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4:30-34 / 유다의 희생

정인순 2019. 1. 3.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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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의 희생


이근호
2019년 1월 2일             



본문 말씀: 창세기 44:30-34

(44:30)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44:31)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44:32)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44:33)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44:34)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성경 내용이 보편성을 가질려면 기껏 어느 개인사에 머물어서는 아니됩니다. 어떤 경향을 가진 인간에게도 다 공유 적용이 되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점을 충분히 충족시켜줍니다. 하나이 발언은 유다이고 다른 한쪽의 등장인물은 요셉입니다. 이 둘이 세상을 보는 관점이 서로 다릅니다.

즉 모든 인류는 이 두개의 관점 중에 하나의 관점에 속합니다. 우선 유다의 세상 관점부터 봅시다. 그는 줄곧 요셉의 처신에 의아해합니다. 자기네들은 가나안 땅에서 평범하게 양식서려 애굽까지 온 사람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애굽나라에 혐의를 둘 만한 짓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애굽나라 쪽에서 지속적으로 자기 가정에 분란을 유발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즉 요셉이 하는 행위에 자기 가정의 입장에서 볼 때 죄짓는 바가 된다는 겁니다. 억울하다는 겁니다. 제발 그만 자기네들을 괴롭히지 말라는 부탁하고 심정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들은 이 유다의 항변에 동의할 것입니다.

즉 사람에게는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는 자존심을 가꾸는 것이 이 생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을 갖추는 것이 개별자로의 위엄이요 가치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차원에서 유다느 요셉을 향하여 항변하고 있습니다.

당신 때문에 집에 있는 우리가 아버지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 있다고 유다는 요셉에게 알려줍니다. 당신 때문에 우리들이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알려주기도 합니다. 집안 자체가 혼란에 빠져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번 생각해봅시다. 복음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그 복음으로 인해 우리의 자존심이 훼손되어야 할까요

아니면 우리 자존심이 더욱 공고히 되어야 할까요? 유다의 항변의 근거는, '인간에게 개별자로서 살 권리가 있다'에 있습니다. 이를 위하여 이들은 양식사려 애굽으로까지 온 겁니다. 즉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 양식이 모자라서 그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 애굽에 온 겁니다. 이것이 현 야굽 가정의 자존감이요 개별적으로 타인과 명확하게 구분되는 독자적인 삶입니다.

이 안에서 그들은 삶의 가치를 유지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유다의 생각에 대해서 모든 인류는 공감하지 않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지극히 당연한 항변을 하고 있다고 볼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요셉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합니다. 요셉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여기서 '모든 인류'에 포함되지 않는 특수한 입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그동안 하나님의 숨겨진 꿈의 계시에 의한 결과물로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된 겁니다. 즉 모든 인류들이 잃어버리고 놓치고 있는 바를 그는 알고 있습니다. 요셉은 진정한 관찰자입니다. 세상을 내막을 압니다.

왜 이 세상에 7년 풍년 뒤에 7년 흉년이 꼭 찾아들어야 되는지를 유일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개인, 곧 개별자적인 삶은 결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없음을 요셉은 압니다. 개별적인 가치를 고수하다보니 인간은 자기 자존심을 유지하는 것을 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외부의 요인으로 저지가 되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즉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도 조차 모릅니다, 마치 유다 입장에서 보면 요셉의 개입으로 자신들이 아버지 야곱에게 죄를 짓게 된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요셉이 원했던 바입니다. 요셉은 '죄'라는 상황 속으로 형제들을 몰아부쳐 원초적인 것이 당도하고자 시도하고 있는 겁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실과'를 따먹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창세기 3장에 넘어오면서 인간들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을 따먹은' 상황을 포함시켜 자체저인 자존감과 개별성을 고수하는 식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놓고 하나님에 대해서 온갖 고상하고 거룩한 용어를 사용하여 우러러 대하고 있다고 여깁니다. 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자신의 자존감을 포기하지 않은 채 갖출 것은 다 갖추어놓아서 완벽한 자기 온전함을 달성하려고 합니다. 무엇이 미흡한가를 본인이 안다고 우깁니다.

