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2:20-25 / 요셉의 계획

정인순 2018. 11. 28.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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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의 계획


이근호
2018년 11월 28일           



본문 말씀: 창세기 42:20-25

(42:20)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42:21)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42:22)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42:23)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 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42:24)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42:25)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각자 자신들의 생활에만 열중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특정 사람에게 일어난 일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방식이 된다면 안 받아들이게 됩니다. 사람들이 자기 일에만 열중하다보니 모든 것이 오직 하나의 원리와 요인에 의해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일이 단순히 한 가정의 일이 아닙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뿜어져 나옵니다. 핵심은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일을 진행시키시는 겁니다. 그 와중에서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가 드러납니다. 그 원리는 세상을 일단 둘로 나눕니다. 노아의 물심판 때의 경우를 생각해보세요. 노아는 방주를 통해서 안과 밖이 명백하게 구분지어졌습니다.

방주 밖에는 맹렬한 풍랑이 일고, 방주 안에는 구원의 힘이 작용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을 보세요. 전혀 안과 밖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전부라고 여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방주의 경우처럼 안과 밖을 분명하게 나누어 다루십니다. 요셉은 일단 사람들과는 자신의 형을 달리 다룹니다.

일반 사람들에게는 돈받고 그냥 양식을 팔 뿐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양식으로 모든 것을 다 얻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가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는 법이 있을까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리 본인들이 갖고 싶고 추구하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결국 얻지 못합니다. 충족될 수 없습니다.

이 원인이 ‘본인이 갖고 싶다’는 바로 그 점에 문제 있음을 그들은 상상도 못합니다. 즉 ‘내가 갖고 싶기에’ 갖지를 못하는 겁니다. 막연하게 매일의 삶이 뭔가를 기다리고 고대할 뿐입니다. 반면에 성도에게는 ‘본인이 원해야만 하는 것, 가져야만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기어이 갖게 합니다.

결코 본인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고 싶어하시는 것을 성도에게 제공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과의 만남에서 충격과 공포와 절망을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입각해서 보면 요셉의 형들은 궁지에 몰려 있습니다. 죽음에 직면해있습니다. 그들은 일반인들 처럼 그저 양식 사러온 것 뿐입니다.

본인들이 원하고 갖고 싶은 것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양식’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들에게 양식을 주지 않습니다. 정작 그들이 그동안 알지 못한 것을 줍니다. 그것은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세상을 읽는 방식’입니다. 그것도 총체적으로 모순없이 말입니다. 이러한 원리는 요셉이 알고 있었던 겁니다.

요셉의 인생 여정은 인간적으로 해석해서 이해되지를 않습니다. 착하게 살았지만 본인이 갈수록 힘들게 되고 더구나 그 주변들은 혜택을 입게 됩니다. 따라서 이런 방식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꿈’을 대입시키는 겁니다. ‘꿈’이란 요셉에게 있어 누락된 현실입니다. 현실을 마처 온전하게 채우는 남은 핵심부분입니다.

요셉의 꿈은 애굽나라의 미래가 바로왕에서 요셉의 세계로 넘겨지는 내용입니다. 즉 애굽나라의 한계가 곧 요셉의 꿈세계를 등장시키는 동기가 되는 됩니다. 이로서 요셉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안과 밖’을 갖게 되는 겁니다. 마치 노아의 방주같습니다. 죽음의 세계란 곧 요셉의 원리와 끊어진 세계요, 생명의 세계란 요셉의 원리와 연결된 세계입니다.

이런 원리를 장착한 요셉은 형들을 닦달 냅니다. 누가 봐도 억지입니다. 양식 사러 온 형들에게 정탐꾼들이라고 몰아붙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형들도 극구 변명하고 방어하고 억울함을 호소합니다. 그렇게 내세운 논리가 ‘우리에게는 12형제’가 있다는 겁니다. 한 사람은 잃어버렸고 다른 한 사람은 아버지 곁에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점에 요셉이 물고 늘어집니다. 막내 동생을 다른 형들과 같이 오지 않고 따로 떼놓았다는 것은 곧 어떤 의도가 있어 숨겨놓았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 의도가 수상하다고 몰아세웁니다. 수상한 구석이 있기에 나 요셉이 당신네들을 스스로 결백하다는 주장을 받아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흘 동안 옥에 가두어둡니다. 이는 이미 요셉이 형들에 대한 처벌을 결단내었다는 사실을 통보하는 겁니다. 그리고 사흘 뒤에 형들을 옥에게 풀어내어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일반적인 신 개념 하에서 인간들이 어떤 식으로 처신하는지를 보고자 하는 겁니다.

