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오용익 168강-창 43장 1-5절(자식담보) 181212-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3장 1-5절입니다. 구약성경 67페이지입니다.
창 43:1-5
“그 땅에 기근이 심하고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곡식을 다 먹으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이르되 다시 가서 우리를 위하여 양식을 조금 사라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으니 아버지께서 우리 아우를 우리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내려가서 아버지를 위하여 양식을 사려니와 아버지께서 만일 그를 보내지 않으시면 우리는 내려가지 아니하리니 그 사람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전에 애굽에서 1차로 가져왔던 양식은 다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기근은 여전히 맹렬합니다. 야곱과 함께 있던 식솔들은 70명 가까이 됩니다. 생산은 없는데 소비만 증가하니까 얼마 안가서 곡식이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자식들에게 이야기합니다. 다시 한 번 애굽에 가서 양식을 사오라고 합니다.
야곱은 아무리 잘난 체해도 양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애굽나라에 대해서 의존적입니다.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데 유다가 나서서 아버지에게 명백하게 이야기합니다.
“그 사람은 사실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식량을 줄 수 있는 애굽의 총리는, 아버지가 특히 애지중지하고 놔주지 않으려 하는 아우에 대해서 신경을 많이 쓰고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이 점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버지는 우리 아우 베냐민을 애굽에 안 데려가는 상황을 생각하시는데 이것은 양식문제가 아닙니다. 그 사람은 양식은 뒷전이고 아우가 있는지의 여부를 묻고자 합니다. 만약 아우를 안 데려가면 형 시므온은 애굽의 볼모로 계속 잡혀 있게 됩니다.”라고 했어요.
지금 유다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관점과 그리고 베냐민을 기어이 내놓지 않으려는 야곱의 관점이 서로 상반된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우선 야곱의 입장을 봅시다. 70명의 식솔은 먹여야 되겠고, 그리고 사람이 양식 먹는다고 사는 보람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행복한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을 때 비로소 양식이 좀 없어도 사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위험하기 짝이 없는, 자기 자식 중 시므온을 볼모로 잡고 있는 그 위험한 지역에 자기 목숨보다 귀한 베냐민을 보낸다 하는 것에 대해서 차라리 내 목숨을 달라고 하라고 할 정도로 강력하게 야곱은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애굽으로 안 갔던 거예요. 비록 자기 하나가 잡혀 있더라도 베냐민이 있기에 계속 버티고 있었던 겁니다.
문제는 양식이 고갈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기근은 더욱 더 심하고 이제는 막다른 지경에 이른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야곱을 보게 되면 야곱의 하는 행동이 전혀 우리에게는 낯설지 않고 이상하지가 않습니다. 충분히 이야기가 되는 행동이에요. 지금 우리가 보는 성경은 그 자체가 하나님 이야기지요.
성경자체가 하나님 이야기인데 이런 본문을 보게 되면 하나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버티듯이 인생을 살아가느냐 하는 그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식 없어서 양식을 사오라고 했고 유다는 “양식 파는 책임자가 우리의 돈이나 양식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하나밖에 없는 베냐민을 눈으로 목격하고자 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했을 때 이런 이야기가 설마 하나님의 이야기가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것이 평소 일상에서 잘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래도 일어날만한 일이거든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또는 하나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또는 하나님이 어떻게 일을 하시느냐에 대해서 우리가 추상적으로, 관념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작용하는 하나님의 일을 놓칠 가능성이 많아요.
하나님은 평소에 일상을 통해서 다 개입하고 있는데 우리는 나 편한 대로, 내가 원하는대로 살아놓고 따로 약간의 헌금과 정성을 다해서 “하나님, 받으소서.” 하면 하나님께서 넙죽 받는 줄로 오해하고 있어요. 종교라는 것이 오락이 되어버렸어요. 문화활동이 되어버린 거예요. 실생활 속에 하나님이 관여하는 것을 모르고.
