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퍅
이근호 2019년 1월 20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1:19-20
(11:19) 기브온 거민 히위 사람 외에는 이스라엘 자손과 화친한 성읍이 하나도 없고 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쳐서 취한 바 되었으니
(11:20) 그들의 마음이 강퍅하여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싸우러 온 것은 여호와께서 그리하게 하신 것이라 그들로 저주받은 자 되게 하여 은혜를 입지 못하게 하시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진멸하려 하심이었더라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원하고 필요한 모든 해답을 다 갖고 있다”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나아가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몰아붙이고 계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아쉬운 것이고 필요한 것들을 따로 분류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하고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것만은 하나님께서 부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단 하나입니다. “그게 강퍅이야”입니다. 그게 곧 건방짐입니다. 우리 인간은 ‘건방짐’외에는 다른 성격을 안 갖고 있습니다. 태생이 그러합니다. 우리는 마치 ‘안 망해야 되는 사람’인 것처럼 굽니다. 망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는 전혀 안 맞는 상황인 것처럼 배격하려는 자세부터 먼저 취하게 됩니다.
이런 태도로 성경을 보면, 왜 하나님께서 인간을 상대로 전쟁을 벌리시는지 그 이유를 모르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전쟁을 앞장 세우지 않는 유화적인 하나님을 진짜 하나님이라고 믿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입니다. 전쟁 속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해야 하고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지만 우리 인간 자신에게 얼마나 큰 오류가 있고 잘못이 있는지 파악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밑도 끝도 없이 무조적으로 괜찮은 인물로 간주하는 것은 모든 인간에게 다 해당되는 사항입니다. 범죄란 아담의 태고난 습성이기도 합니다.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간주하기에 자신을 건드리는 것은 다툼의 시발이 됩니다.
이러한 인간의 근성은 이방민족이나 이스라엘 가리지 않고 다들 공통적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이방민족만 진멸당하고 이스라엘은 멀쩡합니다. 이스라엘은 과연 이런 건방짐을 아담으로부터 안 물러 받아서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마땅히 진멸당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전쟁 중에 살아남은 겁니까?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의 잘남의 목격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전쟁의 목격자요 증언자’로 세상에서 이어져나가야 할 민족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세의 명’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모세의 명’이란 간단하게 말해서 율법입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에게 제시되므로 서, 이스라엘의 역사는, 율법과 이 인간 세상의 만남의 그 결과를 보여주는 역사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얼마나 우월하게 취급하고 냉혹한 심판주로서 행세하시는 지를 이스라엘 역사의 내부 내용으로 후대에 밝혀주게 됩니다. ‘너무나도 무서운 하나님’으로서의 하나님입니다.
인간들이 율법을 지키면 되지 않느냐 하지만, 인간들이 출제한 문제가 아닌 문제는 인간들이 풀어낼 재간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학생에게 문제를 출제하면서 모든 아이들이 만점 맞는 문제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혹시 만점 맞는 아이가 나오면 기특하게 생각하면서도 다음번에는 만점이 안 나오도록 난이도 조정에 나서게 됩니다.
무서운 하나님으로부터 일방적으로 제공된 율법은 모든 인간으로 하여금 심판받아 합당한 자로 규정하기 위함입니다. 몇몇을 심판에서 면제해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있듯이 ‘진멸당’은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에게 부여받는 마땅한 조치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가지고 남들을 지적하는 용도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자기 인생살이 영 마음에 안 든다는 고백이기도 합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주제인 ‘강퍅’과 일치되는 바입니다. 인간들은 자신이 어느 정도로 강퍅한지를 모릅니다. 매사를 행동 조심하고 타인을 배려하는 식으로 산다고 해서 강퍅 아닌 게 아닙니다. 도리어 그런 행함을 축적하고 기억해서 전에 보다 자신을 보는 안목이 점점 높아지게 마련입니다.
즉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벌 받을 일을 한 적이 없다”가 됩니다. 이는 곧 오늘 본문에 의하여 ‘강퍅함’으로 가지고 하나님을 공격하는 성격을 뜻합니다. 하나님의 전쟁에 있어 원칙은 율법입니다. 율법을 위반했으면 그냥 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묵과하지 않습니다. 구차한 변명들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냥 처벌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합당하신 조치입니다. 이런 전쟁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인간을 공격하신 것이 아니라 먼저 인간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었다가 드러납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차라리 인간이 좋아하는 대상은 같은 인간입니다. 인간 끼리는 우성이 싹틉니다. 말도 잘 통합니다.
하나님과 사귀는 것보다 훨씬 자기 근성에 맞습니다. 불편함도 적습니다. 기도하는 것보다 커피 카페에서 몇 시간씩 수다를 떠는 것이 훨씬 행복합니다. 같은 인간은 부담이 없습니다. 거룩하지 않고 엄격하지 않는다는 점이 마음에 드는 겁니다. 인간끼리는 단합도 잘 됩니다.
양보할 것과 타협할 수 있는 것을 늘 최종적으로 마음 두고 있습니다. 인간 끼리 하나가 된다면 외롭지도 않습니다. 외롭지 않고 행복할 수 있는 여건이 된다면 구태어 하나님을 상대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인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한결같이 건방지고 교만하고 강퍅한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이방민족에게 전쟁으로 다가가는 것은 이스라엘을 앞장 세울 때에는 그들의 평소에 대한 태도 자체를 ‘강퍅’이라고 규정하기 위함입니다. 즉 인간 내부의 강퍅한 본심은 하나님께서 전쟁하시는 투로 우리에게 쳐들어와야 비로소 드러나고, 그 드러남을 봐야 될 책임이 이스라엘에게 있는 겁니다.
하나님에게 있어 전쟁이란 기적적인 하나님의 일반성에 포함됩니다. 출애굽기 4장에서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투를 ‘기적’으로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지팡이니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것을 땅에 던지라 하시매 곧 땅에 던지니 그것이 뱀이 된지라 모세가 뱀 앞에서 피하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어 그 꼬리를 잡으라 그가 손을 내밀어 그것을 잡으니 그의 손에서 지팡이가 된지라”(출 4:2-4)
모세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팡이 더불어 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함께 하신다는 증표입니다. 이 ‘증표’가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함께 있는 지팡이를 던지니 졸지에 뱀이 됩니다. 이 세상이 뱀이 지배하고 있는 악한 세상인 것을 알려줍니다. 모세의 손을 품 속에 넣으니 졸지에 모세는 문둥병자가 됩니다.
모든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문둥병자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즉 모든 인간에게는 타고난 질병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계시므로 성도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을 위한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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