즉 일반들이 믿고 있는 신은 ‘여호와’가 아니라 ‘수호신’ 수준입니다. 실제로 형들 사이에서 다음과 같이 오고갑니다. 22절에 보면,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음의 위기에 처한 형들은 자신들의 돌변한 상황을 해석하면서 ‘신의 보복적 차원’을 거론합니다. 요셉을 억울하게 죽이려고 했고 결국 팔아먹은 그 잘못의 죄값을 우리가 이런 식으로 보복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형들 입장에서는 전 우주적으로 하나님의 원리를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불행한 사태 중심으로 세상을 읽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잘못이 없었으면 이런 불행한 사태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신’ 입장에서 나온 생각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행함에 보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간들의 수호신 부분을 타격하고 구멍을 내어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은 일반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지만 언약의 백성인 요셉의 형들에게는 제공하는 원리입니다. 요셉의 계획은 이러합니다. 20절에 보면,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요셉의 형들은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겁니다. 살고 죽는 원리는 과거에 대한 후회가 반성이 아니라 지금 인질로 잡혀 있는 시므온이라는 두 번째 형의 처지와 자신들의 처지를 연결시키는 안목입니다. 비록 다른 형들이 애굽에게 풀려나왔다고 해서 자기 만족에 빠질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알라는 겁니다.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았다고 좋아들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 아니라, 왜 예수님께서 내 대신 채찍을 받고 피흘리고 죽으셔야 하는지와 늘 연결된 삶이 곧 방주 안에 구원된 삶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를 지켜주는 수호신 개념에서 이제 벗어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66강-창 42장 20-25절(요셉의 계획)

181128-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2장 20-25절입니다. 구약성경 66페이지입니다.

창 42:20-25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그들이 그대로 하니라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줄을 알지 못하였더라 요셉이 그들을 떠나 가서 울고 다시 돌아와서 그들과 말하다가 그들 중에서 시므온을 취하여 그들의 목전에서 결박하고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내용을 그냥 봐버리면,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이게 왜 성경이 되고 왜 진리가 되지?’라고 의아해 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아니고 우리 말고 타인에게 일어난 일이기 때문에 타인에게 일어난 그 일이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이 안 된다고 철석같이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었다. 그런다고 해서 내 집에 그런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는 것은 도저히 믿기지 않지요. 그래서 우리의 일은 진리라고 할 수 없는 겁니다. 성경이라고 할 수 없는 거지요. 그러나 성경적 요소는 거기에 담겨 있어야 됩니다.

오늘 본문 내용 20절에 보면,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라고 했어요. 요셉이 아예 형제들에게 이야기하기를, 너희들은 내 손에 죽기로 작정되었다, 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죽음이 들어감으로서 하나님의 진리로서의 가치가 피어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내용전체의 느낌이 뭐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공포입니다. 요셉은 그들에게 공포를 주었고 그들은 공포에 주눅 들었습니다. 그리고 20절, 방금 읽은 것처럼 “너희가 죽지 아니하리라.” 해서 그 조건을 채우지 못하면 반드시 죽이겠다는 요셉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궁지에 몰린 겁니다. 위기에 몰린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다운 겁니다. 하나님의 진리다운 겁니다. 우리는 평소에 살아가면서 죽음과는 멀리하고 싶어 하는 그것이 내 삶이어야 한다고 생각을 먹지요. 그러나 죽음을 멀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진리를 멀리 하고 딴생각 하면서 살아간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을 설명하는 요인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지요. 세상을 설명하는 요인. 이 가정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두고두고 오는 모든 세계를 설명할 때 딱 이것으로 설명하면 설명 끝! 이런 것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내지 아니하면 우리는 진리를 접촉 못한 겁니다.

