있겠어요? 아무리 두 눈으로 똑바로 쳐다봐도 이것은 천국이 아닙니다.
하늘에 앉혔다는 감을 줄 수 없는, 그런 느낌이 못 오게 만드는 그런 복판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구원받지 못할 사람이라면 에베소서 2장 6절, 7절에 나오는 이 사도바울의 편지, 성령으로 쓴 편지에 대해서 강력한 거부감을 나타내야 돼요. 성경을 덮든지, 그런 소리 하면 두 번 다시 교회에 안 나오든지 화가 치밀어 올라야 됩니다.
어느 정도껏 해야지 터무니없어도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감을 사실은 가지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정상적인 태도에요. 오히려 ‘그럴 수가 있었네. 이것은 신의 한수네.’라고 느끼는 그 마음 자체가 좀 낯설다, 내가 미쳤나, 내가 기존에 살던 방식이 아닌데, 기존에 살던 방식을 내가 이 자리에서 포기를 해야 돼, 라는 자구적인 의심, 그러한 것을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미 하늘에 앉혔다면 우리를 이 땅에 그냥 둘 이유가 없잖아요. 앉혔다면, 이미 하늘에 갔다면 빨리 둘둘 묶든지 해서 빨리 이 땅에서 뽑아내야 우리 몸이 편하잖아요. “빨리 와, 빨리 와! 너는 합격이야. 얼쩡대지 말고 빨리 와.” 이렇게 뽑아내야 되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계속 이 땅에 팔십이고 구십이고 백 살까지 힘든 세상에 살게 하는 이유가 뭐냐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예수 믿고 나서 당장 죽지 않았습니다. 연락책 역할을 다 해야 되듯이 우리 성도가 하나님의 연락책 역할을 해야 돼요. 나같이 이렇게 구원된 사람이 혹시나 있을까 해서 우리를 탐색견으로, 마약 조사하는 탐지견으로 주께서 목을 묶어서 지옥세상을 샅샅이 들춰보게 하는데 우리가 팔십, 길어도 백 살까지 사는 그것을 가지고 오늘 본문에서 뭐냐?
‘이 세대’라고 하는 거예요. 이 세대에 우리가 연기자로서 맡은 역할은 다 해야 돼요. 우리의 구원이 주의 목적이 아니고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앉아 있다. 성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있다는 이 새로운 현실에 대해서 알려야 될 역할을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 하는 거예요. 구원받으려고 교회 오시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보이스피싱한테 당하는 겁니다.
교회는 구원을 해주는 곳이 아니에요. 세대라는 말, 세상이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 헬라어로 ‘아이온’이라고 하는데 세대라는 말로 한 것은 세상을 시간으로 표현하는 거예요. 어렵지요. 세상을 시간으로 표현한다는 말은 무엇을 무시하느냐 하면, 인간의 모든 문화와 문명을 무시하는 거예요.
인간의 업적이 있잖아요. 원자력발전, 4차 산업,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은 깡그리 다 무시하는 거예요. 그래도 갇혀 있기는 마찬가진데, 이런 식으로 무시하는 겁니다. 세대라는 말은, 시간이 흘러가는 거예요. 시간이 흘러가게 되면 어떤 시대, 1700년대, 1800년대, 아무리 해도 시간이 흘러가면 어떤 인간도 시간을 이길 수가 없어요. 후패해서 썩어서 무덤에 갑니다.
자식을 낳으면 자식은 그 시대에 부모를 흉내 내면서 똑같이 살아요. 그걸 보통 새내기라 하지 않습니까? 지금도 산후조리원에 가면 새내기들이 많이 있는데 그 새내기들이 이 땅에 살아갈 때 어떻게 살 것인가? 이미 좀 살아본 사람은 알아요. 백날 살아봤자 우리 했던 것 그대로 되풀이하고 반복해요.