다시 말해서 야곱이, 양식도 얻고 내 사랑하는 자식도 지키겠다고 하는 이 야곱의 심성은 오늘날 우리 일반인들의 심성을 그대로 대변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게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가정화목하고, 거기다가 tv나 김치냉장고나, 전자렌지나 가구하나 들이는 식으로, 평소에 내식대로 행복하게 가정 꾸리고, 거기다가 하나님, 예수님을 들여놓으면 그게 하나님보시기에 영광되고 아름답다고 사람들은 그냥 가볍게 생각하는 거예요.
평소에 우리가 하는 대로 하고, 거기다가 교회 다니기라든지, 하나님 믿기, 예수 믿기를 하나 보태는 겁니다. 그러면 죽어서 구원도 되고, 평소에 일상에서 내 하는 식대로 행복도 보장받고.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가지 않는 사람, 와, 정말 그런 사람은 찾기 힘들어요.
성경 자체가요. “너 기어이 신자 아니야.” 그걸 전부 발각시키는 내용들입니다. 평소대로 행복추구하고, 거기다가 하나님 하나 더 추구해서 갖다 보태면 그게 신앙가정입니까? 그래서 천국 가는 거예요? 누구 맘대로 가요? 야곱의 행동을 보게 되면 평소의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습니다. 챙길 것 다 챙기고 양식은 달라. 그게 뭐가 잘못되었는데, 라고 야곱은 지금 유다에게 항변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이 이런 일상적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는 것은 성경전체를 보면 이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를 비교하는 거예요. 우리는 나 자신과 비교하기 때문에 하등 자기자신에게 문제없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복음 전하면, 항상 반박으로 들려오는 것이 “네가 뭐가 죄인인데? 내가 뭐가 잘못되었는데?”라고 이야기하지요.
예수님과 자기 자신을 비교할 줄을 몰라요. 예수님이 아주 훌륭한 분인 줄로 알고 있어요. 예수님은 훌륭한 분이 아니고 내 것을 빼앗아 가시는 분이에요. 옆집에 훌륭한 분이 살면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살고, 그런 관계에서 저분은 나보다 훌륭하고 나는 저분보다 좀 못하다고 정리가 되지요.
그런데 그분이 내 것을 빼앗아간다면 그 분은 훌륭한 분이 아니고 나쁜 분이지요.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간단해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야곱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것을 빼앗아가려고 하는 겁니다. 이래도 하나님이 훌륭합니까? 안 빼앗기고 신앙생활 하겠다고요? 그것은 성경자체가 그런 사람을 신자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배제해버립니다.
수십 차례, 수백차례 이야기했지만 야곱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고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왔는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약속을 줬어요. 언약을 줬다 그 말이지요. 언약을 주신 하나님과 언약을 받은 인간은 어떤 관계냐? 나는 그것 몰라도 되지 않습니까, 하지 마세요. 그걸 모르게 되면 엉터리 예수를 믿는 거예요.
예수님은 새언약의 완성으로서 언약을 완성하러 오신 분입니다. 따라서 새언약이 있기 전에는 옛언약이 있어요. 그것을 구약이라고 합니다. 옛언약은 아브라함 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이 먼저 언약의 틀을, 형식을 만들어놨어요.
그 형식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서 아들 이삭을 빼앗아갔습니다. 이삭에게서는 야곱을 빼앗아갔고요. 지금 야곱에게서는 요셉을 빼앗아간 거예요. 아브라함에게서 이삭을 빼앗아 갔고, 이삭에게서 야곱을 빼앗아 갔고, 야곱에게서 요셉을 빼앗아간 겁니다.
뺏길 때 쓸데없는 것을 빼앗겼습니까? 자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을 빼앗아 간 거예요. 그리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겁니다. 믿음의 조상이라 하는 것은 믿는자의 표준적인 모델을 형성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 관계를 수립하고 있는 사람이에요. 그 틀,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그 틀이 반복해서 주어지지 아니하면 그것은 신앙이라고 하지 말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에게 빼앗기지 아니하면 신앙이 아니에요. 다시 이야기할까요? 일상적으로 가정에서 살고, 전자렌지나 컴퓨터나 하나 들여놓듯이 우리 가정에 교회에 있다는 하나님, 예수님 들여놓으면 그게 신앙인 아니에요. 그것은 취미생활이에요.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너 기어이 신자 아니야.” 하는 것을 그냥 가만 놔두지 않고 들춰내십니다.