그러나 요셉의 입장에서 보면,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놓친 것이 멀까요? 그것은 오늘 본문 유다의 고백을 통해서 점차 드러나고 있습니다. 곧 3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처음 아버지 야곱이 요셉을 결사적으로 사랑했을 때, 다른 형들의 태도는 어떠했습니까? 아버지의 생명이 요셉의 생명과 결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들 둘 사이를 강제로 떼어놓았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잃어버린 요셉을 대신을 베냐민을 '생명의 결탁 관계'로 맺어놓았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형들의 '생명의 결탁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이점을 이해하려면 형들은 강제적으로 궁지로 몰려야합니다. 사람이 궁지에 몰리지 않고 위기에 몰리지 않으면 자칭 관찰자로 자처하게 됩니다. 즉 전과 후를 다 살피게 되는 자리에 그들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최종성이 그들에게 안기게 되면 그들은 더이상 사태의 후까지 미처 고려할 자격이 박탈당하게 됩니다. 유다는 자신의 자존감이 허물어지는 것이 용납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33절에 보면,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소서" 라고 말입니다.

즉 그는 베냐민 속에서 자기 자신이 함께 있음을 압니다. 이는 신약에 와서 예수님께서 친히 알려주시는 아버지와 자신과의 관계를 미리 보여주시는 바가 됩니다. 요한복음 10:38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행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을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즉 세상 사람 보기에 예수님이 한 분으로 계신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에게 아버지도 함께 계십니다. 1로 보이지만 실은 2이다는 말입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 비정상적인 인간들이 되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최종 자존감으로 홀로 살려고 합니다.

비록 평소에 여러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느끼지만 항상 최종적인 감은 나로 인하여 홀로1이 되는 겁니다. 2를 배척합니다. 2를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야곱에게 있어 사랑하는 요셉, 사랑하는 베냐민은 각자 1이 아니라 둘이 하나가 된 1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그동안 요셉의 형들은 몰랐던 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의 원초적인 내용이 당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원하는 바요 찾는 바는 이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요셉이 어떠한 존재이며 2이면서도 1처럼 같이 생명을 공유하는 관계라는 것을 요셉의 형들도 같이 체험하기를 원하는 겁니다. 이 체험을 위해서 형들은 독자적인 개별자로 사는 것을 청산해야 합니다.

자존감을 고취하는 목표로 사는 것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자존적으로 다 갖춘 것으로 인생의 승리나 행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자들입니다. 죄인이라면 더 이상 자존감을 지킨다든지 홀로 살기를 목표로 할 권리가 없습니다. 1이면서 주님이 함께 계시로 2의 존재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의 심정과 하나님께서 십자가에게 아들을 버리시는 심정에 공통 체험을 가진 자들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성도들 속에서 이 체험으로 인하 성도는 날마다 최종적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죄인으로서 뭐든지 주저말고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71강-창 44장 30-34절(유다의 희생)19010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4장 30-34절입니다. 구약성경 70페이지입니다.

창 44:30-34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 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비의 흰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내가 어찌 아이와 함께 하지 아니하고 내 아비에게로 올라 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비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창세기 44장에 들어가서 요셉이 하는 이야기보다 유다가 하는 이야기가 훨씬 길게 나와 있습니다. 18절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가로되”부터 시작해서 마지막 34절까지 유다가 계속해서 자기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을 향하여 ‘주’ 라고 이야기하고 자기를 주의 종이라고 이야기하면서 32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주의 종이 내 아비에게 아이를 담보하기를 내가 이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지 아니하면 영영히 아버지께 죄를 지리이다 하였사오니” 죄 문제를 유다가 거론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모든 인간의 성향과 경향을 다 뛰어넘고 누구에게도 해당되는 하나님의 경전이 되는 이유가 우리가 몰랐던 죄 문제를 현실 속에서 밝혀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의 현실이라 하는 것은 자기정당성 때문에 죄라는 것을 자꾸 기피하게 되어 있어요. “뭐가 잘못되었는데? 한평생 열심히 살았는데 그게 뭐가 그렇게 큰 죄냐? 뭘 그렇게 잘못한 것이 있느냐? 열심히 산 것 밖에 없는데 그것도 큰 죄냐?” 세상 사람들이 무심코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도 그런 식으로 대외적으로 핑계대면서 꾸준하게 살아오고 있습니다.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그다지 들지 않아요. 그런데 죄의식이 없는 곳에는 뭐도 같이 날라 가버리느냐 하면, 복음 의식도 같이 날라 가버립니다. 복음의식이 날라 가버리면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과 감사도 같이 메마르게 돼요. 하나님의 고마움과 감사가 없으면 그 사람의 자존감은 꿈쩍도 안하고 버티는 식이 되어버립니다.