제가 아까도 처음에 이야기했지만 이것이 남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지금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전체,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변화를 딱 하나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고 명쾌하게 설명이 되어져야 돼요. 그게 성도가 세상을 자유롭게, 넉넉하게 살아가는 그 이유입니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세상에 전개되는 그 핵심부분을 성도는 간파해야 되지요. 그러면, 무식하고 배우지도 못한 우리가 그런 내력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성령께서 성경을 주실 때에 그것을 허락하신 겁니다. 그 힌트를 42장 9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라고 되어 있어요. 자, 출발을 요셉부터 출발합니다. 요셉과 요셉외의 다른 사람의 차이점이 뭐냐? 요셉은 꿈을 전제로 해서 세상을 읽는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그 꿈, 하나님의 계시에 준해서 자기뿐만 아니고 자기로 인하여 파생된 모든 결과들을 읽어냅니다. 해석하는 거지요.

그러면 그 꿈이 뭐냐? 그 꿈 때문에 요셉이 의도하지 않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어요. 요셉이 세상을 설명하는 방식인데, 누락된 현실판, 요셉이 세상을 설명할 때 꿈을 배제하고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면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설명이 안 되는 그 자기 인생에다 꿈만 집어넣으니까 다 설명이 되더라는 말이지요.

오늘날 우리의 인생은 어떻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을 온전한 전체성으로 확립하는데 우리는 늘 실패하고 있어요. 그저 눈앞에 보이는 내 일만 급조하듯이 헐떡거리면서 그 때 그 때 처리하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거예요. 하지만 저는 그걸 공포라고 합니다.

뭔가 모든 것에 어떤 공포에 질려 있어요. 인생이라는 게. 아닌 것 같지만 교회 안에 있어도 마찬가지고, 세상에 나가도 그렇고, 집에 있어도 그렇고. 뭔가 공포라는 것이 있고 태도나 행동하는데 있어서 그 공포가 섞여 나옵니다. 언젠가 제가 설교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유쾌한 척 하지 말고 믿음 있는 척 하지 말자.

왜냐하면 공포가 지워지지 않는 한 오히려 오버하는 수가 있어요. 뭔가 믿음이 있는 체,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척, 그것은 마저 자기가 처리할 수 없는 그 치밀어 오르는 공포가 감당이 안 되어서 우왕좌왕, 부들부들 떨면서 나오는 모습들이에요. 과도하게 논리적이고 과도하게 제대로 한 번 살아보려고 애쓰는 것, 그것은 성도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님의 계시만 집어넣으면 되거든요. 꿈만 집어넣으면 되는 거예요. 이걸 지난 대전강의에서는, 혼자 살아가는 것이 신자가 아니고 신자는 겹쳐서, 다른 분과 겸하여 살아간다고 간단하게 설명한 겁니다.

예를 들면, 노아의 방주 같은 경우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노아의 방주가 참 쉬워요. 왜냐하면, 방주 안에 들어 있습니다. 자기가 속해 있는 그 삶의 공간에서 조금만 나가면 두꺼운 잣나무 방주의 벽이 있잖아요. 그리고 충분히 예상합니다. 그 벽 너머는 무서운 폭풍이 인다는 것, 나가면 죽는다는 것, 그 죽음에 포위되어 있으면서 잣나무로 만든 방주 덕에 숨을 쉬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과 밖에 뚜렷해요. 방주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tv에 나오는 세상 사람들 보세요. 안과 밖이 없습니다. 죽음이라 하면 장례식이나 공동묘지나 힐끗 보지 이 세상에는 안과 밖, 특히 밖이라는 것이 없어요. 그저 이 세상이 전부라고 알고 있습니다.

노아 방주를 가지고 노아언약이라고 이야기하거든요. 하나님의 약속이라 이 말이지요. 요셉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준 꿈이에요. 요셉의 꿈은 야곱의 언약에서 나왔으니까. 이야기를 쉽게 해 봅시다. 지금 요셉은 세상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이미 확정되었어요. 왜냐하면, 그 야곱언약,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 요셉과 요셉의 형들과 비교해보자는 말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그냥 양식 사러 왔어요. 그런데 요셉은 세상을 읽어내는 그 눈을 가지고 형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데 궁지로 몰아넣으면 넣을수록 아까 20절에서 본 것처럼 죽음으로 몰리게 됩니다. 부들부들 떱니다. 절망적이에요. 공포에 파랗게 질려있습니다.