초짜들이거든요. 인생초짜, 세상초짜. 그들 새내기도 나처럼 늙어가요. 시간을 이길 수 없습니다. 세월을 이길 수 없어요. 위대한 발견을 하고, 위대한 발명을 해도 피부에 덮쳐지는 죽음의 흔적을 떼 낼 수가 없습니다. 시간을 누가 이깁니까? 그래서 세상을 표현하는 적절한 방법은 뭐냐? 세대다. 세월의 무게. 이 세대는 기억의 조건이라 하는 겁니다. 남는 것은 기억밖에 없고. 또는 역사의 텍스타일. 역사의 천 조각이에요.
역사라 하지만 내가 살아있을 때만 역사지 내가 죽으면 역사고 하나님이고 뭐고 내가 죽는 마당에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요? 좋은 집 살지만 내가 죽는다면 그 좋은 집도 나에게 무슨 유익을 주겠습니까? 누가 시간을 이기겠습니까? 그래서 너희들은 시간 속에 갇혀 있다. 그래서 너희는 세대다. 그렇게 보는 겁니다.
이 말은, 하늘에 앉혔다는 말은, 하나님 오른편, 그 자리는 시간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반면에 인간들의 세대는 뭐냐? 불멸해요. 영원과 불멸의 차이점은 불멸은 썩어감의 반복이에요. 세대와 세대의 반복이에요. 그래서 7절에 “오는 여러 세대에”라고 표현한 것은 갇혀 있다는 겁니다. 썩어짐을 되풀이 할 뿐이에요.
우리는 썩어서 은퇴하고 새내기가 또 썩기 위해서 살고. 그것이 어디서 보이는가? 하늘에서 보이는 거예요. 하늘에 앉아 있는 눈으로 보니까 보이는 거예요. 그 하늘에 앉아있는 안목을 가지고 성령 받았다고 하는 겁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은혜 받았다고 이야기하고. 아무리 성도라도 안 늙는 것이 아니에요. 늙어가요.
하지만 은혜가 뭐냐 하면, 이 세상에서 듣지도, 못한 외부에서 주어진, 성령이죠, 외부에서 주어진 안목, 시선, 그 전체를 아울러 한꺼번에 볼 수 있는 안목, 그걸 은혜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 11절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 외에는 모른다고 단정 짓습니다. 맞는 말이지요. 왜? 타인의 마음은 그 사람만 알지 나는 모른다는 것을 예로 들어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사정은 하나님만 아신다.
그렇게 단정지어놓고 그 다음에 뭐라고 하느냐? 하나님만 아셔야 되는 그 하나님의 사정을 은혜를 받은 사람은, 우리가 몰랐어야 되고 알 수 없어야 되는 하나님의 사정을 은혜를 통해서 성령의 선물을 통해서 비로소 알 게 되었다, 라고 12절에 나옵니다.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 세대라고 하지 말고 세상이라고 합시다. 이 세상에서는 인간이 장차 어떤 짐작을 해요. 죽고 난 뒤에는 천국이 있고 지옥이 있을 것이니 우리가 대비하자. 그래서 만든 것이 종교라는 것을 만들어놓았어요. 종교가 크게 세 가지로 이어지고 있거든요. 불교, 기독교, 천주교로 이어져요. 이슬람교도 있지만, 그리고 힌두교도 있지만 대략 세 가지로 보면 되지요.
불교는 뭐하느냐? 사람이 조상에게 육적으로 매여 있으니까 조상제사를 대행하고 점을 쳐주는 대행업자입니다. 불교는 2십만 원에서 2백만 원까지 주면 제사를 대행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사회에서 꼭 필요한 단체가 불교입니다. 왜? 조상한테 잘해줘야 자기가 잘되니까. 가정이 화목하고 사업이 잘되니까. 제사를 대행해주고 또는 점을 쳐줍니다.
요새 점치는 앱이 나와서 절마다 점을 쳐줍니다. 암자가 돈이 되는 이유가 점을 치러 오기에 돈이 돼요. 불교는 제사와 점치는 대행업. 그 대행업을 사회가 요구하고 있어요. 불교가 없어지지 않아요. 자기욕망을 대신해주니까. 기독교는 뭐하느냐 하면, 복 받는 것. 기도로서 복 받는 것을 대행하는 대행업이에요.