사람이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할 경우에는 어떤 미흡함이나 빠진 것이 없다고 자부할 경우입니다.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갖출 것을 다 갖췄다고 자신감이 있을 때는 고마움과 감사는 어디론지 벌써 없어지고 그 자리에 씨도 안 먹히는 자존감만 높아지고 있지요. 복음을 수십 년 들어도 그놈의 자존감이 얼마나 돌멩이 같은지 끄떡도 없어요. 복음을 그만큼 들어도.

주님 앞에서, 복음 앞에서 “죄인입니다.” 백날 이야기하지만 막상 교회나 세상에 나가서 이야기해보면 ‘네 자존감이 세냐, 내 자존감이 세냐?’는 그 대화, 그 투쟁, 그 싸움, 결국 남는 것이 자존감하나로 버티기, 그게 흔하디흔한 일이 되고 말았어요. 도대체 복음을 들은 흔적을 어디서 발견해야 될지, 어디서 찾을지를 몰라요.

복음 듣고 달라진다는 말은, 자기가 죄의식을 느끼고 그 죄의식 속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복음에 대해서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죄의식을 갖기를 내 자존감이 용납치를 않아요. 내 자존감은 죄의식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죄의식과 자존감은 서로 반대거든요. 사람이 죄를 지었다는 느낌이 들면 큰소리 못 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큰 소리 친다는 말은,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이렇게 나오고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하는 순간 그 사람은 고마움과 감사함은 벌써 사라진지 오래되어 버렸지요. 요셉은 몇 마디 했는데 유다는 요셉에게 길게, 44장 18절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길게도 합니다.

길게 이야기하는 그 내용이 뭐냐? “우리는 바로의 애굽나라와 와서 돈 주고 양식만 사서 돌아가면 그만이잖아요.”라는 그 이야기를 길게길게 해요. 다시 말해서 “당신은 우리한테 돈 받고 양식 팔면 되지 우리 인생사에 그렇게 엮이고 관여할 필요 없습니다.” 하는 식으로 길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여기 보면, “당신이 말째 아들을 데려오라고 해서 우리가 그 조건 들어준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아버지가 반대했지만 우리가 억지로 양식 사러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아들까지 볼모로, 인질로 잡는다면 우리 아버지는 죽고 말 겁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죽 합니다. 33절에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

그 이야기는 한마디로 말해서 “왜 당신은 우리를 괴롭힙니까?” 하는 이야기에요. 우리가 본문 이야기를 하면서 이게 어떤 개인적인 가정사의 문제라면 성경에 이렇게 적힐 이유가 없습니다. 가정사의 문제가 아니라면 뭐냐? 모든 인간에게 다 적용되는 보편적인 거예요. 양식을 사러 간적도 없는 가정까지 이 이야기가 적용이 되어야 된다는 겁니다.

아담에 속한 모든 인간에게 공히 이 말씀은 우리의 자존감을 겨냥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공격하는 그 계시의 말씀이에요. 사적인 말씀일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 보고도 ‘이것은 요셉 가정의 이야기네. 이것은 우리 가정하고는 별로 연관성이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넘어간다면 그것은 유다가 요셉 앞에서 아주 강력하게 자신의 행위, 즉 같은 형제들의 행위가 옳다는 것을 가지고 자기자존감으로 버티는 행위와 동일한 행위를 보여주는 것이 돼요.

그래서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알려면 유다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읍시다. 유다가 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돈 주고 양식을 사러 왔습니다. 문제 복잡하게 하지 말고 단출하게 봅시다. 우리는 돈 주고 양식 사러 왔는데 당신이 우리 가정사에 개입해서 우리가 지금 궁지에 몰렸습니다. 제발 우리 좀 놔주세요.” 하는 것이 유다입장이지요.