양식 사러 와서 이 난리가 웬 난리입니까? 왜 요셉은 형들을 그렇게 괴롭히는 거예요? 그것은 애굽과 그리고 같은 언약에 속한 형제들을 하나님께서 달리 다루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애굽이니까 그냥 세상 사람이라고 봅시다.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하면, 본인이 추구하는 것을 계속 원하고 있지만 결국은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겁니다.

‘40대에 얻을까’ 하다가 40대 지나면 ‘50대에 시도해야지’ 하다가 50대 지나면 60대, 끊임없이 자기가 추구하는 것을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써도 얻을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 얻지 못하는데서 오는 공포가 점점 더 짙어집니다. 점점 시커매져요. 얼굴부터 해서 모든 것이. 모든 행동이 부들부들 떠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얻고자 하는 것을 제대로 못 얻을 것이라는 그러한 절망적인 기대감에 몸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1956년도에 사무엘베케트라는 희곡작가가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연극을 상연했어요. 그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파리와 뉴욕에서 상연했던 연극이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겁니다.

그 연극을 저는 본적이 없지만 내용은 이렇게 되어 있어요. 배우 둘이 나와서 대사도 별로 없고 아무것도 안 해요. 그냥 ‘고도’(godot)라는 사람을 기다려요. 그러다 파장이고 그 다음날이 되면 또 ‘고도’라는 사람을 기다려요. 그날도 또 헛방. 그리고 또 다음날도 기다려요. 계속 그렇게 가다가 연극이 끝납니다.

관람하는 사람이 그 연극을 모독하기 위해서 관람했다가 그들이 도리어 모독 받았어요. 연극을 조롱하려고 하다가 오히려 조롱을 받았어요. “이게 연극이야?”라고 하면서 갔는데 그들이 뭘 느꼈느냐 하면, 현대인의 일상은 바로 이거다, 하는 것을 함축된 연극을 통해서 한꺼번에 확 알게 된 겁니다.

그냥 맹목적으로 반복적인 삶의 연속이 현대인들의 삶이라는 거예요. 그 ‘고도’가 뭐냐 하면 독일말로 신이에요. ‘내일은 나아지겠지.’ 혹은 ‘내일은 주님이 오시겠지.’ 하는 것처럼 ‘내일은 하나님이 도와주겠지. 하나님 믿으니까 하나님께서 내일은 나를 행복한 내일이겠지.’ 아무리 추구해도 결국은 그것을 얻지 못하고 끝이에요. 그러다가 늙어죽겠지요.

결국 인간이라 하는 것은 본인이 뭘 원하는지를 몰라요. 그리고 원하기는 하는데 그냥 원하지 않습니다. 계속 공포심에 쫓기면서, 쫓기니까 그저 행복으로 보상받으려고 하는 겁니다. 세상 뉴스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쫓기면서 그래서 성공이라는 것으로 보상받으려고 몸부림 맘부림 치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이 9시 뉴스에 다 나옵니다.

남 욕할 것 아니지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공포스럽지 않습니까? 뭔가 와장창 깨진다는 그런 공포가 없어요? 그래서 분노하지 않습니까? 격분하지 않습니까? 왜 격분하고 분노합니까? 공포에 쫓기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지금 요셉의 형들은 뭐하러 왔느냐 하면, 양식 사러 온 거예요. 전혀 공포스럽지 않습니다.

돈 가져 왔겠다. 양식 있겠다. 돈 주고 양식 받으면 그걸로 오케이. 룰루랄라, 하면서 집에 가서 아버지와 풍족하게 먹고 산다. 그렇게 양식을 구하러 온 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주시한 사람이 있었어요. 누구냐? 요셉입니다. 야곱의 아들들, 요셉의 형제들은 언약백성이거든요.

언약은 뭐냐? 그들이 원해야 했고 그들이 가져야 할 것을 기어이 가지고 가게 만드는 그 업무와 사명을 요셉은 형들 모르게 하고 있는 겁니다. 고도를 그냥 기다리는 것이 아니에요. 정말 그들의 손에 쥐어주는 겁니다. 양식? 아닙니다. 세상을 한꺼번에 보는 그 방식, 세상을 다 해결하는 방식을 쥐어줍니다.