의인의 기도는 간구하는 힘이 있으니까 목사가 기도해주면 효과를 봐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겁니다. 천주교는 뭐하느냐 하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대행해주는 업체가 천주교입니다. 그래서 불교와 기독교와 천주교는 이 세상에서 없어지지 않아요. 영원합니다. 불멸이에요.
왜? 사람이, 내가 하고 싶은데 규범 쪽으로 잘 못하는 것을 전문가에게 일임을 하는 거지요. 대행업자, 전문가에게 일임을 하는 거예요. 일종의 여행사에게 맡기듯이. 천국 어떻게 갑니까, 하고 맡기는 거예요. 그게 바로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 세대로 바뀌었다는 말은, 그게 다 말짱 소용없었다는 것을 예수님이 지적하고 이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우리에게 이 세대로 성령을 통해서 찾아온 거거든요.
그러면 3대종교, 4대종교까지 포함해서 불교, 천주교, 기독교, 이슬람교, 거기에 힌두교까지 이런 여러 가지 세상종교가 말짱 소용없고 그 모든 것들은 시간이 주는 저주의 품 안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들은 죽어가고 있더라, 라는 것을 세대적 관점에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겁니다. 그 아는 관점을 성령을 받은 우리가 같이 공유해버리면 그것을 가지고 은혜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 땅에 어떤 대행업자도 없어요. 세대라는 관점으로 봤을 때는 이 세상 자체가 시간의 시전이고 시간의 사원이에요. 시간만이 차고 넘치는 신전, 그 안에 주님이 계십니다. 교회에 주님이 계신 것이 아니고 바깥의 모든 일상에, 시간이 흐르는 그쪽에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예배당 왔다 갔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어요. 예배당이라는 부동산 자체가 소용없는 거예요.
그러면 결국은 하나밖에 없는 세대가 되지요. 헬라말로 아이온이라 하는데. 그런데 오늘 본문에 여러 세대라고 되어 있어요. 이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전에 이미 세대라는 흔적을 주신 민족이 있어요. 그 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이스라엘민족은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과 함께 동행 하는 민족이기 때문에 그 민족은 세대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아왔던 유일한 민족이에요.
그러면 그들의 세대는 뭘 로 나누는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약속에 의해서 시작과 마감을 규정을 해버렸습니다. 참 어려운 이야기를 끄집어낼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25장 8절-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년이라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는 나팔 소리를 내되 전국에서 나팔을 크게 불찌며 제 오십년을 거룩하게 하여 전국 거민에게 자유를 공포하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할 때 다 마무리하시고 안식일을 만들었고, 그 안식일이 하나님의 언약이 되고 약속이 되어서 나라가 만들어지면서 안식일이 그 안에 계명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이 나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겁니다. 안식일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말은 안식일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완성으로 달리게 만드는 주체가 되는 거예요.
사람이 주체가 아니고 안식일이 주체가 되는 겁니다. 그 안식일이 계속해서 일 년 내내 이어지게 되고 그것이 나중에 7년이 되면 안식년이 되고, 안식년이 일곱 번이 되면 49년이 되고 거기에 플러스 1년이면 50년, 희년이 되어서 모든 것이 최종적인 안식상태에, 영원한 상태에 들어가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 있는 거예요.
시간이라 하는 그 안에 안식일의 취지, 본질이 담겨 있으면서 달려가는데 어디로 달려가느냐? 안식일의 완성을 향하여 달려가는 겁니다. 안식일 지정자체가 심히 보시기에 좋았더라, 의 하나님 자신이 만든 것을 스스로 기념하고 영광 돌리기 위해서 안식일을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 안식일이 이 지상에서는 시간을 통해서 달리는 겁니다.
단둥에서 출발한 기차 안에 누가 있습니까? 김정은이 탔잖아요. 60시간이면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다는 겁니다. 그 기차 왜 달립니까? 그 안에 누가 타고 있잖아요. 어떤 사람은 뚱땡이라 하는데. 거기에 누가 타고 있잖아요. 타고 있으니까 모든 다른 기차를 다 스톱시키고 달리고 있잖아요.