그러니까 요셉이 유다가정을 꽉 물었다고 보면 돼요. 물었는데 유다와 그 요셉의 형제들은 왜 양식을 파는 저 총리라는 사람이 우리 가정을 무는 이유를 특별히 모르겠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유다를 비롯해서 형제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입니다. 이 유다나 요셉의 형들의 관점하고 오늘날 우리들의 관점하고 일치되어서 동일합니다.

“양식이 없어서 돈 주고 양식 사러갔으니까 당신은 돈 받고 양식만 우리한테 넘겨주면 됩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당신이 뭔데? 사적인 개인사, 우리 가정사에 당신은 관여할 자격이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그걸 한마디로 해서 개별자라고 합니다. “나는 나의 개별적인 존재로서 살겠습니다.”

왜? 사람의 자존감이라 하는 것은 개별자가 굳어지면 굳어질수록 자존감은 한껏 높아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람 사는 이유는 자기자존감을 높이는 목적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완전히 자존감이 와르르 무너진다면 자살 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자기자존감이 없는데 왜 삽니까? 죽는 것이 낫지요. 심지어 어떤 공직자는 자존감 무너지니까 관악산에 올라가서 자살하잖아요. 자존감 무너지니까.

지금 유다는 버티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길게길게 죽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버틸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요셉 당신 때문에, 물론 그 때는 요셉인줄도 모르지요. 소위 양식을 파는 국무총리 당신 때문에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버틸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다고 하는 거예요.

유다가 이런 식으로 국무총리를 향하여 자기방어에 나설 때에 우리가 뭘 놓치면 안 되느냐 하면, 요셉의 입장은 뭐냐를 놓치면 안돼요. 지금껏 제가 유다입장만 이야기한 거예요. 유다 쪽에서 자기가 볼 때에 전혀 하자가 없는 거예요. 갖출 것 다 갖춘 겁니다. 양식이 없다 뿐인데 그것은 돈 주고 양식만 사오면 갖출 것을 다 갖추는 거예요.

그러나 요셉의 관점에서는 뭐냐? 형들의 그 개별적인 관점과 현실관에서 형들이 지금 잃어버린 것을 감추고 있다고 보는 거예요.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했고 2장에서 3장에 넘어오면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었지요. 처음에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분명히 언급했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저 높은 곳에 계신 대단한 분, 전지전능한 분,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했는데 따먹었습니다.’하는 관점, 따먹지 말라는 금지의 명령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때 우리는 스스로 갖출 것을 다 갖춤으로서 자존감을 높이려는 이 시도자체가 저 하늘에 계신 하나님 보시기에 원하는 인간상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간파해야 돼요.

다시 말씀드립니다만 우리는 자존감 없이는 못살아요. 자존감 없이는 못사는데 자존감 없이는 못살겠다는 그것이 우리를 죽게 만든다는 그 말입니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것이 있어요. 뭘 잃어버렸느냐? 하나님이 금지한 명령을 우리가 위반했다는 사실, 우리는 위반자요, 환자요, 죽을 병자라는 사실을 우리가 누락시키고 있는 겁니다.

지금 뭔가 뻥, 하고 뚫려서 허한 데가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그냥 덮어버리고 뭐만 내세우느냐 하면, 자존감만 내세우고 있는 겁니다. 그 자존감을 내세우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것은 개별자로서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분명히 나만의 영역을 고수하기 위해서 경계선을 강제로 치는 겁니다.

설교 다시 할게요. 복음을 들었으면 복음을 들었던 그 감이 뭐냐? 우리가 평소에 세상 사람들처럼 생각 안하고 있었는데 복음을 듣는 순간, 아, 내가 놓친 것이 있고, 내가 모든 것을 갖추었다는 것이 용납이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내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주께서 알고 계신다는 거예요.

모든 것을 갖추지 않으면 우리가 무엇을 구성할 수가 없느냐 하면, 자존감이라는 이것은 허접스러운 것이 돼요. 이것은 실패일수밖에 없는 겁니다. 자존감 돋우기가 실패일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존감이 무너져야 된다면, 와해되는 것이 마땅하다면 평소에 말을 해도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라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 하고 버티는 것은 나는 나로 인하여 살겠다는 거예요. 참 “복음을 압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하는 이런 사람들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고 길에서 인사하고 헤어지고, 하면서 내가 늘 느끼는 것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 왜 복음으로 오지를 않고 왜 복음에 관심이 없느냐’ 하는 거예요.