그것은 요셉이 갖고 있어요. 요셉의 꿈이거든요. 요셉의 꿈, 아까 제가 뭐라고 했느냐 하면, 그것이 누락된 현실판이에요. 인간은 전체를 꾸미는데 있어서 뭔가 빠져 있어요. 전체를 한꺼번에 설명하기에는 항상 뭔가 빠져 있는데 요셉은 그 빠져있는 부분을 하나님이 자기에게 준 꿈의 계시로 딱 집어넣으니까 다 맞아떨어져요.

지난 화요일에 대전에서 두 번째 강의하면서 마태복음 25장 46절을 설명했습니다. 거기 보면,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아니면 매일같이 여기에 관심 없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본인이 보상받을 것을 찾기 위해서, 행복하기 위해서 계속 추구할 거예요.

추구하지만 그들에게는 아무것도 안돌아가요. 그런데 여기에 “저희는 영벌에” 영원한 지옥에, 그리고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간다는 이것은 택한 백성에게는 반드시 가져야 하고 반드시 결국은 하나님에 의해서 손에 쥐어지는 거예요. 이것 주려고, 이 준비된 것이 바로 언약 안에 있습니다.

자, 방주를 다시 설명합니다. 방주에서는 잣나무벽을 통해서 저쪽은 멸망이요 방주 안은 영생입니다. 이게 방주구조에요. 그러나 현대인들에게 언약이 없어요. 그냥 알 수 없는 죽음에 내쫓기면서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야곱의 형제들한테는 이 언약의 요소가, 방주에 나타난 언약의 요소인 안과 밖이라는 것, 그 구조를 형들에게 전달해야 된다는 사명이 요셉의 사명이에요.

그렇다면 형들은 양식 사러 오면 안돼요. 그러면 세상 사람하고 똑같아요. 양식 사러 온 그 형들로 하여금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 하면, 저 바깥에 영벌, 지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동네인 것을 그들이 체득하도록, 체험하도록 요셉을 통해서 전달하고 조치를 취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조치의 방법이 뭐냐? 요셉이 그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것이 42장 12절에 나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정탐꾼으로 보는 거예요. 정탐꾼으로 보니까 형들이 거기에 대해서 양식 사러 왔다가 난리가 난 거예요. 정탐꾼이라고 하니 이것은 사형감이니까.

극구 반대합니다. 어떻게 반대하느냐 하면, 우리는 진실한 사람이고 거짓말 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라고 하면서 13절에 “주의 종 우리들은 십 이 형제로서” 열 두 형제가 있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말은 지금 진실 되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솔직하게 다 이야기하겠다는 겁니다.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 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14절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내 말이 맞잖아, 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이 대목을 보는 사람들은 무엇을 간파해야 되느냐 하면, 요셉의 수법을 간파해 줘야 돼요. 요셉이, 너희들은 정탐꾼이라고 일방적으로 매도했어요. 그러니까 형들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우리는 열 두 명입니다.”라고 하니까 요셉이 하는 말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 말이 맞잖아. 열 두 명인데 너희들은 하나 없어졌다고 이야기했고, 하나는 아버지에게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지금 너희들이 정말 정탐꾼이 아니고 정말 신실한 열두 명으로서 하나의 통합체가 되려면 그 누락된, 남겨진 내력을 아버지에게 있다고 하면서 왜 숨기려 하느냐?” 하고 요셉이 형들에게 억지를 쓰고 있는 거예요.

잘 보세요. 마지막 아들을 숨기려는 의도가 요셉보기에 아주 수상하다는 겁니다. 무슨 내력이 있어서, 무슨 이유가 있어서 마지막 아들을 데려오지 않고……, “하나는 잃어버렸다니까, 가출했으니까 그것은 할 수 없는 것이고, 그러면 열 한 명은 있어야지. 열 한 명이어야 되는데 왜 하나는 놔두고 열 명만 데려왔느냐? 너희들 말에 의하면 하나를 아버지 곁에 두고 왔다는 이야기인데 그렇게 했을 때 너희들이 뭔가 수상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숨겨놨잖아. 그러니까 너희들의 앞뒤가 수상하기 짝이 없다.”라고 하는데 누가 봐도 억지에요.

억지를 쓰는데 이유 있는 억지입니다. 숨기고 싶은 것을 거덜 내고 노출시키는 이 수법, 예수님의 십자가가 오늘 저와 여러분 보고 하는 수법입니다. 여기서 우린 이걸 생각해야 돼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요? 엉터리입니다. 그 증거가 18절에 나옵니다. “삼일 만에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라고 했거든요.