이 세상은 세상으로 보지 말고 세대로 보면 그 안에 시간이 있어서 안식을 향하여 막 질주하고 있는 거예요. 브레이크 없이 막 달리는 거예요. 하자 없이. 그러면 성도는 뭐냐? 그 시간의 제물 되는 거예요. 시간이라는 제단 앞에 제물로 바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늙어죽어야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의 주인이 되고.
유대인들은 착각하기를 안식일은 시간을 지키는 것이라고 안 거예요. 제 7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가 이단인 이유가 그들은 시간을 지키는 거예요. 일요일로 안 지키고 토요일로 지킨다는 겁니다. 행함이죠. 토요일 날 밤 11시 59분 59초. 그 다음부터는 안식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바리새인하고 똑같아요. 연속극도 59분 59초까지 안틀면 되고 그 다음부터 틀면 되고. 모든 것을 그런 식으로 지키는 거예요.
우리나라도 고신측에서 그렇게 한다고 했지요. 안식일을 그렇게 지키는 거예요. 제가 언젠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 했잖아요. 고신측 같으면 여러분은 먼데서 차타고 오면 안돼요. 기름 값 들어가는 것도 안식일 어기는 거거든요. 근처 모텔 많거든요. 거기서 주무시고 아침에 걸어와야 돼요.
그럴 때 남는 것이 뭘까요? 자기 뿌듯함이겠지요. 나 하나님 말씀 지켰다. 이것은 아직도 율법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안식일의 주인공이에요. 그러면 안식일의 주인공과 우리가 동일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이 땅에 있다는 말은, 주님께서 이 땅에서 어떤 것도 문제 삼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안목, 은혜 받은 것, 그 은혜 받았느냐를 우리에게 문제 삼는 거예요.
다른 것은 문제 삼지 않아요. 수색견처럼 하나님께서 자기백성 찾을 때, 네가 작년 여름에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것을 안 묻습니다. 네가 내 안목을 선물로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의 그 여부만 따져요. 가정이 파탄 났느냐의 그런 것은 묻지도 않아요. 우리가 이미 이 세대를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세대적관점인데 그 마지막세대가 뭐냐 하면, 새언약이거든요.
마지막 언약, “다 이루었다”가 되면 세대가 그걸로 끝나는 겁니다. 그걸 종말이라고 하고 마지막 때라고 하는데 마지막 때 히브리서 1장에 보면 나와요. 마지막 때는 선지자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직접 보냈어요. 그러면 아들이 ‘다 이루었다’ 하면, 이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 이룬 것이 맞아요.
우리한테 일체 책임을 안 묻습니다. 네가 이런 짓을 했구나, 저런 짓을 했구나, 해서 천당가거라, 지옥가거라, 이런 식으로 우리의 행함에 대해서 묻지를 않는다니까요. 이걸 얼마나 강조해야 됩니까? 우리가 안방구석에서 무슨 짓을 하고, 여행가서 무슨 짓을 했는지 그런 것을 일체 묻지를 않는다니까요.
인과응보적 사고방식을 따지지를 않아요. 이런 짓 하니 벌 받아라, 이런 짓 하니 복 받아라, 그런 것이 없어요. 그것은 종교대행업자들이 하는 짓이에요. “목사님, 착해야 천당 가겠습니까? 착하게 되는 방법 좀 ……” 이런 것은 종교대행업자들이 고객을 향해서 그런 짓을 하고 있는 거예요.
축구할 때 반칙하기만 해봐라 지옥 간다. 그런 것이 있어요? 없지요. 반칙 없이 무슨 축구가 됩니까? 감정 섞이지 말고 축구하라. 이게 돼요? 설교 다시 갑시다. 우리가 아는 방식이 아니라니까요. 어이가 없을 정도에요. 우리가 아는 방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아는 방식들이 아니에요.
그러면 내가 과연 은혜 받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아느냐? 세상, 세대말고, 시간이 지배하는 세대말고,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그것을 세상이라 하거든요. 하나님의 언약이 빠졌으니까. 우리가 알아서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나가야 되니까 인간만 있는 거예요.