왜 그런가 하면, 복음 가지고 뭘 만드느냐 하면, 자기의 자존감을 다듬는 것, 그 누락된 것을 마저 보충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유다가 그리고 요셉의 형들이, 우리가정이 갖출 것을 다 갖췄는데 모자라는 것은 오직 양식만 모자란다는 거예요. 그것만 마저 채우면 된다는 것이 유다가 강변하고 있는 그 사고방식입니다.

사실은 설교 이것으로 끝내도 괜찮아요. 복음을 수십 년 들어도 우리는 유다의 생각에서 한발자국도 바뀌지를 않았어요. 아까도 이야기했습니다만 꿈쩍도 안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잔뜩 들었는데 본인의 자존감은 끄떡도 없어요. 그놈의 자존심은 왜 그리 센지.

자, 이 사태를 다 깨부수려면 요셉의 관점을 겸하여 같이 알아야 됩니다. 요셉의 관점은 뭐냐 하면, 관찰자의 관점이에요. 모든 것을 다 아는 관점이 요셉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요셉이 요셉의 형들을 괴롭히는 이유는 다 알기 때문에 괴롭히는 거예요.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버티는 것은 멋도 모르고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요셉의 형들이 멋도 모르고 버티지만 자기는 안다고 여기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세상 돌아가는 것을 판단하고 관찰하고 있다고 여기는 겁니다. 요셉이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아는 것, 왜 풍년이 7년 있었고, 왜 흉년이 7년 오는지를 요셉은 간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요셉의 형들은 그것을 간파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런데 간파하지 못하면서도 그 태도는 뭐냐 하면, 세상 돌아가는 것을 다 관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요셉은 그 관찰을 절단 내 버리는 거예요.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절단하는 그 방법은 최종성을 유다에게 안겨주는 겁니다. 요셉의 모든 처리과정은 최종성을 안겨주는 칼 같은 거예요. 최종성을 안겨줘 버리면 최종성은 어떤 효과가 있느냐 하면, 이 순간 말고 그 다음순간을 미리 알아채서 넘어갈 수 없는 형편으로 궁지에 몰아넣는 거예요.

이 순간 말고 다른 순간을 염두에 못 두게 만드는 겁니다. 유다가 지금 버티는 것은 뭐냐 하면, 만약에 당신, 현재 요셉인지도 모르고 있으니까, “양식을 파는 총리께서 만약에 베냐민을 인질로 잡는다면 아버지는 한을 품고 돌아가시게 되고 우리 집안은 엉망이 됩니다.”라고 관찰을 하되 어떤 사건의 뒤까지 미리 알고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래서 좀 봐달라는 그 말입니다. 베냐민만큼은 아버지에게 돌아가야 하고 만약에 베냐민이 돌아가지 못하면 아버지가 죽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게 30절에 나옵니다.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라고 되어있어요.

유다가 나서서 절규하듯이 또는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제발 양식만 주시고 우리 가정사에 대해서는 너무 깊숙이 개입하지 말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할 때 요셉은 어떤 의미에서 유다의 가정, 형들의 가정, 아버지야곱의 가정에 사실은 죄를 짓는 거지요. 사람을 힘들게 하니까 죄를 짓는 거예요. 왜냐하면 32절에 죄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에.

당신이 그렇게 나오면 우리에게 죄 짓는 겁니다, 라고 나왔거든요. 요셉의 관점은 이래요. 죄가 원천에 당도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뭔가 사태가 지금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그 느낌을 아는 순간 인간이 자기정당성을 고집하지 않게 될 것이고 자기자존감을 다시 구성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리고 고마움과 감사에 도달할 수 있는 여지를, 기회를 부여받는 것이 돼요.