이 하나님이 무슨 하나님이냐 하면, 수호신이에요.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신, 모든 인간의 출발은 뭐냐 하면, 하나님이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것부터 시작해요. 그 수호신은 언약이 빠져 있는 겁니다. “내가 숨기는 것을 그냥 봐주소. 하나님은 날 지켜주는 분이니 날 잘되게 하고 나는 이 땅에 살면서 알 수 없는 공포에 시달리지만 그래도 하나님 믿으니 좋게 해결될 거지요?”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게 자기 스타일의 하나님이에요. 그런데 스타일, 내 타입을 운운해요? 우리는 내 타입을 운운할 그런 처지가 아닌걸 알아야 됩니다. 내 타입이라면 내가 선택할 가능성이 있는데 그게 허용이 안돼요. 그럼 뭐냐? 요셉이, 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러면 형제들에게는, 수호신 하나님에서 여호와로 바뀌어야 돼요.

수호신은 언약이 빠져 있는, 그냥 우리를 지켜주는 게 수호신이라면 여호와는 언약이 들어 있는 하나님이 여호와에요. 수호신은 내가 우상으로 소유하면, 간직하면 되지만 언약은 실제로 현실이라는 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가면서 현실 속에, 쉽게 말해서 손을 쭉 내미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언약의 사람에게는 그들이 원해야 되고, 그들이 가져야 할 것을 기어이 갖게 하시는 철두철미한 이 작업에 반드시 손수 나서서 성사시키시는 하나님, 여호와하나님이십니다. 그 작업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아까 20절에 본 것처럼, 요셉을 통해서 죽여 버리겠다고 나섭니다.

양식 사러 왔다가 목숨이 날라 갈판이 되었어요. 그들에게 어떤 위기가 왔고 절망에 이르렀을 때에 그 대목에서 요셉이 뭔가 의도하는 것이 있어요. 내가 이렇게 그들을 궁지로 몰아넣었을 때에 그들끼리 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어떤 몸부림을 치는가를 그냥 보게 합니다.

그들은 요셉이 애굽사람인줄로 알고 자기들 속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했어요. 요셉이 그들 사이에 통역자를 내세워서 자기들끼리 히브리말 하는 것을 요셉이 못 알아듣는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그들 이야기 가운데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 하면, 22절 이야기가 나옵니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하니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그들은 요셉이 그 말을 알아 들은줄을 알지 못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자, 형제들의 사고방식은 뭐냐 하면, 옛날에 요셉을 미워해서 요셉을 처음에는 죽이고자 하다가 루우벤이, ‘죽일 것까지 뭐 있느냐? 팔아먹자.’ 해서 팔아먹었다. 그런데 그 애가 죄가 없다는 것을 너도 알고 나도 우리 형제들이 다 알았잖아. 우리는 그걸 쉬쉬해서 죄가 덮어진 것으로 여겼는데 이제는 그의 핏 값을 내게 되었다.

요셉을 죽인 그 피 값을 우리가 내게 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게 바로 여호와 하나님 방식이 아닙니다. 이게 하나님방식이에요. 이게 중요합니다. 교회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 참 오래했다. 성경알고 복음 안다고 하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게 전혀 복음 모르는 거예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은, 재수 좋은 쪽으로 신앙이라는 것을 하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뭔가 죄를 지었잖아요. 재수 옴 붙은 거예요. 잘못된 거예요. 그러면 그걸 가지고, 신은 보복의식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중심으로, 궁지에 몰린 것을 두고 ‘가만 있어봐. 이렇게 궁지에 몰렸는데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을까? 아하, 우리 인생이 이렇게 개판이 되고 죽게 된 것은 그 때 의인인 요셉을 죽였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벌을 받는다. 어떡하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보는 눈이 아니고 자기신세타령 하고 있는 거예요.