들춰낼 때 그 출발점이 뭐냐? 야곱부터 출발하는 거예요. 야곱의 모습은 우리 일상의 모습을 쏙 빼닮았어요. 양식도 챙기고 귀한 자식도 챙기고.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따로 내 맘속으로 깊이 믿고, 하나님을 존경하고 영광 돌리고. 그런 마음이야 다 갖고 있지요.
얼마나 속편하게 믿는지 모르겠어요. 문제는 하나님은 그 야곱을 가만두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기어이 하나님은 야곱을 구원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만약 우리가 오락이나 취미생활 하는 것처럼 일상생활 하고 가구 들여 놓듯이 하나님 믿어버리면 그 사람은 영원한 가짜 예수, 노닥거리 예수와 더불어서 전혀 그 사람에게는 진짜 하나님을 아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셈이 되어버려요.
성경이 왜 있느냐 하면, 가짜 신자와 진짜 신자를 구분하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겁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진짜 복음, 성경내용만 전하는 이유는 “가짜는 좀 가줘.” 그 말이에요. 어차피 교회 머리는 주님이니까 교회를 말아먹지는 않을 거 아닙니까? 교회가 망할 리는 없다 이 말이지요. 교회가 불탈 수는 있고 교인이 하나도 없을 수는 있어요.
교회가 부도날 수는 있어요. 그러나 교회는 없어지지 않아요. 진짜 교회의 교회됨을 위해서 부도나고 불나고 교인이 다 빠져나가고,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그런 일이 있다 할지라도 진짜 교회는 멀쩡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겁니다. 교인 하나도 없고, 헌금도 하나도 없고.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진짜 교회는 그 헌금과 교인 수에 아무 구애받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도대체 뭘 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겁니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에서 구원될 사람은 그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말을 거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쪽에서 말을 걸어온다고요.
딱 한 주 지났어요. 일주일 전에 여기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지런히 요셉이 지금 아버지 야곱에게 말을 건네 오는 겁니다. 말을 건넬 때 그 건네는 내용이 뭐냐 하면, “아버지여, 아버지 자리에 연연하지 마시고 이 자리, 내 자리, 요셉의 자리에 합류하소서.” 지금 그런 내용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걸 오늘날의 방식으로 말씀드릴까요? “아무개야! 네가 평생 노력해서, 네가 열심내서 만든 네 인생이라는 그 터전, 아파트, 네 직장, 명예, 명성, 그 자리에 있지 말고 내 자리, 예수님의 십자가의 자리에 오라”고 하는 그 말 건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국백성입니다. 그 외에는 천국백성 아니에요.
내 것으로 내가 즐거워하는 그것을 포기하게 만듭니다. 야곱의 입장에서 베냐민을 놓지 않으려는 이유를 우리가 충분히 이해할만 합니다. 왜냐하면 요셉은 야곱에게 있어서는 이미 죽었거든요. 그 대타로 베냐민 붙들고 있는 겁니다. 그 잃어버린 요셉이라고 치고 베냐민을 대신 잡고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그 베냐민마저 자기 곁에서 없어진다는 말이지요. 야곱 본인이 이야기한 것처럼 “차라리 내가 죽어버리련다.” 하는 고백을 할 정도로 그만큼 베냐민과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쉽게 말해서 베냐민은 내편이라는 겁니다. 나는 내편인데 베냐민이 있음으로서 내 편되는 내가 즐겁다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거예요. 내가 내편이 될 때 우리는 결코 하나님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이것을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떤 가수가 그런 이야기 했지요. “누가 나를 위로해 주지?”라고 노래하잖아요. 윤복희지요. <여러분>이라는 노래. “누가 나를 위로해주지?” 나는 내 편이라는 이야기를 그대로 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이 내 편이 되어서 나를 위로해 달라는 그 이야기 아닙니까? 내 편이 되어버리면 내 편 된 인간은 천국에 안 넣어줍니다. 수십 년 교회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교회 백날 왔다갔다해도 자기는 자기편인데. 마태복음 16장 24절에 뭐라고 되어 있지요?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잖아요.