복음을 안다는 것이 뭐냐 하면, 날마다 자기의 자존감이 허물어지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참 이야기가 어렵게 가는데요. 사람이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못할 것이 없어요. 사람이 못할 것 할 것을 구분하는 이유가, 나 이정도 되는데 저런 허접한 일은 못하겠다, 그렇게 되는 거거든요. 자존감만 있고 자기 정당성만 있으면 자기 자존심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할 일 못할 일을 일방적으로 구분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개별자로서 나는 내 식대로 살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어버리면 인류의 최종성, 마지막 심판의 사건에 당도하지 못한 것이 돼요. 인간의 원천에 당도하지 못한 것이 된다는 말이지요. 제가 이렇게 하면, 지금 멀쩡하게 살아 있는데 왜 심판에 당도해야 됩니까, 라고 나오는데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원리가 적용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뭐냐 하면, 이미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 따먹은 존재가 돼요. 선악과 따먹은 존재에 있어서 처벌은 뭐냐?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입니다. 그러면 죽으리라, 에 당도하지 못한 사람은 이 세상을 볼 때 그냥 환상으로 맞이하고 있는 거예요.

올해가 기해년, 황금돼지해라는 겁니다. 갑을병정……, 12간지와 띠 이야기. 왜 사람들이 그걸 거론합니까? 최종성을 거부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희망의 새해가 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희망을 갖습니까? 자기에게 자존감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다하고 사고방식이 똑같아요.

하나님은 하나님답게 선물만 주고우리를 괴롭히지 말라는 거예요. 그러나 요셉은 괴롭힙니다. 완전히 가정을 모독해요. 남의 가정을 괴롭힙니다. 뿌리까지 괴롭힙니다. 왜 그래야 되느냐 하면, 그 개별성이라는 것, 그 성채를 뭉개버려야 되기에 그래요. 그렇게 허물어버려야 될 이유가 뭐냐? 그 이유가 이미 궁지에 몰린 유다가 어느 정도 최종성에 점점 더 근접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 고백이 나오는데 아버지와 아이의 생명이 결탁되었다는 이 고백을 뽑아내기 위해서 요셉은 계속해서 형들을 괴롭혔던 거예요. 왜냐하면 처음에 형들이 요셉을 꿈꿨다고 시기질투해서 쫓아 낼 때에 형들이 무슨 짓을 했느냐 하면 아버지의 생명 같은 요셉과의 관계를 중간에서 형들이 나서서 강제로 찢어버린 거예요.

찢어버릴 때 난 아버지의 아픔과 상처를 형들은 잃어버린 겁니다. 형들은 양식만 잃어버린 것이 아니에요. 형들은 지금 다른 것은 다 갖추고 있는데 다만 양식이 없어서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야 될 필요성이 있음의 상황 속으로 요셉은 계속해서 몰아넣는 거예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을 우리 조상 아담이 따먹었어요. 그래서 하나님의 아픔과 하나님의 고통을 인간들이 모독하고 거부했습니다. 처음에 하나님이 만들어놓은 인간 속에 ‘선악과 그까짓 거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마음이 들어와 버렸어요. ‘하나님의 법 그깟 거 아무것도 아니야. 하나님 자체도 아무것도 아니야’라는 생각으로, 악마의 생각으로 무장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원리가 원천이라면, 그 원천에 당도하려면 인간이 뭘 알아야 되느냐 하면, 내가 뭘 놓치고 뭘 잃어버렸는가를 알아야 돼요. 알려면 우리가 나름대로의 세상을 관찰하지 말고 요셉처럼 주님께서 우리의 관찰자의 자격을 박탈해버립니다. 관찰자라는 것은 누가 할 몫이냐 하면, 하나님이 할 몫입니다.

계시를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예정하신 하나님의 몫이지 인간이 세상을 관찰해서 나름대로 거기에 적응해서 자기자존감으로 버틴다? 이것은 하나님이 용납한 적 없습니다. 왜 요셉이 형들을 궁지에 몰아넣는지? 그것이 이렇게 길게 창세기 40장부터 44장까지 되어 있거든요.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경내용을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 자꾸 느끼는 것이 뭐냐? 이것은 개인가정사, 개인가정의 역사라는 인식으로 가볍게 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자기에게 직접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본 거예요.

‘요셉이 형들을 구원하려고 애쓰는구나.’ 그런 식이라는 말이지요. 33절에 보면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리고 유다자신이 베냐민을 대신하고 있어요. “차라리 나를 잡으시고 베냐민은 풀어주세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을 통해서 신약에 와서 하나님께서 원천적으로 무엇을 계속 강조하느냐?

요한복음 10장 38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찌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 안에 한 분이 더 계시다는 이야기에요. 요한복음 8장 54절에도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 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55절에는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가 되리라.”