아직도 자기 자신의 공포에서 못 벗어나고 있는 겁니다. 공포가 그대로 있고 거기다가 하나님을 연결시킨 거예요. 언약 아닙니다. 복음 아닙니다. 십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 모르는 거예요. 뭔가 집안에 일이 안 좋다. 사업하는데 뭔가 안 풀린다. ‘내가 하나님께 뭐가 잘못되었을까?’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주일 낮에 설교한 것처럼 마귀가 선악이라는 거치대를 집어넣은 그 효과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참 이것은 어떻게 고칠 수가 없어요. 빼도 박도 못합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를 다 읽을 수 있는 그 요인을 찾는 것이 아니고 그 때 그 때 내 가정, 나만 행복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에요. 하나님 믿고, 복 받고, 하나님 믿고, 복 받고, 계속 하루하루 넘어가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이 보복이 모든 종족에 다 퍼져 있는 신의식입니다. 문화인류학 보면 이거 다 나와요.

신의 전쟁을 보복전쟁으로 보는 겁니다. 뭔가 나쁜 짓을 했으면 신으로부터 보복 당한다는 의식이 우리 속에 있는 거예요. 선악이라는 거치대가 아직도 생생하게 우리의 정신, 마음전체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한 것이 있기 때문에 뭔가 벌을 받는다는 거예요. 어떻게 이런 논리에서 인간이 벗어날 수가 있습니까?

이러한 주장들, 주석을 찾아보면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리고 이 핏 값의 대목가지고 설교한 것을 보면 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요셉이 주님의 핏 값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그들은 정신 차렸다는 겁니다.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 방식이 아니에요. 이것은 수호신 방식입니다. 내 일이 틀어졌으니까, 그래서 반성하고 회개했으니까, 회개한 자는 하나님이 용서해주니까, 우리가 핏 값을 알고 반성했으니까 도와주세요, 이렇게 나오는 겁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이 점을 드러내고 이걸 도려내야 돼요. 제가 어떤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요. 십자가로 우리에게 구멍을 뚫어야 된다고요. 그동안 내가 살아왔던 그 기초가 되는 원리가 되는 곳에 뻥, 하고 구멍을 뚫어내야 돼요. 구멍을 뚫어내면 거기가 빈 허공이 되는 겁니다.

맞습니다. 그게 정답이에요. 내가 요셉에게 잘못해서 벌을 받는다는 그 자체가 공중에 날라 가버려야 돼요. 마태복음 25장 다시 말씀드립니다.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할 때에 나쁜 짓해서 영벌에 가고 나쁜 짓 안 해서 영생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기어이 지옥에 가게 하셨기 때문에 지옥 가는 것이고 기어이 천국가게 하기 때문에 천국 가는 거예요. 우리소관 아닙니다.

내가 반성하고 회개할 소관 아니에요. 내가 나댈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요셉이 애굽에서 고생했다. 왜 했느냐? 그것은 요셉이 잘못한 것이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꿈이 요셉의 마음 한가운데 구멍을 뚫어 놓았어요. 그걸 가지고 누락된 부분이라고 해요. 현실을 설명할 때 우리는 나 잘되기 위해서 현실을 보거든요.

다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공포에 쫓겨 다니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이 내 소원대로, 내 뜻대로 되기를 원해요.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남들은 요셉을 도무지 이해를 못해요. 요셉 본인도 이해 못하고. ‘아, 주님이 날 갖고 노셨구나.’ 이것은 내 잘못 때문에 고생한 것이 아니고, 착하다고 이 운명이 바뀔 문제도 아니에요.

선, 착함. 악, 악함.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안 들어올 것이 들어온 거예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없어야 될 것이 지금 들어온 후유증을 우리가 겪고 있는 겁니다. 언제쯤 이것이 빠질까요? 언제쯤 빠집니까? 악마는 선악과 심어놓고 공포를 집어넣습니다. 네가 제대로 행동을 안했기에 이런 벌을 받는다고 계속 추궁하고, 추궁하니까 인간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착하게 살면 덜 상처 나겠지, 인생 덜 망가지겠지, 그런 식으로 늘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여기서 요셉의 방식은 뭐냐? 기존의 개인보복이라든지 기존의 신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명하여 곡물을 그 그릇에 채우게 하고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 하고 또 길 양식을 그들에게 주게 하니 그대로 행하였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요셉이 웁니다. 우는 장면이 24절에 나와요. “요셉이 그들을 떠나가서 울고” 혼자 울지요. 창세기 끝에 가면 요셉이 왜 울었는지 설명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형들이 나를 팔아먹었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보복 들어오지 않을까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지요. 그렇게 하게 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구원하기 위함이랍니다.