예수님말씀은 그거예요. 너는 네 편인 것을 네가 알고 있을 것인데 그러나 네가 네 편이 되어서는 안 되고 네 편이 되었다는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을 인정하라는 거예요. 내가 내 편이라는 것을 너의 모델로 삼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내 편이 안 되는 방법이 있는가? 방법은 바로 내 편이라고 여겼던 그 베냐민을 강제로 빼앗아가는 거예요.
베냐민을 빼앗아가는 것은 마치 뭐와 같으냐 하면, 내가 나를 떠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나에게 실망하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내가 나 있음에 희망을 걸고 살았는데 그 나를 살리는 희망이 완전히 좌절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나는 더 이상 내편으로 살 수 있는 어떤 여지, 어떤 근거도 완전히 상실된 상태를 말하는 겁니다.
아버지 야곱이 그렇게 버티고 있으니까 이러한 점을 유다가 9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리니” 이 말은 뭐냐? “아버지여, 내가 베냐민을 데려가야 되겠습니다. 그래야 우리 가족 다 삽니다.” “못 데려간다. 안 된다.” “베냐민이 아버지에게 귀한 줄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내 자식을 아버지의 담보로 내놓겠습니다.”
여기에 담보물이 나와요.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지금 갑자기 담보물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담보물이 세 명이 되었어요.
요셉은 시므온을 담보로 잡았고요, 아버지는 베냐민을 담보로 잡고 있고, 자기 행복을 위해서, 자기인생의 낙을 위해서 베냐민을 담보로 잡고 있고, 유다는 그 담보를 빼앗아 오기 위해서 자기자식을 죽을 자로, 담보로 아버지 손에 맡긴다고 하면서 세 명의 담보자가 갑자기 출몰해 버렸어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과 우리와 비교해볼 때 우리는 그냥 늙으면 죽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뭐냐? 그냥 죽어서는 천국 못가요. 우리의 죽음이 어떤 죽음이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죽음과 같은 죽음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가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만이 죽었다가 부활했기 때문에.
사도바울이 빌립보서 3장 10절에서 자기 자신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천국 간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줬습니다. 내가 부활의 권능에 이르기 위해서 어찌하든지 그의 죽으심을 본받는다고 했어요. 그냥 산채로 부활에 쑥 들어가면 될 텐데 그렇지 않고 부활의 권능에 이르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갔던 코스를 반복하는 그 외에는 하나님이 허락한 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우리에게 이야기해줍니다.
무당교회들이 빌고 바치면 복 받는다고 할 때는 죽음이라는 것이 빠져있지요. 누락이 되어있는 거예요. 교회들이 어떻게 성장했고 어떻게 컸다 하는 것은 우리가 알면서도 그 내막을 안 봐요. 죽으려고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아니면 살려고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지.
아니면 내가 내 편 안 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가요? 아닙니다. 전자제품 하나 들여놓듯이 하나님 들여놓고 내 가정 잘되기 위해서 교회 가는 거예요. 왜 그 엉터리 교회를 교회라고 계속 우기는 겁니까? 간판이야 뭔들 못 달아요. 대한예수교장로회 그 간판이야 몇 만원주면 다 해주는데요.
성경을 봐야지요. 지금 진짜 천국 가는 죽음은, 담보물은 하나님의 체험 속에 있는 요셉이 제대로 된 담보물이에요. 요셉자신이. 아버지 야곱이 구원받으려면 요셉자리에 합류가 되어야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내가 내편이라는 이 자아성이 날라 가버려야 돼요. 이게 사라져야 돼요.
베냐민 빼앗기면 나 죽는다는 것은 신체적으로 자살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나로 인하여 살 여력이 상실되어야 됩니다. 자기 목숨보다 애지중지하는 그 베냐민이 만약에 유다 따라서 애굽에 간다면 자기목숨같이 간 그 담보물, 베냐민이 간 곳에 아버지 마음도 자동적으로 합류해야지요. 따라가야지요.
