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에베소서

에베소서 1:5-6 / 자기의 아들들

정인순 2018. 11. 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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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1:5-6    자기의 아들들


이근호


‘거저 주시는 바’가 의도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자를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시는 겁니다. 이는 ‘은혜 없이 아들 없다’가 됩니다.


‘은혜 안’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 있기에 ‘아들들’이 생겨나는 걸까요? 그것은 ‘은혜’란 예수님의 일에 의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아버지 뜻을 압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정’으로 완료되어 있습니다.


‘예정된 뜻’이 역사를 통해서 전개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아들들’ 만들기에 나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소소한 일이라도 ‘아들들 만들기’가 무관한 것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증명하기 위한 세상 흐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세상에 ‘주님의 은혜’를 훼방하는 훼방꾼이 여전히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은혜 주심’이 없이 스스로 ‘아들 되기’에 나서는 세력들이 있는 겁니다.


참으로 은혜 받은 자라면 ‘나의 하나님 아들되기’를 포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은혜라는 것이 ‘십자가 사건의 반복’의 영향력으로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즉 ‘거저 주심’이 제대로 체험되려면 이 ‘거저 주심’과 방해가 되는 요소가 끊임없이 인간 내부에서 발산되게 됩니다. 주님의 은혜가 오게 되면, 왜 인간은 하나님에게 은혜를 요구할 입장이 아닌가가 병행해서 알게 됩니다.


은혜는 커녕 늘 은혜를 받지 못할 자라는 사실이 늘 발각되면서 은혜 작용에 모든 것을 맡기게 됩니다. ‘거저 주심’이 참으로 ‘거저 주심’ 그 자체로 드러나는 경우는 주님의 은혜가 인간에서 뿜어내는 온갖 방해를 극복하는 식으로 주어짐을 알 때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경우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주시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기쁨을 위해서입니다.


기뻐서 예정하시고 기뻐서 은혜주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해서 발생되는 하나님의 아들되기는, 인간의 기쁨 이전에 주님의 기쁨의 작품이 됩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기 기쁨보다 주님의 이런 기쁨을 아는 안목을 지니게 됩니다.


자기의 아들들



이근호
2018년 12월 2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1:5-6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1:6)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자체가 멸망의 대기 상태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곧 멸망의 대상자들입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아들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들이 있으려면 세상 자체가 다른 세상에 되어야 합니다. 다른 세상이란 조건 하에 아들이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아들되고 싶어하는 이들이 쏟아집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땅의 존재가 하늘로 입성하는 역류를 막고자 하십니다. 그 막으시는 방식이 바로 ‘예정’입니다. 즉 ‘예정된 자만 입성’입니다. 이러한 역류가 계속 생겨나는 이유를 하나님께서는 이미 아십니다. 인간의 정신을 악마가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악마의 정신은 ‘하나님의 예정’을 무시하고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 대로 라면 ‘그 기쁘신 뜻대로’로 지워버리자는 겁니다. ‘그 기쁘신 뜻’ 대신 자신들의 뜻과 열의와 열성과 노력고 수고로 천국 가는 ‘하나님의 아들되기’에 집중하자는 식입니다. 이는 곧 무슨 교리와 논리로 이어지느냐 하며는 바로 ‘인간들의 예정하기’로 이어집니다.

즉 인간들은 ‘인간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예정’이 있어야 한다고 하나님에게 압력을 가하려고 시도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니 사랑하고 자비로움답게 인간 구원을 위해서 미리 예정하라고 촉구하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 우선의 하나님의 예정’ 속에는 ‘인간들의 자기의 기쁜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인간들의 ‘자기 기쁜 뜻’은 결국 예수님을 핍박하는 양상을 낳게 됩니다. 사도행전 9:4에 보면 사울과 예수님께서 처음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거기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이란 거저 ‘요구의 대상’으로만 여깁니다. 나 여기 있으니 하나님이 자기에게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달라는 식입니다. 그러나 참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도리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도대체 인간의 어떤 요소가 예수님을 끊임없이 미워하고 핍박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이 지상에서 인간들이 하늘이 허공에다 사다리를 걸어놓으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백날 걸어봤자 소용없습니다. 이 땅에의 ‘하나님의 아들 만들기’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들이 예상못하는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의해서 진행될 뿐입니다. 그 어떤 인간의 요구나 압력도 통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핍박받음이란 인간들의 멈추지 않는 천국 열망이 빚어낸 결과입니다. 인간들의 총동원된 행함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 무시당하고 훼방당하는 겁니다.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인간은 이 땅에 죽기 위해 태어났고 심판받기 위해 태어난 사실을 인간들은 애써 거부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모든 행위는 늘 미완료요 미완성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다보면 감사나 찬미는 계속 미뤄집니다. “다음 상황이 내 뜻대로 되어지는 것을 보고서 그때 가서 감사하고 찬미하겠습니다.‘는 식으로 인간은 버티게 됩니다. 하지만 그 상황이 되면 또다시 미흡함을 감출 길이 없습니다.

즉 인간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끊임없이 쫓기는 생활을 합니다. 공부하는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는 공부를 잘해야 하는 강박관념으로 부모는 계속 시달리게 됩니다. 왜 나의 자녀는 공부를 잘해야 합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고 모릅니다. 그냥 기분상 그러고 싶을 뿐입니다. 늘 인간들은 추궁당하는 입장에 놓여 있습니다. 

“이 미완료가 마저 채워지는 날, 나는 드디어 구원에 완성할 것이라”는 망상을 놓치고 못하고 있습니다. 즉 자신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중이라는 사실을 전혀 감잡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카프카라는 독일 소설가를 지은 『심판』이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은 아침에 눈 떠보니 자신이 뭔가 심각한 범죄자로 기소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자기가 지은 죄가 뭔지를 정말 모르겠다는 겁니다. 자신이 지은 죄를 알아야 용서를 빌더라도 빌 것인데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겁니다. 이것이 계속 추궁당하는 현대인의 삶의 모순입니다. 로마서 8:15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에서 사도 바울은, 인간의 몸은 이미 율법에 의해서 저주받을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다고 합니다. 즉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겁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율법의 요구를 충족해야 될 책임이 있는 종(노예)의 처지에 놓여 있는 겁니다.

따라서 인간들은 다음의 두 가지 세상의 성격을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는 ‘죄인들로 구성된 죄악된 세상의 성격’ 곧 오늘날 인간들이 말하는 현실세상입니다. 또 하나의 세상은 ‘심판의 성격’을 구체화하는 심판자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현실세상은 심판의 대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런 영문도 모르는 채, 이유도 없이 인간은 죽어가는 겁니다. 인간의 몸 자체가 쇠퇴해지는 것을 물론이거나아 정신조차가 악에 바쳐 살아갑니다. 노인네들의 질환의 특성이 이러합니다. 자신의 기억에서 과거에 자신이 잘나갔던 기억만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다는 울분같은 것이 늘 내부에서 들끊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 대해서 괘심하게 여기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없습니다. 아들이 아니면 영생도 없습니다. 여기에 성령이 오시므로서 비로소 아들이 발생합니다. 성령님이 하시는 일은, 역류를 뜷기 위해 우리 내부에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질문을 유발합니다.

즉 자신이 자신보고 늘 다음과 같이 질책하는 겁니다. “네가 뭔가 감히 우리 주님을 핍박하느냐?” 이런 질책현상이 감히 일어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아들로서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곧 늘 ‘자기 부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혼자서 도 닦지 말고 자신이 여태껏 내 뜻대로 막살아온 것을 쉬지 말고 고백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