말이 굉장히 복잡한데 이게 뭐냐? “너희들 보기에 내가 나로 보이느냐?” 유대인들이 “그래. 너 뿐이잖아.” “아니야. 너희들이 믿는다는 그 하나님 아버지가 나와 함께 있어.” 그러니까 나를 볼 때 1로 보지 말고 2로 봐야 된다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복음을 안다 할 때 어떻게 한 분을 보면서 두 분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느냐?

그 안목을 어떻게 갖출 수 있느냐? 우리가 세상을 알고 모든 것을 관찰하고 분석하고 판단한다는 내 개별성이 최종성을 맞이하지 아니하면 우리는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볼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 33절에서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이 말은, 베냐민이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말을 하고 있는 유다가, “베냐민은 그냥 보면 1로 보이지만 그 안에 나까지 포함해서 2로 봐주세요, 이 애굽총리야!”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뭔가 궁지에 몰리면 이 사태 다음에 그 다음 사태를 넘어갈 수 있는 권한이 없어요. 최종성이라 하는 것은 어떤 칸막이라서 그 뒤를 돌아볼 여지가 없는 것이 최종성입니다. 지금 요셉은 의도적으로 요셉의 형들을 최종성으로 몰아가고 있어요.

양식을 사서 집에 가면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한다는 이러한 양식사고 난 뒤의 그 다음에 전개될 스토리를 미리 예상하는 그것은 세상을 두루 안다고 자부하는 관찰자, 구경꾼의 입장이지만 요셉의 입장에서는 “형들이여! 당신들은 이 세상을 제대로 관찰하고 구경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당신은 내가 당했던 최종성, 죽음이라는 것에서 스톱을 해야 됩니다.” 하는 공통된 체험을 형들에게 집어넣으려고 하는 거예요.

아버지가 아들 잃어버릴 때의 그 아픔에 당신이 몽땅 뛰어들 용의가 되어 있습니까, 하고 묻는 거예요. 뛰어들겠습니다, 하는 고백이 나오게 되면 비로소 요셉은 형들을 이해하고 이제는 그들을 받아줄 용의가 있는 겁니다. 이것을 하나님 마음이라고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은 누구를 천국에 넣어주느냐 하면, 1에서 2를 볼 수 있는 사람을 넣어줘요. 예수님에서 뭘 보느냐? 예수님 따로, 하나님 따로가 아니라, 삼위일체가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아버지가 함께 있음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만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평소에 예수님 안에 아버지가 함께 있는 것을 못 보느냐? 그것은 우리가 개별자로서 살기에 그래요. 왜 우리가 개별자이고 싶으냐 하며, 자존감 때문에 그래요. 자존감이라 하는 것은 나는 나로 인해서 살겠다는 거예요. 2가 아니라 1을 고집하는 거예요. 주님께서는 네 안에 2를 고집하는데 우리는 1을 고집하는 거예요. 나는 나만 있으면 돼요. 최종적으로.

최종에 이를 때까지는 친구도 여러 명이면 좋지만 하여튼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나는 나다, 가 최종적이에요. 이게 자존감이고 자존심이라는 말이지요. 수십 년 복음 듣고, 안다고 우기는데 제가 보기에는 자존심만 자꾸 눈에 보여요. “목사님, 저도 복음 압니다.”라는 말도 자존감처럼 들린다는 말이지요. “이제 갖출 것은 다 갖췄습니다.” 하는 이런 뉘앙스로 느껴진다는 말이지요.

고마움도 없고 감사도 없고 맨 날 하나님 앞에 속으로 말하기를 ‘나를 왜 이렇게 힘들게 하십니까?’ 유다가 요셉의 형들이 지금 양식 팔고 있는 애굽의 총리보고 하는 이야기하고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어요. 당신이 뭔데 내 인생을 호작질하고 있느냐고 이런 식으로 지금 따지고 있는 거예요. 유다가.