우울증이란 뭐냐? 인간이 인간만 상대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리는 거예요. 예를 들어 갑자기 젊은 날에 구조조정을 당했다. 그런 경우 젊은 사람들 중에 많아요. 직장에서 오라고 합격통지 했는데 두 달 정도 다녔어요. 월급도 제법 되고 이런 꿈이 있었어요. ‘이제 이 월급으로 원룸이라도 얻고, 원룸이라도 얻으면 사랑하는 여자 불러다가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터 잡고 살 수 있다. 행복하다. 직장주신 사장님 좋아요.’
이렇게 하고 있는데 2개월 만에 회사가 문 닫게 되었어요. 고향에 있던 것 다 팔고 왔는데 이쪽에 돈 줄이 끊어졌다는 말이지요. 구조조정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그러면 갈 데도 없고 있을 곳도 없어요. 이게 가슴에 얼마나 상처가 되었으면 수십 년 후에 꿈에 나타납니다. 이 충격에 기절 할 뻔 한다니까요. 가슴이 너무 아파서.
여러분, 구조조정도 한 두 번이지 한 네 번 당해보세요. 본인은 주의 뜻이라고 하면서 룰루랄라지요. 하지만 그 아내는 구조조정 당할 때 어떻겠어요? 여자가 왜 결혼합니까?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자만나서 룰루랄라 살려고 결혼하잖아요. 당신은 돈벌어오고 나는 쇼핑 다니고 애 키우고. 그런 희망 때문에 여자가 결혼하는 거예요.
남자는 남자로서 터 잡아서 거기서 자기가정을 이루고 남자다운 기개를 펼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터 잡는 겁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좌절되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은 왜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요?” 참 있을 곳도 없고 갈 곳도 없을 때 사람이 하나님이고 예수고 그게 중요해요? 뭐가 중요합니까? 도대체 내가 있을 터나 있으면 좋겠다.
이 세상을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계시로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땅 있음과 땅 없음의 차이. 그게 구약 이스라엘입니다. 땅 없는 민족을 땅 있게 했을 때 땅에 대한 집착이 대단한 거예요. 땅 없다가 땅 있으니까, 내 자리 없다고 내 자리 생겼으니까 이것은 그게 신이고 그게 우상이 되고 그게 나의 전부가 된 거예요.
“나는 살았다. 나는 이제는 몇 십년간 살 수 있다. 너무나 근시안적인 사고방식이지만 그렇게 사는 거예요. 이 땅, 이 터를 만약에 누가 위협한다면, 누가 나로 하여금 이 땅에서 나의 희망을 좌절시킨다면 내가 그 인간을 그냥 좌시하지 않겠다. 내가 용서하지 않으리라.” 그래서 돌아가신 분이 누구냐? 예수님입니다. 그 가나안 땅에서.
땅 없다가 땅 있는 민족이 구걸 하듯이 매달린 것은 로마제국이었습니다. “조용하게 살 테니까, 예수 저런 인물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까 제발 우리 민족을 종교생활만 하도록 허락해주면 세금 바치겠습니다.” 그게 예수님 당시의 유대사회였어요. 세대가 아니고 그냥 세상이었습니다.
주님은 그 세계에서 빠져나온 거예요. 마태복음 6장 31절에 이런 말씀 있지요. 혹시나 여러분이 기억나거든 고개 끄덕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혹시 들어보신 기억납니까?
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예수님은 세대적 관점에서 준 거예요. 그러나 그 말씀을 받는 제자들은 세상적 관점에서 이걸 받는 거예요. “참새를 보라. 들풀을 보라. 내가 친히 키우잖아.” 이게 은혜에요. 주께서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같이 있다는 것이 은혜에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예수 안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님이 책임지고 함께 있는 거예요. 혼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우울증 생기고 왜 힘듭니까? 자꾸 혼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 인생 문제를 내가 해결 안하면 해결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은혜? 개코같은 소리하고 있네. 내가 노력하면 그만이지. 내가 거지인가?” 이러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은혜 받은 자의 여유가 성경에 나옵니다. 스데반집사. 아, 돌에 맞아도 여유 있어요. 그들을 용서할 정도로 여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나사로. 앞에서 부자가 까불거리는 것 알아요. 부자가 돈으로 여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자기는 믿음으로 여유 있어요. 개가 핥아도 가만 놔둡니다. 그리고 둘 다 죽었습니다.