가정을 구원한다는 말은 하나님식이 아니고 여호와식이에요. 방주식이 되는 거예요. 어렵지만 좀 쉽게 해보겠습니다. 방주는 잣나무 깎아서 만들면 돼요. 실제로 물체를 만들면 돼요. 만들게 되면 그 물체로 인하여 바깥쪽은 죽음이 되고 안쪽은 생명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언약에 와 보면 그 죽음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요셉 개인에게 있어요. 그래서 형들에게 요셉이 당했던 그 초죽음, 죽음의 바닥이지요, 그 죽음의 바닥을 맛보게 하는 그것이 노아가 만든 잣나무 방주라 생각하시면 되는 겁니다.

한 사람을 인질로 잡아요. 그러면 형들 입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형들의 입장에서 다 죽어야 되는데 조건을 갑자기 유예해줘요. 사흘 동안 가둬놓고 사흘 후에 어떻게 조건을 유예하느냐 하면, 내가 너희들 용서하지는 않는다. 유예하는 거예요. 어떻게 유예하느냐 하면, 너희들 다 죽은 것을 대표해서 한 사람을 잡아두겠다. 다만 어떤 요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죽는 거예요.

둘째 아들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요. 잡고 나머지는 일을 간편하게 처리하기 위해서 그냥 내보내버립니다. 그들은 비록 살아서 왔지만 어디에 종속되느냐 하면, 이미 죽어야 되는데 한 사람이 내 대신 사로잡힘으로 말미암아 살아있으니까 이게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에요. 이 요건을 충족하지 아니하면 진짜 죽는 수가 있어요.

그러면 시므온을 가운데 두고 시므온이 죽느냐 사느냐, 그 죽음에서 부활하느냐의 문제는, 형들이 ‘휴, 살았네.’ 하면 안 되고 거기에 집중해야 돼요. 모든 생각, 사고방식이 십자가에 집중해야 되듯이. ‘나는 예수 믿고, 십자가 믿고 살았다.’ 이러면 안 되고, ‘왜 예수님은 우리 대신 채찍에 맞았지? 주님은 왜 아파했지? 주님은 왜 쓴잔을 마셨지?’

언약의 중심과 그리고 언약에 의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한 가지로 연결되어 줘야 돼요. 이게 바로 방주속의 세계입니다. 방주 안에 ‘살았다’라고 할 수 있는 관계망입니다. 구조에요. 인질로 대신 시므온을 잡았다는 말은, 형이 잡혔는데 ‘형이 잡히든 말든 나는 몰라.’ 이것은 지옥가지요. 이것은 불신자에요. 또다시 자기 행복만 생각하고, 자기처지만 생각하고, ‘큰일 날 뻔했네.’

우리 성도한테는 큰일 날 뻔 한 것이 없어요. 나대신 다 이루었다, 가 나와야지요. 큰일 날 뻔 한 것이 아니라 다 이룬 거예요. 우리의 빈구멍에는 시므온이가 대신 형들의 빈 구멍을 채우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그걸 요셉이 다 채웠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네 번째 이야기합니다. 형들에게는 양식 주면 안돼요. 그들이 원해야 될 것은 뭐냐 하면, 나대신 누가, 요셉이 고난 받았다는 사실, 그리고 요셉에게는 하나님의 꿈이 직결되어 있다는 그 사실을 그들은 원래 원했어야 돼요. 그리고 그것을 손에 쥐었어야 돼요. 그리고 반드시 그들이 쥐도록 요셉과 함께 한 하나님이 그들을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아버지까지도 요셉의 자리에 다 오게 하실 것이고. 그리고 그 점을 주께서 알기 때문에 그들이 길에 가면서 필요한 양식까지, 돈까지 도로 다 줍니다. 양식이 핵심문제가 아니고, 시므온이 대신 잡혔다는 것, 그게 핵심문제에요. 양식이라는 하나님에서, 누가 대신 죽었다는 여호와의 세계로 옮겨가는 작업을 이제부터 요셉이 계속 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살면서 공포에 휩쓸리는 저희들, 그게 수호신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하나 행복하기 위해서 하나님 믿지는 않았습니까? 이제는 저희들 속에 구멍이 뚫리고 그 구멍 난 자리에 억울하게 채찍 맞으시고 대신 피 흘리신 주님이 우리 안에 상주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