따지고 있으면서 궁지에 몰리니까 극단적으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결탁되어 있다는 이야기, 정말 요셉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궁지에 몰리니까 불쑥 와락 튀어나와버린 거예요. 그리고 “내 몸을 베냐민 대신 바치겠습니다.” 그러면 네 자존심은? 지금 궁지에서, 마지막최종성에서 자존심, 자존감, 내 정당성, 내 가치, 개별자, 그 딴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보면서 이게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유가, 우리가 관찰자 입장에서 시간을 길게 보기 때문에 그래요. 한 달 뒤를 예상하고, 2개월 뒤를 예상하고, 또 하루를 예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일을 할 때는 최종성을 우리에게 계속 안겨주고 있는데 우리는 그걸 느끼지를 못해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줘도 자꾸 튕겨나가는 이유가 유다나 요셉의 형들처럼 자존심이, 자존감이 세서 그래요. 자존심이 세서, “하나님, 우리에게 필요한 것 가르쳐 주시면 잘 배우겠습니다. 그것 내 소유 만들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보다 더 강고한 신앙인이 되겠습니다.” 하고 또 개별자로 돌아서버려요. 1에서 2로 들어가지 못하고 1에서 계속 1로 가기를 버티고 있는 겁니다.

1에서 2가 되려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의 사도바울의 고백이 나와야 돼요. 나는 죽고 날마다 죽고 죽고 또 죽고, 죽는 이유는 죄인이기 때문에 죽고, 죄인이기 때문에 못할 일이 없고, 마다할 일도 없고, 부끄러운 것도 없고, 창피스러운 것도 없어야 되고, 내 인생 조졌습니다, 하는 고백도 나와서는 안 되고, 이러면 내가 자살하겠습니다, 하는 항의조로 나와서도 안 되고, 매일같이 감사하고 매일같이 고마워해야 돼요. 최종성이라면.

나는 나로 인하여 사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우리의 생명은 예수님과 결탁되었기 때문에. 나라는 1과 예수님1이 결탁되어야 돼요. 그냥 결탁되면 안 되고 생명으로, 영생으로 결탁되어야 됩니다. 그 앞에서 무슨 자존심이니 자존감이니 그걸 왜 챙깁니까?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버지가 요셉을 잃을 때 아버지는 자기의 목숨을 빼앗기는 것처럼 괴로웠다는 거예요. 지금 요셉을 대신해서 베냐민을 아버지가 품고 있었거든요. 아버지가 베냐민을 품고 있었는데 요셉이 장난을 쳐서 그것을 강제로 떼어놓습니다. 아버지와 베냐민 사이를 떼어놓을 때 아버지와 베냐민이 양식 때문에 갈라지는 그 아픔을 형들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가를 요셉은 궁금했던 거예요.

그게 알고 싶었던 겁니다. 아버지가 요셉과 떨어질 때 그 아픔을 형들이 공히 같이 공통체험으로 느끼기를 바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하는 그 아버지와 떨어지는 아픔을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인 체험을 하기를 아버지께서는 원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멀어질 때의 아픔, 또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칠 때, 그것도 미운 자식이 아니라 사랑하는 이삭을 제물로 바칠 때의 그 아픔에 참여하려면 그 아파하는 요인이 어디서 비롯되었느냐 하면, 바로 ‘나는 나로 인해서 산다’는 악마적 본성에서 나왔어요.

하나님이 복음 가르쳐주고 좋은 것 가르쳐주면 그것 간직해서 내가 구원받겠습니다, 하는 개별자로 돌아서려는, 1에서 1로 버티는, 끝까지 나만 좋으면 된다는 그 버팀, 1이 2가 되기를 거부하고 자기가 최고가 되고 싶은 그 악마적 본성이 주님의 십자가의 아픔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게 만들었어요.

그런데 성령께서는 그 십자가의 아픔을, 죄인으로서 당해야 되는 아픔을 우리에게 성령을 통해서 제공함으로 말미암아 나는 홀로 구원될 수 없고, 홀로 천국갈 수 없는 죄인이고, 주께서 이런 죄인을 위해서 희생을 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1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2가 된 채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이제는 느끼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성도가 갖춰야 될 공통적인 체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복음 안다고 하면서 복음을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여 주옵소서. 언제부터인가 감사가 사라지고, 언제부터인가 고마움도 없어지고 내가 스스로 버티기만 남은 이 고집스러운 완악한 마음, 꿈쩍도 하지 않는 우리의 자존감. 주여, 성령께서 오셔서 저희들로 최종적인 심판의 자리에, 십자가체험에 날마다 집어넣어서 느끼도록 해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