한쪽은 천국에, 부자는 그 여유 있던 모든 것, 땅에 살던 그 사고방식 그대로 지옥으로 갔습니다. 내가 가져야만, 내가 쥐어야만 안심이 되는 그 성깔머리, 그대로 가져갔어요. 거지는 도와주신 은혜로 산다는 것이고 부자는 내 힘으로 이만큼 내 인생 일궈놓았으니 내 인생에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이러한 철저한 방어 식으로 살아왔던 거예요.
마치 개척교회 하는 목사가 좀 크고 나니 “내 교회 누가 욕해? 내 교회 누가 건드려?” 이런 것과 똑같은 겁니다. 교회중심주의, 종교중심주의, 이게 문제에요. 내 중심주의, 전부 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동안 여러분이 만났던 사람은 전부 다 우연이었어요. 전부다 우연히 만난 사람이에요. 결혼한 상대도 세상여자 다 불러놓고 골라잡은 것이 아닙니다.
우연히 마주치면서 한방에 훅 가서 결혼한 겁니다. ‘저 사람이랑 결혼하고 보니 영 아니더라.’ 결혼 해버렸는데 ‘아니더라’가 어디 있어요? ‘그 때 왜 그랬지?’ 모르겠어요. 그게 내 뜻이 아니라니까요. 우리는 그냥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과 같은 겁니다. 세대라는 사고방식을 가지고 세상을 보라는 말은 마치 뭐와 같으냐?
옛날 지난 시절에 입었던 교복을 입어보는 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제 생각입니다만 여러분 생각은 어떤지 모르겠어요. 고등학교 때, ‘나는 언제 어른 되어서 내 힘으로 돈 벌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한번 살아보느냐?’ 이 교복, 그리고 중도 아니고 머리도 빡빡머리로 다 깎았잖아요. 이게 꼴 보기 싫은 거예요. 머리 기르고 싶어서라도 빨리 졸업하고 싶었어요. 지금은 다 빠졌지만.
소원이 뭐냐 하면, 근시안적이에요. 우리가 코앞에 있는 것밖에 몰라요. 근시안적으로 자기 하고 싶은 욕망만 벗어나면 그게 천국인양 여겼던 겁니다. 그런데 부산역에 초량동이 있고 거기에 ‘이바구길’이 있어요. 168개의 계단이 있습니다. 그 위가 천당 같아요. 하도 힘드니까 모노레일을 해놓았는데 거기 올라가면 ‘이바구공작소’가 나와요.
이바구공작소가 뭐하는데냐면 옛날 60년대 70년대 체험하라고 공작하는 곳입니다. 교복을 입어요. 사진도 찍어보는 겁니다. 립스틱 짙게 바른 아줌마들이 교복을 입어보는 거예요. 입을 때 얼마나 여유가 있습니까? 이제는 숙제 걱정 안 해도 되고 다시 고등학생시절로 돌아가서 학교교사한테 감시를 안 받아도 되잖아요. 이미 어른 되었잖아요.
여유 있게 교복을 즐겨 입을 수가 있고 사진도 찍고 하는 겁니다. 또 늘 입으라고 하면 귀찮겠지만. 그처럼 하나님께서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세상 살게 하는 것은, 주님께서 어떤 은혜로, 십자가 피로 너를 용서를 했는가를 보라고 우리로 하여금 세상교복을 입히는 거예요. 이미 알맹이는 구원받아놓고.
왜 내 행함으로, 내 착함으로 왜 구원이 안 되는가를, 내 성실함으로 구원이 안 되는가를, 왜 모든 살아가는 것이 내 뜻이 아니었고 주님의 우발적인 은혜였고 선물이었다는 것을 이제는 새롭게 느껴보라고 우리로 이 세상에 살게 만드시는 겁니다.