보물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다 했잖아요. 우리의 보물이 뭡니까? 돈입니까, 예수님입니까? 묻는 제가 어리석어요. 믿음도 없는 사람에게 “돈입니까, 예수입니까?”라고 묻는 그것이 실례되는 질문 같아요. ‘돈이지요. 몰랐어요?’ 우리의 속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 없이는 살아도 돈 없이는 못사는데요. 지금 이게 야곱의 입장이에요.
야곱하고 우리하고 똑같다니까요. 그런데 강제로 주님께서 언약적으로 요셉으로 하여금 자기 정체를 숨기고 계속해서 야곱에게 말을 걸어옵니다. 다시 말해서 너 자신이 너 자신의 자리에서 안 떠나고는 못 배기게 만들어버려요. 내가 끝까지 내 편이고 싶다는 그 고집에서 기어이 탈피되도록, 찢어져서 거기서 기어 나오도록 만드는 겁니다.
얼마나 고마우신 하나님이십니까? 더 이상 내가 내편이 될 하등의 가치가 없음을 스스로 알아야 돼요. 기근이 왔다는 자체가 죽으라고 기근이 주어진 것이니까. 그래서 내 한 몸 죽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냥 죽는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고 죽을 때도 천국 가는 죽음, 천국 가는 요건을 갖춘 죽음이 있어야 돼요.
내가 그냥 죽는다고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의 요건을 갖춘 죽음에 합류되어야 우리가 천국 가는 겁니다. 이미 야곱에 있어서의 요셉은 죽은 사람이잖아요. 죽었다고 여기는 요셉에게 야곱이 살아있다고 도저히 생각 못한 그 아들에게 하나님께서 미리 죽음의 요건, 구원의 요건을 다 충족시켜 놓은 겁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이 우리를 책임집니까, 산사람이 우리를 책임집니까? 보통사람에게 이걸 물어보면, “죽은 할아버지나 할머니나 아버지가 우리를 뭘 책임져? 살아있는 일가친척이 우리를 책임지고 부모가 우리를 책임지지. 살아 있는 사람이 책임지는 거지.”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왜? 죽은 분은 죽은 것이고 산 사람끼리 협력해서 살아가는 것이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그게 아니에요. 죽은 분이 우리를 책임져요. 죽은 예수님이 우리를 책임진다고요. 죽은 예수님이 살아 있다 하지만 보통 살아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눈에 안보이니까 여전히 우리는 살아 있다는 그 개념의 범주에 예수님이 안 들어오는 거예요.
실감이 나지 않는 겁니다. 주님 살아 있다는 것이.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노래하고 예수님을 찬양하지만 예수는 안 믿어요. 왜? 안 살아있으니까. 실감이 안 나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요동치게 합니다. 인생이 이상하게 꼬이게 만들어요. 뭔가 궁지에, 막다른 길에 자꾸 몰리게 하는 겁니다.
내가 나만 쳐다보고 사는 나 자체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 다른 자아, 다른 나가 있어야 된다는 거지요. 그런 예가 주님 가르쳐준 기도에 나와 있어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되어 있지요. 나의 아버지라 하는 것은 누구만 할 수 있느냐 하면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시편 22편 그리고 마태복음 27장에 보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여기서 나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만 할 수 있어요. ‘나의 하나님’이라고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지자들도 했지만 선지자들은 예수님을 대신해서 하는 거고요.
우리의 ‘나의 하나님’은 없어요. 왜냐하면 ‘나’라는 자아를 천국에서는 용납을 안 해주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공동의 자아에 합류되어야 됩니다. 공동의 자아에 합류가 되려면 그냥 ‘나’로 들어가면 안 되고 이 나는 죽어야 되는 거예요. 이 자아는 있으나 마나한 하찮은 존재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그동안 내가 내편이라고 여겼던 그 모든 가치기준이 파괴되어야 되는데 그게 뭐냐 하면, 나는 누구의 담보물이 되어야 돼요.
