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11:6-9 / 병거와 말의 뒷발

정인순 2019. 1. 6.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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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거와 말의 뒷발



이근호
2019년 1월 6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1:6-9

(11:6)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인하여 두려워 말라 내일 이맘 때에 내가 그들을 이스라엘 앞에 붙여 몰살시키리니 너는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사르라

(11:7) 이에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함께 메롬 물 가로 가서 졸지에 습격할 때에

(11:8)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붙이신고로 그들을 격파하고 큰 시돈과 미스르봇 마임까지 쫓고 동편에서는 미스바 골짜기까지 쫓아가서 한 사람도 남기지 아니하고 쳐 죽이고

(11:9)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여 그들의 말 뒷발의 힘줄을 끊고 불로 그 병거를 살랐더라

고대 민족들끼리 싸움하는 이야기를 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까요? 그것은 오늘날 자신을 살리기 위해 동원되는 조건을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즉 이스라엘을 앞장 세워서 벌리는 하나님의 전쟁이 단순히 땅 잡기 위해 싸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단 이스라엘편을 들지 말고 그 가나안 땅 주민의 입장을 먼저 헤아려봅시다.

그들의 심정이 오늘날 우리들의 심정과 같습니다. 조용하게 내 인생 내가 설계해서 살도록 제발 좀 안 건들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입니다. 착실하고 욕심 많이 내지 않고 소박하게 살면 나름대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소박한 삶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으로부터 저주받은 나쁜 생활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정신이, ‘보다 큰 것’을 고려하지 못한 생각입니다. 본인이라는 개별자만 생각하는 겁니다. 나만 편하고 나만 행복하면 그만이 아니냐라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들 토착민들하고 전혀 다른 임무를 짊어진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행복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하나님됨을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출현한 민족들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이라고 점지한 땅의 주민들을 어린애까지라고 씨를 남기지 말고 다 죽여라입니다. 무자비한 하나님의 면면을 유감없이 그들 주민들에게 실행하라는 겁니다. 물론 가나안 민족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가 관영했기 때문이랍니다.

창세기 15:16에 보면, “네 자손은 사대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니 이는 아모리 족속의 죄악이 아직 가득 차지 아니함이니라 하시더니”고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하나님께서 ‘죄’라고 지적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본인이 수긍하지 아니하면 여기서 필연적으로 충돌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미 인간에게 있어 죄와 선의 관계는 이런 식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즉 “내가 사는데 유리하면 선이고 불리하면 악이다” 따라서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것은 참으로 일방적 기준을 적용시킨다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사는 이방민족에게 적용시키는 죄의 기준은 이미 이스라엘 내부에 적용시키신 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희생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곧 죄라는 겁니다. 인간들은 자기 살 궁리가 우선이기에 ‘자기 희생’이라는 아무리해도 용납될 수 없는 요구입니다. 사는 쪽으로 가야 동조가 되지만 도리어 죽는 쪽으로 자신을 몰고 가는데 동의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앞장 세워 가나안 민족과의 전쟁을 하시면서 문제 삼으신 것은, 그들 적들은 자신들의 사는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낸다는 겁니다. 여기서 동원되고 필요했던 것이 바로 병거와 말이었습니다. 이번 전쟁의 특징은 정복한 민족의 병거를 불태우고 말의 뒷발을 끊어버려라는 겁니다.

바로 이 지시가 시사하는 바는, 천국(약속)의 조건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을 살리는 방식은 안 받는다는 겁니다. 진멸의 대상이 될 뿐이다 는 겁니다. 구원은 ‘전쟁’이라는 방식을 경유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인간쪽에서 좋게 좋게 해서 성사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인간이 주님을 향한 핍박 가했다는 증거를 담지 아니하면 천국갈 수 있는 사람이 못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이스라엘에게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이는 평소에 이스라엘이 자기 살기 위해 취한 방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 맞닥뜨리게 하시는 환경은 인간들의 자기 위주의 생활에 부합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편하게 살면 만사 오케이라는 안일한 생각은 하나님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살리기 위해 동원된 장점들은 도리어 자체적으로 두려움을 피하려는 생각에서 시도한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반대로 부각시켜버립니다. 즉 이스라엘로 하여금 단순히 생존을 위한 생존이 아님을 통감하게 하십니다.

천국이란 실은 인간에게 요원한 나라입니다. 세상에 살던 사람들에게 천국은 터무니없이 구상입니다. 이러한 세계를 하나님께서는 전쟁 방식 속에서 심어서 그 상황 속으로 자기 백성들을 밀어넣습니다. 전쟁의 취지를 알라는 겁니다. 예수님도 이런 방식에 따라 이 세상에서 활동하셨습니다.

불가능한 방식입니다. 이 불가능한 방식을 예수님께서는, 인간들이 기피하는 방식으로 표현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그 시대상에서 당연히 지옥에 갈만한 자들을 도리어 천국의 모델로 내세우시는 방식입니다. 세리와 창기와 도둑과 그리고 불의한 청기지들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자신의 삶의 방식이 무산된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 식대로 사는 것과 천국에 본인이 사는 것과 같아야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내세운 자들은 스스로 생각해도 전혀 깨끗하고 거룩한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들입니다. 순수하고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두려움’이란 사치라는 겁니다.

망해도 당연히 싸다는 심정이기에 무슨 일을 당해도 여기서 후회나 원망같은 것은 나올 수가 없지요. 왜냐하면 주제넘게 목표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 비추어볼 때 가당치도 않는 욕심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이런 자들은 자기를 살기 위해 병거나 말들을 준비하지 않는 겁니다.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한 입장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처분에게만 맡긴 자들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포도원에서 가장 적게 일한 자가 포도원 주인의 관대함을 가장 깊이 알게 된 자입니다. 이처럼 오늘날에도 영적전쟁은 여전합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땅 따먹기 전쟁이 아니라 삶의 방식에 관한 전쟁입니다.

‘아래로의 종합’을 먼저 실시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 유일한 성공이요 영생으로 통해서 좁은길을 개척하신 겁니다. 따라서 이 방식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성도는 이스라엘 자격으로 참여되어 있습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고자 하는 길이 곧 망하는 길임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