학교 때 체험 중에 이런 것도 있어요. 뜨거운 난로 위에 도시락을 올려놓아요. 도시락 안에는 김치하고 계란을 얹어 놓았어요. 좀 잘 사는 애들은 소시지도 있었지요. 도시락을 흔들어요. 흔들어서 도시락 비빔밥을 만들어서 먹잖아요. 그것도 세끼 계속 먹으면 맛도 없지만 하여튼 오랜만에 먹어본다고요.
이 세상은 마치 뜨거운 난로 위에 있는 도시락 속과 똑같은 거예요. 갇혀 있는, 밀폐된, 폐쇄된 공간 안에 있는데 지옥불이 올라오고 있어요. 그 안에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빠져나온 안목, 다시 말해서 우리 안목이 아니고 빠져나온 성령의 안목을 선물로, 은혜로 받은 사람은 그 도시락을 물끄러미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근시안적이 아니에요. 이 세상 사람들은 사람을 상대해요. 세상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적 안목 가지고 살아가다 보니까 적을 속이고 적을 죽여야 내가 살아요. 한평생 사는 것이, 남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겁니까? 이것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에요. 자기 한 몸 살리려고, 자기가정 살리려고 하는 짓거리는 그야말로 듣기 싫을 정도로 엄청난 잘못된 일을 하는 거예요.
범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인간이 인간만 상대할 때 범죄하는 거예요. 남하고 상대할 때. 사람과 사람과만 상대할 때. 내가 나만 있다고 하는 것처럼 저쪽도 저쪽만 있을 것이라고 여기고 상대하니까 사람만 자꾸 의식되고, 사람만 신경 쓰이는 거예요.
그러나 내가 여기 있음에 주께서 나를 참새로 여기고 들풀로 여기고 주께서 지금까지 키워왔다는 것을 안다면 상대가 나에게 어떤 소리를 해도 그것도 주께서 알아서 하게 하셨겠지, 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게 우리한테 우울증으로, 스트레스로 오지를 않습니다.
세대의 관점에서 이 세상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는 미개인이에요. 좀비, 또는 식물인간, 산송장. 지옥의 거주자들이 이런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다. 왜? 공통점이 있다면 내가 나를 살리지 않으면 아무도 날 살릴 사람이 없다는 것. 나는 혼자라는 것. 나는 홀로 있다는 것. 그것만 계속해서 품고 있는 거예요. 그런 세상은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망하게 되어있어요.
이 세상은 난로불이 타고 올라와서 아예 폭발해 버립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어떤 식으로 받습니까, 하는 것은 제가 할 이야기도 아니고 이것은 사도바울에게 요구할 사항도 없어요. 다만 희한하게 성령 받은 성도가 나타났거든 이미 이 세상은 세상이 아니고 세대라고, 시간 안에 갇혀 있고, 그리고 언젠가는 이 세대가 끝날 날 모든 것이 도시락 뚜껑 열리듯 할 때 우리는 그동안 마귀에게 속아왔다는 것이 들통 날 그 때가 올 것입니다.
이것은 부탁할 문제가 아닙니다. 부탁하게 되면 행함이 되니까, 그것은 나부터 시작하니까. 여러분, 한 번 돌아보세요.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내가 살아온 이 모든 것이 누가 이끄시고, 누가 인도하시고, 누가 다루고 있다는 느낌, 그런 느낌을 받아야 돼요.
마태복음 6장에서, 이방인들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고, 하나님의 언약과 이 말씀,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맨 날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밖에 생각 안하지만 너희들은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이미 그 쪽 세계와 한통속이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나라 의를 구하라.
여러분들이 그 나라 의를 생각하고 그걸 의식하신다면 여러분은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가 할 말이 있답니다. 무슨 소리인지 당최 못 알아먹는 그런 사람 아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그런 식으로 일을 하셨구나, 를 지금부터 받아들이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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