누구의 담보물이 된다는 것은 주체가 나 말고 저쪽에 있는 거예요. 저쪽의 담보물이 되어버리면, 저쪽의 포로가 된다든지 볼모가 된다면 나 자체적으로 선과 악, 이걸 따질 필요 없고요, 나한테 이익이냐 손해냐도 따질 필요가 없어요. 이게 성도가 누리는 자유입니다.
보통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를 해 봅시다. 나는 내편이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가야 되겠다는 열의가 있고 욕망이 있어요. 내가 내편이고 나를 기어이 천국 보내려면 내가 나한테 가장 좋은 것과 귀한 것, 아름다운 것, 경건한 것, 거룩한 것을 다 나에게 집어넣어줘야 돼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항상 뭘 따지느냐 하면, 선과 악을 계속해서 계산 할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선과 악은 그냥 선과 악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내게 선을 행했을 때 어떤 이득이 왔느냐, 내가 악을 행했을 때 어떤 손실이 왔는지, 항상 이익과 손실을 늘 쫓기듯이 고민고민 할 수밖에 없는, 휘둘리는, 누가 따라오는 것 같은 불안정한 정서를 가지고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50년 신앙생활 해도 51년째 개판되어서 끝나잖아요. 60년째 신앙생활 해도 하루에 뭐가 잘못되어버리면 와르르 다 내려가잖아요. 아직도 우리가 우리를 쥐고 있으려 하는 겁니다. 꼭 야곱 같아요. 베냐민을 내가 쥐고 있겠다는 겁니다.
그러나 요셉은 베냐민을 데려오라 해서 베냐민을 볼모로 잡겠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유인하고, 아버지를 이 요셉이 경험한 하나님의 죽음의 체험에 동참시키기 위해서 기어이 요셉은 자기 동생을 볼모로 잡으려고 하는 겁니다. 왜 거기에 아버지와 형제들까지 다 따라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그런데 지금 문제는 그러한 요셉의 의도를 야곱은 모르고 있는 거예요. 왜? 이미 죽었으니까. 마치 오늘날 우리와 같아요. 예수님의 의도를 모르는 이유가 예수님은 우리한테는 이미 죽은 분이니까, 살아서 우리 눈에 안 보이는 분이니까 모르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계속 무엇을 이슈화시키느냐, 무엇을 부각시키느냐? 네가 나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볼모가 되지 않으면 너는 구원 없다는 것을 계속 각인시키는 식으로 주께서 모든 상황을 강제로 이끄시는 겁니다. “가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16장 24절의 말씀. 이것을 현실화시키는 겁니다.
그러면 그대로 따라가는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아느냐? 아까 이야기한 대로 선과 악에 대해서 구애받지 아니하고 그 다음에 이익과 손해를 따질 필요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볼모기 때문에. 주님의 볼모라는 말을 달리 이야기하면 로마서 12장의 말씀으로 할 수도 있어요.
로마서 12장 1절에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사, 네가 제물이 되어라 그 말입니다.
그 뒤 부분에도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심직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로마서 15장 16절에서 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줬다. 이게 옛언약이고 새언약은 예수님이 주셨습니다. 옛언약속에 아브라함 언약 있고, 이삭 언약이 있고, 야곱 언약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간상 순서는 아브라함 언약, 이삭 언약, 야곱언약, 이렇게 되어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이루는데 역순해서 요셉에게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담보물이 되게 하신 원리를 보다 더 풍부하게 하셔서 요셉을 통해서 야곱에게 알리게 합니다.
야곱에게 알리고 이삭과 아브라함이 했던 다소 단순해 보이는 일 속에 요셉같이 복잡한 담보물로 그 내용이 더 확대되게 하지요. 아브라함에게는 그냥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내게 바치라.” 해서 간단한 문제지만 요셉에게는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어떤 복잡한 문제냐 하면, 단순히 담보물이 아니라 그 담보물이 다른 담보물을 포섭을 한다는 거예요.
포섭을 해서 자아를 버리고 공동자아에 같이 합류하게 하는 겁니다. 나의 하나님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이 되게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떠냐?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죽음이라는 소굴에 담보물이 되셨어요. 아버지로 인하여. 담보물이라 하는 것은 죽음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죽음 아니면 이 땅에서 빠져나가서 천국에 못가기 때문에. 이 세상은 어차피 죽음으로 마감돼요. 이왕 죽는 거 담보물로서 죽는 죽음은 천국 가서 영생을 얻지요.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그 통과하는 길, 예수님 자신이 길이라고 했으니까 그 길을 나의 죽음만이 영원한 부활, 영생에 이른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담보물로 오셨고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나의 하나님에서 우리의 하나님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말을 건네지요.
이 말은 곧 뭐냐? 네가 하나님의 노예, 하나님의 볼모가 되지 아니하면, 만약 하나님의 담보물이 되지 않는 사람은 그게 어떤 존재든, 대통령, 국회의원, 어떤 존재든 그것은 하찮고 시시한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이라 하는 것은 결국 내가 내편이라고 우기는 것은 하나님보시기에 하찮고, 시시하고, 대수롭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천하보다 귀하다고 쥐고 있는 거예요.
야곱이 베냐민 계속 쥐고 있어봤자 요셉에 합류하지 않는 이상은 하찮은 인생, 아무 의미 없는 인생이에요. 하나님께서는 유다를 통해서 아버지에게 통보시키는데 왜 르우벤을 통해서 하지 않고 레위를 통하지 않고 넷째아들 유다를 통해서 하느냐?
첫째 아들 르우벤은 서모하고 통간했지요. 그래서 인상이 별로 안 좋고, 시므온은 현재 볼모로 잡혀 있고, 레위는 창세기 34장 25, 26절에 세겜사람 작살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일에 미쳐 그들이 고통할 때에(할례를 강제로 시켜놓았기에) 야곱의 두 아들 디나의 오라비 시므온과 레위가 각기 칼을 가지고 가서 부지중에 성을 엄습하여 그 모든 남자를 죽이고 칼로 하몰과 그 아들 세겜을 죽이고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 오고.”
레위가 여기 개입해서 아주 잔인하게 죽였어요. 성격이 자기편이에요. 그런데 유다에 대해서는 이렇다 하는 말이 없고 유다는 아낌없이 희생적으로 담보물을 제공하는 겁니다. 담보의 특징이 뭐냐? 열심히 일하는 것이 아니고 자진해서 희생하는 것을 담보물이라 합니다. 예수님이 희생하듯이.
얼마나 착하냐, 성실하냐, 거룩하냐가 아니라 네가 복음을 위해서 희생했느냐를 주님께서 묻는 거예요. 희생한다 해서 큰 일, 업적을 남기라는 말이 아니고 내가 나한테 나 자신을 포기하는 겁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주님께서 알아서 하겠지. 이것보다 더 큰 희생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내 편 되기를 포기했으니까. 세상 모든 웃음과 울음을 분석해 보세요. 왜 웁니까? 내 인생 내편이기를 원했는데 그게 실패로 끝나서 울었고요. 그런 노래도 있잖아요. “마마~,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퀸이라는 밴드가 불렀죠. 자기 인생 자기가 건사 못하고 실패해서 울었고, 좋다는 것은 내 인생 내 편이니 잠시 뭐가 잘되었기에 기뻤고.
울고 웃고, 이것이 전부 다 끝까지 희생 안하려는, 손톱만큼도 손해 안 보려는 강력한 악마의 심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이지요. 하나님은 가인을 아벨로 바꿉니다.
아벨의 특징이 뭐냐? 하나님에 의해서 억울하게 희생물 된 사람이 아벨이에요. 천국은 아벨들의 집합소입니다. 그 아벨은 본인이 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되는 거예요. 공동의 자아입니다. 이 담보물, 하나의 담보물 안에 모두가 집결하는 이 작업, 지금도 성령께서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십자가가 눈에 보인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찾아와서 주의 뜻대로 주의 능력으로만 우리가 구원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일상 속에서 주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게 하옵소서. 하나님, 예수님 이름 부른다고 신자가 아님을 명심케 해주시고 지금도 주어진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십자가와 관련된 일로 우리가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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